사랑 받는 요셉(창세기 37:1-4)
에돔 족속이 이스라엘 역사와 관계되지 않는 한 모세는 그들에 대하여 더 이상 언급하지 않는다. 바면 이제는 야곱의 가정에 대한 이야기에 접근한다. 즉 "야곱의 약전(略傳)은 이러하니라" 고 말한다. 그의 약전은 에서의 약전(36:1)처럼 공허한 것이 아니라, 기억될 만한 유용한 역사이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들이 있다.
1. 아직 살아 있는 아버지 이삭과 함께 거하는 야곱에 대한 이야기이다(1절). 하늘 나라에 갈 때까지 우리는 결코 평안할 수 없는 것이다.2. "형제들과 함께 양치는" 목자 요셉에 대한 이야기이다(2절). 그는 아버지의 총애를 받고 있었으나 게으르거나 약하게 자라지는 않는다. 자녀들에게 부지런하고 근면하며 고생을 알도록 계획하지 않는 부모는 자녀를 참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자녀를 귀여워하는 것이 흔히 자녀를 망치는 이유라고 말한다. 아무 일도 하지 않도록 교육받은 사람들은 아무 것에도 쓸모 없게 되기가 쉽다.
3. 요셉은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다(3절). 부분적으로는 세상 떠난 그의 사랑하는 어머니 때문이요 또 한편으로는 노년에 가장 큰 위로가 되기 때문에 자신을 위하여 요셉을 사랑했던 것이다. 요셉이 자기 아버지를 시중들었을 것이고 다른 아들보다 아버지에게 더 순종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상당히 "노년에 기다리던 아들" 이었다. 즉 그가 어렸을 때 어른처럼 정중하고 침착했다. 그는 어린이였지만 유치하지 않았다. 야곱은 아른 아들보다 요셉에게 더 좋은 옷을 입히고 더 사랑하였던 사실을 보여 준다. "그는 채색 옷을 지어 입혔다." 이 사실은 아마도 그에게 있어서 보다 큰 영광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부모들의 각별한 사랑을 받는 자녀들은 행복하겠지만 자녀들이 성실하거나 또는 불성실로 인하여 생길 뚜렷한 이유를 가지고 있지 않는 한 자녀들을 차별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한 일이라는 것을 명심하자. 아버지가 보살피는 것도 공평하고 끊임없이 부지런하여야 한다.
4. 요셉은 그 형제들에게 미움을 받았다.
(1) 그의 아버지가 그를 사랑한 까닭이다. 부모가 차별을 두었을 때 자녀들은 곧 그것을 알아차리고 때에 따라서는 서로 반목하고 불안을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2) "그가 형들의 과실을 아버지에게 고했기" 때문이다. 야곱의 아들들은 아버지의 감시를 벗어나 있을 때, 집에 있을 때는 감히하지 못할 일을 했다. 요셉은 형들을 나무라고 방지하기 위하여 아버지에게 형제들의 나쁜 일들을 말하였다. 불화를 낳게 하는 악의에 찬 이야기꾼이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 그들에게 감히 충고하지 못하기에 그들에게 충고할 만한 권위를 갖고 있는 아버지에게 그들의 결함을 전해 주는 성실한 형제로써 견제했다. 다음의 사실을 주목하자.
[1] 우정에 넘친 충고자가 원수로 보이는 일은 흔히 있는 일이다. 회개하기를 싫어하는 사람은 자기를 개선되도록 충언해 주는 사람을 싫어한다(잠 9:8).
[2]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들은 흔히 세상의 미움을 받는다. 하늘이 축복하는 자들을 지옥은 저주한다. 하나님께서 위로의 말씀을 해주는 자들에게 악한 사람들은 평화롭게 말하지 않는다. 여기에 요셉에 대하여 "그 소년이 빌하의 아들들과 함께 하였다" 고 말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보고 요셉이 그들의 하인이었고, 그들이 그를 자기네들의 천업자(賤業者)로 삼았다고 말한다.
꿈꾸는 요셉(창세기 37:5-11)
여기에서 다음 사실들을 보게 된다.
Ⅰ. 요셉은 자기가 꿈꾼 예언적인 꿈에 대하여 말한다(6, 7, 9, 10절). 그는 비록 어렸을지라도(약 17세 정도)경건하고 성실하고 성품이 좋았다. 이 때문에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에 합당했다. 요셉은 무서운 공포를 가졌을 때 하나님께서 곧 얼마 안 되어 성공할 수 있는 전망을 주셔서 그가 당하는 지루하고도 애처로운 공포와 근심 가운데서도 지탱해 가며 위로를 받을 수 있었다. "그 앞에 놓여 있는 기쁨" (히 12:2)을 가지고 있었고 그리스도인들도 그와 같다. 하나님은 자기의 백성들이 예견하지 못하는 시험을 위하여 백성들의 갈 길을 예비하신다는 것을 기억하자. 하나님은 자기의 백성에게 베푸는 위로의 눈으로 백성이 당하는 시험을 보고 있다. 요셉의 꿈은
1. 그의 형제들의 곡식 단 모두가 자기의 단에 절하는 것이었다. 이 사실은 이른바 요셉에게서 곡식을 구하는 사실에서 형제들이 그에게 경배하게 되는 것을 암시했다. 그들의 빈 단이 그의 가득찬 단에 절을 하였다.2. 해와 달과 열 한 개 별이 그에게 절하는 것이었다(9절). 요셉은 정치가라기보다 예언자였다. 그래서 형제들이 이미 자기를 미워하고 있었으며 이 꿈이 더 한층 형제들을 노하게 하리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 꿈에 대한 이야기를 자신만이 감추고 있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단순하게 아무 의미 없이 말했다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고통 당하도록 그렇게 했을 뿐이다. 요셉이 출세할 꿈을 꾸었으나 투옥될 꿈을 꾸지 않았다는 사실을 관찰하여야 한다. 이같이 많은 젊은이들이 이 사회에 발을 디딜 때 번영과 기쁨에 대하여만 생가하고 결코 고통에 대하여, 괴로운 일에 대하여는 생각하지 않는다.
Ⅱ. 형제들은 못마땅하게 생각하여 점점 요셉에 대하여 격분하였다(8절). "네가 참으로 우리의 왕이 되겠느냐?" 우리는 여기서 다음 사실들을 볼 수 있다.
1. 어떻게 하여 형제들은 그의 꿈을 요셉이 자기들을 다스리는 것으로 풀이를 했는가이다. 기드온의 이야기와 같이(삿 7:13-14), 꿈이 성취되는 데 적이 된 자들은 해몽자 자신이었다. 그들은 요셉이 말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마 21:45). 그 사건은 42장 6절 이하의 설명으로 정확하게 대답하였다.2. 형제들은 그 꿈에 대하여 꾸짖고 불쾌하게 여겼다. "아직 혼자인 네가 여러 형제인 우리를 다스리겠느냐? 가장 어린 네가 형들인 우리들을 다스리겠느냐?" 우리 요셉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과 영토는 육적인 불신의 세계에 의하여 과거에 무시당했고 현재도 무시당하고 있고, 또 그러한 세계와 싸웠고 현재도 싸우고 있다는 것을 주목하자. 불신의 세계에서는 이런 사람이 그들을 다스리리라고 생각지도 못한다. 부활의 아침에 있는 올바른 지배는 극도의 경멸과 더불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Ⅲ. 요셉의 아버지는 그 꿈에 대하여 그를 점잖게 꾸짖었다, 그에 대한 언급을 관찰하자(10, 11절). 아마도 형제들이 꿈으로 인하여 취하게 될지 모르는 공격을 막기 위하여 요셉의 아버지는 그를 타일렀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요셉은 그 꿈에 대하여 생각 이상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아버지는 그 꿈이 무익한 것이라고 암시한다. 왜냐하면 그의 어머니는 죽었기 때문이다. 즉 이것은 "해와 달과 열한 별이" 그를 의지하게 될 전체 가정 외에 다른 것을 의미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 그 백성의 신앙은 백성들이 그 약속을 잘못 이해하여 흔들리고, 성취하게 될 수 없는 듯한 일들을 암시함으로써 혼란을 가져온다는 것을 명심하자.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사업을 계속하여 이루신다. 또 앞으로도 하실 것이다. 우리가 그를 바로 이해하든 못하든 간에 계속할 것이다. 그 사건이 있을 일에 대한 예보로써 해답이 되었을 때 마리아와 같이(눅 2:51) 야곱은 마음속에 이 일을 간직하고 오랜 후에까지 이 일들을 의심할 바 없이 기억하였을 것이다.
음모하는 형들(창세기 37:12-22)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Ⅰ. 요셉은 아버지의 분부에 순종하여 여러 마일 떨어져 있는 세겜에서 양치고 있는 형들을 애써 찾아갔다. 요셉의 형들은 요셉이 자기들을 찾도록 보냄 받을 것을 기대하면서 고의적으로 그 먼 곳까지 갔다고 말하며 그렇게 하여 요셉을 해칠 기회를 갖게 되었다는 의견을 말하는 이도 있다. 그러나 요셉과 아버지는 뱀과 같은 지혜보다 비들기 같이 순결하게 대하였다. 따라서 그를 미워하는 형제들과 결코 같은 태도를 갖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것을 선하게 이끄신다. 예로써 요셉을 보자.
1. 아버지에 대한 순종. 그는 아버지의 총애를 받았으나 아버지의 종이 되어 수종드는 일을 하려고 했다. 그는 미리 아버지의 분부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13절). 부모에게 가장 사랑 받는 자녀들은 가장 부모에게 순종해야 된다는 것을 명심하자. 그렇게 하면 그들의 사랑은 잘 전달되고 잘 순환된다.2. 형제에 대한 친절. 형제들이 자기를 미워하고 질투하는 것을 알면서도 아버지의 분부에 그 여정이 멀든 또는 위험하든 어떤 반대도 하지 않고 요셉은 이 기회를 기꺼이 받아들임으로써 형들을 존경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다. 터득하기 어렵고 좀처럼 실천하기 어려우나 좋은 교훈임을 기억하자. "우리를 미워하는 자를 사랑하라" 는 좋은 교훈임을 기억하자. 친척들은 우리에게 의무를 다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그에게 의무를 다해야 한다. 이것은 감사할 만한 일이다. 아버지는 요셉을 세겜에 보내어 형들이 거기에 잘 있는지, 몇 년 전에 세겜 족속을 처참하게 살인했던 복수로 인하여 멸망되지 않았는지 알아보도록 했다. 그러나 거기에서 형들을 찾기 못하고 도단으로 갔다. 이러한 여행을 꼭 해야 할 책임으로 생각하여 아버지에게 순종할 뿐 아니라(아버지가 말했던 대로 세겜에서 형들을 만나지 못했을 때 돌아설 수 있었을 텐데) 형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도단으로 갔다. 그는 형들을 찾을 때까지 열심히 계속하여 결국은 찾았다. 이 같이 형제의 사랑을 우리도 계속하자. 그리하여 그러한 사랑의 증거를 보여 주자.
Ⅱ. 악을 선으로 갚는 요셉에 대하여, 형들은 유혈적이고 사악한 음모로 요셉의 사랑 대신에 적의를 품는다. 다음 사실들을 관찰하자.
1. 형들은 이렇게 해를 주려고 숙의하였다. "요셉이 멀리서 오는 것을 죽이기를 꾀하였다" (18절). 흥분하였거나 갑자기 노하여 그를 죽이기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가해할 계획으로 또 냉혈적인 태도로부터 자연히 이루어진 것이다. 자기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살인자이라는 것을 명심하자. 왜냐하면 기회만 있으면 살인자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요일 3:15). 원한은 대단히 해가 되는 것이어서 적의를 감추고 또한 적의에 빠져 피를 흘리게 되는 위험성이 있다. 죄에 빠진 설계와 계략은 더 훌륭하면 할수록 더 나쁜 결과를 가져온다. 악을 행함도 나쁘다. 악을 음모하는 것은 더 나쁘다.2. 그들의 계획이 잔인했다. 피흘림 이외에는 그들을 만족시켜 줄 것이 없었다. 자 "그를 죽여 구덩이에 던지자" (20절). 오랜 적대심은 귀중한 생명을 빼앗아간다는 것을 주목하자. "정직한 자를 미워하는" 자들은 "피에 굶주린 자들이다" (잠 29:10). 그리고 매음부가 마시는 것은 성도들의 피이다.
3. 형들이 요셉의 꿈으로 인하여 신랄하게 책망하였다. "꿈꾸는 자가 오는도라" 하며(19절) "그 꿈이 어떻게 되는 것을 우리가 볼 것이라" (10절)했다. 이 장면은 그 꿈이 얼마나 형들을 초조하게 만들고 성나게 했는가를 보여 준다. 그들은 요셉을 해할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은 요셉을 살해함으로써 방해할 음모를 꾸민 것이었다. 하나님의 계획에 조바심을 가지고 노하는 자는 고의적으로 그 계획을 파괴하려고 조력한다는 것을 알자. 그러나 그들은 헛된 일을 생각할 뿐이다(시 2:1-3).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것이다.
4. 그들은 서로 의견을 나누어 뜻을 같이 하여 거짓으로 살인자를 가리운다. "우리가 말하기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먹었다 하자. 이렇게 그를 잡아먹는 것처럼 하여 그들은 스스로 자기들을 매우 악한 짐승보다 더 악한 것임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악한 짐승은 자기와 같은 짐승을 먹이고 하지 않는 까닭이다. 그러나 그들은 같은 형제의 몸을 찢고 있는 것이다.
Ⅲ. 요셉을 놓아주려는 르우벤의 계획(21, 22절).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위하여 친구들을 세우시되 원수 사이에서조차도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을 유의하자. 모든 인간의 마음을 다스리고 있기 때문이다. 르무벤은 모든 형제들 중에 요셉을 제일 시기할 이유를 갖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장자요, 야곱이 요셉에게 베푼 특별한 총애를 르우벤이 받아야 했었다는 이유이다. 그러나 르우벤이 가장 가까운 사이임을 보여준다. 르우벤의 성품은 부드럽고 여성적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이런 성품은 그로 하여금 불결한 죄를 짓지 않게끔 해 주었다. 그 다음 두 형들 즉 시므온과 레위의 성질은 격렬한 편이었지만 죽이는 짓은 하지 말자고 했던 것이다. 르우벤으로서는 생각하기에도 끔찍한 죄였다. 우리의 자연적인 성품은 범하기 쉬운 죄에 대하여 방어적이어서 싫어하는 죄에 대항하여 개선해 나간다(여기에 나오는 르우벤과 같이). 르우벤은 그들이 생각해 낸 제안이 요셉을 죽이려는 의도에 대하여 효과적인 해답이라고 제안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손에서 요셉을 구출하여 아버지에게 돌려보내어 아버지의 이미 잃었던 총애를 회복할 수 있으리라는 뜻을 가지고 르우벤은 제안을 하였든지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은 요셉이 더 많은 사람을 구출하는 도구로 삼으려는 하나님 자시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모든 일을 다스리고 있었다. 여기에서 요셉은 그리스도의 모형이다. 그는 사랑하는 아버지의 아들(하나님의 아들)이고 악한 세계에 미움을 받았으나 아직도 아버지는 그를 보내어 크신 겸허와 사랑으로 우리를 찾아 주신다. 그는 우리를 구하시려고 하늘에서 땅에 오셨다. 아직도 악한 음모가 그를 대적한다. 그는 그의 백성에게 오셨다. 그러나 그의 백성은 아직도 그를 영접하지 않고 그에게 대항한다. "이는 상속자이다. 자 그를 죽이자" (마 21:28). "그를 십자가에 못박아라. 그를 십자가에 못박아라." 그리스도는 우리를 대속하시고 구원하시려는 계획을 성취시키는 데 십자가의 못 박힘도 달게 받으셨다.
팔려가는 요셉(창세기 37:23-30)
여기에서 요셉에 대한 형들의 음모가 성취됨을 보게 된다.
1. 요셉의 아름다운 채색옷을 탐내며 벗겨 빼았다(23절). 이와 같이 상상하여 본다면, 그들은 날 때부터 요셉을 깎아 내렸다. 그리하여 저들은 요셉을 괴롭히고 아버지를 모욕하며, 그것을 자신들의 낙으로 삼았다는 징표를 보여주었다. 그러면서 이렇게 그를 놀려댔다. "자 요셉아, 아름다운 옷이 어디 있느냐?" 우리 주 예수님도 호지 않은 옷을 그렇게 벗기웠다. 또한 고난 당하는 그의 성도들은 처음에는 그들의 특권과 명예를 송두리째 빼앗겼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가장 귀찮은 쓰레기처럼 여기는 취급을 당했던 것이다.2. 형들은 요셉을 굶겨 마른 구덩이에 던지려고 했다. 그래서 그곳에서 굶주려 추워서 죽게 하려 했다. 이렇게 잔인한 행동이 바로 저들이 베푼 자비였다(24절). 시기가 있는 곳에 동정이 없어지고 인간성이 저절로 사라진다(잠 27:4). 너무나 치명적인 독이 가득하여 그 악의가 더 야만스럽게 되면 될수록, 오히려 달라고 애걸했다(43:21). 옷을 가지는 것으로 만족하고 생명만은 살려달라고 하는 애처로운 표정으로 탄원하였다. 요셉은 자기의 결백과 형제 관계, 그리고 애정과 복종을 호소했다. 그는 울면서 간청했으나 모든 것이 허사였다. 르우벤만이 가엾게 생각하고 그를 위하여 가운데서 조정했다(42:22). 그러나 그는 무서운 구덩이에서 요셉을 구하는 데 성공할 수 없었다. 형들은 차차 요셉이 구덩이 속에서 죽을 것이고 거기에서 산채로 매장될 것으로 생각했다. 이것이 형들이 신하가 되기로 맹세하게 된 요셉이 아닌가? 하나님의 섭리가 그 목적을 이루도록 돕고, 떨어져서 그 목적이 달성되도록 역사하고 있다 할지라도 가끔 하나님의 섭리가 그의 목적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을 주목하자.
3. 요셉이 고통 중에 있을 때도 형들은 그를 무시하고 요셉이 당하는 고통을 동정하지 않았다. 구덩이에 갇혀 불행을 슬퍼하면서 점점 가늘어져 가는 목소리로 형들에게 동정을 구할 때 "형들은 옆에 앉아서 음식을 먹었다" (25절).
(1) 그들은 자신의 죄에 대하여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다. 만일 그들이 가책을 느꼈다면 음식에 대한 식욕을 잃었을 것이고 음식의 맛을 잃었을 것이다. 양심에 가해지는 큰 힘은 일반적으로 감격과 언어의 욕망을 당분간 빼앗는다. 대담한 죄인들은 도망할 염려를 안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요셉의 형들의 양심은 지금 비록 잠들었다 하더라도 오랜 후에 불러 게워졌다(42:21).
(2)형들은 동생이 자기들을 지배하리라고 하는 공포로부터 풀려났다고 생각하면 기뻐했고, 그와는 반대로 자기들이 그를 짓밟아버렸다고 생각했다. 자기를 괴롭히던 두 증인을 박해하는 자같이(계 11:10), 형들은 요셉을 괴롭히며 조롱하였다. 하나님의 권고를 거부하는 자들은 자기의 주장이 관철되었다고 생각 할 수 있을 만큼 승리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속고 만다는 것을 명심하자.
4. 형들을 그를 팔았다. 대상들은 마침 때를 맞추어(하나님의 섭리의 인도에 따라서) 그곳을 지나게 되어 요셉을 그들에게 팔아 애굽으로 멀리 보내면 거기에서는 아마도 소식이 끊겨 더 이상 결코 소문이 들려오지 않을 것이라고 유다는 제안했다.
(1)유다는 요셉을 동정하여 그렇게 제의했다(26절). "우리가 동생을 죽인들 무엇이 유익할까? 그를 파는 것이 또 이득을 얻을 수 있는 일이 아닌가?" 우리가 범죄하려 할 때 죄에는 이익이 없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거기에는 전혀 얻어지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2) 그들은 잠자코 그 계획을 받아들였다. 왜냐하면 만일 그를 노예로 팔면, 결코 주인이 될 수 없으며 더군다나 애굽으로 팔려가면 그들의 주인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 까닭이다. 이제 이 모든 일들은 분노는 하나님께서 금하실 것이다(시 76:10). 요셉의 형제들이 놀랍게도 그를 죽이지 않게 되었다. 그를 팔게 됨으로써 놀랍게도 하나님께 찬양을 돌렸다. 요셉이 유다의 계략으로 은 이십 개에 팔린 것같이 우리 주 예수는 은 삼십에 팔렸다. 판 사람의 이름은 두 사람 다 유다이다. 아마도 르우벤은 요셉이 팔릴 때 형제들과 헤어져 슬쩍 사라져 다른 길로 돌아서 구덩이에 가서 요셉을 그 속에서 나오도록 돕고 아버지에게 무사히 돌아가게 하려 했을 것이다. 이러한 일들은 친절한 계획이었다. 그러나 만일 그러한 일들이 효과가 있었더라면 요셉이 애굽에서 출세하게 된 일들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은 어떻게 외었을까? 인간의 마음속에는 많은 계획이 있다. 하나님의 백성을 멸하려는 원수들의 계획, 하나님의 백성을 도우려는 친구들이 계획, 그러나 아마도 이 둘 다 이 사실과 같이 모두 실패할 것이다. 그러나 주님의 뜻은 영원히 살 것이다. 르우벤은 소년을 팔았기 때문에 스스로 망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어디로 갈꼬?" (30절). 르우벤은 맏형이기에 아버지가 자기에게서 요셉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려고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요셉을 팔지 않았더라면 죽여 모든 일을 끝냈을 것이다.
애굽으로 팔려간 요셉(창세기 37:31-36)
Ⅰ. 요셉이 없어진 것을 곧 알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큰 의심이 생길 것이다. 따라서 요셉이 맹수에게 무려 찢겨 죽었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려는 보다 큰 계획을 만들어 냈다. 형들은 다음과 같이 하였다.
1. 잘못 저지른 일을 의심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자신들이 결백함을 나타내려 한다. 우리는 아담에게서 죄 숨기는 것을 배웠다(욥 31:33). 마귀가 범죄하는 것을 가르칠 때 그 범죄를 감추는 방법까지 가르쳐 주며, 거짓과 위증으로 도덕과 살인까지 가르친다. 그러나 자기 죄를 숨기는 자는 오래 번성하지 못한다. 요셉의 형제들은 얼마 후에 자기들이 서로 의논한 의견대로 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사악한 행위는 드디어 밝히 드러났다. 그들의 범죄는 세상에 알려지고 영원히 계속하여 전하여진다.2. 그들의 아버지를 슬프게 했다. 요셉을 편파적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그 보복으로 이런 일이 계획된 것 같다. 요셉에 대한 극도의 분함을 갖게 되어 이루어진 계략이었다. 형제들은 요셉의 화려한 옷을 아버지에게 보였다. 그 옷의 화려한 여러 가지 색 외에 한 가지 더 많은, 즉 피 빛이 얼룩진 옷이었다(32절). 그들은 그 옷을 들에서 찾았다고 꾸며댔다. 또한 그들은 아버지에게 "이것이 아버지 아들의 옷인가 아닌가 보소서." 조소하면서 질문하였을 것이다. 야곱은 체념으로 자기의 운명을 그대로 받아들여 펼쳐나간다. 즉 그는 성급하게 피묻은 옷을 보고서 "요셉이 정녕 찢겼도다" 고 생각했다. 사랑은 사랑 받는 자를 가장 싫어하는 자를 두려워한다. 사랑은 공포를 물리치고서야 완전한 사랑이 된다. 부모의 마음을 아는 자들은 가엾은 야곱의 고민을 생각해 보고 야곱의 영혼을 생각해 보자. 야곱은 요셉의 불행한 일에 대하여 비참한 생각을 얼마나 강렬하게 나타내고 있는가! 자거나 깨거나 요셉을 덮치는 맹수를 상상하며 사나가 요셉에게 포효하며 덤벼들 때, 가련하게 비명을 지르는 것을 듣는 듯이 생각하며 짐승이 그의 피를 빨아 먹으며 갈래갈래 뜯으며 그를 하나도 남기지 않고, 단지 채색 옷만 남겨 이런 소식만 전하게 된 것을 상상할 때 여러차례 떨면서 으스스함을 느꼈다. 그리하여 틀림없이 요셉에게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오게 된 위험한 심부름에 대하여 하필 홀로 보낸 것을 후회한들 슬픔이 사라지지 않았다. 이 사실은 야곱의 마음을 찢는 듯했고 자신이 아들 요셉을 죽인 공모자라고까지 생각하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보게 된다.
(1) 야곱을 위로하기 위하여 아들들은 노력하였을 것이다. 아들들은 비열하게 위로하는 체하였다(35절). 그러나 그들 모두가 파렴치한 위선적인 위로자였다. 만일 그들이 진심으로 그를 위로하기 원했다면 그들은 곧 사실대로 말함으로써 위로할 수 있었을 것이다. "요셉은 살아 있습니다. 진실로 그는 애굽으로 팔려 갔습니다. 그러나 그리로 가서 배상하면 쉽게 해결될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즉석에서 "허리에 맨 굵은 베를 풀고 기쁨으로 허리를 동여맬 것이다." 그들의 진술을 통하여 자기의 범죄를 누설하지 않는 것이 놀랍다. 요셉이 생존해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요셉의 죽음에 대하여 야곱에게 조의를 표함으로써 위장하는 그들의 얼굴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 마음은 이상하게 죄의 기만성으로 더 굳어져 있었다는 것을 명심하자. 그러나
(2) 그들은 모두가 허사였다. "야곱은 위로를 받지 아니하였다" (35절). 그는 다루기 힘들게 슬픔에 잠겨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슬퍼하며 음부에 내려가리라고 결심하였다. 그것은 일시적인 급작스러운 격정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마치 다윗처럼 "내 아들아, 애 아들아 너 대신 나를 하나님이 죽게 하였더라면" 그러나 욥과 같이, 그는 슬픔으로 마음이 단단해졌다.
[1] 어떠한 피조물에 대한 사랑이 우리에게서 사라지거나 우리를 슬프게 할 때는 훨씬 더 큰 고통을 가져다준다. 보통 터무니 없는 사랑이 지나친 비탄으로 끝맺는다. 시계 추가 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 만큼 그것은 반대 방향으로 움직인다.
[2] 그들은 어떤 경우에서든 당한 슬픔 중에서 갖는 영혼의 위로나 종교적 신앙을 찾지도 아니했다. "우리는 슬퍼하며 음부에 갈 것이다" 고 결코 말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섭리가 우리를 지키시는 그 날이 얼마나 기쁜 날인지를 알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섭리에 맞게 사는 것이 우리의 지혜와 의무이다.
[3] 우리는 상상적인 두려움으로 자주 우리 자신을 당황하게 만든다. 우리는 실제보다 일들을 나쁘게 상상한다. 그래서 필요 이상으로 고통 당한다. 때로는 우리들의 잘못을 깨우쳐 주는 것이 위로 중 가장 큰 위로이다. 최선의 것을 소망하는 것이 좋은 일이다.
Ⅱ. 이스마엘 사람들과 미디안 사람들이 단지 그를 상품으로 돈을 벌려고 사서 틀림없이 충분히 이익을 내서 다시 보디발에게 그를 팔았다(36절). 야곱은 요셉이 죽었다고 슬퍼하였다. 혹 모든 것을 알고있어 그것이 그렇게 결정적인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자유를 상실한 것을 한탄하였을 것이다. 야곱의 자유인인 아들이 그 가정의 제일 좋은 옷을 애굽인인 주인의 옷과 예속된 표시로 바꾸겠는가? 그렇게 빨리 애굽 땅이 야곱의 씨에게 노예의 집으로 될 줄이야! 자기의 자녀를 자나치게 까다롭게 키우지 않는 것은 부모의 지혜라는 것을 명심하자. 왜냐하면 부모들이 죽기 전에 하나님의 섭리가 자녀들로 하여금 어떠한 고역과 고행을 당하게 할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요셉이 종으로 이처럼 사고 팔렸을 것이라는 사실을 야곱은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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