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을 당한 디나(창세기 34:1-5)
디나의 외모가 어떠했는지는 모르지만 그는 야곱의 외동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어머니가 제일 사랑을 했고 집안의 귀염둥이 였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디나는 특별히 그들의 기쁨이 되었다거나 신용을 받고 있지는 않았다. 귀여움을 많이 받는 아이들은 최선의 것이나 최대의 행복을 찾이하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이다. 디나는 이 불행한 사고가 일어났을 때 열 다섯 살이나 열 여섯 살쯤 되었었던 것 같다. 다음 사실들을 살펴보자.
1. 디나는 공허한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을 위험 앞에 노출시켰다. 그녀는 아마도 아버지의 허락을 받지 않고 나갔을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는 구의 딸이 "그 땅의 여자들을 보러 나가도록" (1절) 묵과했을지도 모른다. 어떤 축제나 잔치날이었는지도 모른다. 외동딸이기 때문에 그녀는 집에서 외롭다고 느꼈다. 대화할 수 있는 같은 나이 또래의 여자 아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울한 기분을 벗어버리고 아버지의 장막 속에서 늘 하는 이야기와는 다른 대화를 하면서 스스로를 즐기기 위해 밖으로 나가야 할 필요를 느꼈을 것이다. 자녀들이 가정을 사랑하는 것은 매우 아름다운 일이라는 것을 명심하자. 자녀들로 가정을 사랑하게 만드는 것은 부모의 지혜며, 또 가정을 잘 사랑하는 것은 자녀들의 의무이기도 하다. 그녀가 밖에 나간 것은 "그 땅의 딸들을 보러 간 것" 곧 그들의 옷치장과 그들의 춤추는 것과 무엇이 유행인가 하는 것을 보러 간 것이다. 그는 "보려고" 간 것이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그는" 보이려고" 간 것이다. 그는 그 땅의 딸들을 보러간 것이지만, 그 땅의 아들들도 또한 보고 싶었을 것이다. 나는 그녀가 가나안 사람들을 사귀고 그들의 사는 모습을 배우려 갔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젊은이들의 자만과 허영은 그들을 많은 함정에 빠지게 한다는 것을 기억하자.2. 그녀는 능욕을 당했다(2절). 세겜은 그 땅의 왕자인데 정욕에 사로잡혀 디나를 강간한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강제로 추행을 한 것 같지는 않다. 높은 사람들은 자기들이 아무런 일이라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을 기억하자. 더구나 교양도 없고 성미가 난폭해 제어할 수 없는 높은 지위에 있는 젊은 사람들의 행패는 말할 것도 없다. 디나가 할일없이 나돌아다닌 결과가 무엇인가를 보라. 젊은 여인은 순결한 몸가짐과 집안 살림을 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순결하고 집안을 다스리는 것은 언제나 함께 있어야 하고, 또 여인의 덕이다(딛 2:5), 집안 살림을 잘 하지 않는 여인은 자기의 순결을 노출하는 사람이다. 디나는 자기 주위를 돌아보려고 밖에 나갔다. 그러나 만약 그녀가 자기가 마땅히 취해야 할 자세를 지니고 보아야 할 것만 살펴보았다면, 이런 함정에 빠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죄의 시작은 물이 흘러내리는 그 근원 같다는 것을 명심하자. 또 작은 초가 큰불을 일으키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죄를 지을 수 있는 모든 기회의 접근을 조심스럽게 피하지 않으면 안 된다.
3. 디나를 욕 보인 후, 세겜은 그녀에게 청혼을 했다. 이는 참으로 바람직하고 옳은 일이었으며, 최악의 경우를 최선의 경우로 만든 것이었다. 그는 그녀를 사랑했다(삼하 13:15 의 암논과는 달리). 그래서 자기 아버지에게 그 둘 사이에 중매를 서 주도록 청했다(4절).
4. 이 소식이 딱한 야곱에게 전해졌다(5절). 야곱의 자녀짐은 장성하자마자 야곱에게 근심거리가 되었다. 신앙심 깊은 부모들이 자녀들의 비행 때문에 가슴이 아프고 괴로울 때, 그것이 자기네들만의 유일한 경우이고 전례가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선한 사람은 놀라서 아무런 할 말을 찾지 못하는 사람처럼 자기 마음의 평화를 묵묵하게 지켜나간다. 아니면 다윗처럼 실수를 범할까 두려워서라고 그러한 사람은 침묵을 지킨다(시 39:1, 2). 야곱은 자기의 울분을 감추어 두었다. 만약 그가 이 사실을 발설하면, 그들이 그를 외설 하는 사람으로 취급할까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혹은 야곱이 자기 일들을 아들들에게 맡기고 있었으므로(너무 많이 맡기지 않았나하고 나는 생각한다) 아들들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든가, 아니면 이를 발설하면 아들들이 뒤에 나타난 바와 같이 어떤 경우에나 무호하고 급진적이고 단정적이기 때문에 자기를 괴롭힐 것을 알기 때문에 침묵을 지켰다고 이해할 수도 있다. 부모의 권위가 가정에서 실추되면, 잘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명심하자. 집안 식구들은 각자 규칙을 지키고 자녀들은 모든 중요한 일에 복종하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디나의 혼담(창세기 34:6-17)
야곱의 아들들은 디나가 부끄러운 일을 당한 것을 알고 크게 원한을 품었다. 아마도 덕을 생각해서라기 보다는 자기 가족의 명예 때문에 더욱 분개했으리라고 생각된다. 많은 사람들은 마음 속 깊이 있는 죄때문이 아니라 그 죄가 미쳐준 단순한 부끄러움에만 관심을 가져 부끄러워한다. 여기에서 이 일은 후대의 표현 방법에 의하여 "이스라엘의 부끄러움" (7절)이라고 불리워지고 있다. 그 당시에는 이스라엘이 하나의 민족이 아니라 다만 한 가족이었다. 다음과 같은 사실을 살펴보자.
1. 부정한 행실은 어리석은 일이다. 왜냐하면 이는 하나님의 은총과 양심의 평화를 잃어버릴 뿐만 아니라 거룩하고 영예로울 수 있는 모든 영혼들이 천하고 야비한 정욕에 떨어지고 말기 때문이다.2. 이 어리석음은 "이스라엘" 에서, 이스라엘의 집안에서,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는 이름으로 야곱의 장막에서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을 알고 그를 믿는 곳에서 더할 수 없이 부끄러운 일이다. 이스라엘에서의 어리석음은 참으로 추문인 것이다.
3. 범죄한 것을 좋지 못한 이름으로 낙인찍어 부르는 일은 좋은 일이다. 예를 들면 이 곳에서의 부정한 행위가 하나의 격언처럼 "이스라엘에서의 부끄러움" 이라고 불리워지고 있다(삼하 13:12). 디나는 여기에서 "야곱의 딸" 이라고 불리워지고 있다. 모든 이스라엘의 딸들에게 이 같은 어리석은 짓으로 자기 자신들을 배신하지 않도록 경고하기 위한 것이다. 하몰은 야곱과 직접 일을 타결하기 위해 왔다. 그러나 야곱은 그 아들들과 의존하게 했다. 여기에서 우리는 참으로 특이한 경우를 본다. 참으로 부끄러운 것은 가나안 사람들이 이스라엘 사람보다 더욱 정직했다고 하는 사실이다.
Ⅰ. 하몰과 세겜이 이스라엘 가족과 서로 통상을 하기 위하여 공정하게 혼인할 것을 청한다. 그리고 세겜은 디나를 깊이 사랑하고 있었다. 그는 어떤 조건이라도 디나와 결혼할 수 있는 것이라면 다 수응하겠다고 말한다(11, 12절). 또 세겜의 아버지는 사과할 뿐만 아니라 위로하면서 두 집안이 결합하면 크게 유익할 것이라고 주장한다(9, 10절). 하몰은 야곱이 더 강했지만 조금도 그를 질투하지 않았다. 다만 자기와 자기의 가족이 서로 연결이 되기를 진지하게 바랐던 것이고, 그래서 "땅이 네 앞에 있으니 여기 머물러 매매하며 여기서 기업을 얻으라" 고 말했던 것이다.
Ⅱ. 야곱의 아들들은, 실은 조금도 바라지 않으면서, 종교가 서로 합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자기들의 참된 의도를 숨기고 있다. 만약 야곱과 하몰이 직접 이 문제를 다루었다면 아마 쉽게 해결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야곱의 아들은 다만 어떻게 복수할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일을 수행하기 위해, 이상한 제안을 한다. 세겜 사람들 모두가 할례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들을 성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조금도 그런 의도를 가져보지도 않았다) 그들을 괴롭게 하여, 쉽게 자기들의 칼의 먹이가 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1. 그들의 구실은 일견 그럴 듯하였다. "하나님의 언약의 표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야곱의 집안의 명예이다. 그렇게 거룩하고 구별된 사람들이 할례 받지 못한 사람들(14절)과 직접적인 관계를 갖게되는 것은 야곱의 집안에게는 치욕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다 할례를 받으면 우리가 너희와 함께 거하여 한 민족이 되겠다" (15, 16절). 참으로 이러한 진술의 목적이 진정한 것이었다면 이 제안은 칭찬할 만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가나안 사람들과 통혼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한 결혼은 큰 죄일 뿐만 아니라 적어도 커다란 문제를 야기하게 될 원인이 될 수도 있고, 때로는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어떠한 사람에 대한 관심이든, 일단 우리가 어떤 사람에 대하여 마음을 쓰거든 현명하게 그들과의 관계를 맺어 그 사람으로 하여금 신앙을 사랑하고 또 실천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영혼을 얻는 사람은 현명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 때, 야곱의 아들들처럼 종교의 외적 형식에 그들을 종교의 타당성을 확신하게 하고 그 종교의 힘을 깊게 해줄 수 있어야만 한다.2. 이야기가 계속되면서 알 수 있듯이 야곱의 아들들의 의도는 극히 악했다. 그들이 목적으로 하고 있는 것은, 살육의 날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다. 피비린내 나는 계획은 때로 종교를 구실삼아 계획되고 실천된다는 것을 명심하자. 그렇게 위장함으로써 그 악한 일들이 가장 그럴 듯하고 안정하게 성취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만적인 경건을 더 손상을 받는 경우도 없고 하나님의 거룩한 성례가 악한 음모를 위해 사용될 때보다 더 속될 수라 없다. 그런데 이 사실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은 또 다른 것이다. 만약 야곱의 아들들이 이 처절한 계획 없이 그러한 제안을 했다면 하나님의 약속의 징표인 거룩한 할례의 표를 그 계약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이 가나안 사람에게도 내게하고 그 일을 어떻게 합리화했을는지 알 수가 없다. 약속을 맺을 권리가 없는 사람들은 징표를 받을 권리도 없는 사람들인 것이다. "자녀들의 떡을 빼앗아 개에게 주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야곱의 아들들은 할례를 자기들의 목적을 위해서 사용할 줄은 알면서도, 위에서 지적한 것과 같은 사실들은 중요하게 생각을 하지 못하였다.
할례 받은 세겜 사람들(창세기 34:18-24)
1. 하몰과 세겜은 할례를 받기로 동의했다(18, 19절). 아마 야곱의 아들들이 이혼담에 적극적으로 나오는 말에 감동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이 할례가 갖는 거룩하고 영예로운 의도를 듣고,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분명하게 파악은 못했겠지만 그 증표에 의한 약속들에 대하여 들으면서, 아브라함의 자손인 이 가족과 더욱 관계를 맺게 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슥 8:23). 종교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종교인과 함께 생활하면 종교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게 되다는 것을 기억하자. 또 만약 남자가 좋은 아내를 얻기 위하여 종교를 믿게 된다면 우리는 너그러운 사랑으로 그가 하나님의 은총을 입도록 그를 포옹해 주고 그를 사랑하기 위하여 우리의 마음에도 할례를 받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세겜이 여기에서 그랬듯이 "이 일은 지체하면 안 된다."2. 그들은 자기 고을 사람들에게 야곱의 아들들이 요구하는 것을 전하고 모두 할례를 받기로 동의를 얻었다.
(1) 하몰과 세겜은 그 마을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종교는 세겜과 같이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 즉 다른 사람들보다 더 귀한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앞장을 서서 열심히 믿을 때 크게 전파된다는 것을 기억하자.
(2) 그들은 대단히 설득력 있는 말로 호소했다(23절). "그들의 생축과 재산과 그 모든 짐승이 우리의 소유가 되지 않겠느냐?" 그들은 야곱의 아들들이 근면하게 일하면서 점점 번영해가는 것을 보았고, 또한 그들과의 동맹에 의하여 그들과 그들의 이웃이 함께 이롭게 될 것을 약속하였다. 이로 인하여 그들은 더 많은 밭을 얻고 통상을 할 수 있을 것이며, 많은 돈을 벌어들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1] 이러한 원칙에서 서로 결혼을 한다는 것은 아주 나쁜 일이다. 그러나 재산에 대한 탐욕이 결혼을 중매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 집과 집, 들과 들이 비교되고 고려의 대상이 되지만 그 외의 것은 전혀 염두에 두지 않은 혼담을 많이 본다.
[2] 이러한 원칙에 의해서 할례를 받는다는 것은 더욱 나쁜 일이다. 세겜 사람들이 야곱의 가족이 믿고 있는 종교의 원칙보다는 세속적인 관심과 이해 관계로 종교적인 경건을 취하는 사람이 세상에는 많이 있다.
이스라엘 아들들의 배신(창세기 34:25-31)
겨우 스무살 안팎의 야곱의 젊은 아들 시므온과 레위가 세겜 사람들의 목을 짜르고 이로 인하여 착한 아버지의 마음을 상하게 한다.
Ⅰ. 세겜 사람들에 대한 야만적인 살육 이 기록되어 있다. 야곱은 언제나 양을 모는 지팡이 하나만을 가지고 살았다. 그러나 그 아들들은 마치 칼을 의지하고 사는 에서의 자손인 양 칼들을 지니고 있었다.
1. 세겜의 거주민들을 모두 죽였다. 특별히 "모든 남자들" 과, 며칠 전 친절하고 우애 있는 태도로 대하면서도 그들의 목숨을 노렸던 대상인 하몰과 세겜을 죽였다. 어떤 사람들은 모든 야곱의 아들들이 세겜 사람들에게 할례를 받도록 설득하여 그들이 고통을 받는 동안 디나를 구출해 내고자 했던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시므온과 레위는 그것으로 만족하지는 못하고, 그 치욕을 복수하려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분명히 복수를 했다.(1) 하나님께서 이 일에 관해 올바르셨음을 우리는 부인할 수가 없다. 만약 세겜 사람들이 하나님의 율법에 복종하여 할례를 받았다면 할례 받음이 그들을 보호해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그물을 얻으려는 것이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이 살육 이 그들에게 감행된 것은 하나님께는 올바른 것이었다. 진실한 종교는 우리를 가장 안전하게 보호해 준다는 것을 기억하자. 그러나 위장된 종교는 언제나 우리를 위험 앞에 노출시킨다.
(2)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일에 공정하셨지만 시므온과 레위는 가장 불의한 사람들이었다.
[1] 세겜이 디나를 욕보이고 "이스라엘에게 부끄러운 일을 행한 것" 은 사실이다. 그러나 디나 자신이 그 범행의 방조자였다는 사실을 마땅히 고려했어야 했다. 만약 세겜이 디나를 디나의 어머니의 장막에서 그렇게 욕을 보였다면, 또 문제는 다르다. 그러나 디나 자신이 세겜의 땅으로 갔다. 그리고 그의 점잖지 못한 행동이 이 큰불이 일게 하고 작은 불꽃을 튀게 했는지도 모른다. 죄인에게 엄격하고 냉혹하고자 할 때 우리는 누가 유혹자인가 하는 것을 심사숙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
[2] 세겜이 잘못을 저지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속죄 받으려고 애를 썼다. 그리고 ex post facto 일이 끝난 뒤였지만, 그들은 잘못을 인정하고 정직하고 정중히 대하였다. 그리고 이 사건은 레위 사람의 첩이 욕을 본 뒤 살해당한 그런 경우도 아니었고 세겜은 자기가 한 행동을 정당화하려 하지도 않았다. 다만 어떤 조건에 의해서도 화해를 하고자 했던 것이다.
[3]세겜이 잘못을 범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모들 세겜 사람을 다 죽인 것은 무엇 때문이었는가? 한 사람의 범죄는 모든 마을 사람들에게 무섭게 갚아져야 하는가? 무죄한 사람도 범죄인으로 취급되어야 하는가? 이야말로 야만적인 것이었다.
[4] 무엇보다도 그 잔인성을 악화시킨 것은 이 복수가 지닌 가장 심한 불신 행위였다. 세겜 사람들은 조건을 수락하고 그들과 한 백성이 되기로 약속하고(16절) 그 약속을 실행하였다. 그러나 야곱의 아들들은 불과 며칠 전까지도 가장 인간적인 입장에서 약속을 이루고 둘도 없는 친구로 대하던 그들에게 철천지 원수에게 행하듯한 것이다. 이들이 과연 이스라엘의 아들들인가? 분을 애는 사람에겐 화가 있도다. 그 화가 무서우리로다!
[5] 하나님의 거룩한 의식을 자기들의 사악한 계획을 위해 사용한 사실은 이들의 범죄를 더욱 추악하게 한 것이다. 마치 그것은 자기 자신들과 자기 가족이 당한 부끄러움만으로는 모자르다는 듯 그들의 종교가 지닌 거룩한 표징마저 더럽히게 한 것이다. 참으로 이 의식이 피의 의식이 되고만 것이다.
2. 세겜의 성을 점령하고 그 도성을 약탈하였다. 그들은 디나를 구해냈다(26절). 스스로 말했던 것처럼(17절), 그 목적만을 이루고 피를 흘리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약탈을 목적으로 했다. 그리고 비록 시므온과 레위만이 살인자이긴 하였지만 야곱의 다른 아들들도 "그 시체 있는 성으로 가서 노략하였다" (27절). 그리하여 살인자의 공모자들이 되었던 것이다. 야곱의 아들들이 행한 이러한 행위 자체는 불의한 짓이었다. 그러나 이 일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정의를 발견한 수가 있다. 세겜 사람들은 "저들의 재산과 가축들이 우리의 것이 되지 않겠느냐?" (23절)고 하는 원칙 위에서 할례 받을 것을 약속하여 야곱의 자손들을 기쁘게 해 주었다. 그런데 그 결과를 보라. 야곱의 가족들이 지닌 모든 부를 자기네들이 가져 주인이 되는 대신 오히려 야곱의 가족들이 자기들의 재산을 차지하는 주인이 되어 버렸다. 다른 사람들이 정당하게 가진 것을 부당하게 취하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것도 잃게 된다는 것을 기억하자.
Ⅱ. 시므온과 레위의 이 피비린내나는 행위 때문에 야곱은 깊이 상심하였다(31절). 그가 그처럼 가슴 아파한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1. 그런 짓으로 인해서 자기에게 닥친 치욕 때문이었다. "너희가 나에게 화를 끼쳤다." 너희는 나를 정신을 차릴 수 없게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 너희는 나를 이 땅에 거주하는 사람들 속에서 "악취가 나는 못된 이간" 이 되게 해버렸다. 즉 너희는 나와 내 가족들을 그들 사이에서 가장 추악하게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 우리와 우리 종교에 대해서 그들이 무어라고 하겠는가? 우리들은 그들의 눈에 "세상에서 가장 잔인하고 야만스러운 사람으로 보일 것이다" 하는 뜻이다. 사악한 자녀들의 커다란 과실들은 참으로 경건한 부모들의 슬픔이며 부끄러움이라는 것을 기억하자. 자녀들은 그 부모의 기쁨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못된 자녀들은 부모의 괴로움이고, 그들의 마음을 슬프게 하고 그들의 사기를 꺾고 매일 매일 슬픈 비탄의 눈물로 세월을 보내게 한다. 그러나 좋지 못한 자녀들로 하여금 만약 그들이 잘못을 뉘우치지 않으면 그들로 말미암은 부모들의 비탄과 그 부모들에 의하여 지탱되어 온 종교에 대한 훼손이 언젠가는 자기들에게 청산이 요구되고 스스로가 감당해야 할 결과를 초래하는 것임을 알려 주어야 한다.2. 그들이 저지른 악행이 야곱을 위기에 몰아 넣었다는 것이다. 숫자적으로 많고 강대한 가나안 사람들이 모두 합쳐 야곱을 대적한다면 그와 그의 조그만 집안이 그들의 손쉬운 먹이가 될 것 밖에는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인가? "나와 내 집이 멸망하리라." 만약 한사람의 과오로 모든 세겜 사람들이 멸망을 받아야 한다면 두 사람의 범죄 때문에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멸망 받지 않는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야곱은 참으로 하나님께서 그의 집안을 보호해 주시고 영원히 이어나가게 해 주시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의 자손들이 행한 이 악한 행위로 인하여 그 계약이 무효가 되고 계약 상속권이 끊기지 않을까 두려웠던 것이다. 범죄가 집안에 있을 때 멸망이 문간에 이르렀음을 두려웠던 것이다. 범죄가 집안에 있을 때 멸망이 문간에 이르렀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경험이 많고 인자한 아버지는 겁 없이 사악한 행위를 하는 악한 자녀들의 죄의 결과가 얼마나 좋지 못하다는 것을 예견하고 있다. 사람들은 이러한 것을 이야기하면 자식들의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자기의 착한 아버지에게 겸손해지면서 용서를 빌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반대로 악한 자녀들은 자신들을 정당화시키고 이렇게 거만하게 대꾸한다. "그가 우리 누이를 창녀같이 대우함이 가하나이까?" 그렇게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만약 그것이 정말 이유라면, 그들은 오히려 그들 자신에게 복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한 어리석은 여자에게 이루어진 이 못된 짓을 속량하기 위하여 사용될 수 있는 방법이 수많은 생명을 죽이고 온 도성을 황폐케 하는 이 방법이 아닌가, 덜 잔악한 방법은 없었던가? 그런데 이 답변에서 보면, 야곱의 아들들은 마치 아버지가 자기 딸을 그들이 창녀처럼 취급하는 것에 만족하고 있지 않느냐 하는 투의 항의를 넌지시 하고 있다. 중도를 지키는 사람에게 흔히 사람들은, 자기의 극단적인 입장에 서서, 상대방을 정반대되는 또 다른 극단적인 입장에 서 있는 것이 아니냐고 비난하기가 일쑤라는 것을 명심하자. 극렬한 복수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마치 그들이 적의 편에 가담하여 그들을 옹호하고 정당화시키고 있는 것처럼 오해되는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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