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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1

천사의 영접을 받으며(창세기 32:1-2)

야곱은 라반을 떠나, 가나안으로의 귀향 여행을 계속했다. 많은 어려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었다면, 우리는 더 한층 즐겁고 굳은 결심을 하고 하늘을 향한 여행을 계속하지 않으면 안 된다.

1. 야곱의 여행을 지켜 주는 호위대가 있었다(1절).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났다" 했다. 눈으로 볼 수 있도록 나타났는지, 그가 사다리를 오르내리는 그들을 본 것처럼(28:12)낮에 혹은 밤의 꿈에 환상으로 보았는지는 확실하지가 않다. 선한 길을 따르는 사람은 언제나 선한 보호자가 있다는 것을 명심하자. 천사들은 "일하는(부리는) 영" 으로서 야곱의 일행을 안전하게 하기 위하여 온 것이다(히 1:14). 야곱이 장막을 치면 그들도 그 둘레에 자기들의 장막을 쳤다(시 34:7). 그 천사들은 야곱이 다시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는 것을 환영하기 위하여 나와 만난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한 도성의 고관들이 공식적으로 나아와 맞아주는 군왕들도 경험해보지 못한 가장 영광스러운 영접이었다. 그들은 야곱이 라반을 떠났다는 것뿐만 아니라 그가 고향에 도착하는 것을 축하하기 위해서 나온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종이 잘 되어 가는 것이 즐거웠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제까지 보이지 않게 야곱의 일행을 따라왔지만 이제는 뚜렷하게 눈에 보이도록 나타났다. 왜냐하면, 야곱이 여기에 이르기까지 당한 어떠한 어려움보다도 지금은 더 커다란 위험에 직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백성을 특별히 단련하실 때에는, 그들을 위한 특별한 위로도 아울러 예비해 두고 계시다는 것을 명심하자. 이 천사들이 처음에는 휩싸여 있을 때 나타난 것은, 야곱이 어떤 내적인 고통도 지니고 있지 않은 조용하고 평온한 때 만나 준 것보다 더욱 시기에 알맞은 일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평안한 속에 있을 때는 시련을 겪게 해주시고, 시련을 직면할 때는 이전의 경험을 통하여 이를 극복하게 해주신다. "우리는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에 의하여 행하지 아니하기" 때문이다(고후 5:7). 하나님의 백성들은 죽음에 임하여 아버지의 집, 가나안으로 돌아간다. 그러면 하나님의 천사들이 그들의 오랜 수고가 행복하게 끝난 것을 축하하고 그들을 안식의 곳으로 안내하기 위하여 영접하러 나아올 것이다.

2. 야곱은 이 호송하는 천사의 무리들을 만나고 마음이 편해졌다. "이는 하나님의 군대라" (2절). 그러므로

(1) 이들은 강력한 군대이다. 그들을 거느리고 계신 분이고 참으로 위대한 분이고 그들의 보호를 받는 사람은 참으로 안전하다.

(2) 이와 같은 특별한 보호를 해 주시는 하나님께 우리는 영광을 돌리지 않으면 안 된다. "이는 하나님의 군대이니,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하리라." 하나님께서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너를 지키게 하신다" (시 91:11)는 이 약속을 믿는 선한 사람들은, 야곱이 그이 육신의 눈을 가지고 본 바를 믿음의 눈으로 볼 수가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성도의 주변에 수호의 천사를 두고 계시다는 사실을 우리가 확신한다면, 한 사람 산 사람의 성도들이 제각각 수호 천사를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으로 논쟁할 필요가 과연 있겠는가? 이러한 특별하신 사랑을 영원히 기억하기 위하여, 야곱은 그곳을 마하나임이라고 명명하였다. 두 군대들 또는 두 개의 부대라는 뜻이다. 어떤 유대인 학자들에 의하면, 한 천사의 무리는 메소포타미아의 천사들인데, 야곱의 무리를 그곳으로부터 가나안으로 안전하게 이끌어 온 천사들이고, 다른 한천사의 군대는 가나안의 천사들로서, 서로의 접경 지대에서 야곱의 무리들을 영접한 것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이런 해석보다는 천사들이 좌우에 한 떼씩 있어 둘이라는 견해나, 전 후에 한 떼가 있어 뒤에서부터 닥칠지도 모르는 라반으로부터 야곱을 보호하고 앞에서 닥칠지 모르는 에서로부터 그 위험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두 군대라고 했다고 하는 것이 더 타당성이 있을 것 같다. 그리하여 야곱은 하나님의 사랑에 의하여 둘러싸여 있었다. 이와 비유하여, 교회가 마하나임 곧 두 군대라고 불리워졌을 것이다(아 6:14). 또한 여기에는 두 부대가 있었다. 하나는 야곱의 가족인데, 이들은 세상에서 하나의 군대의 기능을 다하면서 순회하고 전도하는 교회를 상징하는 것이다.

 

32:2 없음.

 

32:3

불안한 야곱(창세기 32:3-8)

이제 야곱은 가나안으로 다시 돌아왔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그가 이곳을 떠날 때 남겨 두었던 친구들을 다시 생각게 해 주신다. 그리하여 야곱은 그가 가졌던 많은 적도 생각하게 되고, 특별히 에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아마 리브가가 야곱에게 형에서는 지금 세일에 정착해 있고, 아직도 야곱에게 미움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알려 주었는지도 모른다. 이 불쌍한 야곱은 어찌하여야 좋겠는가? 그는 자기 아버지를 그처럼 보고 싶었지만, 자기형을 만나는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그는 가나안 땅을 다시 보게 된 것이 말할 수 없이 즐거웠으나, 에서 때문에 두려움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Ⅰ. 야곱은 대단히 친절하고 겸손한 전갈을 에서에게 보냈다. 야곱이 그곳을 지나기 위해서는 에서가 있는 땅을 거쳐가야만 했든지 혹은 에서의 허락을 받아야만 했는지는 잘 나타나 있지 않다. 그러나 분명히 야곱이 가고 있는 길은 에서가 있는 곳에서 멀지 않았고 야곱은 자기의 형제에게, 쌍둥이 형제에게 그것도 하나밖에 없는 형제요, 형님인 형제에게, 그리고 자기가 노하게 했던 그형에게 인사를 드리지 않고 그곳을 지나칠 수는 없었다. 다음 사실을 명심해 두자.

1. 비록 우리의 친척들이 자기들의 의무를 우리에게 다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그들에 대한 우리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

2. 우리의 형편을 친구들이 알도록 하고 그들의 형편을 물어 알아두는 것이 우정과 형제애의 하나이다. 예의바른 행동은 반목을 없애 준다. 에서에게 보낸 야곱의 전갈은 대단히 친절하고 정중한 것이었다(4, 5절).

(1) 그는 에서를 자기의 주인이라 부르고, 자기 자시은 종이라 불렀다. 그것은 그가 아버지로부터 얻은 장자의 권리와 축복을 주장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하나님 자신의 뜻이 그의 후손들 속에서 이루어지도록 하나님께 완전히 맡겨버린 것이다. "공순(恭順)이 큰 허물(분노)을 경하게 하느니라" (전 10:4). 우리는 우리에게 부당하게 성을 낸 사람들에게 겸손하고 유순한 태도로 말할 것을 거절하지 말아야 한다.

(2) 야곱은 자기 자신에 대하여 간략하게 언급하면서, 비록 오랫동안 고향을 떠나 있었지만 정착해 있으면서 가족을 거느리고 있었다고 말하고 자기가 도망자나 방황 자로 정처 없이 떠돌아다닌 것은 아님을 설명한다. "내가 라반과 함께 체류했으며 지금까지 거기 있든 것을 탕진하고 친척들에게 그 모든 빚을 지우려고 집에 돌아온 탕자도 아니었다. "내게 소와 나귀가 있나이다" 라고 했다. 이와 같은 사실이 그는 에서에게 호감을 일으켜 주리라 생각한 것이다.

(3) 야곱은 에서의 호의를 간구한다. "사람을 보내어 내 주께 은혜 받기를 원하나이다." 사정을 보다 호전시키기 위하여 화해를 간구하거나 평화와 권리를 간원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자기를 멸시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자.

Ⅱ. 그는 자기에게 대항하여 형 에서가 거의 전쟁을 준비하듯 한다고 하는 엄청난 소식에 접한다(6절)는 것이 그저 보고의 한 마디 말이 아니라 그에게는 강타와 같은 것이었다. 자기의 친절한 서신에 비하면 너무나 야비한 반응이었고 불쌍한 동생을 맞는 것 치고는 너무나 슬픈 환영이었다. "그가 400인을 거느리고 주인을 만나려고 오더이다" 라고 했다. 에서는 자기의 착한 아버지가 돌아가실 그 날을 기다리다 지쳐서 그 날이 오기 전에 자기 동생을 죽이기로 결심을 한다.

1. 에서는 옛날의 다툼을 기억하고 동생이 지니고 있는 장자의 권리와 축복에 대한 복수를 하고 가능하다면 그 두 가지에 대한 야곱의 기대를 산산이 깨뜨려 버리려 하고 있는 것이다. 악의를 품고 있는 사람은 그 품은 마음이 오래 간다. 그래서 자극이 주어지면 그것이 폭력의 기회를 찾는다. 사람들은 노하기 잘하고 기억력이 좋다.

2. 에서는 별로 재산을 가지지도 못한 야곱을 질투했다. 그가 훨씬 낳은 형편에 있으면서도 야곱이 말하는 것을 보고 자기들만이 야곱에게서 빼앗은 전리품으로 가득차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야곱이 자기 재산에 대해서 써보낸 내용이 에서의 이러한 마음을 더 자극했는지도 모른다.

3. 에서는 지금 야곱이 여행 중에 있고, 여행 중에 아주 지쳐있으면, 정착하지 못한 채 무방비 상태(에서는 그렇게 생각했다)에 있으므로 지금 처치하는 것이 매우 쉬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뱀의 독을 가진 자는 뱀의 간사한 계교도 갖는 법이다. 그리하여 복수하기에 가장 좋은 최초의 호기를 놓치지 않으려고 한다.

4. 에서는 야곱이 아버지한테 오기 전에 이러한 복수를 해야 하겠기 때문에 갑자기 이런 일을 결정했다. 아버지가 간섭하여 둘 사이를 중재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에서는 화평을 미워하는 사람중의 하나였다. 야곱은 가장 평화스럽게 화평을 이야기했지만 그는 싸움을 준비하였다(시 120:6, 7). 그는 열화 같은 분노에 차서 늘 사냥 다닐 때 같이 다니곤 했으리라고 상상되는, 틀림없이 무장을 한 그리고 주인처럼 잔인해서 어떠한 명령이라도 이를 실천하며, 협박과 살해밖에 모르는 400인의 부하를 끌고, 피와 살인을 의도하면서 행진하여 나아오고 있다. 이 병력의 10분의 1만 있어도 가련한 야곱과 무죄하고 절망적인 가족들, 곧 뿌리나 가지를 모조리 자르는 데 넉넉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야곱이 심히 두렵고 답답했었다고 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라 이제 가까스로 벗어나온 라반에게서 받은 공포보다 훨씬 더한 것이었을 것이다. 의로운 사람에게는 참으로 많은 일들이 이 세상에서 문제가 된다. 또 어떤 때는 하나의 일이 끝나는 그 끝이 또 다른 문제의 시작이기도 한다는 것을 기억해 두자. 비가 끝나면 또 다시 구름이 몰려오는 법이다. 야곱은 위대한 신앙의 소유자였으나 이제는 견딜 수 없는 공포에 사로 잡혔다. 위험을 생생하게 느끼고, 이 느낌으로부터 다급한 두려움이 생기는데, 오히려 이런 두려움을 통하여 인간은 더욱 겸허하게 하나님의 능력과 약속을 신뢰 할 수도 있다는 것을 명심하자. 그리스도 자신도 그의 고통 속에서 심각한 고뇌를 하셨었다.

Ⅲ. 야곱은 자기의 지금 환경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최선의 방어책을 강구하였다. 공격에 대항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조차 없는 일이고, 그의 계획은 단지 어떻게 모면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이었다(7, 8절). 일시에 당하는 어리석음을 면키 위하여 심사숙고한 끝에 그는 자기 무리를 둘로 나누어 한쪽이 짓밟혀도 다른 한쪽은 피할 수 있도록 양편으로 갈라놓는 다. 자애롭고 조심성 있는 가장답게 그는 자기 자신의 안전보다 온 가족의 안전을 더욱 생각하였다. 그는 자기의 무리들을 아브라함과는 달리(14:13) 싸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싸움에서 도망치기 위해 갈라놓았다.

 

32:4 없음.

 

32:5 없음.

 

32:6 없음.

 

32:7 없음.

 

32:8 없음.

 

32:9

하나님께 아뢰는 야곱(창세기 32:9-12)

우리가 어려운 처지에 빠졌을 때 지켜야 할 법은 하나님께 이 사정을 아뢰는 것이다. 이 법의 한 예를 여기에서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예의 성공은 우리가 이 모범을 따르는데 많은 격려가 된다. 이때야말로 야곱에게는 커다란 시련의 때였다. 그러나 그는 그 시련의 고통으로부터 구원을 받을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그가 어떻게 이 구원을 기도했는가를 살펴 볼 수 있다(렘 30:7). 그는 절망 속에서 여호와를 찾았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부르짖음을 들으신 것이다. 두려움의 때는 기도의 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자. 어떠한 두려움이 있든지 우리는 오히려 그것 때문에 우리의 하나님께 무릎 꿇고 기도해야 한다. 야곱은 얼마 전에 전사들이 자기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종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계 22:9). 그는 라반의 드라빔을 이용하지 않았다. 자기를 가게 하신 하나님 한 분으로 충분하였다. 야곱은 하나님께 자기의 최선을 다해 가장 진실하고 경건하게 기도하고 견고한 망대이신 여호와의 이름으로 안전을 추구한다(잠 18:10). 이 기도가 더욱 특별한 의미를 갖는 것은 그가 이스라엘 곧 하나님과 겨루어 이김이라는 영예와 모든 기도하는 사람의 조상이 되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기도하는 사람들을 "야곱의 자손이라고" 부르고, 이제 기도하는 "너는 헛되이 내게 구하였도다" 라는 말은 결코 하지 않으신다. 이제 기도하는 모든 사람이 이러한 영예를 얻게 하기 위하여 어떤 점이 야곱의 기도 중에서 독특한가 하는 것을 살펴보기로 하자.

Ⅰ. 야곱이 요구한 것은 다만 한 가지였고, 그것도 극히 분명했다. "내 형의 손에서 나를 건져내소서(11절). 비록 인간적인 가능성의 차원에서 본다면 전혀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야곱은 하나님의 권능이 피에 굶주린 사자의 입에서 어린양과 같이 자기를 능히 구해 내리라고 믿었던 것이다. 다음과 같은 사실을 유의하자.

1.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할 때, 우리의 상황에서 직면하고 있는 사정과 어려움을 구체적으로 선명하게 말씀드리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가 말씀을 드리는 하나님, 우리가 관계하고 있는 하나님은 우리가 마음놓고 말씀드릴 수 있는 분이기 때문이다. 말할 수 있는 "언론의 자유" (parrhsi,a)를 가지고 있다.

2. 우리의 형제들이 우리를 멸망시키려 할 때 우리가 구원을 요청할 수 있는 아버지를 모시고 있다고 하는 것은 큰 위로가 되는 일이다.

Ⅱ. 요구는 단 한 가지였지만 야곱의 그 탄원은 한이 없었고 절실한 것이었다. 그리고 사연은 더 할 수 없이 잘 정리되어 있었다(욥 23:4). 그는 자기의 소원을 굳건한 신앙과 뜨거운 마음과 한없는 겸손함을 가지고 아뢰었다. 얼마나 진지하게 그는 간구했는가! "내가 주께 간구하노니 나를 건져 내시옵소서" (11절). 그의 공포는 그로 하여금 그저 떼를 쓰는 사람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는 얼마나 신앙적인 논리를 전개하였던가? 그가 하나님께 간구한 말은 얼마나 거룩한 웅변이었는가? 여기에 우리가 본받아야 할 고귀한 모범이 있다.

1. 그는 자기 조상의 하나님께 기도했다(9절). 그것은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를 수 없는 그의 자기 부정적인 겸손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나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곧 자기의 조상들과 언약을 맺은 하나님을 부른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을 부름으로써 그는 더 좋게 간구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계획하신 의도에 의하여 그 언약은 자기에게 상속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곤경에 처할 때 우리 조상들과 하나님과 맺은 언약은 커다란 위로가 될 수가 있다는 것을 기억해 두자. 흔히 여호와의 백성에게는 그랬었다(시 22:4, 5). 하나님의 집안에 태어났기 때문에 우리는 그 하나님의 특별하신 보호 아래 있는 것이다.

2. 야곱은 자기의 정당성을 말한다.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네 고향으로 돌아가라 하셨나이다." 그가 라반과 함께 있던 곳을 떠난 것은 경솔한 탓도 아니었고 변덕스러운 기질 때문에 이 긴 여행을 해온 것도 아니고 바보스럽게 그저 고향이 그리워 떠나온 것도 아니다. 다만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떠난 것이다. 다음 사실을 명심하자.

(1) 우리가 의무를 수행하는 도중에 고난과 역경에 빠질 때가 있다. 그러나 번영이 곧 우리가 의롭다고 하는 것을 증거하지 못하는 것처럼 괴로운 역경에 처한다고 하는 사실이 우리가 악하다고 하는 것을 증거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어디든지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곳으로 가야 한다. 그러나 간혹 우리는 가시덤불이 우리의 길을 방해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야 한다.

(2) 우리가 조심스럽게 우리의 의무를 수행해 가는 동안 하나님께서 우리를 안전하게 하시리라는 사실을 안심하고 신뢰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 지금 우리의 인도자이시라면 앞으로도 우리의 수호자가 돌 것이다.

3. 그는 겸손하게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만큼 가치 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인정한다(10절). "나는 감당할 수 없나이다." 이것은 흔한 기도가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지금 위험에 놓여 있는 그 모든 것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닌 야곱 자신의 것이며 그는 충분한 대가를 지불하고 벌어들인 재물이라고 호소했어야만 했다고 생각한다. 야곱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여호와여 나는 감당할 수가 없나이다" 하고 호소한 것이다. 자기 부정과 자기 격하는 은총의 보좌에 계신 분에게 기도할 때 가장 적당한 것임을 명심하자. 그리스도께서는, "주여 내가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면서 간구한 사람과(마 8:8), "주여 !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라고 말한 여자(마 15:27)보다 누구도 더 높이 평가하지 않으셨다. 이제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살펴보기로 하자.

(1)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베풀어주신 은총을 참으로 장엄하고 가장 영예스러운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여기 19절에 나오는 "은총" 이란 말은 복수로 되어 있다. 그 은총은 마르지 않는 샘물, 수를 헤아릴 수 없는 물의 흐름과 같은 것이다. "모든 은총과 모든 진리." 그것은 약속에 의하여 베풀어주신 모든 과거의 은총과 약속에 의하여 신실하게 보장된 모든 앞으로의 은총을 뜻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총 속에 있는 것은 물론이요 하나님의 진리 안에 있는 모든 것도 능동적인 신앙인의 위로와 동시에 찬양이 된다는 것을 명심하자. 그런데 야곱은 더 적극적으로 이를 표현하고 있다. 모든 은총과 모든 진리가 하나님께 있다고 말한다. 그의 표현 방식은 참으로 풍부하다. 그리고 그의 가슴이 하나님의 선하심으로 가득차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2) 그는 자기 자신이 어떤 가치 있는 존재라고 하는 생각은 모두 부정하면서 참으로 어리석을 정도로 겸손하게 자기 자신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당신의 모든 은총을 조금이라도 감당할 수 없사오며, 제가 지금 간청하는 축복은 더더구나 감당할 수 없나이다." 야곱은 신중한 사람이었다. 많은 경우에 그는 모든 것을 심사숙고했다. 그래서 라반과 협정을 맺을 때는 자기의 고적에 대하여 분명한 주장을 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도 그렇게 자기 주장을 하지는 않았다. "나는 당신의 모든 은총을 감당하기에는 부족하옵니다." 그의 말은 바로 이런 뜻이었다. 인간이 지니고 있는 것은 아무리 위대한 것일지라도 하나님의 가장 작은 은총조차 감당할 수가 없는 것이라는 것을 명심하자. 그러므로 어떤 경우에도 이 사실을 인정할 마음의 준비가 있어야 하다. 어버트(Herbert)씨의 좌우명은 다음과 같은 훌륭한 것이었다. "나는 하나님의 가장 작은 은총도 감당할 수 없노라." 그렇게 태도를 취하는 사람만이 신의 가장 크신 은총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다.

4. 야곱은 그가 쫓겨가 있는 동안 자기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선하심과 그 선하심이 얼마나 자기의 기대 이상으로 이루어졌는가 하는 것을 감사에 넘쳐 고백하고 있다. "내가 지팡이만 가지고 이 요단을 건너 헐벗고, 버림받고, 외롭고, 멸시받는 순례자처럼 갔었다." 그는 안내자도 없었어, 친구도, 시종도, 여행을 위한 편리한 교통 수단도 없었다. 의지할 거라고는 그의 지팡이밖에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런데 이제는 자기의 권속이 두 떼나 되었다. 이제 나는 사랑스러운 수많은 자식들과 종들에 의하여 둘러싸여 있다" 비록 지금 그는 자기의 가족들을 둘로 갈라놓을 수밖에 없는 절망적인 처지에 있으면서도 얼마나 하나님께서 그를 풍요하고 번성케 하셨는가 하고 그 은총을 크게 드러내기 위하여 그 사실들을 열거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 사실을 명심하자.

(1) 가족이 번창하는 것은 우리가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은총과 진리를 보게 될 때 참으로 즐거운 일이다.

(2) 나중에 가서 크게 번영하고 번성하게 된 사람은 그들의 출발이 얼마나 보잘 것 없이 적었었나 하는 것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야곱은 "주여 ! 당신은 제가 지팡이 하나만을 가지고 다만 목숨하나만을 부지하고 나아갔을 때 저를 지켜 주셨나이다. 그런데 지금 저는 저로부터 비롯한 많은 사람들을 거느리고 있는데 저를 지켜 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하고 기도하고 있다.

5. 그는 자기가 처한 고통이 극에 달했음을 호소하고 있다. "주께 간구하오니 형 에서의 손에서 나를 구원하옵소서" (11절). 하나님의 백성은 자기들의 두려움을 하나님께 아뢰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께서 이미 자기들의 모든 입장을 알고 계시고 그 고통을 생각하고 계시고 있다고 알기 때문이다. 기도를 재촉하는 두려움은 참으로 귀한 것이다. 야곱이 두려워한 것은 도둑이 아니라 살인자였다. 또한 그가 두려워한 것은 자기 생명의 죽음이 아니라 자기를 따라오기 위하여 고향 땅을 떠나온 여러 어머니들 그리고 아이들의 생명을 잃을까 봐 겁이난 것이다. 혈연에 대한 사랑은 기도 중에서도 특히 허락 받을 수 있고 용인 받을 수 있는 것이다라는 것을 명심하자.

6. 야곱은 특별히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맺어 주신 약속을 주장했다(9절). "주께서 내가 네게 은혜를 베풀리라 하셨나이다." 그리고 끝에 가서 다시(12절) "내가 정녕 네게 은혜를 베풀리라 하셨나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다음 사실을 주목하자.

(1) 기도할 때 우리가 하나님께 아뢸 수 있는 최선의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해 주신 말씀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가 기도 중에 바라는 모든 소원의 가장 확실한 안내자이기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최선의 탄원을 할 수 있게 해 줄 뿐만 아니라 우리 희망의 가장 견고한 근거이기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최선의 간구를 할 수 있게 해 준다. "주님 당신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그 말씀이 나로 소망이 있게 하셨으니 주께서 그 말씀에 신실하지 않으실 이가 있겠습니까?" (시 119:49).

(2) 가장 일반적인 하나님의 약속은 어떤 특별한 경우에도 타당성을 가지는 것이다. "당신은 내가 네게 은혜를 베풀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여! 제가 당한 이 일에도 은총을 주시옵소서." 야곱은 또한 특별한 약속을 상기하면서 하나님께 아뢰고 있다. "네 자손을 번성케 하리라" 하신 약속을 상기하고 있는 것이다. "주여, 만약 모두가 살육 을 당하면 어찌 그런 일이 이루어질 수가 있겠습니까?" 다음 사실을 주목하자.

[1] 착한 사람들의 가정에는 언제나 가족을 위하여 일상적인 것이든, 특별한 것이든, 자비를 간구할 때 그것을 이루어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다(시 17:7, 112:2, 102:28).

[2] 세상의 위협은 사실 우리를 하나님의 약속을 다시 생각토록 한다.

 

32:10 없음.

 

32:11 없음.

 

32:12 없음.

 

32:13

야곱의 전략(창세기 32:13-23)

간절한 기도로 하나님과의 사귐을 이룬 야곱은 이제 선물을 통하여 에서외의 우정을 갖기 위한 세심한 노력을 한다. 그가 하나님께 에서의 손으로부터 구해 주십사고 간구했던 것은 에서를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두려움 때문에 어떻게 해야 할 방도를 잃고 망연해지거나 그저 어떤 대책도 강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총만을 바라고 기도만 하고 앉아 있지 않았다. 하나님께 은총을 간구한 다음에는 우리의 기도를 우리 노력을 통하여 제2의 기도를 드려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자.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들 자신의 모든 사색과 노력을 다 기울이면서 하나님의 섭리에 의존해야 한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막연히 들어주시는 것이 아니라 부닥친 일을 어떻게 신중히 다루어 나가야 할 것인가를 가르쳐 주시는 중에 응답하신다. 에서를 진정시키기 위하여,

Ⅰ. 야곱은 대단히 귀한 선물을 보냈다. 그것은 보석이나 좋은 옷들이 아니었다(야곱은 그런 것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모두 합해서 580마리의 가축을 보냈다(13-15).

1. 그처럼 가축을 보낼 수 있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얼마나 야곱을 번영토록 축복해 주셨는가 하는 것을 증거해 준다.

2. 일부를 떼어 줌으로써 나머지를 구하려 한 것은 그가 지혜롭게 행동했다고 하는 것의 증거이다. 어떤 사람들은 욕심이 많아 가지고 있던 것도 잃어버리는 경우가 있다. "가죽으로 가죽을 바꾸며, 그가 가진 모든 것을" 그가 현명한 사람이라면, "자기의 목숨과 바꿀 것이다" (욥 2:4)

3. 야곱은 이 선물들이 야생의 동물들을 사냥하기만 하고 길들인 가축들을 많이 갖지 못한 에서의 마음에 들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얼룩지고 점이 있고 울긋불긋한 현란한 색깔이 에서를 즐겁게 했으리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4. 야곱은 이 선물에 의해서 에서의 환심을 사야겠다고 생각했다. 흔히 "뇌물은 임자의 보기에 보석같은즉 어디로 향하든지 형통케 하고" (잠 17:8), "선물은 그 사람의 길을 너그럽게 할" 뿐만 아니라(잠 18:16), "은밀한 선물은 노를 쉬게 하고, 품의 뇌물은 맹렬한 분을 그치게 하기" 때문이다(잠 21:14). 다음 사실을 주목하자.

[1] 우리는 아무리 우리에게 화를 내는 사람이 있더라도 그와 화해할 수 없다고 절망을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사람을 아무리 해도 그에게는 호소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판단해 보리면 안 된다. 그러기 전에 우리는 그를 진정시키기 위한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2] 사랑과 평화는 아무리 값비싸게 산 것이라 할지라도 결국 참 잘 샀다고 느끼게 될 것이다. 많은 무뚝뚝하고 마음이 고약한 사람들은 야곱의 처지를 당하면 "에서는 이유 없이 나를 죽이려하고 있다. 그러니 나를 선대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그러니 선물을 보내기 전에 멀리서 더 좀 충분히 그를 관찰하고 지켜볼 수밖에 없다고 말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야곱은 에서를 오히려 용서하고 이 모든 악의를 잊어 버렸다.

Ⅱ. 야곱은 에서에게 아주 겸손하게 자기의 의사를 전했고 그것도 아주 현명한 벙법으로 하도록 종들에게 일렀다(17, 18절). 종들은 에서를 주인이라고 불러야만 했고, 야곱을 그의 종이라고 불러야만 했다. 그들은 그들이 끌고 가는 가축들은 야곱이 멀리 떠나 있으면서 획득한 것이 징표로 에서에게 보내는 조그만 선물이라고 말해야만 했다. 그는 선물로 보내는 가축들을 여러 떼로 나누어 가게하고 각기 그 떼를 몰고 가는 종들에게 동일한 전언을 하게 하여, 그 선물들이 더 귀하게 보이고 몇번이나 이미 반복하고 있지만 자기의 공손한 자세가 에서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도록 하게 했다. 특별히 종들은 야곱이 뒤에 따라오고 있다(18-20절)는 사실을 조심스럽게 말하여 야곱이 무서워서 도망가지 않았다는 것을 에서에게 알려야 했다. 인간성이 지니고 있는 선에 대한 우정 있는 신뢰로 살아간다면, 우리는 인간성이 지닌 악에 의해서 빚어지는 많은 불행을 예방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자. 야곱은 만약 자기가 에서를 두려워하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면 에서도 야곱에게 공포의 대상이 될 수는 없으리라는 것을 기대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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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싸우는 야곱(창세기 32:24-32)

우리는 여기에서 호세아 12장 4절에 언급되어 있는 야곱이 천사와 씨름하여 이겼다고 하는 놀라운 이야기를 읽게 된다. 이른 새벽 동이 트기 전에 야곱은 그의 아내들과 아이들을 도와 강을 건너게 하고 혼자 있고 싶어, 홀로 남아 하나님 앞에 자기의 모든 근심과 두려움을 다시 한 번 털어놓고 기도를 드렸다. 우리는 끊임없이 매 순간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자. 결코 피곤하면 안 된다. 자주 기도하고 쉬지 않고 간구하면 하나님께서 은총을 허락해 주실 것이다. 야곱이 하나님을 붙잡고 간절히 기도했을 때 천사가 그를 붙잡았다. 어떤 사람은 이 천사가 창조된 천사 곧 "자기(하나님) 앞에 있는 천사" (사 63:9), 언제나 "아버지의 면전에 있고" 세키나(Shechinah) 곧 하나님의 존전에 시중 드는 천사였으며, 아마 야곱도 이것을 보았으리라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들은 미가엘이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영원하신 말씀, 언약을 맡은 천사, 곧 천사장이며, 영원히 인간성을 입기 전에 가끔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그러한 천사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 천사가 어떤 자이든 간에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이름이 그 천사 안에 있다고 하는 사실" 이다(출 23:21). 다음과 같은 사실을 살펴보자.

Ⅰ. 야곱과 이 천사가 어떻게 어울렸는가를 알아보자(24절). 이 씨름은 어떤 보조자고 없는 일대일의 싸움이었다. 야곱은 내일 자기형에서와 만날 일 때문에 근심과 두려움에 차 있었다. 그런데 그 고통스러운 시련을 더하시려는 듯 하나님께서는 마치 적군처럼 자기로 하여금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고 자기가 먼저 보낸 처자식들을 따르지 못하도록 갈 길을 훼방하시려는 듯이 보인다. 견고한 신앙의 소유자는 여러 다양한 시련을 각오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자. 호세아 예언자는 "야곱이 어떻게 씨름" 을 했는가를 말해 주고 있다(호 12:4). 그는 "울며 간구 하였다." 그의 무기는 눈물과 기도였다. 그 싸움은 몸의 싸움이 아니라, 신앙과 거룩한 바램이 부닥치는 영적인 씨름이었다. 그러므로 모든 야곱의 영적인 자손들도 하나님과 더불어 씨름하며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

Ⅱ. 그 천사와의 만남에서 이긴 결과는 무엇이었는가?

1. 야곱은 자기 위치를 빼앗기지 않고 지켰다. 비록 싸움은 오래 계속 되었지만 "천사는 야곱을 이기지 못하였다" (25절). 즉 이같은 불의의 사태가 그의 신앙을 흔들지도 못했고 그의 기도를 침묵시키지도 못한 것이다. 그가 이렇게 씨름을 한 것은 자기 힘으로 한 것이 아니었다. 또 그가 이긴 것도 자기 자신의 힘으로 이긴 것이 아니었다. 또 그가 이긴 것도 자기 자신의 힘으로 이긴 것이 아니었다. 하늘로부터 하늘에 의하여, 주어진 힘에 이한 것이었다. 욥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가 큰 권능을 가지시고 나로 더불어 다투실까?" (욥 23:6) 아니다. (천사도 지쳤고 야곱도 지쳤다). 그러나 "도리어 내게 힘을 주시리라." 그리고 "바로 그 힘으로 야곱은 천사를 이긴 것이다" (호 12:4). 우리도 우리가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고는 하나님을 설복할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하자. 우리에게 찾아오시어서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도와주시는 이는 하나님의 영이시다(롬 8:26).

2. 천사는 야곱의 환도 뼈를 쳤다. 이것은 자기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야곱에게 보여줌으로써 야곱이 지금씨름을 하고 있는 상대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려 주려 한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으로서는 누구도 한 번에 환도 뼈를 쳐 위골이 되게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 때 야곱은 이 상처로 인해 어떠한 고통도 느끼지 못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럴 수 있는 것이, 야곱은 싸움이 끝날 때까지 한 번도 그 씨름을 중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31절). 만약 그렇다면 이것이야말로 상처를 입히시고 동시에 그것을 치유하시는 하나님의 행동이심을 증거 하는 것이다. 야곱은 이겼으나 환도 뼈는 위골이 되었다. 씨름을 하는 신도는 영광스러운 승리를 얻을 수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자. 그러나 때로는 뼈가 부러지는 수도 있다. 무릇 그들이 약할 때, 또한 그들은 강한 것이다. 우리들 자신으로는 약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는 우리가 강하기 때문이다(고후 12:10). 이 세상에서 얻은 우리의 명예나 위로에는 언제나 티가 있게 마련인 것이다.

3. 천사는 말할 수 없이 겸손하게 자기를 가게 해달라고 부탁한다(26절). 그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대로 하게 하라" 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강한 천사가 야곱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 없었겠는가? 그는 그럴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야곱의 신앙과 기도를 존경했고 또 야곱이 얼마나 지조가 있는지를 시험하고 싶었던 것이다. "왕이 머리카락에 매이었고" (아 7:5), "그를 붙잡고(라고 배우자는 말한다) 놓지아니하리라" (아 3:4). 천사가 가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한 것은 날이 새려하기 때문이었다. 그는 더 이상 야곱을 잡아 놓을 수가 없었다. 야곱은 해야 할 일도 있고, 거야 할 길도 있고, 이 위기에 처하여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가족이 있었기 때문이다. 만사는 때가 있는 법이다. 종교적인 신앙의 생활도 하나님과의 사귐이 주는 평안도, 때로는 이 세상 삶에 필요한 것 때문에 중단해야 할 수도 있다. "하나님은 자비를 원하시지 희생을 원하시지 않는다."

4. 야곱은 거룩한 떼씀을 계속했다.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자기 가족이나 이 긴 여행이 어떻게 되든간에 그는 자기의 슬 리가 가져다 준 이점을 놓치지 않고 이 기회를 최선의 것으로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그는 밤새도록 씨름을 한 결과가 아무 것도 아닌 허무한 것일 수가 없었다. 그리고 뼈가 하나 없이 다 없어진다 하더라도 아무런 결과도 없이 무의미하게 이 씨름이 끝나는 것보다는 겸허하게 축복을 간구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축복의 위로가 없다면 씨름에서 이겼다고 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래서 그는 비록 싸움에서는 승자였지만 이 축복을 간구하면서 스스로가 열등한 자임을 인정한다. "열등한 자는 우월한 자로부터 복을 받는 법이다." 그리스도의 축복을 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그 축복을 간절하고 끈질기게 고해야 한다. 축복을 받지 않고는 물러나지 않겠다고 결심해야 하는 것이다. 가장 효과적인 기도는 타는 듯한 뜨거운 기도이다.

5. 천사는 야곱의 이름을 바꾸어 줌으로써 영원한 영예의 징표를 야곱에게 주었다(27, 28절). "너는 용감한 투사다" (하고 천사는 말한다). "영웅적인 결단이 있는 사람이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야곱입니다. 하고 그는 말한다. "속이는 자" 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좋다 이제부터는 절대로 그렇게 물리어져서는 안 된다. 이제부터는 네가 재주나 교활한 수단 때문에 칭송 받는 것이 아니라, 네가 보여준 참된 용기를 인하여 칭송을 받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는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 곧 이스라엘이라 불리워질 것이다." 이 이름은 이 땅 위에 있는 어떤 위대한 사람의 이름보다도 더 위대한 것이다. 그는 승리자 곧 하나님을 이긴 승리자였다. 그리고 기도에 남다른 열심과 힘을 보여 주는 사람들 곧 이스라엘들 또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참으로 영예로운 사람들이다. 야곱은 여기 들판에서 마치 영예를 수여 받는 기사와 같았다. 모든 명예의 근원이신 분으로부터 그에게 수여된 이 명예는 세상 끝날까지 길이 보존되어 그를 기리는 칭호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만이 모두는 아니었다. 하나님과 겨루어 이기는 힘을 차지했기 때문에 그는 사람과 겨루어 이기는 힘도 또한 가지게 되었다. 하나님을 이겨 축복을 얻게 된 그는 에서의 호의를 차지할 것도 분명한 일이다. 우리가 어떠한 적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우리의 친구로 삼으면, 만사가 형통해진다는 것을 기억하자. 믿음으로 하늘의 행을 획득하는 자는 지상에서도 필요한 경우 강한 힘을 가지게 된다.

6. 야곱은 축복을 받고 천사를 놓아준다(29절). 야곱은 천사의 이름을 알고 싶었다. 그가 이루어주는 일을 보고 그를 존중하기 위해 서였다(삿 13:17). 그러나 이를 거절했다 야곱이 나는 어느 천사를 이겼다든가 자기가 소원한 바를 이루어 놓도록 어느 천사를 복종시켰다고 하면서 교만해지지 않기 위해서 그렇게 거절한 것이다. "무엇 때문에 내 이름을 묻는가, 그 이름을 알아서 무엇이 유익하겠는가?" 야곱은 죽을 때가 임박해서야 그가 실로라고 불리운 천사임을 알게 된다. 그런데 천사는 자기 이름대신에 야곱이 얻기를 간구하여 씨름하였던 축복을 그에게 내려주었다.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 이전에 받은 축복이 재천명된 것이다. 우리의 행복을 보장해 주는 영적 축복은 우리의 호기심을 만족시키는 훌륭한 개념보다 더욱 간절히 소망해야 된다는 것을 기억하자. 천사의 축복을 받아야겠다는 관심이 그의 이름을 알아야겠다는 관심보다 더 좋은 것이고 생명의 나무는 선악의 나무보다 더 좋은 것이다. 마침내 야곱은 자기가 원한 점에 도달하여 소원을 이루었다. 얻기 위하여 씨름한 그 축복을 받았고, 그의 기도를 본받는 어떤 후손에게도 기도가 헛되지 않음을 보여 준 실례가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겸허하게 간구하는 기도를 들어주기고 영예롭게 해 주시는가를 잘 살펴 보라. 비록 하나님께서 우리를 죽이시더라도 그 분을 굳은 마음으로 믿는 자는 마침내 정복자보다도 더 위대해질 것이다.

7. 야곱은 그 자리를 새 이름으로 불렀다. 그는 그 자리를 브니엘 곧 하나님의 얼굴이라 불렀다. 왜냐하면 그가 그 곳에서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뵈었고 하나님의 은총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가 그곳을 그렇게 명명하여 오래 보존하고 기리려 한 것은 자기 자신의 용기나 승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유로운 은총을 위해서였다는 사실을 주목하자. 그는 "여기에서 내가 하나님과 씨름하여 이겼다" 라고 말하지 않고 "이곳에서 나는 하나님을 마주 죄었는데도 내 생명이 보존되었다" 고 말했다. "내가 정복자가 된 것은 내가 잘나서이다" 라고 말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총으로 나는 목숨을 구했다" 고 말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영예롭게 해주신다 할지라도 우리는 스스로 겸비해야아여 오히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스스로를 낮추셨다고 하는 사실을 찬양 드리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님께서 은혜의 전언을 다윗에게 보내셨을 때, 다윗의 태도가 그랬다. 그는 "주 여호와여 나는 누구이오니까?" 하고 감격하여 부르짖었던 것이다(삼하 7:18).

8. 야곱은 이 사건의 흔적을 몸에 지니고 있었다. "그가 환도 뼈로 인하여 절었더라" (31절). 어떤 사람은 그가 죽을 때까지 환도 뼈로 인하여 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마 그게 사실이라 할지라도 야곱은 그 아픔과 불편을 결코 불평하지 않았으리라 생각된다. 왜냐하면 비록 무덤까지 절며 걸어갔다 할지라도 이 씨름에서 얻은 영예와 위로가 그의 아픔을 충분히 보상하고도 남았으리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절게 된 것을 부끄럽게 생각할 아무런 이유도 없는 것이다. "내 몸에 주 예수의 흔적을 가지노라" (갈 6:17). 아마도 바울의 몸을 찌르는 가시처럼 이 환도 뼈의 아픔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그 풍성한 계시를 뽑내지 않도록 그를 보호해 주신 것이다.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 해가 떠올랐다. 하나님과 이 소통은 곧 영혼에 태양이 떠오르는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영감으로 이 성경을 쓴 성서 기자는 이일을 기념하기 위하여 야곱의 후손들이 어떤 짐승의 고기를 먹든지간에 환도뼈 큰 힘줄은 먹지 않는 습관을 가지게 되었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이 이야기를 기억하고 그런 습관이 왜 생긴거냐고 자손들이 묻도록 함으로써 야곱의 이야기가 끊임없이 전달되고 그 야곱의 사실을 영예롭게 보존하려 한 것이다. 우리도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의무를 기억하고, 하나님과의 소통을 늘 유지하여 삶이나 절름발이의 위험 없이 믿음과 희망과 사랑 중에서 살아가기 위해 이러한 습관을 방법으로 사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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