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준비하는 이삭(창세기 27:1-5)
여기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찾아볼 수 있다.
Ⅰ. 유언을 하고 에서를 자기 상속자로 세우려는 이삭의 계획이다. 메시야와 가나안 땅에 관한 약속은 위대한 소망이었다. 처음에는 그것이 아브라함에게 맡겨졌다. 거기에는 영적이고 영원한 축복이 내포되어 있었고, 또한 그것의 한 상징이었다. 그런데 이 약속은 하나님의 짓에 의하여 아브라함은 이삭에게 물려주었던 것이다. 이삭은 이제 너무 늙었기 때문에 큰아들이 작은아들을 섬기리라고 말씀하신 자기 두 아들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알지 못하고, 혹은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정당하게 생각을 하지 못하고, 혹은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정당하게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으므로 계약이 지닌 모든 영예와 능력을 한데 묶어 맏아들 에서에게 상속해 주기로 마음을 먹은 것이다. 이 일에 있어서 이삭이 하나님께서 알려 주신 바 있는 의도를 알고 있었다면(알고 있었을 것이다) 당연히 했어야 했던 방식보다는, 일상적인 상속법대로 즉 본능적인 애정에 따라 처리하려 했던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로부터 말미암은 척도에 의해서보다는 우리 자신의 이성으로부터 솟아나는 척도에 의하여 행동하기가 쉽다는 것을 명심하자. 그리하여 가끔 우리가 가야 할 길을 놓치고 마는 것이다. 우리는 현명하고 학식이 있는 사람, 고귀한 권력가가 그 약속을 계승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을 외모로 보시지 않으신다(삼상 16:6, 7 참조).
Ⅱ. 이 계획에 따라서, 이삭은 에서에게 지시 사항을 일러준다. 그는 에서를 불러들였다(1절). 에서는 결혼은 했지만 아직 따로 살지는 않았다. 비록 에서가 결혼 때문에 부모를 슬프게 하기는 했지만, 부모들이 그를 내쫓지는 않은 것이다. 서로 화해를 하고 최선을 다해 문제를 해결한 것 같다. 부모들이 자녀에게 화를 낼 수도 있지만, 결코 자녀들에 대하여 앙심을 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아두자.
1. 그는 에서에게 어떤 생각에서 자기가 이러한 결심을 하게 되었는가를 이야기 해 준다. "내가 이제 늙어, 곧 죽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날 죽을는지는 알지 못한다. 언제 죽을는지고 모른다. 그래서 언젠가는 해야 할 일을 지금 아려는 것이다" (2절). 다음을 명심해 두자.(1) 노인들은 나이가 먹고 점점 허약해지면, 자기 손으로 해야 할 일들은 빨리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된다(수 13:1 참조).
(2) 이 세상에서 우리가 언제 떠나야 할는지 알 수 없다고 하는 사실을 생각하면, (하나님께서는 지혜롭게도 그 날을 어두움에 감추어놓고, 우리가 볼 수 없도록 하고 계신다.) 우리는 그 날 해야 할 일은 그날 하도록 해야 한다. 우리의 마음이나 우리의 집안은 안정이 되고 질서 있게 정리되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우리가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께서 강림" 하시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의 죽음의 날을 우리는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늘 생명 있는 동안 해야 할 일을 생각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2. 이삭은 자기의 마지막 유언과 약속을 경건하고 엄숙하게 집행하기 위한 의식을 준비하도록 에서에게 분부하였다. 그런 것을 통하여 그는 에서를 자기의 상속자로 삼으려고 계획을 한 것이다(3, 4절). 에서는 사냥을 나가 짐승을 잡아와야 했다. 아버지는 그것은 이삭이 자기의 정신을 새롭게 한 다음 맑은 정신으로 축복을 내리는 것보다는, 그 은총을 에서에게 쏟기 전에 먼저 자기 아들의 효도를 뚜렷이 받고 싶어하는 단순한 취지였던 것이다. 어쩌면 에서는 결혼을 한 이후로는 사냥한 고기를 아내들에게만 갖다줄 뿐 이전처럼(25:28) 자기 아버지에게는 자주 갖다 드리지를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삭은 자기가 그를 축복하기 전에, 자기에게 대한 이러한 작은 정성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작은 자가 큰 자의 축복을 받으려면 작은 자는 큰 자를 대접하고 칭송해야 마땅함을 깨닫자. 이삭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 영혼이 죽기 전에 내 마음껏 네게 축복하게 하라." 이런 점을 명심해 두자.
(1) 기도는 영혼이 하는 일이지, 입술만이 하는 일이 아니다. 또한 영혼은 하나님을 송축하지 않으면 안 되듯이(시 103:1),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또한 축복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축복과 송축은 마음에서 우러나는 것이 아닐 때 결코 마음에 가 닿지 않는 것이다.
(2) 살아 있는 동안 해야 할 일은 죽기 전에 다 하지 않으면 한 된가. 그런 일이 죽은 후에 이루어질 수는 없는 것이다(전 9:10). 가장 바람직한 것은, 죽음에 임하면 죽을 일 ?에는 아무런 할 일도 남겨지지 않는 것이다. 이삭은 이 일 후에 40년이나 더 살았다. 그러므로 유언이나 죽음의 준비를 해두면, 더 빨리 죽는다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말자.
리브가의 계교(창세기 27:6-17)
리브가는 에서에게 주기로 된 축복을 야곱에게 주려고 궁리한다.
Ⅰ. 그 목적은 좋았다. 왜냐하면 리브가는 하나님의 예언 말씀이 그래서 그렇게 되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그녀는 그 말씀에 의지하여 애정을 The고 있던 터였기 때문이다. 형이 "동생을 섬기리라" 고 하나님께서 이미 말씀하신 바가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리브가는 그렇게 되어야 하리라고 결심한 것이고, 자기의 남편이 하나님의 예언 말씀을 훼방하려는 것을 참아 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Ⅱ. 그 방법은 나빴다. 어떤 입장에서도 그것은 정당화될 수가 없는 것이다. 비록 에서에게서 축복을 빼앗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이미 에서는 장자의 권리를 팔아 버림으로써 그 축복을 상실했다) 이삭의 약점을 이용하여 그를 속인 것은 이사에게 잘 못한 일이다. 또한 속이도록 가르치고 거짓말을 하게 하고, 적어도 그를 자기 심복으로 만들었다 하는 점에서 그것은 야곱에게도 나쁜 일이었다. 그리하여 이 일로 야곱은 그 축복에 대한 끝없는 양심의 가책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즉 비록 그가 이처럼 아버지를 기만해서 축복을 얻는다 할지라도, 이 축복이 언제 어디서나 자기를 지지하고 지탱하여 줄는지, 특별히 아버지가 속은 것을 발견하고 error personal 곧 사람을 잘못 알았다고 하여 그 축복이 무효화 되기를 간구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야곱 자신도 축복을 못 받을 위험을 알고 있었다(12절). 만약 잘못해서 축복을 받지 못하게 되면, 그가 무엇보다도 두려워하는 바 아버지의 저주가 임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더군다나 그는 "소경으로 길을 잃게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신 27:18)고 하는 하나님의 저주 앞에다 스스로 다가서는 것이 된다. 만약 리브가가 이삭이 에서에게 축복을 약속하는 것을 듣고 에서가 사냥에 갔다가 돌아올 동안에 이삭에게 가서 겸손하고 진지하게 하나님께서 그들의 두 아들에 관하여 말씀하신 바를 이삭으로 하여금 다시 기억하게 했었더라면, 만약 리브가가 한 발 더 나아가 어떻게 에서가 자기의 장자의 권리를 팔아 버렸고 또 이방 여인들과 결혼을 해서 그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권리를 상실했는가를 알려 주었더라면 이삭은 알면서도 야곱에게 축복을 주고 말았을 것이며, 속이는 일은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만 되었더라면, 그것은 칭송 받을 만하고 갸륵한 일로 역사에 길이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리브가의 이러한 우회적인 방책을 스스로 허용하셨고, 악에서부터 선을 끌어내시는 영광을 받으셨으며, 인간의 범죄와 잘못을 통하여서도 당신의 목적을 이루게 하신다는 찬양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세상에는 한없이 많은 사악함과 기만이 가득하지만,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에 따라서 그리고 당신에게 영광이 되도록 이 세상을 통치하고 계심을 알면, 우리는 만족할 수 있는 것이다. "능력과 지혜가 그에게 있고 속은 자와 속이는 자가 다 그에게 속하였다" (욥 12:16 참조). 이 때에 이삭은, 시력을 잃고 있었다. 그러나 그 때문에 속을 정도는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모습을 놀랄 만큼 서로 다르게 만드셔서, 어떤 두 사람의 모습도 똑같지 않게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한 다양성이 없다면, 어떠한 교제나 장사도 지속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리브가는 다음과 같이 이삭을 속이려 한 것이다.
1. 이삭의 미각을 속였다. 즉 그는 염소고기를 잘 양념해서 바치게 함으로써, 이삭으로 하여금 그 고기들이 사냥해 돈 짐승의 고기로 믿게 했던 것이다. 이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맛이 좋고 진기한 음식만을 찾아다니면서, 그런 음식을 즐기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보라. 그들이 경멸하고 싫어하는 체하는 것을 이용하여, 그들이 아주 결정적으로 놓아하는 것과 조금도 다름없이 그들을 속이는 것은 무척 쉬운 일이다. 솔로몬은 진미란 "사람을 속이는 음식" 이라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우리는 이른바 진미라고 하는 것들에 의해서 여러 방법으로 속임을 당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잠 23:32).2. 그의 촉각과 후각을 속였다. 리브가는 에서의 옷을 야곱에게 입혔다. 그것은 에서가 복을 받을 때, 그의 아버지에 대한 존경과 즐거움의 표로 입으려고 한 제일 좋은 옷이었는지도 모른다. 이삭은 이것이 에서의 것이라는 것을 옷감이나 옷의 모습이나 냄새로 알고 있었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하늘 아버지로부터 축복을 받으려거든 우리의 많은 믿음의 형제들 중에서도 첫째 형이 입고 있던 정의의 의복을 입고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매끄럽고 부드러운 야곱의 손과 목 때문에, 이삭에게 탄로가 날까 두려워 리브가는 새로 잡은 염소의 가죽털로 손과 목을 감쌌다. 아마 얼굴도 부분적으로 덮었을 것이다(16절). 에서는 거치른 자였으므로, 야곱을 에서처럼 꾸미려면 이 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자기들의 행위가 거칠고 껄껄하게 보이게 하려고 애쓰는 자들은 짐승 가죽을 덮어 쓴 자들이요 그렇게 가장을 했다고 하는 것은 자신들에게도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야곱이 저주가 두려워서 이 계교에 이의를 제기 했을 때, 리브가가 한 말은 지극히 지각없는 말이었다. 즉 "내 아들아, 너의 저주는 내게로 돌리리니" 라고 했다(13절). 그리스도께서는 참으로 구원하실 능력이 있으셨고 또한 모든 것을 담당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기 때문에, "저주는 내가 담당할 테니, 다만 내 말에 순종하라" 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는 계명의 멍에, 곧 복음의 계명을 지려는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저주의 짐 곧 율법의 저주를 담당하셨다. 그러나 "임하지 아니할" (잠 26:2) 까닭 없는 저주가 문명한 경우가 아니라면, "그 저주는 내게 돌리라" 고 말하는 것은 어떠한 피조물에게라도 지나치게 건방진 말이다.
장자의 축복을 받은 동생(창세기 27:18-29)
Ⅰ. 이 음모를 해내는 야곱의 재주와 철면피한 태도, 누가 과연 이평범하고 솔직한 사람이 이 같은 성격의 일에서 자기의 몫을 이처럼 잘 해낼 수 있으리라고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그의 어머니가 그를 그렇게 하도록 했고 또 격려해 주자, 그는 전혀 익숙하지 않을 뿐 아니라 경멸해 오던 그 방법에 그처럼 능란하게 자신을 적응시킨 것이다. 거짓말을 쉽게 배울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자. 시편 기자는 "나면서부터 거짓을 말하는 사람들" 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시 58:3; 렘 9:5). 나는 어떻게 그 정직한 야곱이 그처럼 쉽게 "나는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로소이다" 하고 말하게 되었는지(19절), 알 수가 없다. 또한 나는 어떻게 그가 "나는 장자가 되었나이다" 라고 하는, 즉 값을 주고 사서 장자가 된 자라는 모호한 말을 한 작은 노력이 어떻게 성공을 거두었는지를 이해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그의 아버지가 "네가 참 내아들 에서냐?" 하고 물었을 때, "그러하나이다" 하고 대답을 했던 것이다(24절). 아버지한테서는 아무런 분부도 받은 일이 없고, 다만 어머니가 분부한 대로 한 것 뿐인데, 어떻게 그는 "아버지께서 내게 명하신 대로 내가 하였나이다" 하고 말할 수가 있었을까? 자기가 가지고 간 음식이 들판에서 온 것이 아니라 양의 우리에서 온 것인 줄을 알면서도 어떻게 "내 사냥한 고기" 를 드시라고 말할 수가 있었을까? 그러나 무엇보다도 어떻게 그가 그처럼 뱃심 좋게 아버지를 속이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할 수가 있었는지 알 수가 없다. "아버지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로(사냥감을) 순적히 만나게 하셨음이니이다" (20절). 이것이 정말 야곱인가? 이것이 참으로 간교함이 없는 이스라엘인가? 분명히 이것은 우리가 본받게 하려고 기록된 것이 아니다. 우리를 훈계하시려고 거룩하신 것이다. "섰다고 생각하는 삶은 넘어질까 조심하라." 선한 사람들은 그들이 가장 크게 받아 그 은총의 실천 속에서 때때로 실패를 하는 것이다.
Ⅱ. 이 일의 성공. 야곱은 자기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에 약간의 어려움도 있었지만 축복을 획득하였다.
1. 처음에는 이삭이 만족을 못 느꼈다. 만약 그가 자기 귀를 믿었더라면, 자기를 속이는 음성은 발견해 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음성은 야곱의 음성" 이었기 때문이다(22절). 하나님의 섭리는 참으로 오묘하셔서, 얼굴과 마찬가지로 목소리도 제각기 다르게 만들어 주셨다. 그리하여 우리가 속지 않도록 도움을 주신 것이다. 특별히 목소리는 쉽사리 가장을 할 수 있거나 숨길 수 있는 것이다 아니다. 목소리는 또한 위선적인 성격을 나타내 주기도 한다. 그의 목소리는 야곱의 음성이었지만 그의 손은 에서의 손이었다. 그는 성자의 말을 하고 있었지만, 죄인의 행동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최후의 심판은, 여기에서처럼, 무엇을 말했느냐 하는 음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무엇을 했느냐 하는 손에 의해서 이루어질 것이다.2. 마침내 이삭은 기만하는 힘에 굴복하고 말았다. "그 손에 털이 있었기 때문이다" (23절). 그러한 경우에 털이 많은 것처럼 위장하기는 얼마나 쉬운가 하는 것을 고려하지 않고 인정을 해버린 것이다. 그리고 이제 야곱은 재빠르게 할 일을 해나간다. 그가 가지고 온 고기 요리를 아버지 앞에 놓고 식사를 마치실 때까지, 아주 친절하게 식탁 옆에 대기하고 서 있었다. 이 엄숙한 식사가 끝나면 축복이 선포되려는 참이다. 리브가와 야곱의 범죄가 어느 정도 가볍게 취급될 수도 있는 것은, 그러한 사기 행위가 하나님의 예언 말씀을 빨리 성취해 주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그 말씀의 실현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예방하는 것이라는 이유에서이다. 즉 축복이 엉뚱한 사람에게 막 내려지려고 하는 참이었기 때문에, 그들 스스로가 나서지 않으렴 안 될 때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제 어떻게 이삭이 야곱을 축복했는가를 살펴보라(26-29절).
(1) 이삭은 특별한 사랑의 표시로 야곱을 껴안았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입맞춤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사랑과 충성심을 표하기 위하여, "아들에게 입맞추는" 것이다(시 2:12).
(2) 이삭은 그를 칭송했다. "그가 그 옷의 향취를 맡고 그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내 아들의 향취는 여호와의 복주신 밭의 향취로다." 즉 그 냄새는 가장 향기로운 꽃과 향료의 향기와 같다고 했다. 하나님께서 이미 야곱을 축복하셨기 때문에 이삭도 그를 축복하게 된 것이다.
(3) 이삭은 그를 위해 기도했다. 그 기도 중에서 그에 관한 예언을 했다. 자녀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또 그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는 것은 부모들의 의무이다.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세례를 받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계약의 상속권이 집안에 보존되고 영구히 지켜지게 하기 위하여서 부모는 할 수 있는 일을 다 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 축복은 비상한 것이었다. 이삭이 잘 모르고, 실수로 야곱에게 축복을 내린 것은 섭리의 명령이었다. 그리고 보면, 야곱은 하나님께 은총을 입은 것이지 이삭에게 축복을 받은 것은 아닌 것 같다. 야곱은 세 가지 축복을 받았다.
[1] 하늘과 땅이 함께 그를 부하게 하는, 풍요의 축복을 받았다(28절).
[2] 능력(29절). 특별히 자기의 형제 즉 에서와 그의 후손들을 다스릴 능력을 축복으로 받았다.
[3] 하나님의 특별한 총애와 하늘에 대한 위대한 이권을 받았다. "네게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네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 그러니 하나님께서 네 모든 친구들의 친구가 되리라. 또한 네 모든 원수들의 원수가 되리라." 분명히 이 축복 속에는 곧 prima facle 일견해서는 보이지 않는 많은 것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 축복은 메시야와 교회에 대한 약속의 상속권까지 포함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족장들의 용어로 말하면, 그것은 참된 축복(the blessing)이다. 즉 영적인 어떤 것이 거기에 내포되어 있다. 첫째로 그에게서 메시야가 태어나실 것이며, 그 메시야가 세상을 다스리실 것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섬기고 모든 나라가 굴복해야 할 바로 야곱 일가의 지파는 우두머리 지파였던 것이다. "주권자가 야곱에게서 나리라" 고 했다(민 24:19). 곧 한 별 또는 한 홀(笏)이 그로부터 나온다고 했다(민 24:17). 야곱이 에서를 다스리게 되는 것은, 다만 이같은 사실의 한 모형에 불과한 것이다(49:10). 둘째로, 야곱으로부터 교회가 비롯되고 그 교회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과 사랑을 받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 축복은 아브라함이 받은 축복의 일부이다. 아브라함이 최초로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리워 졌을 때(12: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겠다" 고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셨던 것이다. 따라서 후에 이삭이 그 축복을 야곱에게 줄 때, 그는 이를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복" 이라고 부른 것이다(28:4). 발람도 또한 그렇게 설명하고 있다(민 24:9).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와 관계를 맺고, 그리스도의 권능과 교회의 은총에 상관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최선의 축복임을 명심하자.
축복을 빼앗긴 형(창세기 27:30-40)
Ⅰ. 계약의 축복이 에서에게는 거절되었다. 장자의 권리를 그처럼 경홀히 여기더니, 이제는 "축복을 기업으로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다" 고 했다(히 12:17). 다음의 사실들을 살펴보자.
1. 에서는 축복을 매우 간절하게 구했다. 그는 자기 아버지가 지시하신 대로 맛있는 고기를 요리하여 가지고 와서, 아버지가 기다리도록 격려해 주신 바 있는 그 축복을 간청했던 것이다(31절). 그는 야곱이 속임수를 써서 그 축복을 취한 것을 알았을 때, 그는 "방성대곡하였다" (34절). 아무도 에서처럼 마음에 깊은 절망을 경험해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슬픈 통곡이 아버지의 장막을 울렸다. 그리고 다시 "소리를 높여 울었다" 고 했다(38절). 오늘날 계약의 축복을 경히 여기고 자기들의 상속권을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위해 팔아 버리는 사람들이, 다시금 그 축복과 권리를 안달을 하면서 구하지만 이루지 못할 그 날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자. 지금 간절히 원하고 구하지 않는 사람들은, 얼마 안 있어 문을 두드리며 "주여, 주여" 하고 부르짖을 것이다. 그리스도를 멸시하던 사람들이 그 때에 가서는 겸손한 탄원자가 될 것이다.2. 그가 어떻게 거절당했는가? 이삭은 처음 자기가 기만당한 것을 알았을 때, "심히 크게 떨었다" 고 했다(33절). 하나님의 뜻이 지시하시는 대로 따르지 아니하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대로 선택하는 사람들은, 이와 같은 당혹에 빠진다. 그러나 그는 정신을 되찾고, 그가 야곱에게 내려 준 축복을 인준했다. "내가 그를 위하여 축복하였은즉, 그가 정녕 복을 받을 것이니라" . 어쩌면 그는 매우 타당한 근거가 있음을 깨닫고서, 그렇게 말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 마침내 그는 에서에게 축복을 내려 주기로 했을 때 잘못을 범했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이삭은 직접 하나님의 예언 말씀을 기억해 냈는지, 또는 야곱에게 축복을 내리고 있는 동안 보통 때와는 달리 성령의 충만하심을 입어 스스로 이런 말을 발견해 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이 행하신 마를 깨달은 것이다. 말하자면, 자기가 내린 축복에 "아멘" 이라는 말을 덧붙인 셈이다.
(1) 야곱은 이에 의해서, 비록 그가 속여서 얻은 것이긴 하지만, 축복의 소유권이 확인되었고, 그 소유권의 타당성을 마음껏 기뻐하게 된 것이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사 자기의 잘못을 묵인하시고 용서해 주셨다고 믿을 수 있는 소망을 가졌다.
(2) 여기에서 이삭은 자기 자신의 기대와 애정에 어긋나는 것이긴 했지만, 하나님의 뜻에 묵묵히 복종하였다. 그는 에서에게 복을 주기로 작정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 다르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는 그 뜻에 복종했던 것이다. 그는 전에 아브라함이 이스라엘을 위해 간청했을 때처럼 "믿음으로" (히 11:20) 이 일을 행하였다.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의 것을 가지고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행할 수 없겠는가?
(3) 이로써 에서는 자기가 장자의 권리를 팔아버린 후에도 여전히 자기가 지니고 있다고 생각해 온, 그 특별한 축복에 대한 기대를 이제는 완전히 상실했다. 우리는 이 사실을 통하여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배울 수가 있다.
[1]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하는 사실을 배울 수 있다(롬 9:16). 바울 사도는 여기서 에서의 이야기를 넌지시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다. 에서는 그 축복을 좋게 보고, 그것을 향하여 좇아갔다. 그러나 자비를 베푸신 하나님께서는 그 축복을 야곱에게 주시기로 한 것이다. 즉 "택하심에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서게 하려 하신 것이다(롬 9:11). 유대인들은 에서와 같이 의의 법을 추구하여" 사냥을 갔으나(롬 9:31) 의의 축복을 놓치고 말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율법의 행위에 의하여 되는 줄로 알았기 때문이다" (롬 9:32). 그러나 이방인들은 야곱처럼, 하나님이 보여주신 것에 대한 믿음으로 그것을 추구하고, 강제로 그 축복을 획득하였다. 하늘 나라는 이러한 폭력을 당하고 있다(마 11:12 참조).
[2] 영적인 장자권을 귀하게 여기지 않아 음식 한 그릇을 받고 그것을 팔 수 있는 사람은 영적인 축복을 상실한다. 또한 그들이 무관심했던 그 은총을 하나님께서 거절하심은 당연한 일이다. 이 세상의 명예와 재물과 향락을 위해서 지혜와 은총, 신앙과 양심을 떠나는 사람들은 아무리 그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열심히 추구하는 척해도 이미 그 축복을 받을 가치가 없는 사람들이며, 저들의 종말이 그러하리라.
[3] 분노하여 손을 드는 사람을 결국 아무 것도 얻지 못한다. 에서는 자기 자신의 잘못을 참회하는 대신 자기 동생을 비난하고, 그가 정당하게 동생에게 판 장자의 권리를 동생이 빼앗아 갔다고 부당하게 비난하며(6절) 아버지가 한 일 때문에 동생에 대하여 악의를 품었다(41절). 자기 자신에게 돌려야 할 원한을 자기 형제들에게 돌리는 사람, 자기 자신을 부끄럽게 생각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기 비행의 부끄러움을 형제들에게 뒤집어씌우는 사람들의 기도는 속히 응답을 받지 못할 것이다.
[4] 너무 때 늦게 구하는 사람은 거절을 당할 것이다. 이것이 에서가 망하게 된 원인이다. 그는 시간 애에 오지 못한 것이다. 용납된 시간, 즉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시간이 있듯이, 약속된 시간을 어겼기 때문에 아무리 간구해도 하나님께서 들어주시지 않는 그런 시간이 있다(잠 1:28 참조). 하나님의 인내와 우리의 시련이 언제나 지속되는 것은 아니다. 마침내 은총의 날이 임하고 또 마침내 문이 닫혀지는 때가 있는 것이다. 그 때에는 지금 하나님의 축복을 멸시하는 사람들이 간절하게 그 축복을 찾을 것이다. 그 때서야 그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 것인가를 알게 될 것이며, 그 축복이 없이는 그들 스스로가 영원히 무의미하게 파멸될 뿐이라는 것도 알게 되기 때문이다(눅 8:25-27).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살아 있는 지금 우리의 "평화에 속한 일을 알아야" 하리라!(눅 19:42 참조).
Ⅱ. 에서에게는 일반 축복이 내려진다.
1. 에서는 "내게도 축복하소서!" 라 했다(34절). "아버지께서 나를 위하여 빌 복을 남기지 아니하셨나이까?" 하고 원했다(36절).다음을 명심해 두자.(1) 가장 악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기 자신을 위할 줄은 아는 법이다. 그리고 함부로 장자의 권리를 팔아버린 사람들조차도, 그 축복은 진심으로 바란다. 목적을 바르게 선택하고 수단을 바르게 사용하지 못하면, 행복에의 희미한 욕구는 많은 사람을 속이고 그들을 결국 파멸하게 하고 만다. 수많은 사람들이 입으로는 좋은 것을 많이 바라면서도, 지옥으로 빠지고 있다. 나태하고 불신하는 사람들의 욕망은 그들 자신들을 죽이는 것이다. 에서와 같이 많은 사람들이 들어가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힘써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눅 13:24).
(2) 여기의 에서처럼, 장자권과는 관계없지만 아무런 축복이라도, 곧 제2급의 축복이라도 받으려고 애쓰는 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범하는 어리석음이다(시 4:6). 속된 마음들은 어떤 축복이든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내려지는 축복과 마찬가지로 좋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버지의 빌 복이 하나 뿐이리이까?" 그것은 마치 "나는 어떤 축복이라도 받겠습니다. 제가 교회의 축복은 갖고 있지 않지만, 하여간 어떤 축복이라도 갖게 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는 것과 같다.
2. 에서는 그와 같은 축복을 받았다. 그 축복을 잘 선용하게 하자(39, 40절).
(1) 그것은 좋은 것이었다. 에서의 자격 이사의 축복이었다. 그 축복은 다음과 같은 것을 그에게 약속했다.
[1] 그는 넉넉한 살림을 살 것이다. 즉 "땅의 기름짐과 하늘의 이슬" 을 축복했다. 계약의 축복은 없어도 가른 축복은 충분히 받을 수가 있음을 기억하자. 하나님께서는, 계약을 거절하여 계약에는 차지할 몫이 전혀 없는 많은 사람에게도, 좋은 땅과 좋은 기후를 베풀어 주신다.
[2] 그는 점차적으로 자기의 자유를 회복하리라 했다. 야곱이 다스려야만 한다면(29절), 에서는 섬기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그 에서를 위로하기 위하여 "너는 칼을 믿고 생활하리라" 고 한 것이다. 그는 섬길 것이지만, 결코 굶주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많은 작은 충돌들을 겪은 다음, 그는 매임의 멍에를 깨뜨리고 자유의 징표를 옷입을 것이다. 이 예언은 에돔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배반하고 나갔을 때에(왕하 8:20, 22)이루어졌다.
(2) 그러나 이것은 야곱의 축복에 비하면 훨씬 못한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위하여 몇 가지 보다 훌륭한 것들을 예비하고 계신 것이다.
[1] 야곱의 축복 속에는 "하늘의 이슬" 이 제일 먼저 나와 있다. 그것은 야곱이 가장 귀하게 여기고 바랬으며 또한 의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에서의 경우에는 땅의 기름짐이 제일 먼저 나와 있다. 그것이 바로 에서가 무엇보다도 우선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2] 에서는 그저 그것을 가지고 있지만, 야곱은 그것들을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직접 받는다. "하나님이 하늘의 이슬을 주시기를 원하노라" (28절). 에서는 재산을 갖는 것으로 넉넉했다. 그러나 야곱은 그것을 약속에 의하여 갖기를 원했던 것이며, 계약의 사랑으로부터 그것을 얻기를 바랐던 것이다.
[3] 야곱은 그의 형제들을 다스릴 것이었다. 따라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때때로 에돔 사람들을 지배했던 것이다. 에서도 지배권을 가진다고 했다. 즉 세력과 이익도 얻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형제를 다스리지는 못할 것이다. 우리는 유대인들이 에돔 사람들의 손에 팔려갔다든가 에돔 사람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압박했다는 사실은 찾아볼 수가 없다. 그러나 이 둘이 받은 축복 속에 있는 가장 큰 차이는, 에서의 축복 속에는 그리스도를 지시하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점이다. 또한 에서를 하나님의 교회와 계약에 관계시켜 주는 축복이 없다는 점이다. 이런 것이 없다면, 땅 위의 기름짐이다 들판에서 거두어들이는 모든 것이 그에게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이리하여 이삭은 믿음으로 그들 둘을 다 축복했으니, 그들의 운명은 그대로 되었던 것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야곱은 "입맞춤" 으로 축복을 받았으나(27절), 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주시하기도 한다.
불화하는 형제(창세기 27:41-46)
Ⅰ. 에서는 야곱이 얻은 축복 때문에 그에게 악의를 품었다(41절). 그리하여 그는 가인의 뒤를 따랐다. 가인은 자기가 드린 제사는 무가치한 것으로 여기시어 받지 않으시고, 동생의 제사만을 받으셨기 때문에, 그 아우를 죽였던 것이다.
1. 에서의 증오는 이유 없는 것이었다. 에서는 아버지가 야곱을 축복했고, 하나님께서 그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를 미워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이유가 없다. 성도의 행복은 언제나 죄인들의 질투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기억하자. 하늘이 축복하는 자들을 지옥은 저주하는 법이다.2. 그것은 또한 잔인한 증오였다. 그의 동생을 죽이는 것 이외에는 만족할 다른 길이 없었던 것이다. 박해자들이 갈망하는 것은 바로 성도들의 피이다. "내가 내 아우를 죽이리라." 어떻게 두려움 없이 그러한 말을 할 수 있었을까? 어떻게 아우라고 여전히 부르면서 살해를 맹세할 수 있단 말인가? 박해자의 분노는 어떤 속박으로도 묶어 놓을 수가 없다는 것을 명심하자! 가장 강한 끈으로도, 가장 거룩한 것으로도 묶어 놓을 수가 없는 것이다.
3. 그것은 또한 계략적인 증오였다. 그는 자기 아버지가 곧 돌아갈 것이라 예상했다. 그렇게 되면 동생과의 사이에 상속물이나 재산이 불가피하게 문제되리라고 보았다. 그리하여 그것이 자기가 복수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그의 아우를 죽이기 전에는, "칼을 믿고 생활" 할 수가 없다고 생각한다(40절). 그는 아버지가 살아 있는 동안 아버지를 비통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의도적인 살인을 연기한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도 살아 계실 어머니가 얼마나 그 일 때문에 비통하리라는 것은 염두에 두지 않았다. 다음을 명심해 두자.
(1) 인자한 부모들에게 짐이 되는 자녀들과 그 부모들을 어서 장례 지내려고 기다리는 자녀들은 악한 자식들이다.
(2) 악한 사람들이 의도하는 위해가 흔히 너무나 오랫동안 외적인 제약을 받아서, 그들의 사악한 목적이 때로는 헛되고 마는 수가 있다.
(3) 하나님의 뜻을 깨뜨려 버려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틀림없이 자신들에게 절망하고 말 것이다. 에서는 야곱과 그의 후손들이 주권을 갖고 지배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그가 결혼하기 전에 그의 생명을 빼앗아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바를 감히 누가 취소시킬 수 있겠는가? 인간은 하나님의 뜻을 어지럽힐 수는 있을지 모르나 바꾸어 놓을 수는 없는 것이다.
Ⅱ. 리브가가 그 악한 행위를 방지하기 위한 방책을 취한다.
1. 리브가는 야곱이 위험에 직면해 있다는 경고를 해 주고, 잠시 동안 물러가 스스로 안전을 구하라고 충고하였다. 어머니는 에서가 동생을 죽일 기회를 찾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 계획을 야곱에게 일러준다(42절). 이렇게 잔인하고 야만적인 생각이 한 인간에게 위로가 될 수 있으리라고 어느 누가 생각할 수 있을 것인가? 만약 에서가 자기의 계획은 마음속에만 지니고 있었더라면, 그의 어머니가 의심을 가질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죄를 짓고도 뻔뻔스런 사람들은 종종 분별력을 잃고 만다. 그리고 그들의 분노가 너무 격렬해서 감추어 두지를 못하며, 그들의 사악함은 공중의 새가 그 목소리를 전하기 때문에 성취하지 못한다. 다음과 같은 사실을 관찰해 보자.(1) 리브가가 두려워한 것은 무엇인가? 그는 "하루에 둘을 잃을까봐" 두려워한 것이다(45절). 살해당한 피살자만 잃는 것이 아니다. 살해자마저도 행정관이나 하나님의 손에 의하여 즉각 정의의 희생이 되지 않을까를 두려워한 것이다. 정의의 심판은 그녀로서는 막을 수 없었다. 복종할 수 있을 따름이었다. 또는 그렇게는 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 일 후에 야곱에게서 얻을 수 있었던 모든 기쁨과 위로를 다 빼앗길지도 모른다고 두려워했던 것이다. 어떤 의미로는 덕을 잃은 사람은 모두 친구를 잃고 만다. 악마의 자식으로밖에 볼 수 없는 자식이라면, 어떠한 즐거움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2) 리브가는 무엇을 희망했는가? 그는 만약 야곱이 한동안 눈에 띄이지 않으면, 그의 형이 그처럼 무섭게 분개한 격노가 점차 마음에서 사라지리라고 희망한 것이다. 격정의 강도는 시간적, 공간적 거리에 의하여 약화되고 사라지는 법이다. 리브가는 에서의 노가 풀어지리라고 기대한 것이다. 양보는 무서운 진노도 진정시킬 수가 있음을 기억하자. 그리고 정당한 이유를 가지고 있고 하나님께서도 한편이 되시는 사람들조차도, 자기들의 생병 보존을 위하여 다른 현명한 방법은 물론이요 이렇게 양보하는 태도로 사용해야 한다.
2. 리브가는 야곱이 그녀의 친척들이 있는 곳으로 가지 않으면 안 될 또 다른 이유를 이삭에게 강조했다. 즉 아내를 얻기 위해서도 야곱이 그리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46절). 그는 이삭을 덜 괴롭히기 위하여, 에서가 야곱의 생명을 노리고 있다는 사악한 계획을 알리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는 자기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지혜로운 다른 한 길을 택한 것이다. 이삭도 리브가와 마찬가지로 에서가 적당치 않게 헷 족속의 여인과 함께 멍에를 메고 있는 것 때문에 마음이 편하지 못했었다. 따라서 리브가는 매우 타당성 있는 이유에서, 야곱을 보다 나은 사람과 결혼시키자고 동의를 하고 있는 것이다. 한번의 실수는 또 다른 실수를 방지해 주는 경고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자. 똑같은 돌에 두 번이나 걸려 넘어지는 사람은 조심성이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리브가는 이 일에 관해 좀 지나치게 흥분하여 말한 것 같다. 그는 "야곱이 만일 헷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취하면 나의 생명이 내게 무슨 재미가 있으리까?" 하고 말하였다. 하나님께 감사한 것은 우리의 모든 위로와 축복이 한 손에만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비록 모든 것이 우리 마음에 들지도 않고, 우리의 친척들이 모든 면에서 우리에게 동의해 주지는 않더라도 우리는 생활에 필요한 일을 할 수 있고, 거기에서 오는 위로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아마도 리브가는 이삭에게 빨리 그러한 명령을 내리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나자 이러한 문제를 이야기한 것 같다. 야곱은 비록 대단히 온순하고 독실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지만, 아직도 유혹의 길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었다는 점을 주목하자. 야곱도 형의 좋지 못한 본을 따른다든가, 그 본이 만드는 함정에 빠지든가 하는 두 가지의 위험 속에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가능성이 많고 장래성이 있는 자녀들의 지혜와 결심이라고 너무 지나치게 완전하다고 생각헤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들이 위태로운 길에서 벗어나도록 늘 돌보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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