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하는 이삭(창세기 26:1-5)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Ⅰ. 하나님은 그의 섭리 속에서 이삭을 시험하셨다. 이삭은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자기와 자기의 후손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기로 허락하셨다는 사실을 믿고 의지하며 자라왔다. 그런데 이제 "그 땅에 흉년이 들었다" (1절). 약속된 땅이 먹을 식량도 제공해 주지 못할 때 이삭은 그 약속을 어떻게 생각했겠는가? 도대체 그러한 조건 밑에서, 그리고 그처럼 뒤늦게라도, 과연 그 땅은 받아들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일까? 이 모든 의문에도 불구하고 이삭은 그 계약을 여전히 굳게 믿고 있었다. 그 가나안 땅 자체가 하찮게 보이면 보일수록 그는 그 땅을 더욱 귀중하게 평가하는 법을 배운다.
1. 즉 그 땅은 자기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영원한 자비의 표시로 평가할 줄 알게 된다. 그리고2. 하늘 나라의 영원한 축복의 한 모형으로 평가하기를 배운 것이다. 어떠한 엇갈린 섭리가 있더라도 신자의 눈에는 하나님의 약속이 지니고 있는 내적인 가치는 결코 축소될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하자.
Ⅱ. 하나님께서는 시련 속에 있는 이삭을 말씀을 통해 지도해 주시었다. 이삭은 양식이 궁해서 고생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양식을 얻기 위해 어디로든지 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이 그러한 곤경에 빠졌을 때 그랬던 것처럼, 이삭도 애굽으로 갔어야만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삭은 그날로 갔다. 어느 곳이 최선의 길인가 하는 것을 틀림없이 심사숙고해 보았을 것이다. 마침내 하나님께서 은혜롭게도 그에게 나타나시어, 그로 하여금 결정을 하게 해 주시었던 것이다. 그것은 그에게 참으로 넘치는 만족이었다.
1. 하나님께서는 이삭에게 그가 있는 곳에 머물고,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이 땅에 유하라" 고 명령하시었다(5,3절). 야곱의 시절에도 기근이 있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애굽으로 내려가라 고 명령하시었다" (46:3, 4). 이삭이 흉년을 당했을 때는 하나님께서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라" 고 명령하셨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살고 있을 때 흉년이 들었을 적에는, 어떠한 길도 지시하지 않으시고 자유롭게 스스로 결정하도록 내버려두셨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역사 하심이 제각기 다른 것은(애굽은 언제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시련과 훈련의 장소였다는 것을 고려한다면)이들 세 족장들의 서로 다른 성격 때문일 것이다. 아브라함은 대단히 높은 경지에 도달한 사람이었고 하나님과 밀접한 친교를 맺고 있었다. 그리고 그에게는 모든 땅 모든 조건이 한결같이 동일한 것이었다. 이삭은 대단히 훌륭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어려운 고생을 견디는 일에 적합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를 애굽으로 보내지 않으신 것이다. 야곱은 어떤 고통도 견뎌낼 수 있는 강하고 인내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애굽으로 내려가야만 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믿음의 시련이 결국 그에게 칭찬과 영광과 존귀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벧전 1:7).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을 시험하시되 그들의 힘에 맞게 시험을 주신다.2. 하나님께서는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리라" 고 약속하셨다(3절). 하나님의 축복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우리가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수 있다. 그러므로 만약 그 축복이 우리에게 임하시기만 한다면 우리는 어디에서나 만족하게 머무를 수가 있는 것이다.
3. 하나님께서는 이삭에게 계약을 새로이 하셨다. 그것은 누누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계약이다. 즉 가나안 땅과 수많은 자손과 메시야의 약속을 반복하여 인준하신 것이다(3, 4절).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특별히 역경에 빠지거나 자기 부정을 하게 되는 경우에는, 지금까지 삶을 부지해 주었던 약속을 되새겨 보고 돌아볼 필요가 있음을 명심하자.
4. 하나님께서는 이삭에게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이 행한 순종의 훌륭한 모범을 일러주었다. 그 순종 때문에 그의 집안에 그 계약이 상속되었음을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아브라함은 내 말을 순종했다(5절). 너도 그렇게 하라. 그러면 그 약속은 또한 틀림없이 너의 것이 될 것이다," 아브라함의 순종은 여기에서 크게 칭송을 받고 있다. 이로 말미암아 그는 하나님과 사람들 모두에게서 훌륭한 평판을 얻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는 아브라함이 복종한 하나님의 뜻을 여러 가지 말로 표현하고 있다(내 말, 내 명령, 내 계명, 내 율례, 내 법도). 그것은 아브라함의 순종이 보편적이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자연의 본래적 법을 지켰고, 하나님의 예배에 관하여 계시된 율법을 순종했으며 특별히 할례의 법을 복종했고 그의 고국을 떠나야 한다든가, 이삭 자신이 충분히 기억할 수 있으리라 생각되는 자기 자식을 제사하라든가 하는(어떤 사람은 이 명령은 다른 것보다 더욱 특별하게 취급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특별한 명령들을 모두 순종했던 것이다. 부모의 순종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사람들만이 그들의 신앙 깊은 부모와 더불어 하나님의 계약의 은총과 축복을 받게 됨을 명심하자.
아내를 부인한 이삭(창세기 26:6-11)
이삭은 이제 애굽으로 갈 생각을 모두 버리고 하나님께서 보여 주신 대로 순종하여 자기가 태어난 땅, 그 땅에서 자기에게 속한 모든 사람들과 함께 정착하였다(6절). 그러나 그 곳에서 그는 유혹에 빠지고 말았다. 그것은 그의 훌륭한 아버지가 언젠가 당했던 유혹, 즉 얼떨결에 자기 아내를 자기 아내라 하지 않고 자기 누이라고 하게 된 그러한 유
혹과 꼭 같은 것이었다. 다음의 사실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Ⅰ. 그는 어떻게 범죄하였는가(7절). 그의 아내가 아리따웠으므로 그는 블레셋 사람들이 어떤 방법으로든 자기를 제거하고 그들 중의 어떤 사람이 자기 아내와 결혼을 할런지도 모른다고 공상을 한 것이다. 그래서 그의 아내를 그의 누이라고 속여야 했다. 이 훌륭하고 착한 사람들이 어째서 자기 자신은 물론 자기 아내의 덕망을 크게 훼손할 이러한 이상스러운 기만의 죄를 질 수밖에 없었는가 하는 것은 설명될 수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고 있다. 즉
1. 대단히 훌륭하고 착한 사람들이 때로는 큰 실수와 어리석은 짓을 범한다고 하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사람들로 하여금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게 하자. 그리고 이미 넘어진 사람들은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리라고 생각하고 절망하는 일이 없도록 하자.2. 우리는 우리가 인정을 한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약점과 결점까지도 모방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훌륭한 사람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면서도 때때로 그들의 탈선한 발자취마저 따라가는 일이 없도록 우리의 발걸음을 잘 지켜나가야만 하는 것이다.
Ⅱ. 그가 속이고 있다고 하는 사실이 어떻게 왕 자신에게 발각되었는가? 아비멜렉(아브라함 시대에 있었던 왕과 동일 인물이 아니다. 20장, 왜냐하면 이때는 그 때로부터 거의 100년 후이다. 아비멜렉은 로마의 황제들을 시이저라고 불렀듯이 블레셋 왕의 공통적인 호칭이었다)은 이삭이 리브가와 지내는 것이 남매간이 지내는 것보다는 더 밀접하고 즐거운 관계임을 보았다(8절). 왕은 이삭이 리브가를 "껴안고 있는" 것을 보았다. 여기에서 "껴안고" 라는 말은 이삭이라는 그의 이름과 같은 어원에서 나온 말이다. 그는 젊어서 취한 아내와 즐거워하고 있었던 것이다(잠 5:18). 그러한 관계 속에서는 서로 함께 있어 즐거울 뿐만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즐겁게 해주는 관계가 되는 것이다. 인간이 가장 허심탄회하게 즐길 수 있는 것은 자기 아내와 자기 자녀들이다. 그 외의 어떤 곳에서도 그렇게 순수하게 즐길 수는 없는 것이다. 아비멜렉은 이삭의 속임을 비난하고(9절) 그의 변명이 얼마나 천박하며, 잘못 되었더라면 얼마나 그 결과가 크게 잘못될 수도 있었다는 것을 밝혀준다(10절). 그리고 나서 블레셋 사람들에 대한 이삭의 질투와 편견이 매우 부당하고 근거가 없다는 것을 그에게 확신시키기 위하여 그의 가족은 왕의 특별한 보호 아래 두고 그에게 나 그의 아내에게 해를 가하는 사람은 사형에 처하리라고 선언한다(11절). 다음 사실을 명심하자.
1. 거짓은 다만 순간적이다, 진실은 시간의 딸이다. 즉 시간이 가면 진실은 밝혀지는 법이다.2. 한 죄는 많은 죄의 입구가 된다. 그러므로 죄의 시작을 피해야만 한다.
3.신앙을 고백한 사람들의 죄는 신앙이 없는 사람들 앞에서 그들을 부끄럽게 할 것이다.
4. 하나님은 다소의 이유는 있다고 하더라도 자기 백성에게 분노한 자들에게는,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을 해치면 생명의 위험이 온다는 것을 능히 알게 하신다(시 105:14, 15 참조).
옛 우물을 판 이삭(창세기 26:12-25)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사실이 있다.
Ⅰ. 이삭에 대한 하나님의 호의의 징표. 하나님께서는 "이삭을 축복하사" 번영케 하시었다.
1.그의 곡식이 이상하리 만큼 그 수확이 늘어났다(12절). 그는 자기 자신의 땅이 없었다. 그래서 블레셋 사람의 땅을 취하여 파종을 했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를 대단한 수확의 증가로 축복을 해주신 것이다(이것은 다른 사람의 땅을 얻어서 정직하고 근면하게 일하는 가난한 소작인들을 격려하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는 "백 배" 나 거두어 들였다. 그리고 이 서술 속에는 특별히 그 시기가 강조되어 있는 것 같다. 즉 그렇게 많은 수확을 한 때는 그 땅에 흉년이 들었던 "그 해" 였던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거의 거둬들이지 못했는데 그는 그처럼 많이 거두어들인 것이다. "나의 종들은 먹을 것이로되 너희는 주릴 것이로다" (사 65:13). "저희는 기근의 날에도 풍족하려니와" (시 37:19).2. 그의 가축도 많이 늘어났다(14절). 그리고
3. 그가 고용하고 부린 "노복이 심히 많아졌다." 재산이 더하면 먹는 자도 더해진다는 것을 기억하자(전 5:11).
Ⅱ. 이삭에 대한 블레셋 사람들의 악의의 징표. 그들은 "그를 시기하였다" (14절). 그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예증하는 것이다.
1. 사람이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더 질투를 당하고 비난과 손상을 입게 되고 이 세상의 허무함을 보여 주는 것이다. "시기 앞에야 누가 서리요?" (잠 27:4; 전 4:4 참조).2. 인간성의 타락한 상태를 보여 주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잘되는 것을 가슴 아파하는 것, 즉 내 이웃이 잘되기 때문에 내가 나빠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참으로 나쁜 본질이다.
(1) 그들은 이삭이 아버지가 판 우물을 메움으로써 그의 가족에 대한 악의를 이미 나타냈다(15절). 이것은 심술 굳고 앙심이 있어서 한 것이다. 블레셋 사람들은 이 우물들의 물을 먹여야 학 가축들이 없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그 우물들을 사용하도록 내버려두기가 싫었던 것이다. 이야말로 얼마나 부조리한 악의인가, 이것은 또한 그들이 아브라함과 맺은 우정의 약속에 반대되는, 신의를 저버린 불신의 짓이었다(21:31, 32). 어떠한 동맹도 못된 본성을 억누를 수는 없는 법이다.
(2) 그들은 이삭을 자기 나라에서 쫓아내었다(16, 17절). 그 날의 왕도 그를 질시의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한 것이다. 이삭의 집은 궁궐과 같았고, 그의 부와 시종들은 아비멜렉의 부나 시종을 능가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삭은 더 멀리 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들은 이삭과 더불어 이웃으로 힘께 있는 것에 싫증이 났다. 여호와께서 이삭을 축복하신 것을 그들이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상은 저들도 이삭 때문에 축복을 받을 수도 있다는 이유 때문에 그가 더 묵기를 간청했어야 했다. 이삭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땅 때문에 그가 그들과 맺은 약정을 주장하지도 않았고, 지금 자기가 그 땅을 점유하고 있으며 그 토지를 개량하여 많은 수확을 얻게 했다는 사실을 들어 고집하지도 않았으며, 비록 자기가 대단히 위대한 삶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힘으로 그들과 겨루려 하지도 않았다. 지극히 평화롭게 그 왕도를 떠나 아마도 그 나라 안에서 그보다 못한 곳으로 갔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권익을 위해서 다투기보다는 우리의 권리나 편의를 양보해야만 한다는 것을 기억하자. 현명하고 착한 사람은 질서와 악의의 표적이 되어 높이 앉아 있기 보다는 골짜기로 돌아간 여기 이삭과 같이 물러나려 할 것이다.
Ⅲ. 그럼에도 이삭은 여전히 자기의 일에 조금도 변화가 오거나 중단되거나 함이 없이 항구적이고 지속적이었다.
1. 그는 집안 일을 돌보면서 끊임없이 부지런하게 우물을 찾아 쓸 수 있도록 다시 팠다(18절 이하). 그는 비록 대단한 부자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이전과 같이 자기의 가축의 상태를 염려했고 여전히 그 가축의 무리들을 잘 보살폈다. 사람들은 위대하게 되었을 때에도 자기의 일을 돌보기에는 자기가 너무 거대해졌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는 그가 이전에 누리고 있던 모든 편의로부터 쫓겨나 있고, 또 그의 집안 살림을 전같이 그렇게 편리하고 유리하게 할 수는 없었지만, 그가 온 이 지방에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기로 한 것이다. 이것이 모든 지각 있는 사람이 하는 태도이다. 다음의 사실들을 살펴보자.(1) 그는 그의 아버지가 판 우물들을 다시 물이 솟아나게 하고(18절) 그의 아버지를 존경하는 마음으로 아버지가 부르던 이름대로 그 우물들을 불렀다. 진리를 탐구함에 있어서, 즉 생명수가 솟는 우물을 찾기 위해서는 비록 후세의 여러 타락된 현실들로 흐려져 있다 할지라도 이 전 세대가 발견해 놓은 것들을 이용하는 것이 참 좋은 일이라는 것을 명심하자. 옛길 곧 우리 선조들이 파놓았으나 지금은 진리의 적들이 묻어버린 그 우물을 찾도록 하자. 옛 어른들께 묻고 구하라. 그러면 그들은 네게 가르쳐 줄 것이다.
(2) 그의 종들은 새 우물을 팠다(19절). 비록 우리는 이전 세대의 빛을 이용하지 않으면 안 되지만 그것은 결코 그 빛 안에서 안주하고 한 발자국도 더 진전하지 말아야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 (단 12:4).
(3) 우물을 파면서 그는 많은 저항에 부닥쳤다(20, 21절). 진리의 우물을 판 사람들은 부정 혹은 반항과 부닥칠 것을 예상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들이 판 첫 번째 두 우물을 에석, 그리고 싯나라고 했다. 이는 다툼 그리고 대적함이란 뜻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찾아볼 수 있다.
[1] 세상적인 일의 본성이 과연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모두가 노하게 하는 것, 싸움의 기회일 뿐이다.
[2] 이 세상에서 있는 가장 조용하고 평화적인 사람조차도 때로 이러한 일을 당한다. 즉 그들은 싸움을 피하려고 노력하지만 때로는 싸움에 개입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시 120:7). 이러한 의미에서 예레미야는 "다툼의 사람" 이었고(렘 15:10), 그리스도 자신도 비록 그가 평화의 왕이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사람이었다.
[3] 얻으려는 싸움을 하지 않고도 많은 물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은총을 받은 일인가 하는 것이다. 이러한 자비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공통의 은사일수록 우리는 보다 더 이 사실에 대해 감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4] 마침내 그는 평화롭게 살겠다고 하는 자기의 생활 원칙을 지키어, 싸우는 것보다는 그 싸움을 피하고 평화를 미워하는 사람들과 함께 살기가 마음이 내키지 않아서 평화스러운 정착지로 이사를 갔다(시 120:6). 그는 승리보다는 평온을 택했던 것이다. "이삭이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다투지 아니하였으므로" (22절), 평화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지금 평화롭지 못하다 할지라도 조만간 평화를 발견하게 될 것임을 기억하자. 또한 평화롭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평화롭게 되지 않을 수가 없다. 옳든 그르든 온 세상에 대해서 자기 주장만 하던 그의 형 이스마엘과 비교해 볼 때 이삭은 얼마나 다른 사람이었는가!(16:12). 우리는 누구를 본 받아야 할 것인가. 이 우물을 그들은 르호봇 곧 넓음이라고 불렀다. 장소가 넉넉하다는 뜻이다. 이전의 두 우물을 통해서는 이 세상이 다툼과 대적함밖에 없음을 보았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군집해 있으면 인간은 번영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 우물은 하늘 나라가 어떤 곳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하늘 나라는 넓음과 평화이다. 충분한 장소가 있는 것이다. 그 곳에는 많은 거할 곳이 있기 때문이다.
2. 그는 자기의 신앙을 끊임없이 지키고 하나님과도 계속 친교를 유지하고 있었다.
(1) 자비스럽게도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나타나시었다(24절). 블레셋 사람들이 그를 내쫓아, 여기 저기로 옮겨 다닐 수밖에 없도록 하고 끊임없이 그를 괴롭히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찾아오시어 하나님께서 그를 사랑하고 계시다는 확신을 새롭게 해 주신 것이다. 비록 인간은 거짓되고 불친절하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신실하시고 은혜가 충만하시다는 사실을 통하여 우리 스스로 위로를 받을 수가 있다는 것을 명심하자.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인간에 대하여 지니고 있었던 모든 기대가 무너지고 절망에 빠졌을 때 스스로를 나타내신다. 이삭은 브엘세바로 올라갔다(23절). 아마 그는 정처 없이 떠돌아다녀야 하는 자기 처지 때문에 괴로워했는지도 모른다. 그는 한곳에 오래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 모든 숫한 생각에 시달리면서 지치고 편하지 못한 역겨운 마음으로 브렐세바에 올라온 바로 그 날 밤 하나님께서는 그의 영혼을 즐겁게 해 주시기 위하여 위로와 축복을 내리신 것이다. 이삭은 블레셋 사람들이 자기가 그 곳에서 평안히 쉬도록 해 주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리라" 하고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말씀하고 계시다. 하나님의 축복 속에서 전전하는 사람은 그가 어디로 가든지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확신할 수가 있는 것이다.
(2) 그는 조금도 하나님께 대한 의무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 곳에 단을 쌓아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기 때문이다(25절). 다음을 명심하자.
[1] 어디를 가든지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함께 지니고 가지 않으면 안 된다. 짐작컨대 이삭이 제단을 쌓고 자기의 예배를 드리는 일이 블레셋 사람들에게 불쾌감을 주었고 그에게 더 많은 괴로움을 주도록 자극했을 것이다. 그는 의무 이행으로 인하여 어떤 악의를 당하든지 계속해서 의무를 지켰다
[2]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위로와 격려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하나님과 우리와의 교제가 지속될 수 있는 봉헌을 할 수 있도록 우리 자신들을 자극하고 깨우치는 것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삭과 아비멜렉의 계약(창세기 26:26-33)
여기에서 우리는 행복한 평화와 화해의 결과를 가져오게 된 이삭과 블레셋 사람의 논의를 읽어볼 수 있다.
Ⅰ.아비멜렉은 존경하는 표시로 이삭을 친선 방문을 했다(26절).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로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 (잠 16:7). 모보든 왕의 마음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그 왕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왕들을 백성들이 사랑하도록 해 주실 수가 있는 것이다.
Ⅱ. 이삭은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이러한 방문을 해준 아비멜렉의 진실성을 타진하고 있다(27절). 서로 우정을 맺고 상통하기 위해서는 비둘기의 순결뿐만 아니라 뱀의 지혜도 필요하다는 것을 명심하자. 우리가 받은 권리 침해에 대한 강한 인식을 중대시하는 것과 우리에 게 부당한 짓을 한 자들과의 교제를 조심하는 것은 분명히 온유와 사랑의 율법을 범하는 것이 아니다.
Ⅲ.아비멜렉은 이번 이삭의 방문 인사에서 자기의 성실성을 고백하고 진지하게 그의 우정을 요구한다(28,29절),어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이는 이삭이 점점 부자가 되자 어느 땐가는 그가 받은 손상을 복수할지도 모르니까 그것을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아비멜렉이 이삭과 더불어 동맹을 맺기를 강요한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아비멜렉은 순수하게 사랑의 원리에 입각하여 화해하고 지낼 것을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1. 그는 이삭에 대한 최선의 태도를 취하고 있다. 이삭은 블레셋 사람들이 자기를 "미워했으며 내쫓았음" 을 불평하고 있다. 글러나 아비멜렉은 아니라고 말한다. 우리는 "너로 평안히 가게 하였음이니라." 그들은 이삭을 그가 소유하고 있던 땅에서 쫓아냈다. 그러나 그들은 이삭으로 하여금 자기의 재산과 모든 가재를 끌고 떠나도록 허용했다. 우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손상을 줄일 필요가 있다. 손상이 더 커지면 불화를 더하게 하고 넓힐 뿐이다.2. 아비멜렉은 하나님께서 이삭을 사랑하시는 표징을 인정하고, 이를 근거로 하여 이삭과 맹약하기를바라고 있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고, 너는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니라." 그것은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다. "이제는 네게 입힌 모든 해를 간과해 달라. 하나님께서 네가 받은 손해를 풍족하게 채워 주시지 않았는가." 하나님의 축복과 사랑을 받은 사람은 자기들을 미워하는 사람들을 용서해 주어야 하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말자. 왜냐하면 최악의 적이라 할지라도 참으로 그에게 손상을 입힐 수는 없기 때문이다. 또는 이런 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나님께서 당신과 함께 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당신과 우정을 맺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계약을 맺고 있고 교제를 하고 있는 사람과 약속을 맺고 우정 있는 교제를 하는 것은 참 좋은 일임을 알자(요일 1:3; 슥 8:23)
3. 아바멜렉은 그들이 지금 그에게 하고 있는 말이 충분히 생각한 결과임을 확신시키고 있다. "우리와 너 사이에 맹세를 세워 너와 계약을 맺으리라 말하였노라." 아무리 몇 사람의 아비멜렉이 심술 굳고 질투심 많은 신하들이 다른 짓을 하더라도 아비멜렉과 그와 함께 온 국무총리는 간곡한 우정 외에는 어떤 것도 기대하지 말도록 자기의 조상들에게 하신 경고를 (20:7) 전승을 통해 받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리하여 그는 이삭을 경외하게 되었다. 이삭은 아브라함과 마찬가지로 하늘의 큰 은총을 받는 자임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Ⅳ. 이삭은 아비멜렉과 그의 일행들을 환대하고 그와 더불어 우호 동맹을 맺었다(30, 31절). 여기에서 우리는 그 선한 이삭이 얼마나 관대한가를 살펴보자.
1. 주는 데 있어서 그는 인색하지 않고 너그러웠다. 그는 "그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고" 환영하였다.2. 용서해 주는 데 있어서 그는 너그러웠다. 그는 블레셋 사람들이 자기에게 행한 불친절을 기억하면서 그것을 역설하지 않았다. 아무런 부담 없이 홀가분하게 그들과 우정의 약속을 맺고, 스스로 그들에게 어떠한 손상도 입히지 않으리라 맹세를 한 것이다. 신앙은 우리로 하여금 이웃과 친절하게 살 것을, 즉 "모든 사람과 더불어 평화롭게 살 것을 가르쳐 준다는 것을 기억하자.
Ⅴ. 하나님의 섭리는 이삭이 한 행위에 대하여 미소를 지으셨다. 그가 아비멜렉과 이 계약을 맺은 바로 그 날 그의 종들은 그들이 찾아낸 우물에 대한 기쁜 소식을 가져왔다(32, 33절). 그는 우정의 약속이 깨지지 않게 하기 위하여 블레셋 사람들이 부당하게 뺏아간 우물을 돌려달라고 하지도 않고 손해를 보면서도 잠자코 앉아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같은 사실의 보상으로 즉각 그는 새 우물로 풍요하게 된 것이다. 그는 이 우물을 브엘세바 즉 명약의 우물이라 불렀다. 그것이 그날 이루어진 일에 잘 어울렸기 때문이다.
불효가 된 결혼(창세기 26:34-35)
1. 에서의 어리석은 결혼 어떤 사람들은 그가 두 아내와 동시에 결혼했기 때문에 어리석은 결혼을 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아마 그는 "간음한 자" (히 12:16)라고 불리우는지도 모른다. 혹은 아브라함의 축복의 대상이 아닌 이방인이요, 노아의 저주를 받은 가나안 사람과 결혼했기 때문에 어리석은 결혼을 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래서 그는 "속되다" 고 불리웠는지도 모른다. 그는 하나님의 축복을 바란 것도 아니요, 하나님의 저주를 두려워한 것도 아님을 알 수 있다.2. 이와 같은 그의 결혼은 착하고 온유한 부모들의 마음에 슬픔과 괴로움을 주었다.
(1) 그가 부모와 아무런 상의도 없이, 적어도 부모들의 충고나 동의도 없이 결혼을 했으므로 부모들을 슬프게 한 것이다. 자기들의 일을 처리하는 데 있어서 부모를 경멸하거나 거스르는 자녀들은 누구의 발자취를 따르는 것인가를 깨달으라.
(2) 그가 아무런 신앙도 없다. 헷 족속의 말고 결혼한 것이 부모들을 슬프게 했다. 이삭은 자기 아버지가 자기에게 결코 가나안 사람과 결혼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시던 염려를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3) 생각건대 에서가 결혼한 그 아내들이 이삭과 리브가에게 불경하게 행동한 것 같다. 인자한 부모의 마음을 슬프게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전혀 기대할 수가 없는 것이다.
Previous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