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이한 명령(창세기 22:1-2)
아브라함은 처음에 믿음으로 자기 고향을 떠났고, 하나님과의 친교를 나누면서 오랜 정착 생활을 해왔다. 이제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이 오랜 안락한 생활 속에서도, 처음에 그가 지녔던 강하고 뜨거웠고 승리에 찬 신앙을 여전히 지니고 있는가를 시험해 보고자 하셨다. 처음에 고향을 떠날 때, 아브라함은 자기 아버지보다도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있음을 나타내 보여 주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가 자기 아들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있음을 보여 준 것이다. 다음과 같은 사실을 살펴보자.
Ⅰ. 아브라함이 시험을 받은 때는 언제였는가?(1절). "2일 후에" 라고 했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모든 고난과 어려움을 다 거치고 이긴 후이다. 아마 아브라함은 이제야 말로 모은 폭풍의 거센 바람이 잠들기 시작했다고 느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까지 그가 겪었던 어떤 것보다도 더 가혹한 시련에 부닥치게 된 것이다. 이미 많은 시련을 겪었다 해서 앞으로는 어떤 시련도 없을 거라든가, 또 그런 시련이 와도 걱정이 없을 거라고 안심할 수는 없다는 것을 명심하자. 우리는 아직 갑옷을 벗은 것이 아니다(왕상 20:11; 시 30:6, 7 참조).
Ⅱ. 누가 그 시험을 주었는가? 하나님께서 그를 시험하셨다. 그러나 사탄처럼 그를 죄에 빠지도록 하기 위해서는 아니었다(만약 아브라함이 이삭을 희생 제물로 바쳤다 하더라도, 그것이 아브라함의 범죄일 수는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이 그를 옳다고 인정해 주실 것이고, 그를 변호해 주셨을 것이다). 오히려 그가 하나님의 은총을 감사하는 생활에 얼마나 가득차 있는가를 발견함으로써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하기 위한" 것이다(벧전 1:7).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욥도 시험하셨다. 그리하여 욥은 하나의 선한 사람일뿐만 아니라 위대한 사람이었다는 것이 드러나게 된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셨다" 는 말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들어 올리셨다" 고 읽기도 한다. 그것은 어떤 학자가 학업에 정진해서 보다 높은 경지에 이르면 그가 드리워 올려지는 것과 같다. 굳센 믿음도 때로는 어려운 시련과 고통스런 일을 당하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말자.
Ⅲ. 그 시험의 내용은 무엇인가? 이전에도 그러했던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나타나셔서 아브라함아 하시고 그의 이름을 부르셨다. 이 이름은 하나님께서 약속의 증표로 주신 것이었다. 아브라함은 충직한 종과 같이 즉각적으로 응답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내 주여, 주의 종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렵니까? 아마 아브라함은 15장, 1절, 71장 1절에서와 같은, 어떤 새로운 약속을 기대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아연 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것은, 간단히 말하면, "아브라함아, 가서 네 아들을 죽여라"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명령은 그 시험을 더욱 고통스러운 것으로 만들어 주는 그런 비통스런 말로써 전해졌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아브라함은 틀림없이 말씀 한 마디 한 마디를 주의 깊게 경청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한 말씀 한 말씀은 뼈를 에이는 칼날과 같이 그의 가슴에 와 닿았을 것이다. 이 시련은 견딜 수 없이 괴로운 말이 들어 있었으므로 더 냉혹하게 되었다. 아브라함에게 괴로움을 주시는 것이 전능하신 하나님께 어떤 즐거움을 준다는 것일까? 결코 그런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신앙을 시험해 보실 필요를 느끼셨을 때 하나님은 분명히 의도적으로 그 시련을 가혹하게 하신 것만은 사실이다(2절).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살펴보자.
1. 사람을 희생 제물로 바치라 하셨다.(1) "네 소나 네 양이 아니라 네 아들을 드리라." 이삭을 대속할 수 있는 다른 제물이 있다면, 아브라함은 수천 마리의 소나 양도 기꺼이 바쳤을 것이다. "아니다. 내가, 네 집에서 수소나 네 우리에서 염소를 취하지 아니하리라(시 50:9). 네 종도 안 되고, 네 집을 다스리는 청지기도 안 된다. 그런 사람들을 네 아들을 대신해서 바쳐서는 안 된다. 나는 네 아들을 취하리라." 입다는 하나님께 말씀드린 맹세를 지키기 위하여 자기 딸을 번제로 드렸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자기 가문을 이을 아들을 바쳐야 하는 것이다. "여호와여! 양아들을 드리게 하옵소서" 하고 그는 간구하고 싶었을 것이다.
(2) 그러나 하나님은 "아니다," "네 외아들, 사라에게서 낳은 네 외아들을 드리라" 고 했다. 최근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을 쫓아내고 마음이 비감해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이삭만이 남았는데 그도 끝내 떠나가야만 하는가?
(3) 그렇다 "이삭, 그를 바쳐라. 이름이 뜻하는 대로 너의 즐거움인 바로 그 아들을 바치란 말이다" (17:19). "이스마엘을 되불러서 그를 바치려고" 하지 말고. 그래서는 안 된다. 희생 제물은 반드시 이삭이어야만 한다. "그러나 여호와여, 저는 이삭을 사랑합니다." 그는 내 자신의 영혼과 다름 없습니다. 이스마엘도 이제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삭마저 데려가려고 하십니까? 이 모든 것이 저의 의도와는 너무나 다릅니다.
(4) 그렇다 "네가 사랑하는 바로 그 아들" 이다. 그러므로 이 시련은 하나님께 대한 아브라함의 사랑이 어떠한지를 알아보는 시험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사랑하는 아들에 관한 그의 태도 속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따라서 그가 사랑하는 자가 문제될 수밖에 없었다. 히브리 원어에는 이 사실이 더욱 강조되어 표현되고 있다. "자 이제 네 아들, 네 외아들, 곧 네가 가장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바쳐라" 고 되어 있다. 이렇게 읽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은 이 모든 사정들을 묵살하고 만다.
2. 제사 장소는 "모리아 땅에서" 라고 했다. 거기까지 가려면 사흘 동안 여행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그는 사흘 동안 아들을 희생 제물로 바치는 일에 대하여 심사숙고할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기로 했다면 그것은 강제로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 마음속에서부터 우러나와 스스로 하는 일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그것을 합당하고 또 명예로운 것으로 칭송 받을 수 있는 예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3. 제사 방법은 "그를 번제로 드리라" 고 했다. 아브라함은 자기의 아들을 단순히 죽일 뿐만 아니라 하나의 희생 제물은 경건하게 법도에 어긋나지 않게 모든 의식을 갖추어, 침착하고 엄숙한 마음으로, 마치 늘 양이나 소로 번제를 드리듯 그렇게 죽여야만 하였다.
기이한 복종(창세기 22:3-10)
여기에서 우리는 이 가혹한 명령에 대한 아브라함의 복종을 보게 된다. "아브라함은 시험받을 때에 이삭을 드렸다" (히 11:17). 다음과 같은 사실을 살펴보기로 하자.
Ⅰ. 이 복종의 행위에서 그가 겪어야 했던 난관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명령에 반대할 수밖에 없는 조건들이 하나 둘이 아니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1. 엄중한 처벌을 경고하여 살인을 금지한 기성 율법(9:5, 6)과 이 명령은 직접적으로 모순되는 것 같이 보였다. 이제 불변하시는 하나님이 스스로 모순을 범할 수 있겠는가? 번제를 위하여 양이나 소를 훔치는 일도 미워하시는 하나님(사 61:8)께서 번제를 위하여 살인을 하는 것을 기뻐하실 수 있단 말인가?2. 더구나 자식에 대한 사랑은 극히 자연스러운 것인데, 하나님의 명령이 이것과 도대체 어떻게 조화 될 수 있는 것일까? 자식을 죽이는 것은 단순히 살인이라기보다는 최악의 살인이다. 아브라함이 미친 사람이 아니라면 이러한 명령에 복종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이 사람을 희생 제물은 이삭밖에 없고, 그 제물을 드려야 하는 사람은 아브라함밖에 없단 말인가? 신실한 자의 아버지는 모든 아버지들 중에서 가장 잔인한 아버지여야 하는 것인가?
3. 하나님은 이에 대하여 아무런 이유도 설명하지 않으셨다. 이스마엘을 쫓아 낼 때는 아브라함이 만족할 만한 정당한 이유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 이곳에서는, 이삭이 죽어야 하고 아브라함은 이삭을 죽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그 누구도 그 까닭과 무엇을 위해서 그래야 하는지를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이삭이 진리를 위한 순교자의 죽음을 죽는다든지, 보다 귀한 다른 생명을 속량하기 위하여 자기 생명을 바치는 것이라든지 한다면, 그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혹은 이삭이 우상 숭배자나(신 13:8, 9), 패역한 아들(신 21:18, 019)의 경우와 같이, 하나님이나 부모를 거역한 죄인으로서 죽는다면, 그의 죽음을 정의를 위한 희생으로 여겨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도 아니었다. 이삭은 공순하고 순종하며 소망스러운 아들인 것이다. "여호와여 그의 피흘림이 어떤 유익을 가져올 것입니까?"
4. 이 같은 하나님의 명령은 그의 약속과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는가? "이삭은 네 씨라 불리워질 것이라" 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만약 이 풍요한 약속이 가득찬 싹이 이처럼 일찍 꺾어져 버린다면, 그 씨에게서 무엇이 날 수 있다는 것일까?
5. 사단의 얼굴을 어떻게 다시 대할 수 있을 것인가? 이삭의 피가 뿌려져 온통 피로 얼룩진 옷을 입고, 어떻게 무슨 얼굴을 하고 아내 사라와 식구들에게 돌아갈 수 있단 말인가?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 남편이로다(출 4:25, 26 에서처럼)" 하고 사라는 말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 일은 아브라함과 하나님께 대한 사라의 사랑은 영원히 단절시키고 말게 될 것이다.
6. 애굽 사람들은 무어라고 말한 것이며, 그 때 그 땅에서 정주하여 살고 있던 가나안 사람들과 브리스 사람들은 무어라고 말할 것인가? 아브라함에게나 그의 제단에 이 일은 영원한 비난거리가 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의 은총의 뜻이라면, 어떠한 일이라도 내가 맞으리라." 위에 열거한 여러 이견들, 그리고 이와 비슷한 많은 반대되는 생각들이 마음속에 일어났을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것이 틀림없이 하나님의 명령이요 어떤 환경이 아니며, 이 사실은 모든 반대 조건에 해답이 되기에 충분하다고 확신했던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은 논박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순종되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자.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을 혈육과 의논해서는 안 된다(갈 1:15, 16).정중하고 흔들리지 않는 지조를 가지고 그 명령에 순종해야만 하는 것이다.
Ⅱ.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복종한 그 하나 하나를 살펴보면 그 복종의 행위를 함에 있어서 그가 얼마나 심사숙고했으며, 신앙에 따라 행동했는가 하는 것을 볼 수가 있다.
1. 그는 아침 일찍 일어났다(3절). 명령은 밤중에 환상 속에서 주어졌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튿날 그는 아침에 명령을 그대로 실행하기로 결심을 한 것이다. 그는 조금도 지연시키지 않았고, 이의를 제기하지도 않았으며, 혼자서 궁리해 보는 시간도 갖지 않았다. 그 명령은 단호한 것이었기 때문에 논쟁의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충심으로 행하는 자는 신속히 실행한다는 것을 명심하자. 지체하고 나면, 시간을 잃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마음도 강퍅해지는 법이다.2. 아브라함은 번제를 위한 준비를 차근차근히 했다. 마치 자신이 기브온 사람, 즉 천민이었던 것처럼, 자기 손으로 번제를 위한 나무를 쪼갰던 것 같다. 제사를 준비해 놓고도 나무를 구하지 못할까 염려가 되어서였다. 영적인 제사도 이처럼 준비가 필요한 것이다.
3. 사라에게는 이 일에 대하여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던 것이 거의 확실하다. 사라가 막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아브라함은 사라에게 알리지 않고 여행을 한 것이다.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외부의 방해를 이겨야 하듯이, 우리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많은 방해물도 극복해야 한다.
4.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이 제사를 위하여 어떤 징표를 보여 주시면서 약속해주신 그 지정된 장소를 찾기 위하여 자기 주위를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그 징표는 그 장소에 하나님의 영광, 곧 어쩌면 멀리서도 볼 수 있는, 하늘로부터 땅에 의의는 어떤 불기둥이 나타나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한 장소를 지시 받고 난, 아브라함은 이렇게 말했다(5절). "우리는 불빛이 보이는 저리로 가서 경배하리라."
5. 그는 자기의 종들을 얼마쯤 거리가 떨어진 곳에 남겨 놓았다(5절). 그래서 종들이 참견해 들어와, 이 기이한 봉헌에 어떤 장애를 일으키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삭은 틀림없이 온 집안의 귀염둥이였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고통을 겪으실 때, 다른 제자들은 모두 동산 어귀에 머물게 하고, 오직 세 제자만을 데리고 동산에 올라 가셨다. 하나님께 예배하러 갈 때에는, 예배를 방해할지도 모르는 모든 근심과 걱정을 떨쳐 버리고, 그 모든 것을 언덕 아래에 모두 버려두고 올라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명심하자. 그래야만 우리는 마음이 산만해지지 않고 주님께 드리는 예배에 참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요, 또한 우리의 의무임을 명심해야 한다.
6. 아브라함은 이삭에게 나뭇단을 짊어지고 가게 하였다. 먼저 사소한 일을 시킴으로써 이삭의 복종을 시험한 것이다. 또한 이 사실은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가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예시하는 것이기도 하다(요 19:17). 아브라함 자신은 자기가 지금 뭣하러 가고 있는지 알면서도, 불변하고 강직한 결심을 하고 날카로운 칼을 가지고 갔다(6절). 하나님을 위하여는 어떠한 봉헌이나 어떠한 고통도 즐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이겠다고 결심한 사람들은, 혈육에 고난을 주는 사소한 사정은 무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명심하자.
7. 아브라함은 마치 늘 하던 제사를 지내러 가는 것처럼 조금도 당황하거나 혼란을 일으키지 않고 번제를 드리러 가고 있다는 사실을 이삭에게 이야기해 준다(7, 8절)
(1) 함께 가면서, 이삭은 아버지에게 참으로 애처로운 물음을 던졌다. "내 아버지여!" 라고 이삭은 아버지를 불렀다. 이 말은 아브라함의 마음을 에이고 녹이는 것이었다. 아브라함의 칼이 이삭의 심장을 찌를 수 있었던 것보다 더 깊이 아브라함의 가슴에 그 말이 박혔는지도 모른다. 아브라함은 아마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아니 적어도 이러한 생각을 했을 것이다. "나를 네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이제 나는 네 살인자가 될 것이다. 아버지라면야, 아버지로서의 자애를 송두리째 잃어버리는, 이러한 야만적 행위를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는 경탄할 만큼 침착했고 안색도 변하지 않았다. 그는 조용히 자기 아들의 물음을 기다렸다. "보십시오, 불과 나무눈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당은 어디 있나이까?" 이것이 이삭의 물음이었다. 이삭이 얼마나 제사의 법도와 관습을 잘 알고 있었는가를 보라. 이것은 그가 가정에서 종교 교육을 얼마나 잘 받았는가를 보여 주는 것이다.
[1] 이 물음은 아브라함에게 괴로움을 주는 시련의 질문이었다. 아브라함은 이삭 자신이 그 어린양이라고 생각하면서, 어찌 견딜 수가 있었겠는가? 그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아직 감히 이삭에게 이 사실을 이야기하지 못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이란(아무것도) 꿰뚫을 수 없는 갑옷임을 아시기 때문에, "무죄한 자의 시험 당함" 을 비웃으실 것이라(욥 9:23).
[2] 이것은 또한 우리 모두에게 교훈이 되는 질문이다. 즉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하러 갈 때에는, 우리가 모든 준비를 다 갖추었는지, 특별히 번제를 위한 양을 준비하였는지를 심사 숙고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보라, 불 곧 성령의 도우심과 하나님의 열납은 준비되었다. 나무도 준비되었다. 곧 우리들의 사랑을 불태울 수 있는 제도적 규례들이다. 사실 성령이 없으면, 이 제도적 규례들은 불 없는 나무토막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성령은 그 규례들을 통하여 역사 하시는 것이다. "모든 것이 이제 다 준비되었다." 그러나 양은 어디 있는가? 예배 드릴 때 우리의 마음은 어디 있는가? 번제의 제물로 하나님께 드릴 준비가 되어 있는가?
(2)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답변한 것은 매우 지혜로운 것이었다.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양은 하나님이 친히 하실 것이다."
[1] 이 말은 아브라함의 복종심을 표현한 것이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제 바치라고 지적하신 그 양을 드리지 않으면 안된다." 이리하여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해야 한다는 일반적인 법칙을 이삭에게 제시하면서, 자기도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그 법칙을 자기에게 적용시켰던 것이다.
[2] 또는 자기의 신앙을 표현한 말이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다른 제물을 준비하시리라고 하는 것을 뜻하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결과적으로 그런 의미가 되어버렸다. 즉 이삭 대신 제물이 준비되어 있었던 것이다. 첫째로, 이와 마찬가지로 위대한 속죄 제물이신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것이었다. 천지간에 아무도 번제로 드릴 양을 찾지 못하고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친히 속죄양을 마련해 놓으신 것이다(시 89:20).둘째로, 우리가 드리는 모든 감사 제물도 역시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것이다. 그 마음을 준비시켜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시 10:17).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은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제물이다(시 51:17).
8. 마음속에 일어나는 많은 생각들을 누르고 아브라함은 자기가 이미 결심한 대로 침착하게 이 제사에 착수한다(9, 10절). 그의 한 걸음 한 걸음은 괴롭고 무거운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자발적인 거룩한 마음을 지니고 이일을 진행하는 것이다. 무거운 가슴을 안은 채 그는 이 운명의 장소에 마침내 도달했다. 그는 제단을 쌓았다(추측컨대, 그것은 아브라함이 이제껏 지상에서 쌓았던 제단 중에 가장 슬픈 제단이었을 것이다. 그는 수많은 제단을 이제까지 쌓아왔던 것이다.) 그리고 이삭을 불사를 나무를 가지런히 벌여 놓는다. 그리고 이제 그는 놀라운 이야기를 아들에게 했다. "이삭아, 네가 바로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양이다." 이삭의 표정이 어떠했는지는 나타나 있지 않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그랬던 것처럼 그도 기꺼이 이 사실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이삭이 여기에 거역했다든가, 자기 생명을 살려 달라고 애원했든가, 또 도망을 치려 했거나, 늙은 아버지와 싸움을 하는 따위의 어떤 반항을 했다는 사실은 여기에서 찾아볼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 이 일이 이루어질 것을 바라셨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이일을 행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삭은 하나님께와 아버지에게 복종하는 것을 이미 배워 왔다. 이 때 아브라함은 자기 자신이 신앙에 의하여 위로를 얻을 수 있었던 바로 그 동일한 희망을 가지고 이삭을 위로했을 것이다. 그러나 희생 제물은 묶어야 했다. 때가 다 차서 드려진, 대제물(그리스도)이 묶여야 했듯이, 이삭도 묶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어진 아브라함이 이삭의 무죄한 손을 묶을 때 그 마음이 어떠했겠는가! 아마 이삭의 손은 아브라함에게 축복을 내려달라고 종종 뻗혔던 그 손이고, 자기에게 매달려 껴안던 그 손이었을 것이지만, 이제는 이미 사랑과 의무의 줄로 더욱 단단히 묶여 있는 손인 것이다! 그러나 이삭을 묶지 않아서는 안 된다. 그를 묶고, 아브라함은 그를 들어 제단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제물의 머리 위로 그의 손을 번쩍 치켜올린다. 이 때, 아브라함은 비오듯 눈물을 쏟으며, 이삭에게 마지막 작별의 입맞춤을 했을 것으로 우리는 생각할 것이다. 이때 사라를 대신하여, 죽어가는 자식에게 또 한 번 입을 맞추었을 것이다. 그리고 나서, 아브라함은 한 아버지로서의 정을 단호히 잊어버렸다. 그리고 희생의 제사를 집행하는 두렵고 엄숙한 사람이 되었다. 이제 굳은 마음으로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고 칼을 잡았다. 그리고 이삭의 목을 한 칼에 베기 위하여 팔을 뻗쳤다. 오, 하늘이여! 바로 이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도다. 오, 땅이여! 기적이 일어났도다! 여기에 하나님과 천사들과 모든 인간들이 바라볼 만한 믿음과 복종의 행위가 나타나 있다. 아브라함의 사랑이요, 사라의 웃음이며, 교회의 희망이요, 약속의 상속자인 자가 이제 그의 아버지 손에 의하여 피를 흘리고 죽임을 당하기 위하여 누워 있는 것이다. 또한 그 아버지는 이일을 하는 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삭을 바치는 이 아브라함의 복종은 다음과 같은 사실의 생생한 표현이다.
(1) 우리를 위하여 자기의 독생자를 하나의 희생 제물로 내어주어, 고통을 받게 하고 죽게 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가 상함을 받는 것이 "주님의 기뻐하시는" 뜻이기 때문이다(사 53:10; 슥 13:7 을 참조). 아브라함은 의무감과 감사함 때문에 이삭을 내어놓을 수밖에 없었고, 또 그는 이삭을 자기의 한 친구에게 내어 준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의 독생자를 내놓을 어떤 의무도 없으시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적이었던 까닭이다.
(2) 이것은 또한 받은 사랑에 보답하여 우리가 하나님께 돌려야 할 의무를 밟고 따라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위하여 우리의 모든 것을 버리도록 명령하신다. 비록 오른 팔이나 오른 눈, 또는 이삭까지도, 그것이 죄라면 우리는 모두 버려야 하는 것이다. 내 마음속을 다스리셔야 할 주인이신 그리스도와 경쟁이 되거나, 상대가 되는 것은 모두 떠나가게 해야 하는 것이다(눅 14:26). 그리고 우리는 즐거운 마음으로 그것들을 버려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그의 목소리이신 섭리를 통하여 이삭과 헤어지도록 명령하시는 때가 종종 있다. 그 때 우리는 즐거운 마음으로 거룩한 뜻을 받아들이고 복종하지 않으면 안 된다(삼상 3:18).
구출된 이삭(창세기 22:11-14)
이제까지 이 제사의 이야기는 무척 우울한 것이었고, 가장 비극적인 결말을 향해 줄달음쳐 오는 것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하늘이 갑자기 개이면서 찬란한 햇빛이 비쳐온다. 밝고 즐거운 장면이 전개되는 것이다. 상처를 주고 내던져 버렸던 그 손이 여기에서는 그 상처를 치료해 주시고 그를 잡아 일으켜 주시는 것이다. "여호와의 사자" 그는 곧 하나님 자신이시며 영원하신 말씀이시오, 계약의 천사이며, 위대한 구속주와 위로자가 되실 분이다. 그분이 이 일에 참견해 드시어 이 시험이 결과에 행복을 가져다주신 것이다.
Ⅰ. 이삭이 구출되었다(11, 12절). 이삭을 드리라는 명령은 다만 시험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 시험 결과 아브라함은 자기가 이삭을 사랑하는 것보다 참으로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있음이 밝혀졌다. 명령의 목적이 달성된 것이다. 따라서 그 명령은 하나님의 변함없는 뜻에 아무런 비난을 돌리지 않은 채 취소되었던 것이다.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러므로 다음 사실에 주목하자.
1. 피조물에서 얻는 우리의 위안은 우리가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포기할 때에 가장 잘 지속되어지는 것이다.2.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도와주시고 구원해 주시는 그 때는, 그들이 극한적인 상황에 빠져 있을 바로 그 때이다. 위험이 절박하면 할수록, 사형 집행의 시각이 더 가까워지면 질수록, 그 구원이야말로 더욱 놀랍고 감격스럽게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Ⅱ.아브라함은 다만 그 시험에 합격했을 뿐 아니라 칭찬도 받았다. 그는 그가 올바른 사람이라고 하는 영광스런 증언을 듣는다. "내가 이제야 제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물론 하나님께서는 이 사실을 전부터 알고 계셨다. 그러나 이제 아브라함은 그 사실에 대한 가장 잊을 수 없는 증거를 보여드린 것이다. 아브라함은 더 이상 어떤 증거를 보일 필요가 없어졌다. 그가 행한 바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그의 신앙적 관심을 증거하기에 충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다음 사실을 주목하자.
1. 하나님께서 그의 바라시는 섭리가 있어서 우리가 예배드리는 성실한 의도의 성취를 방해하심으로써, 그 예배가 완료되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우리가 행하려는 의도와 정직한 노력은 언제나 자비롭게 받아 주신다.2.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있다는 최선의 증거는, 우리에게 가장 귀한 것을 바치어 하나님을 섬기고 존귀케 하려는 우리의 자발적인 마음을 보이는 것이다.
Ⅲ. 이삭 대신 다른 제물이 준비되어 있다(13절). 이제 제단도 마련되었고 나무도 잘 벌여 놓았다. 그러나 뭔가 바쳐야 할 제물이 있지 않으면 안 되었다.
1. 이삭을 구해주신 데 대한 감사를 드리기 위하여 하나님께 제사를 지내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단이 마련되어있는 지금 빠르면 빠를수록 더 좋은 일이었다.2. "번제할 어린양은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시리라" 고 한 아브라함의 말이 훌륭하게 이루어진 셈이다. 하나님은 스스로 세우신 그의 백성들의 기대를 결코 좌절시키지 않으실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신앙에 따라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주께서 명하시면, 그것은 이루어질 것이옵니다.
3. 이 사실은 약속된 메시야, 곧 축복된 씨와 관련해서 살펴야 한다.
(1) 그리스도는 이삭을 대신한 이 수양처럼 우리 대신 희생을 당하셨다. 그의 죽으심을 통하여 우리는 죄에서 해방된 것이다. 주여! 여기 내가 있나이다(라고 그는 말씀하셨다). 이들로 하여금 저들의 길을 가게 하옵소서.
(2) 비록 그 축복된 씨가 이미 약속이 되었고, 이제 이삭에의하여 예시된 바 있지만, 그 제사만은 세상의 끝날에까지 보류되어야 하였다. 그리하여 그 동안에는 이 수양처럼 짐승을 제물로 드리는 제사를 드려야 했다. 이수양의 제물은 저 위대한 제사에 의해서 어느 날엔가 이루어질 제사에 대한 기대를 보증해 주는 한 징표였던 것이다. 또 그 희생을 바치던 장소인 이 모리아 산 위에 나중에 성전이 세워졌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대하 3:1). 또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 갈보리산이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고 하는 사실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Ⅳ. 그 장소에 새로운 이름이 붙여졌다. 이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세상의 끝날까지 모든 믿는 사람들을 격려하고 복종함으로서 즐거운 마음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게 하기 위하여서였다. 여호와이레 곧 여호와께서 준비하시리라는 이름이다(14절). "하나님께서 친히 그 양을 준비하시리라" 고 한 그의 말을 비유해서 붙인 이름일 것이다(8절). 아브라함은 비록 뛰어난 중재자이기도 하였어도 이일은 결코 그의 고안으로 된 것이거나 기도의 응답으로 된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순전히 여호와께서 하신 일이었다. 앞으로 오는 영원한 세대를 위하여 이 사실을 기록해 두자.
1. "여호와는 언제나 살펴보고 계신다." 질고와 환란 속에 있는 그의 백성들을 언제나 살펴보고 계시기 때문에, 그는 그 백성이 가장 어려움을 겪는 결정적 시기에는, 때를 맞추어 구원병을 데리고 우리에게 오실 것이다.2. 하나님은 언제나 스스로를 우리에게 "나타내 주신다." 특별히 "산에서" 나타나셨다. 다시 말하면, 그의 백성들이 더 할 수 없는 당혹 속에 빠져 있을 때, 스스로를 나타내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스스로를 나타내 보이실 뿐만 아니라 그의 백성을 구원해 주심으로써 그의 지혜와 능력과 인자하심을 돋보이게 해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살펴보시고 보면 우리는 이 사실을 "하나님께서 육신으로 나타내셨다" 는 것과 연관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확약된 아브라함의 축복(창세기 22:15-19)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복종을 즐겁게 받아 주시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아브라함의 복종이 보상을, 그것도 그가 그 자리를 떠나기 전에 넘치도록 보상을 받았다는 사실을 보게 된다. 아마 그가 제물로 바친 수양이 아직도 타고 있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이 은혜로운 말씀을 그에게 하시고, 그와 맺은 계약을 새로이 확인해 주신 것이다. 모든 계약은 제사에 의하여 맺어진다. 그러므로 이번 계약도 이삭을 드리는 상징적인 제사와 수양의 제사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 계약을 아브라함에게 확인하시면서, 이제까지 그가 받았던 어떤 축복에서도 표현되지 않았던 지극히 큰 은총을 베풀려는 것을 말씀해 주셨다. 비상(非常)한 영예와 위로를 상 받게 된다는 것을 기억하자. 그리고 그 약속이 담고 있는 은총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가장 진실하고 가치 있는 보상으로 여기지 않으련 안 된다고 하는 사실도 잊지 말자. 다음 사실을 살펴보기로 하자.
1.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복종이 계약의 원인이 되었다고 즐겨 말씀하셨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찬사를 붙여 그 사실을 말씀하고 계신다. "네가 이같이 행하며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으므로..." 즉(16절) 하나님께서는 이 사실을 특별히 강조하고 계신다. 그리고 그 사실을 복종하였음이니라. 복종이 제사보다 나은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그 계약에 상당하는 원인이라는 것은 아니다. 다만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돌렸던 그 영광 위에 은혜를 베푸사 이러한 존귀를 씌워 주었을 따름이다.2. 이제 하나님은 그 약속을 맹세로써 확증하셨다. 그것은 이미 이전에 서로 이야기되었고 날인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여기에서 맹세된 것이다.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했노라." 하나님께는 가리켜 맹세할 자기보다 더 큰 자가 없으시기 때문이다(히 6:13).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바울 사도가 히브리어 6장 17절에서 표현한 것처럼 스스로를 가리켜 맹세함으로써 당신 자신은 보증을 하산 것이다. (정중히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하셨으며 생명에 근거하여(나는 살아 있음으로) 시작하신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변치 못할 사실들, 그 중에서도 하나님께서는 거짓말을 하실 수 없다는 사실에 의하여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이 큰 위로를 받을 수가 있게 된 것이다. 우리가 믿음을 실천할 때 하나님께서도 그 믿음을 격려해 주신다는 것을 잊지 말자.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활용하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도 그 약속을 재가해 주실 것이다.
3. 이 곳에서 새로워진 구체적인 약속은 자손이 크게 번성하리라는 것이다. "내가 네게 큰복을 주고 자기 씨로 크게 성(盛)하게 하리라" (17절). 어떠한 것이라도 하나님을 위하여 즐겁게 바치는 사람에게는 말도 할 수 없는 이익으로 그것을 보충해 주신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아브라함은 단 하나의 아들밖에는 없었다. 그런데 하나님께 복종하기 위하여 그 한 아들을 버리려 했던 것이다. "좋다, 내가 너를 수천, 수만의 아들로 보상해 주리라" 하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이다.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얼마나 의연한 모습으로 살고 있는가를 역사를 통해서 살펴 보라! 얼마나 많은 얼마나 저명한 그의 후손들이 오늘날까지 아브라함이 자기들의 조상이라는 이 자랑스러운 긍지를 지니고 살고 있는가! 아브라함은 이 세상에서는 수천 배의 보상을 받은 것이다(마 19:29).
4. 의심할 바 없이, 그 약속은 메시야와 복음의 은총을 가리키는 것이다. 사가랴가 언급한 바와 같이, 이것은 바로 우리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맹세하신 약속인 것이다(눅 1:73 이하). 여기에 그러한 약속이 나타나 있는 것을 살펴보자.
(1) 그것은 성령을 주시겠다는 커다란 축복의 약속이다. "내가 네게 큰복을 주고" 하는 말씀은 가장 좋은 축복 즉 성령을 선물로 주시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성령의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방 사람들에게까지 미치게 된, 아브라함의 축복이다(갈 3:14).
(2) 교회의 증가를 약속한 것이다. 곧 아브라함의 영적 후손들인 믿는 자들이 하늘의 별처럼 무수하게 많아지리라는 약속이다.
(3) 영적 승리를 약속한 것이다. "너의 씨가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고 했다. 미든 자들은 신앙에 의하여 세상을 이기고 모든 암흑의 세력을 극복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정복자 이상의 사람들이다. "우리를 원수의 손에서 건져 주시고 두려움 없이 주를 섬기세 하시며" (눅 1:74)라고 한 스가랴의 말은 아마 그 맹세의 이러한 부분에 대한 언급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든 약속 중의 면류관이 되는 약속은 이 마지막 약속이다.
(4) 즉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을 약속하신 것이다. "네 씨로 말미암아," 즉 네 후손이 될 어떤 특정한 한 사람을 통하여(다시 말하면 바울 사도가 파악한 대로 어느 한 사람을 통하여; 갈 3:16) "세상의 모은 나라들이 복을 받을 것이니라." 또는 이사야 65장 16절에 있는 말씀처럼, 그가 "그들을 축복하리라" 고 약속하신 것이다. 그 안에서 원하기만 한다면 모든 사람들은 행복해 질 수 있는 것이다. 그에게 속한 모든 사람 또한 그렇게 행복할 것이며, 그들 스스로가 자신들을 그렇게 느끼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는 이 세상의 가장 큰 축복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자기의 아들을 희생시킬 준비를 했던 바로 그 일이 있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그의 독생자를 희생의 제물로 주실 것을 약속하신 것이다.
리브가의 혈통(창세기 22:20-24)
이 기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다.
1.비록 아브라함은 자기 자신의 가정이 특별한 특권을 가지고있고, 하나님과의 계약을 맺고 있으며, 약속의 성취에 따르는 축복을 지니고 있는 고귀한 집안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자기 친척들을 경멸하거나 업신여기지 않고, 그 친척의 집안이 번성하는 것을 듣고 즐거워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다.2. 또한 다음에 나오는 이삭과 리브가 이 가문의 딸와의 결혼 아야기를 위한 예비 기록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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