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content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21:1

이삭의 출생(창세기 21:1-8)

오랫동안 고대하던 일이 드디어 이루어졌다. 자식을 낳으리라는 약속은 예정된 시기가 되어, 이제 마침내 이루어졌다. 하나님의 약속에는 결코 거짓이 없다. 구약의 인물 중에서 이삭처럼 그렇게 큰 기대 가운데서 태어난 인물을 거의 찾아 볼 수가 없다. 그것은 이삭이 어떤 위대한 일을 성취할 것이기 때문에서가 아니라, 그가 그리스도의 한 모형이 되어야 했다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서이다. 이삭은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오래 전부터 약속해 왔고, 경건한 사람들이 오랫동안 대망해 온 그 시(자손)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이삭의 탄생을 통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살펴 볼 수가 있다.

Ⅰ. 이삭을 잉태하고 출산하리라고 하여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었다는 사실이다(2절). 하나님의 모든 섭리란, 그가 하신 말씀과 비교하고 또한 그가 말씀하시고 이르신 바대로 그 모든 섭리 가운데서 어떻게 역사하고 계시는가 하는 것을 살펴 볼 때, 가장 훌륭하고도 밝히 드러난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1. 이삭은 약속에 따라서 태어났다. 여호와는 말씀하신 바 그대로 사라에게 긍휼을 베푸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한 마디로 땅에 떨어지지 아니한다는 것을 기억하자.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것에 대하여 신실하시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의 믿음에 따라다니고 지지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삭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기한이 되어" 태어났다(2절). 하나님은 시간을 엄수한다는 점을 명심하자. 비록 하나님께서 약소하신 긍휼은 우리가 정한 때에 이루어지지는 않지만,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분명히 이루어지며, 또한 때가 가장 알맞을 때이다.

2. 이삭은 약속에 의하여 태어났다. "사라 자신도 믿음으로 잉태하는 힘을 얻었다" 하였다(히 11:11).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약속에 의하여 그같은 힘을 주셨다. 이삭이 태어난 것은 일반 섭리의 능력이 아니라, 특별 약속의 권능에 의한 것이었다. 이는 말하자면 제2의(자연의) 원인에 사형 선고가 내린 것이다. 즉 아브라함도 늙었고 사라도 늙었으니, 이 두 사람은 시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바로 그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발생한 것이다. 참된 신도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힘입어 인간 본성 이상의 일들을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을 명심하자. "이로써 그들의 신의 성품에 참여하기 때문이다" (벧후 1:4).

Ⅱ. 이삭에 관하여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계율을 아브라함은 복종 하였다.

1.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그 아들의 이름을 지었다(3절). 하나님께서는 기념으로 이삭 곧 웃음이라는 뜻의 이름을 짓도록 아브라함에게 지시하셨다. 자식에게 이름을 지어 주어야 할 책임을 지고 있는 아브라함은, 보다 화려한 뜻을 지니고 있는 다른 이름을 미리 생각하고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그 이름을 자식에게 주었다. 인간이 창안해 낸 화려는 언제나 하나님의 제도의 주권과 평이성을 따르는 것이 합당하다는 것을 기억하자. 그러나 그런 이름을 지어주게 된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1) 아브라함이 아들에 대한 약속을 들었을 때, 기쁨에 넘쳐 웃었기 때문이다(창 17:17). 위로의 태양이 한 영혼 위에 떠올랐다면, 그 날의 새벽을 우리가 얼마나 반가이 맞이했으며, 그 약속에 접한 우리가 얼마나 기뻐했었던가를 회상해 보는 것이 좋다는 것을 알아두자.

(2) 그러나 사라가 그 약속의 말씀을 들었을 때에는 그 말씀이 선뜻 믿어지지 않아 웃어 버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자비가 없어 우리가 절망에 빠지고 있을 때에 하나님의 자비가 우리에게 주어진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를 바라고 추구하면서 하나님의 권능과 약속을 불신하는 죄를 범했던 것을 기억하고 통죄하며 부끄러워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자.

(3) 이삭 자신도 후일에 이스라엘에게 웃음을 당하였기 때문이다(9절). 아마도 그의 이름 자체가 이미 그 같은 일을 각오하라고 말해 주었는지도 모른다. 하나님의 총애를 받는 사람들이 흔히 세상의 웃음거리가 된다는 사실을 주목해 두어야 한다.

(4) 이삭이 아브라함의 아들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가 상속받을 약속은 모든 시대의 모든 성도들의 즐거움이며, 게다가 그 약속은 언제나 저들의 마음에 가득하게 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2. 아브라함은 이삭에게 할례를 행하였다(4절). 이삭에게는 계약이 주어져 있으므로, 이제 그에게 그 계약의 인(印)이 찍힌 것이다. 그것이 비록 피를 흘리는 규례였고, 이삭은 지극히 사랑하는 자식이었지만, 그 규례는 생략될 수 없었다. 8일만에라는 날짜를 어겨서도 안 된다. 하나님은 조금도 어김없이 정해진 때에 그 약속을 실현 하셨다. 그러므로 아브라함도 시간을 맞추어 하나님의 명령을 이행했다.

Ⅲ. 하나님의 이러한 긍휼은 사라에게 감명을 주었다.

1. 즉 그 자비는 사라로 하여금 기쁨으로 충만케 하였다(6절). 이르기를 "하나님께서 나를 웃게 하셨다. 나로 하여금 기뻐할 수 있는 명분과 동시에 마음까지도 주셨다." 우리 주님의 어머니도 그러했었다(눅 1:46, 47). 다음과 같은 사실을 마음에 새겨 두자.

(1)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에게 자비를 베푸시사, 기쁨으로 하나님의 일과 사업을 행할 수 있도록 용기 주신다. 우리가 무엇 때문에 기뻐하든 간에, 우리의 기쁨이 "바보의 웃음" 이 아닌 한, 그 웃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한다.

(2) 하나님의 자비가 오랫동안 지연되었다가 다시 베풀어지는 때에는 더욱 기쁨으로 맞아들이게 된다.

(3) 어떠한 자비로움이든 간에, 우리와 함께 즐거워하는 우리의 친구들에게도 그 자비의 위로를 받게 한다, "듣는 자마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라고 했다(6절). 웃음은 전염되는 것이기 때문이다(눅 1:58 참조). 하나님의 권능과 인자하심이 나타나는 이러한 실례를 통하여 다른 모든 사람들도 함께 즐거워하게 되고, 아울러 하나님을 신뢰하려는 마음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시 119:74 참조).

2. 그것은 사라로 하여금 놀라움으로 가득차게 하였다(7절). 여기에서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관찰할 수가 있다.

(1) 사라는 왜 그처럼 놀랍게 생각했는가? "사라가 자식들을 젖먹이겠다" 는 것, 즉 그녀가 애기를 가질 뿐만 아니라, 그 나이에 아기에게 젖을 줄 수 있을 만큼 튼튼하고 강건할 수 있다는 것이 놀라왔다. 어머니들은 할 수만 있다면, 자기의 자녀들을 양육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자. 사라는 좋은 집안의 부인이었고, 나이도 많았다. 사라가 아기를 키운다는 것은 자신에게나 아기에게, 또 사라는 틀림없이 자기 가족 중에서 유모를 선택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라는 아기를 양육할 자기의 의무를 다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와 같이 "선을 행하는 착한 부인들" 은 모두 사라의 딸이라고 불리운다(벧전 3:5, 6; 애 4:3 참조).

(2) 사라는 자기의 놀라움을 어떻게 표현했는가? "누가 그것을 말하였으리요." 그것은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만약 하나님 외의 어느 누가 그런 말을 했더라면, 우리는 믿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과 계약을 맺은 백성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은총은, 이처럼 그의 백성들이나 그 밖의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 기대를 모두 능가하는 것임을 명심하자. 아무런 보상도 받을 가치가 없는 사람들에게, 아니 오히려 벌을 받아야 할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그처럼 많은 것으로 채워 주신다는 사실을 누가 감히 상상이라도 할 수 있을 것인가?(엡 3:20; 삼하 7:18, 19 참조). 누가 감히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그의 아들을 보내시어 우리를 성별하시기 위하여 그의 영을 보내시며, 그의 천사를 보내시어 우리에게 시중들게 하리라고 말할 수 있었겠는가? 그처럼 엄청난 죄가 용서를 받고, 그처럼 초라한 예배가 받아들여지고, 또한 그처럼 혹은 아무 값어치도 없는 벌레와 같은 자들이 거룩하시고 위대하신 하나님과 계약을 맺으며 친교를 맺을 수 있으리라고 누가 감히 말할 수 있었겠는가?

Ⅳ. 이삭의 유년기에 대한 간략한 언급이 나와 있다. "아이가 자랐다" 고 했다(8절). 비록 극히 당연한 일이기는 하지만, 약속의 자녀들도 성장하는 자녀들이라는 사실을 넌지시 알리기 위하여, 이곳에서는 특별한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다(눅 1:80; 2:40 참조). 하나님의 섭리로 태어난 사람들은 하나님이 자라도록 해주시는 능력을 힘입어 더욱 더욱 자라게 되는 것이다(골 2:19). 젖을 먹지 않아도 될 만큼 또 이제는 간단한 음식도 먹을 수 있을 만큼 자랐을 때, 사라는 이삭의 젖을 떼었다(히 5:13, 14 참조). 그 때에, 아브라함은 그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감사하여 친구들과 이웃들을 초대하여 큰 잔치를 베풀었다. 아브라함은 이삭이 태어난 날에 잔치를 베풀지를 않았다. 만약 그랬더라면 사라에게는 큰 번거로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할례를 받은 날 베풀지도 않았다. 그랬더라면, 할례 의식을 너무나 어수선하게 해 버렸을 것이다. 젖을 떼는 날 잔치를 베푼 것은, 이 아들을 자라게 하시고 유아기의 여러 어려움을 지나도록 그들을 보호해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이야말로, 하나님의 섭리가 보여 주신 보호와 사랑의 가장 뚜렷한 예증이기 때문이었다. 이 사랑을 찬양하여 감사해야 한다(시 22:9; 호 10:1 참조).

 

21:2 없음.

 

21:3 없음.

 

21:4 없음.

 

21:5 없음.

 

21:6 없음.

 

21:7 없음.

 

21:8 없음.

 

21:9

쫓겨나야 하는 이스마엘(창세기 21:9-13)

이스마엘을 쫓아내는 문제가 숙고된 후 결행되어지는 이야기이다.

Ⅰ. 이스마엘이 자기의 어린 동생 이삭에게 행한 무례한 짓이 그 일의 원인이 되었다. 이삭이 젖을 떼자 아브라함이 기쁨으로 잔치를 베푼 그 날에 어떤 무례한 짓을 했다고 혹자는 생각한다. 유대인들에 의하면 젖은 3살 혹은 5살에 떼었다고 한다. 사라가 이삭이 모욕을 당하고 있는 것을 직접 목격했다. "사라가 본즉 애굽 여인의 소생이 이삭을 희롱하는지라" (9절). 이삭을 조롱했다고 하는 사실은 분명하다.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하였다" 는 말이 이것을 말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갈 4:2). 여기에서 이스마엘은 "애굽인의 소생" (아들)이라고 불리워지고 있다. 어떤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듯이, 애굽인들에 의한 아브라함의 자녀들에의 400년간의 박해는 이 때부터 시작된 것이며, 게서부터 연한이 계산되기 때문이다(15:13). 사라는 이스마엘이 이삭과 "함께 놀고 있는 것" 을 보았다고 70인 역에는 씌어 있다. 함께 놀면서 그는 "이삭을 희롱" 한 것이다. 이스마엘은 이삭보다 14살 위다. 어린아이들이 함께 놀 때면 나이 더 많은 아이가 나이가 적은 아이를 따뜻하게 보살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이삭을 희롱했다고 하는 사실을 통하여, 우리는 어떤 면에서도 도저히 적수가 될 수 없는 어린아이를 모욕한, 이스마엘의 비열하고 천박한 성품을 찾아볼 수가 있다. 다음 사실을 유념하자.

1. 하나님은 어린아이들이 놀면서 말하고 행하는 바를 일일이 주시하고 계신다. 그리하여 혹 부모들은 알지 못한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어린아이들의 잘못된 언행을 모두 헤아리고 계신 것이다.

2. 조롱한다는 것은 큰 죄이다. 하나님을 매우 진노케 하는 일이다.

3. 뱀의 자손들과 여인의 자손들 사이에는 뿌리깊은 적의를 지니고 있다. 약속의 자녀들은 조롱 받으리라는 것을 예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바로 거룩하게 살려는 사람이 마음으로 예상하고 미리 다짐하지 않으면 안 되는 박해인 것이다.

4. 먼저 하나님께로부터 거절을 당하고 쫓겨나야 하는 외에는 아무도 쫓겨나거나 하나님께 거부되지 않았다. 아브라함의 집안의 불안이었고, 슬픔이었으며 거침돌이 되기까지는 줄곧 그 가정에 함께 있었다.

Ⅱ. 사라는 "이 여종을 내어쫓으라" 고 제안했다(10절). 어떻게 보면 이 말은 사라가 불이나서 한 말 같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후의 기록에 보면, 예언의 영에 의하여 말씀된 것처럼 인용되고 있다(갈 4:30). 이것은 비록 보이는 교회 안에 자기의 자리와 이름을 두고 있지만 위선적이고 탐욕스런 모든 사람들에게 선언된 말씀이기도한 것이다. 육을 따라 낳고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 율법 아래 머물러 있으면서 복음의 약속을 거절하는 사람들, 이 모든 사람들은 분명히 쫓겨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은 특별히 믿지 않는 유대인들을 지시해 주고 있는 것이다. 즉 그들은 복종하지 않기 때문에 교회에서 파문을 당하고, 모든 공권(公權)을 박탈당한 자들이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진노하시어 저들을 쫓아내게 된 것은, 복음의 교회 곧 하나님의 이삭이 아직 어렸을 때 그들이 희롱하고 박해했기 때문이다(살전 2:16).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자녀들과 친밀한 교제를 가지면서도, 하나님의 자녀들의 유업에는 참여하지 못할 자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명심하자. 이스마엘도 이삭의 놀이 친구, 학교 친구는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상속의 친구는 아니었다.

Ⅲ. 아브라함은 사라의 제의에 반대하였다. "아브라함이 그 일로 깊이 근심이 되었더라" 고 했다(11절).

1. 그는 이스마엘이 그와 같은 분노를 일으켰다는 사실이 슬펐다. 부모들이 자녀들을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자녀들은 자기들이 저지른 과오나 특별히 자기들간에 일어난 다툼에 대하여는 부모들이 더욱 깊이 슬퍼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2. 또한 사라가 그러한 처벌을 주장했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슬펐다. 이스마엘을 교화시키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는가? 그를 쫓아내는 것보다 더 가벼운 징벌의 방법은 하나도 없는 것일까? 바로 잡아지지 않는 자녀들에게 어쩔 수 없이 가해지는 최후 수단이라 할지라도, 어버이에게는 더 할 수 없는 큰 슬픔이라는 것을 명심하자.

Ⅳ. 이스마엘 추방은 하나님께서 결정하셨다(12, 13절). 사라를 불쾌하게 하기도 싫고, 이스마엘을 내어쫓기도 싫은 아브라함이 마음에 심히 갈등을 일으켰을 것은 쉽사리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당신의 뜻이 무엇인가를 밝히셨고, 그러나 결국 아브라함도 마음이 흡족하게 된 것이다. 선한 사람은 사리가 분명하지 못한 경우에는, 자기의 의무, 곧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행하기를 바라시는 일을 알려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원치 않는다. 그리하여 자기의 의무와 하나님의 뜻이 분명해지면, 그는 평안을 얻으며, 또 그것으로 평안을 가져야 한다. 아브라함으로 하며금 이와 같은 것을 분명히 깨닫게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이 사건의 참된 의미를 밝혀 주셨다.

1. 이스마엘을 내어쫓는 것은 이삭이 계약의 권리와 특권을 누리게 하기 위하여는 불가피한 일이라는 것이다.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칭할 것임이니라" (12절). 그리스도와 교회는 모두 이삭의 계통을 이은 아브라함의 후손이다. 이러한 사실은 이삭에게 주어진 약속의 상속이다. 그래서 후에 바울 사도는 아브라함의 자손 모두가 아브라함의 상속자는 아님을 보여 주기 위하여, 이 기적을 인용하였다(롬 9:7). 약속에 의해서 태어난 아들 이삭이 약속된 자손의 아버지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이스마엘을 쫓아내라. 아주 멀리 보내어, 그로 하여금 이삭의 삶의 태도를 타락시키지 못하게 하고, 그의 권리를 침해하지 못하도록 하라" 고 한 것이다. 이삭의 적수를 쫓아 보내는 것이 그의 안전이 될 것이다. 아브라함의 계약의 씨-자손들-은 아예 처음부터 계약이 맺어지지 않은 사람들과 뒤섞이지 않고, 구별된 특별한 백성이지 않으면 안 된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이스마엘도 이삭과 분리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홀로 부름을" 받았듯이, 이삭도 그러해야만 하였다(사 51:2 참조). 사라는 이 사실에 대하여 깊은 생각을 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요한 11:51).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라가 이야기한 것을 들으시고 이 사실을 후일에 대한 예언이 되게 하신 것이다(27:10).

2. 이스마엘을 쫓아낸 일이 곧 이스마엘의 파멸은 아니었다(13절). 이스마엘도 "네 씨니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고 하셨다. 그러므로 그것이 이스마엘의 영원한 파멸을 뜻하는 것이 아니었다고 확신할 수 있다. 하나님의 계약의 외적 섭리 밖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에서 축출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주제넘은 짓이다. 그러한 영예를 찾지 못한 사람들도 구원을 받을 수가 있다. 비록 그가 교회로부터는 쫓겨났다 할지라도, "세상에서 쫓겨난 것" 은 아니었다. "내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고 했다. 다음 사실에 주목하자.

(1) 민족은 하나님께서 형성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민족들을 세우시고 형성하시고 조정하신다.

(2) 하나님의 섭리가 주는 축복은 충만히 받으나, 그의 계약이 주는 축복에 대해서는 이방인인 자들이 많이 있다.

(3) 세상의 자녀들은 현세적인 일에 대하여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관계로 인하여 하나님의 자녀들보다 더 잘 살아가는 수도 있다.

 

21:10 없음.

 

21:11 없음.

 

21:12 없음.

 

21:13 없음.

 

21:14

방황하는 하갈과 이스마엘(창세기 21:14-21)

Ⅰ. 여종과 그의 아들이 아브라함의 가정으로부터 쫓겨난 사실이 서술되어 있다(14절). 이 문제에 관하여 내린 하나님의 명령을 아브라함은 즉시 순종하였다. "아침에 일찍이" 실행했다. 아브라함이 밤에 환상 속에서 이 명령을 받고 나서 즉각적으로 거행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것은 또한 유순한 복종이었다. 그 명령은 자기의 판단, 아니 적어도 자기가 하고 싶은 것과는 정반대의 것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자, 그는 조금도 반대하지 않고,조용히 마치 묵종의 훈련을 쌓은 사람처럼 명령하신 바를 그대로 행한 것이다. 그들을 보낼 때 아무도 딸려 보내지 않았고, 걸어가게 하고, 음식도 충분히 마련해 주지 않은 것도 아마 하나님께서 그에게 지시하신 대로 순종한 것일 것이다. 만약 하갈과 이스마엘이 아브라함의 가정에서 살면서 그 품행이 방정했었다면, 그곳에 계속 머물러 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교만과 무례 때문에 스스로 쫓겨났다. 그러므로 그 추방은 정당한 것이었다. 특권을 남용하면, 그 특권을 빼앗긴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아브라함의 가정과 같은 이상적인 곳에서 살면서도 자기네들이 얼마나 잘 살고 있는가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은 마땅히 거기서 쫓겨나야 한다. 그 보금자리를 잃음으로써 비로소 그들은 긍휼의 진가를 알게 될 것이다.

Ⅱ. 하갈과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이 정착하도록 일러 준 장소로 가는 길을 잃고 광야에서 방황한다.

1. 그곳에서 그들은 심한 어려움에 빠졌다. 양식도 다 떨어지고 이스마엘은 병이 들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집에 살면서는 늘 배불리 먹고 살이 쪘으나 이제 생활의 여유가 없어지자 곧 기진맥진하고 쇠약하게 된 것이다, 하갈은 슬프고, 괴로움에 지쳐버렸다. 이제 하갈은 그가 늘 버렸고 또 가벼이 여겼던 주인의 식탁에서 떨어진 부스러기들을 아쉬워했다. 그녀는 노예 정신의 굴레에 묶여 있는 자처럼, 구제책이 없다고 절망하면서 "자식의 죽음" (15, 16절) 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마엘이 태어나기 전에 이미 그녀에게, 그는 장차 어른이 되어 위대한 인물이 되리라고 말씀하신 바도 있는 터였다. 우리는 하나님의 현재 섭리가 과거에 주신 하나님의 약속과 모순된다고 느낄 때, 흔히 그 약속을 잊어버리기가 쉽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떤 감각에 의해서만 살아가기 때문이다.

2. 이 어려운 처지에서, 하나님은 그들을 구하시기 위하여 자비스럽게 나타나시었다. 하나님은 "아이의 소리" 를 들으신 것이다(17절). 성경에서는 이스마엘이 무엇을 말했는지 한 마디도 찾아 볼 수 없다. 그러나 그의 한숨과 탄식과 그의 비참한 처지가 자비로우신 분의 귓전에 커다란 부르짖음이 되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하갈을 위로하기 위하여 천사를 보내시었다. 하갈이 광야에서 하나님의 위로를 만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이와 비슷한 지난 번 경우에 하나님께서 친절하게 찾아오셨던 일은 참으로 감사하게 생각했었다(16:13). 그러므로 이제 하나님은, 다시 한 번 가장 적절한 시기에 구원병을 보내시어 하갈을 찾아오신 것이다.

(1) 천사는 하나님께서 하갈의 어려움을 알고 계신다는 것을 확신하도록 해 주었다. "하나님이 저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나니라." 이스마엘이 광야에 있었는데도 그의 소리를 들으신 것이다.(무릇 우리가 어떤 곳에 있든지, 거기에는 하늘로 향해 열려 있는 길이 있는 법이다). 그러므로 "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 (18절). 우리가 어려움에 빠져 있을 때,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도와주시기 위해 기다리고 계시지만, 그것이 우리 자신을 구하려는 우리 스스로의 노력을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더욱 촉구하는 것임을 명심하자.

(2) 천사는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 즉 그가 "큰 민족" 이 될 것이라는 약속을 반복하면서, 그렇기 때문에 하갈은 그의 아들을 살리기 위하여 서두르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한다. 우리는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의 자녀들이나 젊은이들에게 계획하고 계시고, 그들을 통하여 이루려고 하는 놀라운 섭리를 생각하면서 그들을 돌보는 수고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자.

(3) 천사는 하갈이 당하고 있는 필요를 충족시켜 준다(19절). "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밝히시니," (그의 눈은 슬픔 때문에 충혈 되어 있었고, 눈물 때문에 앞이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샘물을 보았다." 많은 사람들이 슬픔과 비탄 속에서 세월을 보내면서 위로를 갈망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그처럼 슬픈 것은 위로를 얻지 못해서가 아니라, 위로를 받을 수 있는 충분한 사유들이 자기네들의 생활 속에 이미 깃들어 있음을 알지 못하기 때문임을 명심하자. 그들 주변에는 은총의 계약으로 이미 주어진 샘물이 있다. 그런데도 그들은 그것을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눈을 열어 자기들의 상처가 완전히 치료된 모습을 보게 하시기까지는, 누구도 그 샘물의 혜택을 못 받는다(요 16:6, 7). 바울 사도는 하갈과 이스마엘에 관한 일들은 비유(avllaorou,mena: 갈 4:24)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 이야기들은 비유로 설명되어야 한다. 이것을 비유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은 어리석음을 밝혀 낼 수 있다.

[1] 즉 믿지 않는 유대인들처럼, 법률이나 그 법률의 육적인 규례에서 의를 얻고자 할 뿐, 그리스도에 의하여 성취된 약속에 의해서 얻으려 하지 않는 사람들의 어리석음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스스로를 결핍과 절망의 광야로 몰아내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들의 즐거움은 곧 소멸될 것이고, 하나님께서 특별히 죄를 사하시어 그들의 즐거움은 곧 소멸될 것이고, 하나님께서 특별히 죄를 사하시어 그들을 구원해 주시고 그들의 잘못을 깨우쳐 주시지 않는다면, 그들은 파멸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2] 이 세상과 아 세상적인 사물에서 만족과 행복을 얻고자하는 사람들의 어리석음이다. 그들은 하나님과의 계약과 사귐을 통하여 얻는 기쁨을 저버리고 이 세상에 있는 자기 몫을 취하면서 한 병의 물, 넉넉치 못한 초라한 음식을 얻기 위해 허덕인다. 그나마도 얻고 나면 곧 바닥이 난다. 그리하여 그들은 만족을 찾아 끊임없이 방랑하게 되며, 마침내 어떤 것에도 만족하지 못하여 주저앉게 되는 것이다.

Ⅲ. 이스마엘은 드디어 바란이라고 하는 거친 광야에서 정착하였다(20, 21절). 곧 거치른 장소였으니, 거칠은 사람에게는 가장 알맞은 장소였다. 이스마엘은 정말로 그렇게 거치른 사람이었다(6:12). 육을 따라 난 사람들은 이 세상의 광야에 집착한다. 그러나 약속의 자녀들은 하늘의 가나안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에, 그곳에 도달할때 까지는 이 세상에서 안주할 수가 없다.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사실에 주목하자.

1. 이스마엘은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다는 몇 가지 증거를 받았다. "하나님이 그 아이와 함께 계셨다." 이스마엘의 현세적인 번영은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2. 그의 직업은 활쏘는 사람이라고 했다. 이것은 그의 궁술이 뛰어났고, 그는 사냥으로 생계를 영위했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 버림받은 데서도 노련한 사냥군이었다.

3. 그는 자기 어머니의 친척 중에서 아내를 택하였다. 그의 어머니 하갈은 애굽 사람 중에서 한 여인을 택하여, 자기 아들의 아내를 삼게 했던 것이다. 이스마엘은 활 솜씨가 훌륭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결혼을 함에 있어서 자기 어머니의 충고와 동의를 따르지 않는다면, 그것은 표적을 잘 겨냥하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 것이다.

 

21:15 없음.

 

21:16 없음.

 

21:17 없음.

 

21:18 없음.

 

21:19 없음.

 

21:20 없음.

 

21:21 없음.

 

21:22

아비멜렉과 아브라함의 계약(창세기 21:22-32)

이 곳에는 아비멜렉과 아브라함 사이에 이루어진 계약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이 사실에서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이름을 창대케(유명하게)하시겠다" 고 한 약속(12:2)이 성취된 것을 알 수 있다. 가나안 사람이나 브리스 사람에게는 아브라함이 비록 낯선 사람이고 땅을 제 마음대로 소유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할지라도, 그의 우정만은 귀하게 인정을 받았고 존중을 받았다.

Ⅰ. 아비멜렉과 그의 국무총리이며 군대의 장군인 비골에 의하여 동맹이 제안된 것이다.

1. 그와 같은 제안을 하게 된 이유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편에서 계시다는 사실 때문이었다(22절).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 우리는 이 사실을 무시할 수 없노라. 다음 사실을 명심하자.

(1)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그의 섭리 속에서 자기 백성들에게 선한 은총의 표징을 보여 주시어, 그 이웃들로 하여금 그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도록 하신다(시 86:17).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는 모든 사업이 눈에 띄게 번창하고, 그들의 하는 일들이 현저히 성공함으로써, 그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계시다는 고백이 나올 수밖에 없다.

(2) 하나님의 은총을 받는 자와 우호 관계를 맺고 하늘과 관계 있는 자와 관계를 맺는 것은 선한 일이다.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하심을 들었나니, 우리가 너희와 함께 가려 하노라" (슥 8:23). 하나님과 친교를 맺고 있는 사람들과 사귐을 갖는 것은 자신에게도 유익한 일이다(요일 1:3).

2. 일반적으로 말하면, 그 동맹의 주지는 두 가문간의 확고하고 변함없는 우정을 다짐하며 어떠한 경우에도 그 계약이 침해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같은 우정의 유대는 맹세로써 더 굳건히 되어야 한다. 이때 맹세하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맹세가 얼마나 진실한 것인가 하는 것을 증거 하시는 분이면서 동시에 자기들 중의 어느 한 편이 배신하는 경우 그를 벌하시고 복수하시는 분인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를 한다(23절). 다음과 같은 사실을 살펴보자.

(1) 아비멜렉은 이 맹약의 효력이 자기의 후손과 자기의 백성모두에게 미치기를 바라고 있다. 그는 자기 아들과 그 아들의 아들과 또한 그의 나라가 이 동맹의 혜택을 받기를 원했던 것이다. 선한 사람은 자기들 자신만이 아니라 자기에게 속한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들과의 결연과 교제를 늘 유지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2) 그는 아브라함에게 베푼 후대를 상기시킨다. "내가 너에게 후대한 대로" 라고 했다. 남에게 친절을 받았으면 그것을 갚아야하는 것이다. 또한 남에게 친절을 베푼 사람만이 남의 친절도 기대 할 수 있는 것이다.

Ⅱ. 아브라함은 우물에 대한 세부 조항을 첨가하면서 이 맹약에 동의를 한다. 이 맹약의 상호 관계 중에서 아브라함 편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관찰할 수 있다.

1. 아브라함은 아비멜렉이 명예를 존중하고 양심을 지키는 사람임을 알았고, 또 자기가 보기에 그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임을 알 수 있었기 때문에 이 맹약에 기꺼이 응하였다. 다음 사실을 주목하자. "내가 맹세하리라" (24절).

(1)종교는 사람을 침울하게 하거나 많은 사람과의 사귐을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래서는 결코 안 된다고 나는 확신한다. 나쁜 친구들을 피해야 한다는 구실로 모든 친구들을 싫어하거나 또 그 한 사람 한 사람을 질투하거나 해서는 안 된다.

(2) 마음이 정직한 사람은 확신을 가지고 약속을 하는 데서 결코 주저하지 않는다.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에게 자기가 그와의 약속을 충실히 지키겠다고 말했을 때 아브라함은 자기가 말한대로 맹세할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맹세는 이미 마음속으로 결정한 것을 확인하는 의식일 뿐이다.

2. 아브라함은 아비멜렉의 종들이 자기와 다툰 우물의 사건을 현명하게 해결하였다. 생각건대 우물은 그 나라에서 귀한 재산으로 취급된 것 같다. 우리에게 우물이 그처럼 모자라지 않고 많은 것도 하나님께 참으로 감사해야 할 일이다.

(1) 아브라함은 퍽 부드럽게 이 사실을 아비멜렉에게 이야기 했다(25절). 우리의 형제가 우리에게 잘못을 저지르는 경우 우리는 할 수 있는 한 가장 부드럽게 그의 잘못을 이야기해 주어, 그 문제가 잘 해결되고 끝맺어질 수 있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기억하자(마 18:15).

(2) 아브라함은 이 사건에 대한 아비멜렉의 변명을 잠자코 받아들였다. "누가 그리하였는지 내가 알지 못하노라" (26절). 전혀 잘못이 없는 많은 사람들이 부정하지나 않은지 혹은 불친절한 사람이나 아닌지 하고 의심을 받는다. 그러나 그들이 스스로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였을 때 우리는 그들을 즐겁게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종들의 잘못은 그 주인이 알고 있거나 옳다고 두둔하지 않은 이상 그 책임을 주인들에게 돌릴 수는 없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자기의 잘못을 알고 나서 즉시 돌이킨다면, 더 이상의 것은 바랄 수 없다. 그는 정직한 사람인 것이다.

(3)아브라함은 장차 어떤 논쟁이나 다툼이 이 우물 때문에 다시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이 우물의 소유권이 자기에게 있음을 분명히 밝히고 확인하였다(30절). 그렇게 하여 in perpetuam-전후 사정이 영원히 기억되게 하는 것은 지혜로운 일이요 또 정당한 일이다.

3. 아브라함은 아주 훌륭하고 적절한 선물을 아비멜렉에게 주었다(27절). 그가 준 것은 이상스러운 진귀한 것이거나 화려한 것이 아니라 가치 있고 유용한 것-" 양과 소" 였다. 그것은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베푼 친절에 대한 감사의 표요, 그들 사이의 두터운 우정을 증거한 것이었다. 서로 호의를 베푸는 것은 사랑을 더해 가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나의 것이 곧 나의 친구의 것이라고 하는 사랑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4. 아브라함은 맹세를 함으로써 아비멜렉과의 약속을 조인하였다. 그리고 그 장소를 브엘세바 즉 맹세의 우물이라고 이름 붙임으로써 그 맹약을 증거하는 기록으로 삼았다. 이것은 저들의 계약을 잊지 않기 위함이었다. 또 그 우물은 일곱의 우물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아브라함이 이 우물을 자기가 판 것이라는 것을 확인하기 위하여 아비멜렉에게 일곱 마리의 양을 준 것을 기억하기 위한 것이다. 일단 이루어진 약정은 꼭 기억되어야 한다. 그래야 그 약정이 우리에게 도움을 주고 실수하여 우리의 약속을 파기하지 않게 된다는 것을 명심하자.

 

21:23 없음.

 

21:24 없음.

 

21:25 없음.

 

21:26 없음.

 

21:27 없음.

 

21:28 없음.

 

21:29 없음.

 

21:30 없음.

 

21:31 없음.

 

21:32 없음.

 

21:33

하나님의 이름을 부름(창세기 21:33-34)

이 곳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사실을 찾아 볼 수 있다.

1. 아브라함은 좋은 이웃을 사귀게 되었다. 그는 거기서 상당한 기간을 계속 머물렀다. 그러나 언제 헤어지는 것이 좋은 가도 알고 있었다. 그는 브엘세바에서 자기가 거하는 천막을 가리는 그늘을 만들 수 있는 나무를 심었다. 혹은 열매가 열리는 나무들을 심어 과수원을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으로 일생을 낯선 이방인으로 혹은 순례자로 살게 하고자 하였기 때문에, 그가 거기서 정착했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여러 날을 체류하였다. 그 기간은 히브리인이나 나그네로서의 그의 특성에 맞는 기간이었을 것이다. 여러 가지 의식을 실천하였을 뿐만 아닐라, 신앙을 밝히 공언하기도 하였다. "거기서 영생하시는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 고 했다. 짐작컨대, 그는 자기가 심은 나무들 밑 즉 그의 기도처요 조그마한 예배 장소이었던 그곳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도 작은 산, 곧 동산에서 기도하셨다.

(1)아브라함은 자기의 이웃들이 살고 있는 곳에서 언제나 공중예배를 드렸다. 아마 그 이웃들도 그와 함께 예배에 참석했을 것이다. 선한 사람들은 어디를 가든지 자기네들의 선함을 늘 지닐 뿐만 아니라,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여 그 선을 전파하여, 다른 사람들도 또한 착한 사람이 되게 한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2) 여호와를 부를 때, 우리는 언제나 그분이 "영생하시는 하나님", "아 세상의 하나님" 이시라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 된다. 비록 하나님께서는 그와의 계약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심을 알게 하셨으나, 하나님이 만유의 주이시라고 영광 돌리는 것을 결코 잊지 않았다. "영생하시는 하나님", 그분은 온 세상이 있기 이전에 이미 계셨고, 모든 시간과 날들이 더 이상 있지 않을 미래에도 계실 분이다(사 40:28 참조).

 

21:34 없음.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929 창세기 메튜 헨리 주석, 창세기 01장
928 창세기 메튜 헨리 주석, 창세기 02장
927 창세기 메튜 헨리 주석, 창세기 03장
926 창세기 메튜 헨리 주석, 창세기 04장
925 창세기 메튜 헨리 주석, 창세기 05장
924 창세기 메튜 헨리 주석, 창세기 06장
923 창세기 메튜 헨리 주석, 창세기 07장
922 창세기 메튜 헨리 주석, 창세기 08장
921 창세기 메튜 헨리 주석, 창세기 09장
920 창세기 메튜 헨리 주석, 창세기 10장
919 창세기 메튜 헨리 주석, 창세기 11장
918 창세기 메튜 헨리 주석, 창세기 12장
917 창세기 메튜 헨리 주석, 창세기 13장
916 창세기 메튜 헨리 주석, 창세기 14장
915 창세기 메튜 헨리 주석, 창세기 15장
914 창세기 메튜 헨리 주석, 창세기 16장
913 창세기 메튜 헨리 주석, 창세기 17장
912 창세기 메튜 헨리 주석, 창세기 18장
911 창세기 메튜 헨리 주석, 창세기 19장
910 창세기 메튜 헨리 주석, 창세기 20장
» 창세기 메튜 헨리 주석, 창세기 21장
908 창세기 메튜 헨리 주석, 창세기 22장
907 창세기 메튜 헨리 주석, 창세기 23장
906 창세기 메튜 헨리 주석, 창세기 24장
905 창세기 메튜 헨리 주석, 창세기 25장
904 창세기 메튜 헨리 주석, 창세기 26장
903 창세기 메튜 헨리 주석, 창세기 27장
902 창세기 메튜 헨리 주석, 창세기 28장
901 창세기 메튜 헨리 주석, 창세기 29장
900 창세기 메튜 헨리 주석, 창세기 30장
899 창세기 메튜 헨리 주석, 창세기 31장
898 창세기 메튜 헨리 주석, 창세기 32장
897 창세기 메튜 헨리 주석, 창세기 33장
896 창세기 메튜 헨리 주석, 창세기 34장
895 창세기 메튜 헨리 주석, 창세기 35장
894 창세기 메튜 헨리 주석, 창세기 36장
893 창세기 메튜 헨리 주석, 창세기 37장
892 창세기 메튜 헨리 주석, 창세기 38장
891 창세기 메튜 헨리 주석, 창세기 39장
890 창세기 메튜 헨리 주석, 창세기 40장
889 창세기 메튜 헨리 주석, 창세기 41장
888 창세기 메튜 헨리 주석, 창세기 42장
887 창세기 메튜 헨리 주석, 창세기 43장
886 창세기 메튜 헨리 주석, 창세기 44장
885 창세기 메튜 헨리 주석, 창세기 45장
884 창세기 메튜 헨리 주석, 창세기 46장
883 창세기 메튜 헨리 주석, 창세기 47장
882 창세기 메튜 헨리 주석, 창세기 48장
881 창세기 메튜 헨리 주석, 창세기 49장
880 창세기 메튜 헨리 주석, 창세기 50장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 19 Next
/ 19

All the Bibles, Commentaries and Dictionaries here have their own rights.
All rights are reserved for them, not for us. Thanks! Praise our great God, Christ Jesus!

HANGL Lingua Franca 한글 링구아 프랑카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설치 취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