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튜 헨리 주석, 창세기 20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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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

아브라함과 자기 아내를 부인함(1)(창세기 20:1-2)

1. 아브라함은 근 20년간이나 살던 마므레를 떠나 블레셋 땅으로 이사한다. "아브라함이 그랄에 우거하며……" (1절)라 했다. 어떤 이유로 이사를 했는지를 알 수 없다. 소돔의 멸망으로 인하여 두려워하였든지, 또는 그 멸망 때문에 그 주위의 땅들이 당분간 피해를 입었기 때문이었든지, 혹은 어떤 유대인 저작자들이 말하고 있듯이 롯이 그의 딸들과 근친상간을 범한 일과 그의 친척들로 인하여 아브라함과 그의 신앙에 가나안 사람들이 비난을 가했기 때문에 비통에 빠져 있었던 것인지 분명히 알 수는 없다. 물론 아브라함의 이동에는 그에 상당하는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나그네와 순례자로서 거하는 이 세상에서는 언제나 동일한 곳에 있기를 기대할 수가 없음을 상기하자. 거듭 말하거니와, 우리들이 있는 곳은 어디서든 우리 자신을 나그네로만 생각해야 한다.

2. 전파 같이(12:13) 자기 아내를 부인하는 그의 죄가 나타나 있다. 그것은 사실을 거짓말로 얼버무리는 모호한 말이었을 것이며, 또한 법적으로는 용인된다고 하더라도, 인간적인 교제의 파멸이요 모든 허위의 입구가 될 뿐 아니라 자기 아내의 정절과 명예를 손상시키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 이외에도 그것은 2중적인 고층이었다.

(1) 그 첫째는 전에도 이와 똑같은 죄를 범하여 질책을 받은 바 있었고, 또한 그런 죄악에 빠지게 어리석음을 뉘우친 바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가 그 죄를 다시 범했다. 선한 사람이라도 유혹의 기습과 세력, 그리고 육체의 나약성 때문에 죄에 빠질 뿐 아니라, 같은 죄를 다시 범할 가능성까지도 가지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그러므로 배역(背逆)한 자들은 회개하도록 할 것이며, 절망치 않게 해야 한다(렘 3:22).

(2) 그 둘째는 사라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약속의 씨인 아들을 임신하고 있었음이 틀림없거나, 그렇게 될 기대 속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아브라함은 시사기 13장 4절에 있는 말씀과 같이 그녀를 특별히 돌보아 주어야 했었다.

3. 이리하여 사라는 위험에 빠졌다. 곧 "그랄 왕이 보내어 사라를 그의 궁으로 취하여 돌렸다." 이는 그녀를 자기 침실에 들이기 위함이었다. 한 사람의 죄가 흔히 또 다른 사람을 죄짓게 만든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자. 하나님의 계명의 울타리를 벗어나는 자는 죄의 시초가 마치 물이 흘러 들어오는 것과 같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20:2 없음.

 

20:3

아브라함이 자기 아내를 부인함(2)(창세기 20:3-7)

이로써 하나님께서는 그의 종인 예언자들에게 뿐만 아니라, 교회와 계약의 울타리밖에 있던 자들에게까지도 꿈(이는 하늘의 것이요 초자연적인 것임이 자명하다)으로 친히 계시하셨다는 사실이 나타나 있다. 그러나 흔히 보면, 요셉을 위한 바로의 꿈, 다니엘을 위한 느 브갓 네 살의 꿈, 또 여기서 아브라함과 사라를 위한 아비멜렉의 꿈의 경우와 같이 그 꿈속에는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특별한 배려가 내포된 것이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을 위하여 그 왕을 책망하셨기 때문이다(시 105:14, 15).

Ⅰ. 하나님은 그 여자가 남의 아내이기 때문에 만일 아비멜렉이 그 여자를 취하면 그 남편에게 부정한 일을 하는 것이 됨을 그에게 일러줌으로써 그의 위험을 통고하신다(3절). 곧 죄의 위험이니, 그 죄 때문에 죽음에 임하게 될 것이라고 알려 준다. "네가 죽으리라" 고 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은 누구에게나 그대로 이루어진다. 고의로 죄를 범하는 모든 죄인들은 저주받은 악인과 죽을병에 걸린 환자의 경우와 같이, 이미 죽은 자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당신이 악한 자라면 당신은 죽은 자이다.

Ⅱ. 아비멜렉은 아브라함과 사라가 합의하여 자기를 속였고, 남매 이상의 관계였음을 자기에게 알리지 않기로 했음을 모르고 있었노라고 하나님께 말한다(6절). 사람이 그 마음에 자신을 책망할 것이 없을 때에, 얼마나 하나님 앞에 자신 있게 설 수 있는가를 배우자(요일 3:21). 우리의 양심이 우리의 홈 없음을 증거하고만 있다면, 아무리 우리가 함정에 빠져 알지 못하고 부지중에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짓는 일이 있다 할지라도, 재앙의 그 날에는 우리에게 기쁨이 있을 것이다. 그는 아브라함이 전에 그러했듯이(18:23) 하나님께 그 이유를 항변하고 있다. "주께서 의로운 백성도 멸하시나이까?" (4절) 당연히 멸망해야 했던 소돔과 같은 백성이 아니라, 여기서는 죄없는 사람이 문제되고 있다.

Ⅲ. 하나님은 아비멜렉의 말에 매우 흡족히 응답하신다.

1. 하나님은 아비멜렉의 청원을 들어주시고, 그가 행한 바는 온전한 마음으로 행한 것임을 인정해 주신다. "이렇게 할 줄 나도 아노라" (6절). 정직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그 정직함을 알아주시고 인정해 주신다는 사실이 사람들이 비록 그들에게 반감을 가지며 믿어주지 않는다 해도 그들에게는 위안이 된다는 중요한 사실을 명심하라.

2. "너를 막아 내가 범죄하지 않게 하였느니라" 이는 오직 인자한 하나님의 손길로 그를 죄 가운데로 행하지 않게 지켜 주셨다는 것을 알리신 것이다. 이 때문에 아비멜렉은 잘못을 행치 않을 수 있었고, 아브라함은 부정한 일을 당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으며, 사라는 그들을 동시에 면할 수 있었다. 유의할 것이 있다.

(1) 궁리하여 계획은 되어 있으나 결코 실행되지 아니하는 죄악이 매우 많다는 사실·이 세상의 모든 일들이 악하다고는 하지만 마귀와 사악한 자들의 일처럼 그렇게 나쁜 것은 아니다.

(2) 인간이 행하려는 악한 일을 막아 주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죄가 존재한다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지만, 더 이상의 죄가 없다는 것은 그로 인함이니, 이는 인간의 마음에 하나님께서 영향력을 끼치사 죄에 대한 저들의 성향을 저지하시거나, 섭리를 통하여 범죄할 기회를 빼앗아 가기 때문이다.

(3) 범죄하지 못하도록 방해받는 것은 큰 자비이며, 누가 범죄 방해의 도구로 쓰였든지 간에, 그 일의 영광은 하나님께 돌려야 한다(삼상 25:32, 33).

3. 하나님은 사라를 돌려주라는 명령을 하신다. "이제" 네가 들어서 잘 알 터이니,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 (7절). 무지는 결코 계속될 만한 구실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유의하자. 우리가 만일 무지의 소이로 그릇된 길에 들어섰더라도, 그것이 고의적으로 그 일을 계속하는 구실은 될 수 없다(레 5:3-5). 그가 아브라함에게 의롭고 친절히 대해 주어야 할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친근하고 귀히 여김을 받은 "예언자" 이므로, 하나님께서 그에게 특별한 관심을 두고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예언자들이 피해를 입게 되면 분개하시며, 하나님 자신이 당한 것처럼 여기신다.

(2) 예언자이니 그를 위해 기도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예언자가 줄 수 있는 보답이니, 실로 훌륭한 보답이다. 예언자의 기도는 큰 효험이 있다. 또한 선한 사람들은 곤궁에 빠진 자들을 기도로써 기꺼이 도와주어야 하며, 최소한 자기들에게 베푼 자비에 대하여는 기도로써 보답해야 한다는 사실을 시사해 주고 있다. 아브라함은 아비멜렉에게 문제거리되었으므로, 그를 위해 기도 해주는 것이 당연했다.

(3) "네가 정녕 죽을 줄 알리라" 했으니, 그가 여자를 돌려주지 아니하면, 그에게 위해가 되겠기 때문이다. 왕이든 농군이든 잘못을 하고도 회개하지 아니하는 자는 자기가 행한 불의의 보응을 받으리라는 것을 유의하자(골 3:25). 어떠한 불의도 하나님 앞에서 묵과도리 수 없다. 가이사의 형상을 그 위에 새겼어도 용납될 수 없다.

 

20:4 없음.

 

20:5 없음.

 

20:6 없음.

 

20:7 없음.

 

20:8

아브라함에 대한 아비멜렉의 처신(1)(창세기 20:8-13)

이렇게 꿈속에서 경고를 받은 아비멜렉은 그 경고를 받아들이고, 죄와 그 결과를 진실로 두려워하게 되어, 자기에게 내린 지시에 순종하기 위하여 일찍 자리에서 일어난다.

Ⅰ. 자기 부하들에게 주의를 준다(8절). 아브라함도 이런 문제에 관해서는 자기 권속들에게 어떤 명령을 해 두는 것 이상으로 더 신중할 수는 없었다. 하나님께서 죄와 그 위험성을 깨우쳐 주신 자는 마땅히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들의 영혼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보여 주신 바를 알려 주어, 그들도 깨우치고 마찬가지의 경외하는 마음에 들어가도록 해야 함을 명심하라.

Ⅱ. 그는 아브라함을 책망한다. 다음 사실을 살피라.

1.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을 심히 책망한다(9,10절), 그 일에 피하여 아브라함에게 추구한 논조는 매우 강하면서도, 지극히 온유하다. 그 이상 좋게 말할 수는 없었다. 그를 비난한 것도 아니요, 모욕 주는 것도 아니었다. "이것이 너의 신앙의 태도냐" 네가 저주할 말은 않는다 할지라도 거짓말을 한다는 것을 이제 내가 알았노라. 이런 자들이 예언자라면, 나는 그들을 보지 않기를 원하노라" 는 따위의 말을 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공정하게 아브라함이 그에게 준 피해를 설명하고, 그것에 대한 자기의 원망을 조용히 말하고 있는 것이다.

(1) 그는 자기가 큰 죄의 위험에 빠져 있음을 비로소 알았노라고 말하고 있다. 양심의 빛에서 보더라도 간음죄는 매우 큰 죄라는 것을 알 수 있음을 명심하라. 소위 기독교인이라고 자처하는 많은 자들이 아직 간음을 경시하기까지 하고 있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임을 알자.

(2) 비록 무지의 소이였다 하더라도, 그가 만일 간음죄를 범했더라면, 자기 자신과 그 나라는 하나님의 진노를 받았으리라고 그는 생각하고 있다. 왕의 범죄가 때로는 그 국가의 재앙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통치자들은 그 백성을 위해서도 죄를 두려워해야 함을 알자.

(3) 그는 아브라함이 자기들의 결혼 관계를 부인했기 때문에 온당치 못한 일을 했다고 비난한다. 그는 그것을 공정하고 온유하게 말하고 있다. 아브라함은 거짓말쟁이나 협잡군이라고 하지는 않았다. 그는 "합당치 아니한 일을 했다" 고 말한다. 애매한 언사와 시치미떼는 일은 변명할 수 없는 나쁜 짓이며, 어떤 경우에도 결코 허용해서는 안 되는 일임을 명심하자.

(4) 아브라함이 자기들을 죄에 빠지게 함으로써, 아비멜렉과 그 가정에 매우 큰 피해가 된다고 아비멜렉은 생각한다. 곧 "내가 무슨 죄를 네게 범하였느냐? 내가 만일 너의 최악의 적이었다 해도 이보다 더 악한 보복은 할 수 없었을 것이며, 나에게 복수하기 위하여 이보다 더 효과적인 방도를 취하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라고 한다. 비록 그들이 우정을 가장하고 오더라도 타락한 인간 본성에 즐거운 것으로 생각되는 것을 가져오는 자들은, 사실상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가장 큰 불친절을 가져다주는 자들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5) 아비멜렉은 정직한 사람이 어찌하여 자기와 함께 살고 있는 사람들을 위험한 사람들로 의심을 했는지 그 이유를 요구하고 있다. "네가 무슨 의견을 이렇게 하였느냐?(10절) 그 여자가 너의 아내라는 사실을 우리가 아는 것이 어찌하여 네게 위험을 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는가?" 라는 말이다. 우리들의 선함을 의심하는 것은 우리들의 위대성을 멸시하는 것보다 더 큰 모욕이라는 것을 명심하자.

2. 아브라함의 초라한 변명.

(1) 그는 그 지방에 대해서 나쁘게 생각하고 있던 자기 의견을 실토한다(11절). (비록 그렇게 생각하는 적절한 이유는 못 밝히지만)그는 속으로 "이 곳에는 하나님을 두려함이 없으니 나를 죽일 것이리라" 고 스스로 생각했다.

[1]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는 곳에서는 선이란 거의 기대할 수 없다(시 36:1 참조).

[2] 우리가 생각하는 그 이상으로 하나님을 마음속으로 두려워하고 있는 지방과 사람들이 많이 있다. 아마 그들은 우리들이 붙여 놓은 이름으로 불리우지 아니할 것이며, 우리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들과는 전혀 다를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의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미루어 판단해버리지만, 그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는 좋지 못한 일이며, 우리를 쉽사리 하나님의 심판 앞에 서게 만드는 결과를 준다(마 7:1).

[3] 무자비하고 남의 흠을 비난하기 좋아하는 일은 다른 많은 죄를 일으키는 원인이 되는 죄이다. 우리는 일단 어떤 사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고나면, 우리들은 그들에게 가장 부당하고 그리스도교 정신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면서도 정당화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이란 악한 생각이 먼저 들지 않는다면 악한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이다.

(2) 어느 면에서는 아브라함의 말대로 그녀는 그의 누이이다. 그래서 그는 그렇게 말함으로써 새빨간 거짓말은 면하려고 변명했다(12절). 혹자는 그녀가 롯의 친누이이며, 롯은 자기 "조카" 였음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의 "형제 롯" 이라 불리고 있으며(14:16). 사라도 그의 "누이" 라고 불리우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실로 나의 이복누이" 라는 아브라함의 말을 들은 상대방들은 그녀가 누이이니까 아내가 될 수 없는 것으로 알았다. 때문에 그 말은 속일 의도가 있는 모호한 언사였다.

(3) 아브라함은 자기들이 처음으로 기류자들이 되었을 때부터 아내와 합의하여 전부터 말해 오던 습관임을 강력히 내세움으로써 아비멜렉을 계획적으로 모욕했다는 견해를 받지 않으려는 결백을 주장한다(13절). 즉 "하나님이 나로 내 아비 집을 떠나 두루 다니게 하실 때에, 우리는 그렇게(말하기로) 정했노라" 고 한다.

[1] 우리가 어디를 방황하든 하나님을 인정해야 함을 유의하자.

[2] 해외 여행을 하여 외국 사람들과 많이 교제하는 자들은 뱀 같은 지혜를 필요로 하듯이 그 지혜는 필요로 하듯이 그 지혜는 비둘기의 결백함과 또한 조절되게 하는 것이 필수요건임을 기억하자. 내가 알기로는 하나님께서는 서로간의 관계를 부인하고 만 그 죄로 물든 결약 때문에 그들을 벌하시기 위하여,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그토록 오랫동안 자식 축복을 거부 하셨던 것을 암시하는 것 같다. 그들이 결혼을 스스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어찌 하나님께서 그것을 인정하시겠는가? 그러나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바는, 아비멜렉이 그들에게 이러한 책망을 한 후 다시는 그런 행동을 반복하기로 약속하지 아니했으며, 그리하여 "사라가 잉태하게" 되었다는 기사를 본다(21:1, 2).

 

20:9 없음.

 

20:10 없음.

 

20:11 없음.

 

20:12 없음.

 

20:13 없음.

 

20:14

아브라함에 대한 아비멜렉의 처신(2)(창세기 20:14-18)

Ⅰ. 왕으로서의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 보여준 친절. 아브라함의 질투심은 그 얼마나 부당했던가를 알 수 있다. 그는 사라가 자기의 아내임을 그들이 알면, 자기를 죽이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사실상 그들이 그것을 알게 되자 그를 죽이기는커녕 친절을 베풀었다. 그들에게 내린 하나님의 책망으로 인하여 두려워서라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1. 아비멜렉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함께 하심을 보았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자기들에게 머물 것을 요청하면서, 그 땅 어디든 아브라함이 좋아하는 곳에 거하라는 왕의 칙허를 주었다(15절).

2. 왕으로서의 선물, 곧 "양과 소와" (14절) "은 천개" (16절)를 그에게 주었다. 이것들과 동시에 사라를 돌려주었다.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였다.

[1] 그녀를 자기 집으로 데려간 자기의 부정에 대한 사죄의 뜻으로 그렇게 했다. 사람들이 법계를 억류하자 재앙을 당하게 되니, 그것을 돌려 줄 때 선물을 함께 보냈었다. 반환 때에는 그것에 뭔가를 첨가하여 반환해야 한다고 율법이 규정하고 있다(레 6:5).

[2] 또 아브라함이 자기를 위해 기도해 주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기도를 팔고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신령한 것을 거두게 하는 자들에게 우리는 친절을 베풀도록 노력해야 한다(고전 9:11). 하늘에 관심을 두고 있는 자와 관련을 맺고 또 그 관련을 유지하며, 하나님의 친구가 되는 자를 우리의 친구로 삼는 것은 우리들의 지혜에 속하는 것임을 기억하자.

[3] 그는 사라에게 좋은 교훈을 주고 있다. 곧 그의 남편(아비멜렉은 그의 "오라비" 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는 그렇게 부름으로써 그녀를 책망하기 위해서다)이 그녀에게는 눈마개(우리말 성서는 난외에 넣었음)가 되어야 하니, 다시 말해서 그녀는 다른 사람을 주목해서도 안 되며 남들이 자기를 주목해 주기를 바라서도 아니된다고 했다. 배우자란 서로에게 눈마개가 되어야 함을 명심하자. 결혼의 언약은 욥의 언약과 같이 눈과 세우는 언약이다(욥 31:1)

Ⅱ. 아브라함이 예언자로서의 친절을 아비멜렉에게 베푼다. 그는 "그를 위해 기도" 했다(17,18절). 이 영광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고자 했으니, 아비멜렉이 사라를 돌려주기는 했어도 역시 아비멜렉이 당하고 있던 심판은 아브라함의 기도에 의해서만 제거될 수 있었던 것이다. 미리암은 모세를 매우 비방했지만 모세가 그녀를 위해 기도했을 때에야 하나님은 그녀의 병을 고쳐 주셨고(민 12:13), 욥을 슬픔에 잠기게 하던 욥의 친구들은 욥의 기도로 하나님께서 그들과 화해하셨던 것이다(욥 42:8-10). 그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그들과 화해하시는 것을 아브라함의 손에 맡기셨다. 그러므로 선한 자의 기도는 위대한 인물에게 자비가 될 것이며, 또한 반드시 이루어지리라는 것을 유의하자.

 

20:15 없음.

 

20:16 없음.

 

20:17 없음.

 

20:18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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