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람에게 새로이 준 계약(1)(창세기 17:1-3)
Ⅰ.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찾아 주신 은혜로운 방문의 시기. "아브람의 99세 때에" 라고 하였다. 이것은 이스마엘이 출생한 지 13년이 되는 해이다.
1. 그처럼 오랫동안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하나님과 나눈 모든 교제는 통상적인 의식과 섭리의 방식을 통한 것에 지니지 않았다. 일용할 양식과도 다르며 오히려 가장 선한 성도들의 것도 아니지만, 은총이 주는 특별한 위안이 때때로 있다는 것을 기억하자. 이 세상에서는 그러한 위안이 즐거운 음식이 되지만, 그것이 계속되는 잔치는 될 수 없다.2. 이삭의 약속은 그토록 오랫동안 지연되었다.
(1) 이는 아브람이 지나치게 서둘러 하갈과 결혼한 일을 시정하기 위험이었을 것이다. 악한 마음으로 기대한 위안은 당연히 지연된다는 것을 알아두자.
(2) 아브람과 사래는 이 문제로 인하여 연로한 중에도 그토록 큰 괴로움을 당하고 있었으나, 그것은 하나님의 권능이 더욱더 찬양 받게 되기 위함이었을 것이며, 그 때문에 그들의 신앙에는 시련도 더욱 많았으리라(신 32:6; 요 11:6, 15 참조).
(3) 그토록 오래 기다리던 자녀가 "이삭, 곧 참으로 아들" 인 자가 되게 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사 54:1).
Ⅱ. 하나님이 아브람과 계약을 맺은 방법.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셨다." 이것은 후광(shechinah) 속에 나타난 것이다. 아브람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의 직접적이고 영광스러운 임재의 어떤 가시적인 표시이다. 하나님은 먼저 우리가 그를 알게 하시며 믿음으로 그를 볼 수 있게 하신다. 그 후에야 우리를 하나님의 계약 속으로 끌어들이신다는 것을 주목하자.
Ⅲ. 아브람이 그 때 취했던 태도.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하실 때에 아브람은 엎드렸다" (2절).
1. 그 이전에도 여러 번 경험했지만, 하나님의 영광의 밝은 빛으로 압도당하여 바로 쳐다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니엘과 요한도 역시 전능하신 이의 환상을 익히 알고 있었던 터이지만 역시 그렇게 되었다(단 8:7; 10:9, 15; 계 1:17).2. 그는 자기 자신을 부끄럽게 여겼고, 그처럼 무가치한 자기에게 베풀어주신 영광을 생각하여 얼굴이 붉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을 비천한 것으로 여겼고, 하나님은 숭앙을 받아야 된다고 생각했으며, 그 두 가지의 표로서 사모의 태도를 스스로 취하여 "엎드린" 것이다. 여기에서 기억해 둘 일이 있다.
(1) 하나님은 당신과 더불어 계약과 교제를 맺는 자에게 이야기를 하시기 위해서 은혜스럽게도 당신 자신을 낮추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이야기하시며(잠 6:22), 성령으로 그들과 말씀하신다(요 14:26). 모든 성도들이 이 영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2) 하나님과의 친교를 허락 받은 자는 지극히 겸손하고 경건되이 그에게 나아가며, 또 그렇게 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과 친교를 맺고 있다고 말하면서도 그 친교로 치욕을 삼는다면 자신을 속이는 일이다.
(3) 하나님의 위로를 받고자 하는 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 발아래 엎드려 예배해야 한다.
Ⅳ. 그 나머지의 모든 약속의 터전이 되는 계약의 총괄적 범위와 윤곽. 그것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끊임없이 맺어지는 그 은총의 계약이다(1절). 다음을 살펴보자.
1. 우리를 향한 하나님께 기대할 수 있는 것.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하나님은 오히려 여호와라는 그의 이름보다는 이런 명칭으로 자기를 아브람에게 알리려 했다(출 6:3). 하나님은 그 칭호를 야곱에게도 사용하셨다(35:11).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을 이 명칭으로 불렀다(28:3; 43:14; 48:3). 욥기 전체를 통해서, 또 적어도 욥기 중의 "담론" 부분에서는 대체로 이 이름이 사용된다. 모세 이후에는 여호와(Johouah)가 보다 빈번하게 사용되어 있으며, 이 이름 엘사다이(El-shaddai: 전능하신 하나님)는 매우 드물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전능한 능력을 다음의 것 중의 하나로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1) 혹자는 그 말이 "보복자" 를 뜻한다고 한다. 그것은 hdX(shada)라는 말이 "그는 황폐케 하였다" 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옛 세상을 멸망시켰기 때문에 이 칭호를 갖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사야서 13장 6절과 요엘서 1장 15절로 뒷받침되고 있다.
(2) 또 어떤 자들은 "은혜 베푸는 자" 로 생각한다 그것은 X(sh)는 rXtO (who: …하는 자)를 뜻하고, yd(dai)는 "충족한" 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는 넉넉하신 하나님이시다. 또는 고대 영어 번역 성경은 El-shaddai를 매우 의미 심장하게도 "나는 모든 것에 충족한 하나님이시다" 라고 읽었다. 우리가 관계하는 하나님은 "넉넉하신 하나님" 임을 명심하자.
[1] 그는 스스로에 충분하고 자족하신다. 만물을 가지고 계시며, 아무 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2] 우리와 그가 계약 관계에 있다면, 그는 우리에 대해서도 충분하시며, 우리의 가장 큰 소원도 채워 주실 만큼 넉넉하시며, 그 밖의 모든 부족을 채워 주실 만큼 넉넉하시다. 우리 영혼의 영원 불멸을 위하여 행복을 보증하시기에도 넉넉하시다(시 16:5, 6; 73:25).
2.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 그 계약은 상호적이다. "내 앞에 행하여 완전 하라." 이는 곧 곧게 서서 성실하라는 것이다. 은총의 계약은 질서 정연하며, 성실성은 우리들의 복음의 완성이다. 다음을 살펴보자.
(1) 신앙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흠 없이 행하는 것이다. 언제나 하나님을 우리 앞에 세워야 하며, 생각하고 말하며 행동하는 모든 일에 있어서 언제나 하나님께서 감찰하기고 계시는 자처럼 해야 한다. 우리의 모든 행동에서 끊임없이 그의 말씀을 우리의 규율로 삼고, 그의 영광을 우리의 최후 목표로 생각하며, 항상 그를 경외하는 가운데 있어야 한다. 우리의 모든 경건한 예배의 의무를 통해서 마음속으로 그와 동행해야 한다. 특별히 그러한 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삼상 2:20). 모든 거룩한 대화 속에서도 그를 위하여 완전해야 한다.
(2) 곧게 서서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그의 전능하심에 우리들이 관계될 수 있는 조건이다. 우리가 그를 소홀히 여긴다든가 그를 속인다면, 우리는 그와 우리와의 관계가 주는 은혜가 위안을 잃게 된다.
(3)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끊임없이 관심을 두는 일은 우리에게 크게 영향을 주어, 우리를 곧게 서서 그와 동행하게 해 준다.
아브라함에게 새로이 준 계약(2)(창세기 17:4-6)
여기에 그 약속이 엄숙하게 소개되어 있다. 위대한 하나님께서 이전에는 "내가 너와 계약을 세우리라" 고 하셨으나(2절). 이제는 "내가 너와 계약을 세운다. 자, 보고 찬미할지니라. 그리고 그것을 확실히 알지니라" 고 말씀하신다. 은총의 계약은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시는 것임을 알자. 하나님은 이 계약을 자랑하셨다(" 내가"). 그러므로 우리도 그렇게 해야 되겠다.
Ⅰ. 너는 "열국의 아비가 될지니라" 고 아브라함에게 약속한다. 이것은 다음을 뜻한다.
1. 육체를 좇아날 그의 자손이 이삭과 이스마엘을 통하여 무수히 많아지리라는 것이다. 이 약속 중에는 틀림없이 뭔가 보통 이상의 것이 들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일이 이루어졌으며, 더욱이 같은 조상 노아에게서 아브라함과 마찬가지의 후대에 있는 어떤 사람의 자손들보다도 아브라함에게 계승된 자들의 자녀가 더 많아졌다고 본다. 지금도 그렇다고 생각할 수 있다.2. 모든 시대의 믿는 자들은 모드 아브라함의 영적 자손으로 생각해야 하며, 또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친구" 일 뿐만 아니라, 모든 "믿는 자의 조상" 이라고 불리리라는 뜻이다. 이런 의미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들이 그 약속을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롬 4:16, 17). 그는 믿음으로 하나님과의 계약에 들어가는 모든 사람들의 조상이며, 또한(유대 저작자의 말과 같이) "하나님 보좌의 날개 아래 모인" 모든 자들의 조상이다.
Ⅱ. 이에 대한 증거로서, 그의 이름이 "아브람, 곧 고귀한 아비" 에서 "아브라함, 곧 무리의 아비" 라는 이름으로 고쳐갔다.
1. 이것은 그에게 명예를 주기 위함이었다. "여호와의 입으로 정하실 새 이름으로 일컬어지리라는 것" 은 교회의 영광이라고 말해지고 있다(사 62:2). 왕들이 저들의 대신들에게 새로운 칭호를 수여함으로써 그들을 높인다. 이처럼 아브라함도 참으로 영광의 근원이신 하나님으로 인하여 존귀하게 된 것이다. 모든 믿는 사람들은 새로운 이름을 가진다(계 2:17). 혹자는 생가하기를 아브라함의 새 이름 중에 여호와의 이름자 한 글자를 새겨 넣은 것은, 그의 새 이름에 영광을 더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여고냐(Jeconiah)가 자기 이름의 첫 음절을 떼어내야 했던 것이 그에게 불명예가 되었던 것과 같은 이치이다. 왜냐하면 그의 이름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의 첫음절과 같았기 때문이었다(렘 22:28). 믿는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이름을 주신다(엡 3:15).2. 아브라함의 믿음을 격려해 주고 확고히 해죽 위함이었다. 그에게 자녀가 없었을 때에는 아마 이름까지도 슬픔의 계기가 된 적이 있었을 것이다. 누구의 아비도 아니었던 그가 어찌 "고귀한 아비" (아브람)라고 불리어야 했단 말인가?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수많은 자손을 약속하셨고, 큰 기쁨을 뜻하는 이름까지 주셨다. 하나님은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신다. 그것이 바로 바울 사도가 관찰한 바였다(롬 4:17). 비록 그에게는 아들이 하나 뿐이었지만 때가 되면 수없이 많아져야 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를 "무리의 아비" 라고 부르신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새로이 준 계약(3)(창세기 17:7-14)
Ⅰ. 여기에서 계속되고 있는 계약은 세 가지 일을 암시하고 있다.
1. 계약은 세워질 것이고, 변경되거나 취소될 수 없다. 그것은 확정되고 승인된 것이어서, 하나님의 능력과 진리와 마찬가지로 굳게 세워진다.2. 그것은 상속자가 있는 계약이니, 아브라함만이 아니라(만일 그런 것이 아니라면 아브라함과 동시에 소멸되었을 것이다) 그 뒤에 오는 그의 자손들과도 맺은 계약이다. 육체를 따라 난 자손들만이 아니라 그의 영적인 자손들과도 맺은 계약이다.
3. 그 계약은 영원히 복음주의적인 뜻과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은총의 계약은 영속적이다. 그것은 계약의 외형적인 관리는 그 계약의 인(印)과 더불어 믿는 자들의 자손들에게 전달되며, 그 내적인 관리는 성령을 통하여 모든 세대의 그리스도의 자손에게 전해지는 것이다.
Ⅱ. 그 계약의 내용. 그것은 약속의 계약이며, 지극히 위대하고 귀중한 약속이다. 여기에 사실상 모든 것을 충족시키는 두 가지가 있다.
1.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는 것(7,8절). 그 계약의 모든 특전과 기쁨과 소망이 이 안에 요약되어 있다. 누구든 자신을 행복되게 하는 데는 이보다 더한 것을 바랄 수 없다. 자기 백성에게 친히 하나님이 되겠다고 하시는 그 분은 어떤 분인가? 그의 지혜가 그 백성들의 것이 되어서 저들을 보호하고 지원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그들의 것이 되어서 저들을 채워 주고 위로해 주는 그런 분이시다. 신실한 예비자들이 섬기는 하나님에게서 기대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믿는 자들을 저들의 것인 하나님 안에서 발견하게 되리라. 이것만으로도 넉넉하지만 이것도 전부는 아니다.2. 가나안 땅이 그들의 영원한 소유자가 되리라는 것(8절). 전에도 하나님은 이 땅을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약속하신 바 있다(15:18). 그러나 여기서는 그것이 영원한 소유지가 되리라고 약속되어 있다. 그곳은 분명히 하늘 나라의 행복의 모형으로서,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서 남겨져 있는 영원한 안식처로 생각해야 한다(히 4:9). 이것이 바로 아브라함이 전에 유의했던 바보다 나은 땅이요, 그것을 허락하심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겠다는 약속의 광대한 폭과 범위에 들어맞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만일 하나님께서 이 땅을 준비하시고 계획하시지 않았더라면 저들의 하나님이라고 불리우기에 부끄럽게 되었을 것이다(히 11:16). 가나안 땅이 아브라함의 육의 자손에게 보증되었음과 같이, 하늘 나라는 계약에 의하여 그의 영적 자손이 된 모든 자들에게 보증되어 있는 소유지이니 참으로 영원한 것이다. 그 계약의 표면적인 관리하에 있는 모든 자들에게, 말씀으로써 이 영원한 생명이 주어졌고, 성례전으로 확고히 되었다. 그 계약의 보증이 모든 믿는 자들에게 주어져 있다(엡 1:14). 또 여기에는 가나안 땅은 전에 아브라함이 나그네로 있던 땅이라고 언급되어 있다. 그와 같이 하늘의 가나안은 우리가 지금 나그네로 지내는 땅이니, 우리의 장래가 아직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Ⅲ. 계약의 표징이 있다. 곧 할례이다. 때문에 그 계약을 "할례의 계약" 이라고 부른다(행 7:8). 할례는 아브라함과 그 자손이 꼭 지켜야 하는 계약 사본이나 부본이라고 할 수 있다(9,10절). 그것은 표(sign)와 인(seal)이라 불리고 있다(롬 4:11).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1. 하나님 편에서 아브라함과 그 자손들에게, 이 계약은 이루어질 것이며, 때가 이르게 되면 가나안 땅이 그들의 것이 되리라는 것을 그것으로써 확증해 주기 때문이다. 가나안이 저들의 소유가 된 후에도 이 의식을 계속하는 것은, 이러한 약속들이 보다 미래에 있을 또다른 가나안을 예상하고 있기 때문이며, 그들은 계속하여 그것을 기대하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암시한다(히 4:8).2. 그것은 그 계약 속에서 아브라함과 그 자손들 편에서 지워지는 의무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 계약을 수락하고 동의하며 육체의 더러움을 잘라버리는(할례는 이것을 보다 직접적이고 근본적으로 표시해 주고 있다) 의무일 뿐 아니라 일반적으로 그들이 이후로부터 항상 하나님의 명령을 익히 알아 두어 준수하는 것을 뜻한다. 할례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 를 인간에게 지워 주기 때문이다(갈 5:3). 하나님이 자기의 하나님이 될 것을 바라는 자는, 그의 백성이 되기를 동의하고 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1) 할례는 피를 흘리는 의식이었다. 율법에 의하면 모든 것은 피에 의해서 깨끗하게 되기 때문이다(히 9:23; 출 24:8 참조). 그러나 그리스도의 피가 흘려졌기 때문에 이제는 피를 흘리는 모든 의식이 폐지되었다. 따라서 할례는 세례로 대치된 것이다.
(2) 여성도 그 계약 속에 내포되어 있으나, 그 의식은 남성에게 국한된 것이었다. 남자가 여자의 머리이기 때문이다. 영국에서는 충성의 맹세가 남자에게만 요구된다. 할례 가운데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피에 대한 존경이 있었기 때문에, 남자의 피만 흘렸던 것이라고 생각하는 자도 있다.
(3) 절단해야 했던 것은 포피(包皮)의 살이었는데, 죄악이 만연되는 것은 흔히 생식(生殖)에 의해서이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그리스도께서 아직 우리들을 위하여 그 몸을 드리지 아니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인간들이 자신의 신체의 한 부분을 드림으로써 계약 속에 들어오게 하셨다. 다른 부분을 떼어 주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 부분은 몸의 은밀한 부분이다. 그것은 마음의 할례가 진정한 할례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런 영예를 아름답지 못한 지체 위에 두셨던 것이다(고전 12:23).
(4) 그 의식은 아기가 난 지 8일만에 집례되었다. 그보다 일찍 될 수는 없었다. 아기들이 할례에서 오는 고통을 참고 견딜 수 있을 만큼 강해지고, 또 최소한 안식일을 한 번을 지날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다.
(5) 이방인의 자녀들도, 그 집의 주인이 그들의 진정한 주인이었기 때문에 할례를 받게 하였다(12,13절). 이것은 이방인들에게 베푼 호의였으며, 그들도 적당한 때가 이르면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가정으로 끌어들여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갈 3:14 참조).
(6) 매우 엄격한 벌칙 밑에서 이 제도의 경건한 준행이 요구되었다(14절). 할례를 멸시하는 것은 그 계약을 멸시하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만일 부모들이 그 자녀에게 할례를 행하지 않으면, 모세의 경우처럼(출 4:24 참조) 그들은 위험에 빠지게 된다. 어릴 때에 할례를 받지 아니한 자에 대해서는, 만일 그들이 성장하여서라도 이 의식을 행하지 않았을 경우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분명히 심판하셨다. 그들이 자기들의 포피를 잘라 버리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그들을 자기 백성에게서 잘라버릴 것이다. 하나님의 신성한 의식을 경히 여기고 소홀히 여기는 생활을 한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아브라함에게 새로이 준 계약(4)(창세기 17:15-22)
Ⅰ. 여기에는 사래로 인하여 아브라함이 아들을 낳으리라는 약속이 나타나 있다. 또 그 아들을 통해 아브라함에게 준 약속이 이루어지게 되고, 아브라함이 많은 민족의 아비가 되리라는 것이다. "사래는 열국의 어미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열왕이 그녀에게서 나리라" 고 하셨기 때문이다(16절). 다음을 명심하자.
1. 하나님은 그 백성을 향한 자기의 친절한 뜻을 점차적으로 계시하여 주신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오래전에 아브라함이 아들을 얻으리라고 말씀한 바 있었지만, 사래로 인하여 아들을 얻을 것은 지금까지 말씀하신 바 없었다.2. 여호와의 축복은 결실을 맺는다. 또한 하갈의 경우와는 달리 축복에 슬픔이 곁들여지기 아니한다. "내가 열매맺는 축복으로 그녀를 축복하리니, 그리하면 네가 그녀의 아들을 얻으리라."
3. 정부와 질서는 교회에 큰 축복이다. "민족" 뿐만 아니라 "민족의 열왕" 이 그녀에게서 출생되어, 지혜가 없는 오합지졸이 아니라 튼튼하게 세워지고 잘 다스려진 사회가 되리라고 약속되어 있다.
Ⅱ. 이 약속의 승인 사래를 사라로 그 이름을 바꾼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주었던 것과 동일한 글자를 그녀의 이름에도 넣어 주셨으니, 그와 동일한 이유에서였다. 사래는 "나의 여주인" 이라는 뜻으로서, 마치 그녀의 명예를 한 가정에만 국한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사라는 "여주인" 곧 "무리의" 여주인이란 뜻이니, 그녀로부터 왕되신 메시야, 곧 이 땅의 만왕의 주(主)이신 메시야가 오게 되리라는 뜻이다.
Ⅲ. 이 은혜로운 약속 중에는 기쁨과 감사에 넘치는 위안이 있다(17절). 이 사건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은 태도를 취했다.
1. "엎드렸다" 그는 큰 겸손의 태도를 나타냈다. 하나님께서 영예와 은총을 많이 주시면 주실수록, 우리는 스스로 보다 더 낮아져야 하며, 하나님 앞에 보다 더 경건하고 유순해야 함을 명심하자.2. "웃었다" 이는 그의 큰 기쁨을 나타낸다. 그것은 환희의 웃음이지 불심임의 웃음이 아니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약속은 그 성취와 마찬가지로 거룩한 영혼의 기쁨도 되며, 결실의 기쁨과 마찬가지로 믿음의 기쁨도 있다는 것을 알자. 아브라함은 그리스도의 날을 보기를 즐거워하였고, 이제 그 날을 보았으니 기뻐하셨다(요 8:56). 이는 그가 가나안 땅의 약속 안에서 하늘 나라를 보았듯이, 이삭의 약속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보았기 때문이다.
3.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이 말은 큰 찬미를 표시한 것이다. 조금도 의심스럽게 말한 것이 아니라(그는 "약속을 의심치 않았음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롬 4:20). 매우 놀라운 일이라고 했으며, 이것은 하나님의 전능한 능력이 아니고서는 이룰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또 매우 인자한 것이요, 우리에게 베풀어지는 매우 사랑이 넘치는 은총이요, 매우 놀라운 일이라고 말한 것이다(시 26:1, 2)
Ⅳ. "이스마엘이 하나님 앞에서 살게 되기를 원하나이다" 라고 기도했다(8절).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사라에게서 날 아들에 앞서서 이스마엘이 먼저 택함 받기를 바란 뜻이 아니라, 그가 버림받아 하나님께 잊혀질까봐 두려워서 한 기도이다. 그는 이스마엘을 위하여 그런 간구를 드렸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지금 자기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중이므로, 지금이 이스마엘을 위해 좋은 말을 드릴 기회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놓치지 않으려 했다. 다음의 사실을 명심해 두자.
1. 우리가 하나님께 먼저 어떤 처방을 내려서는 안 되는 것이지만, 하나님은 기도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과 자유롭게 되도록 하시며, 우리들이 간구하는 바를 낱낱이 아뢰도록 허락하신다(빌 4:6). 우리가 염려하고 걱정하는 것은 무엇이든 기도로써 하나님 앞에 내놓아야 한다.2. 자녀들은 수효대로 번제를 드린 욥과 같이(욥 1:5), 자녀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일은 어버이들의 의무이다. 아브라함은 그가 그토록 바라고 있었던 대로 하나님께서 사라에게서 아들을 낳게 되리라고 약속하셨을 때에, 하갈이 나은 아들은 잊어야 한다고 생각지 않았다. 오히려 계속하여 아브라함은 하갈이 낳은 아들을 마음에 두고 관심을 쏟고 있다. 미래의 은총에 대한 기대 때문에 이미 받은 은총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3. 우리가 자녀를 위해 하나님께 간구해야 할 중요한 일은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살기를 바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들이 하나님과의 계약을 지키게 되고 올바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은혜를 입기를 바라는 일이다. 영적인 축복이 최선의 축복이며, 자신이나 남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간절히 바랄 축복도 그 축복이다.
Ⅴ. 그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 그것은 평화의 응답이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얼굴을 찾은 것이 헛되지 않았다.
1. 일반 축복이 이스마엘에게도 보증되었다(20절). 곧 "네가 그처럼 심히 염려하고 있는 이스마엘을 위해서는, 내가 네 말을 들었노라. 너로 인하여 그가 은혜를 입으리라. 내가 그에게 복을 주리라. 내가 그를 위해 많은 복을 쌓아 놓았느니라."(1) 그의 후손들이 많아지리라. "내가 그로 크게 번성케 하리라" 고 했다. 그의 이웃들보다 수가 많아지리라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창세기 1장 28절의 축복과 같은 축복의 열매이다.
(2) 그들은 유력해질 것이다. "열두 방백을 낳으리라" 고 했다. 비록 가시적인 교회가 그의 몸에서 나오지는 아니하였고, 계약이 그의 가정에 깃들지는 아니하였어도, 영적 축복도 역시 그에게 주어졌으리라고 관대히 생각해야겠다. 외형적인 훌륭한 것들이 때로는 경건한 부모들의 육신의 자녀들에게 매우 풍성히 부여되는데, 이것은 그의 부모로 인함이라는 것을 알아두자.
2. 계약의 축복은 이삭을 위해 간직되어 있다. 그 축복은 그에게만 해당되는 것이다(19,21). 만일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위한 기도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마엘과 계약을 새우고 약속된 씨가 그에게서 나게 되기를 기원했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분명히 그에게 응답하시지 않았을 것이며, 언제나 보다 유익한 것으로 응답해 주었을 것이다.
(1) "사라가 정녕 아들을 낳으리라" 하나님은 사라에 의한 아들을 그에게 반복해서 약속한다. 진실한 신자들에게도 하나님의 약속이 거듭되고 반복될 필요가 있으니, 그래야만 그들이 확고한 위로를 지니게 된다는 것을 명심하자(히 7:18). 거듭 말하거니와 약속의 자녀가 진정한 자녀인 것이다.
(2) 하나님은 그 아들의 이름을 "이삭, 곧 웃음" 이라고 지어 주셨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약속하셨을 때에 아브라함이 영적으로 기뻐하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들의 기쁨일진대, 약속해 주신 그의 긍휼하심은 때가 이르면 우리의 큰 기쁨이 되리라는 것을 기억하자. 그리스도는 그를 찾는 자들에게 웃음이 되시며, 지금 소망 가운데 즐거워하는 자들은 멀지 않아 그들이 바라고 있던 것을 얻는 즐거움을 가지게 될 것이다. 이것은 바보 같은 웃음이 아니다.
(3) "내 계약을 내가 이삭과 세우리라."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에게 계약을 상속해 주신다. 하나님은 그의 인자하신 뜻에 따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자를 택하여 계약을 맺으신다는 것을 명심하자(롬 9:8, 18 참조). 이리하여 몇 가지 제한과 유의점과 더불어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에 계약이 정해지게 되자, 그 협의는 끝을 맺는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환상은 사라졌으며, "그에게서 올라가셨다." 하나님과 우리의 친교는 여기서 중단되었다. 그러나 그 친교가 하늘 나라에서는 끊어지지 않고 영원히 계속되는 잔치가 될 것임을 알아야 겠다.
아브라함과 그 가족들의 할례(창세기 17:23-27)
할례법에 대한 아브라함의 순종에 관한 기사이다. 그 자신과 그의 모든 가족들이 할례를 받았고, 그에 따라서 약속의 증거를 받았으며, 이로써 할례와 무관한 다른 가정과는 구별되게 되었다.
1. 그것은 절대적인 순종이었다. 그는 "하나님이 자기에게 말씀하신 대로" 행했다. 이유와 원인을 묻지 않았다. 하나님의 뜻이란 그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율법이었고 또 이유이기도 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으므로 그렇게 행한 것이다.2. 그것은 즉각적인 순종이었다. "당일에" 라고 했다(23,26절). 성실한 순종이란 지체하는 것이 아니다(시 119:60). 그 명령이 아직 우리 귀에 남아 있고 의무감이 생소할 때에, 즉 보다 더 편안해질 때까지 지연시킴으로써 자기를 속이지 않도록 즉각 응하는 것이 훌륭한 일이다.
3. 그것은 보편적인 순종이었다. 그는 자기는 안하고 가족들에게만 할례를 준 것이 아니라, 먼저 그들에게 모본을 보여 주었다. 또 자기 혼자만 계약의 징표가 되는 위안을 받은 것이 아니라, 모든 친족들이 그 일에 그와 동참하기를 바랐다. 이것은 가정들에게 훌륭한 모범이다. 가장들과 그들의 친족들 모두가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 하나님의 계약이 이스마엘과 세워진 것은 아니지만, 그도 할례를 받았다. 나중에는 어떻게 되든지 간에, 신앙심 있는 부모의 자녀들에게는 가시적인 교회의 특전과 계약의 징표에 대한 권리가 있기 때문이었다. 이스마엘은 축복을 받았다. 그러므로 할례도 받았다.
4. 많은 사람들이 할례를 반대하였으나, 아브라함은 거행했다. 할례가 비록 고통스러운 것이고 어른들에게는 수치스러운 것이었고, 또 세겜 사람들과 시므온과 레위처럼 그들이 쓰리고 아파서 행동하기에 거북할 때에 적들이 틈을 탈지도 모른다. 또한 아브라함은 99세나 되었고 오랫동안 하나님께서 의롭게 이미 인정했었고, 저들이 신앙적으로 행하는 일이 당시 그 땅에 거하던 가나안 사람들과 브리스 사람들에게 너무나 이색적으로 보여 비난거리가 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명령은 이와 같은 수많은 반대 조건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바는 반드시 행하여야 하는 것이므로, 혈육과 타협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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