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람, 사래, 그리고 하갈(1)(창세기 16:1-3)
아브람이 하갈과 혼인한 사실을 엿볼 수 있다. 그녀는 그의 둘째 아내가 된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아브람의 어떤 변명이 있을 수 있겠지만, 결코 그는 정당화될 수 없다. 이는 법이 "당초부터 그렇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아브람은, 그렇게 하여서 이 세상과 교회에 사람들이 보다 신속히 많아질 수 있도록 가정을 일으켜야겠다는 불법적 욕망이 있어서 그리했던 것 같다. 이 일은 분명히 일어나지 아니했어야 될 일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결혼을 첫 질서로 삼으셨고, 그것은 한 남자와 한 여자 사이에서 맺어지도록 하셨다.
Ⅰ. 이런 결혼을 성립시킨 자는(누가 그런 것을 생각해 냈겠는가?" 사래 자신이었다. 그녀는 아브람에게 "원컨대, 나의 여종과 동침하라" 고 했다(2절). 여기에 명심할 것이 있다.
1. 우리와 가장 가깝고 사랑하는 연고자를 통하거나, 우리가 신임하고 사랑하는 친구를 통하여 시험하는 것이 사탄의 술책이다. 유혹은 별로 의심할 바 없는 자를 통해서 올 때가 가장 위험하다. 그러므로 이야기하는 자가 누구인가 하는 것보다는 무슨 말을 이야기하고 있는가를 분별하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다.2. 우리 자신들이 궁리한 것보다는 하나님의 명령이 우리의 위안과 영예에 훨씬 더 좋은 조언이 된다. 아브람이 그녀의 어리석은 계획에 따르는 대신 하나님의 율법의 규례를 좇았더라면, 사래의 유익을 위해서라도 훨씬 더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흔히 스스로 악을 행한다.
Ⅱ. 그것에 대한 유인(誘因)은 사래의 불임이었다.
1. "아브람의 아내 사례는 자녀를 낳지 못했다." 그녀는 매우 아리따웠고(2:14). 매우 충실한 아내였으며, 그의 큰 재산의 공동 소유자였으나, 자식은 없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다음을 살펴보자.(1) 하나님은 여러 가지 은사를 나누어 주시는데, 우리에게 유익한 것으로 채워 주시지만 지나치게 주시지는 아니하신다. 때로는 여러 가지 십자가가 지극히 큰 즐거움에 동반되게도 하신다.
(2) 부자는 자녀에게 재물을 물려주며, 선한 사람은 그 자녀에게 교육을 크게 돌보아 주지만, 자녀의 축복은 가나한 자에게는 허락되나 부자들에게는 없으며 악한 자에게는 주어지나 선한 자들에게는 거부되는 수가 있다. 하나님은 그가 기뻐하시는 대로 행하신다.
2. 이 괴로움 속에서 사래는 하나님의 섭리를 고백했다. 즉 "여호와께서 나의 생산을 허락지 아니하셨다" 고 했다.
(1) 자녀를 주시는 자가 하나님이심과 같이(33:5), 자녀가 없는 곳에는 그 자녀를 주지 않는 이도 하나님이시라(30:2)는 것을 알자. 이러한 화는 여호와께 속한 일이다.
(2) 그러한 화는 우리가 참고 견디며 활용해야 될 것이며, 하나님께서 지혜롭고 거룩한 목적을 위하여 명령하시는 고통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자.
3. 사래는 자기의 불임을 아브람과 그의 여종을 인혼시키기 위한 구실로 이용하였고, 아브람은 그녀의 말에 넘어갔다. 여기에 명심할 바가 있다.
(1) 우리의 마음이 지나치게 육체적인 쾌락에 집착하게 될 때,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한 간접적인 방법을 쉽사리 이용하게 된다. 과도한 욕구는 흔히 변측적인 수단을 꾀하게 한다. 우리의 소원을 하나님의 섭리에 복종시키지 않는다면, 우리가 추구하는 바는 거의가 하나님의 계율을 지키지 않게 될 것이다.
(2) 기대했던 자비를 붙잡기 위하여 우리의 의무를 이탈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굳은 신뢰와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인내심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믿음 있는 자는 서둘지 않는다.
4.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다. 곧 사래의 제안에 대한 아브람의 응락은, 약속된 자손에 대한 간절한 소원으로 인한 것이었다는 점이다. 그 자손은 그 계약을 물려받도록 되어 있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의 상속자가 아브람에게서 난 아들이라고 말씀했지만 사래로 인하여 출생되리라고는 아직 말씀한 바 없었다. 따라서 아브람의 생각에는, "사래 자신이 이것을 제안하였으니 하갈이면 어떻랴?" 고 했을 것이다. 다음을 염두에 두자.
(1) 위험한 유혹은 매우 그럴 듯한 구실을 가지고 있고 그럴듯하게 꾸며지는 것이다.
(2) 육체적인 지혜는 하나님의 긍휼의 때를 제멋대로 예견하면서, 우리를 하나님의 길에서 떠나게 만든다.
(3) 중요한 일이지만 의심스러운 일은 그것을 행하기 전에 말씀과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그 뜻을 물어 보아야 한다. 그러면 이와 같은 과오는 다행히도 방지할 수 있었으리라. 여기에 아브람의 부족함이 있었다. 곤 그는 하나님의 동의 없이 결혼한 것이다. 이런 신념은 그를 부르셨던 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아브람, 사래, 그리고 하갈(2)(창세기 16:4-6)
아브람과 하갈의 불행한 결혼에서 오는 즉각적인 나쁜 결과가 나타나 있다. 그것은 순식간에 매우 큰 해독을 끼쳤다. 우리가 의를 행하지 않을 때, 죄와 고통이 문 앞에 이른다. 그러므로 본분의 길을 떠날 때에 죄책과 슬픔이 뒤따르게 되는 것은 우리 자신의 탓이다. 이 이야기 속에서 그것을 살펴보자.
Ⅰ. 사래는 멸시를 당하게 되고, 그것에 자극을 받아 격분케 되었다(4절). 하갈은 자기 주인의 아기를 잉태한 것을 눈치채자 마자, 자기 여주인을 애태우기 위하여 불순하게 굴고 애기 못 낳는 그녀를 비난하고 모욕했을 것이다(삼상 1:6 과 같이). 그리고 그 복된 땅과 약속을 물려받을 후사를 아브람에게 낳아 주리라는 것을 자랑하였을 것이다. 이제 하갈은 자기가 사래보다 더 나은 여자요, 하나님께 보다 큰 은총을 받은 여인이라고 스스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녀는 전과 같이 사래에게 복종하지 않으려 했다.
1. 천박한 노예 근성을 가진 영들은 하나님이나 사람에게 귀여움을 받게 되고 위함을 받게 되면, 오만하고 무례해지기 쉬우며 자기의 위치와 본분을 잊기 쉽다는 것을 주목하자(잠 29:21; 31:21-23). 명예를 올바로 지킨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2. 우리는 물론 우리를 죄에 빠지게 한 그 사람들로 인하여 고통도 받게 된다. 우리가 자신의 죄악의 도구로 삼았던 자들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고통의 도구로 삼으셔서 우리 자신의 악한 계획에 빠지게 하심은 하나님의 의로우신 행위임을 기억하자. 이 돌은 그것을 굴린 자에게로 되돌아가는 법이다.
Ⅱ. 사래가 기분이 나빠 있는 동안, 아브람은 시끄러운 불평을 듣게 되고 마음이 편할 수 없게 된다. 사래는 그를 몹시 비난했으며, 부당하게도 그러한 모욕에 대한 책임을 그에게 돌리고 있었다. "나의 받은 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 고 하니, 이는 그녀가 아브람이 하갈의 오만에 편들게 되었다는 지극히 부당하고 질투적인 의심을 터뜨린 것이다. 아브람이 자기의 과실을 고치고 자기의 결백함을 증명하기 위하여 해야 할 말을 듣고자 하지도 않고, 사래는 경솔하게도 이 사건에 대해서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다. 아브람이 그녀에게 당연한 권리를 거절할 듯이, "당신과 나 사이를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고 한다. 사래는 이렇게 성이 나서, 어리석은 여인이 말하듯이 말했다. 다음 사실을 유의하자.
1. 성미 급한 자들이 흔히 자기가 죄책을 지고 비난받아야 할 것으로 다른 사람과 더불어 다투게 된다는 것은 하나의 자가당착이다. 사래 자신이 그 여종을 아브람에게 주었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한 내가 그 얼마나 어리석었던고!" 라고 해야 했을 때에, "나의 받은 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 고 외치는 것이다. 교만과 노여움으로 말하는 것은 결코 현명하다고 말할 수 없다. 걱정이 극에 이르게 되면, 이성을 잃게 되어 남의 말을 듣거나 자기의 말을 이야기 할 수도 없게 된다.2. 하나님께 소란스럽고 성급하게 호소하는 자가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다. 경솔하고도 대담한 악담이 흔히는 죄와 악한 마음을 품은 증거가 된다.
Ⅲ. 하갈은 심한 학대를 받고 그 집에서 도망간다(6절).
1. 아브람의 온유함의 그 여종에 관한 문제를 사래에게 일임한다. 이는 그런 일은 가정에서의 그녀의 직분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대의 여종은 그대의 수중에 있다" 고 했다. 비록 하갈이 그의 아내였지만, 사래에 대한 여하한 무례한 짓에 대해서도 하갈을 편들거나 감싸주려고 하지 않았다. 이것은 사래에 대한 아브람의 사랑이 변함없었기 때문이다. 평화와 사랑을 간직하고자 하는 자는 심한 비난에 대해서도 온순한 대답으로 응해야 함을 기억해 두자. 부부는 서로 노하지 아니하도록 합의하고 각별히 노력해야 한다. "양보한다는 것은 큰 노여움을 진정시킨다" (잠 5:1 참조).2. 사래의 격분은 하갈을 보복했을 것이다. "사래가 하갈을 학대하였다" 라고 했다. 사래는 하갈을 종으로서의 평소의 장소와 일에 유폐시켰을 뿐만 아니라, 가혹한 행위로 그녀를 대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무정하고 가혹한 주인이 부당하게 그 종들을 고생시키는 것을 주목하고 계시며 불쾌히 여기신다는 사실을 알아두자. 욥의 생각과 같이, 그들을 위협하는 일은 삼가야 하나니, "나를 태 속에 만드신 이가 그도 만들지 아니하였겠는가?" (욥 31:15)라고 했다. 하갈의 교만은 이 학대를 견딜 수가 없었고, 그녀의 도도한 정신이 비난을 참고 견딜 수 없어서, "사래의 앞에서 도망하였다." 그녀는 사울의 노여움을 피해 다윗이 도망했듯이, 사래의 노여움을 당분간 피하고자 했을 뿐 아니라, 자기의 모든 일을 버리고 그 앞에서 도망치고 만다. 그녀는 다음 사실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1) 자기 여주인과 또 남편되는 주인 아브람에 대한 자기 자신의 잘못, 교만은 어떤 의무의 속박으로도, 아니 많은 의무의 속박으로도 좀처럼 억제될 수 없다는 것을 알자.
(2) 그녀 자신이 먼저 여주인을 멸시함으로써 노여움을 샀다는 사실. 자신의 죄로 인하여 괴로움을 당하고 있는 자는 자기의 고난을 참고 견뎌야 한다는 것을 알아두자(벧전 2:20).
아브람, 사래, 그리고 하갈(3)(창세기 16:7-9)
이것은 성서에 기록된 최초의 천사 출현 기사이다. 하갈은 율법의 모형이었고, 그 율법은 "천사들의 의향에 따라 주어진 것이다. 그러나 장차 오는 세상은 천사들에게 복종하지 아니하게 된다" (히 2:5). 다음을 살펴보자.
Ⅰ. 천사는 어떻게 도망하는 하갈을 체포하였는가?(7절) 그녀는 자기 고향으로 도망해 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녀는 애굽쪽에 위치한 술이라는 마을로 가는 도중에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괴로움이 보다 좋은 곳인 우리 집을 생각나게 해 준다면 다행한 일이다. 그러나 지금 하갈은 자기의 위치를 벗어났고, 본분을 벗어나 계속 방황하고 있었다. 그래서 천사가 그녀를 발견한 것이다.
1. 양심이나 섭리로 인하여 죄악의 길에 못 들어서게 되는 것은 큰 은혜로 알아야 한다.2. 하나님께서는 곁길로 벗어난 자들을 잠시 동안 방황하게 버려두시지만,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스스로 자초한 손해를 깨달아서 돌아가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 들게 해 주신다는 것을 알아야 겠다. 하갈은 광야에서 피곤하여 주저앉았다. 그리고 맑은 물로 자신의 기운을 차리려 할 때에 비로소 그 길을 멈추게 되었다. 하나님은 우리를 광야로 이끄시고 거기서 우리를 만나 주신다(호 2:14).
Ⅱ. 천사는 그녀를 어떻게 심문했는가?98절).
1. 그 천사는 그녀를 "사래의 종 하갈" 이라고 불렀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뜻이었다.(1) 그녀의 교만에 대한 견제였다. 그녀는 사실상 아브람의 아내였으며 다시 돌아가야 했었지만, 그녀를 "사래의 종" 이라고 부른 것은 그녀를 겸손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남을 초청할 때는 가장 높은 칭호로 부르는 것이 정중한 예의이지만 겸손과 지혜는 우리 자신이 스스로를 가장 낮은 칭호로 불러야 된다는 것을 교훈하고 있음을 알아야겠다.
(2) 그녀의 처사에 대한 견책이었다. 사래의 여종은 사래의 장막에 있어야 마땅하며, 광야의 샘물 곁에 방황하고 빈둥거리고 있어서는 안 된다. 흔히 우리가 마땅히 있어야 할 곳과 우리의 친족관계를 염두에 두는 일은 좋은 일이 된다(전 10:4 참조).
2. 천사가 그녀에게 던진 질문은 지극히 적절하고 합당했다.
(1) "네가 어디서 왔느냐" 네가 해야 할 본분과 아브람의 장막에서 축복 받은 특전에서 도망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라." 신앙 깊은 가정에서 산다고 하는 것은 큰 이득이 되며, 그런 장점을 가지고 있는 자는 마땅히 존중되어야 하는 것인 데도, 우리는 사소한 유혹이 있어도 그 곳을 떠나기 쉽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2) "네가 어디로 가느냐? 너는 스스로 죄악의 나라 애굽으로 들어가고 있느니라" (그녀가 자기 백성에게로 돌아간다는 것은 그들의 우상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다). "위험한 광야 가운데로 들어서는 것이니라." 그녀는 그러한 곳을 통과해야만 했다(신 8:15). 하나님과 자기 본분을 저버린 자들은 "어디서 왔는가?" 하는 것 뿐만 아니라 "어디로 빠져들고 있는가" 하는 것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자.(하갈과 마찬가지로) "너희가 애굽 길에 있음은 어찜이냐?" (렘 22:1; 요 18:68 참조)
3. 그녀의 답변은 정직하고 아름다운 고백이었다. "나는 나의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 라고 했다.
(1) 자기 여주인을 피하여 도망하는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2) 그러나, 자기 여주인의 "낯을 피하여", 또는 성내는 것을 피하여 도망한다고 변명을 늘어놓고 있다. 자녀들과 종들에게 온유와 친절로 대하여 그들이 나쁜 길을 택하고 범죄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그런 행동이 저들을 정당화하지는 못하더라도, 우리는 비난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4. 천사는 어떻게 적절하고 동정에 넘치는 충고를 주어 그녀를 돌려보낼 수 있었던가?(9절) "네 여주인에게 돌아가라. 그 수하에 복종하라(9절). 집으로 돌아가서 네 잘못에 대해서 겸손히 용서를 구하라. 그리고 앞으로는 네 스스로 보다 잘하겠다고 결심하라." 아브람이 그녀를 뒤쫓아 사람을 보냈다고 하는 기사는 없지만, 천사는 그녀가 영접될 것을 의심치 않았다. 자기의 위치와 본분을 벗어났던 자는 과오를 깨닫게 되면, 어떤 고생이 따르더라도 서둘러 돌아가고 개심해야 한다는 것을 알자.
이스마멜에게 준 약속(창세기 16:10-14)
천사가 "그의 여주인에게 돌아가라" 는 친절한 충고를 하갈에 주자, 즉시 그녀는 그렇게 하겠노라고 약속하고는 집을 향하여 얼굴을 돌렸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 후 천사는 하나님께서 계속하여 그녀와 그 자손에게 은혜를 베풀 것이라는 확증을 주어 그녀를 위로했다. 하나님은 자기 본분으로 돌아가는 자들을 긍휼로써 맞이하시기 때문이다.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자복하리니, 당신이 사하여 주심이라" (시 32:5).
Ⅰ. 그녀가 당면한 어려움 속에서 그녀를 위안해 주기 위하여, 그녀의 후손들에 관한 예언이 여기에 나타나 있다. "보라, 네가 잉태하였다." 이것은 그녀의 형편을 주시한 것이다. 그곳은 그녀가 거처하기에는 적합치 않은 곳이었다. 잉태한 여인들은 하나님의 섭리의 특별하신 인정과 돌보심이 자기들에게 있음을 기억하는 것이 그들에게 큰 위안이 된다는 것을 알아두자. 하나님은 은혜를 베풀어 그들의 형편을 하감하시고 거기에 알맞은 도움을 주신다.
1. 천사는 그녀가 안전하게 해산할 것과 계다가 아들을 낳으리라는 것을 보증한다. 이는 아브람이 바라고 있던 바였다. 그녀가 겪은 공포와 방황은 자녀에 대한 그녀의 소망을 빼앗아가 버렸었을지도 모르나, 하나님께서는 "네가 아들을 낳으리라" 고 하셨다. 하나님은 그녀를 그녀의 어리석음에 따라 대하시지 아니하셨던 것이다.2. 천사는 그 아들에게 이름을 붙여준다. 이것은 그녀와 그 이름에 대한 영광이기도 하다. 곧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여호와께서 들으심이라" 고 했다. 여호와께서 그녀의 호소를 들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들으셨고, 앞으로도 들어주실 것이다. 어려움에 처했을때 때에 따라 자비를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자비를 일단 경험했다면, 그와 유사한 위급에 처해서도 그와 같은 도움을 하나님께 희망할 수 있는 동기를 갖게 된다는 것을 기억해 두자(시 10:17).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 (17절). 신앙으로 애원하는 기도가 없는 곳에서도 때때로 인자하신 하나님께서는 은혜롭게도 인간의 고통스런 부르짖음을 들어주신다는 것을 알아야겠다. 기도와 마찬가지로 눈물도 말을 하는 법이다. 하나님께서 번민하는 자들의 고통을 하감하실 뿐 아니라, 그들의 말을 들어주신다는 것은 그들에게 위안을 주시는 것이다. 더욱이 어려운 시기에 처해 있을 때에 도와준 알맞은 구원은, 하나님께 감사드림으로써 언제나 기억해야 함을 유의하자. 그런 난국에, 그런 어려운 시기에 "여호와께서 나의 음성을 들으시고 나를 도와주셨다" (신 26:7; 시 31:32 참조).
3. 천사는 그녀에게 무수한 자손이 있으리라는 약속을 한다(10절). "내가 네 자손으로 반성케 하리라" 고 하였고, 히브리어로 보면, "번성하리니, 내가 그것을 번성케 하리라" 고 되어 있다. 곧 모든 세대를 통하여 자손을 번성케 하며 영속시킨다는 뜻이다. 오늘날의 터키인들이 이스마엘의 후예로 생각될 수 있으며, 그들은 큰 민족이 되었다. 이것은 아브람에게 준 약속의 이행이었으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처럼 되리라" (13:16)고 하셨던 것이다. 믿음 깊은 부모를 둔 많은 자녀들은, 비록 그들이 계약 속에 고려되어 있지는 않다고 해도 그 어버이들로 인하여 이스마엘처럼 외형적이고 일반적이 축복의 큰 몫을 차지하게 된다는 것을 알아두자.
4. 천사는 그녀가 낳을 자식의 성질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것이 아마 그녀의 바위에 거슬렀던 것 같다(12절). "그가 사람 중에 들나귀같이 되리니" (말뜻은 그렇게 되어 있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난폭하고 대담하며 인간이란 도무지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이니, 사납고 다루기 힘들며, 별 목표도 없이 살아가고, 봉사와 자제를 좀처럼 모르는 성품의 소유자를 뜻한다. 하나님의 계약에서 제외되어 있는 여종의 자녀들은, 날 때부터 들나귀 새끼 같다. 인간을 개화시키고 교화하여 현명해지게 하고 어떤 쓸모 있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은 은혜에 의해서이라는 것을 기억하자. 여기에 몇 가지가 예고되어 있다.
(1) 그는 분쟁과 전쟁 상태 속에서 살게 되리라는 것이다. "그 손이 모든 사람들을 치겠고" 곧 그의 죄를 뜻함이다. 또한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 것이라" 고 한 것은 그의 형벌을 뜻한다. 거칠고 불온한 정신의 소유자는 흔히 성가시고 어려움 많은 생활을 영위하며, 남을 화나게 한다. 남을 비방하는 자는 자기에게 그 보복이 올 것을 각오해야 됨을 명심하자. 자기의 손과 혀가 모든 사람을 치는 자는 또한 모든 자의 손과 혀가 그를 칠 것이니, 그에 대하여 하등의 불평을 할 이유가 없음을 기억하자.
(2) 그러나 그는 안전하게 살 것이며, 모든 세상과 싸워 자기의 땅을 차지하리라 했다. "그가 모든 형제의 목전에서 살리라" 고 했다. 비록 이웃에서 위협을 받고 모욕을 당해도 그는 자신의 땅을 보존하며, 아브람으로 인하여서 자기 소유지보다 더 많은 땅을 차지할 것이며, 그 이웃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25:17), 그는 생존시와 마찬가지로 죽을 때도 "형제들의 목전에서 죽었다." 경망하게 보전함을 받고 있으나, 그것은 저들이 죄로 인하여 생명을 빼앗기거나 위태롭게 될 때에도, 하나님께서 저들을 마땅히 받을 응분 이상으로 매우 인자히 대해 주시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야 겠다.
Ⅱ. 은혜스럽게 나타나신 하나님께 대한 하갈의 경건한 태도가 반영되어 있다(13,14절). 그녀의 말을 통해 다음을 살펴보자.
1. 하갈은 하나님의 전지하심과 섭리가 자기에게도 적용된다고 말함으로써, 거기에 대한 경외심을 표명했다. "하갈은 자기에게 말씀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 하였으니 이로써 그녀는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신앙 고백을 했으며, 그를 찬양하여 "나를 감찰하시는 하나님" 이라고 했다. "나를 감찰하시는 하나님" 은 하갈과 더불어 있을 영원한 하나님의 이름이며, 그녀가 생존해 있는 동안 하나님을 알고 기억할 것이니 영원한 하나님 기념이 될 것이다.(1) 우리가 관계해야 할 하나님은 감찰하시는 하나님이시며, 모든 것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임을 알아야 겠다.(고대인들이 표현했듯이) 하나님은 모든 눈이시다.
(2) 이 사실은 우리 자신 각자에게 적용되는 것임을 인정해야 한다. 다윗과 같이(시 139:1). 모든 것을 감찰하시는 이가 나도 감찰하신다. "여호와여, 당신은 나를 살피셨고 아시나이다."
(3) 하나님은 우리를 감찰하시는 분이라고 믿는 믿음은, 우리가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가는 데에 큰 도움이 되리라는 것을 알아두자. 다음은 참회자에게 합당한 말이다.
[1] "당신은 나의 죄와 어리석음을 감찰하시나이다." 내가 "당신 앞에 죄를 범하였나이다" 라고 탕자는 말한다. 다윗은 "나는 당신의 시야 속에" 있나이다라고 말했다.
[2] "당신은 나의 슬픔과 괴로움을 감찰하시나이다." 이것은 특히 하갈에게 해당하는 말이다. 자신의 어리석음으로 인하여 고통을 자초하였을 때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저버리시지 않는다.
[3] "당신은 나의 돌이킴과 회개의 성실성과 신중함을 감찰하시나이다. 당신은 죄에 대한 나의 은밀한 애통과 당신을 향한 은밀한 나의 거동을 감찰하시나이다"
[4] "당신은 내가 혹 당신을 떠나는가를 감찰하시나이다" (시 44:20, 21). 이런 생각이 언제나 우리들을 죄악에서 막아 주고, 의무를 일깨워 준다. 곧 "당신이 나를 감찰하시나이다" 라는 말씀이다.
2. 자기에게 베풀어 준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그녀의 겸손한 찬미가 있다. "내가 어떻게 여전히 나를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이것은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등을 뵈었는고?" 라고 읽을 수 있다. 이 말씀은 출애굽기 23장 23절에 있는 말씀과 매우 흡사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본 것이 아니라,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게" 본 것이다(고전 13:12). 아마도 그녀는 천사가 떠날 때까지는(삿 6:21, 22; 13:21 과 같이) 자기와 이야기하는 이가 누구인지를 몰랐을 것이다. 그 후에야 그녀는 두 제자들의 경우와 같이(눅 24:31, 32) 반성해 봄으로써 그를 알아 보았을 것이다.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다음 사실을 주목하자.
(1) 거룩한 영혼이 하나님과 나누는 교제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향한 은총의 눈을 가지심과 같이,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눈을 가짐으로써 이뤄진다. 교제는 눈으로 계속된다.
(2) 하나님과 우리의 교제의 특권은 경탄과 찬미함으로 우러러보아야 한다.
[1] 우리가 도대체 무엇이기에 이러한 은총이 허락되는가를 생각해 볼 때에 그러하다. "내가 말입니까? 그처럼 천한 내가, 그렇게 타락한 내가 말입니까?" (삼상 7:18)
[2] 그러한 은혜를 입은 우리들의 장소를 생각해 볼 때 그렇다. "여기에서요? 아브람의 장막과 그의 제단에서뿐만 아니라, 여기 이 광야에서입니까? 내가 결코 생각지도 아니했고, 나의 의무를 이탈해 나갔던 이 곳에서입니까? 주여, 어찌됨이니이까?" (요 14:22). 어떤 자는 이 질문이 부정적인 것이라고 답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참회의 반성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여기서 곧 나의 고민과 고생 중에 하나님을 구하였던가? 아니다. 전에도 그랬듯이, 나는 하나님께 대해 부주의하고 무관심하였도다. 그러나 그 분은 이처럼 나를 찾아주셔서 돌보아 주시는도다." 하나님을 때때로 그의 은총으로 우리를 앞서 가시어, 그를 찾지 아니하는 자에게도 나타나시기 때문이다(사 65:1).
Ⅲ. 이 일 때문에 그 장소에 붙게 된 명칭. "브엘라해로이, 곧 살아 계셔서 나를 감찰하시는 자의 우물" 이다(14절). 이 이름은 하갈이 붙였을 것이다. 그것은 이 사건의 영원한 기념이 되어, 오랜 후대에 이르기까지 간직되었다. 이 곳은 영광의 하나님께서 고민에 빠져 있던 한 가련한 여인에게 보이신 특별한 인정과 보호를 드러낸 곳이었다. 여기에 명심해 둘 것이 있다.
1. 모든 것을 감찰하시는 이는 영원히 살아 계신 분이시니, 그는 살아 계시고 감찰하신다.2. 은혜로써 하나님과 교제에 들어가는 허락을 받고 적절한 위로를 받은 자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영혼을 위해 베푸신 바를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해 주어 그들도 역시 용기를 얻고 하나님을 찾으며 믿도록 해야 한다.
3. 하나님께서 친히 은혜로써 나타나셨다는 것은 우리가 끊임없이 기억해야 하며,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이스마엘의 출생(창세기 16:15-16)
비록 명백히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천사가 하갈에게 명했던 바와 같이, 그녀는 그 여주인에게로 돌아가 복종하였을 것이 분명하다. 그 후 때가 차서 그녀는 아들을 낳았다. 하나님의 계율에 순종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위로를 받는다는 것을 알아 두라. 그는 "육체를 따라 난" (갈 4:23) 여종의 아들이었다. 믿음 없는 유대인들을 상징하는 것이다(25절). 여기세 명심해 둘 바가 있다.
1. 아브람을 조상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들 중에 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육체를 따라 난" 자들이다(마 3:9)2. 교회 안에 있는 육의 자손들이 영적 자손보다 일찍 열매를 맺게 된다. 사람들을 경건의 외모를 꾸미도록 만드는 일을 경건의 능력에 복종케 하는 것보다는 용이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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