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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노아와 그 아들들에 준 축복(창세기 9:1-7)

우리가 전장의 끝에서는 새 세상의 씨앗의 될 인류의 남은 자들에 관한 기사, 곧 하나님께서 그 심중에 이르신 지극히 인자스러운 일들을 읽어보았다. 이제 여기에서는 "그들에게" 이르신 그 인자스러운 일들을 살피게 된다. 총괄적으로 보면, "하나님께서는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었다" (1절). 이는 하나님이 그들에 대한 호의와 은혜로운 은총을 약속하셨다는 뜻이다. 이것은 그가 자기의 심중에 으리신 바로부터 비롯된다. 하나님의 인애하신 모든 약속은 그의 사랑의 뜻과 자신의 계획으로부터 솟아나온다. 에베소서 1장 11절과 3장 11절, 그리고 예레미야 29장 11절을 보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노라" 고 했다. 우리는 노아가 제단을 쌓고 제사를 드림으로써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 것(8:20)을 읽은 바 있다. 이제 여기서는 하나님께서는 성실하게 그를 찬양하는(즉 좋게 말하는)자들에게 은혜로운 복을 내려 주신다(즉 좋은 것은 해 주신다)는 것을 기억해 두자. 자신이 받은 바 은혜에 대해서 진심으로 감사함을 드리는 것이 그 은혜를 확증하고 보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인 것이다. 다음에 "대헌장" (Magna Charta)이 있으니, 이전의 헌장은 벌을 받아 빼앗겼기 때문에, 이제 새로이 건설되고 실현될 새로운 자연 왕국의 "위대한 헌장" 이 주어진 것이다.

Ⅰ. 이 헌장은 인간들에게 친절하고 은혜로운 것을 허락한다.

1. 광대한 땅의 허락과, 사람이 크게 증가하며 그 땅을 소유하고 향유하리라는 약속이 있다. 최초의 축복이 여기에 갱신되어 나타났다. 즉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1절) 했으며, 이것이 또 다시 반복되어 있으니(7절), 이는 곧 인간 종족이 새로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1) 이제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을 그들 앞에 두시고, 세상이 존속하는 한, 그것은 그들의 소유이며 후사가 된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세상을 소유이며 거주지로 삼게 하기 위하여 인간의 자녀들에게 이 세상을 주신다는 것을 기억하자(시 115:16). 비록 그것이 낙원이 아니라 오히려 광야이긴 하지만, 우리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것보다는 훨씬 나은 것이라 하겠다. 지옥이 아닌 것이 다행이니 하나님께 감사할지어다.

(2) 하나님께서는 인류를 이 땅 위에서 번성케 하시고, 영속케 하시는 복을 주신다. 그리하여 조만간 인간이 거주할 수 있는 모든 땅 위에는 다소간의 인간들이 거주케 하신다. 한 세대가 지나가도 세상이 존속하는 한 또 다른 세대가 뒤를 잇는다. 그리하여 모든 인류가 영원의 대양으로 인도될 때까지 인종의 흐름은 끊임없이 계승함을 입게 되고, 그것을 세월의 흐름과 병행되게 하시었다. 비록 아직까지는 사망이 권세를 부리고 여호와는 여전히 심판자로서 알려진다고는 해도, 그 당시와 같은 인종의 멸망은 두 번 다시 이 땅에 없게 하시며, 오히려 인종을 충만케 하셨다(행 17:24-26)

2. 하등 피조물들을 다스리는 권능을 허락하심(2절)은 그가 다음 일을 허락하심이라.

(1) 인간 이외의 피조물들에게 칭호를 붙일 권리. 즉 너희들의 필요와 유익을 위하여 "이들은 너희 손에 붙이었음" 이니라고 했다.

(2) 이 피조물들은 지배할 권리이다. 이것 없이는 그 같은 호칭의 권리도 보람이 없다. 즉 "땅의 모든 짐승이 너희들 두려워하며 너희를 무서워하리리" 고 했으니, 이는 이전의 권리를 회복시키는 것인데(1:28). 단 한 가지 차이점은 무후한 자는 사랑으로 다스리고 타락한 자는 두려움으로 다스린다는 사실 뿐이다. 이제 이 같은 허락은 아직까지도 유효한 것으로 남아 있어서, 우리가 지금까지도 그 혜택을 입고 있으니 다음과 같다.

[1] 우리에게 여러 모로 유용한 동물들은 길들여서 우리의 필요에 따라 부리거나 식물로써 사용할 수 있다. 말과 소는 참을성 있게 고삐와 멍에를 달게 받고 있으며, 양은 털 깎는 사람과 도살자 앞에서는 벙어리와 같으니, 이는 그들에게 사람을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2] 여러 가지 우리들에게 해를 끼치는 동물들은 속박을 당하게 하여, 비록 사람이 때때로 그 중 어떤 동물에 의해서 피해를 입는다고는 하더라도 그들이 서로 합하여 인간을 대적하게 하지는 못하게 하신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이용하셔서 홍수로 하셨던 것 만큼이나 효과적으로 이 세상을 멸망시킬 수가 있었을 것이다. 사실상 그것은 하나님의 중한 심판의 하나이다(겔 14:21). 이 같은 두려움과 무서움이 아니고는 무엇이 이리들로 하여금 우리들의 마을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사자가 우리들의 길거리에 들어오지 못하게 광야에 감금하고 있겠는가? 아니 오히려 그들 동물들 가운데 얼마간은 사람들에게 길들여졌다(약 3:7).

3. 생존과 생계의 허락이다. 즉 "모든 산 동물은 너희의 식물이 될지라" 고 했다(3절). 지금까지도 인간은 땅에서 나는 소산인 열매와 채소와 뿌리 및 모든 종류의 곡식과 젖만을 먹도록 제한되어 있었던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사실상 처음의 허락은 그러하였었다(1:29). 그러나 아마도 홍수가 땅의 효력을 대부분 쓸어버렸기 때문에 그 소산물은 보다도 부족되고 자양분이 별로 없게되어, 하나님께서는 이제 허락의 범위를 넓혀 인간이 육식(肉食)을 먹도록 허용하셨다. 이것은 아마 하나님께서 지시하시기까지는 인간 자신이 결코 생각하지도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양은 이리와 같이 피를 먹을 욕망은 결코 갖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사람이 채소를 먹듯이 자유롭고 안전하게 육식을 먹을 수 있도록 허락 받은 것이다. 이제 여기서는 다음 사실을 배우자.

(1) 하나님께서는 선한 주인이어서, 우리들이 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를 섬기면서 평안하게 살 수 있는 길을 마련하여 주시니, 이는 필요뿐만 아니라 우리의 기쁨을 위해서이다.

(2)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피조물은 선하여 버릴 것이 없다" 는 점이다(딤전 4:4). 그후에, 어떤 고기는 식물로서 매우 적절했으나 의식법에 따라 금지되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렇지는 않았던 것이므로, 복음 아래서는 그럴 필요가 없다.

Ⅱ. 이 헌장의 계율과 조건도 적지 않게 친절하고 은혜로우시며,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호의의 실증이다. 유대 학자들은 흔히 노아나 노아의 아들들의 일곱 가지 계율에 관해서 말하고 있다. 이것은 모든 민족들이 꼭 지켜야 하는 것이므로, 기록해 두는 편이 좋으리라고 말한다. 그 첫째는, 우상 숭배 금지이다. 둘째는 불경스런 말을 삼가고,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라는 것이다. 셋째는 살인하지 말라. 넷째는 근친상간과 모든 부정한 것의 금지이다. 다섯째는 도둑질과 약탈을 말라. 여섯째는 정의로 다스리라. 일곱째는 살아 있는 고기를 먹지 말라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할례의 의무가 없는 개종자들도 지켜야 할 필요가 있다고 유대인들은 주장했다. 그러나 여기에 부여된 모든 계율은 인간의 생명과 연관되어 있는 것들이다.

1. 인간은 자신의 건강을 침해하고 해치는 식물을 먹음으로써, 자신의 생명을 상하게 해서는 안된다(4절). "너희는 고기를 맹수들이 먹듯이 그 생명되는 피 채(즉 생고기) 먹지 말 것이니라." 고기를 먹는 자유를 허용함에 있어서 이같은 제한을 첨가할 필요가 있었으니, 이는 그것으로써 자신의 몸을 살찌게 하는 대신에 자신을 멸망케 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것을 보이시고자 하셨을 것이다.

(1) 인간이 비록 모든 피조물의 주인이라고는 하더라도 창조주에게 중속되어 있으며, 그 율법의 구속 하에 있다고 하는 것이다.

(2) 인간이 식물을 취하는 데 있어서 탐욕한다거나 성급하게 서둘지 말고, 그것이 요리되기를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는 사울의 군병들과 같아서도 아니되며(삼상 14:32), 또한 "고기를 탐식하는 자" 와 같아서도 안 된다(잠 23:20)

(3) 그들은 하등 동물들에 대해서 야만적이거나 잔인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그들은 주인임에는 틀림없으나 폭군이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저들을 죽일 수는 있다고 하되, 자신의 쾌락을 위해서 저들을 괴롭혀서는 안 되며 아직 살아 있을 때에 산 동물을 그대로 찢거나 먹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4) 제사법이 계속되는 동안, "사람의 죄를 속하게" 한 피는(레 17:11) 희생 제물의 생명이 죄인의 생명을 대신하여 받아들인 바 되었다는 뜻이다. 피라는 것은 예사로운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오직 제단이나 땅 위에서 "여호와 앞에서 부어져야함" 한다(삼하 23:16). 그러나 이제는 위대하고도 진실한 제사를 드렸으니, 그 율법의 의무는 이유를 상실하게 되었다.

2. 인간은 자기 자신의 생명을 빼았아도 안 된다. 즉 "내가 너희 피 곧 너희 생명을 찾으리라" (5절)고 말씀하셨다. 우리들의 생명이란 내 마음대로 버릴 수 있는 나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며, 우리는 그의 뜻에 따라 생명을 포기해야 한다. 우리가 만일 어느 모로나 자신의 죽음을 재촉한다면, 하나님 앞에서 그 책임을 져야 한다.

3.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 그 생명을 내가 찾으리라" 했으니, 짐승이 사람의 생명을 해친다는 것도 용납될 수 없다. 비록 하나님께서 얼마 전에 생명을 그같이 멸망시키기는 했지만, 인간의 생명에 대한 인자하심을 나타내 보이시기 위해서 인간을 살해하는 짐승에게는 죽음으로 갚는다. 이것은 모세의 율법에 의해서도 확인되는 것이니(출 21:28), 내가 생각하는 바로는, 오늘까지도 변함없이 그것이 지켜지고 있다고 하겠다. 이같이 하나님께서는 살인의 죄를 미워하신다는 사실을 보여 주셨으니, 우리 인간들은 그보다 더 그것을 증오해야겠으며, 살인자를 벌하는 것 뿐 아니라 살인을 제압해야겠다(욥 5:23 참조).

4. 고의적으로 살인자는 죽음에 처해야 한다. 이것은 형벌의 공포로써 속박하기로 정해진 죄이다.

(1)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 했으니, 하나님께서 살인자를 벌하신다는 것이다. 즉 "내가 피살자의 죄를 살인자에게 갚아 주리라" 는 것이다(대하 24:22). 하나님께서는 불의하게 생명을 앗아간 자에게서 그 사람의 생명을 찾으실 때에는, 살인자가 피살자의 생명을 돌려줄 수 없으므로 그 대신에 자기 자신의 생명을 드려야 한다. 그것만이 상환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사람이 그렇게 할 수 없건 아니하건 간에, 하나님은 분명히 피를 찾으신다는 것을 기억하여 두어야 겠다. 이 세상에서나 저 세상에서 언제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눈에는 숨겨져 있던 살인을 찾아내시어서, 부당하게 공인되고 정당화되었던 살인을 벌하실 것이니, 이 일은 인간의 손으로서는 할 수 없는 큰 일이다.

(2) 통치자는 살인자를 벌해야 한다(6절). 즉 갑자기 성이 났다든가 미리 계획해서든 간에, 사람의 피를 흘리면(미리 계획한 원한과 마찬가지로 성급하게 노여워하는 것은 마음의 살인이기 때문이다. 마 5:21) "사람에 의하여 그의 피를 흘릴 것이라" 했다. 이는 통치자나 또는 누구도 피를 갚는 자로 지명되었거나 허락된 자가 이 일을 해야 한다. 이같은 목적을 위한 하나님의 일군이 있음으로써 악의를 품거나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는 보호자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이 공연히 칼을 차고 있는 것이 아니다" (롬 13:4). 홍수 이전의 가인에 관한 기사에 따르면, 하나님은 친히 자기의 손으로 살인을 다스려 벌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러한 심판을 처음에는 한 가장에게 맡기셨고, 다음에는 한 나라의 우두머리에게 맡기셨으니, 그들은 자기들에게 맡겨진 임무에 신실하여야 한다. 고의적인 살인은 언제나 죽음으로 벌받아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라. 묵인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왕을 용서하지 아니하실(왕하 24:3, 4) 죄이다. 따라서 왕은 자기 백성들이 그런 죄를 지으면 용서해서는 안 된다. 이 율법에는 한 가지 이유가 부가되어 있다. 즉 이는 처음에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기 때문이라" 고 했다. 인간이란 그 조물주에게는 귀중한 피조물이다. 따라서 우리들에게도 그러해야 한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영광을 주셨으니, 우리들도 인간에게 모욕을 돌리지 않도록 하자. 그 같은 하나님의 형상의 자취는 불의하게 사람을 죽여 하나님의 형상을 훼손하고 그에게 치욕을 돌리는 그런 타락한 인간에게도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짐승을 죽이는 일은 허락하셨으나, 그들의 노예를 죽이는 것은 금하셨다. 이들은 하나님의 피조물일 뿐 아니라. 그의 형상이요, 훨씬 더 고귀하고 뛰어난 성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약 3:9). 모든 인간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형상에 속한 것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통치자 들은 그 외에도 하나님의 능력의 형상을 지니고 있고, 성도들은 하나님의 거룩함의 형상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왕이나 성도들의 피를 흘리게 하는 자는 2중적 죄를 범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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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에게 준 계약(1)(창세기 9:8-11)

Ⅰ. 여기에는 이 새 세상과 맺은 하나님의 계약과 그 계약의 범위가 총괄적으로 나타나 있다(9,10절). 다음을 고찰해 보자.

1. 은혜롭게도 하나님은 계약이라는 방법으로써 인간과 교제하시기를 기뻐하신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은 그의 친절하긴 은총을 크게 드러내 보이시고, 인간의 의무와 순종을 합당하고도 유익한 봉사임을 알게 하심으로써 그들에게 용기를 주신다.

2. "내가, 보라, 나의 ……" 라고 하셨으니 사람과 하나님의 모든 계약은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신다는 것이다. 이 같은 말씀은 "하나님께서는 높은 데 계시면서도 인간에 대해서 이처럼 귀히 여기심을 보라" 고 하는 우리들의 찬양을 발하게 하고 다른 한편으로, "보라, 내가 성실하게 지켜서 이룩케 하는 계약을 세우느니라" 고 하심으로서 언약의 효력에 대한 우리들의 확신을 확고히 하신다.

3. 하나님의 계약은 하늘의 기둥이나 또는 땅의 기초보다도 훨씬 튼튼하게 세워진 것이어서 취소될 수 없다는 것이다.

4. 하나님의 계약은 서약자들과 또한 그 자손들과 더불어 믿어지는 것이니, 약속은 그들과 그 자녀들에게도 해당된다는 것이다.

5. 하나님과의 계약에 관련되어 그 은혜를 입게 될 자들이 있다. 그러나 그들 스스로 그 계약에 합의하거나 동의를 표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계약은 "모든 생물 곧 이 땅의 모든 짐승들" 에게도 해당되기 때문이다.

Ⅱ. 이 계약에는 특별한 의도가 있다. "홍수가 다시는 있지 아니라" 했으니, 또 다른 범람으로 이 세상이 침몰되지 않도록 보호하시려고 계획하신 것이다. 한 때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물에 잠기게 하셨으나 여전히 세상은 추악하고 하나님을 분노케 하는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이 사악함을 예견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결코 이 세상을 물에 잠그지 않겠노라고 약속하셨다. 이는 그가 우리들의 죄를 따라 우리를 다스리지 아니하시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세상이 범람하지 않고 그대로 존재한다는 것은, 어떤 이 세상 자체의 개혁 때문이 아니라 그 모두가 하나님의 선하심과 신실하심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옛 사람이 멸망당함이 정의의 기념비라면, 이 세상이 오늘날까지 현존하는 것은 자비의 기념비인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는 다시는 노아의 홍수로 땅 위에 범람치 않게 하리라고 하신 그 맹세로 말미암은 것이다(사 54:9). 하나님의 약속은 바다와 구름으로 하여금 그들에게 명령된 자리를 지키게 하시고, "한계를 정하여 문과 빗장을 세워 자기까지만 오게 하신다" (욥 38:10, 11). 하루에 두 번씩 몇 시간 동안 조수가 밀 듯이 바닷가 수일간이나 밀려든다면, 세상은 그 얼마나 황폐해질 것인가! 우리가 흔히 만나는 그러한 소나기가 오래 계속해서 퍼붓는다면, 구름이란 그 얼마나 파괴적인 것이 되겠는가!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바닷물은 흐르게 하시고 비를 퍼부음으로써, 하나님께서 진노하시게 되면 어떤 일을 행하는지를 보여 주신다. 그러나 이 두 가지로 세상이 범람치 않게 보호해 주심으로써, 하나님은 긍휼과 진리로써 어떤 일을 행하시는지를 보여 주신다. 약속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긍휼과 그 이행을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진실을 그에게 찬양하라. 그러나 이 약속은 다음과 같은 일을 방해하지 아니한다.

1. 하나님께서 황폐케 하는 다른 심판을 인류에게 내릴지도 모른다는 일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 화살은 더 이상 사용하지 않으시겠다고 명세하셨지만, 하나님의 화살통에는 또 다른 화살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2.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어느 특정 지역이나 나라를 바다나 강의 범람으로 멸하실지도 모른다.

3. 또 최후의 날에 불로써 세상을 멸하시라는 것을 파약(破約)하는 것은 아니다. 옛 세상을 물에 잠기게 한 죄가 이 세상을 불에 살라 버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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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에게 준 계약(2)(창세기 9:12-17)

사람들 사이에 협약 조건은 흔히 날인을 하는데, 이는 상호간의 만족을 위해서 그 계약을 보다 귀중한 것으로 삼고 그 약속의 이행을 보다 확실케 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상속자들에게 그 뜻의 변치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의 계약에 인치심으로써 보증하셨다(히 6:17). 이는 우리들이 그 위에 티전을 확고히 세우게 하려 하심이다(딤후 2:19). 이 같은 자연의 계약의 인은 극히 자연적이다. 곧 "무지개" 였다. 이것은 물론 그 이전에도 제 2의(자연의) 이유가 공동 작용했을 때에 구름속에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이제 하나님의 뜻으로써 계약의 인으로 세우시기까지는 결코 계약의 표가 아니었다. 이제 이 계약의 표(인)에 관해 살펴보자.

1. 이 표는 그 계약을 비준하는 것으로 삼아, 그 약속의 진실성을 반복하여 보증한다는 사실이다. 즉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다(13절)" . "무지개가 구름 속에 나타나리라" (14절) 했으니, 이는 그것을 보는 눈이 마음을 감동케 하여 그 믿음을 확고하게 한다는 뜻이다. 또 그것이 "언약의 증거가" 될 것이라 했으며(12,13절), "내가 내 언약을 기억하리니 다시는 물이 홍수가 되지 아니라" (15절)는 것이다. 아니 오히려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마치 비망록이라도 필요하신 듯이, "내가 그것을 보고 영원한 언약을 기억하리라" 고 하신다(16절). 따라서 여기에서는 이 소망을 붙들고 있는 우리에게는 확실하고도 굳은 위로함이 있다는 것이 줄줄이 나타나 있다.

2. 무기개는 구름이 비를 막 내리려 할 때 나타나며, 또 비가 다온 후 구름이 걷힐 때 나타난다. 비가 온 땅을 뒤덮을까봐 두려워하고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약속의 표를 보여 주시어서 땅이 뒤덮이지 않게 하여 주신다. 이렇게 하여 하나님은 때 맞는 용기를 주심으로써 우리들의 두려움을 물리쳐 주신다.

3. 구름이 짙으면 짙을수록 무지개는 구름 속에서 더욱 밝아진다. 따라서 험난한 고통이 많이 있을지라도 용기를 북돋아 주는 위로함은 훨씬 더 큰 법이다(고후 1:5).

4. 무지개라고 하는 것은 하늘 한 쪽이 맑을 때에 나타나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은 진노한 가운데서도 긍휼을 기억하신다는 것을 암시한다. 구름이 마치 무지개로 둘러싸이는 것같이 되어 하늘 가득히 퍼지지 않게 하였다. 무지개는 채색된 비이거나 혹은 금빛으로 물든 구름의 가장자리이기 때문이다.

5. 무지개는 태양 광선의 반사이다. 이는 그 계약의 표가 지니고 있는 영광의 의미가 의의 태양이신 그리스도로부터 유래된다는 점을 암시하고 있으며, 그리스도 역시 "무지개가 그 보좌에 둘려 있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고(계 4:3), "그 머리위에 무지개" 가 있는 것으로 서술되어 있다(계 10:1). 이것은 그의 권세뿐만 아니라 그가 중보자이심을 암시하는 것이다.

6. 무지개는 그 속에 불타는 듯한 빛깔이 있다. 이것은 비록 하나님이 세상을 다시는 물에 잠그지 아니하신다고 해도 하나님의 은밀한 뜻이 끝나는 날에는 이 세상이 불로 소멸되리라는 사실을 시사해 준다.

7. 활(무지개의 모양)은 공포를 나타내는데, 이 활(무지개)은 핍박자들을 대적하기 위해 예비했던 활과 같이(시 7:12, 13) 활줄이나 화살은 없다. 활만으로는 아무런 효과도 올릴 수가 없다. 무지개는 하나의 활어지만, 위를 향하고 있는 활이며 이 땅을 향하고 있는 활은 아니다. 그것은, 계약의 표면 이 활은 위안을 주기 위함이지 두려움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8. 하나님이 무지개를 보시고 계약을 기억하시는 것과 같이 우리들도 그같이 하여 믿음과 감사함으로써 그 계약을 언제나 마음에 간직해 두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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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의 죄(창세기 9:18-23)

Ⅰ. 여기에는 노아의 가족과 직업이 기록되어 있다. 노아의 아들들의 이름이 다시 언급되어 있다. 그리고 그들의 후손들이 온 땅에 퍼지게 되었다 한다(18,19절).이로써 홍수 이후에는 노아가 자녀들을 낳지 아니했으며, 온 세상이 이 세 아들에서 유래된 것을 나타내고 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기만 하면, 지극히 작은 한 사람으로도 수천 명이 되기 하시며, 시작은 작았던 자들이 그 최후는 매우 크게 되게 하실 수 있음을 명심하자. 그와 같은 것이 하나님의 축복의 능력과 효력이다. 노아는 "농부" 이었으며 히브리어로는 "땅의 사람" 인데, 이는 땅에 종사하는 사람으로서 그가 흙을 지키고 소유하는 자이었음을 뜻한다. 우리들 모두가 본래는 땅의 사람들로서 그 땅으로 만들어졌으며, 그 위에서 살며, 그것을 도모한다. 많은 자들이 그러한 죄를 짓고 세상에 속한 것들에 빠져 있다. 노아는 직업상 땅의 열매를 경영하게 되었다. 노아가 "농업을 시작하였다" 했으니, 이는 그가 방주를 나온 얼마후에 그의 옛 직업으로 돌아갔다는 뜻이다. 이것은 당초에 방주를 짓는 일로 인해서 제쳐놓아야 했던 일이었으며, 그 후에는 자신과 가족들을 위해서 마른땅에 집을 짓기 위해서 또 제쳐놓았던 일일 것이다. 그러는 동안에는 그가 목수로서 일해 왔었지만, 이제 다시금 농부로서의 일을 시작하였다. 여기에서 우리들이 배울 바는 비록 노아가 위대하고도 선한 사람이었으며 늘고 부유한 사람이었으며 하늘로부터 크게 은총을 입고 땅에서 크게 명예를 차지한 사람이었지만, 나태한 생활을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농부라는 직업을 하찮은 것이라고 생각지 아니했다는 점이다. 하나님은 그의 섭리로써 우리들로 하여금 잠시 동안 우리의 천직을 떠나게 하시지만, 그 때가 지나면 우리는 겸손한 마음과 근면으로써 다시금 그 일에 열중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자. 또 우리들이 부르심을 받은 천직을 통해서 신실하게 "하나님과 함께 거하여야" 됨을 기억하자(고전 7:24).

Ⅱ. 노아의 죄와 수치에 관한 기사가 있다. "그는 포도나무를 심었다" 그리고 그 포도 수확을 거둬들였을 때에, 아마 자기 가정에서 즐거운 잔칫날을 정하여, 아들들과 한 자리에서 포도나무가 늘어난 것과 아울러 그 가정이 늘어난 것을 기뻐했을 것이다. 우리는 그가 잔치에 앞서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제사를 올렸을 것이라고 가정할 수도 있다. 만일 이것을 생략했다면, 하나님께서 노아를 내버려두신 것은 당연했으리라. 하나님과 함께 시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짐승으로 끝나게 되는 법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지 않았으리라고 관대히 바란다. 아마 그는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잔치를 벌였을 것이며, 창세기 23장 3-4절에 "나로 먹게 하여 내 마음껏 네게 축복하게 하라" 고 이른 이삭과 같이, 그의 아들들을 축복하였을 것이다. 이 잔치에서 그는 "포도주를 마셨으니", 포도나무를 심은 자가 어찌 "그 열매를 먹지 않겠느냐?" 그러나 "취하였다." 그는 나이에 비해 정도 이상으로 지나치게 많이 마셔 버렸다. 우리는 여기서 그가 그 이전이나 이후에는 결코 술에 취하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어찌하여 그가 이 같은 실수를 저지르게 되었는가를 살펴보자. 그 것은 그의 죄 치고는 큰 죄였으며, 그런 큰 구원이 있은 얼마 직후에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 더욱 악한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히스기야에게 하셨듯이(대하 32:31) 그를 그의 마음대로 하도록 버려두셔서, 그의 이같은 실수를 기록에 남게 하셨으니, 우리들에게 다음 사신을 알려 주시기 위함이다.

1. 아담의 타락 이후 아무리 순전한 인간의 가장 아름다운 기록이라 하더라도, 거기에는 흠과 잘못이 있다고 하는 사실이다. "노아는 당대에 완전한 자" (6:9)라고 일컬었으나 그것이 그의 성실을 뜻하는 것이지 죄 없는 완전함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2. 조심성과 결심이 있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유혹 가운데서도 자신의 정결을 지켜나가던 자도, 때로는 유혹의 시간이 지나가 버리면 방심하고 부주의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잊음으로써 불시에 죄악에 빠지고 만다는 것이다. 전에는 주위 사람들이 취했을 때에도 술취하지 않았던 노아가 이제는 주위 사람들은 취하지 않았는데도 홀로 취해 있는 것이다. "스스로 섰다고 생각하는 자는 조심할지어다."

3. 우리들이 하나님의 선한 피조물을 풍성하게 사용할 때에는 매우 조심성 있게 하여 지나치게 사용하는 일이 없도록 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의 마음이 둔하여지지" 아니하도록 조심해야 한다(눅 21:34). 그리하여 노아의 실수의 결과는 수치가 되었다. 노아가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었다." 이는 아담이 금단의 열매를 먹고 그리했듯이 벌거벗어서 수치가 되었다. 그러나 아담은 숨을 곳이라도 찾았으나, 노아는 지각과 이성이 너무나도 결여되어 있어서 덮을 것마저 찾지 못하였다. 이것이 바로 노아가 생각조차 못하였던 바 포도나무의 열매였다. 여기에서 술취하는 죄에 대한 중대한 해독을 살펴보자.

(1) 그것은 인간을 폭로시킨다. 사람이 술에 취하면 그에게 일임했던 비밀을 쉽사리 드리내게 되고 누설하고 만다. 얼마나 인간이 나약한 것인가! 술 취한 문지기는 문을 열어 놓고 지킨다.

(2) 그것은 인간의 품위를 떨어뜨리고, 경멸의 대상이 되게 한다. 그것은 인간을 폭로시킬 뿐 아니라, 수치스럽게 만든다. 사람은 흔히 술이 깨고 나서 생각하면 낯을 붉힐 일들을 술 취했을 때는 말하고 행동하기도 한다(합 2:15, 16).

Ⅲ. 함이 "그 아비의 하체를 보고 두 형제에게 고했다" (22절). 여기에는 그의 뻔뻔함과 불효가 있다. 그것을 우연히 본의 아니게 보았다고 하면 범죄라고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1. 그러나 에돔 사람들이 그 형제의 날(재앙의 날)을 방관하였듯이(욥 12:), 그는 그것을 보고 스스로 모욕하였다. 함은 아마 때때로 술 취하였고, 그럴 때마다 그이 선한 아버지로부터 꾸지람을 받았을 것이다. 따라서 이제 그는 자기 아버지가 술로 정신 잃은 것을 보고 기뻐하였을 것이다. 잘못된 길을 걷고 있는 자들은 때때로 남의 잘못을 보고 기뻐하기가 일쑤라는 점을 주목하자. 그러나 사람은 부정을 기뻐하지 않을 뿐 아니라, 자신의 죄를 후회하는 참된 회개자는 다른 사람들의 죄도 기뻐하지 않는다.

2. 건방지고 조롱하는 태도로 "그가 밖으로 나가서(문자적으로는 "길거리에서" 이다) 두형제에게 고하였다." 즉 아버지가 타락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것은 매우 큰 과오이다. 즉 다음과 같은 행동이다

(1) 죄를 조롱거리로 삼는 일이요(잠 14:9), 오히려 통탄게 여겨야 할 일을 허풍 떨고 선전하는 일이다(고전 5:2).

(2) 또 남의 잘못, 더욱이 마땅히 존경해야 할 자기 부모의 과오를 공표한다는 것은 큰 잘못이다. 노아는 선한 사람이었고, 함에게는 착한 아버지이기도 했다. 그러니 이 같은 행동은 아버지의 인자스러움에 대해서 너무나 야비하고 불성실한 보복이었다. 함은 여기서 "가나안의 아비" 라고 불리고 있다. 이것은 그 자신이(자기 자녀들의) 아버지인 자는 자기의 아버지가 되는 사람을 더욱 존중히 여겨야 한다는 점을 암시해 준 것이다.

Ⅳ. 가엾은 자기들의 아버지의 수치를 덮어 주는 셈과 야벳의 효성스러운 돌봄이 있다(23절). 그들은 스스로 그것을 보려고 하지 아니하였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도록 덮을 것을 마련하였다. 이것은 남의 죄와 수치에 대한 사랑의 본보기를 우리들에게 제시해 주고 있다. 따라서 우리들은 그러한 것을 공표하는 자들과 함께 공모하는 말을 해서는 아니될 뿐 아니라, 그것을 가리워주는 조심성이 있어야 한다. 우리가 그런 일을 당하게 될 때와 마찬가지로 남에게도 친절히 대해 주는 사려가 있어야 한다.

1. 모든 사람의 잘못을 덮어 주는 사랑의 겉옷이 있다(벧전 4:8)

2. 또한 부모와 다른 어른들의 잘못을 덮어 주는 존경의 옷이 나타나 있다.

 

9:19 없음.

 

9:20 없음.

 

9:21 없음.

 

9:22 없음.

 

9:23 없음.

 

9:24

노아의 예언(창세기 9:24-27)

Ⅰ. 노아가 "술이 깨었다" 했으니, 그가 제정신으로 돌아온 것이다. 수면이 그를 고쳐 주었으며, 이제 철저히 치료되어서 그 후로는 결코 그같은 죄에 빠지지 않도록 되었으리라고 생각할 수 있다. 노아처럼 잠자던 자는 또한 노아처럼 깨어야 한다. 깨었을 때 "내가 다시 술을 찾겠노라" (잠 23:35)고 말하는 술꾼과 같아서는 안 된다.

Ⅱ. 예언의 영이 노아에게 임하여, 야곱이 죽을 때와 같이 이제 아들들을 불러 장차 당할 일을 가르쳐 주었다(49:1).

1. 그는 힘의 아들 가나안에게 저주를 선언하는데(25절), 그 저주에게 함 자신도 저주를 받게 된다. 이는 함의 아들 가나안이 다른 아들들보다 죄가 더하였기 때문이든지, 또는 이 아들의 후예들이 후에 그들의 땅에서 송두리째 뿌리 뽑혀서 이스라엘을 위한 자리를 내어 주에 되겠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모세는 여기서 가나안 사람들과의 싸움에서 이스라엘에게 용기를 주기 위하여 이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즉 비록 가나안 사람들이 강대한 백성들이기는 해도 옛부터 저주받은 백성이었으며, 멸망할 운명에 처해 있었다는 것이다. 바로 그 저주는 "그 형제의 종들의 종까지 되리라" 는 것이었다(이는 가장 비천한 종을 뜻하는 말이다). 날 때는 자기와 동등한 자들이 정복으로 그의 주인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을 분명히 가나안 족속들에 대한 이스라엘의 승리를 지적하는 것이다. 이로써 모든 가나안 사람을 칼로 베든지 사역을 시키게 되었으니(수 9:23; 삿 1:28, 30, 33, 35), 저주한지 800년 후에 이루어졌다. 다음과 같은 사실을 기억하자.

(1)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조상의 죄를 그 자녀들에게 돌리시는데, 특히 자녀들이 그 조상의 사악한 기질을 이어받고 그들의 사악한 습관을 모방하며, 저주의 유전을 막아버릴 아무런 방도를 취하지 아니할 때 그러하다.

(2) 남들은 욕보이는 자에게는 의당히 치욕이 돌아온다. 특히 그것도 자기 부모를 모욕하고 마음 아프게 하는 자가 더욱 그러하다는 것이다. 자신의 육친을 조롱하는 불효한 자식은 "자녀라고 불리울 아무런 가치도 없을 뿐만 아니라, 품삯 받는 종으로", 아니 오히려 그 형제들 간에서도 "종의 종으로" 삼아야 한다.

(3) 비록 하나님의 저주가 서서히 작용한다고 해도 그것이 필경에는 이루어진다. 가나안 사람들은 노예가 될 저주를 받았으나, 그래도 매우 오랫동안 지배력을 휘돌렸다. 한 가정이나 어느 개인이 하나님의 저주에 놓여 있다 해도, 가나안 사람들의 경우와 같이 그들의 죄악의 한도가 찰 때까지 오래도록 이 세상에서 융성할 수도 있다. 아직 멸망의 시기는 도래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멸망의 인치심을 받고 있다. 그러므로 "너희 마음으로 죄인들을 부러워하지 말지니라.

2. 노아는 셈과 야벳 위에 축복을 내린다.

(1) 셈을 축복했다. 아니 오히려 셈을 인하여 하나님을 찬송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생각할 수 있는 최대의 영예와 행복을 그에게 부여하고 있다(26절). 다음을 살펴보자.

[1] 노아는 여호와를 "셈의 하나님" 이라고 부르고 있다.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 은 세 갑절이나 복이 있다(시 144:15)는 사실이다. 온갖 축복이 그 가운데에 포함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주신 축복이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을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리라" (히 11:16). 이로써 자기 아버지에 대한 셈의 효성은 충분히 보답 받고 여호와께서 친히 "그의 하나님이 되신다" 는 영광을 주시니 이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드리는 우리들의 모든 봉사와 수고에도 충분한 응보라고 하겠다.

[2] 노아는 셈이 행한 그 선행과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도구에 불과한 셈을 축복하고 칭찬하는 대신에 창조자이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송하고 있는 것이다. 언제든지 우리들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이 잘한 모든 일에 대한 그 영광은 겸손히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돌려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서 우리가 모든 선한 일을 행하도록 친히 역사하고 계심을 명심해야겠다. 우리들은 사람들의 선행을 볼 때 그들에게 영광을 돌릴 것이 아니라, "우리 아버지께" 돌려야 한다(마 5:16). 이와 같이 다윗은 아비가일을 보내신 하나님을 찬송할 때에, 사실상 그녀를 축복하였던 것이다(삼상 25:32, 33). 그러므로 우리가 선한 일을 행하는 일로 하나님에게 쓰인다고 하는 것은 영광이요, 은혜이다.

[3] 셈과 그 가족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관계가 하나님이 셈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온 세상에 증거하는 것이 됨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감사함과 돌리게 될 것을 노아는 미리 내다보고 예언하였다.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할지어다" 라고 했다.

[4] 이것이 암시해 주는 바는 셈의 후손을 통해서 교회가 세워지고 계속되리라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유대인들이 유래되었으며, 이들은 대단히 오랫동안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 신앙고백을 한 유일한 백성이었기 때문이다.

[5] 혹자는 생각하기를, 이것은 그리스도와 관계가 있다고 한다. 그리스도는 그의 인간성에 있어서는 셈의 계보를 이은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육체에 관한 한, 그리스도는 그를 통해서 오셨기 때문이다.

[6]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이라고 했다. 가나안은 특별히 그의 종이 되게 하신다는 것이다. 여호와를 자기들의 하나님으로 삼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서 선함을 보시는 것만큼 이 세상에서 많은 영예와 능력을 그들에게 주신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2)그는 야벳을 축복하고 그를 통해서 "이방의 여러 작은 섬들" 을 축복하여, 이 섬에는 그의 자손이 살게 하였다. 즉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27절)라고 했다.

[1] 혹자는 이 모든 것을 야벳에 속하는 것으로 삼고, 다음 두 가지의 중의 하나를 뜻하는 것이라고 한다. 첫째, 그의 외형적인 융성을 뜻하며 그 자손의 수가 엄청나게 많게 되고 승리를 거듭하여 셈의 장막의 주인이 되리라는 것이었는데, 이는 셈 족속 중에도 가장 뛰어난 유대 백성들이 헬라인에게와 그 후 로마인들에게 조공을 바치는 백성이 됨으로써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헬라인이나 로마인은 야벳의 자손이라고 한다. 외형적인 번성이 반드시 진정한 교회의 절대적인 지표는 아니며, 셈의 장막이 언제나 정복자의 장막이라고는 할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자. 둘째로, 그것은 이방인들의 개심과 그들을 교회 안으로 이끌어들이는 것을 뜻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구절은 이렇게 읽어야 한다. 즉 "하나님은 야벳을 권고하사(그 어휘가 뜻하는 바가 이것이다), 그같이 타이름을 받아, 그가 셈의 장막에 거하게 되리라" 고, 다시 말해서 복음상으로는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서로 하나가 된다는 뜻이다. 많은 이방인들이 유대인들의 신앙으로 개종된 후에, 둘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될 것이다(엡 2:14, 15). 그리고 대체로 이방인들로 구성된 그 그리스도의 교회는 교인으로서의 특권에 있어서는 유대인들을 계승하리라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먼저 그들 자신의 불신앙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그 장막을 던져 버리자, 이방인들이 그들의 장막에 거하게 되리라는 것이다(롬 1:11). 스스로 교회를 떠나 버린 자들을 다시금 교회 안으로 이끌어들이시는 이는 오직 하나님뿐이시라는 것을 기억하자. 그리스도의 복음이 구원을 이루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다(롬 1:16). 거듭 말하거니와, 인간들이 교회 안으로 인도함을 받는 것은 강압에 의해서가 아니라 권고로써 되는 일이다(시 110:3). 그들은 사람의 연줄로 이끌리고 이성(理性)으로 권고함을 받아 신앙에 이르게 된다.

[2] 또 혹자는 셈이 직접 축복을 받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야벳과 셈을 다음과 같이 구분한다는 것이다(26절). 첫째로, 야벳은 이 땅 위의 축복을 받는다. 즉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 하사, 그 자손을 창대케 하고, 그의 영토를 넓히게 하신다. 야벳의 자손들은 온 유럽과 아시아의 대부분, 그리고 아마 아메리카까지도 차지하게 되었다. 우리들의 모든 확장 속에서 하나님께 감사드려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자. 해안을 확장해 주시고 마음을 넓혀 주시는 이는 바로 그분이시다. 거듭 말하거니와, 야벳이 그리하였듯이 하나님의 장막에 거하지 아니하는 많은 자들이 광대한 장막에 거한다. 둘째로, 셈은 하늘 위의 축복을 받는다. "그가(곧 하나님이) 셈의 장막에 거하리라" 했다. 이는 다시 말해서, "그로부터 그리스도가 오시며, 그 자손을 통하여 교회가 계속되리라" 는 뜻이다. 장자 상속권은 함을 전적으로 배제하고 셈과 야벳에게만 나누이게 되었다. 그들은 다같이 권리를 분할하였으나, 가나안은 그들 둘의 종이 되리라는 것이었다. 야벳에게는 두 몫이 주어지게 되어, 하나님은 그를 창대케 하신다. 그러나 사제적은 셈에게 주어지니, 이는 하나님이 셈의 장막에 거하신다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모든 금은 보화를 그 장막 안에 지니고 있기보다는 하나님이 우리의 장막에 거하신다면, 그 위에 더한 행복이 결코 없을 것이다. 하나님을 모시지 않고 큰 궁전에 거하기보다는, 하나님을 모시고 그와 함께 장막에 거하는 편이 훨씬 더 좋은 일이다. 하나님의 성소가 있는 성도(聖都)에는 이방인들의 여러 섬보다도 훨씬 더한 만족함이 있다. 셋째로, "가나안은 그들의 종이 되리라" 고 했으니 그들은 서로가 가나안을 다스리는 지배권을 지닌다고 혹자는 말한다. 야벳이 셈과 연합할 때, 가나안은 그들 앞에 굴복한다. 낯선 자라도 친구가 되면 그 적들은 그들의 종이 되는 법이다.

 

9:25 없음.

 

9:26 없음.

 

9:27 없음.

 

9:28

노아의 죽음(창세기 9:28-29)

여기서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엿볼 수 있다.

1. 하나님께서 노아를 얼마나 장수하게 하셨는가 하는 사실이다. 그는 아담보다는 20년 더 살았고, 므두셀라보다는 19년 적게 살은 950년 동안이나 살았다. 이 같은 장수는 그의 뛰어난 믿음에 대한 보다 큰 보답이고, 이 세상에 대해서는 큰 축복이었다. 이 같은 은혜로써, 그는 의심한 여지도 없이, 이 세상에 대한 의의 전도자로서의 일을 계속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전파한 자들은 모두 그의 자녀들뿐이었다.

2. 결국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그의 생명에 기한을 두셨는가 하는 것이다. 아마 그는 자기로부터 계통을 이은 많은 후손들이 자기 앞에서 죽는 것을 처음으로 보았으리 만큼 오래 살기는 했어도, 역시 그도 죽었다. 노아는 그의 생전에 믿음으로 인하여 후사가 된 두 세계를 목격했다. 그러나 그 두 세계보다 더 좋은 세계를 보기 위하여 이 세상을 떠났다.

 

9:29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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