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튜 헨리 주석, 창세기 08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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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땅이 마르기 시작함(창세기 8:1-3)

Ⅰ. 하나님의 은혜의 행위. 하나님이 노아와 그 모든 생물을 기억하셨다. 이것은 인간적인 표현 방식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피조물 가운데 그 어느 것 하나라도(눅 12:6). 더욱이 그 백성 중의 어느 한 사람도 하나님께는 잊혀질 수 없게 때문이다(사 49:15, 16).

1. 그러나 노아와 그 가족들은 제외한 모든 종족의 인간들은 이제 멸절되고, 망각의 땅으로 추방되어, 더 이상 기억되지 않는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노아를 기억하심은 인류에 대한 그의 긍휼이 다시 시작되는 일이다. 이는 하나님이 인류를 완전히 멸종시키려 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에스겔 5장 13절의 말씀, "그들을 향한 내 분이다한즉 내 마음이 시원하리라" 고 한 것은 이상한 표현법이다. 하나님의 정의의 요청은 저들 죄인들의 멸망으로 응답되었다. 하나님은 그의 대적에게 보응하여 그 마음을 편안케 하셨고(사 1:24), 이제 그 심령이 평온케 되었다(슥 6:8). 그리하여 "하나님이 노아와 모든 생물을 기억하시었다." 하나님께서는 진노 중에라는 긍휼을 잊지 아니하시고(합 3:2), 옛날을 추억하시며(사 63:11), 거룩한 씨를 기억하시고, 노아를 기억하시었다.

2. 노아 자신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던 자이기는 했어도, 방주 안에는 잊혀진 자같이 보였다. 아마 그 자신도 그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얼마나 오랫동안 유폐된 생활을 해야 하며, 언제 놓임을 받을 것인지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이 없었기 때문이다. 지극히 선한 사람들도 때로는 하나님으로부터 잊어버림을 받은 것이라고 제멋대로 결론짓기 쉽다. 특히 그들의 괴로움이 심히 크고 오래 지속될 때에 그러하다. 노아는 위대한 신앙인이었지만, 그 할 일을 충분히 다했다고 생각된 후까지도 홍수가 그처럼 오래 계속되었을 때는, 아마도 자기를 방주 안으로 닫아 넣으신 이가 자기까지도 벌로 잡아두는 것이나 아닐까 하고 생각하는 유혹에 빠졌을 것이다. 그래서 "어느 때까지 당신께서는 저를 잊으시겠나이까?" 하고 하나님께 여쭈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마침내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자비를 베푸셨다. 이것이 그를 기억하신다는 말로 표현되었다. 다음 사실을 유의해 두자. 그들의 형편이 그 아무리 황량하고 근심에 잠겨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기억하는 자는 분명히 하나님의 기억하심을 받으리라.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기한을 정하실 것이며 그들을 기억하실 것이다(욥 14:13).

3. 하나님께서는 노아와 더불어 그 모든 생물을 기억하시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특히 인간의 자손들을 기뻐하시지만, 하나님의 모든 작품들(피조물)을 기뻐하시며, 자신이 지으신 것은 아무것도 미워하시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 백성들 개개인뿐만 아니라 그들의 소유물에 대해서도 특별하신 배려를 해 주신다. 그들과 그들에게 속한 모든 것을 돌보신다는 말이다. 그 분은 니느웨이 있는 육축까지도 생각하시고 있었다(욘 4:11).

Ⅱ. 바람과 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능력의 행위. 이것들은 모두 인간의 통제하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움직인다. 다음 사실을 살펴보기로 하자.

1. 하나님께서 바람에게 명하시어 "가라" 하시니 바람이 갔다. 이는 홍수를 거두시기 위함이었다. 하나님이 바람을 땅 위에 불게 하셨다. 여기에서 다음 사실을 배우기로 하자.

(1) 하나님이 노아를 기억하셨다 함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가 노아를 구원하셨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기억하시는 자들은 사실상 영원히 기억함을 입는다. 그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우리를 기억하시니, 우리들은 그를 섬기기 위하여 그를 기억하도록 하기 위함임을 알아야 겠다.

(2) 바람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지배력은 무엇인가? 그는 바람을 그 장중에 모으고 계시며(잠 30:4). 바람을 그의 곳간에서 끌어내신다(시 135:7). 그가 원하는 때와 방과 목적을 따라 바람을 보내신다. 광풍까지도 그의 말씀을 좇는다(시 148:8). 물이 불어나는 동안에는 바람이 없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그 바람은 방주의 동요를 더 심하게 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그런 위험이 없게 되자 하나님께서 바람을 보내셨다. 아마도 그것은 북풍이었을 것이다. 북풍이라야 비를 몰아 가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흥해를 가르시기 위하여 보내신 것과 같이 땅을 마르게 하는 바람이었다.

2. 하나님께서 물에게 다시 명하시어, "오라" 하시니, 물이 다시 갔다.

(1) 그는 원인을 제거하셨다. 그는 "깊음의 샘이요 하늘의 창인" 그 물의 원천을 봉해 버리셨다. 다음 사실을 명심해 두어야 하겠다.

[1] 하나님께는 여는 열쇠가 있듯이, 다시금 닫아버리시는 열쇠도 있으며, 그 모든 원인을 중단시킴으로써 심판의 진행을 멈추게 하실 수도 있다. 그리고 황폐케 하신 바로 그 손으로 구원을 베푸심을 알아야 한다. 상처를 주시는 그만이 고쳐 주실 수가 있다(욥 12;14,15 참조).

[2] 죽이는 일이건 구제하는 일이건 간에 재앙이란 그 본래의 소임을 마치면 제거되고야 만다. 하나님의 말씀은 헛되이 돌아가지 아니한다(사 55:10, 11).

(2) 그 다음 그 세력은, 일순간에는 아니지만, 점차적으로 종식되었다. "물이 감하였고(1절), 물이 땅에서 물러가고 점점 물러가서" (3절)라고 했다(히브리어로는 물이 "갔고, 돌아갔다" 고 되어 있다<3절>). 이는 물의 점차적인 퇴행을 뜻하는 날이다. 태양은 그 열기를 몹시 내뿜고, 지하의 암굴들은 물을 더 많이 빨아들였을 것이다. 이 세상이 단 하루 사이에 물에 잠긴 것이 아니었듯이, 단 하루에 마른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두어야 한다. 그러나 창조 때에 온 세상을 뒤덮고 있던 물에서 땅을 구별해내어 마른 땅으로 만드는 일은 단 하루의 일에 지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반나절의 일에 지나지 않았다(1:9, 10). 이제는 창조의 대 역사가 끝나고 이 섭리의 역사가 공동 협력하는 제 2의 동인(動因)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말미암아 일어난 일이다. 하나님은 일반적으로 그 백성들을 점차적으로 해방시킨다. 그러므로 평범한 날이라고 멸시하지 말아야 하며, 큰 일을 당하는 날이라고 해서 절망해서도 안 된다(슥 4:10; 4:18 참조).

 

8:2 없음.

 

8:3 없음.

 

8:4

산 봉우리가 드러남(창세기 8:4-5)

여기에는 물이 줄은 결과와 증거를 볼 수가 있다.

1. 방주가 머물렀다. 이 같은 사실은 노아에게 있어서는, 자기가 들어가 있는 집이 견고한 땅 위에 서게 되어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것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에 다소간의 만족을 주었다. 그 방주는 노아의 지각(知覺)으로서가 아니라(그가 방주를 조종하지는 않았다). 하나님의 지혜와 은혜로우신 섭리에 의하여 지시 받은 산 위에 머물게 되었다. 그래서 아마도 좀더 신속히 머물 수가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의 마음에 동요함이 있은 후에 그들을 위하여 쉴 때와 장소를 마련하여 주신다는 사실을 유의해야겠다. 교회라는 방주는 때때로 광풍으로 요동하여 안위를 받지 못하나(사 54:11). 평안을 되찾게 된다(행 9:31).

2. 산봉우리들도 조그마한 섬들과 같이 물위에 드러나 보이게 되었다. 이러한 산들은 노아와 그 아들들만이 보았다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들 이외에는 아무도 그 산들을 볼 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지루한 항해 끝에 육지가 보이지나 않을까 하여 땅을 동경하여 찾는 선원들처럼, 또는 예언자 엘리자야의 사환과 같이(왕상 18:43, 44). 아마 그들은 방주의 창문을 통하여 날마다 밖을 내다 보았을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땅을 찾아내게 되었고, 그들의 여행에서 발견의 날에 이르게 되었을 것이다. 그들은 육지를 찾기 시작한 40일 이상이나 지나서야 비로소 땅을 발견했다. 라이트푸트(Lightfoot)의 계산에 의하면, 물이 비례적으로 줄었다면 방주의 밑부분 11 규빗은 물에 잠겨 있었다고 추정된다.

 

8:5 없음.

 

8:6

땅이 마름(창세기 8:6-12)

여기에서는 노아가 바깥의 사정을 알기 위해서 정탐꾼들 곧 까마귀와 비둘기를 내보낸 기사를 볼 수가 있다. 여기서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살필 수 있다.

Ⅰ. 하나님은 노아에게 홍수가 이르게 될 때는 날짜까지도 자세히 알려 주셨지만97:4), 끝날 때는 언제 어떠한 방법으로 거두어 가게 될는지에 대해서는 특별한 계시를 주시지 아니하였다.

1. 전자(前者)에 관한 지식이 노아로 하여금 방주를 마련하고 그 안에 자리잡게 하는 데 꼭 필요했기 때문이었지만, 후자에 관한 지식은 그를 호기심만 충족시키는 역할을 하므로, 그것을 그에게 비밀로 하는 것이 그의 믿음과 인내에 필요한 훈련이 되기 때문이었다.

2. 그리고, 계시가 없었다면 그가 결코 홍수를 예견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평범한 방법으로도 그 홍수의 감소를 알 수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가 그러한 방법을 이용하도록 기꺼이 내버려 두셨던 것이다.

Ⅱ. 비록 노아가 그 믿음으로 자신의 해방을 기대했고 인내로써 그것을 기다렸지만, 그는 그 기간이 그처럼 유폐되어 있기에는 긴 기간이라고 생각하여 해방의 날을 알고 싶어 했다. 고난으로부터의 해방을 기다리는 갈망, 그것에 대한 간절한 기대, 그리고 그것이 우리들에게 되어지는 모습을 숙고하는 일은 믿음과 인내에서 오는 성실성과 매우 잘 일치된다는 것을 기억하자. "믿는 자는" 하나님 앞으로 뛰어가려고 "서두리지 아니하나", 그를 만나 뵈려고 서둘러서 나아간다(사 28:16). 다음에서 주의 깊게 살펴보자.

1. 노아가 방주의 창문으로 까마귀를 내어 보내자, 까마귀는 날아갔다. 히브리어로는 "나갔다가 되돌아 왔다." 이는 이리저리 날라 다니면서, 물위에 떠다니는 짐승들의 죽은 송장을 뜯어 먹다가 휴식을 위해서만 돌아왔다는 것이다. 아마도 방주 안으로 돌아온 것이 아니라 그 위에 돌아왔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노아에게 별로 만족을 주지 못했다.

2. 그리하여 그는 비둘기를 다시 내어 보냈다. 그것은 처음에는 아무런 좋은 소식도 못 가지고 돌아왔다. 아마도 비둘기의 털이 흠뻑 젖고 불결하게 되어 돌아왔을 것이다. 그러나 두 번째에는 그 입에 감람나무 잎사귀를 물고 돌아왔다. 이것은 홍수 후에 새로 돋아난 나뭇잎이었을 것이다. 이제야 온갖 수목과 과목들이 물위에 드러났다고 하는 분명한 표현이기도 했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 사실을 유의하자.

(1) 노아는 처음 비둘기를 내보낸 후 7일이 지나 두 번째 비둘기를 내보냈고, 그 후 7일이 지나 세 번째로 내보냈다. 아마도 비둘기를 최초로 밖으로 내보낸 것은 까마귀를 내보낸지 7일 후의 일이었을 것이다. 이 사실은 안식일에 그 일을 행하였다는 것을 암시해 주고 있다. 그러므로 노아는 방주 안에서도 경건하게 안식일을 엄수한 것으로 보인다. 노아는 자기의 작은 교회(방주)에서 엄숙한 집회를 열어 안식일을 지키면서, 하늘로 오는 특별하신 축복을 기대하고 간구하고 있었다. 그는 기도하고 난 후에 바라다보았다(시 5:3).

(2) 비둘기는 은혜의 영혼을 상징한다. 발을 붙여 안식할 곳을 찾지 못하고, 범람하여 더럽혀진 이 세상에서 확고한 화평과 만족을 찾을 수가 없어 그의 방주요 노아인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온 것이다. 육욕에 찬 마음은 까마귀와 같이 이 세상을 벗삼고 그곳에서 찾아낸 썩은 고기를 먹고 있다. "내 영혼아! 네 평안함인 노아에게로 돌아갈지어다" (시 116:7)라고 성서는 말한다. "내게 비둘기같이 날개가 있다면" 그에게로 날아 가리라(시 55:6). 노아가 그 손을 내밀어 비둘기를 방주 속으로, 곧 자기에게로 끌여들었다. 그리스도께서도 자기에게로 날아드는 자들은 은혜롭게 보호하시고 도와주시며 환영하여 주실 것이다.

(3) 감람나무 잎사귀는 평화의 상징이다. 마구 먹는 까마귀나 음탕하고 교만한 공작이 아니라 온순하고 참을성 있는 겸손한 비둘기가 감람나무 잎사귀를 가지고 왔다. 영혼 속에 평안과 기쁨의 증거를 가져다 주는 것은 비둘기와 같은 성품이다.

(4) 어떤 이들은 이러한 것들을 한 비유로 삼고 있다. 즉 당초에 율법을 까마귀처럼 내어 보냈는데, 율법은 인류 세계를 범람케한 하나님의 진노의 물이 줄어들었다는 소식은 전혀 가져오지 않았다. 그리하여 때가 차매, 하나님께서는 성령이 강림하셨을 대의 모양이었던 비둘기처럼 그의 복음을 내보내셨다. 이 복음은 우리들에게 감람 잎사귀를 가져다 주어 보다 좋은 소망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8:7 없음.

 

8:8 없음.

 

8:9 없음.

 

8:10 없음.

 

8:11 없음.

 

8:12 없음.

 

8:13

땅이 완전히 마른 시기(창세기 8:13-14)

1. 땅이 말랐다(13절). 즉 물이 모두 걷혔다. 정월 초하루(줄거운 설날) 노아가 직접 그것을 목격하였다. 노아는 "방주 뚜껑을 젖혔다." 뚜껑을 완전히 젖힌 것이 아니라, 방주 주위의 땅의 전망을 살필 수 있을 정도로 열었다. 그리하여 매우 큰 위로가 전망을 얻었다. 그는 보고 또 보고 경탄해 마지 않았다. "지면에 물이 걷혔다." 다음 사실을 기억해 두자.

(1) 우리들 주위에서 땅을 볼 수 있다는 것은 크나큰 긍휼이다. 거기에 대하여 노아는 우리들보다 훨씬 더 민감했다. 끊겼다가 다시 회복된 자비는 계속되어 온 자비보다도 훨씬 더 감동적이기 때문이다.

(2) 이 세상의 면모를 새롭게 하신 하나님의 능력은, 괴로움과 고통을 당한 영혼과 어려움과 핍박을 당한 교회의 면모를 새롭게 하실 수 있다. 버림받고 잊혀진 것같이 보이는 곳에서까지도 하나님은 마른 땅을 드러나게 하실 수가 있다(시 86:16).

2. 땅이 말라서(14절). 노아가 거주하기에 알맞게 되었다. 다음 사실을 관찰하자. 비록 노아가 1월 1일에 땅이 마른 것을 보기는 했어도, 하나님께서는 2월 27일까지는 노아가 방주 밖으로 나오는 것을 허용하시지 않았다. 아마도 처음에는 노아는 갇혀 있는 것이 다소간은 갑갑하여, 방주를 떠나고자 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친절을 베풀어 그만큼 더 오래 대기하라고 명령하시었다. 다음을 기억하자. 하나님은 우리들의 욕망보다는 우리들의 유익을 더 고려하여 주신다. 왜냐하면 그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들에게 무엇이 유익한 것인지를 알고 계시며, 우리들의 유폐 생활이 얼마나 오래되어야 적당하며, 갈망하는 자비가 얼마나 지연되어야 마땅한가 하는 것을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땅이 마르기도 전에 우리는 방주 밖으로 나가고 싶어할 것이다. 만일 문이 닫혀 있다면 뚜껑을 열고 다른 길로 기어내리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긍휼을 보이시는 그 때가 분명히 가장 좋은 시기라는 것을 알고 만족해야 한다. 그 때에야 그 자비가 우리에게 결실을 맺어주며, 우리는 그것을 위해 다 준비되기 때문이다.

 

8:14 없음.

 

8:15

방주에서 나온 노아(창세기 8:15-19)

Ⅰ. 노아는 방주에게 해방된다(15-17절). 다음 사실을 살피자.

1. 하나님께서 명하시기까지는 노아가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방주 안으로 들어가라고 명을 받았을 때에(7:1) 들어갔다. 그리하여 그이 유폐 생활이 매우 지루하였지만 다시 밖으로 나오라는 명령이 있기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들은 우리들의 모든 행동 속에서 하나님을 인식하고 모든 동작 앞에 그 분을 내세워야만 하겠다. 하나님의 지도와 통치에 복종하는 자만이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다.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규율로 삼고 착실하게 지키며 하나님의 은총을 힘입어 그 말씀을 생활 원리로 인도 받는 자, 또한 하나님의 일반적인 지도를 특정한 경우에 적용할 수 있는 암시를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얻는 자들은 광야 같은 이 세상을 행진해 나가는 그들을 일일이 인도하여 주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만나게 되리라.

2. 하나님께서 오랫동안 그를 억류해 두셨지만, 마침내 그에게 해방을 주셨다. 왜냐하면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합 2:3) 진실되니, 결코 거짓되지 아니할 것이기 때문이다.

3. 하나님께서는 "방주로 들어가라" 고 말씀하실 때는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들어가신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제는 "나가라" 고 하시지 않고 "나오라" 고 하시니, 이는 그와 함께 들어가신 하나님께서 노아를 안전하게 내보내실 때까지 언제나 그와 함께 하셨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하나님은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4. 혹자는 그들이 방주 안으로 들어가라는 명령을 받을 때에 남녀를 구별하라는 명령도 들었다고 한다(6:18). 즉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자부들" 이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애통의 때에 사람들이 그 아내들과 따로 있다고 그들을 추단한다(슥 12:12).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신혼부부들처럼 노아와 그 아내를 함께, 그리고 그의 아들들과 그 며느리들을 함께 내보내시어 그들을 생육하고 번성케 하시었다.

5. 노아는 자기와 함께 한 모든 짐승들을 함께 이끌어내라는 명을 받았다. 이것은 그처럼 오랫동안 그들을 돌보아 먹이고 그들을 위해 많은 수고를 했기 때문에, 그 모든 짐승들을 떼를 지어 이끌어 나아가는 영광과 그들로부터의 존경을 얻게 하기 위함이었으리라.

Ⅱ. 해방을 얻자 방주를 나왔다. 허락 없이는 밖으로 나가려 하지 않았던 것과 같이, 허락이 났을 때에는 두려워하거나 기분 나빠 함으로써 그 속에 머물러 있으려 하지 않았다. 다만 모든 점에서 하늘의 계시를 주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비록 그가 이제 만 1년 10일을 방주 속에서 죄수 같은 생활의 해 왔지만, 새로운 생명뿐만 아니라 새 세상을 위해서 그 안에서 자신이 보호함을 받았음을 자각하게 되었을 때에는, 오랫동안의 유폐 생활에 대해서 조금도 불평할 이유가 없었다.

1. 노아와 그 가족들이 살아 나왔다. 그 중의 한 사람 "함'은 사악했으므로 홍수를 모면할 수는 있었다 해도 하나님의 공의가 다른 타격을 가하여 그를 데려가실 수도 있지만 그들 모두가 생존했다. 가족들이 오랫동안 함께 서로 지내면서도 그들 사이에 불화가 일지 아니하면, 그것은 특별하신 은총이요, 주님의 자비로 돌려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2. 노아는 자기와 함께 들어갔던 모든 짐승들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까마귀와 비둘기는 예외였다. 이들은 아마도 그들의 벗들이 나올 때에 이미 그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 노아는 자신의 책임에 관하여 지극히 훌륭한 보고를 드릴 수가 있었다. 이는 자기에게 부여된 모든 책임 중에서 어는 것 하나도 빠뜨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 중요한 시기에 자기를 집안의 수석 청기기로 지명해 주신 분께 신실했기 때문이다.

 

8:16 없음.

 

8:17 없음.

 

8:18 없음.

 

8:19 없음.

 

8:20

노아의 제사(창세기 8:20-22)

Ⅰ. 해방이라는 긍휼을 온전히 베풀어 주신 하나님을 생각하여 노아는 감사를 드렸다(20절).

1. 그는 "단을 쌓았다." 지금까지 그는 하나님의 특별 지시나 명령 없이는 아무런 일도 행하지 않았었다. 그는 방주 안으로 들어갈 때도 특별한 부르심을 받았고, 그 곳에서 나올 때도 부르심을 받았다. 그러나 제단(祭壇)과 제사라고 하는 것은 이미 신앙의 예배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제도이기 때문에 별다른 명령을 기다리지 아니하고도 그는 감사함을 표현했다. 하나님의 긍휼함을 입은 자들은 자진해서 감사함을 돌려야 한다. 그것도 싫은 것을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기쁜 마음으로 해야만 하겠다. 하나님께서는 자유 의지에 따른 제사를 기쁘게 여기시며, 하나님을 기다리는 자를 칭찬 하신다. 노아는 이제 냉랭하고도 황폐한 세상으로 내보냄을 받았다. 그러한 곳에서의 제일 관심사는 먼저 자신을 위해서 집을 세우는 일이라고 우리는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노아를 보라. 그는 하나님을 위해서 제단을 쌓는 것을 먼저 시작하고 있다. 하나님이 첫째이니 무엇보다도 먼저 그를 섬겨야 한다. 하나님과 함께 시작하는 자가 시작을 잘하는 자이다.

2. 그는 "모든 정결한 짐승 중에서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우리가 7장 2,3절에서 볼 수 있는 일곱 쌍 중에서 하나씩을 취하여 제물을 삼았다. 다음 사실을 여기서 살피자.

(1) 그는 정결한 것만을 드렸다. 왜냐하면 우리들이 제물을 드린다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아니하며, 제사법에 따라 부정하지 않은 것 곧 하나님께서 정하시는 것을 제물로 드려야 하기 때문이다.

(2) 그가 가지고 있는 육축의 수가 지극히 적고, 그나마도 그처럼 엄청난 노력과 수고를 치르고 멸망에서 구해낸 것이기는 했지만, 그 중에서 마땅히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것을 드리는 데는 조금도 인색하지 아니하였다. 그는 아마도 "나는 일곱 마리의 양을 가지고 이 세상에 나가야 하는데, 그 일곱 마리 중의 하나를 잡아서 번제로 드려야 한다는 말인가? 더 많아질 때까지 연기하는 것이 훨씬 낫지 않을까?" 라고 말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니다. 자신의 사랑과 감사에 대한 성실성을 보이기 위하여,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며 그로 말미암은 것임을 인정하는 표로써 그는 하나님께 7분의 1을 기꺼이 드렸다. 우리들이 적은 것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그것을 더 풍성하게 하는 길이다. 따라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을 낭비라고 생각해서는 결코 안 된다.

(3) 여기에서 신앙의 태고성을 보게 된다. 즉 새 세상에서 처음으로 인간이 행한 일을 예배 행위였다(렘 6:16). 이제 우리들은 번제가 아리나 찬양의 제사와 의의 제사로써, 경건한 교제로써 우리의 감사함을 표현해야 하겠다.

Ⅱ. 노아의 감사 제사를 하나님께서 은혜롭게 받으셨다. "네가 잘했다면, 받아들이심을 입지 않겠느냐?" 하는 것이 족장(族長) 시대의 정해진 규레였다. 노아가 바로 그러하였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하나님께서는 그의 행실을 매우 기뻐하시었다(21절). 여호와께서는 "그 향기를", 또는 히브리어에 있듯이 거기에서 "안식의 향기를 흠향하셨다." 최초에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일곱째 날에는 안식을 취하시고 원기를 회복하셨던 것과 같이 이제는 세상을 새롭게 만드시나 7분의 1을 드리는 희생의 제물 가운데서 안식을 취하신 것이다. 인간이 향기롭고 기분 좋은 냄새를 즐거워 하듯이, 하나님은 노아의 경건한 열심을 매우 기뻐하셨다. 비록 그가 드린 것이 지극히 작은 것이기는 하였으나 그것은 그의 능력에 따른 것이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그것을 받아들이셨다. 그의 노여움을 죄인들의 세계에 두셨던 이가. 이제는 이렇게 적은 수의 남은 신앙인들에게 그의 사랑을 두셨다.

2. 여기에서, 하나님은 두 번 다시 세상을 물에 잠기게 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셨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노아의 제사보다는 자신을 드린 그리스도의 제사를 염두에 두신 것이었다. 노아의 제사는 그리스도의 제사의 모형이요 상징이다. 그리스도의 제사는 참으로 "향기로운 번제물" 이었다(엡 5:2). 여기에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완전한 보증이 주어진 것이다. 곧 다음과 같다.

(1) 이 같은 심판이 결코 반복되지 않으리라는 사실. 노아는 "어떠한 목적으로 세상이 회복되어야 한다는 것인가, 결국은 세상의 죄악으로 또다시 똑같은 방법으로 조속히 멸망 받을 것이 아니겠는가?" 고 생각하였을지도 모른다. "아니, 결코 그렇게 아니하리라" 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여호와께서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셨다" (6:6). 이제 여기서는 하나님이 인간을 멸망시켰음을 한탄하신 듯이 말씀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의 변화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방법을 달리하신다는 뜻이다. "여호와께서 자기 종들을 인하여 후회하시었다" (신 32:36). 이 결심은 두 가지로 표현되어 있다.

[1] "내가 다시는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라." 하나님께서는 죄악의 최초로 세상에 들어왔을 때 땅을 저주하셨고(13:17). 또한 땅을 물에 잠기게 하셨을 때에는 저주를 더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 이상 저주를 더하지 아니하겠다고 결심하신 것이다.

[2] "내가 모든 생물을 더 이상 멸하지는 아니하리라." 이는 곧 하나님께서 어느 특정한 개인이나 가정 또는 국가에 대해서는 파멸을 주더라도, 역사가 끝나는 그 날이 이르기까지는 다시는 세상 전체를 멸망시키지는 않기로 정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 같은 결심의 이유는 매우 놀라운 것이다. 그것은 세상을 멸망케 한 이유와 사실상 동일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즉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하지 때문이다" (6장 5절에도 비슷한 말씀이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차이점이 있다. 6장 5절에는 "사람의 마음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하다" 고 하셨으니 이는 곧 "인간의 범죄가 계속하여 하나님을 거슬러 외치고 있다" 는 뜻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어려서부터" 라고 했다. 죄악은 타고난 성품이 되었다. 인간이 세상에 들어올 때 가지고 들어온다. 인간이 죄악 속에서 형체를 이루게 되며 그 속에서 잉태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저같이 죄악적인 족속들은 모두 멸절하여, 내가 완전히 끝을 맺으리라" 는 말이 뒤따른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그러므로 내가 더 이상 이같이 가혹한 방법을 취하지 아니하리라." 왜냐하면 첫째로, "저들은 오히려 불쌍히 여겨져야 한다. 인간 안에 거하는 것은 모두 죄의 세력뿐이기 때문이다. 그같이 타락한 족속에게서 기대할 수 있는 일이란, 모태에서부터 패역한 자(사 48:8)라는 청함을 입는 것 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이 그처럼 지극히 반역적으로 패역한다는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타락하고 죄가 많아 "저희가 육체라는 것을 기억하고 계신다" (시 78:39). 둘째로, "인간은 철저히 멸망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저들을 당연한 보응에 따라 다루면, 저들 모두가 멸망 받을 때까지 또 다른 홍수가 계속 잇따르게 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다음 사실을 알아 두자. 첫째, 외형적인 심판이 비록 인간을 놀라게 하고 조심케 할 수는 있다 하더라도, 그 자체가 그들을 성화시키고 새롭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가 심판과 함께 역사하여야 한다. 인간의 본성은 홍수 이후에도 그 전과 마찬가지로 죄악적이었다. 둘째, 하나님의 자비는 인간의 죄악성 위에도 베풀어져서, 인간의 죄악성을 더욱 돋보이게 하기도 한다. 하나님의 자비의 원인은 인간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 자신에게만 달려 있기 때문이다.

(2) 자연의 진행 과정이 멈추는 일은 결코 없다(22절). "땅이 있고 그 위에 인간이 있는 동안에는, 여름과 겨울과(지난 1년이 그랬듯이 내게 겨울만이 아니라) 낮과 밤이 있으리라." 아마 비가 내리는 동안에도 내내 밤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1] 여기에서 분명히 암시된 바는, 이 땅이 언제까지나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다. 땅과 그 안에 있는 온갖 피조물은 불원간 타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우리들은 "새 하늘과 새 땅을" 찾자.

[2] 그러나, 땅이 남아 있는 동안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규칙적인 시간과 계절의 연속을 소중하게 지켜줄 것이며, 그 모든 것이 각기 제 자리를 알게 하여 주실 것이다. 이 세상이 존재하고 자연의 수레바퀴가 그 궤도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그 모두가 이 섭리에 은혜 입는 바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간이란 것이 매우 변동하기 쉬운 것임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불변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첫째로, 자연 과정은 항상 변하고 있다. 시간이 그러하듯이, 사건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그러하며 그 모든 것들이 변화무쌍한 것이다. "낮과 밤, 여름과 겨울이 서로 교차되고 있다. 하늘 나라와 지옥에서는 그렇지가 않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하나님께서 이것과 저것을 마주 대하여 놓으셨다. 둘째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 과정은 결코 변하지 아니한다. 그것은 가변성 속에 있는 계절의 변화가 멈춘 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결코 멈추지 않으리라. 한편 태양은 시간의 한결 같은 측량자 역할을 계속할 것이며, 달은 하늘의 신실한 증인을 계속하리라. 그 계약의 안전성이 은총의 계약을 믿는 우리의 신앙을 확고히 하기 위하여 언급되어 있다(렘 33:20, 21). 그러므로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계약은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따라서 모든 믿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계약도 그러하리라고 추론할 수 있다.

 

8:21 없음.

 

8:22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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