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창세기 6:1-2)
하나님의 정의를 위하여, 그리고 악한 세상에 관한 경고가 되기 위하여 옛 세계가 멸망한 이야기에 접하기 전에 그 세상의 타락성과 하나님에 대한 배신과 반항에 관한 기사를 우리가 충분히 보게 된다. 그 멸망은 절대 주권에 속한 행동이 아니라 필연적 정의에 속한 행동이다. 이는 하나님의 주권의 영예를 보존하기 위한 것이다. 이제 여기서 우리들은 옛 세계에 악을 가져오게 한 원인이 된 두 가지 사실을 보게 된다.
1. 인류의 증가.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하였다" 했다. 이것은 축복의 결과였던 것이나(1:28), 인간의 타락은 이러한 축복을 너무나 남용하고 왜곡시켜 그 축복은 저주로 변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죄는 하나님의 자비를 더욱 큰 죄악의 기회로 이용하고 있다. "악인이 많아지면 죄도 많아진다" (잠 29:16). 죄인이 많아지면 그만큼 죄악도 더 많아지는 것이며, 범법자들이 번성할수록 사람을 대담하게 만드는 법이다. 전염병은 인구 밀도가 높은 도시에서 가장 세력을 떨치며, 죄악은 파급력이 있는 문둥병이다. 따라서 신약 성서의 교회에서는 "제자들의 수효가 많아졌을 때에 원망하는 말도 야기되었던" 것이다(행 6:1). 민족의 수효가 증가된다고 하여 그것이 그들의 즐거움을 더하게 하는 것은 아님을 볼 수 있다(사 9:3). 수가 많은 가정은 악한 가정이 되지 아니하도록 잘 다스려져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2. 잡혼(2절). "하나님의 아들들(즉 여호와의 이름으로 불리우고, 그 이름을 부르는 신앙고백자들)이 사람들의 딸들을 아내로 삼는지라" 고 했다. 이들은 속되고 하나님에 대해 이방인들이며, 경건치 못한 자들이었던 것이다. 셈의 자손들은 마땅히 그들 자신의 순결을 보존하며 배신을 증오해야 했지만 자신들을 지켜나가지 않았던 것이다.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았다" 고 했으니, 파문 당한 가인의 종족과 혼합된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결혼의 잘못은 무엇인가?
(1) "저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라고 했으니, 저들이 단지 눈으로 보고 곧 외모만으로 상대를 택한 것이다.
(2) 저들은 저들 자신의 타락한 욕정이 시키는 대로 택한 것이다. 그들은 누구의 충고나 의논도 없이 "그들이 좋아하는 모든 자" 로 아내를 심은 것이다.
(3) 그러나 그 결과는 악하게 드러났으니,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하고 이방인 아내를 취했다" (고후 6:14)는 사실이다. 이것은 이스라엘인들에게는 금지된 사항이었다(신 7:3, 4). 그것은 솔로몬의 변절의 불행한 계기가 되었고(왕상 11:1-4), 바벨론에서 해방되어 돌아온 유대인들에게 사악한 결과를 가져왔던 것이다(스 9:1, 2). 신자들은 그들 자신이나 그 자녀들의 결혼에 있어서, 신앙 고백의 범위 내에서 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함을 알자. 선한 자가 악한 자를 개심케 하는 것보다는 악한 자가 선한 자를 더 속히 타락시킨다.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고백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동의 없이 결혼해서는 안 되는 것이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원수들과 인척 관계를 맺는다면 그의 자녀가 아닌 것이다.
세상의 부패(1)(창세기 6:3)
이것은 이방의 여인들과 결혼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불쾌감의 표정이 나타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영이 그들에게서 물러나리라고 위협하신다. 그들의 신앙을 위배하고 행한 결혼으로 그들은 비탄에 빠지게 된다. 그러므로 육체의 정욕은 심판으로 벌받게 된다. 옛 세계의 큰 악의 또 다른 원인은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함으로 하나님께서 진노하시어서, 여호와의 영이 그들과 함께 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며 그들의 신앙이 완전히 상실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그들에게 경고하시어서 성령을 진노하지 않게 하고 기도로써 성령과 함께 하도록 했었다. 이 구절 가운데서 다음 사실을 살피자.
Ⅰ. 하나님은 반드시 그의 영으로 사람과 함께 할 것만을 결심하지는 않는다. 당시에 하나님의 성령은 노아의 전도를 통하여(벧전 3:19, 20) 또한 양심의 가책을 통하여 인간들과 함께 하셨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헛되게 되고 말았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 영이 영원히 함께 하지 아니하리라" 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사실을 주목해야겠다.
1. 성령은 양심의 뉘우침과 죄인들에게 함께 하여 그들을 죄악에서 돌이켜 하나님에게로 향하게 한다.2. 비록 성령은 오랫동안 함께 한다 해도, 훼방하고 억제하고 거부하면 영원히 함께 하지는 아니하신다(호 4:17).
3. 은혜의 성령이 떠난 자들은 파멸을 재촉하게 된다.
Ⅱ. 이와 같은 하나님의 결단의 이유. "그들도 육체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이 어찌할 수 없이 타락하고 육욕적이며 음탕하여서 그들과 함께 하는 것은 헛수고에 지나지 않게 됐다는 것이다. 흑인이 자기의 피부를 바꿀 수 있겠는가? "그도 역시" 즉 그 모두가 한결 같이 육체의 오욕에 빠지고 말았던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해둘 것이 있다.
1. 성령이 깃들기를 거부하고 그것을 헛되게 하는 것은, 타락된 인간의 본성이요 육체를 따르려는 영혼의 경향성 때문이다.2. 죄인이 오랫동안 그러한 관심에 집착하여 성령에 반대하고 육체의 편을 들게 될 때, 성령은 마땅히 그 역사를 그만두고 더 이상 함께 하지 아니한다. 성령과의 동행을 박탈 당한 자 이외에는 어느 누구도 성령의 내주(內住)를 잃어서는 안 된다.
Ⅲ.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락된 집행유예. "그러나 그들의 날은 102년이 되리라" 고 한 것이다. "그토록 오래도록 그들이 받아 마땅한 심판을 연기하노라. 돌이켜 회개하면 심판을 면할 여유를 주노라." 정의는 "그들을 잘라 버리시오" 라고 하고, 자비는 "일년만 더 기다려 주시오" 라고 한다. 면할 수 있는 자비가 정의보다 우세하는 한 120년동안 집행 유예를 받은 것이다. 하나님을 진노하게 하는 죄인들에게 하나님께서 인내하시고 관용하시는 시간은 흔히 길기도 한 것이지만 항상 한계가 있는 것이다. 집행 유예는 용서는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하며, 비록 하나님께서는 대단히 오랜동안을 참으시기는 하지만 언제까지나 참으시지는 아니하시는 것임을 명심하자.
세상의 부패(2)(창세기 6:4-5)
여기에서 옛 세계의 타락상에 관한 기사를 계속 보게 된다. "하나님의 아들들" 이 "사람의 딸들" 과 짝을 짓고,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매우 불쾌하게 생각하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즉시 그들을 없애 버리지 아니하시고 이와 같은 결혼의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이며 그 자녀들은 어는 쪽을 닮을 것인가를 보기 위해 기다리셨다. 그리고(흔히 그렇듯이) 그들은 가장 악한 쪽을 닮게 되었음이 드러났다.
Ⅰ. 그들은 남을 압박하고 폭력을 가하는 유혹에 빠졌다. 그들은 장부들이었고 "유명한 사람들" 이었다. 자기들 주위에 있는 모든 자들에 비해 너무 강했으므로 주위에 있는 자들에게 무엇이든 행할 수 있었다. 무엇으로 그같이 했는가?
1. 아낙의 아들들 같이(민 13:33) 큰 체격이 그들에게 있었다.2. 앗수르 왕들 같이(사 37:11) 위대한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것들 때문에 그들은 산 자들의 땅에서 힘의 횡포를 휘두르게 되었다. 또 무장하여 그 모든 이웃의 권리를 대담하게 짓밟고 의롭고 거룩한 모든 자들을 유린했다. 남들을 압제할 수 있을 만한 대단한 힘을 가진 자들이라도, 자신을 억누를 만한 힘은 좀처럼 가지지 못한다. 그러므로 큰 힘은 사람들에게 그만큼 큰 함정이라는 것을 알아야겠다. 이같이 타락한 민족은 그들의 조상이 선행과 믿음으로 획득한 영광을 경시했으며 그들의 이름을 영원히 멸망케 하는 것으로써 위대한 이름을 삼았다.
Ⅱ. 그들을 반증해 고소(5절). 여기에 제시된 증거는 더 이상 논의할 여지가 없이 명백한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보셨으니, 그것은 천 명의 증인을 대신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자녀들에게 있는 모든 죄악을 보신다. 회개하지 아니하면 곧 드러나고 마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감찰하신 바는 무엇일까?
1.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을 보셨다" 고 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생활 속에 흐르고 있는 죄악의 흐름을 감찰하시고, 그 흐름의 폭과 깊이를 감찰하셨다. 이것을 전절(前節)과 연결지어 살펴 보자. 압제자들은 "용사요 유명한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 때에 "하나님께서 사람의 죄악이 관영한" 것을 보셨다. 가장 악명 높은 죄인들이 유명한 사람이 된 때에 사람의 죄악도 실로 대단한 것임을 알아야겠다. 악한 자가 그 사악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 사악함 때문에 가장 추앙을 받을 때는 만사가 악한 것이다. 위대한 자가 악해질 때 죄악은 커진다. 그들의 죄악이 커졌다는 것은 온갖 민족과 모든 지역에 죄의 범람이 넘쳤다는 것이다. 그런 죄악은 본질적으로 가장 무성하고 극악스러우며 하나님의 분노를 자극하는 것이다. 죄악은 뻔뻔스럽게도 하늘을 무시하고 범해졌을 뿐 아니라, 그 죄악을 제지하거나 벌을 가할 능력을 손에 쥐고 있는 자들마저 아무런 주의를 기울이지 아니하였다. 이것을 하나님께서 보셨다. 죄인들은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 온갖 죄악을 다 아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겠다. 이 세상을 가장 잘 아는 자라도, 또 세상의 많은 죄악을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인간은 이 세상에 대하여 별로 아는 것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것을 아시며 아무리 큰 죄라 하더라도 올바르게 심판하실 것이다. 그의 심판은 결코 거짓될 수 없다.2. 그는 사람의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는 죄악의 근원을 감찰하셨다. 누구든지 "인간의 죄악이 관영" 한 것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들의 죄가 소돔과 같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은 그 이상의 것을 보셨다. "그들의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셨다." 이것은 쓴 뿌리, 즉 더러워진 샘이었다. 세상의 온갖 횡포와 압제, 온갖 향락과 방종이 그 본성의 부패에서 흘러 나왔다. 욕심이 그것들을 잉태하였다(약 1:15; 마 15:19 참조)
(1) 마음이 거짓되고 절망적인 만큼 사악해졌다. 도의는 부패하였고, 습성과 성질도 악해졌다
(2) 마음의 생각도 헛되었다. 생각이란 가끔 고정 관념으로 착각된다. 고정 관념이란 오도된 것을 의미한다. 환상의 작용이란 언제나 헛되거나 천박한 것이며 거짓말 투성이요, 전설 같은 이야기다.
(3) 그 마음이 꿈꾸는 착상도 헛된 것이었다. 즉 그들의 계획과 책략 역시 사악했었다. 그들은 자기들이 행하는 바를 알지 못하고 그저 모험으로 행하는 자처럼 단순히 부주의로 악을 행했던 것이 아니다. 어떠한 해독을 끼칠 것인가 하는 방안을 모색하면서 고의적이고도 계획적으로 악을 행했었다. 그것은 참으로 악했던 것이다. 오직 악만을 꿈꾸었으니, 항상 사악한 것을 생각하였고 그 모든 착상이 악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서는 선이란 것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니 죄의 흐름은 가득차고 강하며 끊임이 없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보신 것이다(시 14:1-3 참조).
멸망의 위협에 처한 인류(창세기 6:6-7)
Ⅰ. 인간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 하나님은 이것을 전혀 무관심한 방관자처럼 보신 것이 아니라, 이로 말미암아 마음에 상처를 입고 모욕을 당한 자처럼 보셨다. 반항적으로 불순종하는 자식들의 어리석음과 고집을 보는 친절한 아버지처럼 하나님이 보신 것이다. 이는 그를 진노하게 할뿐만 아니라 슬프게 하여 차라리 자식이 없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한다. 여기에 나타난 표현은 매우 특이하다. 즉 "여호와께서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시었다" 이와 같은 표현은 인간적 표현법을 따라서 나타낸 것이다. 이것을 하나님의 불변하는 영광과 축복을 손상시키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아니된다는 것이다.
1. 이 말이 하나님에게 어떤 감정이나 근심이 있다는 뜻은 아니다(세상의 그 무엇도 영원하신 마음을 동요시킬 수 없다). 죄와 죄인들에 대해, 곧 하나님의 거룩함을 훼손하는 죄와 하나님의 정의에 대해 반역하는 죄인들에 대해 하나님의 의로우시고 거룩하신 분노가 나타난다. 하나님은 피조물의 죄로 압박을 받으며(암 2:13). 괴로움을 당하고(사 43:24) 근심케 되면 상하며(겔 6:9), 본문에서처럼 한탄하신다. 이것은 이간이 친절을 베풀었던 자들로부터 부당한 취급을 받고 모욕을 당할 때에 그 베푼 친절을 후회하고, 다시는 면전에서 야유하고 마음을 쏘는 능구렁이를 품속에 품은 자들을 돌아보지 않겠노라고 말하게 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토록 죄를 미워하시는데 우리가 죄를 미워하지 않을 수 있으랴! 우리 죄가 하나님의 마음을 근심케 하지는 아니하였는가? 우리는 죄로 인하여 마음에 근심하고 찔림을 받지 아니할 것인가? 이같은 생각에 미칠 때에 우리는 겸손해지고 부끄러움을 느낄 수밖에 없으며, 우리가 그토록 근심케 하고 슬프게 했던 바로 그 분을 바라보게 된다!(슥 12:10).2. 이 말은 하나님의 심경의 어떤 변화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일편단심이시니 누가 그를 돌이킬 수 있으랴? 그에게는 마음의 변화가 없다. 그러나 이 말은 그의 길의 변화를 뜻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올바르게 지으시고 나서 "쉬고 평안하셨으니" (출 31:17),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길은 하나님 자신의 솜씨를 기뻐하시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사람이 배신하고 말았으니 진노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따라서 벼한 것은 인간이지 하나님이 아니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지으신 것을 한탄하셨다. 그러나 그가 인간을 구원하신 일을 한탄하신 것은 결코 볼 수 없다(비록 이것이 보다 더 큰 희생을 치른 역사이기는 하였지만). 이는 구속의 위대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는 틀별하고 효험 있는 은혜를 지금도 주고 계시기 때문이다(롬 11:29).
Ⅱ. 죄악으로 인하여 인간을 멸하시려는 하나님의 결심(7절). 다음 사실을 살펴 보자.
1.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신 것을 후회하게 되자, 인간을 멸망시키기로 결심하셨다. 진정한 회개자는 하나님의 은총을 입어 이같이 죄를 극복하고 멸하여 다시는 잘못을 행하지 아니하기로 결심해야 한다. 그러나 만일 우리 죄를 유감스럽게 여기고 마음 속으로 뉘우친 다고 말하면서 계속해서 죄에 빠져 있다면, 하나님을 조롱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즉 우리의 길(행실)의 변화를 입증하지 않는다면, 우리 마음의 변화는 헛된 것이다.2. 하나님은 사람을 멸하시기로 작정하셨다. 이 말씀의 원어는 지극히 의미심장한 것이다. (어떤 이는) "내가 땅에서 사람을 쓸어 버리겠노라" 고 한다. 이는 마땅히 깨끗해야 할 곳에 있는 쓰레기나 오물을 쓸어 그 합당한 곳인 오물 처리장에 던져 버린다는 것과도 같다(왕하 21:13 참조). 자기사 사는 곳에 흠이 되는 자들은 마땅히 하나님의 심판으로 쓸려 없어지게 된다. (또 혹자는) "내가 땅에서 사람을 지워버리겠다" 고 했다. 이는 저자에게 불쾌한 글귀를 그 책에서 지워 버리겠다는 것과 같다. 혹은 사람이 죽거나 또는 그 공민권이 박탈당할 때에 그 이름이 자유인의 명부에서 지워지는 것과 같은 뜻이다.
3. "내가 지은 사람이라" 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멸하실 것을 작정하시면서까지도 당신께서 친히 지으신 피조물이라고 말씀 하신다. "내가 그를 창조하였지만, 이 사실 때문에 그를 용서할 수는 없느니라" (사 27:11). "그를 지으신 이가 그를" 구원하지 아니하리라 했다. 우리의 창조주이신 이는 우리의 통치자가 아닐 경우에는 우리를 멸망시키는 자가 되리라는 것이다. 또는 "내가 그를 창조했는데도 그 창조주 대해서 불효 막심하고 배은망덕하니, 내가 그를 멸하겠노라" 하는 말씀이다. 자기들은 생존의 목적에 합당치 아니한 자는 그 생명을 잃게 된다.
4. 짐승들까지도 이 멸망 속에 포함되어 있다.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도" 라고 하셨다. 이러한 것들은 사람을 위하여 지음을 받았으므로 사람과 함께 멸망 받아야만 했다.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는 말씀이 따라오기 때문이다. 또 이들을 창조한 목적이 역시 좌절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이들로 더불어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하여 지음 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그것들로 자기의 육욕을 충족시키는 데 썼고 부질없는 것으로 삼았으니 멸망된 것이다.
5. 하나님의 영이 사람을 오랫동안 기다리신 것이 헛되이 되자 이와 같은 결심을 하셨다. 하나님의 은혜로 새 사람이 되기를 실어하는 사람 이외는 아무도 하나님의 정의 때문에 멸망당하지는 않는다.
노아의 행적(창세기 6:8-10)
여기에서 우리는 세상의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고, 독특한 영광의 징표를 지니고 있는 노아를 엿볼 수 있다.
1. 하나님께서 세상 모든 사람에게 노여워하셨을 때에 노아에게는 은혜를 베푸셨다. "그러나 노아는 의로우매 은혜를 입었다" (8절). 이것은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 속에서 정의가 있으며, 또한 세상이 모두 타락하였노라고 선언하시기 전에 하나님께서 세상에 있던 모든 사람의 성품을 각각 엄격하게 시험해 보셨음을 보여준다. 한 선한 사람이 있으매 그를 찾아내시고 그에게 미소를 던지셨기 때문이다. 또한 다른 모든 인간들이 하나님의 진노의 역시 노아에 대에 그가 하나님의 은총을 의미한다. 그 은총은 특별히 강력한 은혜로써 오는 것이다. 아마도 노아는 그의 생활과 가르침을 통해서 "세상을 정죄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서 호감을 사지 못했고 사람들은 그를 미워하고 핍박했을 것이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다" 이것은 족한 영예요 위안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 모든 사람보다도 노아를 훨씬 더 중히 여기셨고, 이 때문에 그는 당시에 유명했던 용사들보다도 훨씬 더 위대하고 참으로 영광스럽게 되었다. 은혜를 입는 것은 우리들의 대망의 극치로 삼자.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님께서 용납하시는 자들이 되도록 힘쓰자(고후 5:9). 하나님께서 귀히 보시는 자는 크게 은혜를 입은 자들이다.2. 세상 모든 자들이 악해졌을 때(이것이 노아에 관하여 알아야 할 기사이다) 노아만은 홀로 자신의 고결함을 지켰다. "노아는 의인이었다" (9절)고 했다. 이 같은 노아의 성품은 다음과 같다.
(1) 하나님이 그에게 은혜를 내려 준 이유. 그의 단독적인 신앙심은 하나님의 자비심을 독차지하기에 합당하였다. 여호와의 은혜를 입고자 하는 자들은 노아와 같은 인간이어야 하며, 그가 행한 것과 같이 행하여야 한다. 하나님은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사랑하신다.
(2) 아니면, 그에 대한 하나님의 은총의 결과였을 것이다. 그 안에서 선한 역사를 일으키시는 것은 그에 대한 하나님의 은총이었다. 그는 매우 선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의 그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고전 15:10). 이제 그의 성품을 살펴보자.
[1] 노아는 "의인이었다" 즉 그는 믿음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입은 것이다. 그는 "신앙에 의하여 의의 상속자가 된 자" 였다. 올바른 도의와 성품을 자기 안에 뿌리박고 있었다. 또한 그는 교제에 있어서도 의로왔다. 모든 자들을 공정하게 다루어,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로 사람의 것은 사람에게로 돌려주는 양심의 소유자였다. 참으로 정직한 자가 아니고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은총을 입을 수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겠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제는 "육체의 지혜" 가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 으로써 다스려져야 한다(고후 1:12).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이 세상의 어리석은 것을 택하셨지만 결코 부정한 것들을 택하지는 아니하셨다.
[2] 그는 "완전한 자" 였다. 이는 죄 없는 완전하다는 것이 아니라, 성실성에 있어서 완전했다는 뜻이다. 은총의 계약, 즉 그리스도의 의로 인하여 우리의 성실성이 우리의 복음적 완전으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은 다행한 일이다.
[3] 그는 그보다 앞서 에녹이 그랬듯이, "하나님과 동행하였다" 는 것은 언제나 하나님의 감찰하에 있는 자답게 하나님과 더불어 행동하였다는 뜻이다. 그는 하나님과 교통하는 생활을 하였다. 끊임없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그를 기쁘시게 하며, 하나님 앞에 정직히 행하려고 애썼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눈을 가지고 성실히 하나님을 우러러보는 자들을 은혜로우신 눈으로 내려다 보신다는 것을 알아야겠다.
[4] 그러나 보다 더 그의 성격을 영예롭게 하는 사실은 자기의 운명으로 타고난 그 타락하고 퇴폐한 자기의 세대에서 그 같은 성품을 가졌고 그같이 행동하였다고 하는 그 사실이다. 신앙이 유행하고 있을 때는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용이한 일이다. 그러나 아무도 하나님을 위하여 자기를 드러내지 아니하려 할 때에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는 것은 조류를 거슬러 하늘을 향하여 나아가는 강한 믿음과 결의의 증거이다. 노아가 이같이 행동했으니, 영원히 기록되어 불후의 영예가 되리라.
세상의 부패(3)(창세기 6:11-12)
그 세대의 사악함이 언급돼 있다. 이것은 온땅이 타락하고 부패되어졌을 때 노아는 의롭고 완전하였으니, 그의 신앙심을 돋보이게 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아니면 그의 종 노아에게 전하고자 하시는 바 이 세상을 멸망시키겠노라는 하나님의 결의를 보다 더 정당화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1. 온갖 종류의 죄가 그들에게 있었다.(1) "하나님 앞에 부패되었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있어서 타락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들이 하나님 앞에 다른 신을 섬기고 있었든지, 또는 하나의 우상을 세워 그를 예배드렸거나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에 대하여 뻔뻔스럽게도 그를 무시하고 악의를 품어 하나님을 멸시함으로써 타락하였고 사악해진 것이다.
(2) 또한 "땅은 인간에 대한 강포와 불의가 충만하였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질서도 없었으며 정상적인 정부도 없었다. 아무도 가장 명백한 소유권을 지니고 있는 재산조차도 마음놓을 수 없었다. 가장 죄 없는 자라도 안심 할 수 없었다. 따라서 거시에는 살인과 간통과 약탈 밖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죄악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 본성의 수치임과 마찬가지로 인간 사회의 파괴라는 것을 알아야 하겠다. 양심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사라지면 사람이란 서로간에 짐승과 악마로 변해 버리어, 강자가 약자를 삼켜 버리는 바다의 물고기 같이 되고 만다. 죄가 이 세상을 충만케 하여 세상을 황무지와 투기장으로 변화시켜 버린다.
2. 그 타락상에 대한 증거는 부인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땅을 친히 보셨고" 그 타락에 대한 목격자이기 때문이다. 의로우신 재판장은 하나님 자신의 전지(全知)한 절대 확실성에 기초하여 모든 재판을 수행하신다(시 33:13).
3.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타락되었다" 문제를 악화시키는 것은 그 전염병이 도처에 만연되었다는 그 사실이다. 어느 특정인이나 도시가 아니라 인류가 사는 온 세상이 그렇게 악해졌다는 것이다. 거기에는 누구 하나 선을 행하는 자가 없었으니, 진정 노아 이외에는 어느 누구 한 사람 없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아야 하겠다. 죄악이 보편화되면 세계의 멸망이 그리 멀지 아니하다. 한 민족 가운데 죄악의 분량이 넘칠 때에, 그것을 없애게 하려고 기도하는 남은 자들이 있는 한 상당히 오랫동안 심판을 막을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죄로써 그 방백을 헐어 버리는 일을 자행하고 있고, 그로 인해 생겨난 틈을 보수하고자 하는 자가 없다고 하면, 홍수와 같이 넘쳐 흐르는 진노 이외에 무엇을 기대할 수가 있다는 말인가?
대홍수의 예언(창세기 6:13-21)
여기에는 참으로 "노아가 여호와의 은혜를 입었다" 는 것을 볼 수가 있다. 그에 대한 하나님의 은총은 8-10절에 있는 그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 속에 명백히 암시되었다. 단 한 번의 언급으로서도 그 뜻의 분명해지기에 족한 데도 성령께서는 마치 그에 대한 기억을 영존 시키기를 즐거워하시는 듯이, 다섯 줄에 걸쳐 노아의 이름을 다섯 번이나 말씀하신다. 그러나 이 구절 가운데서 보다 분명히 나타나 있는 것은 노아에게 주신 정보와 지시이다.
Ⅰ.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노아를 그의 상담자로 삼으셔서, 이같이 사악한 세상을 물로써 멸망하시겠다는 당신의 뜻을 그에게 전하고 계신다. 후에 하나님께서 소돔에 관한 당신의 결의를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것같다(18:17)(" 내가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여기에서도 "노아가 강대한 민족이 될 것을 알고도 내가 나의 하려는 것을 그에게 숨기겠느냐?" 라고 하신다. "여호와의 비밀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함께 있다(시 25:14)는 것을 유의하자. 또 자기의 비밀이 "그의 종 예언자" 들에게 함께 있는 것이다(암 3:7). 계시의 영으로써 그들에게는 특별히 자기의 뜻을 알리신다. 여호와는 지혜와 믿음의 영으로써 모든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비밀이 함께 있어 말씀의 총괄적인 뜻과 거기에 기록된 경고를 이해하고 응용케 해 주신다. 자, 이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살펴보자.
1. 총괄적으로 보면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멸망시키겠노라는 것을 말씀하셨다(13절). 즉 "모든 혈육 있는 자의 끝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멸하리라" 하셨으니 이 사악한 세상의 멸망이 노아에게 포고 되었고 확정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이르렀다" 고 하는 것은 분명히 그리고 속히 오리라는 뜻이다. 아마도 노아는 그의 이웃들에게 말씀을 전하여, 그들의 사악함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되리라고 경고하였을 것이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진노에 대한 특별한 통고를 통하여 그 경고가 실효를 거둘 것인지를 알아보게 하셨다. 그럼 다음 사실을 배우자.(1) 하나님께서는 "그 사자의 말을 응하게 하신다" (사 44:26).
(2) "가진 자는" 그 가진 것을 타인의 유익을 위해 씀으로써 "더욱 가지게 되며" 더 많은 가르침을 받게 된다.
2. 하나님께서는 홍수로써 세상을 멸하시리라는 것을 노아에게 상세히 말씀하셨다. "보라, 내가 홍수를 땅에 일으키리라" (17절). 하나님께서는 모든 애굽인들의 장자와 앗수르의 진을 멸하신 것같이, 천사의 검 즉 빙빙 도는 화염검으로 모든 인류를 멸하실 수가 있었다. 따라서 노아와 그 가족들을 보존하시기 위하여 그들에게 표적을 세우시는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필요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홍수로써" 멸하시기로 하셨으니, 세상은 이 홍수로 물에 잠기게 되었다. 비록 우리로서는 알 바 없지만, 그 원인은 현명하고 의로우셨을 것이 확실하다. 하나님께서는 화살 통에 많은 화살을 갖고 계시지만 어느 것이든 그가 원하시는 대로 사용하신다. 이는 회초리를 택하셔서 그것으로 자녀를 바로 잡고, 검을 택하셔서 그것으로 적들을 없애 버리는 것과 같다. 하나님의 표현 방식을 고찰하여 보자. "내가 홍수를 일으키리라. 나는 권능이 한량 없으므로 무한한 정의로 그 일을 할 수 있으니, 내가 그렇게 하리라"
(1) 이것은 심판의 확실성을 말해 준다. 즉 "나 곧 내가" 그렇게 하리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친히 하시니 유효하게 이루어지리라(욥 11:10 참조)
(2) 이는 하나님의 영광과 정의를 암시하고 있다. 따라서 이 땅 위에서는 하나님을 찬미하고 높일 것이며, 온 세상은 "원수 갚는 일이 그에게 속해 있는" 하나님임을 알아야된다. 여기에 쓰이고 있는 표현은 이사야 1장 24절에서 볼 수 있는 바와 다소 비슷한 것 같다. "슬프다. 내가 장차 내 대적에게 보응하여 내 마음을 편케 하겠노라."
Ⅱ. "그러나 너와는 내 계약을 세우리니라" 하셨으니, 여기서 하나님은 노아를 "그의 계약의 사람" 으로 삼으셨다(18절)
1. 섭리의 계약, 즉 자연의 진행은 홍수로써 인한 방해에도 불구하고 시간의 끝까지 계속되리라는 것이다. 이 약속은 즉시 노아와 그 자손들에게 하셨다(9:8 이하). 그들은 모든 피조물을 대신하여 권리를 위탁받은 자들과 같았다. 그리하여 그의 후손에 유효하게 주어졌다.2. 은총의 계약, 즉 하나님은 그에 대해서 하나님이 되시며, 그의 후손으로 자기의 백성을 삼으신다는 계약이다. 다음 사실을 알아두도록 해야겠다.
(1) 하나님께서 계약을 세우실 때에는 하나님 자신이 친히 정하시고 확실하게 하시며, 그것을 유효하게 하신다. 따라서 그의 계약은 영원하다.
(2) 그 은총의 계약 속에는 홀로 훌륭했던 봉사에 대한 보답이 있으며, 특별한 모든 은총의 근원과 기초가 있다. 우리는 그와 계약을 맺을 것만 바랄지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손해 본 바를 보상하려 한다든가 하나님 안에서 우리들 자신을 위한 행복을 추구하려고 애 쓸 필요는 없다.
Ⅲ. 하나님께서는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하셨다" (13절). 여기에서 하나님은 세상의 다른 모든 자들과 더불어 노아가 멸망당하지 아니하도록, 다가오는 대홍수에서 노아가 자신을 구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줌으로써 그를 관대한 자비의 기념탑으로 삼으셨다. "그러나 너는 방주를 지으라. 네가 살아 남을 수 있도록 내가 돌보아 주리라" 남다른 경건은 특별한 구원으로서 보답 받는 것이니, 이는 특별한 방식의 은혜를 입는 것임을 알아야 하겠다. 이 은혜가 영광을 받을 성도들의 영예와 행복에 더해질 것이니, 대부분의 사람의 멸망 받을 때에 그들은 구원함을 얻게 되리라.
1.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방주를 지으라" 고 지시하셨다(14-16). 이 방주는 해상의 항해하기에는 적합치 아니한 낡은 배와 같은 것이었다(항해하여 다다를 육지가 없으니 그럴 필요가 없었다). 물위에 떠 있으면서 물이 줄어들기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오직 하나님께서는 노아가 그 스스로 염려하고 수고하고 어려움을 격지 아니하고도 천사를 시켜 그를 구하실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노아가 자신을 보존하는 방편이 될 방주를 짓게 하는 길을 택하셨다. 이는 그의 믿음과 순종을 시험하기 위함뿐만 아니라, 우리들로 하여금 어는 누구도 자기 자신의 구원을 애써 이루는 자가 아니고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을 자가 없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함이었다. 하나님이 없이는 우리가 구원을 행할 수가 없으며, 우리들이 없이는(우리의 행동) 그가 하려 하지 아니하신다. 하나님의 심리와 그 은혜는 순종과 근면의 수고를 인정해 주시고 영예롭게 해 주신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이 방주를 건립하는 데 관하여 지극히 세밀한 지시를 하시었다. 창조주의 무한한 지혜가 바로 그 설계자가 되셨으니, 그 목적에 놀랍게 합당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1) 그것은 "잣나무" 로 만들어진다. 우리들은 지금도 삼(杉)나무인지 실편백나무인지 또는 어떤 다른 종류의 나무인지 전혀 모르지만, 노아는 분명히 그것이 어떠한 종류의 나무인지를 알고 있었다.
(2) 그 내부는 삼층으로 지어져야 했다.
(3) 그것을 간막이로 여려 개의 방으로 나누어, 여러 가지 종류의 피조물에 합당한 자리를 마련하고 조금이라도 비는 곳이 없게 하여야 했다.
(4) 정확한 칫수가 그에게 주어졌다. 그가 그 방주를 균형 잡히게 하고 그 목적이 맞도록 방을 마련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하나님을 위하여 일하는 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그 방법을 받아서 그것을 준수하지 아니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아야겠다. 나아가 우리들의 거주지를 정하시는 이께서 그 범위와 한계를 정하시는 것이 온당하다는 사실도 알아야겠다.
(5) "역청으로 안팎을 칠하여야" 했다. 즉 밖에서는 빗방울을 흘려 버려 물이 스며드는 것을 막아야 했고, 안에서는 문이 닫혔을 때 짐승들의 나쁜 냄새를 제거하기 위함이었다. 하나님께서는 페인트를 칠하라고 하지 않으시고 역청으로 칠하라고 명령하셨다는 것을 주목하자.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안전하고도 따뜻하며 위생에 좋은 거처를 마련하여 주신다면, 그것은 비록 훌륭하고 좋은 것이 못된다 하더라도 감사해야 한다.
(6) 그는 위쪽에 창문을 내서, 햇빛이 들어오도록 해야 했는데(흑자가 생각하기로는) 그가 그 창문을 통하여 세상이 폐허화되는 것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7) 그는 출입할 수 있는 문을 방주 옆에 내어야 한다.
2. "너희가 그 방주를 들어가리라" 했다(18절). 하나님은 노아와 그에 속한 모든 자가 생명을 보존케 되리라는 것을 노아에게 약속하셨다. 하나님께 순종하여 행한 일은 우리 자신에게 안위함과 은혜를 입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다. 너희가 지혜롭다면 너희 자신을 위해 현명하라. 노아만이 방주에서 구원함을 받았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것을 살펴보자.
(1) 선한 부모의 염려. 부모들이 염려하는 바는 자신의 구원뿐만 아니라 그의 가정을 위해서 특히 그 자녀들이 구원을 위해서 염려한다.
(2) 경건한 부모를 가진 자녀들의 행복. 부모들의 신앙심은 때때로 여기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그 자녀들에게 현세적 구원을 얻게 하기도 하고, 또한 더 나아가서 부모들의 은혜를 더 입게 되면 영원한 구원에도 이르게 한다.
Ⅳ. 하나님께서는 여기서 노아로 하여금 이 세상에 대한 큰 축복이 되게 하시며, 이로써 그를 부모들이 기대했던 대로(5:29) 메시야는 아니라 해도 메시야의 같은 훌륭한 모범 인물로 삼으셨다.
1. 하나님께서는 노아로 하여금 그 세대의 사람들에게 전도자로 삼으셨다. 파숫군처럼 그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함으로써 그는 옛 세상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파하였으니" 이것은 베드로가 기록하기를 "옥에 있는 영들" 이라고 한 그 사람에게 한 것이다(벧전 3:18-20). 여기에서는 그가 그리스도의 모형이었다. 그는 모든 혈육에 속한 자들 이제 각기 타락해 버린 그 땅과 세대 속에서 닥쳐오는 진노의 홍수에 관하여 회개와 경고의 말씀으로 사람들을 깨우치며 돌아다녔다.2. 하나님께서는 노아를 하등 피조물에 대한 구원자로 삼으시고, 이들 동물들의 여러 종류를 홍수 속에서 목숨을 잃거나 멸망되지 않도록 지키라고 하시었다(19-20절). 이것은 그에게 큰 영예가 되었다. 곧 그를 통하여 인류의 종족이 유지되었고, 그로부터 새로운 세계와 교회와 세상의 영혼과 그 교회의 머리되시는 메시야가 유래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가 하등 피조물을 보존하는 도구가 되었고, 그리하여 인류는 그를 통하여 동물들에게 새로운 권리를 가지고 이용하게 되었다.
(1) 또 그는 그들이 빠져 죽지 않도록 피난처를 마련해 주어야 했다. 그는 "모든 종류의 생물을 암수 한 쌍씩을" 방주로 이끌어들여야 했었다. 그러나 그가 이들을 이끌어들이는 데 어려움을 겪지 않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자발적으로 그에게 나아오게 하리라고 약속하셨다(20절). 소가 그 주인과 구유를 알도록 하시는 이가 이제 그의 보존자와 방주도 알게 하셨다.
(2) 그는 이들이 굶어 죽지 아니하도록 먹을 것을 마련해 주어야 했다(21절). 그는 이제 자기 책임하에 있는 대가의 수효에 맞고, 그리고 방주 안에 있기로 정해진 기간 동안 먹을 것을 그 배에 실어야만 했다. 여기에서도 역시 그는 그리스도의 모형이었다. 이 세상의 존립은 그의 덕분이었고, 그로 인하여 만물이 존재하며, 또한 죄로 인하여 인류가 완전히 멸망되지 않도록 보존한다. 그를 통하여 거룩한 씨가 살아남게 되고, 만물이 헛된 신음에서 구원함을 얻은 것이다. 노아는 자기가 다스려야 할 자들을 구원했으며, 그리스도께서도 그러하시다(히 5:9).
방주로 들어가라(1)(창세기 6:22)
노아가 방주를 짓는 일에 관심을 기울였고 근면했던 것은 다음과 같은 것으로 생각할 수가 있다.
1. 하나님 말씀을 믿는 그의 신앙의 결과이다. 하나님께서는 조만간 이 세상을 물에 잠기게 하리라고 노아에게 말씀하셨다. 그는 그것을 믿고 그같이 무서운 홍수를 두려워했다. 그리고 그러한 두려움 가운데서 방주를 마련했다. 우리는 신앙을 인간의 불신앙과 불의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에서 비롯된 계시와 관련시켜야 한다. 위협적인 말씀은 헛된 경고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하겠다. 많은 사람들이 노아에게 주신 이같은 경고를 믿으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세상을 지으신 지혜로운 하나님께서 다시금 그것을 그렇게 속히 파괴하시고, 물을 빼 버려 물이 드러나게 하신 하나님(1:9-10)께서 또다시 그것을 물로 덮어 버리신다니 그것을 누가 믿겠는가? 이것이 하나님의 긍휼과 어떻게 일치될 것이며, 그 긍휼이 그의 모든 역사(役事)하신 것에 임재해 있는데 어찌하여 사람의 죄로 인하여 유독 죄 없는 피조물까지도 죽어야 한다는 것이냐? 그리고 반드시 그같이 되어야 한다면 왜 노아에게만 그같은 사실을 알려야 하겠는가?" 그러나 노아의 신앙은 이러한 타락된 모든 추론을 극복했다. 지금까지 그가 본 일도 없는 그 같이 방대하고도 정확한 칫수를 가진 건조물을 세운다는 것은 그로 하여금 대단한 염려와 수고와 비용을 들게 하였을 것이다. 또 시간을 요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 환상을 오랜 후에 이루어질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이웃들은 그가 쉽사리 믿는 것을 조롱하였을 것이고, 그는 술꾼들의 놀림거리가 되었을 것이다. 방주를 짓는 것은 "노아의 우매함" 이라고 불리었을 것이다. 악한 자가 악한 자에게 오면 그들은 서로 이웃처럼 잘 지내게 된다고 한다. 그러나 노아는 이러한 수천 가지의 바대를 믿음으로 이겨냈다. 그의 순종은 이미 각오된 단호한 것이었다. 즉 "노아가 그와 같이 했다" 고 했으니, 그는 불평하거나 논박하지 아니하고 쾌히 준행하였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행하라" 하셨으니 그는 그것을 행하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시간을 지켜야 되고 참을성이 필요한 일이었다. 그는 자기에게 주어진 지시에 따라 모든 것을 정확하게 행하였으며, 그것을 짓기 시작하자 끝마칠 때까지 결코 그만 두는 일이 없었다. 우리들도 노아와 같이 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2. 자기 자신을 위한 지혜의 본보기이다. 이로써 그는 자신의 안전을 위하여 대비하였다. 그는 홍수를 두려워하여 방주를 마련하였다. 닥쳐오는 심판에 대한 경고를 하나님께서 주실 때에 그 말씀을 따라 대비하는 것이 우리들의 지혜요 의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출 9:20, 21; 겔 3:18 참조). 우리는 이 땅에서 그의 심판날에 주님을 만날 준비를 해야 하며,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이니 그리로 도망가야 하겠으며(잠 18:20), 우리들의 밀실에 들어가야 하겠으며 (사 26:20), 특히 우리는 이 땅에서의 죽을 때와 심판날에 주님을 만날 준비를 해야 하며, 반석되시는 그리스도 위에 집을 지어야 하고(마 7:20), 방주이신 그리스도에게로 들어가야 하겠다.
4. 태평한 세상에 경고의 뜻으로 생각할 수가 있다. 또한 그것을 닥쳐올 홍수에 대한 올바른 경고이기도 했다. 그가 휘두른 모든 도끼와 햄머 소리는 모두 회개를 촉구하는 부름이었고, 그들도 역시 방주를 준비하라는 요청이었다. 그러나 이것으로써 세상을 납득시킬 수는 없었다. 그것으로써 그는 세상을 단죄하였다(히 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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