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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가인과 아벨의 출생(창세기 4:1-2)

아담과 하와에게는 아들과 딸들이 많이 있었다(5:4). 그러나 가인과 아벨이 그 중 제일 손위인 두 사람인 것 같다. 흑자는 그들은 에서와 야곱처럼 쌍둥이이며, 형은 미움을 받고 동생은 사랑을 받았다고도 한다. 비록 하나님께서 인류의 시조를 낙원에서 쫓아냈지만 자식을 없게 하시지는 아니하셨다. 오히려 그들을 위하여 다른 축복을 마련하셨음을 보여 주기 위하여, 생육과 번성의 복을 첫 축복으로 주신 것이다. 그들은 죄인이었고 참회의 수치와 슬픔을 느끼기는 했으나, 그들 자신을 지탱해 줄 수 있는 구원주의 약속을 가짐으로써 위로를 받게 된 것이다. 여기서는 다음과 같은 것을 살펴보자.

Ⅰ. 두 아들의 이름.

1. 가인은 "소유" 라고 하는 뜻이다. 이는 하와가 그를 낳고 기쁨과 감사와 벅찬 기대를 가지고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도다" 고 말했기 때문이다. 자녀들이란 하나님의 선물이며, 가정을 이루는 것은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는 일임을 주목하자. 또한 자녀들이란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오는 것이며, 그는 손수 지으시고 주신 선물을 저버리지 아니하신다는 것을 알 때, 그들을 통해서 오는 우리의 위로는 갑절이 되고 신성하게 되는 것이다. 하와는 죄의 결과인 고통 중에 해산을 하였으나 그러한 고통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의 긍휼에 대한 인식을 잃지 않았다. 위로가 적어졌지만 역시 그 위로는 우리들이 받을 위로보다는 더 큰 것이다. 따라서 불평으로 인하여 감사의 마음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 하와의 말을 "내가 한 남자 곧 주요 신인(神人)을 낳았도다" 라고 풀이하여, 많은 사람들은 아마도 그녀가 이 애는 약속의 씨라고 스스로 잘못 생각하여 그 아들을 찬양하는 착각을 가졌다고 한다. 만일 그랬다고 하면, "이는 여호와의 기름 부으신 자가 과연 내 앞에 있도다" (삼상 16:6)라고 말한 사무엘과 같이 얼토당토않은 큰 잘못인 것이다. 자녀들이 출생할 때, 그들이 장차 무엇이 될 것이라고 그 누가 미리 예측할 수가 있단 말인가? "남자 즉 주요", 아니 최소한도 주님으로부터 온 사람으로서 그 가정의 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될 것이라고 생각되었던 그 사람이 주님에게 원수가 되었다. 피조물에 대한 기대가 적으면 적을수록 이에 대한 실망도 그만큼 작아지는 것이다.

2. 아벨이란 "공허" 란 뜻이다. 그녀가 가인에게서 약속의 씨를 얻었다고 생각했다면, 다른 아들을 가지는 것은 그녀에게는 공허한 일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스도에게 관심을 가지고 그만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다른 것을 가지는 것이 모두 무(無)와 같다. 또한 이는 우리가 이 세상에 장수하면 할수록, 세상의 공허함을 더 많이 보게 되리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당초에는 소유물이라고 좋아하던 것도, 후에 가서는 아무런 쓸모 없는 것임을 알게 된다. 이 아들에게 준 이름은 모든 인간에게 붙여진다. 곧 모든 사람은 기껏해야 아벨 - 공허이다(시 39:5). 그러므로 우리들 자신이나 남들도 다 그러하다는 것을 알도록 힘쓰자. 어린이와 청년은 허망함뿐이다.

Ⅱ. 가인과 아벨의 직업.

1. 그들은 둘 다 작업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분명히 온 세상의 상속자였고 높은 가문과 방대한 그 소유가 그들에게 있었으나 안일한 생활을 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아버지가 무죄 상태에 있을 때에도 직업을 주셨으니, 그들에게도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저마다 이 세상에서 할 일을 갖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부모들도 그 자녀들이 일을 하도록 키워야 한다. "그들에게 성경과 직업을 주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리라" 고 도드(Dod) 씨는 훌륭히 말하였다.

2. 그들은 서로가 각기 다른 직업을 가지고 있었다. 형제가 서로 기회 있을 때마다 교역하면서 살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국가의 각 기관들은 서로를 필요로 하며, 또한 서로간의 사랑은 상호 교역으로 도움을 받게 되는 것이다.

3. 그들의 작업은 그 아버지처럼 농업에 속하는 것으로, 긴요한 직업이었다. 왕도들의 소산을 먹고 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수고와 돌봄이 항상 필요한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지금은 미천한 직업으로 여겨진다. "빈천한 사람들이" "포도원을 다스리는 자와 농부" 로 일하기 때문이다(렘 52:16). 그러나 이 직업은 조금도 그들에게 불명예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그것을 영예롭게 여겼다.

4. 이야기의 순리로 보아 아벨이 동생이었으나 먼저 직업에 종사하여, 가인에게 모범을 보여 준 것 같다.

5. 아벨은 양치는 일을 택하였다. 이 직업은 명상과 헌신에 가장 잘 어울리는 직업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목축 생활은 유별나게 좋은 직업으로 평가되어 왔다. 모세와 다윗을 양을 치면서 고독한 가운데서도 하나님과 교제했던 것이다. 우리를 죄와 가장 멀리 있게 하고, 하나님을 섬기고 즐기는 기회를 가장 많이 주는 그런 직업이 가장 좋은 직업이요 우리를 긍휼에 유익한 직업이며, 우리가 선택해야 할 직업이라는 것을 명심하자.

 

4:2 없음.

 

4:3

가인과 아벨의 제사(창세기 4:3-5)

Ⅰ. 가인과 아벨이 드린 예배를 볼 수 있다. "세월이 지난 후에" 즉 그들이 각기 자기 직업에 다소의 경험을 얻은 후에(히브리어로 "마지막 날에" 라고 했는데, 일 년의 수확을 기념하는 절기나 타작을 기억하여 금식일을 지키는 연말이거나, 또는 한 주일이 지나는 마지막 날 즉 일곱째 날인 안식일을 뜻한다). 어떤 정한 때에 가인과 아벨은 그 가정의 제사장인 아담에게 각기 "여호와께 드릴 재물" 을 가지고 왔다. 그러므로 아담의 배신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주시는 은혜의 징표와 아담과 그의 아들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뜻을 나타내는 표로서, 하나님이 그들에게 제사를 드리라는 지시를 했다고 생각해야 한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이제 아담이 약속을 믿으며 그 속죄 법을 순종하는가를 시험해 보고자 하셨을 것이다. 하나님은 하늘과 땅 사이의 통신을 재개하시어서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를 그들에게 미리 나타내어 보이려고 하신 것이다. 여기에서 다음을 살펴보자.

1. 하나님을 경건하게 예배하는 것은 새로운 발명이 아니라, 옛부터 있어 온 제도이다. 그것은 "태초부터" 있던 것이다(요일 1:1). "옛적의 선한 길" 이다(렘 6:16). 우리 하나님의 도성은 과연 고대에 건설된 희락의 도성이다(사 23:7). 진리는 과오의 기선을 제압했고, 이 불경건의 기선을 제압했다.

2. 어렸을 때 잘 가르치고 늦기 전에 경건하게 예배드리는 것을 훈련시키는 것이 자녀들에게 좋은 일이다. 그래야 그들이 장성하여 자립하게 될 때에 자발적으로 "하나님께 예물을 가지고" 올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여호와의 도" 속에서 부모는 그 자녀들을 양육하여야 하는 것이다(18:19; 엡 6:4).

3.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번창케 하여 주시었으니, 우리는 가진바대로 각자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한다. 그들은 직업과 소유물에 준하여서 제물을 가지고 왔다(고전 16:1, 2 참조). "우리들의 장사한 것과 이익은 무엇이든 간에 거룩하게 여호와께 돌려야 마땅한 것이다" (사 23:18). 우리는 신앙을 유지하고 경건과 사랑의 행위를 함으로써 하나님께 거룩함을 돌려야 한다. 따라서 이제 우리들은 "정직한 마음으로 제물을 가지고 와야 마땅하다" "하나님께서는 그와 같은 제물을 기뻐하신다."

4. 위선자들과 악을 행하는 자들도 외적인 예배 행위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백성의 최선을 따라갈 수가 있다. 즉 가인도 아벨과 함께 재물을 가지고 왔다. 아니 오히려 그들 중 가인이 먼저 한 것처럼 그의 제사가 먼저 기록되어 있다. 위선자들은 선량한 그리스도인처럼 설교도 많이 듣고 기도도 많이 하며 구제 사업도 많이 할 수 있겠지만, 그들에게 진실성이 없으며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받으시지 않는다. 바리새인과 세리들도 성전에 가서 기도를 했던 것이다(눅 18:10).

Ⅱ. 그들의 예배의 각기 다른 결과. 모든 신앙의 행위의 목적은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것에 있다. 이 목적을 이룩하면 잘한 것이며, 그렇지 못하면 헛된 예배가 되고 마는 것이다.(고후 5:9). 아마 구경군에게는 가인과 아벨의 제사는 한결같이 훌륭하게 보였을 것이다. 아담은 그들을 다 받아들였지만, 사람들처럼 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아니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며", 그 증거로 아마 하늘로부터 불을 내리셨을 것이다. 그러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셨다." 이와 같은 차이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하나님은 절대 권력을 가지신 통치자이지만, 이유 없이 미소 짓거나 기분 나쁜 안색을 보이지는 않으신다.

1. 제물을 바치는 사람의 인격에 차이가 있었다. 가인은 악한 사람이었으며, 세상과 육신의 권세 하에서 좋지 못한 생활을 했던고로 그의 제물은 "여호와께는 가증스러운 것이었고" (잠 15:8) "헛된 제물" 이었던 것이다(사 1:13). 본문의 말씀에서 암시하는 바와 같다, 하나님께서는 가인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시지 아니했으므로, 그의 제물을 받지 아니하셨다. 그러나 아벨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의인 아벨" 이라 불린다(마 23:35). 그의 마음이 정직하고 그 생활이 경건했으며,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 수 있는 자 중의 하나였다(시 11:7). 따라서 그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셨다(잠 15:8). 또 하나님께서 거룩한 사람으로 인정하셨으므로, 그의 제물을 거룩한 제물로 여기신 것이다. 나무가 선하여야 그 열매도 선하며, 의인이여야 인간의 마음을 헤아리시는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다.

2. 그들이 가져온 제물에 차이가 있었다. 아벨은 가인보다 더 좋은 제물을 드렸다고 뚜렷하게 말씀되어 있다(히 11:4).

(1) 그 제물의 본질상의 차이였을 것이다. 가인의 것은 단지 창조주를 인정하는 표시로 드리는 것 뿐이었던 것이다. 땅의 소출로 드리는 소재(素材)는 아마도 무죄 시대에 드린 것에 지나지 않은 것일 것이다. 그러나 아벨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속죄의 표를 나타내는 속죄의 제물을 드림으로써,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진정시키고 중보자에 대한 하나님의 은총을 바랐던 것이다.

(2) 그렇지 않으면 제물의 품질적인 차이가 있을 것이다. 가인은 "땅의 소산을" 가져왔다. 아마 자기에게 필요 없으며, 팔아먹을 수 없었고, 처음 거둬들인 것도 아닌 것으로 바쳤을 것이다. 그러나 아벨은 제물을 정성껏 택했다. 절름발이거나 야윈 것도 폐물도 아닌, "양의 첫 새끼", 곧 그가 가진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 또 "살찐 것" 곧 최선의 것 중에 가장 좋은 것으로 드렸을 것이다. 그래서 히브리 학자들은, 선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드려지는 것은 무엇이든 가장 우수하고 훌륭한 것이어야 됨을 법칙으로 삼고 있다. 으뜸 되시고 최선이 되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시간도 힘도 충성도 첫째 가는 것과 최선의 것을 받아 마땅한 것이다.

3. 그러나 가장 큰 차이는, 아벨은 믿음으로 드렸고 가인은 그렇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들이 따른 원리 자체에 차이가 있었다. 즉 아벨은 하나님의 영광을 그의 목적으로 삼고, 구속하여 주시는 이의 약속을 의지함으로써 드렸다. 그러나 가인은 단지 자기 친구를 위하여 하는 정도만을 했다. 곧 자기 자신의 신용을 보존하기 위하여서만 드렸으며, 믿음으로 드린 것이 아니었으므로, 죄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아벨은 의롭게 된 세리와 같이, 회개의 마음을 가진 신앙인이었다. 그러나 가인은 오만하고 우쭐대며 자기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는 바리새인과 같아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는 인정을 받을 수가 없었다.

Ⅲ. 가인은 하나님께서 그의 제물과 아벨의 제물을 차별하심에 대해 불쾌하게 여겼다. 가인은 심히 분해서, 그 안색에 우울한 표정이 나타났다. 이것은 그의 억울함과 불만의 표정이라기보다는 원한과 분노를 말해 준다. 그의 토라지고 심술나고 기분 나빠 하는 표정은 그의 격렬한 분개심을 실증한다. 그이 얼굴에는 심술이 엿보였다. 그의 표정은 그의 잘못된 스스로 증명했다.

1. 하나님께 대한 적대심과 형제간의 제물에 차별을 두는 하나님께 대한 분개한 마음, 그는 자기 자신의 불충스러움과 위선 때문에 하나님께서 받아들이시지 아니한 것이라고 자신을 나무라고 통분했어야 했다.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할" 세리와 같이 회개하고 부끄러움을 느꼈어야만 했던 것이다(눅 18:13). 그런데 도리어 하나님을 웃음과 노하심에 있어서 지극히 편파적으로 불공평한 양, 그리고 자기에 대해서 많은 잘못을 저지르신 양 하나님께 대들었던 것이다. 우리 자신의 죄 때문에 당하는 비난에 오히려 항변하는 것은 오만한 마음의 확실한 표적이다. "사람의 어리석음이 자기의 길을 굽게 하고, 설상가상으로 그 마음으로 여호와를 원망한다" (잠 19:3).

2. 분명한 영예를 차지한 자기 동생에 대한 시기. 동생은 어느 모로나 그에게 누명을 씌울 생각이 조금도 없었으며, 그를 모욕해서 노하게 하지 아니하였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자기 동생을 원수로 보고 원한을 품었던 것이다. 다음과 같은 것을 명심하자.

(1) 자신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자포자기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귀여움을 받는 자들을 보고 분개하고 시기하는 것이 보통이다. 바리새인들은 가인의 길을 따랐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했을 뿐 아니라, "들어가고자 하는 자들까지도 막아 "버렸던 것이다(눅 11:52). 그러한 자의 눈은 악한 것이니, 이는 그들의 주인의 눈과 동료들의 눈은 선하기 때문이다.

(2) 시기심은, 일반적으로 안색이 변함으로써 그 자체를 드러내고, 뼈가 썩게 함으로써 그 형벌이 뒤따르게 되는 그러한 죄이다.

 

4:4 없음.

 

4:5 없음.

 

4:6

문책 받는 가인(창세기 4:6-7)

여기에서 하나님은 가인을 타일러 그 죄와 어리석음을 깨닫게 하고 분함과 불만이 부당하다는 것을 뉘우치게 하시며, 다시 선한 성품뿐만 아니라 앞으로 실수가 없도록 하라고 하신다. 이것은 그처럼 악하고 또 악한 일을 하는 자를 친절하게 다루시는 하나님의 인내하심과 은혜로우신 선의 실례이다. 그는 어는 누구도 멸망 받을 것을 원치 아니하시며, 모든 자들이 회개할 것을 원하신다. 탕자의 아버지도 이와 같이 큰 아들에게 변론했던 것이며(눅 15:28). "주의 길이 공평치 않다" 고 말한 이스라엘 족속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변론하신 것이다(겔 18:25).

Ⅰ. 하나님께서는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라고 하시면서, 가인으로 하여금 그의 불만이 참으로 정당한 것인지를 살피게 하며 그 원인이 과연 정당한가를 반성케 하신다. 다음과 같은 것을 고찰하자.

1.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악스러운 정욕과 불만을 알고 계신다. 어떠한 노한 얼굴이나 시기심, 또는 짜증내는 모습도 하나님의 눈을 피할 수 없다.

2. 우리의 죄악된 심정과 걱정은 그 이유에 대하여 냉정하고 진지하게 생각해 보면 대부분 사라지고 말 것이다. "왜 내가 노하는가? 그에 대한 참으로 정당한 이유가 있는가? 왜 내가 그처럼 빨리 노하는가? 왜 그렇게 심히 노하는가? 그리고 왜 화해할 수 없을까?"

Ⅱ. 가인을 다시금 옳은 마음으로 돌이키기 위하여, 그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밝히신다.

1. 가인은 하나님에게 화낼 아무런 이유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시험 단계에 알맞은 정부의 법, 곧 불변하는 고정된 법에 따라 판결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 앞에 생명과 사망, 축복과 저주를 두시고, 인간의 행동에 따라 차별하시며, 그들의 운명도 달라진다. 이 규례들은 공의로운 것이며, 하나님의 길은 이러한 법칙을 따라 공평함이 분명하며, 다음과 같이 말씀하실 때 그는 정당하신 것이다.

(1) 가인 앞에 생명과 축복을 제시하시고,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네가 선을 행하지 않았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아니 그보다는 네가 그것을 알고 있다."

[1] "네 동생처럼 네가 선을 행하였다면 그의 제물을 받은 것처럼 네 것도 틀림없이 열납됐을 것이다" 라고 하신다.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보시지 아니하시며, 자기가 지으신 것은 아무것도 미워하지 아니하시며", 하나님의 은총을 스스로 버린 자 왜에는 누구에게도 그 은총을 거절하지 아니하시며, 자기의 죄로 말미암아 스스로 하나님을 적대하는 자 이외에는 누구에게도 원수가 되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그가 받으시기에 부족하다면 그 책임이 우리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 모든 잘못은 우리들 자신의 것이며, 우리들이 할 바를 행하게 되면 그의 긍휼하심을 받지 못했을 리 만무한 것이다. 이것은 죄인들을 멸망시키고, 그들의 멸망을 한층 더 무겁게 하시는 하나님의 행위를 정당화해 줄 것이다. 지옥의 운명을 타고 난 죄인이란 없다. 그러나 만일 인간이 선을 행한다면 하늘의 영광스러운 성도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얼마 안가서 이에 대해 입을 다물고 말 것이다.

[2] 아니면, "만일 지금 네가 선을 행하고, 너의 죄를 회개하고, 마음과 생활을 개선하고, 보다 나은 방법으로 나에게 제물을 가져오고, 또 선한 일을 할 뿐 아니라, 그것을 잘하면 지금이라도 열납될 것이요 너의 죄는 용서함 받고 위로와 은혜를 되찾을 것이며 만사가 형통할 것이다" 라고 하셨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중재하시는 중보자의 중보의 효험을 볼 수가 있다. 회개의 여지를 전혀 주지 않은 첫 계약의 발판 위에 우리가 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새로운 조건 위에 선다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즉 우리가 죄를 범한다 하더라도, 회개하고 돌아오게 되며 긍휼함을 얻을 수가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또한 우리는 복음이 그 얼마나 일찍 전파됐는가를 볼 수가 있으며, 또한 그 혜택이 죄인의 괴수에게까지도 임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2) 하나님은 인간 앞에 죽음과 저주를 두신다. "선을 행치 아니하면", 즉 "선을 행치 아니함으로써 네 스스로가 초라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심한 견책을 받지 아니하였음을 것이니라" 하시는 것이다. 흑은 일반적으로 이해되듯이, "네가 지금 선을 행치 아니하고, 이와 같은 진노를 받을 일을 고집하고, 하나님 앞에서 네 자신이 겸비치 못하고, 나를 대항하여 원고 한다면, 죄가 대문에 엎드리느니라" 고 하시는 것이다. 이 말은 다음과 같은 뜻이다.

[1] 즉, 그것은 죄를 더함이다. "이제 분노가 네 가슴에 차있으니, 살인이 네 문에 있다" 는 것이다. 죄의 길은 내리막 길이며, 사람을 점점 더 악한 길로 이끈다. 선한 제물을 드리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무관심하고 소홀히 하는 자기 스스로 가장 악한 시험 가운데 드는 것이며, 아마도 죄가 그 문 앞에 도사리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율례를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온갖 가증스러운 짓을 범하는 위험에 빠지게 된다(레 18:30).

[2] 또는 죄인 처벌. 죄와 벌은 매우 가까운 동계어(同系語)여서 히브리어에서는 같은 어휘로 사용되며, 두 가지 뜻이 다 함께 포함되어 있다. 죄를 집에 머물게 하면, 집달리처럼 그 죄인이 내다보기만 하면 체포하려고 문간에서 기다린다. 저주는 마치 자는 듯이 엎드려 있는 것이지만, 곧 깨어날 수 있도록 문 앞에 엎드려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저주란 깊이 잠들지 않는 자같이 보이는 것이다. 너희 죄가 "너희를 찾아낼 것이니라" (민 32:23). 그런데도 혹자는 이것 역시 긍휼함을 암시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네가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즉 속죄제)가 문에 엎드려 있어서, 네가 그 은혜를 입게 될 것이다" 고, 같은 단어가 죄와 죄를 위한 제사를 나타낸다. "네가 선을 행하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낙망하지 말지어다. 구원책이 바로 가까이에 있다. 하나님의 위로하심은 그리 멀지 아니하다. 굳게 그것에 매달려라. 그리하면 너의 거룩한 것의 부정은 용서함 받을지니라." 그러므로 큰 속죄에 제물인 그리스도가 문 앞에 서 있다고 한다(계 3:20). 그리고 속죄제에 관심을 가지고 그 문으로 가지 아니하는 자들은 죄 가운데서 멸망해 마땅한 것이다. 이러한 모든 것을 종합해서 생각해 본다면, 가인은 스스로에게 노할 망정 하나님께 대해서 화낼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것이다.

2. 아울러 자기 동생에게 화낼 이유도 없는 것이다. 그의 "소원은 네게 달려 있는 것이다. 그가 너를 형님으로 계속 존경할 것이며, 또한 너의 맏이이므로 언제나 그를 다스릴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물을 받았다고 해서 장자의 권리를 그에게 넘겨주신 것도 아닌데, 가인은 이것을 시기했었다(창 49:3). 또 하나님께서 그런 것을 뜻하신 바도 아니었고 아벨도 그렇게 생각하지 아니했다. 가인의 편견과 같은 것을 초래할 위험성은 전혀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처럼 화낼 필요가 어디 있었겠는가? 여기에서 살펴보기로 하자.

(1)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차별은 하나님의 섭리로 인한 구별을 바꾸지는 아니한다. 오히려 그것들은 그대로 유지하며 거기에 따르는 의무를 다하게 하는 것이다. 즉 믿는 종은 믿지 않는 주인에게 순종해야 마땅하다. 지배권은 은혜 가운데 기초를 두고 있는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어떤 신앙이라도 사물의 관계에 있어서의 불충함과 무례를 정당화시키는 것은 아니다.

(2) 이 세상 정권이, 흔히 하나님을 신실하게 예배하는 자들은 그들의 정부에 위험한 존재요, 가이사의 적이며, 국왕과 국가에 대해서는 해로운 존재라는 생각을 품고 시기하는 것은(그러한 혐의 때문에 핍박 자들은 신자들에 대하여 분노를 품었다) 매우 부당하고 매우 불합리한 것 뿐이다. 자기들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는 자들은 어떠한 경우에든지 간에 그리스도인은 참으로 가장 훌륭한 백성이며, 나라의 평온화에 이바지하는 사람들임이 분명하다. 그들의 갈망은 그들의 통치자들에게 달려 있으며, 그들이 이들이 다스릴 것이다.

 

4:7 없음.

 

4:8

최초의 살인(창세기 4:8)

여기에는 가인의 분노의 격렬함과 그 결과로 아벨을 죽인 사건을 보게 된다.

Ⅰ. 그것은 가인의 죄이다. 그 죄는 주홍과 같고 진홍과 같은 죄이며 가장 큰 처음 죄였는데, 이는 자연의 빛과 자연의 법칙에 이탈되는 죄였으며, 악한 자의 양심까지도 깜짝 놀랄 죄였던 것이다. 여기에서 다음 사실을 알 수 있다.

1. 죄가 이 세상과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오게 된 비참한 결과. 인간의 본성이 그 얼마나 괴로움이 근본인가를 보게 된다. 이것은 몸서리나는 것을 간직하고 있다. 아담이 금지된 실과를 먹은 것은 지극히 사소한 죄같이 보였으나 사실에 있어서는 가장 큰 죄로 통하는 문을 개방해 놓고 만 것이다.

2. 여인의 후손과 뱀의 후손과의 적대심이라는 열매를 맺게 됨. 아벨이 순교자들의 고귀한 대열의 선봉에 섰던 것같이(마 23:35), 가인은 핍박하였던 것이니, 지금도 차이는 있지만, 역시 그렇다(갈 4:29). 앞으로도 모든 성도들이 영원히 구원받고 그들을 미워하는 모든 자들이 영원히 멸망하여 전쟁이 끝날 때까지는 이 미움이 계속될 것이다.

3. 시기, 증오, 악의 그리고 모든 부정함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보여 주며, 만약 이러한 것들이 영혼 속에 깃들고 가슴속에 자리잡으면, 인간은 끔찍스러운 살인죄를 저지를 위험 속에 놓이게 됨을 보여 준다(마 5:21, 22). 원한을 품는 것은 보다 더 큰 죄이다.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하나님 앞에서는 이미 살인한 자다. 하나님께서 그러한 자를 그대로 내버려 두면, 이 세상에서 스스로 살인자가 되려는 기회를 원할 뿐이다. 많은 죄는 가인의 죄가 악화된 결과이다.

(1) 그가 죽인 사람은 자기의 형제 곧 친 형제이었고, 자기 친 어머니의 아들이었으며(시 50:20), 자기가 보호했어야 할 동생이었다.

(2) 가인에게 어떠한 잘못도 저지른 일이 없는 착한 동생이었을 뿐만 아니라 언행간에 그를 노하게 한 일도 없었다. 그의 소망은 항상 그 형을 위한 것이었다. 어떤 경우를 막론하고 그 형에게 항상 충성스러우며 존경하는 동생이었다.

(3) 그는 이러한 일이 있기 전에 충분한 경고를 받은 바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그 결과가 어떻게 될 것까지도 말씀해 주셨는데도 그와 같은 잔인한 계책을 감행했다.

(4) 우정과 친절이라는 탈을 씌워 그 계책을 덮어 버리려한 것이 분명하다. 즉 가인은 아벨이 위험을 눈치채고 자기를 멀리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온유하고 다정스럽게 아우 아벨과 말을 나눴다. 요압도 이와 같이 아브넬과 입마추고는 그를 죽었던 것이며, 압살롬도 그같이 그 형제 암논에게 잔치를 베풀고는 죽여 버렸던 것이다. 70인역<구약 성서 희랍어역의 하나, 주전 200년 이전에 애굽의 필라델푸스(Ptolemy philadelphus) 왕의 요청으로 72인의 유대인에 의해 번역된 것으로 생각됨>에 의하면, 가인이 아벨에게 "들로 나가자고 말했다고 번역되어 있다. 만일 그렇다면, 아벨은 그것을(현대 감각으로 말해서) 도전으로 생각하지 않았음이 분명한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며, 단지 함께 들로 일하려 가자고 하는 형제다운 권유로 알았던 것임에 틀림없다. 갈대아 번역에는 그들이 들에서 이야기를 나눌 때에, 가인은 미래의 심판이란 따위는 없을 것이며 내세도 없으며, 저 세상에서의 상벌도 없다고 주장하자, 아벨은 그 모든 것이 있다고 진리를 변호했고, 그 때에 가인은 이를 트집잡아 치게 된 것이라고 되어 있다.

(5) 그러나 성경이 말하여 주는 동생 살해의 이유에 의하면 그 이유는 "자기 행위는 악했고 동생의 행위는 의로왔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그 자신이 악한 자에게 속한 것을 스스로 입증했다(요일 3:12). 그는 모든 의인의 대적이고 마귀의 자식임을 보여 주었다. 즉 그는 그의 친 형제에게조차도 원수가 되었고, 그는 파괴자 사탄의 직접적인 꾀임을 받은 자였음이 드러났다.

(6) 아니 그보다는 오히려 자기 동생을 죽인 것은 그가 하나님을 직접 공격한 것이나 다름 없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벨의 것을 열납하신 것을 노여움의 구실로 삼았기 때문이며, 하나님이 아벨을 사랑하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아벨을 미워한 것이었다.

(7) 아벨의 살인은 더욱 비인도적인 것이었다. 아벨 같은 사람은 퍽 보기 드문 의인이었기 때문이다. 인간의 목숨이란 것은 언제나 귀한 것이지만, 아벨의 생명은 특별히 귀한 것이었는데, 도저히 구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Ⅱ. 아벨에게는 고난으로 생각할 수 있다. 아담이 죄를 지은 후 줄곧 사망이 지배해 왔으나, 아직까지 누가 그 사망에게 붙잡혔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그런데 이제 듣게 된 것이다.

1. 처음으로 죽은 자는 성도요, 하나님께서 열납하시고 사랑을 받던 아벨이었다. 이것은, 지금껏 약속 받은 씨가 믿는 자들을 그 사망의 독아(毒牙)로부터 구원해내기 위하여 사망의 권세를 잡고 있던 자를 멸망하도록 되어 있긴 하지만, 그들도 죽음의 공격을 받아야만 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즉 무덤으로 간 첫 사람은 하늘로 갔다. 하나님은 친히 첫 열매를, 곧 먼저 난 자들에게 죽음에 대한 안심을 주시고자 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먼저 그들에게 저 세상에 이르는 관문을 여셨다. 이것은 죽음의 성질을 변경시킨다. 죽음은 하나님께서 택하여 주시는 시기에 알맞은 운명이 되었다. 그러므로 죽음의 공포를 벗어 버리자.

2. 그 보다는 처음으로 죽은 그는 순교자이다. 그는 신앙을 위해서 죽은 자이다. 이것은 전몰 용사의 무덤에 묻힌 군인들보다 훨씬 더 참된 순교이다. 아벨의 죽음은 결코 죄를 받고 저주받은 것이 아니라, 그 때문에 영광의 면류관을 얻게 된 죽음이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는 자는 결백하고 무해할 뿐만 아니라, 그를 위하여 죽는 자에게는 영예롭고 영광이 되기도 한다. 이 것이 놀랍도록 변화되어 찬양을 받을 만큼 된 죽음의 특성이다. 우리가 만일 피흘리기까지 저항하도록 부름 받는다면 불같은 심판도 조금도 이상히 생각지 말아야 하며 뒤로 물러서지 말아야 한다. 성실한 모든 자에게는 생명의 면류관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4:9

가인의 벌(창세기 4:9-12)

여기에는 첫 살인자에 대한 심문과 정죄에 관한 완전한 기사가 나타나 있다. 민간법정이 나중에는 설치되었지만(9:6) 아직은 이러한 목적을 위해서 설치되지 않았을 때이므로, 하나님께서 친히 재판장이 되시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복수가 그에게 속하는 분이시며, 피에 대하여 특히 성도들의 피에 대하여는 반드시 심리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다음 사실을 살펴보기로 하자.

Ⅰ. 가인의 범죄 심문(審問).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하셨다. 혹자는 범죄를 저지른 그 다음 안식일에 가인이 이런 심문을 받았으며, 그 때는 다른 때와 같이 하나님의 자녀들이 여호와 앞에 나와 예배하러 모였음 때이며, 늘 비우지 않던 자리가 비어 있고, 아벨이 눈에 띄지 않으므로,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공중 예식에 누가 참례하고 누가 불참하는가를 예의 주시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가인이 질문 받은 것을 그가 아벨에 대해서 악의를 품고 있는 내색을 드러내고 늦게까지 그와 함께 있어서 의당 의심을 받을 이유가 있었기를 솔직하게 자백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고자 하는 자는 이처럼 하나님 앞에 스스로를 문책해 보아야 하며, 또한 회개하는 자도 그처럼 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Ⅱ. 가인의 항변. 그는 오히려 "죄가 없다" 고 항변했을 뿐만 아니라, 자기 죄에 반항이라는 죄를 더하고 있다. 왜 그런가?

1. 의식적으로 살인하고도,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라고 고의적인 거짓말을 하여 그 죄를 은폐하려고 애썼기 때문이다. 그는 아벨이 어찌되었는지를 너무나도 잘 알고 애썼기 때문이다. 그는 아벨이 어찌되었는지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뻔뻔스럽게 그것을 부인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우리들은 마귀라고 하는 것이 당초부터 살인자요 거짓말쟁이 였다고 하는 것을 가인에게서 볼 수 있다. 죄인의 정신은 이와 같이 죄에 미혹되어 눈멀게 되고, 그 마음은 강퍅해지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모든 것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저들의 죄를 은폐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야 말로 어리석은 소경이며, 죄로 자백하기만 하면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에게 죄를 은폐하기를 바라는 자들은 어리석고 완악한 자들이다.

2. 그는 지금 뻔뻔스럽게도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라고 되물으면서 재판장이신 하나님께 미련하고 무례스럽게 대든다. 그는 오히려 자기 자신을 낮추어 겸손하게, "내가 내 동생을 죽인 놈이 아닙니까?" 라고 말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마치 하나님이 전혀 엉뚱한 질문을 하신 것같이,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아벨은 분명히 자기 스스로를 돌볼 만큼 나이 들었을 뿐만 아니라 내가 그를 지킬 책임을 맡은 일조차 없는 것이나이다" 라고 하면서 하나님에게 대들었던 것이다. 혹자는, 그가 마치 "당신이 그를 지키는 자가 아닙니까? 그가 행방불명이 되었다면 그것은 당신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지, 그를 지킬 책임이 없는 나에게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라는 식으로 하나님에게 트집하는 것이라고 풀이한다. 우리가 형제들을 위하여 인자한 관심을 베풀고, 그들을 돌본다고 하는 것은 훌륭한 의무이다. 이것은 우리들이 꼭 해야 할 본문인데도 우리들은 흔히 그것을 소홀히 하고 있다. 자기 형제의 일에 무관심하고, 기회 있을 때마다 그들의 몸과 재산, 또는 명성, 그리고 특히 영혼에 상처입지 않도록 돌보아 줄 책임조차 없다고 말하는 자들은 필경 가인의 후예이다(레 19:17; 빌 2:4 참조).

Ⅲ. 가인의 유죄 판결(10절). 하나님께서는 그의 질문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대답하시지 아니하셨다. 그의 항변은 어리석고도 쓸데없는 것이라고 거절하신 것이다. 즉 "내가 무엇을 하였느냐? 너는 그것을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으나, 이 죄가 얼마나 사악한 것이고, 얼마나 깊은 오점이며, 무거운 짐인가를 생각해 보았느냐? 네가 그것을 숨기려고 생각하고 있지만 헛된 일이다. 너의 죄에 대한 증거가 분명하며 부정할 수 없다. 네 아우의 피가 호소하느니라" 라고 하신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미리 다 아시고, 그를 심문하기 전에 이미 그 피가 증인이 되고 고발자가 되었다는 듯이 말씀하신다. 여기에서 다음 사실을 살피게 된다.

1. 살인은 하나님께 크게 울부짖는 죄이다. 그보다 더한 것은 없다. 피는 피로서 갚는 것이며, 피살자의 피는 살인자의 피로 갚아진다. 스가랴가 죽을 때에 "여호와는 감찰하시고 신원하여 주옵소서" 라고 부르짖었으며(대하 24:22), 죽음을 당한 영혼이 제단 아래에서 "거룩하고 참된 대주재시어, 어느 때까지니이까?" (계 6:10)라고 큰소리로 부르짖는다. 화를 당한 자들은 그들을 용서해 달라고 부르짖어도(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소서!), 저들의 피가 원한을 갚아달라고 호소하는 것이다. 비록 그들이 잠잠한다 하더라도, 그 피는 큰 소리로 끊임없이 울부짖으며, 그 호소하는 소리에 언제나 의로우신 하나님의 귀는 열려 있는 것이다.

2. 피가 땅 즉 흙 속에서부터 울부짖는다고 했다.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으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느니라" 라고 한다(11절). 말하자면 땅이 자기 얼굴에 피칠을 하였으니, 부끄러워서 입을 벌려 땅 스스로가 제거할 수 없는 것을 덮어 달라고 말한다. 하늘이 가인의 죄악을 드러낼 때에, 땅도 일어나 그를 거부하고(욥 20:27) "허무한 것에 굴복하게" 된 것을 탄식한 것이다(롬 8:20, 22). 이와 마찬가지로, 가인은 자기의 범죄를 감추려고 피와 시체를 묻어 버렸지만, "살인이란 것은 드러나는 법이다." 가인은 피와 시체를 깊이 묻지 못하였고 따라서 피와 시체의 울부짖음을 하늘에 닿았던 것이다.

3. 원어에는 이 말이 복수로서 내 동생의 "피들" 이라고 했다. 이것은, 비단 그의 피 뿐만이 아니라, 그의 후손들의 모든 피, 또는 이같이 진리를 그들의 피로 증거해야 할 사람들 곧 여자와 모든 후손들(성도들)의 피까지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 모든 피를 일괄하여 말하고 있다(마 23:35). 또 "피들" 이라고 한 것은 흘려진 모든 핏방울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스도의 피는 아벨의 피보다 얼마나 더 유익한 말을 해주고 있을 것인가!(히 12:24) 아벨의 피는 원한을 갚아 달라고 호소하지만, 그리스도의 피는 용서해 달라고 호소한다.

Ⅳ. 가인에게 내려진 선고.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라" (11절). 다음 사실을 살펴보자.

1. 그는 저주를 받아 홀로 분리되어 모든 악에 속해졌고,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게 되었다. 이는 마치 경건치 못하고 불의한 모든 인간에게 하늘로부터 내려진 진노와 같다(롬 1:18). 하나님의 저주가 그 얼마나 멀리까지 미치는지, 그 얼마나 깊이 꿰뚫을 것인지, 그 범위와 무게를 누가 알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저주를 선포하시면, 그 사람은 그대로 되어진다. 이는 하나님께서 저주하시는 자마다 참으로 저주를 받기 때문이다. 아담의 불순종에 대한 저주는,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으리라" 는 것으로 한정되었지만, 가인의 반역에 대한 저주는 즉각적으로 그 자신에게 임하여, "네가 저주를 받으리라" 고 하셨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는 긍휼의 여유를 두셨지만, 가인에게는 아무것도 두지 않으신 것이다. 우리는 모두 이 같은 저주를 받아 마땅하지만, 신자들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그 저주에게 구원을 얻고 축복을 이어받게 되는 것이다(갈 3:10, 13).

2. 그는 땅에서 저주를 받게 된다. 땅으로부터 아벨의 피가 하나님께 호소하였으니, 가인이 땅에서 저주를 받게 된 것이다. 하나님은 이때 천사의 칼이나 벼락으로 즉결하지 않고 이 땅 위에 머물게 하는 길을 선택하신다. 땅 역시 그에게 저주가 되게 하신 것이다. 땅은 언제나 우리 가까이에 있다. 우리는 그 곳을 떠날 수 없다. 그러므로 땅을 하나님의 진노의 집행자로 삼으셨다면, 우리들이 심판을 피할 길이 없는 것이다. 즉 그것은 죄의 벌이 문 앞에 엎드려 있는 것이다. 가인은 자기의 분깃으로 삼고 마음에 둔 곳에서 벌을 받게 됐다. 이 저줄 때문에 가인은 땅에서 바랄 수 있는 두 가지, 즉 먹을 것과 거할 곳을 모두 박탈당했다.

(1) 가인은 땅에서 나는 식물(食物)을 박탈당한다. "네가 밭 갈아도 땅이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다" 라고 했으니, 이는 그의 즐거움 특히 그의 직업에 대한 저주이다. 하나님께서 지어 주신 모든 피조물은 우리에게 안위를 주거나 십자가를 준다. 그러므로 축복이 아니면 저주임을 알아야 하겠다. 만일 땅이 그 효력(힘)을 주지 아니한다면,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의를 깨달아야 한다. 그것은 우리들이 힘을 하나님께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인 것이다. 땅은 이미 아담 때문에 저주를 받았는데 다시 가인 때문인 것이다. 땅은 이미 아담 때문에 저주를 받았는데 다시 가인 때문에 이중적인 저주를 받은 것이다. 자기의 몫이었고 자기의 직업으로 삼았던 부분의 땅은 아벨의 피로 인하여 그에게는 위안이 되지 못하며 헛된 것이 되고만 것이다. 악한 자의 사악함은 그들의 모든 일과 모든 소유에도 저주를 초래하며(신 28:15 이하), 이러한 저주는 그들의 모든 소유물이 오히려 괴로움이 되게 하고, 행하는 모든 일에 실망을 안겨준다.

(2) 가인은 땅 위의 거주지를 빼앗긴다. 즉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고 하셨다. 이것은 가인에게 다음과 같은 저주를 가져다 준다.

[1] 인간들에게서는 영원한 수치와 비난거리가 된다. 그를 숨겨 준다든가, 그와 말한다든가, 편들어 준다고 하는 것은 언제든지 치욕적인 일로 여겨진다. 따라서 인간성을 저버린 자는 모든 인류로부터 증오와 버림을 받고, 악명 높게 됨은 마땅한 일이다.

[2] 그 자신의 마음에는 영원한 불안과 공포가 있게 된다. 즉 그가 어디를 가든지 죄지은 그의 양심이 항시 그를 괴롭히며 "공포의 도가니" 에 빠지게 한다. 어디로 가든 마음 속에 번민을 지니고 다니는 자가 어떻게 안식과 거할 곳을 찾을 수 있겠는가? 정처 없이 방황하는 자들은 버림받은 자들임에 틀림이 없다. 끊임없이 자신의 죄책에 쫓기는 자보다도 더욱 불안한 방랑자는 세상에 없다. 또한 자신의 육욕이 시키는 대로 하는 자보다 더 타락한 탕아한 없는 것이다. 이런 방랑이 가인에게 내려진 선고이다. 그러나 그를 곧 죽게 하지 않았으며 회개의 기회를 주었다는 것은 이런 선고 중에 그래도 자비가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오래 참으시며 아무도 멸망하기를 원치 않으시기 때문이다.

 

4:10 없음.

 

4:11 없음.

 

4:12 없음.

 

4:13

가인의 불평(창세기 4:13-15)

여기서는 가인에 대한 소송 사건이 계속된다.

Ⅰ. 가인은 자기에게 내려진 선고가 힘들고 엄하다고 불평한다. 혹자는 13절의 "내 죄의 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라는 가인의 말을 절망하는 인사로 바꾸어, "내 죄가 너무나 중하여 용서받을 수 없다" 라고 읽는다. 그러므로 가인의 말은 하나님의 자비심에 대한 비난과 모욕이다. 하나님의 자비는 오직 그것을 희망하는 자에게만 내려지는 은사이다. 용서의 하나님은 가장 무거운 죄와 죄인도 용서하신다. 그러나 그 용서에 대하여 절망하는 자에게는 용서가 박탈되고 말 뿐이다. 방금 가인은 자기의 죄를 예사로운 것으로 여겼는데, 이제 그는 또 다른 극단에 다달았다. 곧 사탄이 그의 부하들을 오만에서 절망으로 이끌어간다. 죄란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라고 우리가 생각하지 않았다면, 죄를 지나치게 나쁘게 생각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가인은 오히려 분개하는 언사로 말하는 것 같다. "내 죄벌이 너무나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라고 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정의를 바난하고 모욕하는 언사요 불평하다. 자기 죄가 중하다는 것이 아니라 벌이 극심하다고 하는 말이다. 마치 자기의 공로에 비례하여 어울리지 않는다는 듯한 말투이다. 하나님의 선고를 옳다고 인정하기는커녕 자기 죄에 대한 형벌을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오히려 하나님의 선고에 도전했다. 그러므로 간악하고 교만한 마음은 하나님의 책망으로도 바로 잡을 수가 없다는 것을 깊이 명심하자. 그것은 그들 스스로가 하나님의 책망은 자기들에게 부당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연고이다. 자신의 죄보다는 그 당하는 고충에 더욱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마음이 심히 굳어져 있다는 증거이다. 바로왕이 염려했던 것도 역시 죽음이었지, 그의 조가 아니었다(출 10:17). 가인 역시 그러했던 것이다. 그는 살아있는 사람이면서도 죄의 벌을 원망하고 역시 그러했던 것이다. 그는 살아있는 사람이면서도 죄의 벌을 원망하고 있는 것이다(애 3:39). 사실상 그는 은혜로운 대우를 받고 있는데도, 자기 자신은 엄중한 취급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지옥문에 들어가지 않는 것만도 놀라웁게 생각해야 마땅할 때에, 잘못되었다고 울부짖는다. 이처럼 자기를 지으신 이에게 항의를 하며, 심판자이신 하나님을 판단하려 드는 자에게 화 있으리라! 이제 이와 같은 불평을 정당화하려고 가인은 자기가 받은 선고를 자세히 설명한다.

1. 그는 자기 자신이 그 선고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총에서 제외된 것을 깨닫는다. 또한 저주를 받아 하나님의 낯을 뵈옵지 못하게 된다고 판단하게 된다. 이것이 참으로 하나님의 저주의 진정한 본성이다. 저주받은 죄인들은 이것을 알게 된다. 그러한 자들에게 향하여 "저주받은 자여! 내게서 떠나라" 고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보호에서 영원히 쫓겨나고, 그의 모든 은혜의 소망으로부터 영영 추방당하는 자는 참으로 저주받은 자이다.

2. 그는 자기가 이 세상에서의 즐거움으로부터 축출당한 것을 알게 되고 유리 방황하는 자가 된다는 결론을 얻는다. 실제로 그는 "오늘날 지면(地面)에서 추방당하는" 것이다. 이 땅 위에 자리가 없다고 하는 것은 정착할 곳이 없다는 것과 다름이 없다. 전혀 쉼을 얻지 못하는 것보다는 무덤 속에서 안식을 취하는 것이 나으리라.

3. 그는 이 선고로 말미암아 자기가 파문 당했음을 깨닫는다. 교회에서 축출당하고 모든 공적 예식의 참석을 금지 당했음을 알게 된다. 그의 손은 피로 가득 차 있으며, "더 이상 헛된 제물을 가져올" 수 없게 되었다(사 1:13, 15). 아마도 그가 "지면에서 쫓겨났다" 고 한 것은 이것을 뜻하였을 것이다. 아직 그 어느 누구도 버림받은 적이 없는 그 교회로부터 제명 당하였기 때문이며, "하나님의 낯으로부터 감추어졌기 때문" 이다.

4. 그는 그같은 선고로 인하여 자기가 모든 인류의 증오와 악의의 대상이 된 것을 깨닫는다. 즉 "무릇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이겠나이다" 라고 한 것이다. 어느 곳을 방황하든지 간에 그의 생명은 위험에 빠지게 된다. 적어도 그 자신만은 그렇게 생각하였다. 빚진 사람처럼 자기가 만나는 자마다 집달리로 생각되는 처지이다. 자기 친족들 밖에는 살아 있는 자가 없었다. 그러나 이전에 자기 동생에 대하여 그처럼 잔인했던 그라도 친척들까지 두려워하는 것은 당연한 처사였다. 혹자는 이 구절을, "나를 만나는 무엇이든지 나를 죽이겠나이다" 라고 읽어, "사람들 중에서 누구든지" 라는 것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 중에서 무엇이든지" 라고 해석한다. 하나님의 보호로부터 쫓겨난 것을 알게 되자, 그는 모든 피조물이 그를 대적하여 무장한 것을 깨닫는다. 용서받지 못한 죄는 사람을 끊임없는 공포로 가득 채운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다(잠 28:1; 욥 15:20, 21; 시 53:5). 두려워하여 죄를 범하지 않는 편이, 죄를 짓고 두려워하는 것보다 낫다. 라이트푸트(Lightfoot) 박사는 이 같은 가인의 말을 소원으로 간주해야 한다고 한다. 즉 "그러므로 이제 나를 죽이게 하소서" 하는 소원이다. 영의 번뇌도 고통하는 자와 같이(계 9:5, 6), 그는 영원히 괴로워서 "죽기를 바라도 죽음이 오지 아니하는" 것이다(욥 3:20-22).

Ⅱ. 다음에는 하나님께서는 선고를 확정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은 심판하실 때에(모든 이의를) 이기시기 때문이다(15절). 다음 사실을 살펴보기로 하자.

1.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7배나 받으리라" 고 하였다. 가인은 이 선언으로 진노 속에서 보호받게 된다. 생각건대 이 선고는 당시에 얼마 안 되는 세상 모든 사람에게 통고되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가인에게 내린 선고(유리 방황하는 자가 되리라)는 무효가 되겠기 때문이다. 사형 선고를 받은 죄수는 법의 특별한 보호를 받고 있는 것이다. 즉 정의의 제물로 정해진 자는 사적인 원한의 제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 가인의 소송사건에서 하나님은 "원수갚는 일은 내 것이니, 내가 갚으리라" 고 하셨던 것이며, 인간이 하나님의 손에서 칼을 빼앗는 것은 뻔뻔스러운 권리 침해요, 하나님의 명백한 선언을 모독하는 일이다. 따라서 그 벌은 일곱 배나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악한 인간의 생명까지도 보호하고 연장시키는 데에는 그의 현명하고도 거룩한 목적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다. 하나님께서 어떤 자들에게는 "저희를 죽이지 마옵소서, 나의 백성이 잊을까 하나이다. 주의 능력으로 저들을 흩으소서" (시 59:11) 하는 기도를 따라 다루신다. 가인이 당장에 죽임을 당하였더라면, 그는 잊어버린 바 되었을 것이다(전 8:10). 그러나 이제 그는 그대로 쇠사슬에 묶이어, 말하자면 보다 더 두렵고 영원불변하는 하나님의 정의의 기념비로서의 생을 살아가는 것이다.

2. 진노 속에서 가인은 어떤 표를 받았는가를 엿볼 수가 있다. "가인에게 표를 주사" 라고 하였다. 이는 다른 모든 인간과 그를 구별하여, 자기 동생을 죽인 자라는 것을 알리기 위함이었으며, 누구든 그를 해칠 수는 없으나 조소하게끔 하기 위함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낙인을 찍으시고(어떤 악인들을 그 뺨에 낙인 찍혔던 것같이), 그처럼 뚜렷하고도 씻을 수 없는 오명과 치욕의 표를 그에게 씌워서, 모든 지혜로운 자들이 그를 내쫓아, 그는 유리 방황하는 자와 만물 중의 폐물이 될 수밖에 없게 하시었던 것이다.

 

4:14 없음.

 

4:15 없음.

 

4:16

가인의 가계(창세기 4:16-18)

여기서도 가인에 관한 기사가 계속된다.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거부당한 뒤에 어떻게 되었는가를 살필 수 있다.

Ⅰ. 가인은 하나님의 낯을 피하게 되리라는 선고를 순순히 순종하였다. "그는 여호와의 앞을 떠나갔다" 고 했기 때문이다(16절). 즉 그는 기꺼이 하나님과 신앙을 저버리고 신앙의 특권을 기쁨으로 포기했다. 그리하여 신앙의 계율을 지키지 않으려고 했을 것이다. 그는 아담의 가족과 제단을 저버리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체하던 모든 허식을 몽땅 내던져버린고 다시는 선한 사람들 앞에 나타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예식에 참례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속이고 얕보는 위선적인 신앙 고백자들은 제멋대로 내버려 두어, 심히 치욕적인 일을 하게 하고, 그들이 그 권능을 비난하고 부인해 오던 경건은 모양조차 벗게 하는 것이 당연한 처사이다. 그 곳에 다시 돌아왔다는 기사는 전혀 찾을 수 없다. 지옥은 "주의 얼굴을 떠난 멸망" 이다(살후 1:9). 그것은 모든 선의 원천으로부터의 추방이다. 이것이 바로 죄인들이 택하는 곳이다. 따라서 그들의 운명은 그렇게 되리니 영원한 혼돈에 빠지고 말 것이다.

Ⅱ. 그는 자기를 유리하는 방랑자로 만든 선고에 대결하려고 애썼던 것이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그는 자기 땅을 택하였다. 그는 "에덴의 동쪽에 거하게" 되었다. 그 곳은 아담과 그의 신앙적인 가족들이 살고 있던 곳과는 먼 곳이며, 그와 그이 저주받은 자손들을 거룩한 자손들과 구별시키는 곳이며, 그의 진(陣)은 "성도들의 진과 사랑받는 성" 과 구별되는 곳이다(계 20:9). 에덴 동산의 동편에는 그룹들과 빙빙도는 화염검이 있었다(3:24). 그는 여호와의 횡포에 도전이나 하려는 듯이, 그곳을 자기의 땅으로 택했다. 그러나 그같이 정착하고자 한 그의 계획이 헛된 것이었다. 그 땅은 그에게 "놋땅" (즉 요동 또는 들림의 땅)이었기 때문이다. 그 자신의 영이 끊임없이 불안정하고 불안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떠나는 자는 그 어느 곳에서나 안식을 찾을 수는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여호와의 앞을 떠나 간 후에도 가인은 결코 쉼을 찾지 못했다. 이와 같이 스스로를 하늘로부터 차단하는 자들은 스스로 영원한 요동속에 빠지는 일이 된다. "오 내 영혼아, 그러므로 너의 안식처 곧 하나님 안에 있는 너의 안식처로 돌아올지니라. 그렇지 않으면 너는 영원히 쉬지 못하리로다."

2. 그는 거처를 위하여 도성을 쌓았다(17절). "그는 성을 쌓고 있었다" 라고 읽는다. 그래서 그는 도성을 영원히 쌓고는 있으나, 그와 그가 하는 일에는 저주가 내려졌기 때문에, 완성될 수는 없었다는 것이다. 또는 우리가 읽는 대로, 그는 하나님의 교회로부터의 확고부동한 이탈의 표징으로 "성을 쌓았다" 이로써 그는 결코 다시 돌아갈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 도성은 배신의 총본산이 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서 다음 사실을 고찰하자.

(1) 하나님의 선고에 대한 가인의 반항적인 태도. 하나님께서는 그가 유리하는 방랑자가 되어야 한다고 하셨다. 가인 자신이 회개하고 겸손하였더라면, "야곱에게서 나누이고 이스라엘에게서 흩어져야" 했던 레위 족속의 저주와 같이, 이 저주는 축복으로 변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과 반대되는 길을 걷고 하늘을 무시하고 스스로 정착하려고 결심하는 완악하고도 교만한 마음으로 말미암아, 축복이 될 수도 있었던 것이 저주로 변하고 만 것이다.

(2) 가인이 하나님을 저버린 후에 택하였던 것이 무엇인가 살펴보자. 가인은 이 세상에 정착지를 택하여 영원한 안식처로 삼았다. 하늘의 도성을 바라보는 자들은 이 세상에 있는 동안 장막 안에 거하기를 택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가인은 하늘의 도성 따위에는 마음을 두지 않던 자이므로 이 땅 위에 자기 스스로 도성을 세웠던 것이다.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들은 이 아래 세상에서 그들의 정착지와 만족을 구하고자 하기 쉬운 것이다(시 17:14).

(3) 자기를 끊임없이 괴롭히는 공포를 막기 위하여 가인은 어떠한 방법을 취하였는가를 살펴보자. 그는 도성을 세우는 일에 착수하여 자기 자신의 비참한 생각을 다른 데로 돌리고자 했으며 죄에 물든 양심의 부르짖음을 도끼와 함마 소리로 들르지 않게 하려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많은 사람들은 이 세상의 일에 황급히 뛰어들어서 자신들의 회개를 방해한다.

(4) 악한 사람들이 때때로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들의 기선을 제압하고, 외면상의 부귀영화로 그들보다 뛰어나는가를 살펴보자. 아담과 그의 축복 받은 가족들이 장막에서 거할 때에, 가인과 그의 저주받은 세대들은 도성에서 살았던 것이다. 우리는 우리 앞에 놓여 있는 모든 것으로써 사랑과 미움을 판단할 수가 없는 것이다(전 9:1, 2).

3. 그의 가정도 이룩되었다. 여기에는 그의 후손, 적어도 7대에나 이르는 그의 일가의 상속자들에 관한 기사가 있다. 그의 아들의 이름은 에녹이었는데, 이는 "하나님과 동행했던 지극히 경건한 에녹(5:22)과는 동명이인(同名異人)이었다. 선한 사람이나 악한 자가 같은 이름을 가질 수가 있기는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가룟 유다와 가룟인이 아닌 유다를 분별하실 수가 있다(요 14:22). 그의 후손들의 이름은 꽤 많이 언급되어 있지만 그저 이름만 기록될 뿐이다. 한 세대(世代)에 대하여 3절씩이나 기록되어 있는(5장) 거룩한 자손의 이름 같지 아니하며, 여기서는 한 구절에 서너 대를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의 이름은 하나님의 택함 받은 백성들의 이름과 비교해 볼 때, 무가치하고 기뻐할 것이 못되므로 숫자만 간단히 나열한 데 불과한 것이다.

 

4:17 없음.

 

4:18 없음.

 

4:19

라멕의 가계(1)(창세기 4:19-22)

우리들은 여기에서 아담의 7대손 라멕에 관한 몇 가지 특이한 사실을 볼 수가 있다. 다음 사실을 살펴보기로 하자.

Ⅰ. 그는 두 아내와 결혼했다. 이것은 오직 두 사람이 한 몸을 이루어야 한다는 결혼에 대한 원래의 법을 최초로 범한 가인의 타락한 자손의 하나였다. 지금까지는 한 남자가 한 번에 한 아내만을 취하였던 것인데, 라멕은 두 아내를 취했다. "태초로부터 이것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말 2:15; 마 19:5).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것을 알 수 있다.

1. 하나님의 교회와 그 계율을 떠나는 자들은 스스로 온갖 유혹에 빠지게 된다.

2. 나쁜 습성이 악한 자들에게서 시작되면, 때로는 선량한 자들도 방심으로 악한 자들을 따르게 된다. 후에 야곱이나 다윗, 그리고 그 외의 많은 사람들도, 그런 일이 없었더라면 선한 사람들이었을 것이나, 라멕이 먼저 빠졌던 이 죄의 함정에 빠지고 말았다.

Ⅱ.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자녀들을 통하여 그는 행복했다. 비록 그가 두 아내와 결혼함으로써 죄를 저지르기는 하였지만, 두 아내의 자녀들로 더불어 축복을 받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이 당대에 유명해진 것은 그들의 경건함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잘 알 수는 없으나 이들은 그 당시에 애교도였을 것이다) 그들이 스스로 고안해 낸 재간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저들은 사업가들이었을 뿐만 아니라, 세상에 유익한 자들이기도 하였다. 뛰어난 발명의 자질이 있었든지, 적어도 어떠한 유익한 기술을 그들이 개량해 냈을 거이다.

1. 야발은 이름난 목자였다. 그는 자기가 가축을 치는 것을 매우 기뻐했으며, 최선의 유익을 얻을 수 있도록 양치는 방안을 고안해 내기를 좋아했다. 그런 것을 남들에게 자기가 가르치기를 좋아하였다. 그리하여 그 당대와 그 후대의 목자들은 그를 "조상" 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아니면 아마 그의 자손들은 그를 따라 같은 직업을 가지게 되어, 목자들의 일가가 되었을 것이다.

2. 유발은 유명한 음악가였다. 특히 통소를 연주하는 자였고 고상한 학예나 음악회에 대한 규례(規例)를 최초로 고안한 자였다. 야발이 그들을 부유하게 되는 길로 이끌었다면, 유발은 즐거움의 길로 이끈 것이다. 부귀 가운데서 나날을 보내는 자들은 소고(小鼓)와 수금(竪琴) 없이는 안 되는 것이다(욥 21:12, 13). 아마도 희년(禧年)의 나팔(Jubilee-trumpet)이란 말이 그의 이름 유발에서 유래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가장 아름다운 음악은 자유와 속죄를 선포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야발은 그들의 판 신(Pan) 곧 양의 뿔과 다리를 가지고 있으며 음악을 좋아하는 목신(牧神)이었다면, 유발은 그들의 아폴로신(Apollo: 태양신, 음악, 시가, 예언 등을 주관하는 신)이었던 것이다.

3. 두발가인은 이름난 대장장이었다. 전재에나 농사일 어느 쪽에나 쓸 수 있는 동(銅)과 철(鐵)로 일하는 기술을 크게 개량하였던 것이다. 그는 그들의 발칸 신(Vulcan: 불과 대장간의 신)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다음 사실을 알 수 있다.

(1) 세속적인 것들은 육욕적이고도 악한 사람들이 마음을 쏟고 창안해 내며 부지런히 경영하는 유일한 것들이다. 저주받은 가인의 신앙 없는 자손들이 그러했다. 여기에 양치는 자의 조상이 있고 음악가의 조상이 있었기는 하지만, 충성스러운 믿음의 조상은 없었던 것이다. 동과 철에 대해서 가르칠 사람은 있었으나 여호와의 선한 지식을 가르칠 자는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또한 부귀해지고 강대하여지며, 유쾌해지는 책략은 있어도 하나님에 관한 것과 또한 그를 두려워하고 섬기는 지혜는 그들에게는 전혀 없었던 것이다. 현세적인 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의 머리에 가득 차 있다.

(2) 하나님의 지식과 은혜가 없는 자들까지도 탁월하고 유익한 재능을 부여받을 수가 있다. 이로써 그들은 유명해지기도 하고 그들의 세대에서 유익하게 봉사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일반 은사들은 악인들에게도 주어진다. 반면에 하나님은 세상의 어리석은 것들을 자신에게도 선택하신다.

 

4:20 없음.

 

4:21 없음.

 

4:22 없음.

 

4:23

라멕의 가계(2)(창세기 4:23-24)

아마도 그 당시에 라멕에 관해 많은 말이 오르내리고 있었던 것 같다. 라멕의 이 같은 말을 볼 때, 라멕은 가인의 저주받은 자손들이 일반적으로 그러했듯이, 악한 자였던 것 같다. 다음 사실을 관찰하여 보자.

1.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고 하였다. 대단한 존경과 순종을 바라는 자처럼, 얼마나 건방지게 자기 아내들에게 말하고 있는가를 볼 수 있다. 두 아내를 취함으로써 결혼의 한 율법을 어긴자가 자기가 취한 아내에게 친절하고 상냥스럽게 대해 주고 연약한 그릇과 같은 여자를 존중해 주어야 했던 또 하나의 결혼 율법을 파기했다는 것은 놀랄 것이 못된다. 남들의 존경을 독차지하려 하고 그들의 본분을 알고 의무를 다하라고 촉구하기에 나쁜 자들이 자신들의 의무를 언제나 주의 깊게 이행하는 것은 아니다.

2. 자기 주위에 있던 모든 자들에게 그 얼마나 피비린내 나리만큼 잔인하고 지독하였던가를 볼 수 있다. 즉 "내가 죽었도다." 또는(난외에 기록되어 있듯이) "나의 부상 때문에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처 때문에 청년을 죽이곤 하였도다" 라고 했다. 그는 자기 자신이 지독하게 잔인한 성격의 소유자임을 자백한다. 그는 무자비한 자이어서 자기의 길을 막는 자는 모두 죽여 버리는 것이다. 그러한 싸움에서 자기 자신이 상처를 입는다든가 피해를 입을 위험도 있었지만 어린이든 청년이든 그에게는 닥치는 대로였다. 그가 자기 자신을 가인과 비교하고 있기 때문에(24절). 혹자는 이것을 그가 하나님의 참된 경배자인 거룩한 자손들 중 몇을 죽인 것이며, 그러므로 그것이 자기 양심에 상처요 자기 영혼에 피해가 되는 것임을 자인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도 가인처럼 계속해서 뉘우침이나 회개하는 빛이 없었고, 겁이나 떨면서도 겸손치를 못했던 것이다. "두려워 말라" 고 그가 말한다. "나에게 싸움을 걸어오는 자는 용서치 않는다. 누구든지 싸움을 걸어오면 나 혼자서 잘 처리할 테니 상관 말라. 그가 어른이든 청년이든 내가 그를 죽여버리라." "부끄러움으로 영광을 삼는 것" (빌 3:19)은 성 잘내고 잔인한 자들의 공통된 특징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강렬한 분개로 많은 생명이 희생됨을 개의치 않으며, 자기들은 두려워함으로써 어떤 큰 증오를 받더라도 염려치 않는다는 사실이 마치 자기들의 안전이요 명예인 듯이 생각하는 것이다.

3. 그 자신의 악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보호하심에 얼마나 무례하게 참견했는가를 살피게 된다(24절). "가인은 7배로 원수 갚아지리라" 는 말을 그가 들었다(15절). 즉 비록 가인이 그의 동생을 살해하여 천번 죽어도 마땅하다 하겠으나 어느 누구라도 감히 가인을 죽인다면 그는 엄중히 다루어져서 7배의 벌을 받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라멕은 누구라도 자기가 살인을 범했다 하여 자기를 죽이는 자는 하나님께서 더 큰 벌로 원수갚아 주리라고 추단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특별한 배려를 하시어서, 가인의 생명을 연장하시고 안보 하시려고 했다면 그의 경우에는 특유하고 특별한 이유(사실상 정죄함 받은 자로서 보다 더 쓰라린 형벌이 계속되게 하기 위하여)가 있었다. 그러나 라멕은 그것을 모든 살인자들에 대한 보호책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라멕은 심술궂게도, "만일 하나님이 가인의 안전을 마련하셨다면, 나에게는 보다 더할 것이다. 내가 비록 많은 사람을 죽였다 하더라도 내 친동생을 죽인 것도 아니요, 그가 행한 것처럼 하나님을 노엽게 하지도 않았노라" 고 주장하는 것이다. 어떤 죄인들에 대한 일시적인 집행유예와 이들을 향한 하나님의 인내하심은, 흔히 이렇게 악한 방법으로 이용당하여, 다른 사람의 마음을 굳게 만들고 만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전 8:11). 그러나 어떤 자에게는 비록 정의가 늦게 임하지만, 또 어떤 사람은 신속한 멸망과 함께 데려감을 당한다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한다. 또한 만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관용을 이같이 악용하는 자들에게 오래 참으신다면, 그러한 자들은 그들 자신이 "심판의 날에 대한 진노" 를 자신들 위에 쌓아올릴 뿐이다. 가인의 후예가 대홍수 속에서 멸절된 기록이 나오기 전까지는, 이것이 저주받은 가인의 가계와 그 후손에 관한 성서의 기록의 전부이다.

 

4:24 없음.

 

4:25

셋의 출생(창세기 4:25-26)

본 장의 이야기 중에서 처음으로 언급된다. 아벨의 피살과 가인의 뉘우침 없는 태도와 배신은 아담과 하와에게는 대단히 큰 슬픔이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슬픔은 그들 자신들의 사악함이 자기들의 잘못을 지적해 주었고 그들 자신의 타락이 자기들은 꾸짖는다는 것이었다. 그들의 어리석었던 행동이 죄와 죽음이 이 세상에 들어오는 길을 트게 했으며, 그 때문에 "하루에 그 두 아들을 빼앗김으로써" (27:45) 괴로워했던 것이다. 부모들이 그 자녀들의 악함으로 인해서 괴로울 때에는, 자녀들이 본성의 타락은 그 부모들로부터 유래되었으며, 본성의 부패가 모든 괴로움의 근본이라는 것을 뉘우치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그러나 여기 괴로움 속에 있는 우리의 첫 부모들에게 위안이 있음을 볼 수가 있다.

Ⅰ. 그 슬픈 사건으로 가정이 흔들리고 약해지기는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가계를 재건해 주셨음을 볼 수 있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그들은 자기들의 씨를 보았다. "아벨 대신에 다른 씨" 를 주신 것이다(25절). 하나님께서는 섭리로 그의 백성을 다루심에 있어서 그들에게 친절과 사랑을 베푸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이 그의 백성에게서 한 가지 위로를 거두어 가실 때에는, 그 대신에 다른 위안을 주신다. 이 위안은 그들의 목숨이 달려 있다고 생각하고 있던 그것보다 더 큰 축복이 될 것이다. 이 다른 씨를 통하여 교회가 이루어져 영속케 되었으니, 그는 아벨을 대신하여 오는 자이다. 신도들의 계승은 순교자들의 부활인 동시에 죽음을 당한 하나님의 증인들의 부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는" 것이다(고전 15:29). 즉 우리가 세례로써 교회로 들어가는 허락을 받는 것이니, 이것은 죽음으로써 특히 순교로 말미암아 교회에서 떠나간 자들을 위하거나 대신하는 세례이다. 그리하여 우리들은 그들의 자리를 채우는 것이다. 하나님의 종들을 살해하는 자들은 이와 같은 수단으로 지고자(至高者)의 성도들이 지치기를 바라겠지만 그들은 스스로 기만당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지금도 그의 씨를 보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돌로도 그 자녀들을 만들 수 있으며, 순교자들의 피를 교회의 씨로 삼으실 수 있으니, 분명히 그들의 땅은 상속자가 없어서 상실되는 일이 없을 것이다. 그들은 예언적인 영감을 받아 그 아들을 셋(이는 놓여진, 안정된, 또는 정해진이라는 뜻이다)이라고 불렸다. 왜냐하면 그 씨를 통하여 인류는 시간의 끝까지 계속되고, 그를 통하여 메시야가 오시겠기 때문이다. 배신자의 우두머리인 가인이 유리하는 방랑인이 된 반면에 참된 교회를 이룩하게 된 셋은 안정된 자이었다.

2. 그들은 자기들의 씨의 후손을 보았다(26절). "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다." 에노스란 이름은 모든 인간에게 일반적인 이름으로써 인간의 연약하고도 유혹에 빠지기 쉬운 비참한 상태를 나타내는 것이다. 가장 선량한 사람들이라도 그들 자신에게 서나 자녀들에게서 이같은 인간 상태를 능히 파악할 수 있다. 우리는 결코 셋이라는 뜻처럼 그렇게 안정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약한 존재임을 명심해야 한다.

Ⅱ. 하나님께서는 그 집안에 신앙이 부흥되게 하셨음을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즉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26절). 만일 선한 사람이 이스라엘의 평화를 보지 못하고, 동시에 그에게서 난 자들이 진리 가운데 걷는 것을 보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 자녀들의 자식들을 보게 되는 것은 그에게 조그마한 위로가 될 수 있다. 전에도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음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1. 그러나 이제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은 스스로 이전보다 믿음을 더하기 위해 분발하기 시작했다. 아마 최초의 신앙보다 더 깊은 신앙은 아니었겠으나, 가인의 변절이 있은 그 후기의 신앙보다는 더 깊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이제야 하나님을 예배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기들의 사실(私室)이나 가정에서 뿐만 아니라, 공적이며 정식 집회를 통해 예배를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또한 이제 신앙상의 큰 개혁이 일어났다. 말하자면 그것은 새로운 출발이었던 것이다. "그때" 란 에노스의 출생 때가 아니라 전술한 이야기 전체에 해당하는 때를 말할 것이다. "그때" 곧 사람들이 가인과 라멕에게서 자연적 양심의 역사로 인한 죄의 슬픈 결과를 보게 된 때이다. 또한 죄와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본 때이다. 사람들은 믿음에 있어서 보다 더 활발해지고 단호해졌던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보다 더 악해지면 질수록 우리들은 보다 더 선하여야 하며 더욱 열성을 내어야 하겠다.

2.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은 그들 자신을 구별하기 시작하였다. 성서의 난외(欄外)에는, "그 때에 비로소 사람들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불려지게 되었다" 또는 그들 스스로가 그런 이름으로 불렀다고 되어 있다. 가인과 믿음을 떠나 버린 자들은 도성을 세우고 불경건과 불신앙을 공표하기 시작했고, 그들 자신을 "사람의 아들들" 이라고 부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때에 하나님을 향하여 나가는 자들이 하나님과 하나님 예배를 선언하기 시작했으며, 자기들은 "하나님의 아들들" 이라고 부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하여 신앙 고백자들과 세속적인 자들 사이의 구별이 시작되었으며, 이러한 구별은 지금껏 계속되고 왔고, 앞으로도 이 세상이 존속하는 한 계속될 것이다.

 

4:26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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