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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안식일의 설정과 성별(창세기 2:1-3)

우리는 여기서 다음 기사를 볼 수 있다.

Ⅰ. 하나님께서 창조 역사를 마치시매 자연계도 정돈한다(1,2절).

1. 하늘과 땅에 지음 받은 피조물의 수는 "천군만마" 와 같다. 하지만 그 수는 비록 많아도 잘 정돈되었으며, 규율이 서 있고 하나님의 주관 아래 놓여 있다. 그 수는 굉장히 많다. 하지만 모든 것들은 각각 자기들의 위치를 알고 지키고 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을 보호하며, 그의 원수들을 진멸하시기 위해 이것들을 그의 군사로 이용하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만군의 여호와이시며, 이들 모든 군사들의 주님이시기 때문이다(단 4:35).

2. 하늘과 땅은 완성된 작품들이 되었으며, 그 안에 있는 모든 피조물들도 역시 완성된 작품이 되었다. 하나님의 활동은 이처럼 완전하시게 때문에 거기에 더할 것도 덜할 것도 없다(전 3:14). 짓기 시작하신 하나님은 훌륭하게 완성하실 수도 있으신 분이심을 친히 보여 주셨다.

3. 처음 엿새가 지나간 후 하나님께서는 모든 창조의 활동을 마치시었다. 그 때 하나님은 그의 활동을 끝내셨지만 그의 섭리 가운데서 모든 피조들을 보호하시고 다스리시며, 더욱이 인간 속에 그의 영혼을 형성시켜 주시는 일은 지금까지도 계속해서 하신다(요 5:17). 그러나 새로운 종류의 창조는 전혀 하시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또 기적을 통해서 자연 현상을 조정하시고 극복하시지만 그러나 이미 정해진 과정은 결코 변경하시거나 그 기본 원칙을 조금도 가감하시지 않으신다.

4. 영원하신 하나님은 그 자신만으로도 무한히 행복하셨지마는 그의 손으로 만드신 솜씨를 볼 때에 만족을 느끼셨다. 하나님은 피곤하여 쉬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자기 자신의 선이 실증된 것과 또 그 자신의 영광이 드러난 것을 크게 기뻐하시는 분으로서 쉬셨다.

Ⅱ. 하나님은 안식일을 성별 하심으로 은혜의 세계를 시작하셨다(3절). 하나님은 그 날에 안식하셨으며 그의 피조물들에 대해 만족하셨다. 그리고 그 날을 성별 하셨다. 또 하나님은 우리도 그 날에는 쉬도록 명령하셨으며, 창조주께 대해 찬양하는 날로 정해 주셨다. 그리고 그가 쉬심으로 제 4 계명에서 우리가 엿새 동안 열심히 일하고 이레되는 날에는 쉬어야 하는 그 근거를 마련하여 주셨다.

1. 이레 중 한 날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거룩히 쉬고, 거룩하게 일하는 날로 엄숙하게 지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신령하신 안식을 보여 주신 모든 인간의 필요 불가결한 의무이다.

2.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은 옛적 길 곧 선한 길이다(렘 6:16). 안식일은 세계 창조와 함께 시작된 아주 오래된 것이다. 죄가 없었던 시대에 설정된 안식일이 족장 시대에도 하나님의 백성들이 경건하게 지켰을 것이라는 것에 대해 나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3. 여호와의 안식일은 참으로 귀한 날이다. 그리고 그 날을 귀하게 여겨야 할 까닭도 있다. 그것은 그 위대한 시작, 그 근원 때문이다. 그 첫 번째 안식일은 하나님 자신과 하나님께 순종하는 무죄 시대의 우리의 첫 조상에 의해 성별 되었기 때문이다.

4. 안식일은 복된 날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복 주신 날이며, 하나님께서 복 주신 날은 참으로 복된 날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그날을 영광되게 하셨으며, 우리로 하여금 그 날에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명하셨으며, 그 날에 우리를 만나시며 우리에게 축복을 내리시겠다고 약속하셨다.

5. 안식일은 거룩한 날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 날을 성별 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 날을 주간 동안의 다른 날들과 구분하셨으며, 그리고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날로서 그 날을 따로 성별 하셨다. 비록 일반적으로 우리가 지키고 있는 기독교의 안식일은 창조의 과정에서 볼 때 한 주간의 일곱째 날이 아니고 그 첫째 날이지마는, 아들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속하는 역사를 마치시고 안식한 점으로 보아서는 일곱째 날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날은 원래 설정한 안식일로 지킬 수 있으며, 또 지켜야 하고 위대하신 창조주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창조의 활동을 이 날에 기념하여야 한다. 하나님은 이 날에 모든 신앙적인 모임에서 드리는 송축과 영광과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시다.

 

2:2 없음.

 

2:3 없음.

 

2:4

인간의 창조(창세기 2:4-7)

여기에는 아직 한 번도 우리가 듣지 못했던 하나님의 이름이 나온다. 그 이름은 여호와(Jehouah)이시다. 영어 성경에서는 한결같이 LORD라고 대문자로만 표시하고 있다.

제 1 장에서는 줄곧 엘로힘(Elohim), 즉 "능력의 하나님" 으로 일컬어졌는데 여기서는 "여호와 엘로힘", 즉 "능력과 완전의 하나님", 완성하시는 하나님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여호와라고 알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바를 실행하시려고 나타나셨을 때이다(출 6:3). 그러므로 이제 하나님께서 자기의 시작하신 바를 완성하셨을 때에도 그러한 이름으로 일컫게 된 것이다. 여호와란 이름의 뜻은 스스로 존재하는 자이심을 나타내며, 모든 것들의 존재를 허락하시는 자이심의 나타내는 뜻인데, 하나님의 호칭중 가장 위대하고도 남에게 결코 양보할 수 없는 이름이다. 그러므로 하늘과 땅의 창조가 끝난 이 마당에서 하나님의 그러한 이름으로 호칭된다는 것은 마땅하다.

Ⅰ. 초목과 채소의 형성에 관한 보다 자세한 관심이 표명되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인간의 음식을 위해 만들어졌으며 또 그렇게 지정되었기 때문이다(5,6절)

1. 땅은 스스로의 타고난 능력으로 열매를 맺을 수 없었다. 순전히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열매를 맺었는데, 하나님의 능력은 이 땅에 그것들이 형성되기 이전에 모든 초목과 채소를 형성시켜 주셨다. 그러므로 토양이 받은 은혜, 다시 말해서 이름 있는 초목은 자연의 토양 속에서 스스로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활동 속에서 성장한다.

2. 비도 역시 하나님의 은사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비를 내리실 때까지는" 비가 오지 않았다. 만일 비가 모자라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내리시지 않기 때문이며, 만일 비가 시절에 알맞게 풍족하게 내린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내리시기 때문이다. 만일 또 비가 차별을 두고 내린다고 해도 그것은 하나님께서 "어떤 성읍에는 내리고 어떤 성읍에는 내리지 않게 하시기" (암 4:7) 때문이다.

3. 하나님께서는 흔히 어떤 방편을 이용해서 활동하시지마는 하나님은 결코 그린 방편에 얽매이지는 않으신다. 원하시기만 하면 하나님은 그러한 방편을 이용하시지 않으시고도 당신 스스로의 일을 하실 수 있다. 해가 지음 받기 전에 초목들이 지음 받았음을 보아 비가 오거나 사람이 땅을 갈기 전에도 초목이 지음 받을 수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방편을 무시하여 하나님을 시험해서도 안 되며, 방편이 부족하여도 하나님을 신임하여야 하다.

4. 하나님은 어떤 방도로든지 그가 만드신 초목들에게 물을 대주실 수 있으셨다. 그 때까지 아직 비가 없었지마는 하나님은 소나기와 같은 안개를 만드셨다. 그리고 안개를 통해서 "온 지면을 적셨다." 이처럼 하나님은 가장 연약한 방편으로 그의 목적을 달성하셨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매우 뛰어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안개나 소리 없이 내리는 이슬과 같이 내리면서 조용히 교회를 적셔 주신다(신 32:2).

Ⅱ. 인간의 창조에 관한 보다 더 자세한 기사가 있다(7절). 인간은 하늘과 땅, 영혼과 육체가 합하여 구성된 하나의 소우주이다. 여기에는 이 두 가지의 기원과 이 두 가지가 합쳐지게 된 것에 관한 기사가 있다. 이것을 자세히 검토하고 우리의 창조주께 우리를 지으심이 신묘막측하시다(시 139:14)고 찬양을 올리자. 족장 시대의 엘리후가 이 역사를 증거하여 말하되, "나도 흙으로 지으심을 입었은 즉(욥 33:6) 전능자의 기운이 나를 살리시나니(욥 33:4), 사람의 속에는 심령(a spirit)이 있나이다" (욥 32:8)고 말했다.

1. 인간의 육체는 그 근원이 비천하지만 그 구조는 오묘하다.

(1) 그 소재는 비천한 것이었다. 인간은 "땅의 티끌로" 지음을 받았다. 인간을 만들기에 도무지 합당한 재료와 같이 보이지 않지마는, 무(無)에서 세계를 창조하신 바로 그 무한한 능력이 인간을 최고의 걸작품으로 만드셨다. 인간은 티끌, 땅 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작은 티끌로 지음을 받았다. 아마 마른 티끌이 아니라, 지면에서 올라온 안개로 축여진 젖은 티끌이었을 것이다(6절). 인간은 금가루, 진주 가루, 또 다이아몬드 티끌이 아니라 땅의 먼지와 같은 흔한 티끌로 지음을 받았다. 따라서 인간은 흙에 속한 자, coi,koj- "티끌" 이라고 일컬어진다(고전 15:47). 그리고 우리는 흙에 속한 자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흙에서 나왔고 흙과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땅과 우리의 육신의 부모 사이에는 너무나 유사성이 많기 때문에 우리가 태어난 우리 어머니의 태를 우리는 "땅" 이라고 부르며(시 139:15), 또 우리가 묻혀야 할 땅을 우리는 우리의 "모태" 라고 한다(욥 1:21). 우리의 기초는 땅에 있다(욥 4:19). 우리의 조직도 흙과 같은 것이며, 그것을 지을 때도 질그릇을 만들 때와 같이 하셨다(욥 10:9). 우리의 식물도 땅에서 나왔다(욥 28:5). 우리와 친분이 있는 것들도 흙과 함께 있다(욥 17:14). 우리의 조상들은 흙 속에 묻혔고, 우리도 결국 흙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니 우리의 자랑이 어디 있는가?

(2) 그러나 우리를 지으신 이는 위대하시고 그 작품도 훌륭하다. 모든 존재와 능력의 위대한 근원이신 여호와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셨다. 다른 피조물들에 대해서는 그들이 "창조 받고 만들어졌다" 하고 하였다. 그런데 인간에 대해서는 그가 "지음을 받았다" (formed)라고 하였다. 이것은 그 활동이 정확하고 정밀한 계획에 따라서 점진적인 과정을 거쳐 완성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새로운 거의 창조를 묘사하기 위해 새로운 용어를 사용하셨는데, (어떤 사람은 생각하기를) 토기장이가 질그릇을 녹로 위에서 빚는 데서부터 차용한 것으로 보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진흙이요, 하나님은 토기장 이시기 때문이다(사 64:8). 사람의 몸은 기이하게 지으심을 받았다(시 139:15, 16). Materiam superabat opus - 솜씨가 감보다 훨씬 훌륭하다. 우리는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 산 제물(롬 12:1)로 드리고 성령의 전(고전 6:19)으로 드리자. 그리하면 이 낮은 몸이 잠시 후 그리스도의 영광의 몸과 같은 새로운 형체를 입게 될 것이다(빌 3:21).

2. 인간의 영혼은 매우 고상한 기원을 가지고 있으며, 그 유용성도 놀라운 것이다.

(1) 인간의 영혼은 하늘의 생기로부터 기원되었으며, 창조되었다. 그것은 육체와 같이 흙으로 지으심을 받지 않았다. 그러므로 인간의 영혼이 땅에만 집착한다든가 세상일만 생각하는 것은 매우 불쌍한 일이다. 인간의 영혼은 직접 하나님께서로부터 왔으며, 하나님께서 그 영혼을 그 육체 속에 넣어 주셨다(전 12:7). 그것은 후에 하나님께서 손수 쓰신 돌판을 법궤 안에 넣게 하신 것과 또 손수 만드신 우림을 흉패 안에 넣게 하신 것과 같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단지 지으신 분이실 뿐 아니라, 영들의 아버지이시기도 하다.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불어넣어 주신 영혼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따라 숨을 내쉬게 하며, 그것이 하나님을 위한 것이 되게 하자.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께로부터 왔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우리가 우리의 영들을 받았으니 그것들을 하나님의 손에 위탁하자.

(2) 인간의 영혼은 진흙 집에 거하며, 진흙덩이의 생명과 유지자가 되고 있다. 그로 말미암아 인간은 살아 있는 영혼이 되었으며, 살아 움직이는 인간이 되었다. 왜냐하면 영혼이 육체 속에 생기를 넣어주지 않는 한 인간의 육체는 무가치하고, 아무 소용이 없으며, 보기 흉한 송장에 불과하다. 이러한 영혼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께 우리는 잠시 후에 우리가 그 영혼을 어떻게 사용했으며, 어느 정도 그 중요성을 인정했으며, 어느 정도의 위치에 올려놓았던가를 보고하여야 한다. 그때 만일 우리가 비록 온 세상을 얻고도 영혼을 잃어버렸다면 우리는 영원히 멸망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영혼의 근원이 그처럼 고상하고, 그 본질과 재능이 그처럼 훌륭한 것인 만큼 우리는 썩어질 육체를 영혼보다 더 중요시하면서 그 영혼을 멸시하는 미련하고 어리석은 자처럼 살아서는 안 된다(잠 15:32). 우리 주님 예수께서 맹인의 눈에 진흙을 발라주셨을 때, 아마 그분은 자기가 태초에 진흙으로 인간을 지으신 분이심을 시사하는 것이었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을 때" 아마 그분은 자기가 태초에 인간의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신 분이심을 시사하신 것인지도 모르겠다. 영혼을 지으신 분만이 다시금 영혼을 새로이 지으실 수 있으시다.

 

2:5 없음.

 

2:6 없음.

 

2:7 없음.

 

2:8

에덴 동산(창세기 2:8-15)

육체와 영혼으로 되어 있는 인간, 즉 흙으로부터는 육체, 하늘의 생기로부터는 이성적인 불멸의 영혼으로 지음 받은 인간의 영육간의 행복을 위해서 마련하여 주신 것을 이 구절에서 볼 수 있다. 인간이 그들의 축복된 상태를 알고 그것을 간직할 수만 있었더라면, 인간을 지으신 분이 그 인간을 계속 행복하게 하실 수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감정의 세계와 관련된 인간의 육체를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낙원에서 살게 하였고, 신령한 세계와 관련된 영혼을 위해서는 하나님과 계약을 맺게 하여 주셨다. 주님이시여! 벌레와 같은 인간이 무엇이기에 그처럼 존귀하게 하여 주셨나이까!

Ⅰ. 위대한 영주의 저택과 영지, 이 황태자의 궁정으로 쓰기 위해 마련해 주신 에덴 동산의 묘사를 볼 수 있다. 영감을 받을 필자는 이 역사를 기록할 때 우선 유대인을 위하여, 그리고 다음으로 미숙한 유아기에 있는 교회를 위하여 그들도 잘 이해 할 수 있도록 모든 사실들을 외적으로만 기록하였고, 그 속에 감추어져 있는 비밀은 후에 하나님의 빛으로 인해서 발견될 수 있도록 하였다. 영적인 사실은 영적 아직 그들이 감당할 수 없는 단단한 음식이었기 때문에 필자는 육신에 속한 자에게 하듯 기록하여 주었다(고전 3:1). 그리하여 그는 아담의 내적인 행복보다는 외적인 상태의 행복에 대해 주로 기록하였다. 모세의 역사서들은 모세의 율법과 마찬가지로 하늘에 있는 것들 그 자체라기보다는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을 간직하고 있다(히 9:23).

1. 아담의 주거로 정해진 곳은 동산이었다. 상아궁이나 금으로 장식된 궁전이 아니고 동산이며, 인공으로 꾸며진 곳이 아니라 자연 그대로 꾸며지고 단장된 동산이었다. 인간이 아무 것도 필요 없는 무죄의 상태에 사는 것이 행복이었던 시대에 으리으리하고 장대한 건물이 무슨 자랑이었을까! 죄로 말미암아 인간이 옷을 입게 된 것과 마찬가지로 집도 죄의 산물이다. 하늘은 아담이 사는 집의 지붕이었다. 하지만 어느 지붕이 그처럼 기묘하게 꾸며지고 단장될 수 있겠는가! 땅은 그의 마루였는데 그 어떤 마루도 그처럼 훌륭하게 아로새길 수가 없을 것이다. 나무 그늘은 그의 안식처였다. 그 그늘 아래는 식당도 있었고, 거실도 있었는데 세상의 어느 방도 그처럼 아담하게 꾸며질 수가 없을 것이다.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그처럼 단장할 수가 없을 것이다. 우리 자신이 가식이 없는 것에 보다 더 잘 적응하면 할수록 우리는 인간의 자랑과 향락을 충족시키기 위해 꾸며낸 인공적인 쾌락에 보다 덜 빠지게 되며, 무죄의 상태에 보다 더 가까워진다. 자연은 작은 것으로 또한 극히 자연적인 것으로도 만족하며 은혜는 더욱 하찮은 것으로도 만족하지만, 욕심은 아무 것을 가지고도 만족하지 못한다.

2. 이 동산의 장치와 장식은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 직접적으로 활동하며 만든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 동산에 나무들을 심어 주셨는데, 이 땅위에 맺는 나무들을 창조하시던 셋째 날에 심어 주신 것들이다. 모든 것에 넉넉하신 하나님 자신이 그 동산을 사랑하는 피조물 인간의 현재적 행복이 되도록 정하셨고, 또한 영광 중에 선택받을 남은 자들의 장래의 행복을 위한 모형과 상징이 되도록 설계하셨으니, 이 동산이야말로 기쁨과 즐거움을 위한 가장 완벽한 곳이라 할 수 있겠다. 하나님 자신이 정해 주시지 않으면 영혼을 위해 알맞은 곳이 될 수 없고 만족을 주는 곳이 될 수도 없다. 하나님께서 마련하여 주시지 않으면 참 낙원이라고 할 수 없다. 우리 자신이 피운 불의 빛과 우리가 피운 횃불의 불꽃이 잠시 후 우리를 어두움 속에 남겨 놓을 것이다(사 50:11). 타락과 홍수 이후의 세계와 비교해 볼 때 그 당시 세계는 온 땅이 낙원이었다. 이 현재의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동산도, 인간 때문에 저주받기 이전의 이 세상의 온 지면에 비하면 황야의 같은 곳이다. 그러나 이렇게 말해도 충분하다고 할 수 없다. 하나님은 아담을 위하여 동산을 마련하여 주셨다.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자들은 그들에게 베푸시는 특별한 은총을 누릴 것이다.

3. 이 동산의 환경은 매우 아름다웠다. 그것은 에덴에 있었는데 "기쁨" 과 "즐거움" 을 의미하는 말이다. 그 장소에 대해서는 매우 충분하리 만큼 여기에 표시와 경계를 가리켜 주셨다. 내 생각에 모세가 이를 기록했을 때는 그 고장 지리를 잘 아는 사람들에게는 그 곳의 위치를 명확히 하여 주려는 것이었다고 본다. 그러나 오늘날 호기심에 끌려서 이를 알아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충분한 정보를 제공해 주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늘의 낙원만을 우리의 거처로 확신하여 여기에 관심을 기울일 것이지, 지상 낙원의 위치를 알아내려는 일에 얽매어 살아서는 안 된다. 그 동산이 어느 곳에 있었든지 간에 확실한 것은 그 곳에는 의식주의 불편이 조금도 없는 안온한 곳이었다는 점이다(이 땅의 어떤 집도 동산도 결코 그릴 수는 없다). 환경의 아름다움과 온 땅의 기쁨과 영광이 이 동산에 있었다. 하여간 그 동산은 가장 완전한 동산이었다는 것이 확실하다.

4. 이 동산에는 다음과 같은 나무들이 심어져 있었다.

(1) 이 동산에는 다른 땅에 없는 가장 좋은, 선택받은 나무들이 다 있었다. 그 나무들은 높이와 향기, 모양과 색깔, 그 잎과 꽃 등이 아름답게 단장되었기 때문에 보기에 즐겁고 매혹이 넘쳤다. 매가 주렁주렁 매어 달려 있었다. 자비로운 아버지이신 하나님은 아담의 복지 뿐 아니라, 그의 즐거움까지도 생각하여 주셨다. 왜냐하면 죄가 없는 곳에 즐거움이 있는 법이며, 더욱이 죄가 없는 곳에 참되고도 초월적인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의 종들의 융성함을 기뻐하시며 그들을 평안케 하여 주신다. 만일 그들이 평안치 못한다면 그 책임은 전적으로 그들 자신들에게 있다. 하나님의 섭리가 우리를 풍요와 즐거움이 넘치는 에덴동산으로 데려다 주시면,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풍성한 선 가운데서 "즐겁고 기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

(2) 그러나 여기에는 다른 땅에 없는 매우 독특한 나무가 두개 있었다.

[1] "동산 한 가운데는 생명 나무가 있었다." 그것은 아담으로 하여금 그의 생명의 근원과 창조자를 기억하게 하려는 것이거나 또는 그의 생명을 유지시키며 연장시킬 수 있는 자연적인 방법으로 주신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아담에게 그가 무죄한 가운데서 계속 순종만 하면 창조주가 베푸시는 은혜로 말미암아 장수와 행복, 더 나가서는 불멸과 영원한 축복까지 받는다고 약속하는 징표와 확증으로 쓰고자 하신 것이었다. 그는 이 열매를 먹고 참되게 살아야 했던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제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생명의 나무" 이시며(계 2:7; 22:2). "생명의 떡" (요 6:48; 53)이시다.

[2] 거기에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가 있었다. 이는 유용한 지식을 가지게 하거나 더해 주는 어떤 효력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일컬어진 것이 아니다(그렇다면 이는 분명히 금단의 것이 되지 않았겠다). 그러나, 첫째로 이 나무를 통해서 도덕적인 선악을 알 수 있도록 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이 적극적으로 제시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게 일컬어졌다. 선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이 나무의 열매를 맺지 않는 것이다. 악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이 나무의 열매를 먹는 것이다. 다른 모든 도덕적인 선과 악의 분별은 원래 인간의 마음속에 새겨져 있다. 그러나 적극적인 법의 결과로 생기는 선악의 분별은 이 나무 위에 새겨져 있었다. 둘째로, 마침내는 그것을 잃어버림으로 얻게 된 선에 대한 경험적인 지식과, 그것을 느낌으로 얻게 된 악에 대한 경험적인 지식을 아담에게 준 것이 밝혀졌기 때문에 그렇게 일컬어졌다. 은혜 시대의 계약 속에는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라" 는 약속과 함께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막 16:16)하는 경고가 포함되어 있는 것과 같이, 무죄 시대의 계약에도 생명나무를 통해서 인치시고 확증하신 "이것을 행하면 살리라" 고 하신 약속만이 아니라 "범하면 죽으리라" 는 경고가 다른 또 하나의 나무를 통해서 아담에게 동시에 주어졌다. "손을 대면 멸망하리라." 그리하여 하나님은 이 두 나무를 통해서 아담에게 "선과 악, 축복과 저주" (신 30:19)를 함께 설정해 놓으셨다. 성례전이 두 가지가 있는 것과 나무도 두 가지가 있었다.

5. 이 동산에는 다음과 같은 강들이 흘렀다(10-14절). 여기에 나오는 4줄기의 강들(또는 4 줄기로 갈라진 하나의 강)은 이 동산을 상쾌하게 하고, 열매를 풍성하게 하여 주었다. 소돔 땅은 "온 땅에 물이 넉넉하여 여호와의 동산 같았다" (13:10)고 하였다. 하나님은 당신이 심은 나무들에게 물을 넉넉히 대어주신다. 의로운 나무들을 강가에 심어졌다(시 1:3). 하늘의 낙원에는 이것들보다 훨씬 좋은 강이 흐르고 있다. 이것은 생명의 강인데 에덴에서 발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흘러나와서(계 22:1) 우리 하나님의 성을 기쁘게 하는 강이다(시 46:4). 헛데겔과 유브라데는 바베론에 있는 강들로서 어디서나 그 이름을 볼 수 있다. 이 강가에 앉아 포로로 잡혀간 유대인들이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다" (시 137:1). 그러나 내 생각을 그들을(우리도 그렇겠지만) 에덴을 기억하며 울었어야 했을 것 같다. 아담의 낙원이 그들에게 감옥이었다. 그런 처참한 결과는 죄로 말미암아 생겼다. 하윌라의 땅에 관하여는(12절) "그 땅의 금은 정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다고" 하였다. 이는 확실히 하윌라 땅이 자랑하는 부귀가 에덴 땅의 영광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것임을 나타내기 위한 표현이다. 하윌라에는 금과 향품, 그리고 보석 등이 있었다. 그러나 에덴에는 그것들보다 훨씬 더 좋은 나무와 및 하나님과의 사귐이 있었다. 따라서 우리는 아프리카인이나 인도인들에 대해서 "그들은 금을 가졌으나, 우리는 복음을 가졌다. 그들의 땅이 가지고 있는 금도 좋지만, 우리가 가진 부유는 훨씬 좋은 것이다" 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Ⅱ. 이 희락의 동산에 인간을 살게 하셨다(15절).

1. 하나님께서 그로 하여금 그 동산을 소유하게 하셨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셨다" 고 8절, 15절에 기록되었다.

(1) 인간은 낙원 밖에서 지음 받았다. 하나님께 그를 지으신 다음에 그를 동산 안에 두셨다. 그는 낙원의 흙이 아니라 보통의 진흙으로 지음 받았다. 그는 에덴 안에서 살게 되기 전에는 그 밖에서 살았다. 그러므로 낙원에서의 그의 평안함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유로우신 은총에 기인하는 것임을 그는 알아야만 했다. 그는 낙원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어떤 전제를 가지고 태어난 것도 아니며, 그에게 있다는 것은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주장이란 영원히 제거된 것이었다.

(2) 그를 존재케 하신 바로 그 하나님이 그에게 복락을 주셨으며, 그를 산 영혼으로 지어주신 바로 그 손이 그를 위해 생명나무를 지어 주셨고, 그를 그 곁에서 살게 하셨다. 우리를 지으신 그 분만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신다. 우리의 육신을 지으시고 우리의 영적인 아버지가 되시는 그 분, 오직 그 분만이 영육간의 복락을 우리에게 내려 주실 수 있다.

(3) 우리가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여 주신 것을 분명히 보았다면 우리는 어떠한 형편에서든지 많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를 거역하지 않고 순종하여 우리에게 주신 그의 뜻을 깨달았다면 다른 방법으로는 기대할 수도 없었던 낙원을 찾을 수 있는 소망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시 47:4 참조).

2. 하나님께서 그로 하여금 동산에서 일하며 지키도록 하셨다. 하나님은 큰 물고기를 물에서 놀게 하시듯이 그를 동산에 두신 것이 아니라, 그 동산을 가꾸고 지키게 하기 위하여 그 동산에 두셨다. 낙원 그 자체는 노동이 면제된 곳이 아니다.

(1) 우리는 게으름을 피우기 위해 이 세상에 보냄을 받은 것이 아니다. 영혼과 육체를 만들어 주신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가지고 일을 하라고 해서 그것들을 만들어 주셨다. 그리고 또 우리가 살 수 있도록 이 땅을 주신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그 위에서 할 일거리를 주셨다. 만일 지체 높은 가문이라든가 또는 많은 재산, 대단한 권력, 철저한 무식 또는 순수한 명상에 천재적인 소질이 있거나, 적은 식구 때문이라는 이유 등이 어떤 사람으로 하여금 안일함을 줄 수 있다는 것이라면 하나님은 애당초 일을 시키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를 존재케 하신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우리의 인류를 위해 섬기며, 우리의 구원을 이룩할 수 있도록 하는 일거리를 우리에게 주셨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일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우리는 존재할 가치도, 생명을 보존할 가치도 없는 존재가 되어 버린다.

(2) 이 세상의 직업은 무죄 상태와 그리고 하나님과의 교제의 생활에 아주 알 맞는다. 하늘 나라의 자녀들은 이 세상에 있는 동안 이 세상을 위하여 할 일이 있다. 그들은 그 일을 위해 그들의 시간을 쓰며 마음을 써야 한다. 만일 그들이 하나님을 생각하는 가운데 이 세상의 일을 한다면, 그들이 무릎을 끓고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같이 참으로 그를 섬기는 것과 같다.

(3) 농사는 오래되고 또 영광스러운 천직이다. 농사는 낙원에서조차 필요하였다. 에덴 동산에서는(가시와 엉컹퀴가 아직 방해물이 아니었기 때문에) 비록 잡초를 제거할 필요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가꾸고 지키는 일은 필요했다. 자연은 비록 원시 상태하에서도 기술과 산업의 발전 여지를 남겨 놓았다. 농사는 무죄 시대에 알맞은 직업이었다. 그것은 생명을 위하여 마련된 것이며, 육욕을 위한 것이 아니었으며, 인간으로 하여금 창조주를 찬양하고 그 섭리에 감사하는 기회를 주기 위한 것이다. 그의 손이 나무들 주변에서 맴도는 동안 그의 마음은 그의 하나님과 함께 있을 것이다.

(4)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 시키시는 일 가운데는 진정한 즐거움이 있다. 아담의 일은 낙원의 즐거움을 손상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즐거움을 더해 주는 것이었다. 그가 만일 태만하였다면 그는 결코 행복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지금까지도 여전히 하나의 계명이다. 그래서 성경은 말하기를, "일하기 싫은 자는 먹지도 말라" 고 하고 있다(살후 3:10; 잠 27:23).

Ⅲ. 하나님께서 무죄 상태에 있는 인간에게 계명을 주셨고, 그 때 그와 계약을 맺으셨다. 지금까지는 인간의 전능하신 창조자, 그리고 그의 풍성하신 은인으로서의 하나님만을 우리가 보아 왔다. 그런데 이제부터의 하나님은 통치자와 입법자로서 나타나신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에덴 동산에 두실 때 제멋대로 살도록 두신 것이 아니라, 통치하에 있게 하셨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게으름을 피워서는 안 되는 것처럼, 우리는 또 우리 멋대로 우리 마음대로 하여서도 안 된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으로 하여금 모든 피조물들을 다스리게 하셨을 때, 하나님은 인간 자신이 아직 창조주 하나님의 통치하에 있다는 것을 알게 하셨던 것이다.

 

2:9 없음.

 

2:10 없음.

 

2:11 없음.

 

2:12 없음.

 

2:13 없음.

 

2:14 없음.

 

2:15 없음.

 

2:16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창세기 2:16-17)

Ⅰ. 하나님은 이성(理性)과 자유 의지를 가진 피조물로서 인간을 지으시고 그에게 대해 권위를 행사하신다. 하나님은 이제 한 사람의 공인(公人), 인류의 조상, 인류의 대표자로서 서 있는 인간에 대해 그가 조금 전에 자연을 선물로 받은 것처럼 그 자신과 그의 모든 후손들을 위해 이번에는 율법을 받아들이도록 명하셨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들에게 능력에 따라서 명령하셨다. 자연에 대해 각각 정해준 그들의 과정이 곧 하나의 법이다(시 148:6; 104:9). 짐승들은 그 나름대로의 본능을 가지고 있으나 인간은 합리적인 봉사를 할 수 있도록 지음을 받았기에 창조주의 명령뿐만 아니라 영주와 주인의 명령도 받아들였다. 비록 아담이 매우 위대하고, 선하며, 그리고 매우 행복한 인간이라 할지라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에게 명령을 내리셨다. 그리고 그 명령이 아담의 위대함을 얕보거나, 그의 선함을 손상시키거나, 그의 모든 행복을 감소시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다스릴 권리를 가지고 계시며, 우리는 그의 다스림을 받아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알자.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에 거역하거나 반대되는 우리 자신의 뜻을 내세우지 말자.

Ⅱ. 하나님의 권유를 유지하기 위해, 인간이 해야 할 일과 그의 창조주와 맺어야 할 관계를 위하여 다음과 같은 특정한 행동을 명령하셨다.

1. 하나님은 인간에게 주신 현재의 행복을 확증하기 위하여, "동산에 있는 각종 나무의 실과는 임의로 먹으라" 고 허락하셨다. 이는 단지 그가 그 동산을 가꾸고 지키는 수고의 대가로, 그에게 낙원의 맛있는 열매를 먹을 수 있는 자유를 허락해 주신 것만이 아니라(고전 9:7, 10), 그가 순종만 하면 그에게 생명 즉 불멸의 생명을 주신다고 확약하신 것이었다. 하나님은 생명나무를 그 동산의 심장부와 같은 한가운데 두셨는데(9절), 이는 하나님께서 그 나무를 더 특별히 눈여겨보시기 위한 것이었다고 본다. 그러므로 거역하는 행동이 있자 그러한 은혜가 취소되었고, 다른 모든 과실에 대해서는 아무런 경고를 주시지 않았지만 다만 그가 그것을 따먹고 영생할는지 모른다고 하면서(3:22) 생명나무에 대해서는 경고를 내리신 것을 보아, 그것은 원래 그의 영생과 행복을 위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너희는 이 낙원이나 혹은 보다 나은 곳에서 지금처럼 하나님의 뜻을 따라 계속 거룩할 지어다. 그리고 창조주의 은총을 누리며 지금처럼 계속 행복할 지어다." 그리하여 아담은 완전한 인격과 변함없는 순종을 지속하기만 하였더라면 그 자신과 그의 후손들을 위해 낙원을 영원히 확약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2. 그의 모든 행복을 걸고 그의 순종을 시험하셨다. "그러나 생명의 나무 곁에 세워진 나무" 에 대해서 이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라고 하였으며, "그 실과를 먹는 날에는 네가 정녕 죽으리라" 고 하였다(이 두 나무는 모두 동산 한가운데 있다고 하였다). 그 말씀은 마치 이런 말씀과 같다. "아담아 이것을 알아두어라. 너는 이제 잘 처신해야 한다. 너는 이 낙원에서 시험받고 있다. 너는 조심하고 순종하면 영원히 이곳에 있게 된다. 하지만 그렇지 못하면 비록 지금은 행복하지만 그 때에는 비참한 운명에 떨어지게 된다."

(1) 불순종하면 죽으리라는 위협을 아담은 받았다. 이 언약의 앞부분에서 "임의로 먹으라" 는 것이 자유와 완전한 허용을 나타내 주었던 것에 대해,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는 하나의 확실한 위협적인 선포하고 할 수 있다.

[1] 아담은 무죄 상태에서도 위협을 받았다. 두려움이란 영혼을 조종하는 핸들이다. 그것으로 영혼을 붙잡아 매어놓는다. 아담에게 이 같은 울타리가 필요하였다면, 우리에겐 오늘날 더욱 더 필요할 것이다.

[2] 그 형벌은 죽음이라고 경고되었다. "네가 정녕 죽으리라" 는 말은 다시 말해서 이런 말이다. 즉 "너희 생명의 나무와 그것이 뜻하는 바 모든 것 그리고 네가 현재 가지고 있거나 혹은 가지게 될 것이라고 기대되는 모든 행복으로부터 멀리 떨어지게 될 것이며, 너는 정녕 죽을 것이며, 죽음이 가져다주는 온갖 불행에 처하게 될 것이다."

[3] 이것은 죄의 직접적인 결과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경고되었다.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고 한 말은 다시 말해서, 이런 말이다. "너는 죽어 멸망하는 존재가 될 것이다. 불명의 은총은 철회되고, 너는 아무런 보호를 받지 못하게 될 것이다. 너는 법적으로 사형 선고를 받은 죄수 모양으로 죽음을 면키 어렵게 될 것이다" (아담은 단지 모든 인류의 시조가 되게 하기 위해서 그 형벌을 유예 받았다). "아니 그보다는 죽음의 전조와 예고가 너를 사로잡을 것이며, 그 때부터 너의 생명은 죽음을 향한 생명이 될 것이다." 죄를 범하는 영혼마다 정녕 죽으리라는 것이 확실한 원칙이다.

(2) 아담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의 과실을 먹지 말라는 실증적인 법을 가지고 시험받았다. 그런데 이러한 명령을 가지고 그의 순종을 시험하신 것은 매우 합당한 것이다.

[1] 왜냐하면 그 이유는 이것이 순전히 입법자이신 하나님의 뜻에서 온 것이기 때문이다. 아담의 성품은 본질적으로 악한 것을 미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단지 그것을 금했다는 것 때문에 악한 것이 되는 그러한 것으로 시험 받았다. 그리고 그것은 사소한 것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의 순종심을 표시하기 좋은 것이었다.

[2] 왜냐하면 그러한 억제가 타락된 인간에게 있어서의 두 가지 커다란 죄의 원천이 되는 육신과 정신의 욕망에 대해 내리신 것이기 때문이다. 이 금령은 그의 감각적인 쾌락에 대한 욕망과 그의 호기심을 견제하였던 것이며, 그리하여 그의 육신은 그의 영혼에게, 그리고 그의 영혼은 그의 하나님께 지배를 받도록 하였던 것이다. 무죄 상태에 있던 인간은 마음이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는 가운데서 그처럼 안일하고, 그처럼 행복하였다. 하나님은 그에게 대해 얼마나 좋으신 분이었던가! 그 얼마나 많은 은혜를 베푸시었던가! 주신 법이 얼마나 쉬웠던가! 그와 새로운 언약은 얼마나 애정이 깃든 것이었던가! 그런데 인간은 영광스러운 자리에 있으면서도 자신의 유익을 깨닫지 못하고 곧 "멸망할 짐승과 같이 되어버렸다."

 

2:17 없음.

 

2:18

아담의 권리 행사(창세기 2:18-20)

Ⅰ. 창조주께서 인간을 돌봐 주시되 인간의 안락을 위해 아버지처럼 보살펴 주셨다(18절). 비록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금령을 내리심으로 그로 하여금 자기 자신이 하나의 예속되어 있는 존재임을 깨닫게 하여 주셨지마는(16,17절) 그래도 여기서는 아담으로 하여금 잘 순종할 수 있도록 격려하여 주시며, 하나님이 그에게 친구가 되시며 또 그를 돕는 자이시며, 그리고 그의 만족한 삶을 염려하여 주시는 분이시기도 하다는 것을 알게 하여 주셨다.

1. 하나님은 그가 홀로 있는 것을 심히 불쌍히 여기셨다. "사람, 이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라" 고 하나님은 말씀하셨다. 비록 위에는 천사들의 세계가 있고, 아래에는 짐승들의 세계가 있었지마는, 거기에는 그 자신의 본성과 같은 본성을 지니고 있으며 또 같은 신분을 가진 존재가 없었기 때문에 그는 친숙하게 지낼 상대가 없었다. 따라서 그는 "고독"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를 지으신 분은 그와 또 그를 위해서 무엇이 좋겠는가 하는 것을 그 자신보다도 더 잘 아시고 계셨다. 그리하여 "그가 계속해서 혼자 있는 것이 좋지 못하나니" 라고 말씀 하셨다.

(1) 홀로 있으면 인간은 위로 받을 길이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사회적인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인간이란 같은 인간끼리 지식과 사랑을 교환하는 것, 다시 말해서 다름 사람에게 나를 알리고 또 내가 배우는 것, 그리고 사랑을 주고받는 것을 통해 즐거움을 누린다. 하나님께서 여기 첫 사람 아담을 두고 하신 말씀을 솔로몬은 만인을 두고 말했다.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낫고, 홀로 있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전 4:9, 10). 만일 이 온 천하에 다만 그 한 사람만이 존재한다면 그는 얼마나 우울하겠는가! 철저한 고독은 낙원을 사막으로, 궁전을 감옥으로 전락시킬 것이다. 따라서 이기적이며, 이 세상에 혼자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참으로 어리석은 자들이다.

(2) 홀로 있으면 인간은 자기의 종족을 번성 시키며 유지시키지 못한다. 하나님은 천사들로 하늘의 세계를 가득 채웠듯이 태초부터 인간들로 가득 채워진 세계를 만들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지으시기도 예정하신 수만큼의 인간이 일시에 살기에는 이 땅이 너무 협소하였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본래 사람을 지으신 것같이 남자와 여자로 된 두 사람으로부터 대를 잇게 함으로써 그 수효를 채우는 것이 합당하다고 보신 것이다. 하나는 영영 하나일 수밖에 없다.

2. 은혜로우신 하나님은 아담을 위해 사회를 마련하여 주기로 결심하셨다. 그에 대해서 이러한 생각을 가지신 결과 "내가 그를 원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는 자비로우신 결심을 하셨다. 즉 성품과 신분이 같고(like) 그 곁에(near) 언제나 함께 살면서 그 앞에서(before) 기쁨과 즐거움을 줄 수 있는 배필을 주시기로 하신 것이다.

(1)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형편 가운데 있을 때에도 서로 도움을 주고받을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서로 지체들이며,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고전 12:21). 그러므로 우리는 남에게 도움 받는 것을 기뻐하며 동시에 기회 있을 때마다 남을 도와주어야 한다.

(2) 하나님만이 우리의 요구를 완전히 아시고 그 모든 것을 넉넉히 채워 주실 수 있으신 분이시다(빌 4:19). 오직 그에게만 우리의 도움이 있으며, 우리의 도움은 모두 그로부터 온다.

(3) 어울리는 아내만 돕는 배필이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다. 따라서 배필이라는 생각이 배우자 선택을 좌우하고 항상 도와주고자 하는 정신이 깃들어 있다면(고전 7:33, 34), 그 관계란 매우 즐거운 것이 될 것이다.

(4) 가족 사회는 그 용어가 타당할는지 모르지만, 고독의 불만을 충분히 해소시켜 주는 곳이다. 그러므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좋은 하나님, 좋은 애인, 좋은 아내가 있으면서도 대화가 부족하다고 불평하는 사람이 있다면 만족을 누리지 못할 것이다. 아담은 하와가 창조되기 이전에 그 이상 아무 것도 없으면서도 "아버지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심으로 자기는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조금도 자기의 의로움을 불평하지 않았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만족할 줄 아는 사람들은 이 세상의 온갖 아름다운 것들을 받아들일 모든 준비를 갖춘 사람들이며, 그들은 무한한 진리가 선한 사람들을 돌보고 계시다는 것만큼은 확신할 수 있을 것이다.

Ⅱ. 피조물들은 인간에게 복종하고 인간은 피조물들을 지배하였다(19,20절). 하나님은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들을 아담에게 이끌어다 주셨다. 천사들의 도움이나 혹은 특별한 본능에 의해 짐승들은 그들의 주인인 인간에게 이끌려 왔으며, 황소도 그 주인을 알 수 있도록 가르침을 받았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인간에게 내려 주신 공정한 자세에 대해서는 그 점유권을 허락해 주셨으며, 다른 피조물들에 대한 지배권도 허락해 주셨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피조물들의 이름들을 짓게 하고 다음과 같은 것들을 보여 줄 수 있게 하기 위해 그들을 인간에게 이끌어 주셨다.

1. 그것은 인간이 비록 피조물이지만 이성(理性)적인 사고와 의사 표시의 재능을 부여받았으며, 따라서 "땅의 짐승들보다 더 교육받고 공중의 새들보다 더 지혜롭게 지음 받았다" 는 지식을 증거를 보여주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2. 그 두 번째는 그의 권위의 증거를 보여주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름을 지어 준다는 것은 하나의 권위 있는 행동이다(단 1:7). 그리고 이름을 지어 받는다는 것은 하나의 예속을 나타내는 행동이다. 하등 피조물들은 여기서 보는 바와 같이 저들을 왕자가 등극하는 마당에 경의를 표하고 충성을 다짐하고 신하의 도리를 다하겠다고 맹세하였다. 만일 아담이 계속해서 하나님께 충성을 다했더라면 모든 피조물들은 아담이 그들에게 지어 준 그들의 이름을 잘 알며 또 기억하고 있다가 언제라도 그들의 이름을 부르면 쫓아 나오고 그 이름에 응답하였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겠다. 하나님께서는 낮과 밤, 그리고 바다에 이름을 주시고 별들을 이름대로 부르시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주 여호와이심을 보여 주시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짐승과 새들의 이름은 그들이 작은 주인 격인 아담으로 하여금 이름을 붙여 주도록 하나님의 영광의 일부를 그에게 전가시켜 주시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Ⅲ. 그러한 피조물들만으로는 인간의 행복에 아직 만족을 줄 수가 없었다. 그런데(그 모든 피조물들 가운데는) "아직 아담을 돕는 배필이 없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말이 아담 자신의 말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모든 피조물들이 쌍쌍으로 그에게 와서 이름을 지어 받는 것을 보고 아담은 하나님께 그의 소원을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이라고 본다. "하나님이시여, 이 모든 것들은 모두 저들을 돕는 배필이 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어찌하오리까? 여기엔 내 배필이 될 만한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아담의 말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돌아보신 후에 판단하신 말씀이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많은 피조물들 가운데 아담에게 어울리는 짝이 있는가를 보시기 위해 모든 피조물들을 이끌어 오셨지만 거기서 찾으실 수가 없으셨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볼 수 있다.

1. 인간 본성의 존귀함과 우수함을 볼 수 있다. 이 땅위에는 인간과 닮은 것이 없었으며, 눈에 보이는 피조물들 가운데는 그의 동료가 될 만한 것들도 없었다. 그 모든 것들을 살펴보셨지만 그것들 가운데서는 어울리는 짝을 찾으실 수가 없으셨다.

2. 이 세상과 이 세상에 속한 것들의 허무함을 볼 수 있다. 세상 모든 것을 다 모은다 해도 인간을 위한 배필이 될 수 없다. 그들은 인간의 영적인 본성에 어울릴 수가 없으며, 그 요구를 채워 주지도 못하고, 그 정당한 욕구에 대해서는 만족감을 주지 못하며, 영원 불멸의 반려자가 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인간 아담을 위한 한 배필로서 하나의 새로운 존재를 창조하셨는데 그것은 여자의 자손으로 여자가 아니었다.

 

2:19 없음.

 

2:20 없음.

 

2:21

하와를 지으심(창세기 2:21-25)

Ⅰ. 아담의 배필로서 여자를 창조하셨다. 이 기사는 비록 일곱째 날의 안식 후에 언급되었지마는 여섯째 날 즉 아담을 낙원에 데려다 주시던 날에 있었던 일이다. 하나님은 앞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1:27)고 하셨지마는 그것은 개괄적으로 하신 말씀이시고 여기서 보다 자세히 말씀하시고 있다.

1. 아담을 먼저 지으시고 다음에 하와를 지으셨다(딤전 2:13). 그리고 여자는 남자에게서 났으며, 남자를 위하여 지음 받았다(고전 11:8, 9). 그러므로 여자는 일반적으로 겸손, 정절, 정숙, 유순 등을 그 특징으로 해야 하며 특히 아내된 자는 그 남편에게 순종하고 경의를 표하여야 한다. 하지만 제일 나중에 지음 받은 남자가 제일 걸작품이었다면, 아담을 지은 후에 아담에게서부터 나온 하와에게는 남자의 영광이라는 영예를 내려 주셨다(고전 11:7). 만일 남자가 머리라면 여자는 면류관인데, 보이는 피조물들의 면류관인 그녀의 남편의 면류관이 된다. 남자는 정제된 흙이다. 그러나 여자는 이중으로 정제된 흙이며 흙과의 거리를 더 많이 둔 존재이다.

2. 그의 아내가 지음 받은 동안 아담을 잠들고 있었다. 그것은 아담이 "여호와의 신을 지도하였다거나 그의 모사가 되었다거나" (사 40:13)할 만한 어떤 추측의 여지를 전혀 남겨놓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아담은 자기의 배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는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직접 이 배필을 마련해 주시기 때문에 그의 아무 염려 없이 드러누워서 단잠을 잘 수가 있었다. 이것은 그의 온갖 염려를 하나님께 맡기며, 그의 조물주의 뜻과 지혜에 자기의 모든 것을 기쁜 마음으로 맡긴 사람과 같은 것이었다. 여호와 이레,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때에, 원하시는 자를 우리에게 마련하여 주실 수 있도록 하여 드리자. 만일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은혜 가운데 안식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은혜 가운데서 역사하여 주시고 모든 선한 것들을 마련하여 주실 것이다.

3. 하나님은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셨다." 그리하여 옆구리를 가르는 고통을 모르게 하여 주셨다. 그가 죄를 아직 모르는 동안에는 하나님께서 그로 하여금 고통을 느끼지 않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섭리 가운데서 육신의 고통을 당하는 그의 사랑하는 백성들에게 수술 중에 잠들게 하시는 것은 다만 그들의 육신의 행복만을 고려하시는 것이 아니라, 어려운 수술 중에도 그들의 영혼이 안정할 수 있도록 하는 은혜를 위한 것이다.

4. 그 여자는 "아담의 옆구리에 있는 갈빗대로 지음을 받았다." 여자가 남자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머리뼈도 만들지 않으셨다. 또 남자에게 짓밟히지 않도록 다리뼈로 만들지도 않으셨다. 그러나 동등한 위치에 서라고 하여 옆구리 부분에서 취하여 만들었으며, 보호함을 잘 받도록 하여 주기 위해 팔 밑에서 취했으며, 많은 사랑을 받을 수 있도록 남자의 가슴과 가까운 곳에서부터 취하여 내셨다. 아담은 갈빗대 하나를 잃었다. 그러나 함이 빠진 것도 아니고 그 용모가 변한 것도 아니다(왜냐하면 틀림없이 아무 흠이 없도록 그 살이 아물어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대신 아담을 잃은 것보다 훨씬 더 풍성한 도움을 얻을 수 있는 배필을 받게 되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로부터 취하신 바를 어떤 모양으로든지 더 풍성하게 갚아 주신다(다른 많은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아담은 오실 이의 모형으로 나타나고 있다.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부터 그이 배필인 교회가 형성되어 나왔기 때문이다. 그가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을 통해 깊이 잠들었을 때 그의 옆구리가 갈라져 거기서부터 피와 물이 쏟아져 나왔다. 피는 그의 교회를 값 주고 사기 위한 것이었으며, 물은 자기를 위해 그 교회를 정결케 하기 위한 것이었다(엡 5:25, 26 참조).

Ⅱ. 여자는 아담과 결혼하였다. 결혼은 고귀한 것이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이 결혼이야말로 가장 고귀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 결혼은 시종일관 하나님께서 직접 개입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혼인은 하늘에서 정해진 것이라고(사람들은)말한다. 더욱이 이 결혼이야말로 하늘로서 온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 남자와 여자, 그 짝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손수 지으신 것이며, 하나님은 능력으로 그들을 둘로 만드셨다가 이제는 하나의 예식을 통해서 그들을 하나로 만드신 것이기 때문이다. 이 결혼을 전혀 무죄한 가운데 성립된 결혼이었다. 그 후에는 한 번도 이런 결혼이 없었다.

1. 그 여자의 아버지로서 하나님은 그 여자를 그 남자의 제 2의 자아(自我)와 그의 배필로서 그 남자에게 데려다 주셨다. 하나님은 여자를 지으셨을 때 여자 멋대로 하도록 내버려두시지 않으셨다. 그 여자는 하나님의 자녀였으며, 따라서 하나님의 동의 없이는 절대로 결혼할 수 없었다. 믿음과 기도, 그리고 하나님의 섭리를 의지하는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자신을 맡기는 자들은 안위함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로 지음을 받고, 특별한 섭리 가운데 남자에게로 이끌려온 아내들은 남자를 위한 좋은 배필임을 나타내 보여 주어야 할 것이다.

2. 그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아담은 그 여자를 선사 받았다(23절). "이는 내 뼈 중의 뼈이다. 이는 내가 바라던 바요, 아무 피조물도 나에게 줄 수 없었던 내 배필이로다."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은 우리에게 꼭 합당한 것이며, 은혜로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지혜를 깨닫고 겸손하게 감사함으로 그러한 하나님의 선물을 받아야 한다. 아담에게 제공된 이 사랑스러운 피조물은 그 자신의 일부였으며, 언약의 반려자와 또 아내로 주시기 위해 지으신 것임을, 그가 잠들고 있었을 때, 그에게 환상으로 보여주셨을 것이다. 그리하여 어떤 사람들을 장차 하늘의 낙원에 가게 될 때 영광스럽게 된 성도들은 서로 알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더욱이 아담은 그 여자를 받아들인 표로서, 그 여자에게만 해당되지 않고 여성 전반에서 해당되는 이름을 그 여자에게 붙여 주었다. 즉 "그 여자는 hF'gI 곧 여인(she-man)이라고 일컬어지리라" 라고 하였는데, 그것은 단지 성(性)에 있어서만 여자가 남자와 다른 것이며, 그 본질에서는 하등 다를 바가 없다는 것과 여자는 남자로부터 지음을 받았으며 남자와 결합되어 있는 존재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Ⅲ. 결혼 예식을 제정하고 이에 따르는 법을 정하셨다(24절). 안식일과 결혼은 무죄 시대에 정하신 두 가지의 예식이다. 안식일은 교회를 계속 보존시키기 위해 정하신 것이며, 결혼은 인류를 계속 보존시키기 위해 정하신 것이다(마태복음 19:4, 5 에 의하면). 여기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라고 말씀하신 분은 하나님 자신이신 것처럼 나타나 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저자인 모세를 통해서 말씀하신 것인지 아니면(23절에서 말을 한 바가 있는) 아담을 통해서 말씀하신 것인지 분명치가 않다. 그런데 이 말씀은 아담이 법을 그의 모든 후손들에게 내려 주면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포하는 말씀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1. 여기서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도덕법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를 보라. 그 구속력은 천성적인 그 어떤 것에 의한 것보다 훨씬 강하다. 우리를 낳고 길러 주신 우리의 부모와의 관계 이상 도 긴밀한 관계가 있을까? 하지만 아들은 그들을 떠나 아내와 연합하여야 하며, 딸은 남편과 하나가 되기 위해 그들을 잊어버려야 한다(시 45:10, 11).

2. 자녀들은 결혼할 때 부모의 동의를 반드시 받아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배우라. 그리고 그러한 동의를 받지 않고 결혼한다는 것은 얼마나 부당한 것이며 불효한 것인가를 배우라. 왜 부당한 것인가? 그것은 자녀들에 대한 부모의 권리와 관심을 짓밟아 버리는 것이며, 거짓되며 부자연스럽게 그것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넘겨주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3. 그처럼 친밀하고 그처럼 오래 계속될 이러한 대상을 선택하는데 있어서 얼마만큼 신중성과 기도가 필요할 것인가를 배우라. 평생의 한이 되지 않도록 잘 선택할 필요가 있다.

4. 결혼으로 맺어진 인연이 얼마나 굳은 것인가를 배우라. 결혼의 인연은 많은 아내를 얻음으로 갈라지게 하거나 약화시켜서는 안되며(말 2:15), 이혼으로 말미암아 서로 갈라져서도 안 된다. 이혼은 음행이나 자진해서 도망가는 경우를 제하고는 어떤 경우에도 용납되지 않는다.

5. 남편과 아내 사이에는 얼마만큼 서로 사랑하고, 서로 친밀한 관계를 가져야 하는가를 배우라. 그들은 서로 제몸 같이 사랑하여야 한다(엡 5:28). 그들은 서로 한 몸이다. 따라서 그 둘은 서로 하나의 영혼이 되도록 하여야 한다.

Ⅳ. 우리의 조상들이 처음 창조되었을 때의 순결과 무죄의 상태를 보여 주고 있다(25절). 그들은 둘 다 벌거벗고 있었다. 그들은 추위를 막고 더위를 피하기 위하여 옷을 입어 필요가 없었다. 추위도 더위도 그들을 해하지 못했다. 그들에겐 몸단장도 필요치 않았다. 솔로몬의 그의 그 지극한 영광으로도 이 둘 중 하나 만큼 도 성장하지 못했다. 아니 그들에게는 차려야 할 체면도 필요 없었으며, 부끄러워할 이유도 없었다. 그러므로 시리아 역에 의함 "그들은 수치한 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고 읽을 수 있다. 부끄러움이 지금은 미덕의 표현이지마는 당신에는 무죄의 표현이 되지 못했다. 양심상 죄가 없는 사람들은 옷을 걸치지 않아도 수치심을 얼굴에 나타내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2:22 없음.

 

2:23 없음.

 

2:24 없음.

 

2:25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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