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이 … 올라와서. 몽고메리(Montgomery)의 생각에 따르면 바벨론의 느부갓네살(B.C. 605-562)이 예루살렘을 치러 올라왔다는 기록이 잘못된 것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6절을 보면 분명히 그 당시까지만 해도 바벨론 왕은 리블라(립나)에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 절은 바벨론이 팔레스타인을 원정할 때 느부갓네살 왕이 직접 진두에서 지휘를 한 것이 아니라 단지 그 배후 조종자이며 총책임자임을 시사할 뿐 그가 실제로 예루살렘으로 올라온 것을 가리키지는 않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Hobbs). 그리고 렘 38:17에는 당시 바벨론의 군대 통솔자는 바벨론 왕의 방백들이었음을 분명히 하고 있어 이를 더욱 뒷받침 한다. 그래서 혹자는 이때에 바벨론 왕이 ‘립나’에 본부를 세운 이후 예루살렘을 공격했다고 한다(R. D. Patterson, Hermann J. Austel). 한편 느부갓네살의 군대가 예루살렘까지 올라온 경로에 대해서는 분명히 알 수 없다. 그러나 렘 34:7에 따르면 예루살렘 성과 함게 라기스와 아세가를 먼저 공략한 것으로 보아 그들이 세벨라 지역(왕하 18:13-17, 19:8)을 통과했던 것 같다. 여기서 ‘세벨라’(Shephelah)는 팔레스타인의 연안 평지와 유대 및 사마리아의 중앙 고산 사이에 놓여 있는 저지대를 가리킨다. 그런데 바벨론이 이 지역을 통과하여 산헤립과의 전쟁으로 유명한 라기스와 아세가(18:14, 17, 렘 34:7)를 먼저 함락시킨 것은 남(南) 유다의 시드기야로 하여금 애굽을 향해 구원병을 요청하는 연락을 취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렘 37:5). 그러나 렘 37:5과 겔 17:17을 근거로 해서 볼 때 예루살렘이 포위를 당하고 있을 시기에 애굽 왕이 시드기야를 도우러 왔다가 느부갓네살에 의해 퇴각한 사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바벨론이 유다를 친 것은 느부갓네살에게 충성을 맹세했던 시드기야가 배반한 때문이었다(Wycliffe, 24:20).
토성을 쌓으매.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다예크’를 RV에서는 ‘성벽’ 또는 ‘요새’를 쌓다로 번역하고 있다(Thenius, Hitzig). 그리고 70인역(LXX)에서도 이와 동일한 뜻의 단어 ‘페리타이코스’를 쓰고 있다. 또한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도 이것과 동일한 헬라어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그것은 아마 그가 로마인들이 포위하는 방법을 경험했기 때문에 그 단어를 사용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본 절에서는 여기에 나타난 히브리어 ‘다예크’의 문자적인 의미에 매달릴 것이 아니라 당시의 상황을 근거로 해서 그 의미를 결정해야 한다. 여기서 바벨론이 토성을 쌓은 것은 성벽보다 더 높은 곳에서 성안을 공격하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공성용(攻城用) 망대들을 쌓았음에 틀림없다. 즉, 여기에 나타나 있는 ‘토성’은 일렬로 된 성벽이나(겔 4:2, 21:22) 벼랑과 같은 모습의 바깥 담(겔 17:17)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파수대, 다시 말해서 ‘망대’ 혹은 ‘공성용 망대’를 말하는 것이다(Keil & Delitzsch). 한편 바벨론이나 앗수르가 적의 성을 포위할 때 사용하던 망대는 두꺼운 널판으로 만든 이동식이었다 .그 뿐만 아니라 그들이 때로는 공성퇴(攻城退)를 싣고 다니면서 공격했기 때문에 그 파괴적인 힘은 대단히 위력적이었다.
두 성벽 사이 왕의 동산 곁문 길로 도망하여. 시드기야가 수비하던 군사들과 함께 도망한 길은 다윗 성의 남쪽 끝에 있는 기드론 골짜기와 힌놈 골짜기가 서로 맞닿는 두로베온의 입구 문이었다. 이 왕의 동산 곁문은 실로암(셀라) 못 부근에 위치하고 있는데(느 3:15) 기드론 골짜기를 따라 남쪽으로 계속해서 내려가면 여리고로 가는 길과 연결된다.
아라바 길. 이 길은 삼하 4:7에도 언급되어 있는데 아로니(Aharoni)에 따르면 아라바 길은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을 가리킨다. 또한 이 길은 일명 ‘요단 계곡’이라고도 하는데 이 계곡은 갈릴리 바다로부터 남쪽으로 요단 계곡과 사해를 포함하여 멀리 아카바 만까지 이르는 대계곡을 가리킨다. 한편 이 길을 따라 북쪽으로 계속해서 가면 모압과 암몬 땅이 나온다. 그런데 이 두 나라도 본래 시드기야와 함께 바벨론에 반역을 일으키려 했으므로(렘 27:3) 시드기야가 그 길로 계속 가면 도피할 수도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여리고 평지. 이곳은 여리고의 동쪽 요단 계곡 입구 쪽에 있는 넓은 건조지로서 여리고 주위의 지방을 형성한 요단 평야의 한 부분이다(수 4:13). 그런데 많은 군사와 함께 이 넓은 지역을 갈대아인들의 눈에 띄지 않게 통과하여 도망하기란 결코 쉽지가 않았다. 그러나 모압이나 암몬 쪽으로 가기 위해서는 이곳을 통과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에 시드기야는 위험을 무릅쓰고 이곳을 통과하려고 했던 것이다. 한편 이것은 이미 에스겔 선지자에 의해서 예언된 것(겔 12:3-7)으로 시드기야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길이 없었다.
왕의 모든 군대가 그를 떠나 흩어진지라. 왕을 호위하던 모든 군사가 왕과 함께 여리고 평지를 지나가다가 갈대아 군사에게 발각되자 모두 왕을 버리고 도망하였다. 이것은 또한 에스겔의 예언의 성취이기도 하다(겔 12:14). 한편 ‘흩어진지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포추’는 ‘산산이 부수다, 사방으로 던지다, 스스로 흩어지다’란 의미의 ‘푸츠’에서 온 말이다. 이는 사발이나 유리 그릇이 깨어질 때 그 조각이 사방으로 흩어지듯이 다시 모을 수 없을 정도로 분산되는 유다 군사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나타내었다. 그런데 군사들이 사방으로 흩어진 원인에 대해 일부의 학자들은 여리고 평지가 기름진 곳으로 곡식과 열매가 풍성한 곳이기 때문에 이러한 현상이 생겼다는 것이다. 즉, 그들은 자신들이 안전하다고 생각해서 성 안의 기근을 해결하기 위해 양식을 구하려고 농가에 제각기 흩어졌다고 생각한다(G. Rawlinson). 그러나 이러한 추측은 그럴듯 하지만 당시의 상황이 전쟁 중이라는 사실을 감안해 볼 때 지나친 듯하다.
그를 심문하니라. 여기서 ‘심문하다’(히, 미쉬파트)는 단어는 전문적인 법정 용어이다(렘 52:9). 즉, 이 말은 법률적으로 선언된 ‘판결’ 중에서도 언도나 공식적인 선언을 나타낸다. 그런데 시드기야는 느부갓네살과 맺은 언약을 어기고 반역했기 때문에(겔 17:16, 18) 느부갓네살의 법적인 심판을 피할 수가 없었다(렘 52:9).
아들들을 그의 눈앞에서 죽이고. 희생물들을 ‘눈앞에서’ 죽이는 일은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는 일에서 주로 사용되던 행위이다(레 6:25). 그런데 시드기야의 아들들이 이렇게 죽음을 당한 것은 언약을 깨뜨린 자들이 맞는 최후가 죽음인 것을 시사한다. 한편 이렇게 아들까지 죽음을 당한 것은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 즉 그의 아들들이 원수의 손에 잡히리라고 한 말(렘 38:17-23)이 성취된 것이다. 그런데 혹자는 느부갓네살이 시드기야의 아들들까지 죽인 것은 그가 다루기 힘든 유다 왕가의 종식(終熄)을 위해서 였다고 한다(Wycliffe).
시드기야의 두 눈을 빼고. 이것은 시드기야가 느부갓네살을 보게 될 것이라는 경고(렘 32:4, 34:3)의 성취임과 동시에 겔 12:13에서 “그가 거기서(갈대아 땅에서) 죽으려니와 그 땅을 보지 못하리라”고 한 예언의 성취이다. 이와 같이 죄수의 눈을 빼는 것은 동양의 보편적인 관례이긴 하지만(삿 16:21) 특별히 이러한 행위를 적의 왕에게 행하는 것은 바벨론과 바사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광경이다(Keil & Delitzsch). 한편 두 눈을 빼는 행위에는 상징적인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학자가 있다. 즉, 지성과 의지의 관문인 눈을 제거하는 행위는 완벽하게 무기력한 상태로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M. Douglas).
놋 사슬로 그를 결박하여.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바네후쉐타임’은 성경에 단 한 번 밖에 쓰이지 않은 단어로서 ‘한 쌍의 구리 차꼬로 결박하여’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여기에서 ‘차꼬’는 중죄인을 가두어 둘 때 쓰던 형구이다. 그런데 앗수르와 바벨론의 차꼬는 두 개의 철사 고리가 하나의 긴 사슬로 되어 있는 것이다(Batta). 그래서 행동하기에 무척이나 거추장스럽고 고통스러웠다. 한편 시드기야에게 이처럼 행한 것은 그가 왕이라는 중요 인물이었기도 하지만 32세의 젊은 나이였기 때문에 그와 같은 엄격한 단속이 필요하였던 것 같다. 그리고 예레미야 선지자는 느부갓네살이 시드기야가 죽는 날까지 옥에 가두었다고 증언하고 있다(렘 52:11).
시위대장 느부사라단이. 여기서 ‘시위대 장’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라브 타바힘’이라는 단어가 삼상 9:23에서는 ‘요리인’(料理人)으로 번역되었다. 그리고 또 창 40:4에서는 보디발의 직책, 즉 ‘친위대장’으로 번역되어 있다. 이로 볼 때 느부사라단은 왕의 명을 받아 궁내부의 일을 도맡아 하는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는 특별히 사형 집행하는 직책을 가졌음을 본 절을 통해 알 수 있다(Keil & Delitzsch). 한편 본 절에서는 느부사라단이 예루살렘에 도착한 날이 5월 7일로 나타나 있는데 렘 52:12에는 5월 10일로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아마 필사자가 10을 뜻하는 어미인 ‘요드’를 7을 뜻하는 어미 ‘자인’으로 잘못 본 데서 기인한 것으로 추측되나 어느 것이 더 정확한 지는 분명히 알 수 없다(G. Rawlinson, Keil& Delitzsch).
예루살렘의 모든 집. 이는 ‘예루살렘 안에 있는 모든 집’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 안에 있는 ‘큰 집 모두’를 가리킨다(Keil & Delizsch). 왜냐하면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의 문자적 의미는 ‘모든 큰 집’이기 때문이다.
귀인의 집까지 불살랐으며. 여기서 ‘귀인’이란 ‘재물이 많은 부유한 사람들’을 가리키며(4:8) 12절의 ‘비천한 자’와 대조를 이룬다. 한편 역대서에서는 갈대아인들이 ‘모든 궁실’을 불살랐다고 말해 귀인들의 큰 집까지도 이에 포함시킨 듯하다.
농부가 되게 하였더라. 여기서 ‘농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레게빔’은 ‘구멍을 파다’란 뜻의 동사 ‘가바브’에서 파생된 것으로 이들이 샘이나 개천을 파는 사람들임을 암시하고 있다(3:16). 그리고 70인역(LXX) 중 바티칸 사본(Codex Vaticanus)도 동일한 뜻의 단어 ‘타바인’을 사용함으로써 이를 지지해 주고 있다. 그러나 맛소라 학자들은 난외주에서 ‘경작하다’라는 뜻의 동사 ‘야가브’에서 파생한 단어 ‘레요게빔’을 기록하여 이 단어가 본래는 ‘농부’를 뜻하는 단어임을 시사하고 있다. 그래서 이것은 당시 바벨론이 유다에 이러한 농부들을 남겨놓음으로 인해 계속해서 농사일을 할 수 있게 했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이러한 바벨론의 정책에 의한 농사는 포로 시대 이후까지도 계속되었다(Hobbs). 특히 바벨론은 정책적으로 총독 그달리야를 유다에 보내어 경작을 활성화하도록 했는데(렘 40:10, 12) 그것은 그들이 식민지 유다로부터 계속해서 조공을 거둬들이기 위함이었다.
놋 바다. 이것은 반구형의 놋 대야로서 성전의 제단과 입구 사이에 위치해 있었다. 그런데 이 놋 바다는 솔로몬이 만든 것으로 제사장의 목욕 재계(ablution)을 위한 성구(聖具)였는데 직경 4.5m, 깊이 2.28m, 원주 13.68m로 300배럴(barrel)의 액체를 담을 수 있는 거대한 크기였다. 그리고 이것은 세 마리씩 황소가 사방을 향하여 서 있는 상태 위에 얹혀져 있었다. 즉, 12마리의 황소 등 위에 떠 받쳐져 있었다(대하 4:1-6).
금으로 만든 것이나 은으로 만든 것이나 모두 가져갔으며. 24:13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느부갓네살이 가져간 금 그릇들 외에 금으로 만든 것이나 은으로 만든 것은 약간 남아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이와 같이 기구들을 옮겨가는 군인들의 모습이 앗수르의 조각들 가운데서도 분명히 나타난다. 바벨론도 앗수르와 마찬가지로 철저하게 종교 말살 정책을 수행했음이 틀림없다.
부제사장 스바냐. 렘 21:1, 29:25에 따르면 스바냐는 시드기야 왕의 사자(使者)로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보냄을 받기도 했다. 그런데 그의 직책은 혹자의 주장대로 ‘제2계급의 제사장’, 즉 대제사장 밑에서 단순한 역을 담당했던 ‘평 제사장’(Keil &Delitzsch, Bähr)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부(副)제사장이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그는 대제사장의 대리인으로서 활동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은 것으로 추측되기 때문이다(렘 27:3). 한편 예루살렘 함락 후 그는 다른 지도자들과 함게 느부사라단에 의하여 바벨론 왕에게 끌려가 립나에서 죽임을 당했다(21절).
성전 문지기 세 사람. 성전을 지키는 문지기들은 레위인으로서 모두 24명이었다(대상 26:17, 18). 그런데 붙잡힌 세 사람은 아마도 성전을 돌보는 관리들로서 문지기들을 지휘하는 사람들이었을 것이다(Keil). 그래서 혹자는 이들을 ‘성전 수비대장’이라고 일컫는다(Wycliffe).
군사를 거느린 내시 한 사람. 내시가 군사를 거느렸다는 것은 이상하다. 왜냐하면 원래 내시는 왕실의 잡무를 맡아 보았기 때문이다(왕상 22:9, 에 2:3, 14). 그러나 그들은 왕의 측근에서 왕을 경호할 뿐만 아니라(창 39:1, 에 6:2) 왕후의 시중을 들었기 때문에 (에 4:4, 5) 그것을 기회로 큰 권력을 획득한 예가 많다. 그래서 그들은 권력자나 지역의 세도가로 분류되어 바벨론에서 볼 때 제거의 대상이 된 듯하다.
왕의 시종 다섯 사람.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를 문자적으로 직역하면 ‘왕의 얼굴을 본 다섯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와 유사한 표현은 5:1에도 나오는데 거기서 나아만은 그 ‘주인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라고 했다. 그리고 이들은 에 1:14에서 보는 바와 같이 왕에게 가까이 하여 왕의 기색을 살폈던 것 같다. 한편 렘 52:25에는 이 시종의 숫자를 다섯 명이 아니라 일곱 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혹자는 이 표현이 왕실 시종들의 수효가 아니라 단지 ‘성읍에서 만난 사람들’을 지칭할 뿐이라고도 주장한다. 즉, 이들은 도망칠 수 없어 붙잡힌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Patterson, H. J. Austel). 그러나 이에 대한 성경적 근거는 없다.
백성을 징집하는 장관의 서기관 한 사람. 군사를 모집하여 군대를 편성하고 그 명부를 작성하는 일은 서기관의 직무 중 하나였다. 그런데 본 절은 이 서기관이 일시적으로 군대의 지휘관 일까지 맡아 보았음을 암시하고 있다. 한편 여기에 나타난 이 서기관은 아마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있는 동안에 군대를 조직하여 바벨론에 대항하려고 했던 것 같다.
성 중에서 만난 바 백성 육십 명이라. 이들 역시 바벨론에 대항하던 부류들 중의 일부 핵심 세력들이었을 것이다. 즉, 그들은 지방의 유지들로서(Keil & Deiltzsch) 바벨론에 대항하기 위해 반란을 주도한 지도자들이었다(Wycliffe).
이와 같이 유다가 사로잡혀 본토에서 떠났더라. 이와 같은 표현은 사실상 본 절이 본서의 마지막 절인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그런데 이러한 표현은 17:23에 서도 똑같이 나오기 때문에 반드시 이 구절이 본서의 마지막 구절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리고 또 이것은 이미 경고한 바와 같이 유다가 이스라엘과 같이 똑같은 운명에 처하게 되었음을 시사한다. 그래서 본 절에서 ‘유다’가 사로잡혀 갔다는 것은 (1) 유다를 다스릴 수 있는 모든 사람들이 잡혀갔으며, (2) 실질적으로 유다라는 나라가 사라졌음을 가리킨다. 한편 이 사건(B.C. 586)은 여호수아에 의해 약속의 땅에 가나안을 정복한 후 (B.C. 1405, 수 3:1-17) 약 820여년이 경과된 시점에 일어난 불행스러운 일이다(John Wesley, Wesley’s Notes on the Bible, p. 232). 그리고 예레미야 선지자에 의하면 느부갓네살 제7년에 3,023명, 제18년에 832명, 제23년에 745명 등 총 4,600여명이 사로 잡혀간 것으로 알려진다(렘 52:28-30). 여자와 아이들을 포함하면 약 18,000여명은 될 것으로 추측된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부녀자와 아이들은 계수하는 데에 포함시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다 땅에 머물러 있는 백성. 이때 유다에 남아있던 백성들은 어떤 특정한 기술도 없고 바벨론에게 전혀 유익하지 않다고 판명된 사람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는 상류 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이 상당수 있었는데 그들은 유다 각지에 숨어 있던 사람들로서(렘 40:11-12) 예레미야와 바룩, 그리고 몇몇 왕족 등이었다(렘 43:6).
사반의 손자 아히감의 아들 그달리야. 여기서 서기관 ‘사반’에 대해서는 22:3절과 렘 26:24을 참고하라. 그리고 ‘아히감’은 22:12과 렘 26:24에 언급되어 있다. 한편 ‘그달리야’라는 이름은 ‘여호와는 크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렘 40:10에 따르면 그달리야는 당시에 어떤 재정적인 책임을 맡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달리야는 예레미야의 충고에 따라 바벨론을 섬기는 길만이 살 길임을 굳게 믿고 있었으며 그러한 충고를 하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보호해 주었다(렘 29장). 결국 그가 바벨론의 신임을 받고 유다의 총독이 된 것도 예레미야 선지자의 그 같은 생각을 철저히 믿고 따랐기 때문인 듯하다(Keil & Delitzsch, Wycliffe).
관할하게. 이에 해당되는 히브리어는 ‘야프게드 얄레헴’이다. 이는 ‘방문하다, 감사하다, 보살피다’란 뜻의 ‘파카드’와 ‘오르다’란 의미의 ‘아라’의 합성어로 지방을 순회하며 감시하고 보살피는 것을 가리킨다.
모든 군대 지휘관. 문자적으로는 ‘부대의 장들’을 가리킨다. 즉, 이들은 예루살렘을 방어하던 수비대의 지휘관들이다(Rawlinson). 이들은 왕이 도망할 때 흩어졌던 군사들(5절)과 바벨론으로부터 탈출한 군사들, 그리고 들에 있던 군사(렘 40:7)들과 함께 그달리야에게 갔다(Keil & Delizsch).
느다니야의 아들 이스마엘. 아버지의 이름 느다니야나 이스마엘이라는 이름은 당시에 상당히 흔한 이름이었다(Gibson).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 렘 40:8에는 가레아의 두 아들 요하난과 요나단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느도바 사람 단후멧의 아들 스라야. ‘느도바 사람’이란 말은 일반적으로 당시에 그 사람의 출신지를 인명(人名) 앞에 붙이는 것으로 ‘느도바 출신 사람’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리고 느도바라는 지역은 베들레헴 근처에 있는 오늘날의 키르벳 베드 팔루(Khirbet Bedd Falu)이다(Grid). 한편 여기에 언급된 스라야는 단후멧의 아들로서 18절에 언급된 제사장 스라야와는 다르다.
마아가 사람의 아들 야아사니야. 마아가는 북쪽 아람 지역의 땅으로서 오늘날에는 아벨벳 마아가(Abelbeth-Maacah)로 알려지고 있다. 그리고 ‘야아사니야’라는 이름은 ‘여호와께서 귀를 주신다’라는 뜻으로 여호와 신앙에 근거한 이름인 듯하다. 그러나 겔 8:11에도 이 이름이 언급되긴 하지만 비성경적인 문헌에 더 많이 나타난 이름으로(Gibson) 아마도 그는 유다인 계통이 아닌 듯하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그를 호사야의 아들 ‘여사냐’로 부르고 있다(렘 42:1). 한편 혹자는 여기 언급된 군대 지휘관 넷이 유다 최후의 날에 고위직에 있던 사람들이라고 한다(R.D. Patterson, Hermann J. Austel).
모두 미스바로 가서 그달리야에게 나아가매. 당시 그달리야는 예루살렘에게 가까운 미스바에 거처를 두고 있었다. ‘미스바’는 ‘망대’(watch-tower)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오늘날의 ‘텔 엔 나스베’(Tell en Nasbeh)에 해당되는 곳이다. 그런데 이 미스바는 그 이름의 의미와 잘 맞는 장소인 듯하다. 왜냐하면 당시에 미스바는 파괴되는 것을 모두 지켜보았기 때문이다. 또한 삿 20:1과 삼상 7:16에서도 보는 바와 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난의 시기에 항상 이곳으로 피난해 왔던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미스바는 야곱이 외삼촌 라반과 경계지의 표시로 돌을 쌓아 놓았던 곳(창 31:49)으로 가나안 정착 시기에 유다 지파에 할당된 성읍들 중 하나로 미스베로도 표기되던 곳이다(수 15:1, 38).
그들과 그를 따르는 군사들에게. 이것은 전쟁이 끝난 당시에도 유다 각 지방에 떠돌아다니는 군대의 잔당들이 있었음을 가리킨다. 따라서 그달리야의 계획 속에는 이 무리들을 한데 모으고 무기를 해제하여 보다 생산적인 삶에 기여할 수 있도록 하는 목적도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그달리야가 그 군대의 잔당들에게 농업에 종사해 안착할 것을 권했음을 밝히고 있다(렘 40:10).
맹세하여.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싸바’는 ‘일곱 번 되풀이 하면서 맹세하다’란 뜻의 ‘쉐바’에서 유래한 말이다. 그래서 이 말은 철저한 이행을 전제로 한 맹약을 나타낸다.
왕족. 렘 40:14에 따르면 이스마엘이 암몬 왕 바알스의 자극을 받아 반란을 일으켰다고 한다. 그리고 아마도 그는 자신이 왕족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통치자의 지위를 요구하였을 것이다(렘 41:1, Wycliffe). 한편 유다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에 따르면 이스마엘은 매우 간교한 자로서 예루살렘이 멸망하던 당시에는 암몬 왕 바알리스에게 피하여 있다가 이제와서 왕위를 차지하려는 속셈으로 반란을 일으켰다고 한다.
열 명을 거느리고. 여기서 ‘열 명’이라고 정확한 수치를 밝히고 있는 것은 이것이 군대의 한 단위임을 암시하는 것이다. 즉, 이것은 당시 가장 작은 군대 단위이다(출 18:21-25).
유다 사람과 갈대아 사람을 죽인지라. 이로 볼 때 당시 그달리야의 행정에는 갈대아인(바벨론 사람)들이 많이 관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이스마엘의 살인사건과 그의 도망에 대해서는 예레미야서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렘 40:13-41:18). 예레미야는 그달리야의 새로운 지배권과 이스마엘 사건, 또한 그가 애굽으로 도주하게 된 것 등에 대해서 요하난의 입장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렘 40:7-43:7).
여호야긴이 사로잡혀 간 지 삼십칠 년. 여호야긴이 바벨론으로 잡혀간 것은 느부갓네살의 즉위 제8년이었다(24:12). 그리고 느부갓네살은 44년간 통치하였으므로 여호야긴 제37년은 느부갓네살이 죽은 해이다.
에윌므로닥. 느부갓네살의 아들 에윌므로닥(EvilMerodach)은 B.C. 562년에서 B.C. 560년까지 불과 2년 남짓 통치한 뒤 그의 후계자이자 매형인 네르갈사레셀(Neriglissar, B.C. 560-556)에 의해 살해되었다.
십이월 그 달 이십칠일. 예레미야서에 의하면 이십오일로 되어 있다(렘 52:31). 그런데 여호야긴을 옥에서 석방한 일은 그의 초기에 있은 특사(特赦)의 사건이었다(Keil & Delitzsch).
옥에서 내놓아 그 머리를 들게 하고. 여기서 머리는 권세와 존경을 상징하기 때문에(3:14) 머리를 들게 한다는 것은 그 직위를 복원한다는 것을 의미한다(창 40:13). 이와는 반대로 렘 2:16에서 보는 바와 같이 ‘정수리를 상하게 한다는 것’은 비천하게 만든다는 것을 뜻이다. 그런데 에윌므로닥이 무슨 연고로 여호야긴을 우대하였는지 바벨론 역대기의 기록상으로는 전혀 알 수 없다. 그러나 랍비들의 기록에 의하면 그가 옥에서 풀려난 것은 그의 금욕(禁慾)으로 인한 보상이었다고 한다(Ginzberg). 그리고 올브라이트(Albright)에 따르면 느부갓네살은 시드기야의 반란에 대한 징벌로 여호야긴을 옥에 가두었으나 새로운 통치자, 즉 에윌므로닥은 그의 선임자인 느부갓네살(B.C. 605-562)의 정책과 달랐기 때문에 그를 풀어준 것이라고 한다. 한편 여호야긴을 풀어준 것이 유다 포로들에게 호의를 얻으려고 했다는 견해는 이 사건을 에윌므로닥의 즉위 기념 특사로 이해할 때 어느 정도 수긍이 간다. 한편 본 절에 나타난 ‘들게 하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사’는 ‘세우다, 높이다’라는 의미로 존대하거나 지위를 회복시켜 주는 것을 가리킨다(창 40:20).
모든 왕의 지위보다 높이고. 당시 바벨론 감옥에는 포로로 잡혀온 다른 나라의 왕들도 함께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왕족이었기 때문에 일반 죄수들과는 다른 특별한 대우를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여기서 ‘지위’(히, 키쎄)는 중요한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기 때문이다(Hobbs). 그리고 에윌므로닥은 그 왕족들 중에서 유다 왕 여호야긴을 특별히 대우했던 것같다(Rawlinson, Hitzig, Thenius). 그리고 유다 왕에 대한 이러한 호의적인 태도는 유다 민족에게 어떤 희망적인 미래를 기대하게 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본서 기자가 열왕기 기록을 다 마친 후 추신의 형태로 여호야긴의 포로 생활을 간략하게 묘사한 것은 바로 유다의 미래에 어떤 소망이 밝아옴을 암시하기 위한 것이었다(R. D. Patterson, Hermann J. Austel, Wycliffe). 그리고 실제로 이때부터 70년 후에 포로생활에서 본국으로 돌아오리라고 했던 예레미야의 예언(렘 30:3)이 성취되기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의 일평생에. 렘 52:34은 ‘죽는 날 까지’라고 했다.
왕의 앞에서 양식을 먹게 하였고. 왕의 앞에서 먹는다는 것은 그가 왕의 손님으로 왕의 식탁에 함께 참여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근동 지방의 왕들은 정기적, 혹은 비정기적으로 큰 잔치를 베푸는 것(에 1:3-9) 외에도 특별한 손님을 자신의 식탁에 초청해서 함께 식사를 했다(Rawlinson).
종신토록 끊이지 아니하였더라. 이와 같이 다윗 왕조의 마지막 왕인 여호야긴이 포로지에서나마 평안하게 지낼 수 있었던 것은 여호와께서 언젠가는 유다 백성들을 자기 고토(故土)로 돌아오게 하실 것을 보여주는 소망의 증표와 같은 의미를 부여해 준다(Keil & Delitzsch, Wycliffe).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 있다. 비록 여호야긴이 바벨론 왕 에윌므로닥의 호의로 편히 먹고 살 수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는 왕의 신분으로 적국에 잡혀간 볼모의 신세라는 사실이다. 바벨론 왕이 진정으로 여호야긴을 생각했더라면 그를 예루살렘으로 그의 백성과 함께 돌려보냈어야 한다. 그렇게 했다면 그는 마음속에 사무치는 회한(悔恨)을 품고 고향을 향한 그리운 마음을 품지는 않았을 것이다(렘 22:24-30) 그것은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었다.
Previous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