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 주석, 열왕기하 2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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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 요시야가 왕위에 오를 때에 나이가 팔 세라. 요시야의 부친 아몬은 24세에 죽었다(21:19, 23). 그러므로 요시야가 태어난 때는 아몬이 16세였다. 한편 요시야는 유다 최후의 선왕(善王)으로서 31년간(B.C. 640-609) 통치하였다. 그는 다윗을 본받아 여호와 신앙에 전념하였는데 죄악으로 더럽혀진 나라를 정화시키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그도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않고 성급히 애굽과의 싸움에 참전하여 전사(戰死)하였으니(23:29, 30) 애석한 일이 아닐수 없다.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여디다요. ‘여디다’는 솔로몬의 다른 이름인 ‘여디디야’의 여성형 이름이며 뜻은 ‘사랑하는 자’이다(삼하 12:24, 25). 그러나 ‘여디다’에 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보스갓 아다야의 딸이더라. 수 15:39에 따르면 보스갓은 라기스와 에글론 사이에 위치해 있다. 학자들은 그 곳이 오늘날의 ‘텔 나길라’(Tell Nagila)일 것으로 보고 있으나(Hobbs) 정확하지는 않다. 한편 ‘아다야’라는 이름은 ‘장신구’라는 뜻으로서 포로 시대 이후에 자주 나오는 이름이다(스 10:29, 39, 느 11:4, 5).

 

22:2 그 조상 다윗의 모든 길로 행하고. 본 절에서는 요시야의 통치의 특성을 보여 주고 있는데, 그의 경건에 대한 평가는 여호사밧(대하 17:3) 및 히스기야에 대한 평가와 동등하다(18:3). 때문에 후대 역사가들은 여호사밧, 히스기야, 요시야 이 세 사람을 유다의 3대 성군(聖君)으로 부르기도 한다.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더라. 이는 곧 요시야가 모든 인간 삶의 유일한 정도(正道)인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생각하며 판단했다는 뜻이다(신 5:32, 28:14). 히스기야와 요시야는 이 점에 있어서도 서로 일치한다(18:6).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시야의 선한 행위가 유다에 대한 하나님의 최후 심판을 돌이키지 못했다는 사실(23:26, 27)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22:3 요시야 왕 열여덟째 해에. 열왕기 기자는 요시야의 초기 개혁에 대해서는 생략하고 있다. 즉, 대하 34:3-7에 따르면 요시야는 이미 그의 통치 12년에 한 차례 종교 개혁을 단행하여 모든 우상들을 파괴했다. 그러나 그가 유다 역사상 가장 철저하고도 대대적인 개혁을 시작한 것은 그의 나이 26세 되던 해인 바로 이 통치 18년째의 일이다. 한편 요시야 왕 제18년은 B.C. 621년경이다. 이 때는 앗술바니팔 왕의 죽음(B.C. 626년)으로 인해 앗수르 제국이 이미 다시 회복할 수 없는 쇠퇴의 길을 걷고 있던 시기였다. 그러므로 요시야는 대외적인 면에 신경을 쓰지 아니하고 대내적으로 오로지 종교 개혁에 정신을 쏟을 수 있었을 것이다.

서기관 사반. ‘사반’이라는 이름의 뜻은 ‘오소리’이다. 당시 이러한 이름(겔 8:11)은 그렇게 희귀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Hobbs). 한편 렘 26:24에 보면 사반의 아들 아히감이 예레미야 선지자를 보호하였다고 하며, 또 사반의 아들 그마랴도 여호야김 왕 시대에 귀족이었던 것으로 나타나 있다(렘 36 :12, 25). 그리고 사반의 손자 아히감은 예루살렘 멸망 이후 바벨론으로 끌려간 포로들 가운데 중요한 인물이었다(렘 40:5-41:10).그러므로 사반의 가문(家門)은 비교적 명문 집안이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당시 서기관은 여호와의 전에 바치는 세금들을 관리할 정도로 대단한 중책의 위치에 있었으니(4절, 12:10) 그 가세(家勢)를 짐작할 수 있다. 한편 평행 구절인 대하 34:8에 따르면 당시 사반 이외에도 시장 마아세야와 다른 서기관 요아하스의 아들 요아가 함께 활동하였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22:4 대제사장 힐기야. 여기에 언급되 힐기야가 누구인지에 관해서는 학자들간에 견해가 다양하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힐기야’란 이름이 여럿 나오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1) 에스라의 족보에 나오는 살룸의 아들 힐기야(스 7:1, 2)를 들 수 있는데 그는 대상 6:13에 나오는 대제사장들의 명단에도 동일하게 살룸의 아들로 나온다(Rawlinson). (2) 다음으로 베냐민 땅 아나돗(대상 6:60) 출신의 선지자 예레미야의 아버지 역시 힐기야였다(렘 1:1). (3) 그밖에도 레위 족속 암시의 아들 힐기야(대상 6:45, 46), 스룹바벨과 함께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한 제사장 힐기야(느 12:1, 7) 등을 들 수 있다. 그런데 본 절에 등장하는 힐기야는 예루살렘 성전을 직접 돌보고 있었다. 그리고 렘 24장을 보면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에 대해 강한 반감을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 본 절의 대제사장 힐기야가 예레미야 선지자의 아버지라는 견해는 받아들일 수 없다(Hobbs). 대체적으로 학자들은 본 절의 힐기야가 살룸의 아들 힐기야인 것으로 추정한다(Rawlinson).

백성이 여호와의 성전에 드린 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원하여 하나님께 바치거나 아니면 율법의 규정(출 30:13, 14, 레 27:2-8, 민 18:15, 16)에 따라 바쳤던 헌금을 가리킨다. 한편 선왕(先王) 요아스는 이러한 헌금을 모아 성전을 수리하는 데에 사용하였다(12:4-16). 본 장에서의 요시야의 행위(3-7절) 역시 앞서 요아스의 그 같은 정책을 답습한 것으로 보인다.

수납한 은을 계산하여. 여기서 ‘계산하여’ 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야템’은 ‘마치다’라는 뜻이다. 즉, 이것은 새로운 용도에 지불할 목적으로 돈을 정리한 것을 가리킨다(Keil & Delitzsch Commentary). 70인역(LXX)에는 이 단어를 ‘스프라기손’으로 번역하고 있는데 ‘인봉하다’(seal)라는 뜻이다. 탈굼역(The Targums)이나 새영어성경(New English Bible)도 동일한 뜻으로 번역하고 있는데 그것은 곧 돈을 자루에 넣어 묶는다는 뜻이다(12:10).

 

22:5 본 절에 언급된 성전 수축(修築)작업 과정은 앞서 요아스 당시의 작업 과정과 거의 다를 바 없다. 그러니 이에 관해서는 12:11, 12 주석을 참조하라.

성전에 부숴진 것을 수리하게. 12:6에 보면 요아스 왕 이십삼 년에 이르도록 제사장들이 전의 퇴락한 데를 수리하지 아니하였다는 언급이 나온다. 이는 그동안 유다 백성들 모두가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관심, 열정이 식었던 결과였다. 그러나 요아스에 이어 이제 요시야 때에 이르러 성전 수축이 재개된 이후로 얼마 동안은 매년 성전 수리 작업이 시행되었을 것이다.

 

22:6 없음.

 

22:7 회계하지 말지니. 대하 34:12에 따르면 성전 일을 맡은 감독자들은 모두 레위인으로서 전적으로 신뢰받는 인물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더구나 이들은 12:15에서와 마찬가지로 진실되게 일하였을 터이니 요시야로부터 전적으로 신뢰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는 그들이 진실하게 행함이니라. 감독자들의 이 같은 진실됨에는 분명 요시야의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고로 공의를 행하는 통치자 밑에서 정직한 신하가 배출되는 법이기 때문이다. 사실 다윗 왕이 하나님 앞에서 정직히 행하여 공의를 행할 때(삼하 8:15) 정직하고 충성된 신하가 배출되었으며(삼하 15:19-23) 백성들은 태평 성대를 누렸다(삼하 7:1). 그러므로 가정이나 교회, 국가가 평강 가운데 번영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부모, 교회 지도자, 통치자들이 각각 하나님을 경외하며 정직히 행하는 일에 솔선 수범해야 할 것이다.

 

22:8 내가 여호와의 성전에서 율법책을 발견하였노라. 힐기야가 발견한 이 율법책이 어떤 것이었는지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에 견해가 다양하다. (1) 신명기뿐이라는 견해(Ewald). 이 견해를 주장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문서 비평가들이 많은데 이것을 근거로하여 신명기 후기 저작설을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자기들의 신학적 틀을 정한 뒤 그 틀 속에서 모든 결론을 유추해 내므로 신빙성이 없다. (2) 모세의 계명과 규례집의 한 부분이라는 견해(Thenius). (3)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라는 견해(Bertheau). (4) 그러나 본 절에서 ‘율법책’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세페르 하토라’는 대개 모세 오경 전부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신 17:18, 수 1:8, 8:31, 24:26, 느 8:1 등). 따라서 일반적으로 요세푸스나 유대인들이 생각하듯이 힐기야가 발견한 율법책은 모세 오경 전부라는 견해가 가장 유력하다(Keil, De Wette). 한편 이 율법책은 신 31:26에서 보듯이 언약궤 옆에 비치해 두었던 성전용 율법서로서 제사장들에 의해 수시로 읽혀지던 것이었다(신 31:12, 26). 그런데 므낫세 당시의 극심한 배교(背敎) 현상(21:1-9)에 불안을 느낀 누군가가 이 율법서를 보존하기 위하여 성전 모퉁이에 감추어 두었던 것 같다(Matthew Henry).

 

22:9 서기관 사반이 … 보고하여 가로되. 본 절은 당시 서기관 사반에게 성전의 재정을 관리하는 것 뿐만 아니라 대제사장과 왕 사이에서 연락하는 매개자의 임무도 있었음을 보여 준다. 3절 주석 참조.

왕에게 돌아가서. 여기서 ‘돌아가서’에 해당되는 히브리어 ‘야쉐브’는 히필형(Hiphil: 사역형 능동)으로서 사반이 중대한 일이나 불가피한 요인 또는 누군가의 명령에 의해서 왕에게 보내졌음을 가리킨다.

돈을 쏟아. ‘쏟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티쿠’는 ‘쏟아붓다, 녹이다’라는 뜻의 동사 ‘나타크’에서 파생된 것으로 자주 금속을 녹이는 것과 연관된다. 그러나 여기서는 비유적인 표현으로서 아마 ‘분배하다’라는 뜻으로 쓰인 것 같다(Hobbs).

 

22:10 내게 책을 주더이다. 본 절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원문을 보면 무엇보다 ‘책’(히, 세페르)이라는 단어가 문두에 나와 강조되고 있다. 이것은 성전 수리 일보다 힐기야가 준 책의 중요성을 강조한 표현이라 하겠다.

왕의 앞에서 읽으매. 이처럼 서기관 사반이 율법책을 ‘읽었다’는 말은 이미 8절에서도 나온다. 그런데 이때 사반이 읽은 내용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우리가 알 길이 없다. 추측컨대 아마도 그는 왕에게 충격을 주는 중요한 부분 몇 군데를 읽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왕이 율법책의 말을 듣자 곧 자신의 옷을 찢으며 통회하였기 때문이다(11절). 또 23:2과 비교해 볼 때도 이때 만큼은 사반이 책 전체를 읽은 것 같지는 않다.

 

22:11 왕이 … 그의 옷을 찢으니라. 사반이 읽어 준 율법책의 내용은 아마도 이전에 읽은 어떤 책이나 교훈보다도 요시야의 마음에 더 깊은 감명을 주었을 것이다. 더구나 13절에 비추어 볼 때 사반이 읽은 내용 중에는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멀리 할 경우 하나님의 징계를 당하리라는 말씀(신 28:15-68)도 있었던 것 같다. 그러므로 요시야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였음에 분명하다. 왜냐하면 여기서 옷을 찢는 것은 하나님을 떠났던 자들이 다시 돌이켜 마음을 찢고 회개함을 나타내는 상징적 행동이기 때문이다. 19:1 주석 참조.

 

22:12 사반의 아들 아히감. ‘아히감’이란 이름의 뜻은 ‘내 형제가 일어났다’이다. 그는 여호야김 때에 예레미야 선지자를 보호해 준 사람이며(렘 26:24), 예루살렘 멸망 후 포로로 끌려간 그다랴의 부친이다(렘 39:14, 40:7). 3절 주석 참조.

미가야의 아들 악볼. ‘악볼’이란 이름의 뜻은 ‘들쥐’이다. 앞서 ‘사반’이란 이름 또한 ‘오소리’란 뜻이었는바 이처럼 이름의 뜻이 동물을 지칭하는 경우가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드물지 않았던 것 같다. 3절 주석 참조. 한편 악볼이 왕의 전권대사(全權大使)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토록 세움받았다는 사실 이외에는 그나 그의 아버지 미가야에 대하여 알려진 바가 없다. 대신 악볼의 아들 엘라단이 여호야김 왕에 의해 애굽으로 보냄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렘 26:22). 한편 병행 구절인 대하 34:20에는 악볼이 ‘미가의 아들 압돈’으로 되어 있는데 그것은 아마 잘못된 기록일 것이다(Rawlinson, Bähr).

왕의 시종 아사야. ‘아사야’라는 이름의 뜻은 ‘여호와께서 세우셨다’이다. 그는 시종, 곧 왕의 수발을 받드는 신하였다(Bähr).

 

22:13 나와 백성과 온 유다를 위하여. 요시야 왕은 율법책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먼저 자기에게 적용하였다. 11절에서 옷을 찢은 그의 행위가 이것을 잘 보여 준다. 실상 신 28:15-68과 레 26:16-19에서 보듯이 하나님의 심판은 왕으로부터 시작하여 온 백성들에게 미친다. 따라서 히스기야가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귀기울이고 무릎 꿇은 것은 일국(一國)의 최고 통치자로서 마땅한 자세가 아닐 수 없다. 한편 여기에서 ‘온 유다’는 나라와 국민, 땅을 다 포함하는 말로서 ‘백성’이라는 말과는 약간 의미상 차이가 있다.

이 발견한 책의 말씀에 대하여 여호와께 물으라. 혹자는 발견한 책이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인지 또는 진정한 권위를 지니고 있는지 물어보라는 의미인 것으로 이해한다(Dunker). 그러나 훌다의 예언 내용에 의거할 때 이러한 질문이 아니었음이 분명하다(16-20절). 대신 본 절은 책의 내용, 즉 책에 기록된 심판이 내려질 것인지 물어보라는 의미이다(Keil & Delitzsch, Rawlinson, Von Gerlach). 다시 말해 이는 레 26:16-19, 신 28:15-68에 기록된 것과 같은 저주가 우리에게 임할 것인지에 대하여 물어보라는 의미이다.

우리에게 내리신 진노가 크도다. 여기서 ‘내리신’ 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니체타’는 ‘노를 발하다’라는 뜻의 동사 ‘야차트’의 과거 완료형이다. 그러나 히브리어 문법에서 예언이나 본 절과 같은 경우에 과거 완료형이 임박한 미래의 일을 나타내는 경우가 종종 있다. 따라서 본 절은 그 이전 과거에 내린 심판에 대한 언급이 아니라 앞으로 닥칠 임박한 심판에 대한 언급임이 분명하다. 한편 요시야 왕은 출 20:5에 나오는 계명의 말씀처럼 자신의 부친이나 조상들의 죄가 자기에게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보았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히스기야의 죄에 대한 심판이 자손에게로 연기된 것(20:19)과 므낫세 때에 내린 유다 멸망의 예언(21:10-15)에 대해 인식했을 것이다. 더구나 유다 왕들의 반복된 배교 행위로 인하여 축적된 죄의 결과, 이제 멸망의 심판이 불가피하게 되었으므로 그 같은 심판에 대한 요시야의 두려움은 더욱더 심각하였을 것이다.

 

22:14 본 절에 기록된 정보 이외에 여선지 훌다에 관해 알려진 바는 없다. 그리고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여선지자들이 어떤 활동을 했다는 기록도 거의 없는 상태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고대의 여선지로는 미리암(출 15:20, 민 26:59), 드보라(삿 4:5), 이사야의 아내(사 8:3, KJV 참고), 노아댜(느 6:14) 등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훌다가 예언적 은사를 소유했던 자로서 당시 상당한 명성을 지녔던 것만은 분명하다. 한편 요시야 당시에는 훌다 외에도 예레미야와 스바냐 선지자가 활동을 했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베냐민 땅 아나돗 출신이므로 예루살렘에 있지 않았을 가능성이 많다(Keil, Bähr). 또 그들은 궁전 선지자가 아니어서 요시야의 개혁에 직접 관여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Hobbs). 반면에 훌다는 왕궁에서 예복을 주관하는 공직자인 살룸과 결혼한 것으로 보아 왕의 측근에 있는 선지자였던 것 같다. 그래서 왕의 사자(使者)들은 예레미야나 스바냐를 찾지 않고 훌다를 찾아갔을 것이다(Matthew Henry).

예루살렘 둘째 구역. 예루살렘 둘째 구역(히, 미쉬네)이란 왕조 시대에 들어와서 예루살렘 성이 확장될 때 포함된 지역을 가리킨다. 훗날 ‘미쉬네’는 이곳의 지역명으로 고착된 것 같다(Hobbs). 한편 이 ‘미쉬네’는 일명 ‘낮은 지역’이라고도 불리웠는데 그 까닭은 그 지역의 위치가 계곡이었기 때문이다(G. A. Smith).

 

22:15 너희는 너희를 내게 보낸 사람에게 고하기를. 여기서 ‘너희를 내게 보낸 사람’이란 다름 아닌 요시야 왕을 가리킨다(12, 13절). 그런데도 그를 가리켜 이렇게 말한 여선지 훌다의 어투는 1장에서 선지자 엘리야가 아하시야의 사자(使者)들에게 했던 어투와 유사하다(1:6). 이와 같이 훌다가 구약의 전통적인 선지자들의 어투로 말하는 것을 볼 때 그녀는 선지자 엘리사처럼(13:14) 왕의 자문을 담당하는 궁전 선지자였던 것 같다(Wilson). 한편 많은 학자들은 본 절 이후에 기록된 훌다의 말을 15-17절과 18-20절 두 부분으로 나눈다. 그리하여 첫째 부분은 들어야 할 모든 사람에게 한 말이고, 둘째 부분은 특별히 왕에게 한 말이라고 한다(Keil & Delitzsch, Bähr). 그러나 전후 문맥 관계에서 볼 때 두 부분은 다 신명기적 심판과 축복에 대한 언급으로서 모두 왕에게 한 말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Hobbs).

 

22:16 내가 … 재앙을 내리되. 이러한 본 절의 말씀은 21:12에서 므낫세 시대에 주어진 심판의 말씀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이 곳과 그 주민에게. 여기서 ‘이 곳’이란 예루살렘을 가리키며 ‘그 주민’은 예루살렘 백성들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 둘은 궁극적으로 ‘온 유다’를 의미한다. 한편 예루살렘에 관한 이러한 저주의 말씀은 19:31에서 히스기야 시대에 주어진 예루살렘에 관한 축복의 말씀과 서로 상반된다. 그러나 이같은 현상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약속과 긍휼을 무시한 므낫세 왕과 유다 백성들의 패역(悖逆) 때문이지 결코 하나님께서 조변석개(朝變夕改)하시기 때문은 아니다(21:8-15).

유다 왕이 읽은 책의 모든 말대로 하리니. 이미 언급한 대로 요시야가 이 때 읽은 성경 중에는 신명기가 포함되었을 것이다. 11절 주석 참조. 실상 신 27, 28장에는 하나님의 말씀 순종 여하에 따른 축복과 저주의 언약이 언급되어 있다.

 

22:17 본 절에는 유다 백성이 하나님의 진노를 격발케 한 원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세가지로 언급되어 있다. (1) 하나님을 버림: 이처럼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을 버렸다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기하고 불순종했다는 뜻이다. 이는 곧 모든 죄악의 첫 발걸음이자 죄악의 근본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떠난 자에게서는 어떠한 의도 기대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한 샘에서 단 물과 쓴 물이 함께 나올 수 없는 이치와 같다(약 3:11). 그래서 율법서의 상당 부분(신 12:19, 29:25-28)과 예언서의 많은 부분(삿 10:13, 삼상 8:8, 렘 1:16 등)이 하나님을 저버리는 것에 관해서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2) 우상 숭배에 빠짐: 즉, 유다 백성들은 바울이 말한 것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다(롬 1:23). 한편 하나님에게서 떠난 자는 이처럼 자연히 우상 숭배에 빠니게 된다. 왜냐하면 인간은 스스로 존재할 수 없고 하나님 안에서 살든지 하나님을 떠나 다른 무엇을 섬기든지 무엇을 꼭 의존해야만 하는 속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다(마 6:24, 눅 16:13). (3) 적극적인 범죄: 유다 백성처럼 이미 하나님의 말씀이 그 마음에 없고 다른 것으로 채워져 있는 사람은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기 마련이다(창 4:7, 8, 삼상 18:10 등). 왜냐하면 악인은 항상 독을 머금고 있으면서 (잠 10:6, 11) 악을 더듬어 찾음으로 더욱더 사악한 길로 스스로를 재촉하기 때문이다(잠 11:27).

이 곳을 향하여 내린 진노가 꺼지지 아니하리라. 유다에 대한 심판이 연기되기 시작한 것은 8:19에서부터이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심판을 연기하신 것은 당신 백성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과 오래 참으심에서였다(겔 33:11, 벧후 3:9). 우리는 이러한 경우를 요나에 의해 니느웨에 경고와 회개의 메시지가 선포된 사건에서 볼 수 있다(욘 3:1-10). 그러나 그 같은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에도 불구하고 유다 백성들은 계속 죄악 가운데서 행하였으니(21:1-9) 이제 하나님의 심판이 불가피하게 된 지경에까지 이르렀고 어떠한 회개에 의해서라도 만회(挽回)할 수 없게 된 것이다(대하 36:16).

 

22:18 네가 들은 말들에 대하여는. 지금까지의 문맥에서만 본다면 여기서 ‘네가 들은 말’이란 사반이 율법책을 읽을 때 요시야가 들은 말 (11절)을 의미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부분을 19절 서두에 연결시켜 이해한다. 즉, 그들은 ‘네가 들은 말’을 19절에 언급된 예루살렘과 그 백성들에 대한 저주(16, 17절)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저주 역시 이미 모세 오경에도 나와 있는 바이니(신 28:15-68) 어떤 견해를 취하든 별 무리가 없다. 한편 이처럼 하나님께서 특별히 요시야에게 따로 말씀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요시야의 태도가 겸비하였고 그가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며 통곡하였기 때문이다(11, 19절).

 

22:19 내가 이 곳과 그 주민에게 … 저주가 되리라. 이는 곧 “너희 땅이 오늘과 같이 황폐하며 놀램과 저줏거리가 되어 주민이 없게 되었나니”(렘 44:22)라고 한 것과 같은 말이다. 또한 이러한 말은 선지자들이 자주 사용하던 말로서 레 26장과 신 28장에서 인용한 듯하다(렘 4:7, 18:16).

나도 네 말을 들었노라. 하나님은 앞서 히스기야에게도 똑같이 “내게 기도하는 것을 내가 들었노라”(19:20)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요시야의 간절한 회개의 기도(11절)가 히스기야의 기도처럼 하나님께 상달되었음을 가리킨다. 그 결과 히스기야 때에 그의 경건함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심판이 연기되었던 것(20:19)처럼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결정적 심판은 요시야 사후(死後)에 있을 것임이 약속되었다(20절). 이처럼 하나님의 앞에 겸비한 의인이 없음으로써 하나님의 심판 받은 소돔과 고모라의 경우와 완전히 대조가 된다(창 18:22-32, 19:23-28).

 

22:20 너의 조상들에게 돌아가서.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 원문을 문자적으로 직역하면 ‘너희 조상에게로 모으고’가 된다. 이러한 말은 창 25:8에서 보는 바와 같이 침상에서 평안히 죽는 것을 나타낼 때 사용하는 죽음에 대한 전형적인 표현이다(Keil, Hobbs). 그런데 이것은 실제로 요시야가 바로 느고와의 전투에서 비참한 죽음을 당한 사실과 일견 모순이 되는 것처럼 보인다(23:29). 더욱이 본 절 바로 뒤에는 ‘평안히’(히, 베샬롬)라는 부사어가 첨언되어 있어서 더욱더 그러하다. 때문에 혹자는 여기서 ‘평안히’라는 부사어가 왕에게 해당되는 말이 아니라 왕이 다스리는 백성들에게 해당되는 말이라고도 한다(Nicholson). 그러나 애굽과의 전쟁에서 그 백성들이 ‘평안히’ 있었다는 말은 맞지 않는다. 따라서 본 절의 의미는 다음과 같은 것으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즉, (1) 바벨론에 의해 유다가 멸망하는 고난의 때가 요시야 때는 아니라는 것이다. (2) 렘 22:19에서 보는 바와 같이 요시야는 “예루살렘 문 밖에 던져지고 나귀 같이 매장함을 당하”지 않을 것이며 왕조의 묘실에 평안히 잠들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Pulpit Commentary). 실제로 유다의 멸망은 요시야가 죽은 후 3년 뒤인 여호야김 때에 이루어졌으며(24:1) 전쟁터에서 죽은 요시야는 신복들에 의해 예루살렘 묘실에 장사(葬事)되었다(23:29, 30).

네 눈이 보지 못하리라. 창 21:16이나 44:34에서 보듯이 어떠한 참혹한 상황을 눈으로 보지 않게 되는 것은 참으로 크신 하나님의 축복이라 아니할 수 없다. 히스기야와 마찬가지로(20:9-11) 요시야 왕도 그 같은 하나님의 축복으로 인해 이제 자기 백성들의 참람한 상황을 보지 않고 영원한 안식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사자들이 왕에게 복명하니라. 즉, 이 말은 힐기야, 아히감, 악볼, 사반, 아사야와 같은 왕의 사자(使者)들(14절)이 훌다의 예언을 요시야 왕에게 전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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