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 주석, 열왕기하 15장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15:1 여로보암 제이십칠년에. 연대기 문제에 있어서 본 절은 14:23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즉 여로보암이 아마샤 15년에 북(北)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기 때문에(14:23) 아사랴는 그의 아버지 아마샤가 29년간 통치한 후인 여로보암 14년이나 15년에 왕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본 절에는 27년으로 나와 있으니 무려 12-13년 정도나 차이가 난다.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본 절의 ‘27년’을 ‘15년’으로 고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본 절 뿐만 아니라 8, 13, 23, 27절도 함께 수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Rawilnson, Keil & Delitzsch). 그러나 이렇게 고치는 것에도 한계가 있다. 한편 ‘여로보암 제27년’이란 표현은 그의 아버지 요아스(B.C. 798-782)와 함께 통치하기 시작한 때부터 산출한 기간임을 알 수 있다.

아사랴가 왕이 되니. 아사랴는 웃시야(B.C. 791-739)라고도 불리는데 이 둘의 관계에 대해서는 14:22 주석을 참조하라.

 

15:2 오십이 년간 다스리니라. 아사랴는 B.C. 791-767까지 약 24년간 그의 부친 아마샤와 섭정을 했다(Thiele, Mysterious Numbers). 그러므로 그가 정식으로 등극한 해는 아마샤가 죽은 해인 B.C. 767년이며 그가 단독으로 통치한 기간은 약 28년간이 되는 셈이다. 그리고 여기서 그가 16세에 왕위에 올랐다는 것은 그가 처음 섭정하기 시작한 때의 나이를 가리킨다. 이에 대해 요세푸스도 그가 16세에 등극하여 52년간 다스린 후 68세에 사망했다고 기록했는데, 이것 역시 그가 16세에 섭정을 시작했음을 간접적으로 입증해 준다. 그러나 이처럼 아사랴가 24년간이란 장기간 동안 부친 아마샤와 함께 섭정을 했다는 분명한 증거는 찾기 힘들다. 단지 학자들은 아마샤가 북(北) 이스라엘의 요아스(B.C. 798-782)와 싸울 때에 자기 아들을 왕으로 세웠을 것이라고 추측할 뿐이다. 그리고 아마도 그의 부친 아마샤의 실정(失政)에 대한 반감 때문에 섭정했으리라 추정된다(14:1-20).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여골리야라. 대하 26:3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왕의 부친에 대한 언급은 없으며 모친의 이름만 기록되어 있다. 이 이름의 뜻은 ‘여호와는 능하시다’, 혹은 ‘여호와께서 정복하신다’로 주의 전능하심과 공의로움을 반영한 것이다. 한편 요세푸스는 그녀를 ‘아기알라’로 칭하고 있다.

 

15:3 아사랴의 치적에 대한 평가는 그의 부친 아마샤에 대한 평가(14:3)와 유사하다. 그런데 본서에서 유다 왕들의 치적을 평할 떼 그 기준은 항상 다윗 왕이었다. 그러나 다윗에 비길만한 칭찬을 들은 왕은 히스기야(18:3)와 요시야(22:2) 뿐이다. 한편 역대기 기자는 아사랴, 즉 웃시야가 스가랴 선지자가 살아 있는 동안 여호와께 구했다고 기술하고 있다(대하 26:5). 이는 그가 우상 숭배 때문에 여호와의 진노를 받은 것이 아니라 그의 교만에 의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것임을 반영한다(5절, Bähr).

 

15:4 산당은 제거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유다 열왕들의 치적을 평가함에 있어서 여호와 신앙에 배교적인 행위를 일삼던 장소인 산당을 제거하지 않는 것은 왕의 선악 여부를 판가름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왕상 15:14, 22:43, 왕하 12:3, 15:35).

 

15:5 여호와께서 왕을 치셨으므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다’(3절)라는 표현 뒤에 본 절과 같은 말이 나오는 것은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다. 그러나 역대기의 저자는 왜 그가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수 밖에 없었는지 그 이유를 분명히 밝힌다. 즉 대하 26장을 보면 아사랴(웃시야)가 이방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해 많은 영토를 얻었을 뿐만 아니라(대하 26:2-7) 그의 권세가 널리 알려져 그는 두려움의 존재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그 결과를 하나님의 은혜로 돌리지 않고 부왕 아마샤와 같이 자신의 능력과 힘에 돌리는 교만을 나타냈다(대하 26:16). 그 중에서도 특히 그는 제사장의 직무를 침범하려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다(대하 26:16-18). 이처럼 하나님께 대한 교만은 영적 타락을 가져와(호 7:9, 10) 하나님을 부인하고(시 10:4) 자기 도취에 빠지게 되어(렘 43:2) 결국은 멸망에 이른다(잠 16:18).

그가 죽는 날까지 나병환자가 되어. 아사랴가 나병에 걸린 것은 그의 통치 말년이기 때문에 그리 오랜 기간은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아사랴가 나병 환자가 된 후 별궁에 거하고 있는 동안 그의 아들 요담이 왕궁의 일을 돌보았는데 이 때 요담은 적어도 15세 이상은 되었을 것으로 추측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요담은 왕위에 오른 때의 나이가 25세이므로(33절) 아사랴(B.C. 791-739)가 나병에 걸렸던 기간은 10년 이하일 것이다.

별궁에 거하고. 이방에서는 나아만의 경우처럼 나병에 걸렸어도 자신의 직무를 수행할 수 있었던 것 같다(5:4). 그러나 이와는 달리 이스라엘에서의 나병 환자는 격리된 생활을 해야 했다(레 13:46, 민 5:2, 3, 12:10, 14, 15). 아사랴의 경우는 이스라엘의 풍습 뿐만 아니라 그 병의 정도가 아주 심하여 그가 왕임에도 불구하고 따로 격리 수용될 수 밖에 없었던 것 같다. 한편 ‘별궁’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베트 하하프쉬트’에 관한 해석을 살펴보면, (1) 어떤 신분상의 ‘욕된 상태’를 의미한다는 것과, (2) ‘장소적으로 어떤 격리된 상태’를 의미한다는 견해가 있다. 그런데 이렇게 해석을 달리하게된 이유는 히브리어 ‘하프쉬트’의 해석 때문이다. 즉 이 단어는 (1) ‘신분적 예속이나 책무 등으로부터의 자유’(출 21:2, 5, 26, 27, 신 15:12, 13, 18, 삼상 17:25)라는 뜻과, (2) ‘공간적인 분리’(KJV, RSV, NIV)라는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아로니(Aharoni, Biblical Archaeologist, p.116-117)는 아사랴 왕이 예루살렘에서 약 5 km 정도 떨어진 라맛 라헬(Ramat Rachel)에 있는 굴 속에서 살았다고 한다. 그런데 이러한 견해를 긍정적으로 볼 때 ‘별궁’의 의미는 (1)과 (2) 둘 다 동시에 수용될 수 있을 것 같다. 왜냐하면 당시의 나병 환자들은 성 밖에 따로 모여 살았기 때문이다(레 13:46). 그리고 왕이 격리된 상황 내면에는 왕에 대한 ‘욕된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왕의 신분이었기 때문에 성 밖으로 추방되지 않고 그를 위한 특별한 장소가 마련되었을 것이다(Bähr). 한편 아사랴의 이런 저주의 삶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죄 가운데서 고독하게 사는 인생들에게도 적용된다. 왕으로서의 영광스러운 지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무서운 저주 가운데서 살았던 아사랴와 같은 인생은 아무리 물질적으로 풍요하고 육체적으로 안락하다 할지라도 그의 영혼은 이미 죽은 상태에 있는 것이다(롬 2:9). 왜냐하면 죄 그 자체가 하나님과의 교제를 단절시키기 때문이다(눅 16:19-31).

요담이 왕궁을 다스리며. 섭정 왕 요담은 명목상으로 왕의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 아니라 실제로 국사(國事) 전반을 다스렸을 것이다. 그리고 요담은 이때 섭정을 시작해서 웃시야(아사랴)가 죽은 후에도 계속해서 왕으로서의 역할을 했다.

 

15:6 행한 모든 일. 앗수르 왕 다글랏 빌레셀의 원정 기사에 보면 그의 통치 3년(B.C. 743년, 혹은 742년)에 앗수르 군주가 ‘야우다 아사랴우(Azaryau of Iauda)’로부터 공물을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Luckenbill). 어떤 학자들은 여기에 나타난 이 인물을 아사랴 왕과 동일인으로 생각한다(Montgomery). 그러나 성경에서는 유다 왕이 그의 오랜 통치 기간 동안에 앗수르의 속국으로서의 예를 행했다는 기록을 전혀 찾을 수 없다. 그리고 아사랴가 원정을 갔던 곳은 앗수르와 접한 북쪽을 제외한 유다의 남서 방향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사실은 받아들이기 어렵다(대하 26:6-15). 더욱이 오늘날 아사랴우가 북쪽 아랍에 있는 야유다(Iauda)의 아사랴유로 받아들여지고 있어 공물을 바친 인물이 아사랴가 아님을 더욱 확증해 준다(Herrmann, History, p. 246).

 

15:7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장사되고. 이사야서는 웃시야 왕이 죽던 해를 선지자 이사야가 부름 받은 해와 일치시켜 기록하고 있다(사 6:1). 한편 역대기 기자는 본 절의 언급보다도 훨씬 더 구체적으로 웃시야가 ‘왕들의 묘실에 접한 땅 곧 그의 조상들의 곁에’ 장사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어(대하 26:23) 그가 나병에 걸린 채로 죽었음을 나타내 준다. 즉 그는 나병 환자였기 때문에 열조들의 무덤에 묻히지 못하고 조상들의 무덤 곁에 묻힌 것이다. 또한 요세푸스도 아사랴가 단순히 자신의 땅에 홀로 묻혔다고 기록하고 있어 이를 뒷받침해 준다. 따라서 역대기의 기록과 본 절의 기록은 모순되는 것 처럼 보인다. 그러나 제2 성전에 있는 아람어 비문을 보면 아사랴(웃시야) 왕의 뼈들을 후에 왕의 묘실로 이장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어 두 기록의 모순점을 해결해 준다(Y. Yadin, Jerusalem Revealed).

요담이 … 왕이 되니라. 여기서 사용된 동사 ‘이믈로크’는 5절에서 ‘다스리며 … 치리하였더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쇼페트’와는 분명히 다르다. 왜냐하면 이는 히브리어 ‘마라크’에서 온 말인데 그 의미는 ‘다스리다, 보좌에 오르다, 참으로 왕이 되다’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5절에서는요담의 섭정을 지칭하는 것임에 반해 본 절에서는 그가 실제적인 왕이 되었음을 가리키는 것이다. 한편 본서의 연대기 문제를 해결할 때는 이러한 동사의 사용에 주의해야할 것이다(Hobbs, Word Biblical Commentary, Vol. 13, p.195).

 

15:8 아사랴의 제삼십팔년에. 여기서 말하는 ‘아사랴의 제38년’이란 그의 부친, 즉 아마샤(B.C. 796-667)와 함께 섭정한 24년을 합하여 계산한 것이다.

스가랴가 … 다스리며. 여기에 나오는 북 왕국의 왕 스가랴(B.C. 753-752)와 대하 26:5에 나오는 스가랴 선지자는 동명 이인(同名異人)이다. 한편 본 절에 언급된 ‘스가랴’라는 이름은 ‘여호와께서 기억하신다’라는 경건한 뜻을 가지고 있으나 6개월 동안의 그의 치적을 살펴보면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9절).

 

15:9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 북(北) 이스라엘의 초대 왕인 여로보암은 백성의 종교심을 묶어 놓기 위해 우상 숭배 정책을 쓴 장본인이다(왕상 12:25-33).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징벌로 말미암아 재위 22년에 죽고 그 아들 나답도 재위 2년 만에 죽고 만다(왕상 14:13-20, 15:25-28). 특히 그가 만든 금송아지 우상은 매우 가증스러운 것이었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것이다(왕상 12:28-33). 그래서 그후부터 그는 금송아지 우상의 대명사가 되었다. 스가랴도 단(Dan)과 벧엘(Bethel)에서 송아지 숭배를 했기 때문에(Wycliffe, Keil & Delitzsch) 이같이 표현한 것이다.

 

15:10 야베스의 아들 살룸. 여기서 야베스는 인명이 아니라 지명(地名)이다. 따라서 이 말은 살룸이 요단 동편의 야베스-길르앗 출신이라는 것을 나타내 주는 말이다(Hobbs). 그리고 이쉬다(Ishida)의 논문(Royal Dynasties, p. 173-176)을 보면 그 당시 요단 동편 지역과 서편 지역 간에 다툼이 잦았다고 한다(Thiele). 따라서 살룸이 스가랴를 모반한 것은 바로 그러한 사실을 입증해 주는 것이다. 한편 요세푸스에 의하면 살룸이 스가랴의 친구였으나 왕위 계승 문제로 스가랴를 죽였다고 한다(Rawilnson, Bähr). 그리고 본 절에 언급된 지명 야베스는 오늘날의 ‘야습’(Yasuf)에 해당되는 곳이다(Gray).

백성 앞에서 쳐죽이고. 본 절의 ‘백성 앞에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카발 암’의 해석에 대하여 학자들에 따라 견해가 다양하다. (1) 대다수의 중세 맛소라 사본에는 그냥 한 단어로 ‘카발암’으로 쓰여 있으며 70인역 바티칸 사본(Septuagint, G MS, Codex Vaticanus)에도 ‘케블라암’으로 번역되어 있다. 그러나 (2) 맛소라 사본(Masoretic Text)과 다른 헬라어 역본에는 ‘백성들 앞에서’(카테난티 투 라우)로 기록하고 있으며 제임스왕역(KJV)도 그렇게 번역하고 있다. (3) 루시니안 헬라어 역본(Septuagint, Lucianic recension)에는 ‘엔 이블라암’으로 번역되어 있는데 많은 주석가들은 이것을 옳게 보고 있다(T. R. Hobbs, Word Biblical Commentary, Vol. 13, p. 195-196). 그리고 학자들이 그렇게 보는 데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다. (1) 히브리어 ‘카발암’이라는 명사에 대해서 전혀 알려진 바가 없다. (2) 이것이 ‘백성들 앞에서’라는 뜻의 ‘카발 암’이라면 ‘백성’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암’ 앞에 정관사가 붙어 있거나 아니면 이 단어가 부사로 사용되었다고 보아야 하는데 부사로 볼 때 문맥상 잘 어울리지 않는다. (3) 따라서 ‘카발암’은 9:27에 나오는 ‘이블르암’에 대한 오기(誤記)라고 밖에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블르암’은 유다 왕 아하시야가 예후의 칼을 피해 도망하다가 시해된 곳이다(9:27). 그래서 스가랴는 아하시야가 죽은 그 곳에서 처형당했다고 본다. 한편 본 절의 표현을 (2)의 경우와 같이 ‘백성 앞에서’라고 읽는다면, 이것은 백성들이 보는 가운데서 공개적으로 사형시켰다는 말이다(Keil & Delitzsch, Vol. III, p. 389, Wycliffe). 그런데 스가랴를 공개 처형했음에도 불구하고 백성이 동요하거나 복수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들의 죄악성과(Wycliffe) 스가랴의 악행을 잘 나타내 준다.

 

15:11 없음.

 

15:12 본 절은 10:28-31에 기록된 예언에 대한 성취 부분이다. 이와 같이 예언의 성취를 언급함으로써 본서 기자는 이스라엘과 유다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부각시키고 있다.

네 자손이 사 대 동안 이스라엘 왕위에 있으리라. 북쪽 이스라엘 건국 이래 가장 강력한 종교 개혁을 시도했던 왕은 예후다(10:15-27). 그러나 그도 다른 이스라엘 왕들과 같이 여로보암이 범한 금송아지 숭배의 길에서 떠나지 않았다(10:29).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예후 왕가가 지속되지 못하고 예후 이후 4대만에 끝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10:30). 이러한 하나님의 심판적인 예언은 스가랴가 즉위한지 6개월만에 성취되었다. 그러나 여기서 드러나는 한 가지 특징적인 사실은 예후가 하나님 앞에서 어느 정도 신실하게 행하였으므로, 4대(代) 80년이라는 세월 동안 이스라엘을 통치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예후 한 사람의 적은 선행을 기억하시고(갈 6:7-10, 히 10:24) 그의 자손들에게 복을 주셨다.

 

15:13 살룸이 … 한 달 동안 다스리니라. 이와 같이 살룸이 한 달 밖에 왕위에 있지 못한 것은 북 왕국 이스라엘의 정국이 얼마나 불안정했는가를 보여 준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 즉, 짧은 기간 동안 통치할 수 밖에 없는 당시의 상황을 통해 인간의 부질없는 권력욕을 발견하게 된다. 한편, 백성들의 의사와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면서까지 인간이 만들어낸 이러한 자리는 아침이면 사라질 안개와도 같은 권력이다(약 4:14).

 

15:14 가디의 아들 므나헴. ‘므나헴’이란 이름은 ‘슬퍼하다, 후회하다, 위로받다’라는 뜻의 히브리어 동사 ‘나함’의 피엘형(Piel: 강조형 능동) 분사 형태로서 ‘위로자’라는 뜻이다. 그리고 그는 ‘장군’, 혹은 ‘총사령관’의 지위를 갖고 있었던 자인 듯하다(Josephus, Keil & Delitzsch), 그런데 그가 살룸에게 반격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 기인했을 것이다. (1) 이스라엘 왕국은 ‘군사 군주제’(military monarchy)이다. (2) 살룸 또한 왕위 찬탈자이다. (3) 예후 왕가가 멸망했기 때문에 왕위는 군대 장관에게로 돌아가야 한다(Wycliffe). 한편 ‘가디의 아들’이란 가디가 그의 출신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마도 아버지의 이름이 ‘가디’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가디’라는 이름은 ‘가디야후’의 단축형으로서 주로 사마리아 지역에서 발견되던 인명(人名)이다(Gibson).

살룸을 거기에서 쳐죽이고. 요세푸스가 전하는 유대 전승에 의하면 므나헴은 스가랴의 군대를 이끌고 살룸에게 보복했다고 한다(Hobbs). 한편 이것은 므나헴이 디르사에서 태어나긴 했으나 그가 므낫세 지파의 일원이었기 때문에 당시의 지파 간의 전쟁이 치열했다는 논증의 좋은 증거가 된다.

 

15:15 본 절에서 살룸의 사적을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볼 때 비록 그의 통치가 짧은 기간 동안이기는 하지만 그의 통치는 합법적이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그의 치세가 공식적으로 역대 왕들의 사적을 기록한 역대 지략에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15:16 딥사. 왕상 4:24에 따르면 ‘딥사’는 유프라테스 강변에 있는 한 성읍이다(Keil & Delitzsch, Rawilnson).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므나헴이 그곳까지 정복의 손길을 뻗쳤다고 보지는 않는다(Bähr). 그래서 본 절에 언급된 ‘딥사’는 유프라테스 강변의 딥사(Thapsacus)가 아니라 ‘디르사 근처에 있는 딥사’라고 주장한다(Wycliffe). 한편 루시니안 헬라어 역본(Septuagint, Lucianic recension)에도 ‘딥사’가 ‘타푸아’(Tappuah)로 수정되어 있는데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견해를 옳다고 본다(Hobbs). 그리고 수 16:8에 보면 ‘타푸아’는 북쪽 에브라임 지경에 위치했다고 하는데 이곳은 디르사에서 그리 멀지 않은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곳은 여로보암 2세가 정복하여 되찾은 북방 경계선이 있는 곳이기 때문에(14:25, 28) 그 지역을 이스라엘 땅으로 수호하기 위하여 므나헴이 원정을 한 것으로 보인다(Ishida). 그러나 ‘성문을 열지 않았다’는 본 절의 표현은 그 지역의 사람들이 므나헴의 통치에서 벗어나려고 하였음을 보여 준다(Bähr).

아이 밴 부녀를 갈랐더라. 이와 같은 잔인한 행위는 고대 근동의 전쟁에서 나타나는 특징이다. 그리고 그 뿐만 아니라 전쟁에서의 승리자들은 그렇게 하는 것을 당연한 의무로 생각한 것 같다. 한편 ‘갈랐더라’는 말은 히브리어 ‘빅케아’인데 이는 ‘갈기갈기 찢다’란 뜻의 ‘바카’에서 온 말이다. 즉 이것은 임신한 여인의 몸을 칼로 난도질하는 모습을 나타낸 표현으로 그들의 잔인성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런 잔인한 풍습에 관해서는 8:12과 사 13:18, 호 13:16, 암 1:13을 참조하라.

 

15:17 없음.

 

15:18 므나헴(B.C. 752-742)의 행적에 대한 본 절과 같은 설명은 아주 전형적인 것이다. 즉 이러한 방식의 기술과 표현은 북(北) 이스라엘의 말기에 와서 규칙적으로 자주 언급되고 있다.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 9절에 나타난 표현과 마찬가지로 이는 하나님 앞에서 악행을 일삼았음을 나타낸다. 특히 우상 숭배 중에서도 금송아지를 숭배한 죄악을 범했을 경우에 이렇게 표현했다(왕상 12:28-30). 그리고 이러한 말은 북 왕국의 초대 왕 여로보암으로부터 멸망의 전조가 나타나는 말기까지 대부분의 왕들이 악한 왕이었음을 암시적으로 나타낸다.

평생.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콜 야마이우’는 ‘그의 모든 날들 중에’란 의미이다. 그런데 BHS(Biblia Hebraica Stuttgartensia)의 본문 비평에는 이것을 ‘베야마이우’로 수정하여 18절의 마지막에 나오는 이 단어를 19절의 초두에 위치시키고 있다. BHS가 그렇게 하는 이유는 19절에 접속사가 없기 때문에 문장 구성상 매우 어색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만일 그렇게 본다면 19절은 ‘그의 때에 앗수르 왕 불이 … ’로 되어 자연스럽게 된다. 그러나 맛소라 본문의 이 단어는 특정한 사람의 생애를 가리키는 관용적인 용어이므로 그렇게 수정한 것은 억지라고 볼 수 있다(Hobbs).

 

15:19 앗수르 왕 불이 와서 … 치려 하매. 앗수르 왕 ‘불’의 정체에 대해서는 바벨론 왕들의 목록을 보면 알 수 있다. 거기를 보면 ‘불’ 왕은 바로 디글랏 빌레셀(Tiglath-Pileser, III세, B.C. 745-727)과 동일 인물로서 그는 바벨론을 2년간 지배했다. 그런데 그 때 그에게 바벨론식으로 붙여진 이름이 ‘불’인 것이다. 또 디글랏 빌레셀의 비문을 보면 앗수르가 사마리아의 므나헴으로부터 공물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어 이를 더욱 뒷받침해 준다(Luckenbill). 그리고 북(北) 이스라엘 왕 므나헴이 앗수르에 공물을 바친 때는 B.C. 743년 쯤으로 디글랏 빌레셀 제3년에 해당하는 것 같다(Thiele). 한편 앗수르의 불 왕이 사마리아에 온 것이 침략인지 아니면 므낫세의 초청에 의한 것인지에 대하여 견해가 다양하다. 이렇게 견해를 달리하게 된 것은 ‘와서 … 치려 하매’로 번역된 히브리어 ‘바’의 해석 때문이다. 혹자는 이것을 (1) 침략을 나타내는 용어로는 쓰일 수 없다고 보는 반면에(Hobbs), (2) 다른 사람들은 이 단어가 침략을 표현하는 경우로 쓰인 예가 있다고 보아(창 34:25) 이를 침략을 나타내는 행위로 본다(Bähr). 그러나 본서 기자는 침략을 나타내는 용어로는 주로 ‘알라’를 썼으며(6:25, 12:17, 17:3, 5), 본 절에 나타난 것과 같은 ‘바’를 쓰지는 않았다. 따라서 불 왕이 온 것을 ‘침략’으로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의 방문이 므나헴의 초청에 의한 것인지(Thenius) 므나헴을 정당한 왕으로 인정해 그를 왕위에 앉히기 위한 것인지(Ewald)에 대해서는 분명치 않다. 한편 성경에서는 본 절에서 최초로 앗수르 제국에 대한 언급을 함으로 인해 앗수르가 강대국으로 팽창하는 과정에 있음을 시사해 준다(Wycliffe). 그리고 본 절에 나타난 앗수르 왕 불, 즉 디글랏 빌레셀 III세는 앗시리아의 왕위를 찬탈하여 제국을 새롭게 부흥시킨 자였다. B.C. 743년 또는 B.C. 738년에 일으킨 디글랏 빌레셀의 전쟁은 북(北) 이스라엘에게까지 파급되어 므나헴에게 공세를 내게 했다. 앗시리아 왕에게 공세를 바침으로써 므나헴은 앗시리아 통치자의 신복 중 한 사람이 되었다. 그래서 디글랏 빌레셀이 바벨론 왕이 되었을 때 므나헴은 ‘불루’라는 이름을 얻었다(바벨론 왕 명부에도 그렇게 기록되었음). 팔레스타인 지방에서는 ‘므나헴’보다도 그의 바벨론식 이름이 더 널리 알려졌던 것 같다.

은 천 달란트. 드라크마가 노동자의 하루 품삯에 해당하는 금액(눅 15:8)이라고 할 때, 은 한 달란트는 약 6,000 드라크마에 해당하는 돈이다(출 38:27, 마 18:24). 그렇기 때문에 은 천 달란트라고 하면 6백만 드라크마이다. 이처럼 많은 돈을 주고 므나헴은 자신의 정권을 유지시켰다.

나라를 자기 손에 굳게 세우고자 하여. 므나헴이 앗수르 왕에게 많은 공물을 바친 것은 요단 동편으로부터의 위협을 제거해 주도록 부탁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성공은 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25절). 한편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셋에게 조공을 주어 자신의 불안정한 정권을 유지하고자 했던 그의 행위는 성전의 은과 금으로 전쟁에서 벗어나려했던 남(南) 유다의 아사(왕상 15:18), 아하스(16:8), 히스기야(18:15)에 버금가는 악행이었다.

 

15:20 강탈하여.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요체’는 ‘나가다’라는 뜻의 동사 ‘야차’의 히필형(Hiphil: 사역형 능동)이다. 그래서 ‘세금을 징수하다’라는 뜻의 동사 ‘에리크’(23:35)와는 다르다. 그리고 이 단어를 문자적으로 직역하면 ‘나오게 하다’라는 뜻이 되는데 이것은 므나헴이 어마 어마한 돈을 세금으로 징수한 것이 아니라 군사력을 동원하여 부자들에게서 빼앗은 것임을 암시한다. 한편 자기 동족 중 딥사의 아이 밴 여인의 배를 가를 정도로 잔인했던 므나헴은(16절) 바닥난 재정을 메우고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다지기 위해 부자들을 강탈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은 당시 이스라엘의 정치적, 경제적 상황이 매우 심각했음을 의미한다. 사회가 어려움에 빠졌을 때 악한 통치자와 관원은 자신의 배를 채우기에 급급하지만 선한 통치자와 관원은 자기 것을 희생해서라도 위기를 극복하려고 한다. 한편 므나헴은 당시 정치와 경제의 지주였던 부자들에게서 강탈하기에 여념이 없었던 바, 공의를 행하기 보다는 자신의 배만 채우고자하는 불한당 같은 지도자였다. 어느 나라든지 지도자들이 이런 상태에 빠져 있으면 결코 부흥될 수 없다.

은 오십 세겔. 은 한 세겔은 일반 노동자 4일의 품삯에 해당된다(출 30:24, 삼하 24:24). 그렇기 때문에 은 오십 세겔은 200일에 해당하는 노동자의 품삯이다. 그런데 은 오십 세겔로 은 천 달란트를 만들려면 3만 명 정도의 사람으로부터 강제로 거출해야 했을 것이다.

 

15:21 없음.

 

15:22 없음.

 

15:23 브가히야. ‘브가히야’라는 이름은 ‘열다’라는 뜻의 히브리어 동사 ‘파카흐’에서 파생된 것으로서 ‘여호와께서 (눈을) 열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므나헴의 아들 브가히야(B.C. 742-740) 역시 2년 밖에 통치하지 못하였는데 이것은 당시 북 왕국의 불안정한 정치적 상황을 시사해 준다.

 

15:24 없음.

 

15:25 그 장관. 이 말의 히브리어 ‘샬리쇼’는 ‘그의 장관’이란 뜻으로 23절의 브가히야와 연결되는 말이다. 그래서 이 말은 ‘브가히야의 장관’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한편 요세푸스는 이 사람을 ‘천부장’이라고 하고 혹자는 이사람을 ‘전속 부관’이라고 한다(Keil & Delitzsch).

베가. 이 이름도 ‘브가히야’와 같은 어근인 ‘파카흐’에서 파생하였다. 그런데 하조르(Hazor)에서 발견된 그의 비문에는 그의 이름이 ‘페가 삼다르’로 기록되어 있다(Y. Yadin). 한편 본 절에서 ‘르말랴의 아들 베가’라고 표현한 것으 베가 보다도 그의 아버지 르말랴가 당시에는 더 잘 알려진 인물이었기 때문(사 7:4, 8:6)인 듯하다(Rawilnson). 그리고 호위대의 대장이었던 베가가 왕을 반역하였다는 것은 그 군대의 기강이나 충성심이 얼마나 해이(解弛)해졌는지를 잘 나타내 준다(Wycliffe).

왕궁 호위소에서. 이것은 왕궁을 보호하고 방어하는 ‘요새’ 또는 ‘높은 망대’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반대로 이곳에서 왕궁을 공격하기는 매우 용이했을 것이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브가히야 왕은 베가에 의해 살해되기 전에 이곳에서 친구들과 함께 잔치를 베풀었다고 한다.

아르곱과 아리에. 대부분의 역본들은 이 구절을 생략하거나 29절에 삽입시킨다. 왜냐하면 아르곱은 신 3:4, 13에서 언급하고 있는 바와 같이 요단 동편 상부에 위치한 지역의 지명일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문에서는 이것이 불확실하게 나타나 있어서 아르곱과 아리에가 인명(人名)인지 지명(地名)인지 알 수 없다. 만약 두 이름이 인명(人名)이라면, 이들은 베가와 함께 공모한 사람들이었는지 또는 브가히야와 함께 살해된 사람들이었는지 결론을 내릴 수 없다. 1886년 쉬타데(Stade)는 맛소라 사본의 아르곱과 아리에라는 어구가 25절과 가까운 29절에 대한 주석이었다고 시사한 바 있다. 이는 ‘길르앗’이 두 절에 나오기 때문에 필사자가 실수하여 이 두 지명의 주석을 29절 대신에 25절에 포함시킨 것으로 본 것이다. 그리고 아르곱은 ‘60개의 성읍’을 포함하는 옥의 나라 바산에 있었던 지방이지만(신 3:4, 13, 14, 왕상 4:13), 길르앗(왕상 4:13, 민 32:40, 삿 10:4, 대상 2:22)에 속해 있는 ‘야일의 고을들’(하봇)과는 구별된다. 아르곱의 위치는 신 3:4, 13, 14에 의해 정해져 있는데 그 서쪽 변경에는 그술 족속과 마아갓 족속의 영토(즉, 오늘날의 골란 고원)가 있다. 한편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는 이를 인명(人名)으로 간주하고 이 사람들을 왕의 친구들로 추측한다(Rawilnson). 그 뿐만 아니라 권위있는 일부 학자들도 이를 인명으로 보고 이 사람들을 ‘고관’으로 생각한다(Bähr, Keil & Delitzsch).

길르앗 사람 오십 명과 더불어 죽이고. 길르앗 사람들은 건장했기 때문에(대상 26:31, 수 17:1) 왕의 호위를 맡아서 담당했다. 특히 그들은 베가의 명령을 받는 전속 부관, 즉 장관의 명령을 받는 직속 부하였다. 한편 혹자는 본 절의 표현을 부정하고, 대신 길르앗 50명이 베가를 도운 것으로 이해한다(Keil & Delitzsch).

 

15:26 없음.

 

15:27 베가가 … 이십 년간 다스리며. 디글랏 빌레셀(Tiglath Pileser III)의 비문을 보면 앗수르가 B.C. 732년에 베가를 정복했다고 기록되어 있다(29절). 그리고 이 앗수르 왕은 B.C. 745년부터 727년까지 약 18년간 통치했기 때문에 이 중에서 므나헴의 통치기간 10년과 브가히야의 통치 기간 2년을 제외하면 베가에 해당되는 통치 연수는 불과 6년 남짓하다(Thiele). 그러므로 베가가 20년간 북 왕국을 통치했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은 딜리(Thiele)의 주장을 따르고 있는데 그는 여기서 말하는 20년이 북 왕국 내의 지파 간에 전쟁이 일어난 햇수를 가리킨다고 본다. 한편 이러한 국내 분쟁이 발생한 기간은 유다 왕 아사랴 38년 즉, 북(北) 이스라엘 왕 스가랴(B.C. 753-752) 때부터(8절) 남 왕국 아사랴 52년까지 약 14년 정도 된다. 그러므로 베가가 왕으로 단독 통치한 햇수는 6년에서 8년 정도로 추측할 수 있다. 이에 대해 딜리(Thiele)는 요담 12년까지 약 8년 정도를 베가의 단독 통치 기간으로 보고 있다. 또한 본 절에 나타난 베가의 20년간의 통치 기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에 의심을 품는 학자들도 있다. 즉 이 연대는 30절, 16:1의 내용과 일치하지 않는다. 그리고 17:1에 의하면 베가의 후임 왕 호세아의 통치 기간은 9년인데, 이렇게 되면 베가의 즉위 연도인 B.C. 740년부터 ‘사마리아 함락’까지의 기간은 29년이 되는 셈이고, 사마리아 함락의 시기도 B.C. 711년경이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나 실제로 사마리아 함락은 B.C. 722년에 이루어졌으므로 베가가 20년간 왕위에 있었다는 주장은 역사적인 사실과 맞지 않는다. 그러나 이 연대 문제는 본문을 수정하지 않고도 해결될 수 있다. 즉 베가는 B.C. 740-732년까지 9년 동안 정식으로 왕으로서 통치했으나, 그 이전에도 길르앗 지방을 11년간 다스렸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25절). 다시 말해서 그는 여로보암 2세가 죽고 나서 B.C. 752년경 길르앗 지방을 장악했으며, 계속적으로 이스라엘 전체의 통치권을 잡고자 기회를 넘보다가, B.C. 740년경 앗수르의 후원에 힘입어 쿠데타에 성공했고 이스라엘 왕위에 올랐던 것이다. 따라서 이 길르앗 통치 기간까지 합한다면 그의 통치 기간은 B.C. 752-732의 20년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본 절을 베가가 ‘사마리아에서 이십 년을 다스렸다’라고 이해하기 보다는 베가가 ‘사마리아에서 치리했고 또한 이십 년을 다스렸다’라고 이해하는 것이 당시의 상황과 맞는다.

 

15:28 없음.

 

15:29 앗시리아의 디글랏 빌레셀이 이끄는 이 전쟁은 B.C. 739-732년에 일어났다. 앗시리아 침략의 직접적인 이유는 유다 왕이 이스라엘과 시리아 사이에 맺어진 동맹 관계에 대항하기 위해서 앗시리아의 도움을 요청했기 때문이다(16:17). 침략의 구실을 찾고있던 디글랏 빌레셀은 이스라엘로 진군하여 갈릴리와 길르앗 주변의 모든 성읍들을 파괴하고 수많은 백성들을 사로잡아 갔다. 그는 마침내 다메섹으로 진군하여 도시를 약탈하고 아람 왕 르신을 처형시켰다(16:9).

디글랏 빌레셀. 이 이름은 19절에 나타난 ‘불’이라는 바벨론식 이름과 동일한 앗수르 왕으로서의 정식 왕명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학자들은 앗수르 왕이 정복을 목적으로 원정한 해가 B.C. 733년 경인 것으로 보고 있다. 이것은 B.C. 743년 1차 출정(29절)과 B.C. 735년 2차 출정(사 7:1-9) 이후 세 번째 출정이다. 그리고 이 때에 디글랏 빌레셀은 팔레스타인 전역을 공격하여 이스라엘 도시의 대부분을 정복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그는 다시 B.C. 732년경 다메섹을 주목표로 재침공 했다(Jerusalem Bible).

이욘. ‘폐허’란 뜻을 지닌 이 도시는 이욘 강변에 위치하고 있으며 아벨벳 마아가에서 북쪽으로 약 15 km 정도 떨어져 있다. 그리고 이곳은 벤하닷의 침략을 받은 납달리 자손의 마을(왕상 15:20)로서 이스라엘의 최북단에 위치한다.

아벨벳 마아가. ‘압제하는 집의 초원’이란 뜻을 지닌 이 도시는 기럇 세모나(Qirvat Shemona)의 북쪽에 위치한 오늘날의 ‘텔 아빌’(Tel Abil)과 동일한 곳이다. 한편 이곳은 팔레스타인 북부 갈릴리 상부의 훌레 계곡에 위치했던 성읍(삼하 20:14, 15)으로 정치 선동가 세바가 요압의 추격을 피해 숨어 있던 장소이다(삼하 20:14-22). 또한 이곳은 아람 왕 벤하닷에게 점령당했던 곳이기도 하다(왕상 15:20).

야노아. ‘나머지’란 뜻을 지닌 이 도시의 정확한 위치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대개 (1) 세겜의 남동쪽 약 10 km 지점에 위치한 오늘날의 길벳 야눈(Khirbet Yanum)이거나 (2) 악고의 동북쪽 약 16 km 지점에 위치한 야노아(Janoah)로 보고 있다. 이외에도 여러 견해가 있으나 최근에는 (2)의 견해가 큰 지지를 받고 있다. 한편 이곳은 납달리에게 배당된 성읍인데 에브라임의 경계 지역으로도 알려진 곳이다(수 16:6, 7).

게데스. ‘성소’란 뜻을 지닌 이 도시는 아벨벳 마아가와 하솔의 중간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그리고 이곳은 두로 동쪽 약 36 km 지점에 있는 오늘날의 ‘텔 게데스’(Tel Kedesh), 혹은 ‘가데스’로 알려져 있다. 한편 이곳은 납달리 지파에 속한 레위인들의 도피성(수 19:37, 21:32)이었을 뿐만 아니라 바락의 고향이며(삿 4:6) 그가 드보라를 돕기 위해 병력을 집결시킨 장소이기도 하다(삿 4:1-10).

하솔. ‘울타리 마을’이란 뜻을 지닌 이곳은 고대 훌레(Huleh)호수의 남쪽 약 8 km 지점에 위치한 큰 성읍이다. 이곳은 가나안의 수도로서 여호수아에 의해 정복당했다(수 11:1-13). 그 후 재건되어 납달리 지파에게 할당된 후(수 19:32, 36) 솔로몬에 의해 요새화되었다(왕상 9:15). 한편 이 지역은 1950년 야딘(Yadin)에 의해서 발굴되었는데, 이곳에서 큰 건물들이 불타 파괴된 흔적이 발견되었다. 이것은 아마 디글랏 빌레셀 3세에 의해 파괴된 것으로 추측된다.

길르앗과 갈릴리와 납달리 온 땅. 이 지명들은 성경에서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요단 동편의 중부 고원지역에 위치한 길르앗 지방과 갈릴리 지역이 첨가된 것은 그 당시 북(北) 이스라엘의 북쪽 지역에 미친 재난의 영향이 얼마나 컸는가를 짐작케 한다. 그리고 디글랏 빌레셀은 이 지역들을 장악함으로써 이스라엘의 북쪽과 갈릴리 방향인 서부지역을 쉽게 얻을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하솔을 장악함으로 인해 다메섹까지의 진출이 용이하게 되었다.

앗수르로 옮겼더라. 앗수르의 공식적인 기록들에는 포로에 관한 구체적인 언급이 없다. 그러나 이와 같이 정복자로서 포로들을 잡아가는 것은 앗수르의 정책상 정당한 것이었다(M. Cagan). 아마도 앗수르는 대외적인 명예를 생각해서 포로에 대한 기록을 생략한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본 구절을 역사적으로 증명해 주는 역대서에는 포로로 끌려간 사람들이 속한 지명들이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어 이 사실을 확인시켜 준다(대상 5:26). 또한 그후 앗수르의 살만에셀 5세(Shalmaneser V, B.C. 727-722)에 의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두 번째로 포로로 잡혀갔는데 이는 모두 신 28:36의 성취이다(Wycliffe).

 

15:30 요담 이십 년에. 사 7:1-8:8을 보면 베가와 아람, 즉 소위 아람과 에브라임이 동맹하여 남 왕국 왕 요담의 후계자인 아하스와 싸웠다(16:5). 그런데 본 절에서 베가가 요담 20년에 죽임을 당했다는 것은 아무래도 이상하다. 그리고 요담이 예루살렘에서 16년을 통치했다는 33절의 기록과도 이 연대는 맞지 않는다. 이에 대하여 딜리(Thiele)는 베가 17년부터 아하스와 요담이 섭정한 것으로 본다(16:1). 그렇게 되면 요담과 아하스는 4년을 넘게 섭정을 했다는 것인데 이에 대한 성경적인 증거는 매우 희박하다. 그러나 간접적인 증거로 아람 왕 르신(B.C. 750-732)과 북(北) 이스라엘 왕 베가가 동맹하여 유다를 친 전쟁이 마치 요담과 아하스 때 두 번 있었기 때문에(15:37, 16:5) 두 왕의 섭정 기간 동안에 치루어진 전쟁이라 보면 된다. 한편 본 절에는 단순히 ‘호세아가 반역하여 베가를 죽이고 왕이 되었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앗수르의 비문에 나타난 내용과 공식 문서들을 참고할 때 당시 북(北) 이스라엘의 상황은 디글랏 빌레셀 3세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즉 디글랏 빌레셀은 북(北) 이스라엘의 내정까지 깊이 관여해 베가를 죽이고 호세아를 왕으로 세웠던 것 같다. 그러므로 디글랏 빌레셀이 호세아의 반역을 승인한 것으로 추측된다(Rawlinson, Wycliffe).

 

15:31 없음.

 

15:32 베가 제이년에 … 요담이 왕이 되니. 27절에서 베가가 요담의 아버지 아사랴의 52년, 즉 그의 마지막 통치 연도에 왕이 되었다는 기록과 본 절의 연대기는 정확히 일치한다. 그리고 ‘요담’은 여호와의 이름과 ‘안전한, 경건한, 순결한’이란 의미의 ‘타맘’이라는 동사가 합성된 형태로서 ‘여호와는 완전하시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한편 그는 웃시야(아사랴, B.C. 791-739)와 공동 통치했을 뿐만 아니라 아하스(B.C. 735-716)와도 공동으로 섭정했다는 일부의 주장(Thiele, Wycliffe)을 받아들인다면 그는 실제로 므나헴 2년부터 통치한 것이 된다(17절).

 

15:33 십육 년간 다스리니라. 여기서 말하는 16년은 요담이 그의 아버지 아사랴(혹은 웃시야)와 함께 섭정하기 시작한 해부터를 말한다(Rawlinson, 대하 26:23, 27:1). 그리고 요담의 통치 16년은 북(北) 이스라엘 왕 베가 17년에 해당한다(16:1).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여루사라. 여기서 ‘여루사’라는 이름은 매우 특이하다. 왜냐하면 이것은 ‘루사’의 여성 능동 분사 형태인데 성경에서는 이러한 동사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레이(Gray)는 ‘예루살’이 이 말의 본래 형태라고 본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요세푸스는 그녀를 ‘예라사’라고 불렀고 역대기 기자도 본서와 동일하게 기록하고 있어(대하 27:1) 그레이의 견해를 의심케 한다.

사독의 딸이더라. 사독이 제사장이라는 것이 확실하다면 요담은 제사장 계열과 왕족 계열의 맥을 동시에 이은 자임이 분명하다. 한편 34절을 보면 요담에 대한 평은 그의 아버지 웃시야에 비해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 그러나 대하 27:2의 기록으로 미루어보아 그가 제사장의 딸이라고 간주되는 그의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다. 왜냐하면 그는 부친보다는 성전의 규례를 잘 지켰기 때문이다(34절 참조).

 

15:34 웃시야의 모든 행위대로. 본 절과 평행 구절인 대하 27:2에서도 요담의 행위에 대해 동일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역대기에서는 그가 ‘여호와의 전에는 들어가지 않았다’는 사실을 추가하고 있어 불경건한 행동을 하지 않았음을 나타내 준다.

 

15:35 여호와의 성전의 윗문을 건축하니라. ‘윗문’은 안마당, 혹은 윗마당의 북쪽에 있는 문으로서(대하 27:3, 겔 9:2) 바쳐지는 제물을 잡는 곳이다. 그러나 이 문은 북쪽 지방으로부터의 침략을 방어할 목적으로 세워진 듯하다. 그리고 이 문은 예루살렘 성전의 북쪽문을 말하는데 일명 ‘베냐민의 윗문’이라고도 했다(슥 14:10). 한편 대하 27:3을 보면 요담이 오벨 성을 많이 증축했을 뿐만 아니라 유다의 성읍을 많이 건축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그가 수도를 요새화하고 성읍을 건축한 것은 당시의 혼란한 국제 상황을 반영하는 것임과 동시에 여호와께 대한 그의 신앙의 자세를 반영하는 것이다(대하 27:6). 한편 역대기 기자는 이 뿐만 아니라 요담과 암몬과의 전쟁에 대해서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대하 27:5).

 

15:36 없음.

 

15:37 아람 왕 르신과 북 왕국 왕 베가와의 동맹은 사 7:1-8:8에 잘 나타나 있다. 그런데 역대기 기자는 암몬과의 전쟁은 언급하면서도(대하 27:5) 본 절과 같은 전쟁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는다. 한편 이사야의 기록을 보면 베가와 르신은 다브엘의 아들을 유다의 왕위에 앉혀서 유다를 자신들의 동맹에 가담시키려고 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 일은 결국 성공하지 못했는데 이 사건 때문에 이사야 선지자는 르신과 베가를 저주했다(사 7:7-9). 그리고 이러한 역사적 배경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임마누엘’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라는 믿음에 대한 예언이 주어졌다(사 7:10-14). 한편, 아람이 다브엘의 아들을 유다의 왕위에 앉히려고 한 것은 그를 유다의 왕위에 세움으로 유다의 직접적인 도움을 받아 앗수르의 압박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르신과 베가에 대한 이사야 선지자의 경멸과는 달리 본서 기자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용하여 유다를 징벌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저자들의 기록 관점을 나타내 주는 것이다. 한편 르신과 베가가 동맹하여 유다를 공격한 것이 두 번인지(16:5) 아니면 한 번인지, 그리고 한 번이라면 왜 같은 사건을 두 번 기록하였는지에 대해서는 대하 27:5 주석을 참조하라.

 

15:38 없음.

Articles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