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 주석, 열왕기하 1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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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 요아스 제이년에. 본 절에서도 13:1과 마찬가지로 심각한 연대기 문제가 학자들 간에 제기되고 있다. 즉 북(北) 이스라엘 왕 여호아하스의 아들 요아스는 유다 왕 요아스의 37년에 왕위에 올랐다(13:10). 그렇다면 유다 왕 요아스가 40년간 통치하였으므로(12:1) 요아스의 아들 아마샤는 최소한 북(北) 이스라엘 왕 여호아하스의 아들 요아스의 제4년 또는 제5년 이후에 왕위에 오른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런데 본 절에는 이를 요아스 제2년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학자들 간에는 크게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 중복되는 2-3년 간은 유다의 요아스와 그의 아들 아마샤의 공동 섭정 기간이라는 것이다(Hobbs, Gray). 그러나 이것은 전체 문맥에 대한 설명에서는 용이하지만 분명한 성서적 근거, 혹은 역사적 기록이 없으므로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2) 유다 왕 요아스의 통치 기간은 실제로 만 39년이며 40년 초에 죽었다. 그리고 북(北) 이스라엘의 요아스는 유다 왕 요아스의 37년 후반에 왕위에 즉위하였다. 즉 이것은 왕의 즉위가 니산월(가나안식 옛 이름은 아빕월, 종교적으로는 제1월) 한 두 달 전에 있었고 왕의 죽음이 니산월 한두 달 후에 있었다고 볼 때 그 한두 달을 1년으로 계산하기 때문에 이러한 차이가 나는 것이다(Keil & Delitzsch, Vol. 3, p. 379). 이렇게 본다면 요아스의 아들 아마샤가 왕위에 오른 것은 이스라엘의 요아스 제2년이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한편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스라엘의 후반기 연대가 이렇게 많은 혼란을 불러 일으키게 된 것이 전반기의 연대 계산법과는 후반기의 연대 계산법이 상당히 달라졌기 때문이라고 본다(E. R. Thile, Mysterious Number, p. 103-124).

 

14:2 여호앗단. 요세푸스는 이를 ‘요다데’(Jodade)로 부르나 70인역(LXX)에서는 이보다 더욱 정확하게 ‘요아딤’(Joadim)으로 지칭한다(Rawilnson). 그런데 이 이름의 뜻은 ‘여호와는 기쁨’이라는 의미이다.

 

14:3 그의 조상 다윗과는 같지 아니하였으며. 역대기에는 이 부분을 ‘온전한 마음으로 행하지 아니하였더라’(대하 25:2)고 기록하였다. 그런데 아마샤 이전의 유다 왕들 가운데 ‘다윗과 같이’ 온전한 마음으로 행하였다는 칭찬을 받은 왕은 단지 3대 왕 ‘아사’뿐이었다(왕상 15:11). 한편 아마샤는 비록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지만 여러가지 부족한 점이 있었다. 즉 그는 온전한 마음으로 행치 않았을 뿐만 아니라 말년에는 우상 숭배에 빠지기까지 했다. 이처럼 신앙 생활에서 ‘적당주의’는 통용될 수 없다(계 3:15).

그의 아버지 요아스가 행한 대로. 아마샤와 그의 부친 요아스가 행한 행위의 공통점은 다음과 같다. (1) 둘 다 처음에는 여호와께 열심이 있었다. (2) 그러나 나중에는 우상을 숭배하였다(대하 24:18, 25:14). (3) 양자 모두 선지자들의 경책을 거부하였다(대하 24:19, 25:16). (4) 두 사람 공히 모반자들에 의해 피살당했다(19절, 12:21). (5) 또한 둘 다 적군에게 성전의 많은 보물들을 내주었다(14절, 12:18).

 

14:4 본 절의 주석에 관해서는 12:3의 주석을 참고하라.

 

14:5 나라가 그의 손에 굳게 서매. 이 말은 다음 두 가지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1) 왕상 2:46에서 솔로몬의 번영기에 쓰였던 것처럼 정권이 확립되었음을 의미한다(15:19, Rawilnson, Keil & Delitzsch). 아마샤는 집권 초기에 부친 요아스를 암살한 세력(12:20, 21)에 의해 여러가지로 방해를 받았을 것이다. 이러한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호와 앞에서 정직히 행해 정권을 확립할 수 있었다. (2) 아마샤의 통치권 확립과 더불어 국력이 신장되었음을 의미한다. 사실 유다는 아하시야(8:25-29, 9:27, 28, 10:12-14)와 악녀 아달랴의 집권(11:1-3), 아람 왕 하사엘의 공격(12:17, 18, 대하 24:23, 24) 등으로 약해질 대로 약해졌었다. 그러나 아마샤는 에돔과 싸워 대승을 거둠으로 국력 신장의 계기를 잡았다. 이 뿐만 아니라 본 절 전체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사실을 함축하고 있다. (1) 아마샤의 부친 요아스가 죽은 후 혼란기가 있었다(12:19-21)는 사실을 함축한다. 실로 정당치 못한 방법으로 정권의 교체가 이뤄질 때는 언제나 혼란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부왕(父王)이 살해되었기 때문에 그 혼란은 더욱 심각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본 절에서도 그러한 혼란기를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2) 요아스를 살해한 자들과 모반자들은 아마샤가 제거하기 전까지도 여전히 어떤 주요 관직에 있었음을 가리킨다. 즉 그 모반자들은 요아스의 행위에 대한 복수나 나라를 안전하게 하기 위해 모반을 한 것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그들의 정권욕에 의한 것이었음을 가리킨다. 따라서 비록 역대기 기자의 관점으로 볼 때에는 요아스가 여호야다의 아들을 죽인 그 피로 인하여 암살을 당한 것이지만(대하 24:25) 본서 기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들의 모반이 순수한 목적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14:6 모세의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본 절은 신 24:16을 인용한 것이다. 그런데 그 성경구절의 내용은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출 20:5)라는 말씀과 배치될 뿐만 아니라 수 7:1-26과 왕하 9:26에서와 같이 아버지의 죄로 인하여 자식들이 죽임을 당한 경우와도 상충된다. 이것은 본서 기자가 신명기를 얼마나 존중했는가를 보여줌과 더불어 비평주의자들이 신명기 후기 편집설을 주장하는 것(Riehm)을 뒤집는 확실한 증거가 된다. 왜냐하면 본 절의 기록은 요시야 왕이 신명기를 발견하기 약 200년 전의 것이기에 신명기가 요시야 왕에 의한 편집이거나 포로시대 이후의 편집이라고 하는 그들의 주장과는 전혀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Rawilnson). 한편 고대 동양의 전례에 의하면 반역자를 사형에 처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의 자식들까지도 죽였다(Wycliffe).

 

14:7 소금 골짜기. ‘소금 골짜기’의 위치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두 견해가 있다. (1) 오늘날의 ‘나할 말하타’(Nahel Malhata)로서 네게브 사막에 위치한 아랏(Arad)의 남쪽 지역이다. 그런데 이 곳에서 아마샤 왕이 에돔 사람을 격퇴시켰다는 것이다(Y. Aharoni, Interpreter’s Dictionary of the Bible). (2) 남 아라바의 사해 바다 남쪽 지역으로서 페드라 서쪽 약 30 km 지점에 있는 ‘아일 밀흐’라고 한다. 그런데 이곳이 오늘날의 ‘에스 삽카’(Es Sabkah)일 것이라는 견해이다. 그런데 이 두 견해 중에서 후자에 언급된 ‘에스 삽카’는 ‘카슴 우스툼’(Khasm Usdum)이라는 소금으로 된 능선으로 둘러 쌓여 있어서 ‘소금 골짜기’라는 히브리어 명칭에 잘 어울린다(Rawilnson). 그러나 역시 ‘소금 골짜기’라는 명칭에 정관사가 없어서 그 위치는 불분명하기만 하다. 한편 다윗은 바로 이곳에서 에돔과 싸운 적이 있는데(삼하 8:13) 그 싸움 이후로 에돔은 이 곳에 요새를 만들었다(Hobbs).

셀라를 취하고. 히브리어 원문에서는 ‘셀라’ 앞에 관사가 붙어 있는것으로 보아 이곳이 에돔의 수도를 가리키는 별칭인 것 같다(Keil, Rawilnson). 그런데 70인역(LXX)에서는 이곳을 오늘날의 ‘페트라’(Petra) 또는 ‘움바야라’(umm-Bayyara)로 보고 있다(S. Cohen, Interpreter’s Dictionary of the Bible, Vol. 4 p. 262-263). 그러나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셀라’는 ‘부세일’(Buseir)의 북서쪽에 위치한 오늘날의 ‘에스 셀라’(es-Sela)인 것으로 밝혀졌다(A. F. Rainey). 그리고 이 곳은 ‘바위’라는 의미의 지명(地名)으로 아라바 광야에서 에돔의 서쪽으로 통하는 좋은 길목이 된다. 한편 본 구절과 평행 구절인 대하 25:11, 12에서는 아마샤의 군대가 포로 10,000명을 이 바위 꼭대기에서 밀어 떨어뜨려 죽게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욕드엘이라 하였더니. 이 지명(地名)은 ‘하나님에 의해 정복되다’란 의미로 일찍이 수 15:38에서 언급되었으나 여기서 언급한 지명의 위치와는 완전히 다르다. 왜냐햐면 ‘셀라’는 여전히 이사야(사 16:1), 오바댜(옵 3절), 예레미야(렘 49:16) 등의 선지자에 의해서 셀라로 나오는 반면 수 15:38의 ‘욕드엘’은 라가스 근처로 유다 족속의 땅이기 때문이다. 한편 에돔은 에서가 그 조상으로서(창 36:9) 다윗의 지배를 받던 나라이다(삼하 8:13, 14). 그런데 이 에돔은 이스라엘의 요람 왕 때 유다로부터 독립하였다(8:20-22). 아마 에돔은 아람 왕 하사엘이 유다를 괴롭히는 틈을 타(12:7, 18) 유다의 남쪽 변방 지역을 조금씩 차지하려고 했던 것 같다. 그래서 유다의 아마샤는 이 지역으로부터 에돔을 몰아내고 아라바 지역으로 부터의 접근을 막았다(Hobbs, Word Biblical Commentary, Vol. 13, p. 179-180).

오늘까지 그러하니라. 이 말은 본서의 저자가 기록할 당시까지 그러한 상황을 계속적으로 유지했다는 뜻이다. 즉 이 표현은 본서의 저자가 참고한 원사료(原史料)에 나타나 있던 것이 아니라 저자가 본서를 기록하면서 첨가한 말이다(Bähr, Rawilnson).

 

14:8 아마샤가 … 요아스에게 사자를 보내. 대하 25:13을 보면 아마샤가 이스라엘 왕에게 이러한 도전장을 보낸 이유를 알 수 있다. 즉 에돔과의 전쟁 때 고용되었다가 돌려보내어진 이스라엘 군사들의 적대적인 행위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외적인 이유에 지나지 않고(Keil & Delitzsch) 내적 이유는 아마샤가 교만해졌기 때문이다(Wycliffe). 이러한 사실은 아합 이후 이스라엘보다 군사력에 있어서 열세에 있던 유다가 에돔과의 승리로 인하여 아마샤가 교만해졌음을 암시하고 있는(10절) 본문을 통해서 더욱 증명된다.

오라 우리가 서로 대면하자. 문자적으로는 ‘낯과 낯을 마주 대하자’라는 의미로 선전 포고에 대한 완곡한 표현이다. 아합 이후 유다는 계속해서 북(北) 이스라엘의 기세에 눌려 지냈는데 이제 아마샤는 요아스에게 정식으로 같은 지위에서 지내자고 도전한 것이다. 그러나 아마샤는 단순히 정치적인 담화를 원하고 될 수 있는 대로 군사적인 충돌을 피하려고 했던 것 같다(대하 25:17).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북(北) 이스라엘의 요아스왕은 그것을 정식 선전 포고로 받아들였다(Hobbs).

 

14:9 본 절에 나오는 우화는 과거 요담이 세겜 사람들에게 말한 우화와 아주 비슷하다(삿 9:7-15). 일반적으로 비유나 우화는 일상 생활 속에서 일어날 수 있는 소재를 취하여 교훈적인 내용을 풍자적으로 간단하고 명료하게 전달하고자 하는 문학의 한 표현 형태이다. 여기서 가시나무는 유다를, 백향목은 이스라엘을 상징한다. 그런데 가시나무가 갑자기 교만해져서 백향목에게 딸을 달라고 하는 요구는 당시 동등한 신분간이라야 성사될 수 있었던 결혼 풍습에 비추어 볼 때 도저히 있을 수 없는 분수에 맞지 않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가시나무’는 비천한 신분, 불신앙(사 32:13-15), 심판(호 2:6), 고난(잠 26:9)을, ‘백향목’은 의인의 번영(시 92:12), 아름다움(아 1:17)을 상징하기 때문이다(왕상 5:9-11). 그리고 우연히 지나가던 레바논의 들짐승들에게 이 가시나무가 짓밟히고 말았는데 이것은 가시나무인 유다가 백향목인 북(北) 이스라엘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심판을 받아 멸망하게 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요아스의 비유가 유다의 아마샤의 비위를 매우 상하게 했을 것이다.

 

14:10 본 절은 유다가 가시나무와 같이 교만하게 된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아마샤의 도전을 순전히 그의 교만의 탓으로 돌리고 자신의 군사들이 유다 성읍을 엄습하고 3천 명의 사람을 죽이고 물건을 노략한 것(대하 25:13)에 대한 일언 반구(一言半句)의 사과도 없는 요아스의 태도에 대해 아마샤는 더욱 분개하였음이 틀림없다. 한편 본 절에게 ‘마음이 교만하였으니’라는 말은 ‘네 마음이 너를 치켜 올렸다’라는 의미로 교만케 된 아마샤의 심적 태도를 잘 나타내준다.

스스로 영광을 삼아. 문자적으로는 ‘영광을 받아라’, 혹은 ‘그 영광으로 만족하라’는 의미이다. 이는 ‘네가 에돔으로부터 얻은 명성으로 만족하라’(Keil & Delitzsch), 또는 ‘네가 얻은 것으로 자랑을 하고 다른 것으로 위험을 부르지 말라’(Rawilnson)는 것이다.

화를 자취하여. 문자적으로는 ‘당신은 어찌하여 불행을 초래하려고 하는가!’, 혹은 ‘고통이나 전쟁에 끼어들려고 하는가!’이다.

 

14:11 아마샤가 듣지 아니하므로. 화해적인 의미가 아니라 도발적인 의도를 내포한 듯한, 그리고 아마샤를 우롱하는 듯한 소식을 들은 아마샤가 요아스의 경고를 들었을리가 없다.

요아스가 올라와서. 아마샤의 선전 포고를 들은 북 왕국의 요아스는 아마샤가 공격해 오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Bähr) 오히려 남 왕국으로 군사를 이끌고 가서 그곳에서 전쟁을 시작했다. 한편 본 절에서 ‘올라갔다’라는 표현은 히브리어 어근 ‘아라’를 번역한 것으로 ‘오르다, 출발하다, 깨어나다’라는 의미이다. 이는 요아스의 군사가 행군한 지리적 상황을 반영함과 동시에 요아스가 먼저 진영을 갖춰 출발했음을 반영한 말이다.

벧세메스. 수 19:38에 의하면 벧세메스는 유다 땅으로 ‘태양의 궁’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 땅은 예루살렘 서쪽에 위치한 지역으로 헤브론에서 욥바로 가는 도로상에 있다. 그리고 이곳은 오늘날의 ‘아인 셈스’(Ain Shems)와 동일한 곳이다. 요아스가 이 곳으로 올라간 것은 전략적으로 매우 유리한 장소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벧세메스의 고지와 부근에 있는 소렉(Sorek) 계곡은 유다의 중심부를 치는데 매우 유리한 위치가 되었다(Hobbs). 반면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이 직접 공격하기에 매우 험난하고 힘든 곳이었다. 한편, 벧세메스는 납달리 자손들에게 할당된 성읍이었다(수 19:38).

 

14:12 유다가 … 패하여. 대하 25:20에 의하면 아마샤가 패한 것은 우상 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이다.

각기 장막으로 도망한지라. 이것은 군대가 패배했다는 것을 나타내는 역사서의 전형적인 표현이다(삼상 4:10, 삼하 18:17, 왕하 8:21). 이 전쟁은 이스라엘이 둘로 갈라진 이후(B.C. 931, 왕상 11:43-12:20) 처음으로 발생한 북(北) 이스라엘과 남(南) 유다 간의 전쟁이었다. 한편 베가와 아하스 시대에도 또 한 번 이러한 전쟁을 치루었는데(대하 28:6-8), 그 때에는 유다가 지금보다 훨씬 더 크게 참패하였다.

 

14:13 아마샤를 사로잡고. 북 왕국의 공격에 의해 아마샤의 군대가 모두 도망감으로 인해 아마샤는 요아스의 포로가 된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은 후에 아마샤가 모반자들의 공격을 받게 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Hobbs).

에브라임 문에서부터 성 모퉁이 문까지. ‘에브라임 문’은 다른 말로 ‘베냐민 문’이라고 불렸는데(렘 37:13, 38:7, 슥 14:10), 이 문은 예루살렘 성읍 북쪽에 위치해서 베냐민 지파나 에브라임 지파의 땅으로 통하는 통로가 되었다. 또한 ‘성 모퉁이 문’은 옛 성벽의 북서쪽 모퉁이에 위치하였는데(렘 31:38, 슥 14:10) ‘다마스커스 문’의 서쪽이 이에 해당된다(Bähr, Rawilnson). 그 뿐만 아니라 요세푸스에 의해 언급된 ‘탑’이 놓여 있는 자리가 곧 ‘모퉁이 문’이라는 것이다. 한편 이 모퉁이 문은 후에 아사랴(웃시야)에 의해 더욱 견고하게 되었는데(대하 26:9) 느 12:38-43에서 언급된 성벽 보수 공사에서는 이상하게 이러한 사실이 언급되고 있지 않다. 또한 느헤미야서에서 보면 성벽에는 약 13개의 문이 있었으며(느 3:1-31, 12:31-39, 슥 14:10) 이쪽 문에서 저쪽의 다른 문까지는 보통 180-270m 정도였다고 한다(Rawilnson). 이것을 당시 수치로 표현하면 약 400규빗이 된다. 그런데 이 예루살렘 성벽은 후일 히스기야 왕에 의해 기존 성벽보다 조금 북쪽에 다시 건립되었다(대하 32:5). 그래서 새로 건립된 성벽이 ‘제2 성벽’으로 불리고 있다. 또한 이 벽은 헤롯 아그립바 1세에 의하여 다시 좀더 북쪽에 건립되었는데 이것을 ‘제3 성벽’이라고 칭한다(G. A. Smith). 한편 유다 역사가인 요세푸스에 의하면 아마샤가 요아스에게 포위당함으로 인해서 유다 군대가 항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예루살렘 성문을 열어 주었는데 그 결과 이스라엘 군대에 의하여 이같이 비참한 약탈과 파괴를 당했다고 한다. 한편 요아스가 성을 헌 것은 성을 점령했다는 외형적인 표시였다(Bähr).

 

14:14 본서 기자는 아람 왕 하사엘이 유다 왕 요아스 시대에 성전 보물을 뇌물로 받아갔던 일(12:18)과 함께 북 왕국 요아스가 성전 약탈을 한 사실을 중요한 주제로 부각시키고 있다.

볼모로 잡고서. ‘볼모’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베네 하타아르보트’는 ‘교환하다, 담보로 주다’라는 뜻의 어근 ‘아라브’에서 파생한 말로 문자적으로는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의 아들’(Vulgate, obsides)이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이러한 파생형 단어는 본 절에서와 병행구인 대하 25:24에서만 나타난다. 한편 요세푸스에 의하면 당시에는 포로된 왕을 놓아주어 자유를 주는 대신 다른 많은 사람들을 인질로 잡아갔다고 한다. 그러나 이 때에는 아마샤 왕을 놓아주지 않고 그를 볼모로 잡아갔다(13절). 그래서 아마샤는 여호아스(요아스)가 죽은 후 15년간 생존했고, 유다에 돌아와서 그 15년 동안을 다시 다스렸다(17절).

 

14:15 이 구절들은 13:12, 13절과 그 내용 뿐 아니라 서술 방법이 거의 일치한다. 한편 요아스의 죽음과 사적에 대한 기록이 두 번씩 반복된 이유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북(北) 이스라엘의 요아스와 유다의 아마샤와의 관계를 부각시키기 위한 것(17절)으로 보인다(Bähr). 왜냐하면 17절에서 요아스의 죽음 후에 아마샤가 15년을 더 생존한 사실을 저자는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14:16 없음.

 

14:17 북(北) 이스라엘 왕 요아스 제2년에 아마샤가 왕위에 올라(1절) 29년을 치리하였다(2절). 그리고 요아스는 사마리아에서 16년을 치리하였기(13:10) 때문에 아마샤는 요아스보다 15년을 더 산 셈이 된다. 따라서 본 절에 나타난 연대기는 정확한 것이다. 한편 아마샤의 나머지 행적에 관해서는 대하 25장에 에돔과의 전쟁, 우상 숭배, 그리고 선지자로부터 받은 경책 등을 더 기록하고 있다.

 

14:18 없음.

 

14:19 무리가 그를 반역한 고로. 본문 가운데는 무리가 일으킨 반역에 대한 원인이 분명히 나타나지 않는다. 그래서 혹자는 예루살렘 성이 파괴되고 약탈당한 이후부터 아마샤가 죽기 이전까지 약 15년 동안 모반자들이 왕위를 빼앗은 뒤 이때 왕을 죽인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본문 속에서 이에 대한 분명한 근거는 전혀 없다. 한편 또 다른 학자는 모반의 원인이 당시에 흔히 있을 수 있는 왕과 제사장들 간의 충돌에 있었다고 한다(R. de Vaux). 그러나 제사장들이 왕의 진노로 희생당한 예는 있으나 반대로 제사장들이 왕을 시해한 예는 없으므로 그러한 추측은 무리가 있다. 한편 역대기 저자는 아마샤가 피살당한 것은 그가 ‘여호와를 버린’ 때문이라고 한다(대하 25:27). 그래서 어느 정도 후자의 견해를 지지하는 듯하다. 그러나 모반의 원인을 왕과 제사장들간의 충돌로 보기보다는 오히려 아마샤의 패역과 배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Bähr, Keil & Delitzsch).

라기스로 도망하였더니. 아마샤 왕이 라기스로 도망한 것은 그만큼 생명에 대한 위협을 여러 곳에서 받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라기스는 오늘날의 ‘텔 엘 두웨일’(Tellel-Duweir)로서 예루살렘의 남서쪽 약 48 km에 위치한 요새화된 성읍으로 유다에서 두 번째로 큰 도성이 있을 뿐만 아니라(수 12:11) 유다 지파에게 기업으로 준 지역이었다(수 15:39). 한편 이곳이 요새화된 것은 르호보암 때로서 애굽인들을 대항하기 위해서였다(대하 11:9). 따라서 왕은 이곳이 요새화된 성이기 때문에 모반자들로부터 자신을 안전하게 지켜줄 것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왕은 라기스 백성들로부터 보호를 받지 못하고(Wycliffe) 자객에 의해 살해되었다.

 

14:20 모반자들은 격식을 갖추어 아마샤 왕의 장례를 치루었던 것 같다(Hobbs). 왜냐하면 모반자들은 이렇게 함으로써 (1)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한 것으로 가장하고, (2) 백성들로부터의 비난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말에 실어다가. 히브리어 원문은 ‘그 말들 위에’, 혹은 ‘말에 올려서’라는 의미이다. 그것은 아마샤가 라기스로 도망할 때 사용한 왕실 마차에 실어서 예루살렘에 왔음을 가리키는 것이다(Keil & Delitzsch, Rawlinson).

다윗 성. 이곳은 족장 시대(당시에는 살렘으로 불리워짐)와 가나안 시대부터 있던(창 14:18, 시 76:2) 시온의 요새이다(삼하 5:7). 이 성은 동쪽의 기드론 시내와 서쪽의 두로베온 계곡에 있는 급한 경사의 능선을 점유하면서 북쪽 힌놈 골짜기까지 닿아 있다. 그런데 이 성은 다윗이 B.C. 1003년에 여부스 족으로부터 빼앗아 자신의 이름을 붙이고 다윗 왕국의 수도로 삼은 곳이다(삼하 5:9). 그리고 이곳에 장지(葬地)도 마련해 놓고 있어서 다윗(왕상 2:10)과 솔로몬(왕상 11:43)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유다 왕(대하 12:16, 14:1, 16:14, 21:1 등)과 귀인(貴人)들도 묻힌 곳이다(대하 24:16).

장사하니라. 근동 지방에서는 일반적으로 죽은 자를 사망 당일에 매장했던 것 같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시체 처리 방법은 주위의 이방 민족들과는 매우 달랐는데 그 개괄적인 순서는 다음과 같다. (1) 가족들이 시체에 입을 맞춤(창 50:1). (2) 시체를 물로 깨끗이 씻고 염을 함. (3) 시체를 정한 세마포로 운반함(삼하 3:31, 눅 7:14). 한편, 시체를 미이라로 만드는 방법과 시체를 불로 태워 화장하는 풍습은 유대인에게서는 대체적으로 찾아 볼 수 없다.

 

14:21 유다 온 백성이 … 왕으로 삼으니. 본 절과 같이 왕을 옹립하는 데 유다 온 백성이 모두 관여했다는 표현은 매우 생소하다. 그렇기 때문에 학자들간에 ‘유다 온 백성’에 대한 해석을 두고 논란을 벌이고 있다. 이에 대한 여러 해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당시 온 백성이 떠들썩했음을 의미한다(Rawilnson). (2) 유다의 모든 백성이 환호했음을 뜻한다(Keil). (3) ‘유다 백성’은 유다의 모든 군대를 가리킨다(Thenius, Hobbs). 그런데 왕을 시해한 모반자들이 하는 일에 온 백성이 동조했다고 볼 수는 없으므로 (1)과 (2)의 해석은 온당치 못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래서 본 절에 나타난 ‘온 유다 백성’이라는 말은 ‘모반한 군대’를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따라서 아마샤는 군대의 봉기로 폐위되고 아사랴가 왕위에 오르게 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한편 본 절의 ‘아사랴를’은 히브리 원문에는 ‘아사랴를 취하여’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서 ‘취하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이크후’는 모반자들이 어떤 특별한 목적으로 아사랴를 택한 것을 의미한다(Bähr, Hobbs). 즉 이것은 12:21절과는 같이 다윗의 가문에서 왕을 세웠다는 사실을 암시한 것이다.

아사랴. 유다 왕 웃시야의 이름으로 ‘아사랴’와 ‘웃시야’ 이 두 이름이 계속 혼합되어 사용되었다. 이에 대한 설명은 학자들에 따라 무척 다양하다. (1) 두 이름의 히브리어 자음이 오직 하나만 다르다는 데에 착안하여 ‘웃시야’는 필사자의 실수로 인해 ‘아사랴’에서 자음 ‘레쉬’가 탈락된 형태이다. 그러나 이 견해는 타당하지 않다. 왜냐하면 본서와 역대하에서는 이 두 이름이 병행되어 나오기 때문이다. (2) ‘아사랴’는 왕명이며 ‘웃시야’는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후 붙여진 별명이다. (3) 앞의 주장과 반대로 ‘웃시야’가 왕명이고 ‘아사랴’는 본명이다. (4) 이 두 이름이 무차별하게 함께 쓰였다(Keil). 히브리어로 ‘아사랴’는 ‘여호와는 도움이 있다’를, ‘웃시야’는 ‘나의 힘은 여호와시다’를 뜻하는데, 전자는 본서와 대상에서만 9번 나오고 후자는 본서와, 역대하, 호세아, 아모스, 스가랴 등에서 모두 22번 나온다. 이렇게 쓰여진 회수로 미루어 볼 때 보다 많이 사용된 ‘웃시야’는 공식적인 왕명이고 ‘아사랴’는 본명이 아닐까 생각된다. 특히 역대의 많은 왕들이 등극한 이후 그 이름을 바꾸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추측의 개연성은 더욱 높아진다(삼하 12:24, 25).

 

14:22 엘랏을 건축하여. 평행 구절인 대하 26:6에서는 아사랴(웃시야)가 건축한 성읍이 여럿 나오는데 유독 본 절에서는 ‘엘랏’만을 언급하고 있는 것은 그 ‘엘랏’이 갖고 있는 지정학적인 위치와 그 성의 기능의 중요성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엘랏’은 ‘작은 숲’이란 의미의 지명(地名)으로 솔로몬이 이용하였던 에시온게벨 항구 근처(왕상 9:26)에 있는 현재의 아카바만에 위치한 곳이다. 그리고 엘랏은 아카바만에 있는 가장 오래되고 중요한 항구들 중의 하나였기 때문에 무역과 상업에 관심이 있는 여러나라들이 탐을 냈었다. 그래서 한 때는 에돔의 점령하에 있었다(8:22). 그리고이 엘랏이 유다의 웃시야 왕에 의해 남 왕국의 영토가 된 후에도 아람과 앗시리아의 여러 왕들에 의해 점령되기도 한 사실(16:6-9)을 보더라도 그곳이 얼마나 경제적인 요지(要地)인가를 짐작할 수 있다. 한편 본 절에 나타난 바와 같이 ‘엘랏을 건축한다’는 표현은 그곳을 ‘수축하거나’, 아니면 문자 그대로 ‘건축하는 것’을 말한다.

복귀시켰더라. 이 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에쉬베하’는 ‘돌아가다, 기뻐하다, 지불하다’는 뜻의 ‘슈브’에서 유래한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용어가 여기에서는 엘랏의 건축에 대해 ‘기쁜 마음을 갖고 자신의 땅으로 삼았음’을 가리킨다.

 

14:23 여로보암이 아마샤 15년에 즉위했다는 것은 남(南) 유다 왕 아마샤(B.C. 796-767)가 29년간 통치했으므로 북(北) 이스라엘의 요아스보다 아마샤가 15년 더 살았다는 17절의 진술과 일치한다. 그러나 여로보암(혹은 여로보암 II세, B.C. 793-753)이 41년간 통치했다는 것은 그의 아들 스가랴(B.C. 753-752)가 아사랴(B.C. 791-739) 38년까지는 왕이 되지 않았다는 15:8의 진술과 다르다. 이에 대하여는 15:8의 주석을 참조하라. 한편 여로보암 II세는 이스라엘 왕들 중에서 영토 확장에 가장 성공적인 통치자였다. 이스라엘과의 극성스러운 경쟁국이었던 아람이 앗시리아의 아다드니라리 III세에게 침략당하여 수도 다메섹까지도 정복되는(B.C. 805년) 틈을 타서 여로보암 II세는 이스라엘의 잃은 땅을 모조리 되찾았다.

 

14:24 느밧의 아들로서 북(北) 이스라엘의 초대 왕인 여로보암과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여로보암 II세)은 우상을 숭배하는 일과 하나님을 배반하는 일에 있어서 그 맥을 같이 한다. 한편 여로보암 II세의 죄악이 사회에 미치는 결과로 인하여 그는 아모스와 호세아 선지자에게 맹렬한 비난을 받게 된다(암 2:6, 5:27, 6:14).

 

14:25 가드헤벨. 이것은 ‘우물가의 포도주틀’이란 의미의 지명인데 이곳은 스불론 지파의 한 성읍으로서 다볼 산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다(수 19:13). 또한 이곳은 나사렛 동북쪽 4.8 km 지점으로 요나의 무덤이 이곳에 있다고 전해진다(Rawlinson). 한편 오늘날에는 여기를 ‘엘-메세드’(el - Meshed)라고 부른다.

아밋대의 아들 선지자 요나. 선지자 ‘요나’에 관한 기록은 ‘요나서’ 외에 오직 여기에만 나타나 있다. 그래서 이 구절을 통하여 요나 선지자의 활동 시기를 추측할 수 있다. 그는 B.C. 780년경의 인물(Wycliffe), 즉 B.C. 793-753(?)에 활동했던 사람으로 호세아, 아모스와 동시대인이며 미가보다는 앞선 시대의 사람이었다. 그러나 본 절에 기록된 요나로 하신 말씀이 ‘요나서’ 본문에는 들어 있지 않다.

이스라엘 영토를 회복하되. 하란(M. Haran)의 말에 따르면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영토를 확장한 것은 그의 통치 후기였다고 한다.

하맛 어귀에서부터. ‘하맛 어귀’라는 지명은 구약에서 자주 언급된다(민 13:21, 34:8, 수 13:5, 삿 3:3, 왕상 8:65). 그리고 솔로몬 시대에는 이곳이 이스라엘의 북쪽 변방에 해당되었기 때문에 이 지역을 하맛의 남쪽으로 간주해 일반적으로 유프라테스 강과 가까운 곳으로 보고 있다.

아라바 바다까지. 여기서 말하는 바다는 ‘사해 바다’이다. 그리고 ‘아라바’(Arabah)라는 지명은 요단 계곡에서 홍해의 아카바만에 이르는 저지대를 가리킨다(신 3:17, 수 3:16, 12:3). 그런데 이때에 여로보암이 확장시킨 이스라엘의 지경(地境)은 흡사 다윗의 왕국 절정기의 경계선과 같다. 한편 암 6:14에서도 이때의 경계선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14:26 여호와께서 … 보셨고. 본 절은 13:5과 출3:7, 신 26:7과 연관해서 살펴볼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이스라엘의 극심한 고난에 대한 정확한 당시의 배경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본 절에 기록된 열왕기서 기자의 주석이 뜻하는 바는 명백하게 나타난다. 즉, 여호와의 구원은 환난 중에 있는 이스라엘을 불쌍히 여기시는 그분의 긍휼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은 아직까지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겠다고 하신 적이 없는 하나님의 언약 때문이다(사 55:3, 렘 32:40, 겔 16:60).

 

14:27 천하에서 없이 하겠다고도 아니하셨으므로. 이것은 13:23에 언급된 언약의 다른 표현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본서 기자의 이러한 언급은 그가 신명기적 역사관에 충실하였다는 증거가 된다(G. Von Rad).

여로보암의 손으로 구원하심이었더라. 우리는 여기서 우상 숭배자이며 여호와 앞에서 범죄한 여로보암이 어떻게 이스라엘에 번영을 가져오게 되는지에 대한 이유를 발견할 수 있다. 즉 그것은 여로보암의 개인적 능력이나 그를 보좌하는 신복들의 탁월한 술수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여로보암을 통해 죄인들인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나타내셨기 때문이다(호 5:15, 히 10:13, 벧전 3:20). 그러나 이러한 일 때문에 하나님께서 여로보암이 행한 죄를 묵과하셨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Bähr). 왜냐하면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왕의 악행으로도 결코 영향을 미칠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신분과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그분의 정한 시기에 가장 올바른 공의로서 나타나기 때문이다(시 103:6, 사 45:21, 습 3:5).

 

14:28 학자들은 다음과 같은 문제를 제기한다. (1) 다윗 시대 이후로 다메섹과 하맛이 이스라엘에 복속된 적이 없는데 여로보암이 이 두 성읍을 ‘회복’하였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2) 왜 여기서 이스라엘과 유다가 동시에 언급되고 있는가? (3) ‘이스라엘에 돌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베이스라엘’에서 전치사 ‘베’의 정확한 의미는 무엇인가? (4) 이스라엘이 이와 같이 동북쪽으로 영토를 크게 확장할 수 있었던 역사적 배경은 무엇인가? 이에 대한 학자들의 해석을 몇가지 열거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다윗과 솔로몬이 정복했던(삼하 8:6, 왕상 11:24, 대하 8:4, 9:26) 다메섹과 하맛(당시에는 유다 지파에 속하였음)을 여로보암이 회복한 것이다. 그리고 ‘다메섹’과 ‘하맛’은 좁은 의미에서의 ‘성읍’이 아니라 ‘나라 전체’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다메섹은 아람을 지칭한다고 한다(Keil, Rawlinson, Bähr). (2) 이것은 북(北) 이스라엘과 남(南) 유다가 차지한 영토를 합병해서 기록한 것이기 때문이다(Haram, Hobbs). 이에 대한 간접적인 증거로서 여로보암과 동시대인인 유다의 웃시야(아사랴)가 솔로몬 시대에 버금가는 번영을 이루었던 사실을 들 수 있다(대하 26:6-15). 그리고 당시의 국제 정세를 보면 앗수르는 앗술 니라리 5세(Assur-nirari V, B.C. 754-745)의 치하에서 국력이 약화된 사실을 꼽을 수 있다. 또한 영토 확장을 위한 전투도 이스라엘과 상관없는 남동쪽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당시 이스라엘로서는 적절한 상황과 여건을 맞았던 것이다(Hobbs). 그러나 (1)과 (2)의 해석이 서로 상치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상기(上記)된 두 가지의 견해는 서로 상호 보충적인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본서 기자가 본문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여로보암의 활약상이기 때문이다.

 

14:29 스가랴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스가랴는 예후의 4대손으로서 여호와께서 예후에게 약속하신 예언(10:30) 즉 예후의 자손이 이스라엘의 왕위를 이어 사대를 지나리라고 하신 말씀이 여기서 성취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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