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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 아합의 아들 칠십 명. 성경에서 70명의 아들을 언급한 곳은 여기 이외에도 여러 곳이 있다(삿 8:30, 9:2-56, 12:13-14). 여기에 언급된 ‘아들’이란 말은 히브리어 ‘바님’인데 ‘아들’을 뜻하는 ‘벤’의 복수형이다. 히브리어의 아들이란 표현은 손자들이나 후손들까지 포함하는 ‘자손’을 말한다. 아합이 죽은 지 약 14년 정도 되었으므로 이 가운데는 아들보다 손자들의 수가 더 많았을 것이다(Rawlinson).

이스르엘 귀족들. 본 절에서 이스르엘 귀족들을 언급하고 있는 사실에 대하여 많은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왜냐하면 (1) 어떻게 이스르엘 귀족들이 사마리아에서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는가 하는 것(Pulpit Commentary)이고, (2) 이스르엘이란 지명 때문이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이스르엘의 귀족은 사마리아에 있을 가능성이 희박하기 때문이다. 설사 이스르엘 귀족들이 사마리아에 있었다고 하더라도 사마리아에서 그들은 최고의 관리가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편 여기서 ‘귀족’은 히브리어 ‘사레’인데 이 말은 군사적인 용어로 많이 사용되던 것으로서(9:5 주석 참고) 대체적으로 ‘장로’(왕상 21:8), ‘군대의 장교’(수 5:15, 대상 12:23), ‘귀족이나 귀인’(민 22:8, 사 40:23), ‘주권자’(왕상 14:7) 등을 가리킨다. 그러나 아마도 여기서는 아합 왕가의 궁내 대신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9:32, Keil & Delitzsch). 따라서 이들은 요람 왕이 죽은 후 사마리아 성으로 도망간 자들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Hobbs). 그러나 이들이 사마리아에서 아합 가의 편지를 직접 받을 수 있을 만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한편 70인역(LXX)과 벌겟역(Vulgate)은 ‘이스르엘’ 대신 ‘사마리아’로 번역하여 본 절의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 즉 이들은 이스르엘 귀족이 아니라 사마리아 성의 귀족이라는 것이다. 또 다른 주석가들은 ‘이스르엘’을 ‘이스라엘’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두 단어는 모음을 붙이기에 따라 발음이 달라지기 때문에 충분히 가능한 주장이라고 볼 수 있다(Bähr, Keil). 왜냐하면 사마리아 성의 귀족을 ‘이스라엘 귀족’이라고 부르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이다.

곧 장로들과. 제임스왕역(KJV)은 ‘이스르엘 귀족들’과 ‘장로들’을 구분하여 표기하고 있으나(the rulers of Jezreel, to the elders) 장로는 귀족과 동일한 의미로 쓰여진 경우도 많다(G. Rawlinson, 왕상 21:8, 13).

아합의 여러 아들을 교육하는 자들에게. 여기서 ‘교육하는 자들’의 히브리어 ‘하오므님’은 ‘양육자’(룻 4:16) 또는 ‘후원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이를 아합의 자손들을 위한 양부나 후견인(Keil & Delitzsch)으로 보기 보다는 ‘교육을 맡은 가정 교사’ 정도로 이해해야 한다. 요세푸스는 이 말을 ‘선생들’이라고 번역하고 있어서 이들이 가정교사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음을 강조해 준다.

 

10:2 히브리어 원문은 본 절을 ‘웨아트’, 즉 ‘그런데’(and now)라는 편지 용어로 시작하고 있다(5:20-27). 그리고 본 절에 기록된 편지의 내용에는 많은 풍자가 담겨 있으며 냉소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즉 예후는 그들이 소유한 병거와 말, 견고한 성과 병기를 새삼스럽게 강조하면서 이처럼 군사적으로 훨씬 유리한 입장에 있는 너희들이 겁내지 말고 자신을 쳐 보라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경멸의 뜻을 담은 도전장임과 동시에 자신의 혁명에 대해 사마리아에 있는 귀족들의 생각이 어떠한지 떠보려고 한 것이기도 하다.

견고한. ‘잘라내다, 요새화하다, 벽으로 막다’란 뜻의 히브리어 ‘바차르’에서 파생한 ‘미베차르’를 번역한 말이다. 이 말은 높고 요새화되어 도저히 접근할 수 없는 상태를 묘사한 것이다.

 

10:3 너희 주의 집을 위하여 싸우라. 예후는 지금 검투 시합(삼하 2:11-17)으로 사태를 정리하고 마무리할 것을 제안한다. 한편 검투 시합은 고대 근동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일반적인 방법이었다. 그런데 잘못을 한 측은 죄책이나 두려움 때문에 상대에게 곧 항복하였다(Wycliffe Commentary, p. 350).

 

10:4 없음.

 

10:5 왕궁을 책임지는 자 … 당신의 종이라. 문자적으로 ‘집을 다스리는 자’라는 뜻으로서 ‘궁전의 제반 업무를 총괄하는 행정 관리’이다. 예로 사 22:15에 나오는 셉나는 유다의 왕궁을 책임지는 자였다. 그리고 ‘성읍을 책임지는 자’는 성을 다스리는 자로서 ‘성의 제반 업무를 총괄하는 행정 관리’이며 오늘날의 시장과 비슷한 계급이다(왕상 22:26). 한편 ‘우리는 당신의 종’이라고 귀족들이 표현한 것은 자신들의 항복 의사를 완곡하게 표현한 것이다. 즉 그들은 요람의 체제를 지지했었음에도 불구하고 두려움 때문에 예후에게 대항할 의사가 없었다.

 

10:6 예후의 두 번째 편지 속에서 첫 번째 편지를 그들에게 보낸 예후의 속셈이 나타나고 있다. 그것은 예후가 사마리아 성에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생각을 알지 못하고서는 절대로 그곳에 있는 아합 왕가의 후손들을 멸절시킬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들의 생각을 파악한 예후는 자신의 힘을 전혀 들이지 않고 아합의 자손들을 모두 멸하기 위해 두 번째 편지를 다시 그들에게 보냈다. 그들은 유다와 이스라엘의 두 왕이 예후의 손에 죽은 이 시점에서 예후의 반란에 동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결국 예후의 요구대로 왕자 70인을 죽여 그 머리를 그에게 보냈다.

들으려거든. 이 말은 ‘지적으로 듣다, 동의하다’라는 뜻의 히브리어 ‘샤마’에서 파생한 ‘쇼므임’을 번역한 것이다. 이는 단순히 귀로 듣는 것이 아니라 듣고 순종하는 것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10:7 그들이 … 죽이고. 예후가 적을 포섭하는 수완이 뛰어났음을 보여주고 있다. 즉 예후는 사마리아의 자손들을 본인의 손도 안 대고 그들 보호자의 손을 빌려 처치했다.

 

10:8 두 무더기로 쌓아 … 문 어귀에 두라. 문 어귀 즉 성문 어귀는 공무 집행(왕상 22:10), 공적인 연설 장소(창 34:20), 종교 의식의 거행 장소(행 14:13), 재판이 열리는 곳(신 21:19, 슥 8:16), 말씀을 선포하는 장소(렘 17:19-20), 그리고 백성들이 일반적인 모임을 수시로 갖는 곳이다. 따라서 예후가 왕자들의 머리를 문 어귀에 쌓아 두게 한 것은 단순한 시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1) 자신의 혁명이 개인적인 의도에서가 아니라 보다 높은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임을 나타내려는 것이며, (2) 살육당한 왕자들의 피에 대한 책임이 그 성의 방백들에게 있음을 백성들에게 알림으로써 아합 집에 속한 모든 자를 처형함에 있어서(11절) 무리가 없도록 한 것이다. 한편 원수의 머리를 잘라 많은 사람에게 공개하는 것은 고대 근동 뿐 아니라 동양에서도 유행했던 풍속이다(삼상 17:54, Bähr).

 

10:9 너희는 의롭도다. 예후는 백성들에게 ‘너희는 의롭도다’라고 선포함으로써 백성들의 환심을 사려고 했을 뿐만 아니라 아합 왕가의 사람들이 죽은 것은 그들의 죄악이 극심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다. 또한 자신이 왕자들을 죽이지 않았음을 밝히고 있다. 결국 70 명의 왕자들의 머리를 자른 이 잔인한 살육에 대한 책임은 아합의 집에 속한 방백들과 친구 그리고 제사장에게로 돌아간 것이다. 예후는 이 모든 일을 행함에 있어서 대단히 주도면밀하였다. 왜냐하면 아합에게 속한 모든 남자(9:8)를 완전히 멸절함에 있어서 나라를 혼란스럽게 하지도 않고 백성들을 위로하면서 만족스럽게 일을 처리했기 때문이다. 물론 예후 자신도 70 명의 왕자 살육이 자신의 명령에 의해 된 것임을 조심스럽게 숨기고는 있었다. 그러나 사마리아에 있는 방백들이 그의 명령에 즉시 순종한 것을 볼 때에 이 모든 진행 사항이 하나님의 섭리로 된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10절). 한편 본 절에 나타난 ‘의롭다’란 말은 히브리어 ‘차디크’로서 어떤 범죄에도 가담하지 않은 상태를 가리킨다(Lange Commentary).

 

10:10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 즉 왕상 21:20-24의 예언을 가리킨다. 그리고 본 절에 나타난 예후의 선언은 하나님의 예언은 반드시 성취된다는 확신임과 동시에 백성들에게 지금의 결과에 대해 설득력 있게 논증하는 것이다.

 

10:11 제사장들을 죽이되. 여기에 기록된 제사장들의 죽음은 다소 문제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바알 선지자들의 죽음에 관한 사건은 19-25절에서 따로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제사장들’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코하님’은 일반적으로 ‘고위 관리’라는 의미이다(Bähr, Davidson, 삼하 8:18, 대상 18:17, 왕상 4:5, 욥 12:19). 따라서 이것은 5절에서 언급한 왕궁 책임자나 성읍 책임자 등의 관리들을 가리킨다고 추측할 수 있다.

 

10:12 양털 깎는 집. 이곳은 목자들이 양털을 깎기 위해 일상적으로 모이는 장소인데 여기서 목자들이 모여 회의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Raswhi, Gesenius). 한편 이것은 히브리어로 ‘묶는 집’이란 의미의 ‘베트 에게드’인데 이곳은 오늘날 ‘바이트 카드’(Beit Qad)와 동일한 지명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70인역에서는 이것을 ‘바이다카드’로 번역했는데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 당시에는 이 말이 고유한 지명으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바이트 카드는 제닌(Jenin)의 동북쪽으로 약 7km 떨어진 조그만 마을인데 이스르엘에서 제닌을 거쳐 사마리아로 가는 노상(路上)에서 조금 떨어져 있다(Hobbs).

 

10:13 유다 왕 아하시야의 형제들을 만나. 아하시야의 실제 형제들은 블레셋 사람과 아라비아 사람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대하 21:17, 22:1). 그러므로 여기에 언급된 형제들은 아하시야의 조카들이다(대하 22:8). 그러나 이들은 아하시야의 부하 병사들과 조카들의 무리일 수도 있다(Hobbs). 왜냐하면 본문에 사용된 ‘문안하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리쉘롬’의 어근 ‘샬람’이 피엘 형(Piel: 강조형 능동) 부정사(Infinitive)로 쓰일 때는 ‘복수하다’라는 의미를 가지며, 일반적으로 ‘빚을 갚다’라는 의미도 가지기 때문이다. 또 ‘형제’라는 뜻의 히브리어 ‘아흐’가 ‘동료’ 또는 ‘병사’를 의미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순순히 인사하러 가는 사람들의 수가 42명이나 된다는 것은 이 말이 아하시야의 병사들과 조카들의 무리를 가리킨다는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 따라서 그들은 아하시야의 조카들을 우두머리로 하여 자기들의 왕의 죽음과 그들의 태후 아달랴의 아들들의 죽음에 복수하기 위하여 떠났던 무리들인 것이다. 그러나 양털 깎는 집 근처에 숨어서 예후의 군대에게 기급 공격을 하려다가 오히려 민첩하고 주도면밀한 예후에 의해 발각된 것이다. 한편 이 무리들이 왕궁을 방문하려고 간 시기는 요람이 부상을 입어 누워 있던 때가 아니라 부상에서 회복된 후인 것 같다(Bähr).

 

10:14 본 절을 보면 예후는 처음에 이들을 사로잡기만 하고 죽일 생각은 없었던 것 같다(G. Rawlinson). 왜냐하면 죽일 생각이 처음부터 있었다면 사로잡으란 말을 하지 않고 그냥 죽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자신에게 복수하러 온 것을 알고는 우물가에서 죽인 것이다. 한편 본 절의 42명이란 수는 공교롭게도 엘리사를 조롱했던 아이들의 수(2:23-24)와 일치한다. 그러나 그 일치에 어떤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또한 이 무리들은 웅덩이 곁에서 살해당했기 때문에 웅덩이에 던져진 것 같다(렘 41:7).

 

10:15 레갑의 아들 여호나답. ‘여호나답’이란 이름은 ‘여호와’와 ‘나답’이라는 두 단어가 합성된 이름이다(Word Biblical Commentary). 여기서 ‘나답’이란 말은 ‘자극하다, 선동하다, 강요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구약에서 사람의 이름에 이 동사가 합성된 이름은 사회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뿐이었다(출 6:23, 왕상 14:20, 대상 2:28, 9:36). 요세푸스는 여호나답이 예후의 오랜 친구임을 말하고 있는데(Antiquities of the Jews, Vol. IX, p. 132), 예레미야 선지자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여호나답은 ‘요나답’과 동일한 인물로(렘 35:1-9) 레갑 족속의 족장이었다(렘 35:6). 그런데 이 레갑 족속은 밭이나 과수원을 만들지 않고 포도주도 마시지 않는 엄격한 금욕주의자들이었을 뿐만 아니라 선조들의 교훈을 따라 하나님의 명령을 잘 준행한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집을 짓지 않고 천막 속에서 생활을 했으며, 여호와 신앙에 매우 열심이었기 때문에 불순종한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의 모범이 되었다(렘 35:18-19). 원래 레갑은 여호수아와 함께 가나안에 들어온 갈렙의 후손(대상 2:42, 55)으로서 겐 족속의 일파이다. 이들은 가나안에서 유다 남부에 정착했었으나 곧 농경 생활을 배격하고 여호와에 대한 철저한 신앙적 자세로 돌아왔기 때문에 예레미야는 이들의 신앙을 칭찬하였다(렘 35:14). 따라서 본 절에서 예후는 여호나답으로부터 친구로서의 우정을 확인하고(Josephus) 그로부터 자신의 혁명이 정당함을 인정받으려 했다. 왜냐하면 여호나답을 존경하고 따르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인정도 받고 나라의 힘을 자기에게로 집중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예후는 여호나답을 자기 병거에 태우고 여호와에 대한 자기의 열심을 백성들에게 보인 것이다(Wycliffe).

손을 잡자. 이 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를 직역하면 ‘네 손을 다오’(give your hands)가 되는데, 손을 주는 것은 곧 충성을 표시하는 행위였다(겔 17:18). 과거 마호메트 교도들 사이에서는 칼리프, 즉 그들의 종교적 지도자들을 추대하는 행사를 할 때 충성을 다짐하는 의미에서 이 같은 상징적 의식을 행하였다.

 

10:16 나의 열심을 보라. ‘열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킨아’는 ‘시기, 열정’ 등으로 사용되었는데, 특히 인간의 악(惡)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를 나타내기 위해 ‘투기’란 의미로 사용되기도 했다(겔 5:13). 그런데 본 절에서는 이 ‘킨아’가 ‘하나님을 향한 예후의 열심’, 곧 선한 열심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었다. 그리고 예후가 여호나답에게 이 말을 했던 것은 신앙심이 깊은 여호나답과 협력하여 종교 개혁을 하기 위함이었다. 어떤 사업이든 동역자는 매우 중요하다. 바울도 초기에는 바나바와 함께 전도 여행을 다녔으며(행 13:1-3) 후기에는 실라와 함께 다녔다(행 15:36-40, 16:19-40).

 

10:17 거기에 남아 있는 바 아합에게 속한 자들을 죽여. 11절에서 ‘그에게 속한 자를 하나도 생존자를 남기지 아니하였더라’는 말씀과 본 절이 서로 배치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이스르엘에서 죽인 자 이외에 사마리아에 아합의 집과 조금이라도 연관된 자들이 아직까지 남아있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엘리야에게 이르신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 동일한 말씀이 10절에도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왕상 21:20-24에 언급된 아합의 집에 대한 심판의 말씀이 그대로 성취되었음을 다시 한 번 더 강조해서 보여주는 것이다.

 

10:18 예후는 자신이 아합보다 바알을 더 많이 섬기리라는 말로 백성들을 속인다. 이미 이세벨이 예후를 시므리라고 부른 것으로 보아(9:31) 백성들 가운데서도 예후의 혁명을 시므리와 같은 성격의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이와 같이 백성들의 생각을 미리 짐작하고 그것을 역이용하여 일을 진행시켜 나가는 예후의 기발함이 본 장의 전반에 잘 나타난다(9, 16절). 특히 본 절에 나타난 ‘예후는 많이 섬기리라’는 선포는 바알 숭배자들을 처단하기 위한 그의 계략이었다. 한편 본 절에 언급된 ‘많이’라는 말은 ‘증가하는, 능가하는, 철저한’이란 의미의 히브리어 ‘라바’에서 온 ‘하르베’를 번역한 것이다. 이는 양 뿐만 아니라 질에서 매우 철저하다는 뜻을 나타낸다.

 

10:19 내가 이제 큰 제사를 바알에게 드리고자 하노니. 여기서 ‘제사’(히, 제바흐)라는 말은 예후의 편에서 볼 때 재미있는 언어의 유희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제바흐’는 수소나 양, 그리고 염소 같은 동물들을 죽여서 드리는 ‘희생제’를 의미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배교자들에 대한 ‘살륙’이라는 의미로도 사용되기 때문이다(왕상 13:2, 왕하 23:20).

바알의 모든 선지자와 모든 섬기는 자와 모든 제사장들을. 당시 고대 근동에서는 선지자와 제사장이 서로 구분되는 계급이었다. 즉 제사장은 히브리어 ‘아브’(아버지)라 하여 마치 백성의 아버지인 것처럼 존대되었고, 선지자는 ‘하나님의 종’이라 하여 특별한 계급으로 생각되었다. 한편 베니게 지방에서는 선지자가 제사장보다 더 우대된 것 같으며 보다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것 같다(왕상 18:19-40). 그리고 여기서 ‘섬기다’라는 뜻의 히브리어 ‘아바드’와 ‘멸하다’라는 뜻의 히브리어 ‘아바드’가 동음이의어(同音異義語)인데 이것이 본 절 전체에 대해 풍자성을 더 가미하고 있는 듯하다.

 

10:20 바알을 위하는 대회를 거룩히 열라. 여기서 ‘대회를 거룩히 열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카드슈 아차라’는 예배 준비를 가리키는 공식적인 용어이다(욜 1:14, 2:15). 그리고 본 절에 언급된 ‘아차라’가 ‘거룩한 대회’(solemn assembly)로 번역된 경우는 성경에서 빈번한데(민 29:35, 신 16:8, 대하 7:9, 느 8:18, 사 1:13) 이 대회라는 말은 신 16:8과 레 23:36에 기록된 ‘성회’ 또는 ‘거룩한 대회’에서와 같이 절기 마지막 날에 폐회를 위한 성대한 제전을 의미한다. 한편 암 5:21에서는 이 말이 이스라엘 회중이 지키는 ‘여호와의 성회’를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또한 이것은 본래 세상일에 대한 금욕의 시기를 가리키는 것이었으나 바알 숭배가 횡행하던 그 당시에는 바알을 높이기 위한 모임으로 자주 열렸던 것 같다. 그래서 예후가 이러한 모임을 선포해도 백성들로부터 의심을 사지 않았던 것이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10:21 바알의 신당. 사마리아에 있는 바알의 신당은 아합이 이세벨과 결혼한 직후에 세운 것이다(왕상 16:32). 이 신당은 바알의 제사장 450명과 아세라의 선지자 400명을 수용했던 장소인 것으로 보아 대단히 큰 전(殿)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Bähr).

이쪽부터 저쪽까지. 이 표현에 대한 히브리 원문은 ‘페라페’이다. 그런데 이 말은 ‘훅불다, 불어 날리다’란 의미의 ‘파아’에서 온 ‘페’가 전치사로 연결된 용어다. 여기에서 ‘페’는 ‘입, 가장자리, 부분’이라는 의미이기 때문에 본 절의 뜻은 ‘입에서 입으로’, 혹은 ‘열고 또 연다’란 뜻이다(Bähr). 즉 이것은 최대한으로 여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본 구절의 표현은 ‘바알의 우상이 있는 성소’에 사람이 가득차 있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혹자는 본 표현을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라고 해석한다.

 

10:22 예복 맡은 자. 여기서 ‘예복’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멜르타하’는 구약 전체에서 이곳에서 단 한 번밖에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생소하게 보일지 모르나 그 의미는 분명한 것 같다. 이 단어가 ‘시험, 증거(proof)라는 뜻을 가진 아카드어 ‘말타크투’(maltaktu)와 관계가 있다는 주장(W. Von Soden)은 전후 문맥에서 볼 때 옳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동족어인 에디오피아어에서는 예복을 ‘알타’라고 하는데 이것은 아마포로 만든 옷이기 때문에 히브리어의 의미가 정확하리라고 판단할 수 있다. 한편 이방의 신전에는 거의 옷을 보관하는 방을 따로 두었을 뿐만 아니라그 옷을 관리하는 관리자도 있어서 제사를 드릴 때마다 예복을 입었다. 한편 바알 제사장들이 그렇게 예복을 입었기 때문에 구별하기가 용이해 그들 모두를 죽일 수 있었다.

 

10:23 여호와의 종은 하나도 여기 너희 중에 있지 못하게 하라. 본 절에 사용된 ‘여호와의 종’은 ‘바알을 섬기는 자’와 대응되는 말이다. 이 단어가 비록 히브리어로는 똑같이 ‘에벧’, 즉 ‘종’으로 나타나 있으나 이는 ‘여호와에 대한 열렬한 예배자’와 ‘바알에 대한 예배자’를 구분해서 이해해야 한다. 예후가 이러한 명령을 내린 것은 예후나 여호나답을 따르던 여호와의 종들이 영문도 모르고 그들 중에 섞여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Rawlinson). 또한 바알 숭배자들도 자신들의 신성한 예식에 이교도가 섞여있다는 것을 불경스럽게 생각했을 것이므로 예후의 처사를 옳게 여겼을 것이다. 그리고 예후가 이 일을 레갑의 아들 여호나답으로 하여금 지켜보게 한 것은 여호아의 종들을 보호해 줌으로써 여호와에 대한 자신의 열심(16절)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10:24 무리가 … 들어간 때에. 여기에 ‘무리’로 번역된 말이 70인역(LXX)에는 ‘그’로 되어 있고 히브리 성경에는 ‘그들’로 되어 있다. 25절과 비교할 때 ‘그’ 즉, 예후 자신이 혼자서 번제 드린 것이 사실인 것 같다. 그리고 ‘들어간 때에’로 번역한 본 절은 ‘들어가니라’로 되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고 그가 제물과 번제를 드리려고 들어가니라’가 옳은 뜻이기 때문이다.

 

10:25 번제 드리기를 다하매. 이 구절의 주어가 3인칭 단수 접미어인 ‘오’로 나타나 있기 때문에 혹자는 예후가 친히 번제를 드림으로써 자신이 열렬한 바알 숭배자인 것처럼 가장했다고 한다(Ewald). 그러나 히브리어에서 3인칭 단수 접미어 ‘오’는 종종 부정적 주어로서 영어의 it나 they와 같은 용법으로 쓰인다(Bähr). 그래서 70인역(LXX)과 불가타(Vulgate)역에서는 본 절의 주어를 3인칭 남성 복수형으로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예후와 여호나답은 바알 신당 주위에 80인의 호위병을 배치하고 그들이 예배를 다 드릴 때까지 기다린 것 같다. 그러나 만약에 예후가 이방의 제사 의식에 참여했더라면, 예후에게는 곤란한 문제가 발생할 것이다. 즉, 그 행위가 본심에 의한 것이 아닐지라도 그것을 본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를 하나님의 신실한 지도자로 여기지 않을 것이며 그렇게 될 때 앞으로 이스라엘을 다스리는데 있어서 하나님께 대한 신앙으로 뭉쳐진 신실한 백성들의 지지를 받기가 어렵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Wycliffe). 그래서 그는 이방 제사에 참여하지 않았다.

호위병과 지휘관들에게 이르되. 호위병의 문자적인 뜻은 ‘달리는 자들’이다. 즉 그들은 왕을 보호하는 것을 최고 임무로 하는 정예 부대였다(삼상 22:7, 왕상 14:27, 28). ‘지휘관들’에 관해서는 9:25의 주석을 참고하라.

 

10:26 바알의 신당 있는 성. 여기서 ‘성’이란 뜻의 히브리어 ‘이르’는 ‘높은 요새’를 의미하지만 여기서는 바알 숭배자들이 들어가 있는 ‘제단’ 또는 ‘내전’(內殿)을 가리키는 듯하다(Rawlison, Keil). 왜냐하면 바알의 신상이 있는 이 전은 높은 담으로 사방이 둘러싸여 있어서 그 모양이 마치 요새와 같았기 때문이다(Bähr). 이것과는 달리 바알의 주상(主像)은 돌로 만들어져 있고 그 주상을 중심으로 작은 바알의 상들이 둘러 놓여져 있는데 그것들은 나무로 만들어져 있다. 한편 예후가 바알을 예배하는 모든 자를 죽이라고 그의 군사들에게 명한 것은 다음 두 가지 의미의 교훈을 준다. (1) 이것은 윤리적인 차원에서 의아스럽게 생각될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을 대행한다는 의미에서는 충분히 정당화된다. 출애굽 당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정복하는 곳의 모든 사람을 죽이라고 명령하셨는데(신 3:1-3, 수 8:18-25), 이것도 하나님께로부터 범죄자들에 내려진 심판으로 볼 수 있다(창 15:16). 이처럼 하나님께서 심판의 칼을 드시사,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듯 죄에 빠진 자들을 전멸시키신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조금의 불의도 용납 될 수 없다는 공의의 속성에 기인한다. 그런데 신약 시대에는 이러한 공의의 하나님보다는 사랑의 하나님의 모습을 더욱 강조함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공의의 속성이 잘 드러나 있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양 속성을 잘 조화시겨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참지혜자로서의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2) 이는 예후의 과감한 실천의 표현이었다. 즉 그는 여호나답에게 여호와께 대한 열심을 나타내 보이겠다고 약속했다(16절). 그래서 그는 여호나답이 보는 가운데(23절) 바알에게 제사하는 모든 사람을 죽였다. 이러한 예후의 행동은 죄의 길에 서서 후회만하고 행동으로는 돌이키지 않는 우유 부단한 사람들에게 경고가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미지근한 상태에 머무르기를 원치 않으시기 때문이다(계 3:15, 16).

목상들. 본 절에서 ‘목상들’로 번역된 히브리어 ‘마츠보트’는 ‘기둥들’이란 뜻인데, 왕상 14:23에 의하면 이것이 아세라 상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것들은 나무로 만들어져 있었기 때문에 불로 태워 없앨 수 있었다. 그러나 바알 주상은 원추형의 돌로 만들어져 있었기 때문에 훼파하였을 것이다(Bähr, Keil & Delitzsch, Vol, III, p. 351-352). 한편 가나안 인들이 섬기던 우상은 바알의 신상뿐 아니라 여러 가지 더 많이 있었는데 신명기 기자는 이 모든 것을 불사르고 훼파하라고 기록하고 있다(신 7:5,25, 12:2, 3).

 

10:27 변소를 만들었더니. 변소는 ‘성읍의 모든 불결한 것을 두는 저장소’이다(Rawlinson). 그런데 바알 신당을 이와 같은 용도로 사용하도록 했다는 것은 바알 신에 대한 모독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행위는 당시 근동지방에서 유행하던 최대의 모욕이었다(Keil & Delitzsch). 한편 맛소라 본문(Masoretic Text)에는 ‘변소’를 가리키는 히브리어 ‘모하라오트’를 ‘하수구’라는 뜻의 ‘모차오토’로 변형하고 있어 그 의미가 매우 완곡하게 표현되었다(스 6:11, 단 2:5, 3:29).

 

10:28 없음.

 

10:29 본 절은 예후가 바알 숭배자들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숙청을 가했지만 금송아지 숭배는 금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언급한다. 즉, 이것은 마치 남쪽 유다 왕들이 종교 개혁을 했을 때 산당을 전부 훼파하지 않은 것과 흡사하다(12:3, 14:4, 15:35, 대하 15:17, 20:33). 본문은 특히 28절과 29절을 비교적인 관점에서 서술함으로 예후의 주된 활동을 한번 더 강조함과 동시에 그의 부정적 측면, 즉 금송아지 우상을 척결시키지 못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10:30 여호와께서 예후에게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직접 예후에게 말씀하셨다기 보다는, 그 당시 활동했던 엘리사 선자자의 입을 통하여 예후에게 말씀하셨던 것으로 생각된다(Rawlinson, Thenius).

네 자손이 … 사대를 지내리라. 이것은 예후가 바알 이외의 이방 신을 완전히 제거하지 않음으로 예후의 왕조가 4대(100년) 동안만 계속될 것을 허용하시는 제한적인 약속이었다. 그러므로 예후와 그의 집의 통치는 결코 행복한 것이 아니었다(호 1:4). 그리고 하나님의 이러한 예언은 여호아하스(13:1), 요아스(13:9), 여로보암 II(14:23), 스가랴(15:8)가 이스라엘의 왕이 된 것으로 성취되었다.

 

10:31 선을 쌓아 자신의 죄를 감면시키지는 못한다. 오히려 나중의 죄악이 처음의 선을 헛것으로 만들고 자신을 파멸케 하는 예가 많다. 그렇게 때문에 사도 바울은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고 말하였다(빌 2:12).

전심으로. ‘가장 내부에 있는 기관으로서의 마음’, 혹은 ‘열중하다’란 뜻의 히브리어 ‘라바브’에서 온 ‘레바보’를 번역한 말이다. 이는 ‘온 정열과 마음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섬기고 그의 계명에 순종해야 함을 나타내는 표현이다(30절, 23:25, 왕상 24:, 3:6, 8:17-18).

 

10:32 이 때에 … 이스라엘에서 땅을 잘라 내기 시작하시매. 앗수르 왕 살만에셀 3세의 비문에 나타난 기록에 따르면 살만에셀이 B.C. 841-840년 경, 즉 그의 집권 제18년에 하사엘을 공격하여 크게 승리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통치 제21년, 즉 B.C. 838년에 두 번째 하사엘을 공격하여 역시 또 승리했다고 한다. 따라서 이와 같이 계속 참패를 면치 못했던 하사엘은 예후를 공격하여 이것을 만회하려고 했다. 당시 예후는 살만에셀에게 공물을 바치고 있었기 때문에 하사엘은 예후를 못마땅하게 여겼을 것이다. 그래서 혹자는 살만에셀이 두 번째 하사엘을 공격한 것은 예후의 사주로 인한 것이라고 한다(Hobbs). 이때 하사엘이 이스라엘을 공격한 것은 예후의 통치 말년이 가까웠을 때이며(Thenius), 살만에셀이 두 번째로 하사엘을 공격한 연대인 B.C. 838년 직후였을 것이다(Hobbs). 한편 본 절은 이방 세력의 침략을 ‘여호와께서 … 잘라 내기 시작하시매’라고 표현한다. 이는 엘리야 선지자에 의해서 예언된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된 것을 나타낸다(왕상 19:15-17). 특히 ‘잘라 냈다’는 말은 ‘부족하도록 자른다’(cut short)라는 의미로 예후의 죄악이 이스라엘의 영토를 모자라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10:33 결국 예후는 팔레스타인에서 가장 비옥한 땅인 요단 동편에 있는 땅 전부를 아람에게 잃고 말았다. 길르앗 라못도 이때에 다시 하사엘에게 넘어간 것 같다(Hobbs). 한편 열왕기서 기자는 31절과 32절을 연관시키면서 하사엘의 공격이 예후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임을 시사하고 있다. 열왕기서 기자는 이와 같이 일관되게 선과 악에 대한 하나님의 처사를 분명히 밝혀줌으로 여호와의 율법과 계명에 순종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리고 본 절에 나오는 ‘아르논 골짜기’에서 ‘아르논’은 ‘소리치다’란 뜻의 히브리어 ‘라난’에서 온 말이다. 그러므로 이 말은 그곳의 시냇물이 요란하게 흐르는 험한 골짜기라는 사실에서 유래한 듯하다.

 

10:34 34-36절. 예후의 생애에 관한 열왕기서 기자의 기록은 대부분 아합 왕조에 대한 예후의 혁명에 그 초점을 맞추었다. 그리고 ‘업적’(34절)이라는 말을 통해 바알 숭배를 폐지시켰던 예후의 행위가 그의 군인으로서의 용맹함을 나타내고 있다(Bähr, Hobbs).

 

10:35 없음.

 

10:36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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