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 주석, 열왕기하 09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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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선지자 엘리사가. 성경에서 본 절과 같이 ‘선지자’와 ‘엘리사’를 함께 묶어서 표현한 곳은 극히 드물다. 즉 지금까지는 엘리사라는 이름만 언급되거나(3:13, 4:1, 6:1),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별칭(4:7, 5:14, 6:10, 7:2)이 쓰였다. 그러나 여기서 특별히 ‘선지자 엘리사’라고 기술함으로 ‘선지자’의 신분과 엘리사의 이름을 강조한 것은 새 왕의 옹립(擁立)과 관련되어 있다. 즉 선지자 엘리사라고 표현함으로 인해 예후를 왕으로 세우는 주체가 하나님이라는 것을 드러냄과 동시에 그 일의 완성을 위해 엘리사가 일했음을 나타낸다.

선지자의 제자 중 하나를. 랍비들의 전승에 따르면 엘리사에게서 사명을 받은 제자가 아밋대의 아들 요나 선지자일 것이라고 추측하지만 분명한 근거는 없다(14:25).

너는 허리를 동이고. ‘동이다’의 히브리어 ‘하고르’는 ‘허리 띠로 조이라’는 명령어이다. 히브리인들은 통으로 된 옷을 입었기 때문에 활동에 용이하도록 허리에 띠를 둘렀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여행 차림은 어떤 특별한 사명을 수행하는 사람임을 나타낸다(4:29).

길르앗 라못으로 가라. 본 절의 표현 양식으로 보아 당시에 엘리사가 거주하고 있던 곳은 사마리아가 틀림없다(Bähr). 그리고 사마리아와 길르앗 라못은 요단 강을 경계선으로 하여 동서로 마주보고 있었기 때문에 거리는 꽤 먼 편이었다. 즉 사마리아와 길르앗 라못의 사이는 약 65 km 정도 되는 거리이다. 한편 이 때에 예후는 길르앗 라못을 지키고 있었으며 이스라엘 왕 요람은 하사엘과의 전투에서 부상당하여 이스르엘에서 치료를 하고 있었다(15절). 전투중인 길르앗 라못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8:28 주석을 참고하라.

 

9:2 님시의 손자 여호사밧의 아들 예후. ‘예후’라는 이름의 원뜻은 ‘여호와는 한 분이시다’ 혹은 ‘그는 여호와이시다’라는 의미로 다신교와 대조되는 유일신 여호와를 강조한 말이다. 그런데 왕상 19:16에는 예후가 님시의 아들로 언급되어 있으나 본 절에서는 손자로 언급되어 있다. 이것은 예후가 할아버지의 손에서 성장했든가, 아니면 그의 부친이 일찍 죽었든가 하는 점 때문인 것으로 추측된다(Pulpit Commentary). 그리고 예후의 부친 여호사밧보다 그의 조부 님시가 더 자주 언급된 것은(14절) 유다 왕 여호사밧과 구별하기 위한 것이거나 아니면 님시라는 인물의 중요성을 나타내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찾아 들어가서. 문자적으로는 ‘그가 거하고 있는 본부에 들어가서’라는 의미이다. 혹자는 본 절의 이런 표현을 들어 이스라엘이 라못을 지키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즉 예후는 라못이 포위되기 전에 그의 군대와 함께 성을 방어하기 위해 그 안에 있었다는 것이다(Lange Commentary).

그의 형제 중에서 일어나게 하고. 일반적으로 ‘형제’라는 뜻의 히브리어 ‘아흐’는 혈육간의 형제 뿐만 아니라 종교적인 공동체(신 1:16)의 일원을 나타내기도 한다(H. Ringgren). 그러나 여기서는 예후와 뜻을 같이 하고 있는 ‘군대 장관들’을 가리킨다(5-6절, 신 20:8, 삿 9:26, 31, 삼상 30:23).

골방. ‘비밀 회담 장소’(G. Rawlinson), 혹은 방들 중에서 가장 은밀할 뿐만 아니라 깊이 위치해 있는 방을 가리킨다.

 

9:3 내가 네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으로 삼노라. 기름을 붓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지명(대하 22:7)과 존귀한 명예(삼상 24:6, 10), 하나님의 보호(시 105:15) 등을 의미한다. 왕들에게 기름을 붓는 것은 구약에서 여러 번 나온다(11:12, 23:30, 삼상 10:1, 16:1, 13, 삼하 2:7, 왕상 19:15). 여기서 사용되는 기름은 요세푸스의 말과 같이 성전에서 사용하는 거룩한 관유이다(출 30:25).

지체하지 말지니라. 이와 같이 지체하지 말고 도망하라고 한 것은 요람을 추종하는 무리들로부터의 위험을 피하도록 하기 위함은 아니었다(Theodoret, Clericus). 이것은 4:29에서 엘리사가 게하시에게 했던 바와 같은 동일한 의도로 해석할 수 있다. 즉, 하나님의 말씀에 덧붙여 어떤 인간적인 논의가 첨가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일 뿐만 아니라 본래의 목적과 다른 어떤 일에 휘말리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Schmidt, Gerlach).

 

9:4 그 청년 곧 그 선지자의 청년. 여기서 ‘청년’이라는 뜻의 히브리어 ‘나아르’가 원문에서 두 번이나 반복하여 기록된 것은 조금 이상하게 보인다. 아람어로 기록된 탈굼역이나 70인역에는 이렇게 두 번 기록하고 있지 않다. ‘나아르’는 ‘작은 아이’(2:23) 즉, 유년기에서부터 청년기까지의 젊은 아이를 말할 뿐만 아니라 ‘사환, 종’(4:12)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본 절을 ‘그 청년 곧 선지자의 사환’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Keil).

 

9:5 군대 장관들이 앉아 있는지라. 군대 장관은 히브리어로 ‘샤르 하하일’인데 ‘병사들의 우두머리’, 즉 ‘소부대의 지휘관’을 가리킨다. 그리고 나아만의 직위(5:1)와 같은 군대 장관은 ‘지휘관의 총수’, 즉 ‘샤르 차바’로서 현대의 총사령관과 같은 직위를 의미한다. 따라서 이들은 예후를 중심으로 모인 그의 직속 부하들임을 알 수 있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요람 왕은 라못의 전투에서 부상을 당하여 이스르엘로 내려가면서 예후에게 최고 지휘권을 넘겨주었다. 한편 그레이(Gray)의 주장처럼 이때에 이미 예후를 왕위에 추대하려는 모종의 모의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본문의 ‘앉다’라는 말의 히브리어 ‘야샤브’는 흔히 어떤 도모를 꾀할 때 사용되는 말이기 때문이다(겔 8:1, 14:1, 20:1).

 

9:6 여호와의 백성 곧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노니. 이 말은 다윗을 왕으로 세울 때(삼하 7:8), 여로보암을 왕으로 세울 때에도 동일하게 사용되었다(왕상 11:23-43). 그리고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뿐만 아니라 왕도 동일하게 하나님 앞에서 언약적 관계에 놓여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신 14:2, R. Rendtorff). 본 절의 ‘삼노니’의 히브리어 ‘메샤헤티가’는 ‘기름을 바르다’란 의미의 ‘마샤’에서 유래한 말이다. 그러므로 본 절은 ‘성별하다’는 의미로 사용되었음과 동시에 하나님께서 왕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세우셨음을 나타낸다.

 

9:7 너는 네 주 아합의 집을 치라. 이 말은 예후에게 주신 하나님의 명령임과 더불어 하나님을 배반하고 패역했던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복수이다(신 32:35, 41). 한편 여러 주석가들은 7-10절을 신명기 학파가 행한 내용상의 완성을 위한 편집상의 첨가로 간주한다. 그러나 이 구절들에서 언급되고 있는 내용은 본 장 전체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첨가물로 일축할 수 없다(Montgomery, Kings, p. 400).

나의 종 곧 선지자들의 피. 이것은 왕상 18:4, 13에서 이미 언급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엘리야 선지자는 왕상 18:22, 19:10, 14에서 보았듯이 모든 여호와의 선지자들이 아합의 악행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고 믿고 있었다(G. Rawlinson). 그래서 선지자의 제자는 이를 그대로 전해 아합 가문 전체를 멸망시킬 것을 그 임무로 예후에게 준 것이다(Wycliffe).

 

9:8 아합에게 속한 모든 남자는 내가 다 멸절하되. 여기서 ‘남자’는 히브리어 원문으로 ‘벽을 보고 서서 소변보는 자’로 표현되어 있다. 이 표현은 좀 어색한 표현이지만 아합의 집안을 이어갈 만한 모든 후손들을 치라는 뜻이다(삼상 25:22).

매인 자나 놓인 자나.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아합의 집과 관계가 있는 자, 즉 종노릇하는 자나 자유로운 자들까지도 모두 죽이라는 명령이다(14:26).

 

9:9 이스라엘을 다스린 네 왕가는 (1) 여로보암 왕가(B.C. 930-909 ), (2) 바아사 왕가(B.C. 909-885), (3) 오므리 왕가(B.C. 885-841), (4) 예후 왕가(B.C. 841-752)이다. 그런데 여로보암 왕가는 여호와의 노를 격동시킨 일 때문에(왕상 15:30) 바아사에 의해 멸망을 당했고(왕상 15:29), 바아사 왕가는 7일 동안 왕노릇한 시므리에 의해서(왕상 16:15) 아합과 같이 그 일족이 몰살됨으로 멸망했다(왕상 16:11, 12). 그리고 시므리도 바아사와 동일하게 여로보암의 길을 따라 범죄함으로(왕상 16:19) 왕궁에 불을 놓고 그속에서 타죽었다(왕상 16:18). 그와 더불어 아합의 왕가 또는 오므리 왕가는 예후에 의해서 멸절당하게 된다.
이들의 공통점은 ‘여호아 보시기에 악을 행했다’는 점이다. 특히 위에 언급한 앞의 세 왕조는 금송아지 우상과 바알 및 여러 우상들을 섬겨 여호와 하나님의 진노를 샀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우상 숭배 죄가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로 통칭되었다(왕상 12:28, 15:26, 16:2, 19, 26, 31, 22:52). 또한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우상 숭배죄를 어느 왕조보다도 많이 범한 아합 왕조에 대해 ‘아합에게 속한 모든 남자는 내가 다 멸절시키겠다’고 말씀하셨다. 이러한 하나님의 형벌은 자신의 배만 위하는 탐욕의 사람들에게도 해당된다. 왜냐하면 탐욕은 우상 숭배이기 때문이다(엡 5:5). 그 대표적인 예로 아간과(수 7:1-26) 그리스도를 팔아 넘긴 유다가 있다(행 1:18). 그러므로 재물과 명예, 그리고 방탕한 일에 욕심을 내는 모든 사람은 본 절에 기록된 아합 왕가가 받은 심판 뿐 아니라 아간과 가룟 유다가 받은 심판에서 제외되어 있지 않음을 깨닫고 하나님께 회개하여 그 길을 돌이켜야만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있다(겔 39:9, 11, 18, 19).

 

9:10 본 절은 이미 엘리야에 의해 예언되었던 것이다(9:26-27, 왕상 14:11, 21:23). 그런데 그 예언 속에는 본 절과 같이 장사되지 못하리라는 말이 없다. 그러나 그것은 이세벨이 죽임을 당하는 끔찍한 장면을 볼 때 특별히 이상하게 여길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한편 본 절에서 이세벨이 개들에게 먹혀 무덤에 묻히지 못하는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뿐만 아니라 이방인들도 두렵게 하는 것이었다(G. Rawlinson). 왜냐하면 그 당시의 근동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시신을 엄격히 다루어 암혈(巖穴)이나 땅 깊은 곳에 장사지냈기 때문이다. 그 뿐만 아니 시신을 손상시키거나 무덤 없이 시체가 버려지는 것을 가장 큰 형벌로 간주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특별히 개는 히브리인들뿐 아니라 근동 지방의 사람들에 의해서 부정한 동물로 간주되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개를 추잡하고(신 23:18) 무가치한 존재(삼하 9:8), 그리고 경멸의 대상(삼상 17:43)으로 나타냈다.

 

9:11 그 미친 자. 여기에 해당되는 히브리어 ‘메슈가’는 대단히 광범위하게 사용된다. 즉 신 28:34에서는 그것을 의학적인 정신병으로 사용했다. 다윗은 이와 비슷하게 정신병이 걸린 것처럼 눈속임을 한 적이 있었다(삼상 21:13). 또 호 9:7과 렘 29:26에서는 악한 선지자들을 경멸하는 용어로, 즉 선포적이고 질타적인 의미의 말로 사용되었다(미 3:5-8). 한편 혹자는 이것을 선지자가 무아지경에 빠졌을 때를 표현하는 말이라고 한다(Montgomery). 그래서 삼상 10장에 나오는 선지자의 무리들의 이상한 행동도 이와 같은 종류로 간주한다. 그 뿐만 아니라 본 절에서도 예후의 군대 장관들은 무아지경 상태에서 예언하는 선지자를 조롱하는 말로 ‘그 미친 자’라고 표현했다는 것이다(Keil). 이것은 당시 선지자들에 대한 평판이 대체적으로 경멸하는 풍조였음을 반영한다.

무슨 까닭으로 그대에게 왔더냐. 군대 장관들이 예후에게 이런 질문을 한 것은 선지자의 제가가 갑작스럽게 출현했다가 사라졌기 때문에 무슨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지 않았나 하는 궁금한 마음과 함께(Pulpit Commentary) 어떤 중대한 소식을 갖고 왔을지 모른다는 추측 때문일 것이다(Keil & Delitzsch).

그대들이 그 사람과 그가 말한 것을 알리라. 본 구절에 대해 학자들 간에 주장하는 바가 각기 다르다. 혹자는 이 말을 예후는 그 사건을 이미 사전에 계획된 일로 생각했기 때문에 그 의미를 다 알지 않느냐고 군대 장관들에게 반문했다고 본다(G. Rawlinson). 즉, 군대 장관들이 그 선지자의 제자와 함께 계획적으로 자신을 왕위에 앉히려고 꾸민 연극이기 때문에 질문한 바를 자신들이 더 잘 알지 않느냐는 의미로 본다. 또 혹자는 그대들이 그 선지자 생도가 미쳤을 뿐 아니라 정신없이 말한 것을 알리라. 그래서 선지자가 들어올 때 아무와도 이야기한 것이 없는 것과 같이 나갈 때도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Bähr, Keil & Delitzsch). 이와 달리 어떤 학자는 예후의 대답은 그들도 장차 그 젊은 선지자의 신분과 그가 말한 내용을 알게 된다는 의미로 했다고 주장한다.

 

9:12 당치 아니한 말이라. 이것은 예후의 반문에 대한 그들의 분명한 의사 표시이다. 즉, 예후의 추측이 옳지 않음을 나타내고 있다. 11절에서 ‘평안하냐’라고 물었을 때 예후는 군대 장관들의 심중을 정확히 알 수 없었으나 이제는 그들의 심중을 간파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예후는 자신의 왕위에 관한 문제였음을 그들에게 밝히고 있다.

 

9:13 무리가 각각 자기의 옷을 급히 가져다가. 겉옷은 수치를 가릴 뿐 아니라(창 3:10, 11) 정숙을 유지하게 해주기 때문에(벧전 3:3) 인격과 권위를 상징한다. 따라서 군대 장관들이 이와 같은 행위를 한 것은 평소에 예후를 왕으로 추대하려는 마음이 간절했음을 나타낸다. 심지어 그 선지자의 제자를 미친 자라고 경멸했던 그들이 선뜻 선지자의 말을 받아들인 것이 바로 그러한 마음이 있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한편 겉옷을 취하여 바닥에 펴는 군대 장관들의 행위와 마 21:8에서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예수에 대해 무리들이 옷을 펴는 행위는 왕에 대한 백성들의 예우일 뿐만 아니라 왕으로 인정한다는 의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예후가 서 있던 맨바닥 위에 그들이 옷을 깔고 그를 거기에 세운 후 왕으로 선포한 것(Keil, Kimchi)은 왕의 보좌가 그곳에 없었기 때문에 임시로 행한 조치였다.

나팔을 불며. ‘나팔’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쇼파르’는 ‘양각’이라고도 번역되는데, 이것은 숫양이나 숫염소의 뿔로 만든 ‘신호용 나팔’로서 두 가지 음밖에 소리가 나지 않는다. 이 나팔이 쓰인 용도는 안식일의 시작(레 23:24). 개전(開戰, 수 6:4, 삿 3:27, 7:18), 왕의 즉위(11:24), 각종 위험에 대한 경고(겔 7:14, 33:3-6, 호 8:1, 욜 2:1) 등이 있다. 그러나 왕상 1:34과 여기서는 왕의 즉위를 축하하기 위해 왕의 대관식 때 나팔을 불었던 것과 같이 나팔을 분 것이다(E. Werner, “Musical Instruments,” Interpreters Dictionary of the Bible, Vol. 3, p. 469-476). 즉 예후가 새로운 왕으로 즉위하였음과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였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예후는 왕이라. 앗수르 왕 살만에셀 3세(B.C. 859-824)의 비문을 보면 예후의 이름이 두 번 언급되어 있다. 이 비문에 따르면 예후는 하사엘로부터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그 대가로 공물을 바쳤다는 것이다(Ancient Near Eastern Texts, p. 280, Ancient Near East in Pictures, p. 351-355). 그리고 이 비문에서는 예후를 ‘오므리의 아들’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은 분명히 옳지 않다. 그러나 그 비문에서 그렇게 기록한 것은 오므리 왕조가 이스라엘 왕조 중에서 대표적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사르곤 2세(B.C. 722-705)의 시대까지 이스라엘은 오므리 왕조로 알려져 있었다(C. C. Smith).

 

9:14 예후가 요람을 배반하였으니. 본 절은 앞 절에서 일어난 사건의 결과를 나타내고 있다. 즉, 선지자의 생도가 왔다 간 이후에 발생한 일련의 공개적인 행위를 통해 요람에 대한 배반이 공식화되었다는 의미이다(G. Rawlinson). 그렇기 때문에 요람이 부상을 입기 전, 다시 말해서 선지자의 제자가 이곳에 오기 전에 비밀의 약정이 있었다는 견해는 받아들이기가 어렵다(Köster, Lange Commentary).

아람의 왕 하사엘과 맞서서 길르앗 라못을 지키다가. 요람이 하사엘과 싸운 것은 길르앗 라못을 방어하기 위한 싸움이었음이 여기서 판명된다(8:28 주석 참고, Lange Commentary, Keil & Delitzsch). 그리고 본 절의 기사는 예후가 요람을 배반한 사실이 하사엘과의 전투와 깊은 연관이 있음을 암시해 주고 있다. 즉, 이 전투에서 요람은 능력을 재대로 발휘하지 못해 백성들로부터 신망을 잃게 된 반면 예후는 이 전투에서 크게 활약하여 모든 군대 장관들로부터 인정을 받은 것으로 추측된다(Bähr). 더구나 21절을 보면 요람이 거의 완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투에 시달린 병사들을 위로하러 길르앗 라못으로 돌아오지 않고 이스르엘에서 병 문안을 온 유다의 아하시야 왕과 즐기고 있었기 때문에 군대 장관들의 원망을 산 것으로 생각된다(Lange Commentary). 요람에 대한 신임이 이와 같이 형편없었기 때문에 예후가 배반하여 요람을 치러 갈 때에 모든 병사들이 그의 말에 순종하였던 것이다.

 

9:15 본 절이 8:28, 29절의 말씀과 중복된 것은 이 두 가지가 동일 저자에 의해 쓰여지지 않았음을 증명해 주는 단순한 반복(Thenius)이 아니다. 앞의 기사는 온전한 역사적 기술이며, 여기서는 1-14절과의 연관성을 보여 주기 위한 추가적 설명인 것이다(Bähr).

너희 뜻에 합당하거든. 예후는 자신의 동료들에게 혁명의 정당함을 물음과 동시에 자신의 거사 도모에 대한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9:16 유다의 왕 아하시야는 요람을 보러 내려왔더라. 요람의 조카였던 아하시야는 정치적인 면으로 길르앗 라못의 전투에서 요람을 원조했을 뿐만 아니라 인간적인 면에서도 요람과 깊은 교제를 나누고 있었다. 8:29 주석을 참조하라.

 

9:17 망대에 파수꾼 하나가 서 있더니. 여기서 파수꾼은 단순한 성 문지기가 아니라 멀리서 다가오는 위험을 미리 알리는 직무를 맡은 병사를 가리킨다(T. R. Hobbs, 삼상 14:16, 삼하 18:24-27). 한편 본 망대는 이스르엘 망대 중에서 길르앗 라못을 향하고 있는 남동편의 망대를 가리키는 듯하다.

예후의 무리가 오는 것을 보고. 여기서 ‘무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쉬프아’는 ‘풍부함, 넘쳐 흐르는 것’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신 33:19). 즉 그렇기 때문에 본 절은 예후가 무리들을 이끌고 올 때에 요람을 암살하기에 넉넉한 규모의 군사들을 동반했다는 말이다.

평안하냐 묻게 하라. 요람 왕은 파수꾼의 보고를 듣고 즉시 사자(使者) 한 명을 그 무리들에게 보냈다. 그런데 요람 왕이 사자를 보낸 목적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상반되는 두 가지 주장이 있다. 이러한 상반되는 이견(異見)은 ‘평안하냐’라는 말에 대한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른 것이다. 공동번역과 Living Bible은 이 말을 ‘그 무리들이 아군인지 적군인지 알아 보라’는 명령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이러한 번역은 지나친 의역이다. 왜냐하면 본 절에 쓰인 ‘평안’라는 말은 ‘샬롬’으로서 일상적인 인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즉 당시 요람 왕은 다가오는 무리들을 아군으로 확신하고 그들로 하여금 빨리 전황에 대한 보고를 듣기 원했던 것이다. 요람은 부상으로 인하여 오랫 동안 전쟁터에서 떠나 있었으므로 전황에 대해 무척 궁금했을 것이다(8:28, 29). 전황을 알아 보기 위해 나갔던 사자들이 돌아오지 않자 직접 나간 요람이 예후를 보고 동일하게 ‘평안하냐’라고 물었던 것도(22절) 마찬가지로 의미로 이해 된다. 그리고 ‘모든 것이 잘 되느냐’는 영역 성경(Modern Lnaguage Bible)의 번역도 이러한 해석을 지지한다. 한편 본 절에 언급된 ‘파수꾼’은 히브리어 ‘초페’를 번역한 것이다. 이는 ‘먼 곳을 응시하다, 몸을 굽힌다’라는 의미의 ‘차파’에서 온 말로 성 지키는 자의 행동과 시선에 긴장감이 돌 뿐만 아니라 성실하게 업무를 수행하는 모습을 그리게 한다.

 

9:18 요람은 두 번씩이나 똑같이 한 명의 사자만을 보내어 평안을 묻게 했다. 이것은 요람이 분명 그 무리들을 아군으로 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요람이 위험을 감지하는데 있어서 얼마나 둔감한 인물이었는가를 보여 준다. 한편 요람의 이러한 태도는 하나님이 심판을 행하시는데 더욱 순조롭게 했을 뿐만 아니라 여호와의 진노를 더욱 가속화시켰다(Wycliffe).

 

9:19 없음.

 

9:20 그 병거 모는 것이 … 미치게 모나이다. 여기서 ‘미치게’의 히브리어는 11절의 ‘미친 자’와 동일한 어근, 즉 ‘미친듯이 날뛰다, 미친 사람처럼 행동하다’를 의미하는 ‘샤가’에서 파생된 단어이다. 그런데 예후의 용맹함이 바로 이와 같은 어구로 수식되고 있다는 것은 요람과는 달리 그가 얼마나 정력적인 사람이었던가를 말해준다. 한편 요람은 무리들이 미친듯이 급히 말을 몰아쳐 온다는 파수꾼의 보고를 받고 단순하게 생각하고 그를 맞으러 나간다. 그런데 이때에도 요람은 아무런 위험도 느끼지 못했던 것 같다. 왜냐하면 22절에서도 역시 요람은 평안을 묻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는 달리 ‘미치게 모는’ 예후의 모습을 통해 평소에 그가 과격한 인물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이것은 예후의 혁명이 그처럼 광적이었으며 잔인했음을 암시해준다.

 

9:21 요람과 아하시야가 예후를 맞은 것은 그와 접전하려는 것이 아니라 아람과 싸우던 그에게서 전시 상황을 듣고자 함이었던 것 같다. 그러므로 그들은 대항해 보지도 못하고 죽게 된다. 그들이 이렇게 쉽게 죽임을 당한 것은 아합 왕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볼 수 있다.

이스르엘 사람 나봇의 토지에서 만나매. ‘나봇의 토지’는 아합의 탐욕과 배교를 상징하는 곳이다. 그런테 우연히 예후와 요람이 이 곳에서 상봉하게 된 것은 아합의 죄값대로 심판하시는 하나님 주권적인 섭리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섭리를 인간적으로 볼 때는 마치 우연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예언의 말씀에 따라(7-10절) 정확히 성취 되는 것이다.

 

9:22 예후야 평안하냐. 혹자는 이 말을 ‘길르앗 원정은 성공적인가?’라는 의미로 해석하고 있고(Wycilffe), 다른 학자는 이것을 ‘군대에 이상은 없는가?’, ‘어떤 재난이 발생했는가’라는 뜻으로 이해한다(Rawlinson).

네 어머니 이세벨의 음행과 술수. 여기서 ‘이세벨의 음행’은 문자적으로 해석하기보다는 비유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Bähr). 왜냐하면 성경에서는 이세벨이 직접적으로 음행을 범했다는 기사를 전혀 찾아볼 수 없기 빼문이다. 그러나 ‘음행’은 일반적으로 성경에서 ‘우상 숭배’를 의미하고 있기 때문에(레 20:5, 렘 3:2, 9, 겔 23:27, 호 2:2), 그녀가 지은 수많은 범죄, 즉 바알을 숭배한 우상 섬김의 배도(背道)는 음행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었다. 또한 ‘술수’는 우상숭배에 따르는 일종의 마술 행위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모세 율법에서는 이를 엄격히 금하고 있다(출 22:18, 신 18:10, 11). 한편 여기서 특별히 이세벨의 죄악을 언급하고 있는 첫째 이유는 그녀가 아합이 지은 범죄의 근본 원인이기 때문이고, 둘째 이유는 그녀의 악행을 대항하는 행위인 예후의 반란의 정당성을 제시하기 위한 것이다(7절).

 

9:23 요람이 곧 손을 돌이켜 도망하며. 여기서 ‘손을 돌이켜’라는 표현은 손으로 병거를 되돌렸다는 의미이다. 이와 비슷한 상황인 왕상 22:34에서는 아합이 병거 모는 자에게 손을 돌이킬 것을 명령하고 있으나 여기서는 요람이 직접 자신의 손을 돌이켜 병거를 몰아 도망하고 있다. 즉 요람은 다른 병사의 호위도 없이 단신으로 병거를 몰았다는 말이 된다. 이러한 그의 행동으로 볼 때 요람은 예후의 대답을 통해 어떤 모반(謀反)이 있음을 알아차린 것 갈다(Keil & Deltizch). 그러나 이것이 진정 하나님께서 내린 심판이라는 사실은 전혀 깨닫지 못했다(Wycliffe).

아하시아여 반역이로다. ‘반역’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미르마’는 모든 종류의 ‘속임’ 또는 ‘기만’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물론 이것을 ‘반역’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으나 원문의 본래의 뜻은 반역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것을 가리킨다. 이러한 예후의 행위가 요람의 입장에서는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예후는 요람을 주인으로 섬기는 위치에 있었고(7절) 요람은 그에게 큰 직위를 맡길만큼 그를 신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바로 그 전까지도 요람은 예후의 반란을 전혀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예후의 행위는 그에게 ‘속임’으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었다. 참으로 이와 같이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도적이 오는 것 같이 갑자기 닥치는 것이다(마 24:43, 눅 12:39).

 

9:24 예후가 힘을 다하여 활을 당겨. 이 구절에 해당하는 원문을 직역하면 ‘예후가 자기 손에 활을 채웠다’이다. 이것은 활을 쏘기 위해 시위에 화살을 장전하는 것을 가리킨다(삼하 23:7). 한편 ‘힘을 다하여 활을 당긴다’라는 표현은 히브리어 본문에는 없는 것으로 일부 영역본(KJV, RSV, Living Bible)과 한글 개역 성경은 이를 생생하게 나타내기 위해 첨가한 것이다.

두 팔 사이를 쏘니. 제임스왕역(KJV)이 이를 ‘두 팔 사이’(between his arms)로 번역한 것과는 달리 RSV, NIV, Living Bible에서는 ‘어깨들 사이’(between the shoulders)라고 번역하였는데 이것은 사람의 ‘몸통 부분’을 가리킨다. 또 공동번역에서는 이를 ‘등’이라고 의역했는데 이것은 아마도 요람이 도망갈 때 등을 보이고 갔을 것이라는 판단에서 그렇게 하였을 것이다. 한편 불가타(Vulgate)역에서도 예후가 요람의 ‘어깨 사이’를 쏨으로 인해 화살이 요람의 심장을 비스듬이 관통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Bähr, Keil & Delitzsch).

 

9:25 그의 장관 빗갈에게 이르되. 여기서 ‘장관’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샬라쇼’는 ‘세 번째 사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것은 본래 병거에 타는 세 사람 가운데서 세 번째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래서 카일(Keil)은 빗갈이 예후와 함께 병거에 탄 부관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용어는 특수한 군사적인 용어로서 본래의 이와 같은 의미는 사라지고 하나의 직위를 가리키는 명칭으로 쓰였던 같다(T. R. Hobbs). 따라서 이것이 5절에 기록된 군대 장관, 즉 소부대의 지휘자(leader)와 같이 예후보다 직급이 낮은 부하를 가리키고 있다고 볼 수 있다(10:25, 15:25, 대상 12:18) 한편 예후와 행동을 같이 한 이 빗갈이라는 장교는 아합 시대에도 예후와 함께 아합의 부하였다.

네가 기억하려니와. 대부분의 고대 사본들과 70인여(LXX)은 이를 ‘내가 기억하거니와’ 혹은 ‘내가 기억하노니’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히브리어 ‘재콜’을 다음에 이어지는 낱말 ‘아니’라는 1인칭 때문에 잘못 번역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해 본 절은 ‘기억하라’라는 명령형으로 번역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Rawlinson).

너와 내가 … 아합을 좇았을 때에. 본 절은 엘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심판을 왕에게 예언할 때 그 자리에 예후도 함께 있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왕상 21:19).

그의 일을 예언 하셨느니라. ‘예언’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마샤’는 ‘올리다, 짐을 지다’를 뜻하는 동사 ‘나샤’로부터 파생된 명사이다. 이것은 일차적으로는 ‘짐’, ‘올림’을 의미하나 이차적으로는 ‘선지자들의 선포나 경고’ 혹은 ‘위험을 내포하는 예언’(사 13:1, 14:28, 15:1, 나 1:1, 겔 12:10) 등을 뜻한다. 본 절의 내용에 근거해 볼 때 예후는 아합에 대한 엘리야의 선고를 잊지 않고 있었다. 이것은 예후가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신앙이 있었음을 암시해 준다(10:16). 또한 만일 예후가 믿음이 없었다면 하나님께서 아합의 집을 진멸하기 위해 선지자 엘리야를 통해 기름 부으라고 명령하시지도 않았을 것이다(왕상 19:16). 더욱 확실한 사실은 예후가 왕이 되어 바알의 당을 헐고 그곳에 변소를 지었을 때, 하나님께서 예후를 칭찬하신 것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10:27).

 

9:26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 네게 갚으리라. 왕상 21:19에서 엘리야가 아합을 경책한 말과 본 절에 나타난 예후의 말에는 차이점이 많다. 즉 예후의 말은 신 32:43에 기록된 것과 같이 복수하시는 하나님을 부각시키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예후는 자신의 혁명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것임을 설득력 있게 주장하고 있다. 또한 본 절은 왕상 21장에서 기록되지 않은 그 아들들의 피에 관해서도 더불어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의 관례로 보아(14:6) 아버지를 처형시킬 때 아들도 함께 처형했을 것이다(G. Rawlinson). 이와 같이 예후는 아합의 죄에 대하여 보다 광범위한 자료들을 제시함으로써 아합 왕에 대한 백성들의 증오심을 더욱 강화했을 것이다. 혹자는 본 절에서 예후가 한 말과 엘리야 선지자의 선언(왕상 21:19)이 맞지 않은 이유를 예후가 흥분한 상태에서 꼼꼼히 생각하지 않고 말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한다(Bähr). 이는 예후의 과격하고 난폭한 성격으로 미루어 볼 때(20절, 10:1-17)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된다.

 

9:27 본 절에서 아하시야의 죽음을 언급하고 있는 것은 분명히 아하시야가 아달랴와 결혼함으로써 아합의 집과 관계를 맺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하시야가 … 정원의 정자 길로 도망하니. 요람이 죽는 것을 본 아하시야는 자기 나라 즉 남방 유다를 향해 남쪽으로 도주했다. 그런데 그가 도망간 ‘정원의 정자 길’은 갈멜 산 기슭으로서 이스르엘 남쪽 약 11 km 지점에 위치한 ‘엔간님’(동산들의 샘)이라는 곳이다(수 19:21, 21:29). 한편 70인역은 본 절의 이 부분을 ‘벧간 길을 통하여’로 번역하고 있는데 이곳은 오늘날 ‘제닌’(Jenin)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이 길로 계속 가면 사마리아나 예루살렘으로 통하게 되어 있다고 한다. 그래서 대하 22:9에서는 아하시야가 사마리아에 숨었다고 기록하고 있기도 하다.

이블르암 가까운 구르 비탈에서 치니. 이블르암은 오늘날의 ‘벨알메’(Bel almeh)로서 엔간님 남쪽 약 1 km에 있고, 사마리아 동쪽 약 2 km에 있는 요새이다. 또한 이곳은 제닌(Jenin)에서 남쪽으로 수 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수 17:11, 삿 1:27). 그런데 아하시야가 이 길을 통하여 사마리아로 가고자 했던 것은 그곳에 형제들이 있어서 도움을 받을 수도 있었을 뿐만 아니라(10:13) 예루살렘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구르 비탈’은 지금의 ‘구라’일 것으로 짐작되나 분명치는 않다. 다만 갈멜 산 북쪽 기슭의 언덕 이름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할 따름이다. 한편 본 절에서는 아하시야가 사마리아까지 가지 못하고 이블르암 근처 구르 비탈에서 칼을 맞고 부상 당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그리고 사마리아 쪽과는 정반대 방향인 북서쪽에 있는 므깃도까지 가서 거기서 죽었다고 한다. 따라서 대하 22:9에서 아하시야가 사마리아로 피신했다고 기록한 것과는 서로 모순된다. 이에 대해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즉 (1) 아하시야가 사마리아로 피신하였는데 예후의 부하들에게 붙잡혀 예후에게로 끌려왔다. 그리고 그 후 다시 므깃도로 도망을 하려다가 구르 비탈에서 부상을 당하여 결국은 므깃도에서 죽었다고 본다(Keil). (2) 역대기 기자가 말한 ‘사마리아’는 성읍을 가리킨 지명이 아니라 사마리아 왕국의 영토 전체를 가리킨 것이므로 아하시야가 실제로 피신한 곳은 이블르암 부근이었을 것으로 본다(G. Rawlinson). 한편 아하시야가 사마리아로 도망을 가다가 므깃도로 방향을 바꾼 것은 그 길이 단신(短身)으로 피하기 좋고 많은 병거들이 추적해 오기는 어려운 길이므로 사마리아 쪽보다 훨씬 안전했기 때문이다.

 

9:28 다윗 성에서 … 장사하니라. 비록 아하시야가 아합의 집과 교제를 나눔으로서 예후의 손에 죽긴 했지만, 그는 다른 유다 왕들과 동일하게 다윗 성에 있는 가족 묘실에 안장되었다. 역대기 기자는 예루살렘 다윗 성에서 그를 장사지낸 이유를 ‘그는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던 여호사밧의 아들’(대하 22:9)이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9:29 요람의 제십일년에. 본 절과는 다르게 왕하 8:25에는 “요람 제십이년에 유다 왕 여호람의 아들 아하시야가 왕이 되”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서로 다른 연대의 언급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에 대한 설명은 왕하 8:25의 주석을 참고하라.

 

9:30 본 절에서 이세벨은 예후를 맞이할 때 눈과 머리를 꾸미는 등 온갖 단장을 다한다. 23세의 손자를 둔(8:26) 노년의 이세벨이 이와 같이 치장을 한 것은 예후를 유혹하기 위해서(Ewald)가 아니라 황태후로서의 위엄을 갖춤으로 예후를 두렵게 하려는 그녀의 오만한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다(Keil & Delitzsch, Bähr). 이렇게 최후의 순간까지 자기 죄를 오만함으로 감추려는 그녀의 가증스러움은 그녀를 마지막 때까지 최고의 악녀에 대한 상징이 되게 한다(계 2:20). 한편 ‘눈을 그리고’라는 표현은 외부적인 치장이 많으면 많을수록 내면적 허점이 많다는 사실을 나타내 준다(마 23:25). 이러한 표현은 문자적으로 볼 때 흑색 염료, 즉 ‘안티몬’으로 눈을 그린다는 말인데, 이는 바벨론, 앗수르, 메데 페르시아 등지에서 오래 전부터 사용되어 오던 눈 화장법이었다(G. Rawlinson, J. A. Thompson).

 

9:31 너 시므리여 평안하냐. 여기서 언급된 시므리는 바아사 왕가를 몰락시킨 후 일주일 동안 왕위에 올랐던 자이다(왕상 16:8-15). 이와 같이 이세벨이 예후를 직접적으로 반역자로 표현하지 않고 이렇게 시므리에 빗댄 것은 예후에 대한 신랄한 경멸을 암시한다. 즉 바아사 왕가를 몰락시킨 시므리와 같이 예후도 아합의 집을 멸망시킬 수는 있겠지만 일주일도 안돼서 죽고 말 것이라는 저주가 그 말 속에 들어 있는 것이다. 이처럼 이세벨은 예후의 반역이 아합 왕가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임을(6-10절) 깨닫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자신의 악행에 대해서도 회개하지 않고 하나님을 대신하여 심판의 칼을 든 예후를 조롱하듯 저주했다. 한편 이세벨이 예후에게 ‘평안하냐’고 질문한 것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다. 혹자는 이것을 ‘시므리 만세’ 또는 ‘네 주를 죽인 시므리여 이것이 평화적인 것이냐?’(Bähr, Rawlinson) 등으로 이해한다. 또한 이런 말을 함으로써 예후의 행동을 중지시키려고 했다는 견해(Wycliffe)나 자신의 운명을 알기 위해서 이런 말을 했다는 견해(Keil & Delitzsch)도 있다. 어쨌든 이것은 예후가 시므리와 같이 멸망할 것이며 곧 평안하지 못하게 될 것이란 의미를 비꼬아서 한 말이라고 볼 수 있다.

 

9:32 내 편이 될 자가 누구냐. 예후는 그 당시 민심이 거의 아합 왕실에서 떠난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게 때문에 그는 사람들을 자기 편으로 포섭하는 데 별로 힘들지 않았다(G. Rawlinson, 15, 18, 19절). 이세벨을 처형하려는 상황에서도 그는 사람들을 자기편으로 이끌려고 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예후의 말은 당시의 상황을 구경하는 자들에게 결단을 촉구한 것이기도 하다(Wycliffe).

두어 내시가 예후를 내다보는지라. 내시는 히브리어로 ‘사리스’인데 왕궁의 궁녀들을 관할하는 환관 즉 고위 내시들이다. 그러나 그들까지도 아합 왕실을 배반하고 예후의 혁명에 가담하였다.

 

9:33 예후가 그의 시체를 밟으니. 예후가 자신의 발로 시체를 밟은 것(Ewald)이 아니라 자신이 타고 있던 말이 그녀를 밟은 것이다(Bähr).

 

9:34 그는 왕의 딸이니라. 이세벨은 시돈 왕 엣바알의 딸이었다(왕상 16:31).

 

9:35 없음.

 

9:36 이세벨의 최후에 대해서는 이미 엘리야 선지자에 의해 예언되었다(왕상 21:23). 이 말은 하나님께서 그녀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셨음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우상 숭배를 멈추지 않고 모든 이스라엘의 지도자들과 백성까지도 그 우상 숭배에 빠지게 하였다. 그 결과 그녀와 함께 우상 숭배에 빠진 모든 백성들도 처참하게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죽임을 당했다(10:18-25). 만일 이세벨과 같이 하나님을 떠나 우상 숭배에 빠지면, 누구든지 예외 없이 그녀와 같이 비참한 죽음을 당하게 될 것이다.

 

9:37 본 절은 본래 엘리야의 저주 속에는 없는 내용이다(왕상 21:20-24). 한편 본 절에서 ‘거름같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도멘’으로서 ‘똥’(dung)을 의미한다. 이것은 여왕의 이름에 해당하는 ‘세벨’과 그 뜻이 일맥상통하는데 실제로 아람어에서는 본질상 동일한 것으로 간주한다(Gray). 한편 본 절의 이러한 표현이 성경에서 마치 속담처럼 자주 쓰이고 있는 사실(시 83:10, 렘 9:22, 16:4)을 통해서 볼 때, 열왕기서 기자는 본 절을 후대의 교훈으로 삼기 위해 언어 유희적인 표현을 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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