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 주석, 열왕기하 0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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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혹자는 본 절 이후의 사건을 앞 장의 기사와 별개의 것으로 취급하려 한다(T. R. Hobbs). 왜냐하면 6:33에는 등장 인물이 ‘사자’인데 반해 2절에서는 그 등장 인물이 ‘한 장관’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문맥의 흐름과 사건의 연결로 볼 때 앞 장의 사건과 본 절 사이에는 긴밀한 관계가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왜냐하면 7:1, 2절은 앞 사건의 한 구성 요소일 뿐만 아니라 그 기사의 절정이기 때문이다(G. Rawlinson).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예언을 선포할 때 사용되는 고전적인 서론 형식을 엘리사가 이처럼 사용한 것은 이 번이 처음이다. 이러한 서론 형식은 공공의 집회에서 백성들의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하여 흔히 사용되던 것이다(Pulpit Commentary, 렘 2:4, 10:1, 미 3:1, 암 7:16, 17). 그리고 ‘들을지어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쉐마’는 단수 형태로 사용되기도 하고(렘 2:4), 복수 형태로 사용되기도 하는데(미 3:9) 일반적으로는 복수 형태로 사용되는 것이 정상이다(Hobbs). 그러나 이 단어가 단수로 사용될 때는 ‘듣는 무리를 하나로 취급할 때’나 ‘무리 속에 있는 개개인을 하나하나로 간주해 그 설교의 대상으로 삼을 때’이다(렘 22: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러한 표현은 사마리아 성이 아람으로부터 구원받게 되는 것이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강조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한편 ‘이르시되’란 말은 히브리어 ‘아마르’의 번역으로서 ‘대답하다, 확인하다, 명하다’란 의미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본 절의 이러한 표현은 여호와의 확신적 선언임을 알 수 있다.

내일 이맘때에. 여기서 ‘때’를 가리키는 히브리어 ‘카에트’는 명사 ‘에트’ 앞에 전치사 ‘카’가 첨가되어 있다. 그런데 이러한 형태가 구약에서는 아주 드문 예로서(민 23:23, 수 11:6, 삼상 4:20, 왕하 4:16), 이것은 어떤 특별한 시점(時點)을 가리킨다. 즉, 바울이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라고 말한 바로 그 ‘때’(헬, 카이로스)와 같은 의미를 나타낸다.

사마리아 성문에서. 고대의 성들에는 큰 성문이 있었는데 그곳에는 넓은 뜰이 함께 있어 그 지역 사회의 공적인 장소가 되기도 했다. 즉, 공적인 연설의 장소(창 34:20), 공무 집행 장소(왕상 22:10), 재판이 열리는 곳(신 17:5, 행 7:58), 사열하는 곳(삼하 18:4) 뿐만 아니라 말씀을 선포하는 장소(렘 17:19, 20) 등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본 장에서는 성문이 곡물을 파는 시장으로 사용된 듯하다(17, 18절).

고운 밀가루 한 스아를 한 세겔로 매매하고. 여기에 언급된 한 ‘스아’는 한 ‘에바’의 약 1/3에 해당되는 부피로서 약 7.33 리터 정도이다. 한편 이것이 평상시보다는 고가에 해당되지만 당시의 형편으로 볼 때는(6:25) 엄청난 가격 절하이다. 즉, 고운 가루 한 스아의 값이 당시에 거래되던 비둘기 똥 사분 일 갑(kab)에 해당하는 가격의 1/5 밖에 안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 ‘갑’(약 1.3 리터)은 한 ‘스아’의 약 1/6에 해당되므로 이것을 통해서 고운 밀가루의 가격 절하 정도가 얼마나 큰지 짐작할 만하다. 따라서 이 예언이 기근으로 허덕이던 사마리아 성 안의 사람들에게는 구원의 선포로 들렸을 것이다. 한편 ‘한 세겔’이 금인지, 혹은 은인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언급이 없으나, 금 한 세겔은 은 한 세겔의 15배에 해당되고(대상 21:25) 은 한 세겔은 일반 노동자의 4일에 해당하는 품삯이다(출 30:24, 삼하 24:24).

 

7:2 한 장관. 여기서 ‘장관’을 뜻하는 히브리어 ‘샬리쉬’는 ‘셋’을 의미하는 ‘샬라쉬’에서 파생된 것으로 BDB(F. Brown, S. R. Driver, and C. A. Briggs, Hebrew and English Lexicon of the Old Testament)에서는 ‘병거에 탄 세 번째 사람’으로 번역하고 있다. 그 뿐만 아니라 혹자는 이를 ‘셋째 관리’로 번역하기도 한다(Thiele, Mysterious Numbers, p. 114). 한편, 거니(Gurney)에 따르면 헷족(Hittite)의 전차는 세 사람이 몰도록 되어 있는데 그것은 전시에 가능한 한 빨리 많은 사람들을 수송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람세스 2세와 가데스에서 전쟁할 때 헷족(Hittite)은 바로 이러한 삼륜 전차를 이용했다(Yadin, Art of Warfare 1:104-105). 그러나 구약 성경에서는 ‘샬리쉬’라는 단어가 군대와 관련해서 번역된 적은 전혀 없다(T. R. Hobbs). 오히려 출 15:4에서는 ‘택한 장관’(RSV)으로, 겔 23:23에서는 ‘귀인’으로 번역되어 왕의 측근에서 왕을 보필하는 자를 나타낸다(Pulpit Commentary, Keil & Celitzsch).

왕이 그의 손에 의지하는 자가. 왕의 전속 부관(Keil & Delitzsch), 즉 나아만과 같은 직급에 속한 이 사람은 이스라엘 왕이 신임하는 중요한 인물이었다.

여호와께서 하늘에 창을 … 있으리요. 이것은 창 7:11에 기록된 홍수 사건을 의식한 말로서 엘리사 선지자의 예언의 진실성을 의심한 것이다. 그리고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능력을 부인한 것일 뿐만 아니라 선지자를 심하게 조롱한 것이다(K. W. Bähr). 따라서 그는 정죄를 받아 죽임을 당할 수 밖에 없었다(20절).

 

7:3 나병환자 네 사람이 있더니. 랍비들의 전승에 의하면 이 나병환자들은 게하시의 아들들이라고 하는데(T. R. Hobbs) 이에 대한 성경적 근거는 없다. 그리고 율법에 따르면 나병환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존재라 하여 이스라엘의 공동체에서 격리되어 성 밖에서 살았으며(레 13:46, 민 5:3) 친지들이 공급해 주는 음식으로 연명했다(Pulpit Commentary). 그러나 당시에는 성 안의 거주자들도 목구멍에 풀칠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에 이들에게 음식 공급이 단절된 것은 두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한편 혹자는 이들이 ‘성문 앞’ 혹은 ‘통로’(gateway)에 있었다고 한다(Keil & Delitzsch).

 

7:4 우리가 가서 아람 군대에게 항복하자. 이 네 나병환자들은 가만히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기 보다는 차라리 적군에게 항복하는 길이 낫다고 생각해서 그 길을 택했다. 여기서 ‘항복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팔’은 ‘탈주하다, 떨어지다, 눕다’라는 뜻 외에 ‘넘어가다’ 라는 뜻도 지닌다(삼상 29:9, 렘 39:9). 이에 따라서 70인역(LXX)에서는 ‘들어가자’란 뜻인 헬라어 ‘에이셀데인’으로 번역하여 이들 네 사람이 아람에게 항복하러 간 것이 아니라 양식을 구하기 위하여 들어간 것으로 나타낸다. 그리고 KJV과 RSV도 70인역(LXX)의 이러한 번역을 지지해 주고 있다. 그러므로 이들이 아람 진영에 가고자 한 행위를 반드시 항복하러 가는 것으로 해석하기 보다는 단순히 양식을 구하러 들어갔던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7:5 해 질 무렵에 일어나. 본 절에서 ‘해 질 무렵’에 해당되는 히브리어 ‘네쉐프’는 ‘해 뜰 때’ 나 ‘해 질 무렵’의 엷은 태양빛(twilight)을 의미하는 것으로 ‘여명’, ‘황혼’ 등을 뜻한다. 그리고 본문의 9절과 12절을 근거로 해서 볼 때 ‘해 질 무렵’으로 번역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Keil & Delitzsch, Lange Commentary, Pulpit Commentary).

 

7:6 이는 주께서 … 듣게 하셨으므로. 병거 소리와 말소리, 그리고 큰 군대의 소리를 아람 군대에게 듣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이적적인 역사였다. 그 뿐만 아니라 3:22에서도 아람은 이와 유사한 방법에 의해 속임을 당했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들은 바로 하나님께서 역사의 주권자가 되심을 보여준다. 즉, 여호와께서는 나아만을 통하여 아람에게 승리를 주시기도 하셨으나(5:1) 또한 이와 같이 패하게도 하신 것이다. 한편 혹자는 이 소리의 근원을 산골짜기에 밀어닥친 바람에 기인했을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한다(K. W. Bähr, Wycliffe). 그러나 ‘소리’(sound)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콜’인데 ‘인간의 음성’을 나타내기 때문에 이러한 해석은 억측에 불과하다(G. Rawlinson).

헷 사람의 왕들과 애굽 왕들에게. 여기서 언급된 ‘헷 사람의 왕들’을 초기 헷(Hittite) 제국의 제왕들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B.C. 1200년경 오늘날의 터어키(Turkey) 전역을 차지하고 있던 헷 제국은 앗수르와 해안에 퍼져 있던 소수 민족들에 의해서 붕괴되었기 때문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로는 왕상 9:21에는 솔로몬이 헷 제국이 멸망한 뒤에 남아있던 헷 사람들을 이스라엘의 노예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한편 헷 문화는 아람 북쪽에 남아 소규모 집단을 형성하고 있던 헷족의 여러 왕들 또는 장군들에 의해 전해져 오다가 후에는 점차적으로 셈 문화에 병합되고 말았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헷 사람의 왕들’은 바로 소규모 집단의 우두머리들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Gelb, O. R. Gurney). 그리고 당시에 이들은 소규모 집단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세력을 형성하여 갈그미스 부근의 북 아람 쪽에 위치하고 있어서 니느웨 왕들에게는 위협적인 존재가 되어 왔었다. 그래서 이들이 이스라엘을 돕기 위하여 왔다고 아람 사람들이 생각했기 때문에 그들이 도망한 것은 당연하였다(G. Rawlinson).

또 본 절의 ‘애굽 왕들’이라는 복수 형태의 표현에도 상당한 논란점이 있다. 왜냐하면 애굽은 언제나 단일 왕 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다음과 같이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1) 당시 애굽 왕조의 분열로 부바스티스(Bubastis), 타니스(Tanis), 멤피스(Memphis) 지역을 각기 다른 왕들이 통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왕들’이라는 복수 표현을 썼다는 해석이다(G. Rawlinson). (2) 히브리 본문에서 ‘애굽’을 뜻하는 ‘미츠라임’을 ‘무스리’(Musri)를 뜻하는 ‘무츠림’으로 읽을 수 있다는 해석이다(T. R. Hobbs, Wycliffe). 왜냐하면 당시 무스리는 소아시아의 실리시아(Cilicia)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고 다수의 왕들이 복수제로 통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Gurney). 그리고 앗수르의 기록들을 보면 종종 애굽을 무스리라고 칭했는데 이렇게 명칭을 서로 바꾸어 혼용해서 사용했기 때문에 성경에서도 무리없이 ‘애굽 왕들’이라고 표기한 것이다. 그러나 무스리가 애굽에 속한다고 볼 수는 있으나 무스리와 애굽을 동일시 할 수는 없다.

 

7:7 해질 무렵에 일어나서. 5절과 비교해 볼 때 아람 군대가 달아난 시각과 나병환자들이 아람 진영으로 출발하기 시작한 시간이 거의 일치한다.

말과 나귀를 버리고 진영을 그대로 두고. 그들이 왜 좋은 말과 나귀를 그대로 버려두고 달아났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가 없다. 아마 그들은 너무나 공포에 질려서 군장을 꾸릴 여유가 없었던 것 같다. 이러한 상황은 기드온의 300 용사의 외침에 놀란 미디안 군사들이 자기들끼리 서로 죽였던 상황과 유사하다(삿 7:19-23). 이처럼 하나님의 권능은 당신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두려움으로 작용한다(시 76:12, 요 2:11, 습 2:11). 그러나 당신을 의지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도움이 되시고(시 33:20, 46:1, 121:1, 146:5, 사 50:7, 고후 6:2), 피난처가 되신다(시 14:6, 46:1, 렘 17:18, 욜 3:16). 또 혹자는 작전상 적으로 하여금 그들이 진영을 떠나지 않은 것처럼 믿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말한다(G. Rawlinson).

 

7:8 본 절에는 네 명의 나병환자가 아람 진영에 들어가서 취한 행동이 자세히 언급되어 있다. (1) 식욕을 채움: 이 식욕은 수면욕과 더불어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이다. 이들은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서 목숨까지 건 위험을 감행했다. (2) 재물욕을 채움: 일단 식욕이 채워지고 나면 한 걸음 더 나아가 재물에 대한 욕심이 생기기 시작한다. 이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처럼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신의 욕구를 위해 온 신경을 쏟으나, 그럴수록 탐욕으로 인한 공허감과 불만은 더욱 가중되어 간다(시 39:6, 합 2:9, 딤전 6:9-11). 이와 관련하여 예수께서는 가시떨기에 뿌려진 씨앗의 비유를 말씀하신 바 있다. 즉, 가시떨기에 뿌려진 씨앗은 말씀을 듣기는 하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財利)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에 비유된다(마 13:22). 그러나 성도들은 불신자들과 같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에 대하여 걱정하지 않아야 한다(마 6:25, 31). 왜냐하면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이와 같은 기본적인 것은 이미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마 6:32). (3) 뉘우침: 이들은 자신들의 배만 채우는 소위(所爲)를 뉘우치고 성 안에서 굶주리고 있는 자기 형제들에 대하여 생각하게 되었다. 이러한 이들의 행위는 엄청난 구원의 복음을 받은 성도들에게 적용된다. 우리들은 세상의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한 복음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감추어 두기만 한다면, 한 달란트 받은 사람처럼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까지도 빼앗길 것이다(마 25:29). 그래서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자신에게 화(禍)가 있을 것이라고 고백했다(고전 9:16).

 

7:9 아름다운 소식. ‘아름다운 소식’은 히브리어 ‘베스라’를 번역한 말로서 항상 좋은 소식을 뜻하는 것만은 아니다(삼하 18:20). 그러나 여기서는 사마리아 사람들의 생명을 건지는 복음의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다. 한편 이 나병환자들이 양심의 가책을 느낀 것은 단순히 조국애 때문이 아니라 앞으로 닥칠지도 모를 보복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마리아 성 안의 사람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는 이때에 자기들만 욕심을 채운다는 것은 어떠한 형태로든지 벌을 받아 마땅하기 때문이다(Word Biblical Commentary).

 

7:10 성읍 문지기를 불러 그들에게 말하여. 여기서 ‘문지기’를 뜻하는 히브리어 ‘쇼에르’는 성문을 수비하는 병사들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명칭이다(Keil). 여기서 나병환자들은 자신들이 성 안에 들어가지 못하는 당시의 규례(레 13:46, 민 5:3) 때문에 성안으로 직접 들어가지 못하고 아람군이 도망했다는 기쁜 소식을 문지기에게 전달한다. 그런데 이스라엘을 살리는 이 구원의 기쁜 소식이 여러 단계의 명령 계통을 거치게 됨으로 시간적으로 상당히 지체되었을 것이다(11절).

 

7:11 없음.

 

7:12 이스라엘 왕은 문둥이들이 전한 소식을 즉시 믿지 않고 이것을 아람 사람들의 책략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본 장에서는 공직자들의 회의적인 태도를 공통적으로 보여주게 된다(2절). 그렇지만 왕의 추측이 잘못된 것만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공동체와 격리되어 살던 나병환자의 말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과거에 여호수아가 아이 성을 공격할 때(수 8장)도 이와 같은 수법을 사용했었으며 아비멜렉이 세겜 성을 탈취할 때(삿 9:30 이하)도 동일한 책략을 사용했었기 때문에 왕은 쉽게 그렇게 판단했을 수 있었다.

 

7:13 나아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5:13) 본 절에서 왕은 자신보다 지위가 낮은 신하에 의해 문제의 해결점을 모색하게 된다(3:11, 6:12). 즉, 한 신하의 제안은 네 명의 나병환자와 같이 죽음을 각오하고 결단을 내리자는 것으로 결국은 좋은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그것들이 … 온 무리와 같으니이다. 이것은 ‘이 마병들이 성중에서 이미 죽었거나, 아니면 아직 생존해 있는 모든 이스라엘 무리와 같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다시 말해서 그 마병들은 성중에 남아 있더라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아사(餓死)를 당하게 될 것이며, 설혹 적진에 들어가 붙잡히더라도, 싸울 힘이 없어 점령당할 사마리아 성민과 같이 죽게될 것이니, 어차피 결과는 마찬가지라는 뜻이다.

 

7:14 그들이 병거 둘과 그 말들을 취한지라. 여기서 왕이 아람을 정탐하러 보내면서 마병이 아닌 병거를 보냈다는 사실은 아무래도 어색하다. 그리고 병거 둘에 말 다섯 마리(13, 14절)를 취한 것도 자연스럽게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당시에는 한 병거에 두 마리의 말이 쓰인 경우가 있고 세 마리가 쓰인 경우도 있기 때문에 후자의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이 가능하다. 그러나 전자의 문제 즉, 왜 마병 대신에 병거를 보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어색한 점으로 남는다. 한편 히브리 성경 BHS(Biblia Hebraica Stuttgartensia)의 본문 비평에는 ‘병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레켑’을 ‘리케비’로 수정하고 있는데 이렇게 하면 이 단어는 ‘마병’이라는 뜻이 된다(Word Biblical Commentary). 그러나 그렇게 본문을 수정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병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레켑’은 다양하게 번역되기 때문이다(13:7, 신 24:6, 삿 9:53, 삼하 8:4). 그리고 왕이 두 병거를 동시에 보낸 것은 하나가 적에 잡히더라도 나머지 하나가 급히 돌아와 보고를 하도록 하기 위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Lange Commentary).

 

7:15 그들이 그들의 뒤를 따라 요단에 이른즉. 아람이 요단을 통과하여 자신들의 본국으로 도망간 것은 성경에서 잘 알려진 경로를 통해서였다. 실제로 아람의 퇴각로는 두 길이 있었다. 하나는 와디 파리아(Wadi Faria) 사막을 통과하여 ‘아담의 다리’(Bridge of Adam)가 있는 요단 강쪽을 지나 얍복 강으로 도망가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6장에서 나오는 바와 같이 아람 군대가 엘리사를 잡으러 왔던 길, 즉 도단 계곡(the Valley of Dothan)의 북쪽 제닌(Jenin)을 지나 야무크(Yarmuk)로 도망가는 길이다. 그러나 그 외의 길은 모두 적지를 통과하는 길이므로 퇴각로서는 부적합한 길이었다(T. R. Hobbs). 한편 요단 강까지 따라간 정찰병들은 아람 군대가 사마리아에 대한 공격 의지를 완전히 버리고 도망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을 것이다.

버린 의복과 병기가 길에 가득하였더라. 이것을 볼 때 12절에서 왕이 의심한 것과 같이 아람 군대가 도망간 것처럼 꾸민 책략으로 보기에는 너무 실제적이었다. 이러한 사실을 볼 때 아람 군대가 얼마나 황급히 도망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7:16 16-17절. 본문에는 두 가지 예언의 성취가 기록되어 있다. (1) 경제의 회복: 엘리사는 고운 가루 한 스아에 한 세겔을 하고 보리 두 스아에 한 세겔을 할 것이라고(1절) 왕에게 예언했는데, 이것은 정확하게 성취되었다. 자기 아들을 삶아 먹을 정도로 기근이 심했던 사마리아 성의 경제가 하룻밤 사이 이렇게 거의 정상적으로 회복된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큰 이적이었다. (2) 장관의 죽음: 엘리사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했던 장관에게 눈으로 보겠지만 먹지는 못할 것이라고(2절) 심판적인 예언을 했다. 이 예언도 정확하게 이루어졌으니, 곧 그가 성문의 출입을 통제하던 중 백성들의 발에 밟혀 죽음으로써 그 곡식들을 맛보지 못했다. 이처럼 하나님의 약속을 무시했던 장관은 사마리아 성이 구원되는 그 순간에 비참하게 죽임을 당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는 모든 사람에게도 적용된다. 출애굽 노정에서 여호수아와 갈렙 외의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여 하나님을 원망하고 지도자 모세를 반역했다. 그 결과 그들은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해석함에 있어서 히브리서 저자는 그들이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했다(히 3:17-19, 4:5, 6).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 당시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거부함으로써 그들에게 약속된 구원이 이방인들에게로 옮겨지게 되었다(롬 11:11). 하나님께서는 본 절에 기록된 것보다 더 큰 이적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구원을 믿지 않는 많은 사람들은 밟혀 죽은 장관과 같이 구원의 소식만 듣고 그것에 참예하지도 못하고 죽어가고 있다. 한편 엘리사의 예언에 대해 불신앙을 나타냈던 한 장관을 백성이 ‘밟으매’라는 말은 매우 엄격하고 잔인한 의미를 담은 표현이다. 왜냐하면 그 말은 히브리어 ‘이르메수후’를 번역한 것으로 ‘토기장이가 진흙을 이기기 위해 짓밟은 것’을 나타내는 용어이기 때문이다.

 

7:17 없음.

 

7:18 18-20절. 본문은 본 장 전체의 요약으로 볼 수도 있고 단순한 부차적인 설명으로 볼 수도 있다(Montgomery). 그러나 그레이(Gray)의 말처럼 본문을 통해서 열왕기서 기자는 하나님의 약속과 예언의 말씀의 성취를 강조적으로 보여줌으로써 하나님의 권위를 부각시켜준다. 또한 본 절은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는 과정에서 나병환자 네 사람과 아람 군대를 하나님이 도구로 사용하셨음을 보여 준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가장 미천한 것을 들어 사용하실 뿐만 아니라 역사적 사건들을 주관하심으로 약속을 이루시는 신실하신 분이시다.

 

7:19 없음.

 

7:20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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