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 주석, 열왕기하 0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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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선지자의 제자의 아내 중의 한 여인이. 본 절은 선지자의 제자들이 전부 독신 생활을 하거나 수도원 생활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Lange, Pulpit Commentary). 그리고 그들은 가정 생활을 영위하면서 한 가정의 가장도 되었을 뿐만 아니라 선지자 제자들의 공동체 생활을 병행해서 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신의 종 나의 남편. 요세푸스와 랍비들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 사람은 궁내 대신 오바댜를 가리켰다고 한다(왕상 18:3). 그들의 말에 따르면 아합의 궁내 대신인 오바댜가 핍박당하는 선지자들에게 필요한 양식을 공급하였는데 이때 그가 자신의 재산을 다 써버렸기 때문에 빚을 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에 대한 근거로 요세푸스는 본 절과 왕상 18:3 두 곳에서 다 오바댜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였음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Lange). 그러나 혹자는 이러한 사실에 대한 구체적인 근거는 없으며, 본 절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빚진 자가 가난하게 된 것이 단지 자신의 어리석음 때문만은 아니었음을 말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K. W. Bähr). 어쨌든 본 절의 표현으로 미루어 볼 때 그 선지자의 제자가 진실로 하나님을 섬기고 엘리사를 따랐던 것만은 확실하다(Pulpit Commentary).

종을 삼고자 하나이다. 당시 사회에서는 개인의 신용에 의해 대부(貸付)가 되었다. 그리고 그 빚에 대한 보증은 일반적으로 자신과 가족의 노동력, 그리고 그들에게 의존하는 자들(종과 노예 등)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차용자는 대체적으로 자신의 몸을 담보로 해서 돈을 빌리고 만일 약속 기한까지 갚지 못하면 그 돈에 해당하는 노동력을 제공하기 위해 종살이를 해야만 했다. 그리고 채무자가 빚을 갚지 못할 경우 채권자가 빚진 자의 자녀를 종으로 삼는 것은 모세의 율법으로 볼 때도 당연한 일이었다(레 25:39, 40). 그러나 율법은 가난한 자들의 고통을 덜어 주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조건들을 더불어 제시하고 있다. (1) 빚 때문에 종살이 하는 자는 종과 같이 엄하게 부리지 말고 품꾼이나 우거하는 자 같이 대우하라(레 25:39, 40). (2) 기한은 희년(매 50년마다 돌아옴)까지이며 그 후에는 다시 조상의 기업을 회복하게 하라(레 25:40, 46). 이것은 비록 빚진 자일지라도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해 주어야 한다는 성경의 정신을 잘 나타내 준다(출 22:22, 신 24:10-13).

 

4:2 내가 너를 위하여 어떻게 하랴. 본 절에 언급된 엘리사의 말은 예수께서 여리고에서 떠나가시던 중 길가의 소경들이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칠 때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시던 모습을 상기시킨다(마 20:29-34).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필요를 잘 아시지만 직접 구체적으로 구할 것을 요청하신다. 그래서 야고보는 우리가 먼저 하나님께 구하지 않기 때문에 얻지 못한다고 하였다(약 4:2).

네 집에 무엇이 있는지 내게 말하라. 이 말은 ‘지금 갖고 있는 당신의 소유가 무엇이냐’고 물은 것과 동시에 ‘당신이 무엇을 팔아서 빚을 갚을 것이냐’는 질문인 것이다. 왜냐하면 엘리사는 지금 과부의 필요, 즉 생계 유지의 문제와 빚의 청산 문제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4:3 빈 그릇을 빌리되 조금 빌리지 말고. 비록 여인의 집에 남은 것이라고는 기름 한 그릇뿐이었지만(2절) 엘리사는 그 여인에게 하나님의 무한하신 능력(욥 42:2, 시 115:3)을 보여주기 위해 빈 그릇을 구할 수 있는 대로 빌려오라고 했다. 이러한 엘리사의 말에는 여인의 믿음을 시험해 보려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다. 즉 그녀가 믿음이 크면 클 수록 많은 그릇을 빌려올 것이고 반대로 믿음이 적으면 적을수록 그릇을 조금 빌려올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이것은 예수께서 ‘네 믿음대로 되라’(마 8:13, 9:29)고 말씀하신 것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4:4 들어가서 문을 닫고. 이와 동일한 구절이 본 장에서 여러 번 나타나는데(4:5, 21, 33, 6:32) 이것은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의 비밀스런 특징을 나타낸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은혜는 은밀한 교제 속에서 풍성히 내려진다. 그래서 예수께서도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 6:6)고 말씀하셨다. 사실 엘리사도 본 장에서 하나님의 이적을 나타내기 위해 문을 닫고 은밀하게 하나님께 기도했다 (33절). 문을 닫는 행위는 어떤 것에도 방해를 받지 않으려는 의도를 나타낸다(Lange, Wycliffe).

 

4:5 본 절에서는 여인의 믿음에 의한 순종 행위를 부각시켜 주고 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대해 이성적으로 생각할 때에 불합리하게 여겨질지라도 이 여인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야 비로소 하나님의 놀라운 이적을 경험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말씀에 대해 순종하는 성도들에게만 은혜를 베푸시기 때문이다(신 30:2, 3, 삼상 15:22, 행 5:29).

 

4:6 기름이 곧 그쳤더라. 그 여인이 그릇을 하나만 빌렸다면 기름은 한 그릇에만 채워졌을 것이며 열 개를 빌렸다면 그 열 개의 그릇에 다 채웠졌을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성도들이 갖고 있는 믿음의 분량대로 풍성히 은혜를 베푸신다(요 10:10). 그리고 또한 이것은 곧 우리의 필요를 정확히 아시고 공급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나타낸다(Wycliffe).

 

4:7 그 여인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나아가서 말하니. 그릇을 빌려온 사람은 여인일지라도 그 그릇에 담긴 기름의 소유자는 하나님이셨다. 그래서 여인은 이러한 소유물이 하나님의 것인 줄을 알고 선지자에게 보고한 것이다(Lange, Pulpit Commentary). 한편 우리의 주변에는 하나님의 것을 자신의 소유로 착각하여 자기의 생각대로 처리하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통해(눅 12:16-21) 물질의 소유주 뿐 아니라 생명의 주인까지도 누구인지를 분명히 알려주셨다.

기름을 팔아. 하나님의 이적으로 생긴 기름을 파는 것은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 이스라엘은 꿀 뿐만 아니라 밀, 기름, 유향 등을 갖고 주변 국가들과 무역을 하였기 때문이다(겔 27:17).

 

4:8 하루는. 문자적으로는 ‘그 날’, 즉 ‘그 때에’(Keil & Delitzsch), 혹은 ‘그 날이었다’(Word Biblcal Commentary)란 의미이다. 그리고 이 구절은 11절과 18절에서 처럼 어떤 사건이 발생한 ‘특정한 날’을 가리킨다.

수넴에 이르렀더니. 수넴은 오늘날 술람이라는 곳과 동일한 곳으로서 므깃도 남방 약 11.2 km 지점에 위치하며 이스르엘 평야에서 바라보이는 모세 산(창 12:6) 중턱에 자리잡고 있다. 또한 이곳은 이스르엘 북쪽 약 7 km 정도에 위치한 곳으로 수 19:18을 보면 잇사갈 지파의 영토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사울과 블레셋이 전투한 길보아도 바로 수넴 부근이었다(삼상 28:4). 한편 성경에 기록된 수넴 여인은 둘이 있는데 하나는 아비삭(왕상 1:3)이며 또 다른 하나는 본 절의 ‘귀한 여인’이다.

귀한 여인. 여기서 ‘귀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게돌라’로서 ‘위대한, 존귀한, 키 큰’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키 큰’이라는 의미는 사람에 대해서는 사용하지 않고 식물 등에 사용된다. 그래서 대부분의 영역 성경은 ‘부한’(well-to-do, substantial) 또는 ‘위대한’(great)으로 번역하고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주석가들도 이 말을 ‘부요한’으로 해석하여(Keil) 이 여인을 ‘남편 덕택에 부자가 된 여인’으로 보고 있다(G. Rawlinson). 한편 랍비들의 유전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 여인은 아비삭의 누이 동생으로서 선견자 잇도의 아내였다고 한다(대하 9:29). 그리고 그녀는 백 세가 넘도록 살았다고 한다(Ginszberg, Legends of the jews, 4:242-244).

 

4:9 항상 우리를 지나가는. 엘리사는 자주 갈멜(2:25)에서부터 이곳을 지나 갈릴리에 있는 성읍들까지 여행을 했던 것 같다. 열왕기하에 기록된 엘리사 선지자의 대부분의 활동이 갈멜의 남쪽 지역이었는데 수넴 또한 그의 주요한 활동지였다. 이와 같이 엘리사는 아마도 사무엘 선지자처럼 백성들을 보살피기 위하여 정기적인 여행을 했던 것 같다.

이 사람은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인 줄을 내가 아노니. 수넴 여인은 엘리사가 참된 하나님의 사람임을 스스로 고백하고 있다. 오랫동안 친숙한 관계를 유지하게 되면 상대방의 허물을 보기 십상이지만 엘리사는 참된 하나님의 사람이었기에 세인(世人), 즉 이 여인으로부터 이러한 평가를 받게 된 것이다. 이것은 당시에 존재해 있던 자칭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하면서 세인들로부터 비난을 받는 거짓 선지자들(Lange, Pulpit Commentary)과 좋은 대조가 된다. 한편 본 절에는 수넴 여인의 영적인 분별력과 하나님에 대한 그녀의 열심이 묘사되어 있다. (1) 영적인 분별력: 그녀는 엘리사가 하나님의 거룩한(히, 카도쉬: ’구별된, 분리된’) 자임을 확신했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장막 문에 앉았다가 맞은 편에 서있는 세 사람을 하나님의 사자로 알고 영접하여 극진히 대접한 것과 유사하다(창 18:1-8). 이와 같이 성도들은 영적 분별력을 소유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롬 12:2, 사 11:3, 고전 2:14). (2) 하나님에 대한 열심: 그 여인은 외간(外間) 남자를 자기 집에서 유할 수 있도록 자기 남편을 설득했다. 이것은 그녀가 엘리사를 하나님의 거룩한 자로 알았을 뿐만 아니라, 그 깨달은 사실을 적극적으로 행동으로 나타내었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곧 하나님에 대한 열심이 대단했음을 보여준다(신 6:5, 시 119:2, 잠 3:5). 이러한 여인의 행위에 대해 하나님은 침묵하시지 않고 축복하셨다. 왜냐하면 지극히 작은 소자 하나에게 행한 것이 곧 하나님께 행한 것이기 때문이다(마 10:42, 18:5).

 

4:10 본 절에서는 하나님의 사람을 섬기는 수넴 여인의 열정과 헌신된 봉사가 돋보인다. 그리고 그녀의 설득으로 그녀의 남편이 다락에 덧붙여 지은 작은 방이(G. Rawlinson) 엘리사에게 안락한 휴식처로 제공되었다(11절). 이와 같은 수넴 여인의 봉사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를 돕는 또 하나의 사역이었다. 지극히 작은 자에게 베푸는 사랑도 그리스도를 위한 것일진대, 수넴 여인의 봉사는 더 말할 필요도 없는 진정한 신앙의 열매였다(마 25:40, 눅 16:10). 한편 본 절에 언급된 작은 방은 ‘집의 평평한 지붕 위에 지어진 방’(Thenius), 혹은 ‘다락에 덧붙인 작은 방’을 말한다(Pulpit Commentary). 그러나 그 방으로 드나드는 통로는 바깥 벽면에 계단으로 되어 있어서 그 집 본체와는 상관없이 출입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방 안에는 침상과 책상과 의자, 그리고 촛대를 갖추어 놓아 침실로서만이 아니라 휴식과 연구를 위한 공간으로 만들어 졌다.

 

4:11 하루는 … 그 방에 들어가 누웠더니. 8절에서 이미 설명한 바와 같이 ‘하루는’이라는 표현의 의미는 ‘사건이 발생한 특정한 시간’을 가리킨다. 그리고 당시에 발생한 사건과 엘리사가 누워 있던 그 방과의 연관성이 본 절에 암시되어 있다.

 

4:12 자기 사환 게하시에게 이르되.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가 성경에 등장한 것은 여기가 처음이다. 그리고 게하시의 출신이나 그가 과거에 무슨 일을 했었는지, 또한 그가 왜 엘리사의 종으로 선택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전혀 없다. 한편 ‘사환’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나아르’는 2:23에서 ‘젊은 아이들’로 번역된 것으로 ‘종’이라는 의미로도 쓰인다(민 22:22, 삼상 9:3, 삼하 9:9 등). 그러나 ‘나아르’는 ‘노예’와 같이 개인적인 자유를 완전히 상실한 종이 아니라 주로 주인의 시중을 들거나 개인적인 심부름을 하는 종을 가리킨다. 또한 이들은 자유롭게 가정 생활도 할 수 있는 신분이었다(삼상 9:9, 10).

여인이 그 앞에 선지라. 이 여인은 엘리사 앞이 아니라 게하시 앞에 섰다(Thenius). 이것은 선지자로서의 권위나 위엄을 상대방에게 내세우기 위함도 아니며 여인과 직접 이야기하는 것을 꺼려서 그런 것도 아니다(16절). 그것은 단지 다른 사람이 시험에 들지 않도록 덕(德)을 세우기 위한 것이었다. 즉 엘리사는 그녀의 은혜에 대해 보답을 하려함과 동시에 그 여인을 당황케 하거나 곤란한 처지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해 게하시를 가운데에 놓고 이야기를 한 것이다(Wycliffe).

 

4:13 내가 너를 위하여 무엇을 하랴. 이 말은 곧 ‘나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혹은 ‘당신을 위해서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라는 의미이다(Pulpit Commentary). 이는 수넴 여인을 향한 엘리사의 정감있는 요청일 뿐만 아니라 그 여인의 은혜에 보답을 하려는 의중을 말한 것이다.

왕에게나 사령관에게 무슨 구할 것이 있느냐. 이러한 엘리사의 질문은 그가 궁정에서 얼마나 영향력이 있는 존재인지를 짐작케 한다. 실제적으로 우리는 6:9-12, 21-23, 8:4-6에서 엘리사가 왕궁으로부터 받은 총애와 존경을 볼 수 있다. 한편, 본 절에서 ‘무슨 구할 것이 있느냐?’는 엘리사의 말은 ‘남편에게 무슨 군대의 직책이나 직위를 주기 원하느냐?’(Matthew Henry)는 의미보다는 ‘내가 너를 위하여 중재할 어떤 일이 있느냐?’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Keil & Delitzsch). 왜냐하면 남편이 부자였기 때문에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권력이 필요할 수도 있다고 엘리사는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 백성 중에 거주하나이다. 엘리사는 여인의 정성된 섬김에 보답하기 위하여 그녀에게 도움을 주기를 원했다. 그러나 본 절에 나타난 여인의 대답 속에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뜻이 내포되어 있었다. (1) 궁중에 있는 왕에게나 권력을 가진 사령관에게 구할 어떤 요청사항도 없다는 것과 함께 (2) 자신이 엘리사를 대접한 것은 무슨 보답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순수한 봉사였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대가를 바라지 않는 여인의 순수한 봉사 정신은 오늘날의 성도들에게 큰 본이 될 것이다(벧전 4:10).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명예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교회에서 봉사하고, 물질적인 축복을 바라고 헌금하며 구제사업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자이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자들은 하나님을 속이고 자신을 속이는 자들이다(행 5:4).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3)고 선포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하나님의 일을 할 때는 물론 대인 관계에 있어서도 아무런 사심(私心)없이 사랑을 가지고 봉사를 해야한다(고전 13:5).

 

4:14 게하시가 대답하되 참으로 이 여인은 아들이 없고. 여인이 자식이 없는 것에 대해서 어떤 불만을 표했다는 증거는 아무데도 없다. 그러나 오히려 게하시가 여인의 마음을 읽고 그녀의 소원을 엘리사에게 말해 준 것이다. 당시 히브리 사회에서 자식이 없는 것은 모욕과 수치로 생각되었다(창 30:6, 삼상 1:6,7, 눅 1:25). 이러한 고통 가운데 있으면서도 어려움을 토로하지 않은 것은 여인이 행한 봉사의 진실성을 더욱 부각시켜 준다. 그리고 게하시가 여인의 소망을 엘리사에게 대신 말할 때는 그 곳에 수넴 여인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15절). 한편 ‘남편은 늙었나이다’라는 본 절의 말은 남편이 자식을 생산할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완곡히 표현한 것이다(창 18:12).

 

4:15 문에 서니라. 엘리사의 부르심에 즉시 온 여인은 그를 존경하고 경외하는 마음으로 방에 들어가지 않고 문까지만 와서 섰다(Lange, Pulpit Commentary).

 

4:16 네가 아들을 안으리라.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하나님의 은혜로 늙어서 아들을 얻은 것과 같이 수넴 여인에게도 동일한 은혜가 베풀어졌다(창 18:10). 이는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께서 아직도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으시고 섭리하시며 인도하시고, 은혜를 베푸신다는 사실을 나타낸 것이다(Keil & Delitzsch).

당신의 계집종을 속이지 마옵소서. 문자적으로는 ‘속임수의 헛된 소망을 나에게 일으키지 마옵소서’(Lange) 혹은 ‘나를 어떤 거짓 소망으로든지 흥분시키지 마옵소서’(Keil & Delitzsch)라는 의미였다.

 

4:17 한 해가 지나 이 때쯤에.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 본문의 문자적인 뜻은 ‘생명이 탄생하는 계절에’이다(창 17:21, 18:10, 14). 즉 만물이 소생하는 봄철을 가리키는 말이다(T. R. Hobbs). 16절에서 엘리사가 말한 그 때가 돌아오자 엘리사가 예언한 대로 여인은 아들을 낳았다. 한편, ‘아들’을 나타내는 히브리어는 ‘벤’으로서 ‘세우다’라는 뜻의 ‘바나’에서 온 말이다. 이는 아들을 통해 가계(家系)를 이을 뿐만 아니라 집안을 흥하게 한다는 의미이다.

 

4:18 그 아이가 자라매. 본 절의 내용만으로는 그가 태어난 후 얼마의 세월이 흘렀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본 절 이후의 문맥으로 살펴 볼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다. (1) ‘아이’에 해당하는 원어가 ‘어린 아이’, ‘아이’를 의미하는 ‘엘레드’와 ‘나아르’가 사용되었다. (2) 이 아이가 어느 정도 말할 수 있었다(19절). 따라서 아마도 2, 3년의 시간이 흘렀음을 짐작할 수있다. (3) 자기 어머니의 무릎에 앉아 있었다(20절). 이것도 그 아이가 그렇게 많이 자라지 않았음을 암시한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서 우리는 이 아이가 부모에게 재롱을 가장 많이 부릴 정도로 성장했던 때 임을 알 수 있다.

추수꾼들에게 나가서 그의 아버지에게 이르렀더니. 수넴 지방은 옥수수 재배로 유명한 곳이기 때문에 본 절에서 곡식을 벤다는 말은 옥수수를 베는 것, 혹은 옥수수를 따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한편 그 아이의 아버지가 곡식 베는 곳에 있었던 것은 그가 직접 추수를 했다기보다는 추수하는 일꾼을 감독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는 부자이기 때문에 일꾼을 부렸을 것이기 때문이다(Pulpit Commentary).

 

4:19 내 머리야 내 머리야 하는지라. 이 아이는 추수하는 들로 나갔다가 일사병에 걸린 것 같다. 왜냐하면 일사병은 팔레스타인에서 흔한 것일 뿐만 아니라(시 121:6, 사 49:10) 추수 때는 일 년 중 가장 더운 시기이기 때문에 일사병에 걸리기 쉬웠을 것이기 때문이다(Pulpit Commentary, Wycliffe). 이 아이의 병이 일사병에 의한 뇌염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Keil & Delitzsch).

 

4:20 낮까지 어머니의 무릎에 앉아 있다가 죽은지라. 본 절을 보면 아이가 들판에서 병을 얻은 것이 아침 나절이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낮까지’라는 표현을 써서 시간의 경과를 나타내었기 때문이다. 또한 본 절은 아이의 죽음이 명백한 실제적 사실이었음을 입증해 주고 있다. 그 이유로서 수넴 여인은 아이를 무릎에 안고 아침 나절부터 낮까지 아이의 임종에 대해 줄곧 관찰해 왔음을 들 수 있다. 따라서 수넴 여인은 아이의 죽음을 입증하는 가장 확실한 증인이 되는 것이다.

 

4:21 침상 위에 두고 문을 닫고 나와. 수넴 여인은 아이의 시신을 자신들의 방이나 아이의 방에 두지 않고 선지자의 침상 위에 두었다. 그리고 아이의 죽음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아이의 죽음을 감추기 위해서 문을 꼭 닫아 두었다. 그런데 여인의 이런 행동은 아이가 죽은 것을 남편에게 알려서 근심을 주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고, 또한 엘리사가 오기만 하면 그 아이가 다시 살아날 것을 확신하는 신앙적 태도에서 나온 것이었다(K. W. Bähr).

 

4:22 사환 한 명과 나귀 한 마리를 내게로 보내소서. 그녀는 엘리사에게 가는 길이 멀고 험하기 때문에 나귀 한 마리와 그 나귀를 몰고 갈 종을 남편에게 요구했다. 그런데 본 절에서 나귀 한 마리를 요구한 것이 그들이 두 마리의 나귀 밖에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다(Wycliffe).

하나님의 사람에게 달려갔다가 돌아오리이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사람을 찾아가기만 하면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될 것이라는 확신에 찬 여인의 믿음이 나타나 있다. 수넴 여인의 이러한 믿음은 (1) 아이를 가질 수 없었던 부부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아들을 낳았던 사실과 (2) 엘리사를 오랫동안 섬기면서 체득한 영적 지혜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4:23 초하루도 아니요 안식일도 아니어늘. 초하루와 안식일은 백성들의 종교적 휴일이었다(삼상 20:5, 암 8:5, 사 1:13). 그래서 엘리사는 아마도 절기일이나 안식일에만 방문자들을 받아들였던 것 같다(Hobbs). 왜냐하면 다른 날은 백성들을 살피며 여행을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8절). 또 방문자들도 그런 절기때에만 모든 일을 뒤로 미루고 선지자를 만나러 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 절에 기록된 남편의 질문은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는데 (1) ‘오늘 그를 만나기가 힘들지 않겠느냐’는 뜻이며, (2) ‘그렇게 급히 선지자를 만나야 할 다른 무슨 이유가 있느냐’는 뜻이다. 그러나 그녀는 ‘샬롬’ 즉 “평안을 비나이다”라고 대답한다. 이 말은 흔히 안부의 물음에 대한 대답(26절)으로서 ‘아무 일 없다’, 또는 ‘걱정하지 말라’는 뜻이다. 참으로 이것은 그녀가 남편을 안심시키기 위한 지혜로운 처신이었으며 또한 모든 문제가 잘 해결될 것이라는 믿음에 근거한 확신의 표현이었다. 한편 여인이 나타낸 이 표현에 대해서 혹자는 구체적인 대답을 회피하기 위한 말이라고도 한다(Keil & Delitzsch).

 

4:24 수넴에서 갈멜 산까지는 약 40 km나 되었기 때문에 수넴 여인은 사환에게 나귀를 급히 달리게 했다(T. R. Hobbs).

 

4:25 여기에서 엘리사가 자신의 사환을 보내어 수넴 여인을 맞이하게 한 것은 그가 얼마나 그녀를 높이 평가하고 있었는지를 보여 준다. 한편 게하시로 하여금 남편과 아이의 평안을 물어보게 한 것은 갑자기 찾아온 그 여인에게 어떤 문제가 있다는 것을 직감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게하시의 안부 인사에 수넴 여인은 ‘평안하다’라는 짧은 답변을 했는데 그 이유는 (1) 더 많은 설명을 하려다가는 많은 시간을 지체해야 한다고 생각한 때문이며(Keil), (2) 이런 일은 하나님의 사람에게 직접 말해야만 문제해결이 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4:26 없음.

 

4:27 그 발을 안은지라. 수넴 여인이 엘리사의 발을 안은 것은 도움을 요청하는 간절한 심정을 나타낸다(Pulpit Commentary). 그런데 게하시가 그녀의 행동을 막으려고 했던 것은 (1) 이와 같은 방법으로 선지자에게 강요하는 것은 무례한 행위로 보았기 때문이며(Keil & Delitzsch) (2) 선지자의 위엄을 손상시키는 짓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요 4:27). 한편 여인이 엘리사의 발을 안은 행위에 대해 혹자는 ‘큰 슬픔에 사로잡혀서’(Lange), 혹은 ‘불안을 더 이상 자제할 수 없었기’(Wycliffe)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그녀의 행동을 고려할 때(10, 13, 22절), 그녀는 사리 분별을 할 줄 아는 여인이었고 큰 믿음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그녀의 이러한 행위는 존경하는 사람, 믿고 의지하는 사람에게 동양에서 흔히 하는 행동을 한 것이었다고 이해하기도 한다(Pulipit Commentary).

여호와께서 내게 숨기시고. 본 절은 구약의 선지자들에게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항상 알려주시지는 않았음을 보여준다(3:15). 이것은 신약 시대에 예언의 은사를 받은 자들에게도 해당된다. 즉 어떤 사람이 예언의 은사를 받았다고 해서 자신이 원하는 때에 언제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나타내고자 하실 때에만 예언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성령께서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막으심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소아시아 지역의 비두니아로 가고자 했다. 이 때 하나님께서 환상 중에 바울에게 마게도냐로 가도록 인도하셨다(행 16:6-10). 여기에서 우리는 위대한 사도 바울도 역시 하나님께서 그에게 계시하시기까지는 자신의 뜻을 따라 행하려고 했음을 볼 수 있다. 이렇듯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하나님 자신의 영원하신 계획과 정하신 때에 맞춰 주어진다(전 3:1, 행 1:7). 그러므로 자신이 원하는 때면 언제든지 예언을 할 수 있는 것처럼 말하는 자들에 대한 신중한 경계가 성도들에게 요청된다.

 

4:28 내가 내 주께 아들을 구하더이까. 여인은 엘리사에게 자기의 아들이 죽은 사실을 힐책의 표현을 써서 간접적으로 알리고 있다(Pulpit Commentary). 사실 여인은 애초부터 자식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 자손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그녀는 한없이 감사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제 자식이 죽은 마당에 처음과 같은 원점으로 돌아가 ‘저는 아무 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그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합니다’라고 하면서 탄원 섞인 말을 하는 것이다. 이 말에서 우리는 역경과 고난의 어려움을 원망하기 이전에 겸손히 순종하는 여인의 아름다운 믿음을 볼 수 있다.

나를 속이지 말라고 내가 말하지 아니하더이까. 이 말 속에는 아들을 잃은 슬픔과 하나님의 사람에게 은혜를 바라는 간절한 요청이 함께 내포되어 있다. 즉 16절에서 ‘속이지 마옵소서’라고 말했을 때는 자신이 아이를 얻을 형편이 되지 못한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본 절에서는 무슨 일로 자기와 같은 사람에게 아들이 주어지는가 했더니 역시 이런 일이 생기고 말았구나 하는 애탄이 섞인 말을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식이 없을 때보다 하나 있는 아들 자식을 잃었을 때의 슬픔이 몇 십 배 더 큰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불어 이 말 속에는 하나님의 축복으로 얻은 아들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다시 살려달라는 요청이 내포되어 있다.

 

4:29 인사하지 말며. 엘리사가 이렇게 명령한 것은 동양인들이 흔히 그러하듯이 인사하는 데 많은 시간을 허비하여 일을 지체시킬 수도 있었기 때문(Thenius, PulpitCommentary)만은 아니다. 그것은 (1) 외적인 상황을 핑계로 게하시가 이적 수행에 실패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Keil), (2) 게하시로 하여금 온전한 기적 성취를 위해 기도에 전념토록 하기 위해(C. Lap), (3) 허영심이 많은 그가 여행의 이유를 다른 사람들에게 발설함으로써 스스로 이적을 행하는 것인양 자랑치 못하게 하기 위해(Theodoret) 그렇게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한편 본 절에서 ‘허리를 묶는다’라는 표현은 행동의 신속함을 위한 당시의 습관을 반영한 말임과 동시에 마음을 가다듬고(벧전 5:15) 진리에 굳게 선다(눅 12:35)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내 지팡이를 그 아이의 얼굴에 놓으라. 엘리사는 자신이 직접 가지 않고 게하시를 통하여 지팡이만 보내면서 이런 말을 했다. 이것은 선지자의 상징적 행위로서 지팡이가 선지자의 임무를 대행할 수 있는 증거가 되기에 그렇게 했다. 왜냐하면 그 지팡이는 여행용이 아니라 왕의 규와 같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선지자적인 은사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출 4:17, 20, Lange). 그리고 또한 엘리사가 취한 이러한 조치는 지팡이 자체에 어떤 신비적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상징적 행위를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온전히 나타내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는 선지자로서 갖는 겸손의 발로였다.

 

4:30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과 당신의 영혼이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이러한 수넴 여인의 믿음에 찬 고백은 순전히 그녀의 신앙에 기인한 것인데 이는 엘리사가 자신의 스승 엘리야에게 했던 신앙 고백과 같은 것이다(2:2, 4:6, Pulpit Commentary, Word Biblical Commentary).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리이다. ‘사환 게하시가 대신 가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Wycliffe), 혹은 ‘자신을 따라 나설 때까지 곁을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Pulpit Commentary)라는 의미이다. 이는 게하시에 대한 불신으로 이렇게 말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만을 의지하고자 하는 간절한 심정과 사태의 긴박성를 나타낸 것이다.

 

4:31 지팡이를 그 아이의 얼굴에 놓았으나. 게하시가 지팡이를 죽은 아이의 얼굴에 놓았으나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는 사실을 갖고 주석가들은 여러 가지 해석을 하였다. 예를 들면 카일(Keil)은 게하시가 엘리사의 명령대로 충실히 수행했으나 아이를 살리려는 그의 노력은 효과가 없었다는 것이다(Keil & Delitzsch). 또 랍비들의 주장에 따르면 게하시가 엘리사의 명령대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말고 속히 가라는 명령에 불순종했다는 것이다. 한편 데오도르(Theodoret)는 야심과 허영심이 강한 게하시가 길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자신이 위임 받은 하나님의 일을 자랑했다는것이다. 그러나 게하시가 아이를 살리는 일에 성공하지 못한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1) 엘리사가 수넴 여인과 함께 가기로 작정한 직후 게하시의 위임은 무효가 되었다. 그러므로 게하시가 아이를 살리려고 애쓸 필요가 없었다. (2) 엘리사가 준 지팡이에 대해 게하시는 어떤 마술적인 힘이 그 지팡이에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게하시는 그 능력을 속히 나타내기 위해서 미리 앞서 간 것이다. 한편 하나님의 능력을 남에게 위탁할 권세를 갖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일을 위임한 것은 엘리사의 실수라는 주장(Wycliffe)도 있다.

 

4:32 엘리사가 집에 들어갔을 때 아이는 엘리사의 침상 위에 그대로 있었다(21절). 그리고 엘리사는 외부의 방해를 막고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교통을 위하여 문을 닫고 여호와께 기도하였다. 이와같은 엘리사의 신중한 태도는 여호와께 대한 그의 신앙이 얼마나 진지하였는가를 보여준다. 한편 본문 33절에서 ‘문을 닫으니 두 사람 뿐이라’는 표현은 죽은 아이를 산 자, 즉 잠자는 사람으로 간주한 것이다(Matthew Henry).

 

4:33 없음.

 

4:34 본 절은 엘리사가 아이를 살리기 위해 취한 행동에 대한 묘사로 왕상 17:21에서 엘리야가 과부의 아들을 살릴 때보다도 훨씬 더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두 사람 다 그리스도가 행한 이적에 비하면 상당한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는 곧 자신이 하나님이셨고 하나님의 능력을 온전히 다 가지신 분이시기에 그는 말씀 한 마디로 죽은 자를 살리셨다(막 5:39-42, 눅 7:13-15, 요 11:43, 44). 그러나 엘리야와 엘리사의 경우에 있어서는 자신의 능력에 기인한 이적적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께 기도한 것의 응답이었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행한 것과 같은 죽은 자를 살리는 동일한 이적을 행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차이는 엄청난 것이다.

 

4:35 없음.

 

4:36 없음.

 

4:37 수넴 여인은 엘리사의 방에서 아들이 다시 살아난 것을 보고 엘리사의 발 앞에 엎드려 절했다. 참으로 27절에서 엘리사의 발을 안던 모습과는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 이 수넴 여인이 본 절에서 취한 행동은 엘리사에게는 존경과 감사의 표시였으며 여호와께는 찬양의 표시였을 것이다(시 110:4, 요 11:41).

 

4:38 엘리사가 다시 길갈에 이르니. 이 이야기는 수넴 여인의 이적 사건과 시간적으로 이어지는 사건은 아니지만 그 후 어느 때인 것 같다(Lange). 본 사건의 장소인 길갈에는 선지자 학교들이 있었는데 엘리사가 이곳을 방문한 것은 정기적인 순회 즉 연차 순시를 위한 것이었다(Keil, Wycliffe). 한편 이 곳 길갈의 지리적인 위치에 관해서는 2:1의 주석을 참고하라.

그 땅에 흉년이 들었는데. 이 곳의 흉년에 대해서는 8:1에서도 언급되어 있다. 그런데 이러한 흉년과 엘리사 선지자의 길갈 방문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본문을 통해서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길갈에서 상당 기간 머물면서 제자들을 돌보게 된 이유에 대한 설명은 될 것이다. 한편 팔레스타인 지방은 연평균 강우량이 적기 때문에 비가 조금만 덜 와도 쉽게 흉년이 든다.

선지자의 제자들이 엘리사의 앞에 앉은지라.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이 마주보고 앉아 이야기를 나눈 것과는 달리 구약에서는 이와 같이 선지자의 제자들이 선지자 앞에 모여 어떤 모임을 가진 경우는 아주 드물다(T. R. Hobbs). 그러나 여기서 제자들은 엘리사 선지자 앞에 모여 그의 말을 경청했던 것 같다(겔 8:1, 14:1, 슥3:8). 한편 혹자는 본문의 이 구절을 ‘선지자의 제자들이 그와 함께 거주했더라’고 번역하는데(Vulgate, Luther, Horsley) 이것은 옳다고 볼 수 없다(K. W. Bähr) 왜냐하면 본 절은 엘리사가 선지자 학교를 방문하는 동안 제자들을 교육하였음을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4:39 들포도덩굴을 만나 그것에서 들호박을 따서. 국을 끓이기 위해 한 사람이 채소를 구하러 들에 나갔다가 들포도덩굴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것의 열매는 식용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지자 생도들이 이것을 음식으로 먹으려고 했던 것을 보면 당시의 가뭄이 얼마나 혹심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한편 이 ‘들포도덩굴’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 수는 없지만 이에 대한 견해는 대체로 두 가지가 있다. 첫째 견해는 70인역(LXX)과 불가타역이 번역하고 있는대로 이것은 콜로신드(Colocynth)라는 식물이라는 것이다. 이 콜로신드는 외과에 속하며 둥글고 황갈색을 띤 오렌지 만한 열매가 열린다. 그리고 그 열매는 매우 쓸 뿐만 아니라 먹으면 복통과 신경통을 일으킨다(The Interpreter’s Bible). 두 번째의 다른 견해는 어원적(語原的)인 근거를 가진 것으로서 이것이 도토리와 비슷한 열매인 ‘들 외’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야생 덩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파쿠오트’인데 이 단어의 어근 ‘파카’는 ‘깨뜨리다, 쪼개다’라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켄(Oken)에 의하면 이 ‘들외’는 약 2.54 cm 정도의 초록색 다육질로 된 껍질을 가지고 있어서 완전히 익었을 때는 가볍게 누르기만 해도 큰 소리를 내며 쪼개진다고 한다. 그리고 이 식물이 뿜어 내는 즙이 대단히 쓰다는 것이다(Gesenius, Winer). 이러한 의견들에 대해 카일(Keil)은 전자의 견해가 더 타당하다고 보고 있는데 이유는 본 절에 나타난 ‘들 외’는 야생포도가 아니라 오렌지와 같이 둥글고 누런 열매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Keil & Delitzsch).

 

4:40 솥에 죽음의 독이 있나이다. 제자들은 이 식물의 지독한 쓴 맛 때문에 독이 있다고 판단했고 이 독을 마시면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 카일(Keil)은 콜로신드를 다량으로 섭취하게 되면 죽을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본 절에 나타난 ‘죽음의 독’은 히브리어 ‘마웨트’의 번역이다. 이 말은 ‘죽다, 파괴하다’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무트’에서 파생한 용어로 ‘죽음’을 뜻한다. 그래서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쓴 맛과 죽음은 같은 의미로 받아들여졌다(전 7:26).

 

4:41 본 절에서 엘리사가 독을 제거하기 위해 솥에 넣은 가루는 그가 여리고의 물을 고치기 위해 샘에 넣은 소금과 같이 동일한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2:21, K. W. Bähr). 그런데 이 가루는 유해한 것을 이로운 것으로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역사를 위한 매개물로써 사용된 것이다(Keil & Delitzsch). 이와 같이 그리스도는 우리를 사망에 이르게 하는 ‘죄’라는 독성을 제거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리셨다.

 

4:42 한 사람이 바알 살리사에서부터 와서. ‘바알 살리사’의 정확한 위치에 관해서는 별로 알려진 바가 없지만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세겜의 서쪽 20 km 지점에 위치한 크파르 틸트(Kfar Tilt) 또는 둘트(Thult)를 가리킨다고 본다. 이 곳은 리다(Lydda, 현재의 Ludd) 또는 디오스폴레오스(Diospoleos)에서 북쪽으로 약 24 km 가량 떨어진 곳으로서 유세비우스(Eusebius)와 제롬(Jerome)이 ‘벧 살리사’ 즉 ‘세 계곡의 집’이라고 불렀던 곳이다. 또한 삼삼 9장에서 사울이 아버지의 나귀를 찾아 다닌 지역들 중의 하나가 바로 살리사라는 곳이었는데(삼상 9:4) 이 지역의 땅은 매우 기름진 곳이었다고 한다(T. R. Hobbs). 그리고 이곳은 길갈과도 그렇게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G. R. Rawlinson).

곧 보리떡 이십 개와. 보리떡 한 개는 일반적으로 성인 한 명이 먹을 수 있는 한끼 분의 식사에 해당되므로(G. Rawlinson) 떡덩이 이십 개는 이십 명 밖에 먹을 수 없었다.

또 자루에 담은 채소를. 여기서 ‘채소’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카르멜’은 39절에서 ‘채소’라고 번역된 ‘오로트’와는 다르다. ‘오로트’는 ‘요리해서 먹을 수 있는 푸른 풀’(K. W. Bähr)을 의미하는데 이것이 곧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채소이다. 그리고 본 절의 ‘카르멜’은 중동 아셀(Asher) 남쪽이나 사해의 서쪽 지역의 고산 지대에서 생산되는 곡물이다(Davidson, 수 15:55, 삼상 15:12, 25:5). 그래서 대부분의 영역 성경에서는 이를 ‘옥수수’로 번역하고 있다. 그리고 카일(Keil)은 곡식의 구운 이삭(레 2:14)이라고 번역하고 있다(Keil & Delitzsch). 한편 이처럼 곡물의 첫 이삭을 제사장에게로 가져가 여호와의 제단에 바치는 것은 이스라엘의 유월절에 행하여지던 풍습이었다(레 23:10).

 

4:43 보리떡 20개와 채소 한 자루는 백 명이 먹기에는 대단히 부족한 것이었다. 그러나 무리가 먹고 남으리라는 여호와의 말씀대로 온전히 성취되는 이적이 일어났다. 이러한 이적은 바로 그리스도가 행한 오병이어의 이적의 한 모형이 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마 14:13-21) 당시 이스라엘의 경건한 무리들이 여로보암의 정치적인 의도에 의해서 고안된 금송아지 숭배를 거부하고 선지자의 학교에서 올바른 예배를 드렸다는 좋은 증거가 된다(Hengstenberg Beitrr).

 

4:44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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