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갈에서. 성경에 나오는 길갈은 두 곳이다. 하나는 여호수아의 정복사에서 언급된 곳(수 4:19)으로 여리고에서 동북쪽으로 약 2 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현재의 질질리아(Jiljiliya) 또는 칼킬리야(Khalkiliya)에 해당하는 곳(신 11:30)으로 벧엘에서 북서쪽으로 약 13 km정도 떨어진 에브라임 산지에 위치해 있다(T. R. Hobbs). 그런데 엘리야와 엘리사가 이동한 경로(1-11절)와 2절의 ‘벧엘로 내려가니’란 말로 미루어 볼 때 본 절의 길갈은 후자의 길갈임이 분명하다. 이곳은 에브라임 지파의 땅이며 엘리사의 중심 활동지이다(4:38). 그러나 후에 이곳은 우상 숭배지로 변하여 아모스, 호세아 등의 선지자에게 규탄을 받았다(암 4:4, 호 4:15, 9:15).
여호와께서 살아계심과 당신의 영혼이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니. 이것은 구약에서 나타나는 맹세의 일반적인 형식이다(삼상 14:39, 20:3, 삼하 11:11). 라기스 문서(Lachish Letters)에서도 동일한 맹세 형식을 볼 수 있다. 즉 이스라엘인들은 자신의 맹세나 말의 신실성을 확증, 강조하려 할 때 대개 이같은 표현을 썼다. 이는 곧 하나님과 상대방의 전(全) 인격 및 전 존재를 건 것으로 ‘여호와와 당신이 살아 있는 것이 확실하듯 … 도 확실하다’는 뜻이다. 삼상 25:26 주석 참조.
엘리사에게로 나아와 그에게 이르되. 제자들이 엘리사에게 나아온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들이 직접 엘리야에게 나아가기에는 엘리야 선지자의 권위가 너무 컸다(Pulpit Commentary). 또 그들은 엘리사를 자신들과 동일한 제자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엘리사와 접촉하기가 훨씬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여호와께서 … 당신의 머리 위로 데려가실 줄을 아시나이까. 본 절 및 5절과 같은 말로 볼 때 벧엘과 여리고 제자들도 엘리사와 같이 엘리야의 승천에 대해서 무언가를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아시나이까?”라는 질문은 어떤 사실에 대해 확인하려는 말이기 때문이다. 한편 여기서 ‘데려가다’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라카흐’로서 ‘돈을 주고 사다, 결혼하여 데려가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리고 수동형(Niphal)으로는 ‘포로로 잡혀가다, 죽음에 의해서 옮겨지다’(겔 33:6)라는 뜻으로도 쓰인다. 이 단어 ‘라카흐’가 여기서는 ‘엘리야의 승천’을 의미한다. 이는 그의 승천에 대해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계시해 주고 엘리야가 엘리사와 선지자의 제자들에게 그 계시의 내용을 알려준 것으로(Wycliffe) 행 1:9, 10에서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가 감람 산에서 승천하실 때의 모습과 같이 하늘로 올리움을 생생히 나타낸 것이다(Keil & Delitzsch). 또한 본 절의 ‘머리 위로’라는 구절이 이 의미를 더욱 강화해 주고 있는데 여기에 사용된 전치사 ‘메알’은 ‘ … 로부터’라는 뜻의 비분리 전치사(히, 메)와 ‘위에’라는 뜻의 전치사(히, 알)가 합성된 것으로 엘리야가 하늘로 옮기게 되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따라서 제자들이 본 절에서 언급한 말은 엘리야 선지자의 승천에 대한 질문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혹자는 이것을 가리켜 단순히 엘리야가 엘리사를 떠나려고 한다는 사실을 나타낸 것이라고 본다(Bähr). 즉 엘리야의 죽음으로 인한 이별에 대한 언급으로서 엘리사의 마음에 슬픔을 자극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보는 이유는 벧엘에 있는 제자들이 엘리야의 승천에 관해 알 리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K. W. Bähr). 그러나 일반적으로 복음주의 신학자들은 히브리어 ‘라카흐’와 전치사 ‘메알’의 용법, 그리고 당시 상황 등을 고려해 이 구절을 엘리야의 승천에 관한 질문으로 보고 있다.
너희는 잠잠하라. 이것은 “그가 하늘로 올라 가는 것을 큰 소리로 말함으로써 백성들을 소란시켜서는 안 된다”(J. Lange), “엘리야의 겸손을 위해서 그의 영광을 너무 많이 말하지 말라”(Keil)는 의미로 보는 견해도 있다. 또한 이것은 “너희는 마음을 고요하게 해서 하나님의 뜻에 따르고(Wycliffe) 내 사랑하는 주를 이별하려고 하는 이 순간에 말을 많이 함으로써 내 마음을 격동시키지 말라”(Bunsen)는 뜻으로 엘리사 자신의 내적 심정을 토로한 것이며(Matthew Henry) 거룩한 것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말라는 엄중한 요구일 수 있다(Pulpit Commentary).
물을 치매 물이 이리 저리 갈라지고 두 사람이 마른 땅 위로 건너더라. 이 사건은 모세가 지팡이로 홍해를 가른 사건(출 14:16, 21)과 여호수아가 요단 강을 가른 사건(수 3:13)에 상응한다. 또 이것은 엘리야와 엘리사의 관계가 모세와 여호수아의 관계처럼 스승과 제자의 관계, 혹은 지도자 위임의 관계인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본 사건은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 여호와의 권능을 나타내는 상징적 의미를 내포한 이적이다. 왜냐하면 ‘권능’은 오직 하나님께만 속해 있기 때문이다(시 62:11). 따라서 겉옷을 취하는 선지자의 상징적 행위와 이 이적의 사건은 이것을 지켜보는 생도들에게 하나님의 작정하심과 그분의 목적을 알게 했을 것이다. 한편 ‘마른 땅’은 히브리어로 ‘하라바’로서 ‘마른 땅’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이에 따라 공동번역과 영역본들에서는 모두 ‘마른 땅’(dry ground)이라고 번역했으며 70인역(LXX)도 이와 비슷하게 ‘에레모스’ 즉 ‘사막, 광야’란 의미로 옮겼다. 또한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와 요단 강을 건널 때 ‘마른 땅’(출 14:21, 수 3:17)이라고 말했던 그 표현으로서 성경에서는 드물게 사용된다. 이처럼 하나님은 강물과 바닷물을 갈라 놓을 수 있는 분일 뿐만 아니라 갈라서 드러난 땅을 마르게도 하셔서 백성들의 불편함을 알고 조치하시고 역사하시는 분이다. 한편 이 두 선지자가 요단 강을 건너 당도한 곳은 모압 땅이었는데 이곳이 바로 모세가 죽음을 맞이했던 곳이다. 신 34:6을 보면 “오늘까지 이 묘를 아는 자 없으니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묘가 없는 엘리야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즉, 17절에서 무리들이 엘리야의 시체를 찾았으나 찾지 못한 사건이 이를 뒷받침해 준다. 후대의 많은 사람들은 엘리야를 에녹과 연관시키려고 하지만 오히려 모세와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왜냐하면 구약에서 무덤의 위치에 대해 논란을 벌이고 있는 것은 모세와 엘리야에 대한 두 기사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를 네게서 데려가시는 것을 네가 보면. 신 31:23에서 여호수아가 모세의 지도권을 양도받을 때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직접 임했다. 그러나 엘리야는 자신에게 일어나는 이적이 곧 엘리사의 선지자적 직분에 대한 증거가 되리라고 했다. 즉 엘리야는 엘리사가 자신의 승천 모습을 직접 지켜보고 그리고 그 승천의 영적 의미를 깨닫는다면(Wycliffe) 그의 요청이 성취될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이루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6:17, 눅 24:16, 31). 그래서 ‘그렇지 아니하면’이라는 어느 정도 부정적인 면을 암시하는 말을 첨가해서 엘리야는 자신의 의도를 분명히 나타냄과 동시에 이것이 하나님의 주권에 속하는 일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처럼 엘리야는 오직 하나님만을 경외하고 바라보면서 그분의 뜻을 신뢰하였으며 그 명령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삶을 사는 선지자적인 태도의 모범을 보여 주었다.
불수레와 불말들이. 이 구절은 1장에서 말한 ‘하늘에서 내려온 불’과 연관됨이 분명하다(1:9-16). 실제로 ‘불수레와 불말’에 관한 언급은 엘리야의 생애 중에서 불의 역사로 말미암은 그의 승리를 연상시켜 준다(왕상 18:24-38, 왕하 1:10-12). 실제로 구약에서 말과 병거는 군대의 전쟁 능력을 나타내는 것이며(출 14:7, 삿 4:3, 욜 2:5, 나 3:2), 불이 하나님의 현현을 상징하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출 3:2, 24:17, 신 33:2, 합 3:3-5)이 ‘불수레와 불말’이 하나님의 권능과 의지를 나타내는 구름을 의미(Lange)한다기 보다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임재와 초자연적인 권능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을 것 같다(Pulpit Commentary, Wycliffe).
회오리 바람을 타고. 원문의 문자적인 뜻은 ‘회오리 바람 안에’ 또는 ‘회오리 바람 가운데’이다. ‘회오리 바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세아라’로서 검은 구름과 번갯불을 동반한(Wycliffe) ‘태풍’ 상태를 의미한 말로 하나님의 임재, 또는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나타내는 용어이다. 여기서 회오리 바람은 자연법칙에 의해서 생긴 것이 아니라 초자연적으로 일어난 현상이었다(욥 38:1, 행 2:2). 그리고 원문을 보면 엘리야가 불수레와 불말을 타고 승천했는지 분명치가 않다. 단지 갑자기 불수레와 불말이 나타나자 엘리야와 엘리사가 태풍 가운데 사라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엘리야가 불병거를 타고 올라간 것이 아니라(말 4:5, 6, 마 11:14) 폭풍 중에, 즉 주께서 임재하시는 가운데 승천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Wycliffe). 그래서 17절에서 오십 명이 엘리야를 찾으러 간 것도 이와 같이 그의 사라짐이 묘연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엘리야가 에녹(창 5:22-24), 예수(눅 24:50-53)와 같이 죽지 않고 하늘에 올라갔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 그 때까지 살아 있는 모든 신자들이 경험하게 될 일에 대한 예표이기도 하다(고전 15:51, 살전 4:17). 한편 후대의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오시지 직전에 먼저 엘리야가 나타나리라(말 4:5)고 믿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유대 문헌 가운데 기록하고 있는 바에 의하면 유대인들은 유월절에 엘리야가 갑자기 들어올 것을 예상하고 문을 잠그지 않았다고 하며, 개들이 즐겁게 짖으면 그것이 엘리야가 오는 소식이라 하여 가슴을 두근거렸다고 한다(Bähr).
올라가더라. 여기서 히브리 원문이 사용하고 있는 단어는 ‘알라’인데 이것은 선지자의 제자들이 엘리사에게 질문할 때(3, 5절) 사용한 단어 ‘라카흐’와 다른 뜻이다. 즉 ‘라카흐’는 하나님이 그를 데리고 가심을 나타내는 말이지만 ‘알라’는 그 원형인 ‘번제’라는 뜻의 ‘올라’에서 보듯이 완전히 태워져 연기가 되어 하늘로 올라가 사라지는 것을 가리킨다. 이것은 확실히 에녹이 승천한 경우와 연관되는데(창 5:24) 창세기의 기록에서는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고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본문을 해석할 때 엘리야의 승천 방법을 정확히 말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에 의하여 그의 모습을 사라지게 하심으로써 에녹과 모세와 동일하게 데려가셨음을 인정할 수 있다. 한편 하나님의 기적과 초자연적인 능력을 부인하는 자유주의적인 신학자들의 일부는 이 엘리야의 승천 기사를 하나의 전설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The Interpreter’s Bible). 그러나 그 현장을 목격한 당시의 선지자 학교 학생들과 엘리사의 증언에 의해 또는 승천 전에 언급된 사실(3, 5절)을 미루어볼 때 그리고 변형 산상에서 모세와 같이 나타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엘리야의 기사를 살펴볼 때 그 사건의 역사적 진실성과 객관적 사실성은 충분히 입증되었다고 할 수 있다(마 17:3,4, 눅 9:30). 이러한 엘리야 선지자의 승천 사실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이 계신 곳에 대한 확실성 뿐만 아니라 인간이 앞으로 받게 될 불멸성에 대해 어렴풋이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불멸성은 성도의 몸이 입게 될 영광이고, 이러한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가 승천하신 것에 대한 한 상징이다(Matthew Henry Commentary).
소리 지르되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그 마병이여. 엘리사의 이 외침은 2장에서 절정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13:14에서 요아스 왕의 입을 통하여 이 문구가 다시 말해진다. 그래서 혹자는 이 구절 자체가 갖는 독특한 의미를 해석하려고 한다. 그러나 선지자를 ‘아버지’라고 부른 것은 요아스 왕 이외에는 없기 때문에 이 구절을 문맥과 독립시켜 해석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본문에서 ‘아버지여’라고 말한 것은 다음과 같은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다. 첫째, 이것은 존경을 나타낸다. 즉 종들이 자기 주인에게(5:13), 또는 젊은 제자들이 나이든 선지자에게 이와 같은 존칭을 사용했다. 둘째, 이것은 선지자들의 지도자에게 붙이는 호칭으로 볼 수 있다. 또는 이외에도 혹자는 이것을 ‘엄마, 마마’ 등과 같이 어린 아이의 근심된 표현으로 해석하기도 한다(T. H. Gaster). 그러나 본문의 의미는 엘리사가 자신을 엘리야의 영적 아들로 인식하고 엘리야를 ‘아버지’라고 호칭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병거와 그 마병이여라’는 외침은 엘리야가 이스라엘의 참보호자가 된 것을 의미한다(Wycliffe). 왜냐하면 특히 엘리야는 우상을 섬기는 선지자들과 대결하여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오직 여호와 뿐이심을 증명했던 선지자였기 때문이다. 또 엘리사의 이러한 외침은 앞으로 전개될 그의 사역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그래서 요아스 왕이 엘리사에 대하여 이 구절의 내용과 똑같은 말을 사용한 것(3:14)도 엘리사를 엘리야와 같은 이스라엘의 보호자로 인식했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병거와 마병은 그 당시 최고로 강력한 병기로 이스라엘의 왕들이 왕국의 국력을 과시하고 안전을 의존했던 것(Keil & Delitzsch)으로, 싸울 때(욜 2:5, 나 3:2), 물건을 나를 때(9:28), 여행할 때(행 8:29) 등에 사용되었다.
엘리사. 히브리어로 ‘나의 하나님’이라는 뜻의 ‘엘리’와 ‘그가 구원하신다’라는 뜻의 ‘예샤’가 합쳐진 말이며 ‘나의 하나님이 구원하신다’라는 의미이다. 엘리사가 엘리야의 후계자로서 처음 활동을 시작한 때는 이스라엘 왕국의 7대 왕 아합(B.C. 874-853)의 통치 말년이거나(왕상 19:1-7), 또는 아합의 아들 여호람(B.C. 853-841)의 통치 초반으로 본다(3:1). 이때부터 제12대 왕 요아스(B.C. 798-782) 통치 초반기에 이르기까지 약 반세기에 걸쳐 그는 하나님의 뜻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하는 예언 활동을 하였다(13:14-19).
자기의 옷을 잡아 둘로 찢고. 여기서 엘리사가 자신의 옷을 찢은 것은 스승과 이별하는 슬픔을 나타낸 행동이었다(Pulpit Commentary, Wycliffe). 왜냐하면 하나님의 능력이 임재한다는 사실을 직접 보여주던 엘리야가 사라진 것은 엘리사에게 큰 슬픔과 더불어 충격이었기 때문이다. 이 구절은 그의 이러한 심적 상태가 단적으로 표현된 것이다(5:7, 수 7:6). 이 밖에도 재를 뒤집어쓰는 것(욥 2:8), 얼굴과 가슴을 치는 행위(눅 18:13), 정수리의 머리털을 면도해 버리는 것(렘 7:29) 등은 모두 극도의 애통을 표시하는 관례적인 행동들이다.
엘리야의 하나님 여호와는 어디 계시니이까. 히브리어 원문은 ‘엘리야의 하나님은 어디 계시는가? 더욱이 그는?’으로 표현되어 있어 마지막 두 단어를 강조하고 있다(Pulpit Commentary). 그런데 엘리사가 이렇게 외친 것은 엘리야에게 능력을 주셨던 하나님께 자기에게도 함께 하시기를 간구한 것이다(Wycliffe). 그러나 이것을 엘리야와 함께 그 하나님의 능력이 더불어 사라진 것이 아닐까 하는 근심의 표현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와는 반대로 엘리사는 질문의 강조 형식을 빌어서 엘리야가 그랬던 것처럼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충성심을 나타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하나님은 그의 신앙에 응답하여 기적을 이루게 하셨고 엘리사가 엘리야의 후계자라는 사실을 외적으로 확증시켜 주셨다(Keil & Delitzsch).
여호와의 성령. 여기서 회오리 바람과 여호와의 성령에 대한 연관성이 나타난다. 즉 11절에서 엘리야가 회오리 바람을 타고 승천한 것은 여호와의 성령이 그를 인도해 가신 것으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회오리 바람은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능력의 도구이기 때문이다(H. W. Robinson).
보내지 말라. 히브리 원문은 ‘그것은 소용없는 일이다, 너희는 아무 것도 찾지 못할 것이다’(Pulpit Commentary)라는 의미로 엘리야의 승천에 대한 엘리사의 확신에 찬 신앙을 나타낸다.
물이 나쁘므로. 본 절에서는 물에 독소가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밝히지 않고 있다. 그러나 그 성의 사람들은 물이 나쁘기 때문에 토산이 익지 못하고 떨어진다고 생각했다(Wycliffe). 한편 혹자는 이러한 환상이 여리고 성에 대한 여호수아의 저주(수 6:26)에 의한 것으로 설명하기도 한다(Blake).
토산이 익지 못하고 떨어지나이다. 여기서 ‘토산’으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하아레츠’인데, 이것은 ‘땅, 육지, 나라, 주민’ 등의 의미를 가지기 때문에 여기서는 ‘땅’을 의미(Keil & Delitzsch)하는 것 뿐만 아니라 그 땅의 ‘주민들’도 함께 의미(The Interpreter’s Bible)한다고 보는 것이 옳다(레 19:29). 또 ‘익지 못하고 떨어지나이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메샤켈레트’로서 사람이나 동물들이 ‘자식을 낳지 못하다’라는 뜻의 동사 ‘샤콜’의 분사형이다. 또 이 단어는 특별히 비유적으로 포도원에 ‘결실이 없다’라는 뜻으로 쓰이기도 하기 때문에 이러한 비유적인 의미는 결국 자손에 관한 것일 수도 있다(호 9:14). 그래서 루시니안 헬라어 역본은 이를 ‘아이가 없는’(be childless)으로 번역하고 있다. 이러한 다양한 문제들을 고려하면서 본 절을 원문에 따라 해석하면 (1) ‘그 땅에는 소산이 없다’ (2) ‘그 거민은 유산한다’를 의미한다. 이에 따라 공동번역과 Living Bible은 70인역(LXX)과 마찬가지로 ‘주민이 아이를 낳지 못한다’란 의미로 해석한 반면 대부분의 영역본들(KJV, RSV, NIV)은 ‘그 땅에 소산이 없다’라고 번역하였다. 그런데 물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것은 땅의 소산이므로 본 절에서는 (1)의 해석을 따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대머리여 올라가라. 율법에는 일부러 머리를 깎아 대머리가 되게 하는 것은 불법으로 금지되었다(신 14:1). 또 대머리는 나병에 의한 것이었을 때(레 13:42-44)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징벌의 표징으로 생각했을 뿐만 아니라 천민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본 절에서 엘리사의 대머리는 자연적인 특징으로서 결코 사람들의 조롱이나 비웃음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리고 이러한 엘리사의 외모는 스승 엘리야의 외모와 대조를 이루고 있다(1:8). 한편 본 절의 ‘올라가라’는 히브리어 ‘아래’를 번역한 말인데 이는 ‘높이 오르다, 도약하다, 능가하다’는 뜻으로 ‘네 길을 계속 가라’라고 이해할 수도 있다(Pulpit Commentary). 그러나 여기서는 엘리야처럼 ‘하늘로 올라가라’는 의미로(The Bible Knowledge Commentary) 엘리야의 승천을 조롱하는 말이었다(Matthew Henry).
거기서 사마리아로 돌아왔더라. 엘리사는 은둔 생활을 한 자기 스승 엘리야와는 달리 왕궁이 있는 사마리아에서 살았다. 거기서 사람들과 사귀고 교제하며(5:9, 6:32), 왕의 친밀한 상담자 역할을 하기도 했다(6:9). 그리고 그는 왕으로부터 상당한 존경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8:4). 한편 사마리아는 북 이스라엘의 수도로서 엘리사가 사역한 중심지이다(Wycliffe).
Previous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