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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여호와께서 … 엘리야를 하늘로 올리고자 하실 때. 선지자 엘리야(B.C. 875-848)가 자신의 공적 사역을 모두 마친 후 이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가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이스라엘 왕 아합의 통치 초기에 등장하여 숱한 역경을 이기고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역을 완수한 엘리야에게 이제 남은 일은 엘리사(B.C. 848-797, 왕상 19:19-21)를 차기 후계자로 세우는 일이었다. 그 후 그는 영광스러운 최후를 맞이하게 될 것인데 곧 에녹(창 5:24)처럼 죽음을 맛보지 않고 승천(昇天)하는 것이었다(11절). 성경에 언급이 없으므로 이 때가 정확히 언제였는지는 단정하기 어렵지만 이같은 엘리야 승천 사건은 이스라엘 왕 아하시야(B.C. 853-852)가 죽고난 뒤에 일어났던 것만은 분명하다(1:17, 18).

길갈에서. 성경에 나오는 길갈은 두 곳이다. 하나는 여호수아의 정복사에서 언급된 곳(수 4:19)으로 여리고에서 동북쪽으로 약 2 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현재의 질질리아(Jiljiliya) 또는 칼킬리야(Khalkiliya)에 해당하는 곳(신 11:30)으로 벧엘에서 북서쪽으로 약 13 km정도 떨어진 에브라임 산지에 위치해 있다(T. R. Hobbs). 그런데 엘리야와 엘리사가 이동한 경로(1-11절)와 2절의 ‘벧엘로 내려가니’란 말로 미루어 볼 때 본 절의 길갈은 후자의 길갈임이 분명하다. 이곳은 에브라임 지파의 땅이며 엘리사의 중심 활동지이다(4:38). 그러나 후에 이곳은 우상 숭배지로 변하여 아모스, 호세아 등의 선지자에게 규탄을 받았다(암 4:4, 호 4:15, 9:15).

 

2:2 너는 여기 머물라. 본 장에서 세 번씩이나 언급된 말로(2, 4, 6절) 엘리야가 엘리사를 자신에게서 떼어놓으려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엘리야가 이렇게 한 이유는 다음 몇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1) 엘리야가 자신의 최후가 임박했음을 알고 마지막 지상 생활을 홀로 지내기 위해(Pulpit Commintary), (2) 자신이 승천하는 광경을 엘리사와 생도들이 보지 못하게 하려는 겸비에서(Keil & Delitzsch), (3) 엘리사의 충성과 사랑을 시험해 보기 위해서(Wycliffe) 등이다. 이상의 세 견해 중 어느 한 가지만을 선택하기 보다는 모든 견해를 참고하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여호와께서 살아계심과 당신의 영혼이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니. 이것은 구약에서 나타나는 맹세의 일반적인 형식이다(삼상 14:39, 20:3, 삼하 11:11). 라기스 문서(Lachish Letters)에서도 동일한 맹세 형식을 볼 수 있다. 즉 이스라엘인들은 자신의 맹세나 말의 신실성을 확증, 강조하려 할 때 대개 이같은 표현을 썼다. 이는 곧 하나님과 상대방의 전(全) 인격 및 전 존재를 건 것으로 ‘여호와와 당신이 살아 있는 것이 확실하듯 … 도 확실하다’는 뜻이다. 삼상 25:26 주석 참조.

 

2:3 벧엘에 있는 선지자의 제자들. 구약성경 중 사무엘서나 열왕기에는 ‘선지자의 무리’(삼상 10:5, 19:20, 왕상 20:35) 또는 ‘선지자의 제자’(5, 7, 15절, 4:1, 38, 5:22, 6:1)란 말이 종종 나온다. 이들은 영적으로 지극히 암울했던 시기에 이스라엘 민족의 영적, 도덕적 회복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당대의 위대한 선지자였던 사무엘, 엘리야, 엘리사의 수하에 모인 자들이다. 이런 무리를 가리켜 우리는 소위 원시 형태의 ‘선지자 학교’라고 부르는데, 곧 벧엘, 여리고(5절) 등에 있었다.

엘리사에게로 나아와 그에게 이르되. 제자들이 엘리사에게 나아온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들이 직접 엘리야에게 나아가기에는 엘리야 선지자의 권위가 너무 컸다(Pulpit Commentary). 또 그들은 엘리사를 자신들과 동일한 제자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엘리사와 접촉하기가 훨씬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여호와께서 … 당신의 머리 위로 데려가실 줄을 아시나이까. 본 절 및 5절과 같은 말로 볼 때 벧엘과 여리고 제자들도 엘리사와 같이 엘리야의 승천에 대해서 무언가를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아시나이까?”라는 질문은 어떤 사실에 대해 확인하려는 말이기 때문이다. 한편 여기서 ‘데려가다’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라카흐’로서 ‘돈을 주고 사다, 결혼하여 데려가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리고 수동형(Niphal)으로는 ‘포로로 잡혀가다, 죽음에 의해서 옮겨지다’(겔 33:6)라는 뜻으로도 쓰인다. 이 단어 ‘라카흐’가 여기서는 ‘엘리야의 승천’을 의미한다. 이는 그의 승천에 대해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계시해 주고 엘리야가 엘리사와 선지자의 제자들에게 그 계시의 내용을 알려준 것으로(Wycliffe) 행 1:9, 10에서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가 감람 산에서 승천하실 때의 모습과 같이 하늘로 올리움을 생생히 나타낸 것이다(Keil & Delitzsch). 또한 본 절의 ‘머리 위로’라는 구절이 이 의미를 더욱 강화해 주고 있는데 여기에 사용된 전치사 ‘메알’은 ‘ … 로부터’라는 뜻의 비분리 전치사(히, 메)와 ‘위에’라는 뜻의 전치사(히, 알)가 합성된 것으로 엘리야가 하늘로 옮기게 되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따라서 제자들이 본 절에서 언급한 말은 엘리야 선지자의 승천에 대한 질문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혹자는 이것을 가리켜 단순히 엘리야가 엘리사를 떠나려고 한다는 사실을 나타낸 것이라고 본다(Bähr). 즉 엘리야의 죽음으로 인한 이별에 대한 언급으로서 엘리사의 마음에 슬픔을 자극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보는 이유는 벧엘에 있는 제자들이 엘리야의 승천에 관해 알 리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K. W. Bähr). 그러나 일반적으로 복음주의 신학자들은 히브리어 ‘라카흐’와 전치사 ‘메알’의 용법, 그리고 당시 상황 등을 고려해 이 구절을 엘리야의 승천에 관한 질문으로 보고 있다.

너희는 잠잠하라. 이것은 “그가 하늘로 올라 가는 것을 큰 소리로 말함으로써 백성들을 소란시켜서는 안 된다”(J. Lange), “엘리야의 겸손을 위해서 그의 영광을 너무 많이 말하지 말라”(Keil)는 의미로 보는 견해도 있다. 또한 이것은 “너희는 마음을 고요하게 해서 하나님의 뜻에 따르고(Wycliffe) 내 사랑하는 주를 이별하려고 하는 이 순간에 말을 많이 함으로써 내 마음을 격동시키지 말라”(Bunsen)는 뜻으로 엘리사 자신의 내적 심정을 토로한 것이며(Matthew Henry) 거룩한 것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말라는 엄중한 요구일 수 있다(Pulpit Commentary).

 

2:4 4-6절. 엘리야와 엘리사의 여행은 길갈-벧엘-여리고-요단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 험한 여행에서 스승에 대한 엘리사의 인내와 충성심은 명백하게 증거되고 있다. 이러한 훈련의 과정들을 통하여 결국 엘리사는 엘리야의 후계자가 되었다.

 

2:5 없음.

 

2:6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 엘리사는 마침내 스승 엘리야의 반복된 시험을 통과하였다. 이러한 그의 결단은 스승에 대한 깊은 애정과 불타는 충성심에서 나온 것이었다. 또한 이러한 엘리사의 고백은 그의 전 인생을 엘리야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손에 의탁하겠다는 자세를 보여준 것이다.

 

2:7 선지자의 제자 오십 명. 여기에 언급된 오십 명이라는 숫자는 1장에서 엘리야 선지자를 잡으러 왔던 병사들의 수와 동일하다(1:9). 오십 명의 제자들은 엘리야의 최후를 목격한 증인들로서 그의 승천을 전파하게 될 사람들이었다. 한편 선지자의 생도들이 50명이라는 것은 그들이 단체로 활동했다는 사실을 반영하고 있는데, 이러한 사실은 암살의 위험에서 도피하는 다윗의 사건 등 많은 역사적 사실 속에서도 볼 수 있다(삼상 10:5, 6, 10, 19:20).

 

2:8 겉옷을 가지고. ‘겉옷’은 히브리어로 ‘에데르’로서 소매없는 외투 또는 양가죽으로 된 어깨를 감싸는 망토를 가리킨다(Pulpit Commentary). 70인역(LXX)에는 헬라어 ‘톤 멜로텐’으로 번역이 되어 있는데 이것은 ‘양가죽’을 의미한다. 한편 모세의 지팡이가 백성들에게 보여주는 권위의 상징인 것과 비교해서 여기에 나타난 엘리야의 겉옷은 선지자의 직분을 상징한다. 그리고 엘리야가 자신의 겉옷을 엘리사가 일하는 곳에다 던진 일(왕상 19:19)이 있는데 이는 엘리야가 엘리사를 선택한다는 상징적 의미와 함께 선지자직을 위임한다는 의미였다. 그렇기 때문에 무리들 앞에서 엘리야의 겉옷을 보인 것은 엘리사가 그의 후계자임을 명백히 하기 위한 것이었다.

물을 치매 물이 이리 저리 갈라지고 두 사람이 마른 땅 위로 건너더라. 이 사건은 모세가 지팡이로 홍해를 가른 사건(출 14:16, 21)과 여호수아가 요단 강을 가른 사건(수 3:13)에 상응한다. 또 이것은 엘리야와 엘리사의 관계가 모세와 여호수아의 관계처럼 스승과 제자의 관계, 혹은 지도자 위임의 관계인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본 사건은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 여호와의 권능을 나타내는 상징적 의미를 내포한 이적이다. 왜냐하면 ‘권능’은 오직 하나님께만 속해 있기 때문이다(시 62:11). 따라서 겉옷을 취하는 선지자의 상징적 행위와 이 이적의 사건은 이것을 지켜보는 생도들에게 하나님의 작정하심과 그분의 목적을 알게 했을 것이다. 한편 ‘마른 땅’은 히브리어로 ‘하라바’로서 ‘마른 땅’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이에 따라 공동번역과 영역본들에서는 모두 ‘마른 땅’(dry ground)이라고 번역했으며 70인역(LXX)도 이와 비슷하게 ‘에레모스’ 즉 ‘사막, 광야’란 의미로 옮겼다. 또한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와 요단 강을 건널 때 ‘마른 땅’(출 14:21, 수 3:17)이라고 말했던 그 표현으로서 성경에서는 드물게 사용된다. 이처럼 하나님은 강물과 바닷물을 갈라 놓을 수 있는 분일 뿐만 아니라 갈라서 드러난 땅을 마르게도 하셔서 백성들의 불편함을 알고 조치하시고 역사하시는 분이다. 한편 이 두 선지자가 요단 강을 건너 당도한 곳은 모압 땅이었는데 이곳이 바로 모세가 죽음을 맞이했던 곳이다. 신 34:6을 보면 “오늘까지 이 묘를 아는 자 없으니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묘가 없는 엘리야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즉, 17절에서 무리들이 엘리야의 시체를 찾았으나 찾지 못한 사건이 이를 뒷받침해 준다. 후대의 많은 사람들은 엘리야를 에녹과 연관시키려고 하지만 오히려 모세와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왜냐하면 구약에서 무덤의 위치에 대해 논란을 벌이고 있는 것은 모세와 엘리야에 대한 두 기사 뿐이기 때문이다.

 

2:9 당신의 성령이 하시는 역사가 갑절이나. ‘당신의 성령이 하시는 역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루아흐’로서 ‘영, 호흡, 영혼’이라는 의미가 있으나 여기서는 ‘선지자적 능력’을 가리킨다. 그리고 본문의 ‘갑절’이라는 말은 신 21:17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는 용어로서 맏아들의 분깃을 강조한 표현이다(Keil & Delitzsch). 즉 이 말은 일반의 형제들보다 장자가 받는 두 몫의 유산을 말한 것이다. 따라서 엘리사는 엘리야의 합법적 계승자로서 충분한 지도자의 역량을 엘리야에게 요구한 것이다. 만일 이 구절이 엘리야보다 두 배의 능력을 구한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할 때는 다음과 같은 모순이 생긴다(Bähr). (1) 실제로 엘리사가 받은 능력은 엘리야의 두 배가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엘리사가 산 생애의 기간이나 그가 나타낸 기적의 수나 크기는 엘리야가 행한 것보다 두 배의 능력을 의미한다고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2) 그러한 요구는 주인을 모시는 종된 자로서 가장 겸손치 못한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종이 결코 그 주인만 못하다고 하셨다(마 10:24). 따라서 엘리사가 엘리야에게 갑절의 능력을 요구한 것은 하나님의 일에 대한 열심을 나타낸 표현으로 엘리야 같이 하나님의 권위와 능력으로 인정받기 위한 것이었다(Matthew Henry, The Interpreter’s Bible).

 

2:10 네가 어려운 일을 구하는도다. 엘리야의 이 말은 엘리사가 요구한 일의 중요성의 정도를 나타낸다. 왜냐하면 9절에서 “내가 네게 어떻게 할 것을 구하라”고 할 때 엘리야는 자신이 쉽게 줄 수 있는 것을 의미했던 것 같다. 그런데 엘리사의 요구는 엘리야가 기대했던 대답이 아닐 뿐만 아니라(Matthew Henry Commentary) 자신이 할 수 없는 하나님께만 속한 일 즉, 신령한 축복을 원한 것이기에 그 일은 어렵다고 한 것이다. 또 엘리야는 후계자를 임명함에 있어서 인간적인 의식은 만인이 보는 가운데서 치룰 수 있으나 이에 대한 신적인 증거는 자신의 영역에 속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Keil & Delitzsch, Pulpit Commentary). 그렇기에 엘리야는 엘리사의 마음 중심을 아시는 하나님께 엘리사의 신앙심 깊은 요청이 허락되도록 기도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나를 네게서 데려가시는 것을 네가 보면. 신 31:23에서 여호수아가 모세의 지도권을 양도받을 때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직접 임했다. 그러나 엘리야는 자신에게 일어나는 이적이 곧 엘리사의 선지자적 직분에 대한 증거가 되리라고 했다. 즉 엘리야는 엘리사가 자신의 승천 모습을 직접 지켜보고 그리고 그 승천의 영적 의미를 깨닫는다면(Wycliffe) 그의 요청이 성취될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이루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6:17, 눅 24:16, 31). 그래서 ‘그렇지 아니하면’이라는 어느 정도 부정적인 면을 암시하는 말을 첨가해서 엘리야는 자신의 의도를 분명히 나타냄과 동시에 이것이 하나님의 주권에 속하는 일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처럼 엘리야는 오직 하나님만을 경외하고 바라보면서 그분의 뜻을 신뢰하였으며 그 명령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삶을 사는 선지자적인 태도의 모범을 보여 주었다.

 

2:11 두 사람이 길을 가며 말하더니. 원문의 문자적인 뜻은 ‘이에 그들이 걷기를 계속하면서 계속해서 말했다’란 의미이다. 이것은 두 사람이 요단 강을 건너 걸어가면서(Wycliffe) 하늘로부터의 징조를 기다리며 한참동안 이야기하고 있었던 것을 가리킨다. 이처럼 엘리야는 하나님께서 엘리사에게 무슨 증거를 보이시도록 기도하였을 것이며 또한 엘리사는 스승의 최후를 맞이하면서 엘리야가 남긴 교훈을 하나라도 더 듣기를 원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과 유사한 예로서 눅 24:50, 51에는 예수께서 하늘로 올리시기 전에 제자들을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서 축복해 주시는 장면이 나온다.

불수레와 불말들이. 이 구절은 1장에서 말한 ‘하늘에서 내려온 불’과 연관됨이 분명하다(1:9-16). 실제로 ‘불수레와 불말’에 관한 언급은 엘리야의 생애 중에서 불의 역사로 말미암은 그의 승리를 연상시켜 준다(왕상 18:24-38, 왕하 1:10-12). 실제로 구약에서 말과 병거는 군대의 전쟁 능력을 나타내는 것이며(출 14:7, 삿 4:3, 욜 2:5, 나 3:2), 불이 하나님의 현현을 상징하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출 3:2, 24:17, 신 33:2, 합 3:3-5)이 ‘불수레와 불말’이 하나님의 권능과 의지를 나타내는 구름을 의미(Lange)한다기 보다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임재와 초자연적인 권능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을 것 같다(Pulpit Commentary, Wycliffe).

회오리 바람을 타고. 원문의 문자적인 뜻은 ‘회오리 바람 안에’ 또는 ‘회오리 바람 가운데’이다. ‘회오리 바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세아라’로서 검은 구름과 번갯불을 동반한(Wycliffe) ‘태풍’ 상태를 의미한 말로 하나님의 임재, 또는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나타내는 용어이다. 여기서 회오리 바람은 자연법칙에 의해서 생긴 것이 아니라 초자연적으로 일어난 현상이었다(욥 38:1, 행 2:2). 그리고 원문을 보면 엘리야가 불수레와 불말을 타고 승천했는지 분명치가 않다. 단지 갑자기 불수레와 불말이 나타나자 엘리야와 엘리사가 태풍 가운데 사라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엘리야가 불병거를 타고 올라간 것이 아니라(말 4:5, 6, 마 11:14) 폭풍 중에, 즉 주께서 임재하시는 가운데 승천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Wycliffe). 그래서 17절에서 오십 명이 엘리야를 찾으러 간 것도 이와 같이 그의 사라짐이 묘연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엘리야가 에녹(창 5:22-24), 예수(눅 24:50-53)와 같이 죽지 않고 하늘에 올라갔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 그 때까지 살아 있는 모든 신자들이 경험하게 될 일에 대한 예표이기도 하다(고전 15:51, 살전 4:17). 한편 후대의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오시지 직전에 먼저 엘리야가 나타나리라(말 4:5)고 믿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유대 문헌 가운데 기록하고 있는 바에 의하면 유대인들은 유월절에 엘리야가 갑자기 들어올 것을 예상하고 문을 잠그지 않았다고 하며, 개들이 즐겁게 짖으면 그것이 엘리야가 오는 소식이라 하여 가슴을 두근거렸다고 한다(Bähr).

올라가더라. 여기서 히브리 원문이 사용하고 있는 단어는 ‘알라’인데 이것은 선지자의 제자들이 엘리사에게 질문할 때(3, 5절) 사용한 단어 ‘라카흐’와 다른 뜻이다. 즉 ‘라카흐’는 하나님이 그를 데리고 가심을 나타내는 말이지만 ‘알라’는 그 원형인 ‘번제’라는 뜻의 ‘올라’에서 보듯이 완전히 태워져 연기가 되어 하늘로 올라가 사라지는 것을 가리킨다. 이것은 확실히 에녹이 승천한 경우와 연관되는데(창 5:24) 창세기의 기록에서는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고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본문을 해석할 때 엘리야의 승천 방법을 정확히 말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에 의하여 그의 모습을 사라지게 하심으로써 에녹과 모세와 동일하게 데려가셨음을 인정할 수 있다. 한편 하나님의 기적과 초자연적인 능력을 부인하는 자유주의적인 신학자들의 일부는 이 엘리야의 승천 기사를 하나의 전설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The Interpreter’s Bible). 그러나 그 현장을 목격한 당시의 선지자 학교 학생들과 엘리사의 증언에 의해 또는 승천 전에 언급된 사실(3, 5절)을 미루어볼 때 그리고 변형 산상에서 모세와 같이 나타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엘리야의 기사를 살펴볼 때 그 사건의 역사적 진실성과 객관적 사실성은 충분히 입증되었다고 할 수 있다(마 17:3,4, 눅 9:30). 이러한 엘리야 선지자의 승천 사실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이 계신 곳에 대한 확실성 뿐만 아니라 인간이 앞으로 받게 될 불멸성에 대해 어렴풋이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불멸성은 성도의 몸이 입게 될 영광이고, 이러한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가 승천하신 것에 대한 한 상징이다(Matthew Henry Commentary).

 

2:12 엘리사가 보고. 10절과 비교해 볼 때 본 절의 이러한 표현은 엘리야의 승천 사실을 엘리사가 목격함을 나타냄과 동시에 엘리사가 제시해 주었던 상황(3, 5절)이 성취되는 것을 나타낸다.

소리 지르되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그 마병이여. 엘리사의 이 외침은 2장에서 절정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13:14에서 요아스 왕의 입을 통하여 이 문구가 다시 말해진다. 그래서 혹자는 이 구절 자체가 갖는 독특한 의미를 해석하려고 한다. 그러나 선지자를 ‘아버지’라고 부른 것은 요아스 왕 이외에는 없기 때문에 이 구절을 문맥과 독립시켜 해석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본문에서 ‘아버지여’라고 말한 것은 다음과 같은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다. 첫째, 이것은 존경을 나타낸다. 즉 종들이 자기 주인에게(5:13), 또는 젊은 제자들이 나이든 선지자에게 이와 같은 존칭을 사용했다. 둘째, 이것은 선지자들의 지도자에게 붙이는 호칭으로 볼 수 있다. 또는 이외에도 혹자는 이것을 ‘엄마, 마마’ 등과 같이 어린 아이의 근심된 표현으로 해석하기도 한다(T. H. Gaster). 그러나 본문의 의미는 엘리사가 자신을 엘리야의 영적 아들로 인식하고 엘리야를 ‘아버지’라고 호칭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병거와 그 마병이여라’는 외침은 엘리야가 이스라엘의 참보호자가 된 것을 의미한다(Wycliffe). 왜냐하면 특히 엘리야는 우상을 섬기는 선지자들과 대결하여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오직 여호와 뿐이심을 증명했던 선지자였기 때문이다. 또 엘리사의 이러한 외침은 앞으로 전개될 그의 사역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그래서 요아스 왕이 엘리사에 대하여 이 구절의 내용과 똑같은 말을 사용한 것(3:14)도 엘리사를 엘리야와 같은 이스라엘의 보호자로 인식했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병거와 마병은 그 당시 최고로 강력한 병기로 이스라엘의 왕들이 왕국의 국력을 과시하고 안전을 의존했던 것(Keil & Delitzsch)으로, 싸울 때(욜 2:5, 나 3:2), 물건을 나를 때(9:28), 여행할 때(행 8:29) 등에 사용되었다.

엘리사. 히브리어로 ‘나의 하나님’이라는 뜻의 ‘엘리’와 ‘그가 구원하신다’라는 뜻의 ‘예샤’가 합쳐진 말이며 ‘나의 하나님이 구원하신다’라는 의미이다. 엘리사가 엘리야의 후계자로서 처음 활동을 시작한 때는 이스라엘 왕국의 7대 왕 아합(B.C. 874-853)의 통치 말년이거나(왕상 19:1-7), 또는 아합의 아들 여호람(B.C. 853-841)의 통치 초반으로 본다(3:1). 이때부터 제12대 왕 요아스(B.C. 798-782) 통치 초반기에 이르기까지 약 반세기에 걸쳐 그는 하나님의 뜻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하는 예언 활동을 하였다(13:14-19).

자기의 옷을 잡아 둘로 찢고. 여기서 엘리사가 자신의 옷을 찢은 것은 스승과 이별하는 슬픔을 나타낸 행동이었다(Pulpit Commentary, Wycliffe). 왜냐하면 하나님의 능력이 임재한다는 사실을 직접 보여주던 엘리야가 사라진 것은 엘리사에게 큰 슬픔과 더불어 충격이었기 때문이다. 이 구절은 그의 이러한 심적 상태가 단적으로 표현된 것이다(5:7, 수 7:6). 이 밖에도 재를 뒤집어쓰는 것(욥 2:8), 얼굴과 가슴을 치는 행위(눅 18:13), 정수리의 머리털을 면도해 버리는 것(렘 7:29) 등은 모두 극도의 애통을 표시하는 관례적인 행동들이다.

 

2:13 이제 엘리사는 다른 제자들, 즉 위의 모든 사실을 목격한 증인들에게로 되돌아 온다.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겉옷을 줍는 후계자 계승의 상징적 행위는 왕상 19:19에서 엘리사가 선지자로서 처음 부름을 받던 행위와 서로 연관된다. 한편 엘리야의 떨어진 겉옷은 엘리사의 요구가 성취되었다는 하나의 증표(Keil & Delitzsch)임과 동시에 엘리사가 엘리야의 후계자라는 사실을 단정적으로 확증시켜 주는 외적 증거이다(15절, Wycliffe).

 

2:14 물을 치며 … 물을 치매. 여기서 ‘물을 치다’라는 표현이 두 번 거듭해서 언급된 것은 스승 엘리야가 행했던 능력을 상기시켜 줌(8절, The Bible Knowledge Commentary, Pulpit Commentary)과 동시에 홍해를 가르던 모세의 모습을 상기시킨다(출 14:21, 22, 수 3:17).

엘리야의 하나님 여호와는 어디 계시니이까. 히브리어 원문은 ‘엘리야의 하나님은 어디 계시는가? 더욱이 그는?’으로 표현되어 있어 마지막 두 단어를 강조하고 있다(Pulpit Commentary). 그런데 엘리사가 이렇게 외친 것은 엘리야에게 능력을 주셨던 하나님께 자기에게도 함께 하시기를 간구한 것이다(Wycliffe). 그러나 이것을 엘리야와 함께 그 하나님의 능력이 더불어 사라진 것이 아닐까 하는 근심의 표현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와는 반대로 엘리사는 질문의 강조 형식을 빌어서 엘리야가 그랬던 것처럼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충성심을 나타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하나님은 그의 신앙에 응답하여 기적을 이루게 하셨고 엘리사가 엘리야의 후계자라는 사실을 외적으로 확증시켜 주셨다(Keil & Delitzsch).

 

2:15 여리고에 있는 선지자의 생도들은 엘리사의 기적을 목격하고서 그가 엘리야의 후계자로서 그의 권능을 이어받았음을 깨닫게 되었다(요 17:18, 행 14:23). 그래서 그들은 엘리사의 영적 권위를 인정해 주는 뜻에서 그의 발앞에 엎드려 그에게 경배하였다. 한편, 엘리야가 요단 강을 건넌 후 얼마되지 않아 승천하였고 이것을 목격한 이후 엘리사도 겉옷을 취하여 곧바로 돌아왔다. 왜냐하면 그 때까지 요단 서편 언덕에서는 여리고의 선지자 제자들이 엘리야의 일을 궁금하게 여기며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16절 이하에 기록된 사건을 통해서 엘리야의 승천에 대해 모두 확신케 되며 이제부터는 새로운 선지자에게 모든 관심이 집중된다. 한편, 본 절에서 엘리야의 역사가 엘리사의 위에 머물렀다는 말은 엘리사가 엘리야와 동일한 능력과 은사를 부여받았다고 하는 선지자 제자들의 고백이다(Wycliffe).

 

2:16 용감한 사람 오십 명. 문자적으로 ‘용감한 사람’이라는 단어는 ‘힘의 아들’이란 뜻으로(Pulpit Commentary) 일반적으로 군사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으나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다. 여기서 ‘용감한 사람’은 사흘 밤낮 엘리야를 찾아 험하고 가파른 산중을 헤매어 다닐 수 있는 건장한 사람들을 가리킨다. 이러한 사람들이 수색한 결과 엘리야를 찾지 못하므로(17절) 엘리사의 말에 더욱 더 큰 신임을 갖게 되었다.

여호와의 성령. 여기서 회오리 바람과 여호와의 성령에 대한 연관성이 나타난다. 즉 11절에서 엘리야가 회오리 바람을 타고 승천한 것은 여호와의 성령이 그를 인도해 가신 것으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회오리 바람은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능력의 도구이기 때문이다(H. W. Robinson).

보내지 말라. 히브리 원문은 ‘그것은 소용없는 일이다, 너희는 아무 것도 찾지 못할 것이다’(Pulpit Commentary)라는 의미로 엘리야의 승천에 대한 엘리사의 확신에 찬 신앙을 나타낸다.

 

2:17 무리가 그로 부끄러워하도록 강청하매. ‘부끄러워하도록’은 ‘ … 까지’를 뜻하는 원어 ‘아드’와 ‘실망하다’를 의미하는 원어 ‘부쉬’에서 온 말이기 때문에 히브리어 원문의 뜻은 ‘그들이 그가 부끄러워할 때까지’라는 의미이다(Gesenius, Keil & Delitzsch). 그러나 70인역(LXX)은 이것을 ‘그가 자기의 거절을 더 이상 고집하기 어려울 때까지’로 번역하였다. 이와 유사한 표현이 8:11에도 나타난다. 이와 같이 선지자의 제자들의 강청에 못이겨 엘리사가 “보내라”고 말했을 때는 그는 단지 그들의 불신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다. 그래서 그 결과는 엘리사의 충고대로 였다. 따라서 본 절은 단지 엘리사가 ‘만일 너희가 그것을 고집한다면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너희의 민족을 위해서 보내라’라는 의미로 허락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Pulpit Commentary).

 

2:18 본 절은 다른 선지자의 제자들보다 영적 통찰력이 뛰어난 엘리사의 모습이 부각되어 있다. 영적 능력과 더불어(14, 15절) 이같은 통찰력을 구비함으로써 엘리사는 선지자의 제자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영적 권위를 인정받게 되었다. 또한 본 절에서는 엘리야의 사라짐에 대한 확실한 역사적 사실성과 그의 후계자 엘리사의 말이 이를 뒷받침하는 수단으로 공식화되고 있다.

 

2:19 이 성읍의 위치는 좋으나. 여기서 말하는 성읍은 구체적으로 어느 성읍을 가리키는지 알 수 없으나 일반적으로 여리고 성일 것이라고 생각한다(Hobbs). 왜냐하면 여리고는 광활한 사막의 오아시스와 같이 경치가 좋고 살기 좋은 곳이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여리고에는 유대 산지에서 저지대로 흐르는 강이 있었으며, 종려 나무(신 34:3)와 무화과 나무(눅 13:6-9)가 있었고 방향(芳香)의 관목들과 향기로운 수지를 내는 나무 등이 많아 아름다운 곳으로 손꼽히던 장소였기 때문이다. 한편 본문의 이 이야기는 텔 에스술탄(Tell es-Sultan)의 서쪽에 위치한 ‘엘리사의 샘’의 전설로서 오늘날까지 전해져 오고 있다.

물이 나쁘므로. 본 절에서는 물에 독소가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밝히지 않고 있다. 그러나 그 성의 사람들은 물이 나쁘기 때문에 토산이 익지 못하고 떨어진다고 생각했다(Wycliffe). 한편 혹자는 이러한 환상이 여리고 성에 대한 여호수아의 저주(수 6:26)에 의한 것으로 설명하기도 한다(Blake).

토산이 익지 못하고 떨어지나이다. 여기서 ‘토산’으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하아레츠’인데, 이것은 ‘땅, 육지, 나라, 주민’ 등의 의미를 가지기 때문에 여기서는 ‘땅’을 의미(Keil & Delitzsch)하는 것 뿐만 아니라 그 땅의 ‘주민들’도 함께 의미(The Interpreter’s Bible)한다고 보는 것이 옳다(레 19:29). 또 ‘익지 못하고 떨어지나이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메샤켈레트’로서 사람이나 동물들이 ‘자식을 낳지 못하다’라는 뜻의 동사 ‘샤콜’의 분사형이다. 또 이 단어는 특별히 비유적으로 포도원에 ‘결실이 없다’라는 뜻으로 쓰이기도 하기 때문에 이러한 비유적인 의미는 결국 자손에 관한 것일 수도 있다(호 9:14). 그래서 루시니안 헬라어 역본은 이를 ‘아이가 없는’(be childless)으로 번역하고 있다. 이러한 다양한 문제들을 고려하면서 본 절을 원문에 따라 해석하면 (1) ‘그 땅에는 소산이 없다’ (2) ‘그 거민은 유산한다’를 의미한다. 이에 따라 공동번역과 Living Bible은 70인역(LXX)과 마찬가지로 ‘주민이 아이를 낳지 못한다’란 의미로 해석한 반면 대부분의 영역본들(KJV, RSV, NIV)은 ‘그 땅에 소산이 없다’라고 번역하였다. 그런데 물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것은 땅의 소산이므로 본 절에서는 (1)의 해석을 따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2:20 새 그릇에 소금을 담아. ‘소금’은 음식물의 양념으로(욥 6:6), 제사용으로(레 2:13, 겔 43:24), 그리고 신생아의 소독제와(겔 16:4), 방부제 등으로 사용되었다. 이런 다양한 용도와 관련하여 ‘폐허’(삿 9:45, 신 29:23), ‘생명’(마 5:13), ‘언약’(민 18:19, 대하 13:5) 등을 상징하기도 했다. 이는 엘리사가 마라의 쓴 물을 달게 하신(출 15:23) 여호와 하나님의 권능을 믿어 의심치 않았으며 이러한 확신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표현한 기적을 보여주었던 것이다(4:41, 출 16:25, 요 9:6). 이러한 사실은 예수께서 소경을 치료하실 때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만든 다음 그것을 소경의 눈에 발라서 낫게 하신 사실과 비교될 수 있다. 한편 본 절에서 새 그릇은 전적으로 깨끗하고 정결한 수단, 즉 새롭게 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Matthew Henry) 소금은 정결을 상징한다(Pulpit Commentary, The Bible Knowledge Commintary).

 

2:21 없음.

 

2:22 오늘에 이르렀더라. 이 말은 본서의 저자가 열왕기서에 관한 사료를 편집해 기록할 그 당시까지 여리고의 물이 청결하게 되어 백성들에게 뿐 아니라 소산에 대해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음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서 본 절은 엘리사의 이적에 대한 기록을 실증해 줌과 동시에 21절에 예언했던 엘리사의 말에 대한 권위를 대변해 준다.

 

2:23 작은 아이들이 성읍에서 나와서. 여기서 ‘작은 아이들’이란 히브리어로 ‘나아르’로서 십이 세부터 십오 세의 소년들을 가리킨다(G. Rawlinson). 이들은 선악에 대한 충분한 인식력을 지니고서 도덕적으로 책임있는 행동을 해야 할 자들이었다(Wycliffe).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낯선 나그네인 엘리사를 보고 도움을 베풀기는 커녕 오히려 조롱하고 비웃는 짖궂은 짓을 하였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엘리사가 그들에게 그렇게 잔인한 저주를 내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대머리여 올라가라. 율법에는 일부러 머리를 깎아 대머리가 되게 하는 것은 불법으로 금지되었다(신 14:1). 또 대머리는 나병에 의한 것이었을 때(레 13:42-44)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징벌의 표징으로 생각했을 뿐만 아니라 천민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본 절에서 엘리사의 대머리는 자연적인 특징으로서 결코 사람들의 조롱이나 비웃음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리고 이러한 엘리사의 외모는 스승 엘리야의 외모와 대조를 이루고 있다(1:8). 한편 본 절의 ‘올라가라’는 히브리어 ‘아래’를 번역한 말인데 이는 ‘높이 오르다, 도약하다, 능가하다’는 뜻으로 ‘네 길을 계속 가라’라고 이해할 수도 있다(Pulpit Commentary). 그러나 여기서는 엘리야처럼 ‘하늘로 올라가라’는 의미로(The Bible Knowledge Commentary) 엘리야의 승천을 조롱하는 말이었다(Matthew Henry).

 

2:24 본 절에 기록된 저주와 그에 대한 성취 방법은 매우 잔인하였다. 그러나 이 사건은 우리의 윤리 기준을 가지고 설명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당시 여호와를 떠나 우상 숭배에 빠져있는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심판을 상징할 뿐만 아니라, 이제 사역을 시작하는 엘리사의 신적 권위를 증명하는 행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의 사람인 자신을 조롱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조롱하는 것과 동일한 것으로 엘리사는 간주했다(대하 36:16, 눅 23:36). 그래서 그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젊은 아이들에게 저주를 선포했는데 이는 율법 아래에서 하나님의 일꾼들이 불순종하는 자에게 저주하도록 하는 모세오경에 근거한 것이다(신 27:14-26). 그리고 아이들 중에 사십이 명을 찢었다는 본 절의 기록으로 보아 이보다 더 많은 젊은이들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조롱에 가담했다는 사실은 그 조롱의 행위가 미리 의도된 것이었음을 암시할 수도 있다(Wycliffe).

 

2:25 갈멜 산으로 가고. 갈멜 산은 휴양과 명상에 적합한 장소일 뿐만 아니라(Matthew Henry) 엘리야의 주된 활동지였기 때문에(Ewald) 그곳은 특별히 선지자들의 거주지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엘리사가 갈멜 산으로 간 것은 그 곳에 있는 엘리야의 친지들이나 선지자의 제자들에게 그가 승천한 것을 알리기 위한 것이었다(G. Rawlinson, Pulpit Commentary).

거기서 사마리아로 돌아왔더라. 엘리사는 은둔 생활을 한 자기 스승 엘리야와는 달리 왕궁이 있는 사마리아에서 살았다. 거기서 사람들과 사귀고 교제하며(5:9, 6:32), 왕의 친밀한 상담자 역할을 하기도 했다(6:9). 그리고 그는 왕으로부터 상당한 존경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8:4). 한편 사마리아는 북 이스라엘의 수도로서 엘리사가 사역한 중심지이다(Wyclif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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