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열왕기하 서론
(1) 제목
고대 히브리어 정경에는 본래 열왕기서가 상하 구분없이 한 권으로 취급되었다. B.C. 3세기경 70인역 번역자들은 70인역의 편집 과정에서 상하 두 권으로 분리했다. 그리고 오늘날 처럼 열왕기서가 분리된 것은 1517년 봄베르그에 의해 출판된 히브리 성경 초판(the Rabbinic Bible, Venice, 1516-1517) 이후부터 였다.
(2) 저자
저자에 대한 견해는 (1) 선지자 예레미야로 보는 견해와, (2) 예레미야와 동시대 인물인 익명의 선지자적 역사가로 보는 견해가 있다.
(3) 기록 연대
기록 연대는 대략 B.C. 562/561~537/536년 경이다.
(4) 주제
열왕기상의 중심 내용이 성전 건축과 왕국의 분열이라면, 열왕기하의 중심 내용은 성전의 파괴와 멸망이다.
1 절은 이스라엘 역사의 새로운 국면을 시사하는 것으로서 당시의 배경과 이스라엘의 역사적 정황을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묘사하고 있다. 첫째, 북(北) 이스라엘이 창건된 이래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던 오므리 왕가(왕상 16:15-29)가 아합 왕의 죽음(왕상 22:29-40)으로 그 세력이 급격히 약화되었음을 보여 준다. 앗수르 왕 살만에셀이 남긴 기록을 보면 당시 아합 왕은 2,000대의 전차와 10,000명의 군사를 지휘했다고 한다. 아합 왕의 막강함을 짐작해 볼 수 있는 것이다. 둘째, 이 강력한 아합 왕의 죽음으로 인해 이스라엘이 약해지자 모압이 반기를 들었음을 보여 준다. 모압 왕 메사가 남긴 것으로 전해지는 모압 비문(Moab’s epitaph)에 보면 모압이 이스라엘 왕국에 반기를 들기 시작한 것은 오므리의 아들 때부터라고 한다. 그런데 오므리의 아들은 곧 아합 왕을 말한다(왕상 16:28). 결국 모압은 다윗에 의하여 정복을 당한 뒤(삼하 8:2) 계속 이스라엘의 속국이 되어 조공을 바쳐오다가 아합 왕 때부터 서서히 반기를 들기 시작하여 아합 왕이 죽은 후에는 완전히 이스라엘을 배반한 것이다(Keil & Delitzsch, Wycliffe, Pulpit Commentary). 한편 모압이 이스라엘을 반역한 기사는 3:4-27에 다시 나온다. 상세한 내용은 그 곳 주석을 참조하라.
열왕기하 서론
(1) 제목
고대 히브리어 정경에는 본래 열왕기서가 상하 구분없이 한 권으로 취급되었다. B.C. 3세기경 70인역 번역자들은 70인역의 편집 과정에서 상하 두 권으로 분리했다. 그리고 오늘날 처럼 열왕기서가 분리된 것은 1517년 봄베르그에 의해 출판된 히브리 성경 초판(the Rabbinic Bible, Venice, 1516-1517) 이후부터 였다.
(2) 저자
저자에 대한 견해는 (1) 선지자 예레미야로 보는 견해와, (2) 예레미야와 동시대 인물인 익명의 선지자적 역사가로 보는 견해가 있다.
(3) 기록 연대
기록 연대는 대략 B.C. 562/561~537/536년 경이다.
(4) 주제
열왕기상의 중심 내용이 성전 건축과 왕국의 분열이라면, 열왕기하의 중심 내용은 성전의 파괴와 멸망이다.
1 절은 이스라엘 역사의 새로운 국면을 시사하는 것으로서 당시의 배경과 이스라엘의 역사적 정황을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묘사하고 있다. 첫째, 북(北) 이스라엘이 창건된 이래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던 오므리 왕가(왕상 16:15-29)가 아합 왕의 죽음(왕상 22:29-40)으로 그 세력이 급격히 약화되었음을 보여 준다. 앗수르 왕 살만에셀이 남긴 기록을 보면 당시 아합 왕은 2,000대의 전차와 10,000명의 군사를 지휘했다고 한다. 아합 왕의 막강함을 짐작해 볼 수 있는 것이다. 둘째, 이 강력한 아합 왕의 죽음으로 인해 이스라엘이 약해지자 모압이 반기를 들었음을 보여 준다. 모압 왕 메사가 남긴 것으로 전해지는 모압 비문(Moab’s epitaph)에 보면 모압이 이스라엘 왕국에 반기를 들기 시작한 것은 오므리의 아들 때부터라고 한다. 그런데 오므리의 아들은 곧 아합 왕을 말한다(왕상 16:28). 결국 모압은 다윗에 의하여 정복을 당한 뒤(삼하 8:2) 계속 이스라엘의 속국이 되어 조공을 바쳐오다가 아합 왕 때부터 서서히 반기를 들기 시작하여 아합 왕이 죽은 후에는 완전히 이스라엘을 배반한 것이다(Keil & Delitzsch, Wycliffe, Pulpit Commentary). 한편 모압이 이스라엘을 반역한 기사는 3:4-27에 다시 나온다. 상세한 내용은 그 곳 주석을 참조하라.
1:2 다락 난간. 팔레스타인 지방의 다락은 대개 평평한 지붕 위에 꾸민 방으로 보통 방에 비해 크다(눅 22:12, 행 1:13, 9:37, 20:8). 그리고 그곳을 오르내리는 계단은 건물 밖에 있다. 한편 다락방에는 하나의 창문이 있는데 창에는 외부의 침입을 막기 위한 창살이 있고 그 창살은 격자 무늬로 되어 있다. 본 절의 ‘난간’에 해당하는 원어 ‘사바크’도 본래의 뜻은 ‘창살’이다. 이 다락에서는 멀리까지도 조망할 수 있었는데 아하시야 왕은 바로 이곳 창문에서 밖을 내려다 보다가 밖으로 떨어졌을 것이다.
떨어져 병들매. 높은 곳에서 떨어져 심한 타박상 및 골절을 입은 것으로 보인다. 거기에다 합병증까지 발생했을 가능성도 있다.
에그론. 에그론은 블레셋 평원에 있는 다섯 성읍 중 하나(수 13:3)로서 가장 북쪽에 위치한다. 따라서 이스라엘과는 상대적으로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도시이다. 오늘날 이곳은 아키르(Akir)로 불리고 있는데 옛날 폐허의 자취를 아직도 지니고 있다. 여호수아 13:3 주석 참조.
바알세붑. 이 말에서 ‘바알’은 ‘주’(Lord), ‘소유주’, ‘남편’ 등을 의미하며, ‘세붑’은 ‘파리, 날벌레’를 의미한다(사 7:18, 전 10:1). 그러므로 ‘바알세붑’은 ‘파리의 주, 날벌레의 주’라는 뜻이 된다. 혹자(G. Rawlinson)는 ‘바알세붑’을 ‘베엘 사멘’(Beel-Samen)과 동일한 신으로도 보았다. ‘베엘 사멘’은 베니게인들이 섬기던 ‘하늘의 주’이다(Pulpit Commentary). 그러나 이것은 어원적으로 지지를 받지 못한다. 그런데 70인역(LXX)은 ‘바알세붑’을 ‘바알 뮈안’ 또는 ‘데온 뮈안’으로 번역하였다. 이와 관련해 혹자는 ‘데온 뮈안’을 파리 형상으로 된 신으로서 질병을 보내기도 하고 파리로부터 오는 질병을 지켜 주기도 하는 신이라고 주장하였다(Starke). 한편 신약에서는 ‘세붑’이 ‘제불’(Zebul)로 읽혀지고 있는데(마 10:25), ‘제불’은 ‘왕’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사실은 ‘바알세불’, 즉 ‘바알 왕’이라는 칭호가 ‘바알세붑’의 본래의 칭호라는 간접적인 증거가 된다. 또한 바알세붑은 후대 랍비들에 의하여 ‘바알세벨’(Baal-Zebel)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는데 이것은 ‘분토(糞土)의 왕’이라는 뜻이다. 이것으로 보아 왕이라는 뜻의 ‘세불’이 점차 ‘세붑’, ‘세벨’ 등으로 불려진 것은 될 수 있는 대로 우상에 대하여 나쁜 인상을 심어 주려 한 탓으로 짐작된다(Keil & Delitzsch Commentary). 따라서 후에 ‘바알세불’은 여호와의 적대자인 사탄의 칭호로도 쓰이게 되었다(마 10:25, 막 3:22, 눅 11:15).
이 병이 낫겠나 물어 보라. 아하시야의 어리석음이 잘 나타나 있는 말이다. 그는 겸손히 하나님의 긍휼을 간구하여야 했다. 왜냐하면 그의 사고와 질병은 계속 아비와 어미,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는 죄악(왕상 22:51-53)을 깨닫게 하여 하나님과의 정상적인 관계를 회복시키려는 하나님의 징계의 채찍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아하시야는 계속 우상의 마술적 신탁(oracle)에만 의지하였으니 결국 하나님의 징계의 채찍은 심판의 채찍이 되었다(4, 16, 17절).
한편 엘렌 지 화잇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에그론의 우상이 그 제사장들의 중개를 통하여 미래의 사건에 관한 정보를 제공해 준다는 소문이 나 있었다. 그와 같은 일반적 신임을 얻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상당히 먼 거리에서도 그 우상을 찾아갔다. 거기서 말하는 예언과 제공되는 정보는 흑암의 왕으로부터 직접 나왔다.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님께로부터 분리시키기 위하여 우상의 경배를 만들어 유지해 오는 자는 사탄이다. 그리고, 사탄의 대리자에 의하여 흑암과 거짓의 나라는 지속되고 있다.
아하시야 왕의 범죄와 형벌에 관한 역사에는 아무도 생각 없이 무시해 버릴 수 없는 경고의 교훈이 있다. 비록 우리가 이교의 신들을 섬기지 않는다 할지라도, 수많은 사람들이 그 이스라엘의 왕이 한 것과 꼭 마찬가지로 사탄의 신당에서 경배하고 있다. 비록 과학과 교육의 영향 아래 더욱 세련되고 매력적인 형태를 취하기는 했지만, 이교적 우상 숭배의 정신 자체는 오늘날도 널리 보급 되어 있다. 분명한 예언의 말씀을 믿는 믿음은 신속히 감소되어 가고 있는 반면에, 미신과 사탄의 마법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슬픈 증거는 날마다 늘어가고 있다. 성경을 열심히 연구하여 생애의 모든 욕망과 목적을 그 분명한 표준에 복종시키지 않는 모든 사람들,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로써 구하지 않는 모든 사람들은 분명히 정로에서 벗어나 사탄의 기만에 빠지게 될 것이다”(증언보감 2권, 51).
떨어져 병들매. 높은 곳에서 떨어져 심한 타박상 및 골절을 입은 것으로 보인다. 거기에다 합병증까지 발생했을 가능성도 있다.
에그론. 에그론은 블레셋 평원에 있는 다섯 성읍 중 하나(수 13:3)로서 가장 북쪽에 위치한다. 따라서 이스라엘과는 상대적으로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도시이다. 오늘날 이곳은 아키르(Akir)로 불리고 있는데 옛날 폐허의 자취를 아직도 지니고 있다. 여호수아 13:3 주석 참조.
바알세붑. 이 말에서 ‘바알’은 ‘주’(Lord), ‘소유주’, ‘남편’ 등을 의미하며, ‘세붑’은 ‘파리, 날벌레’를 의미한다(사 7:18, 전 10:1). 그러므로 ‘바알세붑’은 ‘파리의 주, 날벌레의 주’라는 뜻이 된다. 혹자(G. Rawlinson)는 ‘바알세붑’을 ‘베엘 사멘’(Beel-Samen)과 동일한 신으로도 보았다. ‘베엘 사멘’은 베니게인들이 섬기던 ‘하늘의 주’이다(Pulpit Commentary). 그러나 이것은 어원적으로 지지를 받지 못한다. 그런데 70인역(LXX)은 ‘바알세붑’을 ‘바알 뮈안’ 또는 ‘데온 뮈안’으로 번역하였다. 이와 관련해 혹자는 ‘데온 뮈안’을 파리 형상으로 된 신으로서 질병을 보내기도 하고 파리로부터 오는 질병을 지켜 주기도 하는 신이라고 주장하였다(Starke). 한편 신약에서는 ‘세붑’이 ‘제불’(Zebul)로 읽혀지고 있는데(마 10:25), ‘제불’은 ‘왕’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사실은 ‘바알세불’, 즉 ‘바알 왕’이라는 칭호가 ‘바알세붑’의 본래의 칭호라는 간접적인 증거가 된다. 또한 바알세붑은 후대 랍비들에 의하여 ‘바알세벨’(Baal-Zebel)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는데 이것은 ‘분토(糞土)의 왕’이라는 뜻이다. 이것으로 보아 왕이라는 뜻의 ‘세불’이 점차 ‘세붑’, ‘세벨’ 등으로 불려진 것은 될 수 있는 대로 우상에 대하여 나쁜 인상을 심어 주려 한 탓으로 짐작된다(Keil & Delitzsch Commentary). 따라서 후에 ‘바알세불’은 여호와의 적대자인 사탄의 칭호로도 쓰이게 되었다(마 10:25, 막 3:22, 눅 11:15).
이 병이 낫겠나 물어 보라. 아하시야의 어리석음이 잘 나타나 있는 말이다. 그는 겸손히 하나님의 긍휼을 간구하여야 했다. 왜냐하면 그의 사고와 질병은 계속 아비와 어미,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는 죄악(왕상 22:51-53)을 깨닫게 하여 하나님과의 정상적인 관계를 회복시키려는 하나님의 징계의 채찍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아하시야는 계속 우상의 마술적 신탁(oracle)에만 의지하였으니 결국 하나님의 징계의 채찍은 심판의 채찍이 되었다(4, 16, 17절).
한편 엘렌 지 화잇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에그론의 우상이 그 제사장들의 중개를 통하여 미래의 사건에 관한 정보를 제공해 준다는 소문이 나 있었다. 그와 같은 일반적 신임을 얻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상당히 먼 거리에서도 그 우상을 찾아갔다. 거기서 말하는 예언과 제공되는 정보는 흑암의 왕으로부터 직접 나왔다.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님께로부터 분리시키기 위하여 우상의 경배를 만들어 유지해 오는 자는 사탄이다. 그리고, 사탄의 대리자에 의하여 흑암과 거짓의 나라는 지속되고 있다.
아하시야 왕의 범죄와 형벌에 관한 역사에는 아무도 생각 없이 무시해 버릴 수 없는 경고의 교훈이 있다. 비록 우리가 이교의 신들을 섬기지 않는다 할지라도, 수많은 사람들이 그 이스라엘의 왕이 한 것과 꼭 마찬가지로 사탄의 신당에서 경배하고 있다. 비록 과학과 교육의 영향 아래 더욱 세련되고 매력적인 형태를 취하기는 했지만, 이교적 우상 숭배의 정신 자체는 오늘날도 널리 보급 되어 있다. 분명한 예언의 말씀을 믿는 믿음은 신속히 감소되어 가고 있는 반면에, 미신과 사탄의 마법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슬픈 증거는 날마다 늘어가고 있다. 성경을 열심히 연구하여 생애의 모든 욕망과 목적을 그 분명한 표준에 복종시키지 않는 모든 사람들,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로써 구하지 않는 모든 사람들은 분명히 정로에서 벗어나 사탄의 기만에 빠지게 될 것이다”(증언보감 2권, 51).
1:3 여호와의 사자. 역사에는 ‘여호와의 사자’(the angel of the Lord)라는 문구가 흔하지 않다(K. Koch). 그렇다고 해서 이것을 편집자에 의한 삽입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Hobbs). 왜냐하면 엘리야와 관계된 기사들 속에서 ‘여호와의 사자’의 역할은 대단히 중요하기 때문이다(왕상 19:7). 특히 본 장에서 ‘여호와의 사자’는 아하시야 왕이 보낸 ‘왕의 사자’와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당시 엘리야가 만난 ‘여호와의 사자’는 천사가 아니라 여호와 자신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성경 가운데는 ‘여호와의 사자’라는 말이 성육신(incarnation) 되기 전의 그리스도, 즉 구약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용어로 많이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본 절에 나타난 ‘여호와의 사자’도 구약의 그리스도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특히 구약의 그리스도가 이스라엘 민족의 보호자로 직접 나타나심과 같이(출 23:20, 21, 사 63:9) 본 절의 ‘여호와의 사자’도 우상을 숭배하는 이스라엘을 징계하기 위해 나타났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뿐만 아니라 ‘여호와의 사자’라는 표현은 엘리야의 사역과 관련하여 세 번 밖에 언급되지 않았으며(왕상 19:7, 15, 왕하 1:3) 그 이외에는 하나님의 계시를 가리켜 주로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16절), ‘여호와의 말씀이 임했다’(왕상 17:2, 9:9)라고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표현 역시 본 절의 ‘여호와의 사자’가 삼위의 하나님 중 한 분인 구약의 그리스도라는 증거가 된다.
디셉 사람 엘리야. ‘엘리야’라는 이름의 뜻은 ‘여호와는 나의 하나님이시다’라는 뜻이다. 구약에서는 엘리야라는 이름이 대단히 많이 언급되어 있는데(대상 8:27, 스 10:21, 26) 대개 히브리인들의 ‘여호와 신앙’의 반영(反映)이다. 한편 디셉은 요단 동편의 길르앗 지경에 위치한 성읍으로(왕상 17:1) 오늘날 길르앗 북쪽의 산악 지대인 리스딥(Listib)과 동일한 성읍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 물으러 가느냐. 강한 역설적 표현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즉 산 자의 하나님이시며 이스라엘 전 역사를 통해 나타나신 능력의 하나님이시다(출 3:15, 마 22:32). 뿐만 아니라 그분은 자기가 택한 백성 이스라엘과 항상 함께 계시면서 그들을 보호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러한 증표로서 하나님은 솔로몬으로 하여금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도록 하셨으며(삼하 7:13, 왕상 6:1 이하) 끊임없이 선지자들을 보내셔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심을 나타내셨다. 따라서 이와 같은 사실에도 불구하고 아하시야가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방인의 우상인 바알세붑을 찾았다는 것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배반한 행위가 아닐 수 없다. 한편 오늘날 극도로 문명이 발달되고 이기주의가 판치는 세상에 사는 성도들에게는 주변의 모든 것이 우상이 되기 쉽다. 그러므로 더욱더 경성함으로 혹 하나님보다 다른 무엇을 더 의지하는 잘못을 범치 말아야 할 것이다(마 10:37, 요일 5:21).
디셉 사람 엘리야. ‘엘리야’라는 이름의 뜻은 ‘여호와는 나의 하나님이시다’라는 뜻이다. 구약에서는 엘리야라는 이름이 대단히 많이 언급되어 있는데(대상 8:27, 스 10:21, 26) 대개 히브리인들의 ‘여호와 신앙’의 반영(反映)이다. 한편 디셉은 요단 동편의 길르앗 지경에 위치한 성읍으로(왕상 17:1) 오늘날 길르앗 북쪽의 산악 지대인 리스딥(Listib)과 동일한 성읍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 물으러 가느냐. 강한 역설적 표현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즉 산 자의 하나님이시며 이스라엘 전 역사를 통해 나타나신 능력의 하나님이시다(출 3:15, 마 22:32). 뿐만 아니라 그분은 자기가 택한 백성 이스라엘과 항상 함께 계시면서 그들을 보호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러한 증표로서 하나님은 솔로몬으로 하여금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도록 하셨으며(삼하 7:13, 왕상 6:1 이하) 끊임없이 선지자들을 보내셔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심을 나타내셨다. 따라서 이와 같은 사실에도 불구하고 아하시야가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방인의 우상인 바알세붑을 찾았다는 것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배반한 행위가 아닐 수 없다. 한편 오늘날 극도로 문명이 발달되고 이기주의가 판치는 세상에 사는 성도들에게는 주변의 모든 것이 우상이 되기 쉽다. 그러므로 더욱더 경성함으로 혹 하나님보다 다른 무엇을 더 의지하는 잘못을 범치 말아야 할 것이다(마 10:37, 요일 5:21).
1:4 그러므로. 여기서 ‘그러므로’(therefore)라고 번역된 히브리어는 ‘라켄’으로서 결과를 나타내는 부사이다. 즉 이는 이제 아하시야의 우상 숭배 죄 때문에 그에게 죽음의 심판이 임하였음을 보여 준다(Pulpit Commentary). 이와 같이 하나님의 심판에는 항상 분명한 이유가 있으니 우리가 그 이유를 분명히 알 때 하나님의 징계에 대하여 불평하지 않게 될 것이다(약 1:13, 14).
엘리야가 이에 가니라. 이처럼 엘리야는 아하시야가 반드시 죽으리라는 엄청난 소식을 아하시야의 사자들에게 전달하기 위하여 지체없이 길을 떠났다. 이것은 엘리야의 위대한 신앙의 모습일뿐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즉각적인 순종의 자세인 것이다. 왜냐하면 일국(一國)의 절대 권력을 행사하고 있는 왕에게, 더구나 악하기로 소문나 있는 아하시야(왕상 22:52)에게 그의 죽음 소식을 알린다는 것은 투철한 신앙과 용기가 아니고서는 행하기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엘리야가 이에 가니라. 이처럼 엘리야는 아하시야가 반드시 죽으리라는 엄청난 소식을 아하시야의 사자들에게 전달하기 위하여 지체없이 길을 떠났다. 이것은 엘리야의 위대한 신앙의 모습일뿐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즉각적인 순종의 자세인 것이다. 왜냐하면 일국(一國)의 절대 권력을 행사하고 있는 왕에게, 더구나 악하기로 소문나 있는 아하시야(왕상 22:52)에게 그의 죽음 소식을 알린다는 것은 투철한 신앙과 용기가 아니고서는 행하기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1:5 사자들이 … 돌아오니. 사자들이 돌아온 시간은 의외로 빨랐다. 그래서 아하시야 왕이 ‘어찌하여’라고 놀람을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왕의 사자들은 엘리야를 만난 후 왕에게로 즉시 돌아오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이유는 첫째, 엘리야가 갑자기 왕의 사자들을 찾아와서 책망을 하며 놀라운 심판을 선언했기 때문이다(6절). 엘리야는 왕의 사자들이 무엇때문에 에그론으로 가는지 전혀 묻지도 않았으면서 그 이유를 이미 다 알고 있었다. 둘째, 엘리야의 외모에서 풍겨 오는 신적 권위에 압도되었기 때문이다. 왕의 사자들은 엘리야의 외모를 자세히 살펴본 것 같다. 이는 그들이 왕에게 보고하는 장면에서 분명히 알 수 있다(8절).
1:6 한 사람이 올라와서. 왕의 사자들 중 그 누구도 당시에 널리 알려져 있던 선지자 엘리야를 보고 못알아 보았을리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엘리야를 가리켜 ‘한 사람’ 이라고 표현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첫째, 엘리야를 보호해 주려는 의도 때문이다. 그들이 처음 엘리야를 만났을 때 그의 신적 권위에 압도되었다는 사실이 이런 주장을 유력하게 해준다. 둘째, 자신들의 신변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서이다. 즉 그들은 엘리야로부터 저주의 말을 듣고서도 엘리야를 그냥 놓아준 일로 인해 아하시야로부터 노여움을 살까봐 두려워하였던 것이다(왕상 18:7-15).
1:7 어떤 사람이더냐. ‘사람’이라는 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미쉬파트’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특별한 용법으로 사용되고 있다. 본래 ‘미쉬파트’는 법적인 용어로서 ‘심판, 공의’라는 뜻이다. 그래서 70인역(LXX)은 이것을 ‘심판이 무엇이냐’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미쉬파트’는 개인의 ‘특징’이나 ‘습관’ 그리고 ‘생김새’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KJV는 이를 ‘외양이 어떠하냐’(What was the appearance)로, RSV는 ‘어떤 종류의 사람이더냐’(What kind of man was he)로 번역하고 있다. 그리고 Living Bible은 ‘어떻게 생겼느냐’(What did he look like)로, 공동번역은 ‘어떻게 차린 사람이더냐’로 각기 번역하고 있다. 이로 보아 아하시야는 엘리야의 외모 뿐만 아니라 그의 습관이나 특징 등을 모두 포함하여 그가 누구인가를 충분히 판단할 수 있는 상세한 답변을 요구한 것이다. 그러면 아하시야가 사자들로부터 엄청난 소식을 듣자 이처럼 제일 먼저 그 말을 한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고 싶어한 까닭은 무엇이겠는가? 아마도 첫째, 그 사람이 정말로 죽음을 예언할 만큼 권위 있는 사람인지 아니면 거짓 예언자나 미친 사람에 불과한지를 알고자 했기 때문일 것이다. 왜냐하면 이는 자신의 생사(生死)와 관련된 문제였기 때문이다. 둘째, 혹 그가 바로 자기 부친 아합에게 저주를 선포했던 엘리야(왕상 21:20-22)가 아닌가 하고 추측했기 때문일 것이다. 즉 아하시야는 사자들의 보고를 접한 순간 엘리야가 또 다시 활동하는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을 수도 있다(Wycliffe, Pulpit Commintary).
1:8 털이 많은 사람.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바알 사아르’로서 ‘어떤 털의 소유자’(a certain possessor of hair)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 말만으로는 그 정확한 뜻이 모호한데 대개 다음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된다. 첫째, ‘머리털이 많이난 사람’이라는 뜻이다. 혹자는 엘리야의 특징이 바로 그 머리털에 있었다고 한다(Hobbs). 70인역(LXX)도 이같은 견해를 따라 본 절을 ‘머리털이 많은 사람’으로 번역하고 있다. 둘째, ‘털옷을 입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에 따라 RSV는 본 절을 ‘그가 털로 만든 겉옷을 입었다’라고 번역하고 있다. 혹자는 당시 엘리야가 무두질하지 않은 털가죽 옷을 입고 머리는 어깨 위로 길게 늘어뜨린 채 다녔다고 주장하기도 한다(Dake, Rawlinson). 그런데 이상의 두 견해 중 보다 보편적인 주장은 후자이다. 왜냐하면 예수 당시 세례 요한이 낙타 털옷을 입었던 점(마 3:4)이 이같은 사실을 뒷받침 해주기 때문이다. 특히 거짓 선지자들 조차 사람의 눈을 속이기 위하여 털로 된 겉옷을 입고 다녔던 점(슥 13:4)으로 보아 당시 선지자들에게 있어서의 털옷은 ‘사명자의 표시’임과 동시에 ‘권위’를 상징했던 것 같다.
허리에 가죽띠를 띠었더이다. 여기서 ‘허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마트나임’은 두 가지 뜻이 있다. (1) 띠나 속옷으로 둘러싸는 곳으로 ‘요부’(腰部) 전체를 가리킨다. (2) 신체의 한 가운데 부분으로 인체의 힘이 집중되어 있는 ‘허리’를 가리킨다. 다음으로 ‘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에조르’는 ‘마트나임’을 둘러싸는 천이나 혁대를 가리킨다. 공동번역은 이를 ‘아랫도리를 가린 것’으로 번역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가죽띠가 아닌 무명이나 면 같은 천으로 만든 띠를 두르고 다녔다(Keil & Delitzsch Commentary). 그리고 대제사장이 매는 띠는 금실과 청색, 자색, 홍색 그리고 가늘게 꼰 베실로 만든 세마포 띠였다(출 28:8). 그 반면에 가죽띠는 매우 거칠어 착용하기 불편하였으므로 주로 가난한 사람들과 고행자들이 착용하였다(Pulpit Commentary). 따라서 엘리야의 옷차림은 대부분의 사람들과 아주 대조적인 것으로서 죄악된 세상으로부터의 분리와 죄악된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한 것으로 보인다(Keil, Rawlinson).
왕이 이르되 그는 … 엘리야로다. 이처럼 아하시야가 사자들의 설명을 듣고서 그가 엘리야라는 사실을 안 것으로 보아 아하시야는 평소 엘리야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아하시야가 평소 엘리야를 알고 있었다는 것은 엘리야가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것과 그가 전한 말도 하나님의 말씀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하시야가 자신의 죄악을 뉘우치지 않고 도리어 엘리야를 체포하려 했던 것(9-13절)은 그가 얼마나 완악한 인간이었는가를 보여 준다.
허리에 가죽띠를 띠었더이다. 여기서 ‘허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마트나임’은 두 가지 뜻이 있다. (1) 띠나 속옷으로 둘러싸는 곳으로 ‘요부’(腰部) 전체를 가리킨다. (2) 신체의 한 가운데 부분으로 인체의 힘이 집중되어 있는 ‘허리’를 가리킨다. 다음으로 ‘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에조르’는 ‘마트나임’을 둘러싸는 천이나 혁대를 가리킨다. 공동번역은 이를 ‘아랫도리를 가린 것’으로 번역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가죽띠가 아닌 무명이나 면 같은 천으로 만든 띠를 두르고 다녔다(Keil & Delitzsch Commentary). 그리고 대제사장이 매는 띠는 금실과 청색, 자색, 홍색 그리고 가늘게 꼰 베실로 만든 세마포 띠였다(출 28:8). 그 반면에 가죽띠는 매우 거칠어 착용하기 불편하였으므로 주로 가난한 사람들과 고행자들이 착용하였다(Pulpit Commentary). 따라서 엘리야의 옷차림은 대부분의 사람들과 아주 대조적인 것으로서 죄악된 세상으로부터의 분리와 죄악된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한 것으로 보인다(Keil, Rawlinson).
왕이 이르되 그는 … 엘리야로다. 이처럼 아하시야가 사자들의 설명을 듣고서 그가 엘리야라는 사실을 안 것으로 보아 아하시야는 평소 엘리야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아하시야가 평소 엘리야를 알고 있었다는 것은 엘리야가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것과 그가 전한 말도 하나님의 말씀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하시야가 자신의 죄악을 뉘우치지 않고 도리어 엘리야를 체포하려 했던 것(9-13절)은 그가 얼마나 완악한 인간이었는가를 보여 준다.
1:9 오십부장과 그의 군사 오십 명을 엘리야에게로 보내매. 각 부장 제도는 모세의 장인 이드로의 충고에 따라 모세가 처음으로 세운 이스라엘의 준(準)군사 체제이자 행정 조직이다(출 18:21-25). 이때 세움 받은 부장들은 곧 십부장, 오십부장, 백부장, 천부장인데 이러한 군대 조직의 체계는 고대 근동에서 다른 나라들도 마찬가지였다(참고, H. W. F. Saggs, The Greatness That Was Babylon, p. 254). 한편 아하시야 왕이 오십부장과 그의 군사 오십 명을 엘리야에게로 보낸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이다. 첫째, 엘리야가 순순히 따라오지 않을 경우, 강제로 끌고 오기 위해서이다. 그렇지 않고 아하시야가 선의(善意)를 가지고 있었다면 한 사람의 사자만 보냈어도 충분하였을 것이다. 둘째,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의 초인적인 능력을 의식했기 때문이다(요 18:3). 이처럼 아하시야는 선지자 엘리야에 대한 강한 적의를 품었을 뿐만 아니라 의식적으로 하나님께 당돌하게 대항하려고 했다.
산 꼭대기에 앉아 있는지라. 여기서 ‘산’이란 뜻의 원어 ‘하르’에는 어떤 특정한 대상을 가리키는 정관사 ‘하’가 붙어있다. 이것은 본 절의 ‘산’이 앞서 엘리야가 왕의 사자들과 만났던 바로 그 산(3절)임을 의미한다. 따라서 본 절은 엘리야가 여호와의 사자의 명령대로 시행한 후(3, 4절) 도망하지 않고 아하시야가 취할 다음 단계의 행동을 조용하고 냉정하게 기다리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Dake). 한편 분명하지는 않으나 일부 학자들은 엘리야가 앉아 있던 산이 갈멜 산이었던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Baker, Delitzsch). 사실 갈멜 산은 엘리야가 바알의 선지자들과 싸웠던 곳으로서(왕상 18장) 본 장의 주제와 깊은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그 주체는 바로 하나님의 사자와 왕의 사자 간의 싸움인데 그 싸움의 승패를 결정짓는 심판자는 앞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왕상 18:38) 바로 하늘에서 내려온 불이었다(10, 12절).
이르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 내려오라 하셨나이다. 여기서 ‘내려오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레다’인데 ‘싸우려 산에서 내려오다’, 또는 ‘홍수처럼 급히 내려오다’라는 뜻의 동사 ‘야라드’의 능동태 명령형이다. 따라서 이는 아하시야가 일국의 왕으로서 엘리야에게 명령하고 있는 말임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하나님의 사람이여’는 선지자를 부를 때 흔히 쓰는 호칭이다(삼상 2:27, 9:6, 10). 그러나 아하시야가 엘리야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대우하지 않은 점으로 보아 여기서는 엘리야를 빈정대는 말임을 알 수 있다. 즉 엘리야를 향하여 명령을 내리는 아하시야 왕의 태도는 존경보다는 경멸에 가까운 것이었다. 한편 ‘이르되’로 번역된 히브리어 ‘예다베르’는 피엘형(Piel, 강조형 능동)으로서 ‘거듭거듭 말한다’라는 뜻이다. 이처럼 동일한 말을 두 번 세 번 반복함으로써 엘리야의 감정을 자극한 것으로 보아 오십부장 역시 아하시야의 명령을 전달할 때 동일한 경멸의 자세를 취하였음이 분명하다.
산 꼭대기에 앉아 있는지라. 여기서 ‘산’이란 뜻의 원어 ‘하르’에는 어떤 특정한 대상을 가리키는 정관사 ‘하’가 붙어있다. 이것은 본 절의 ‘산’이 앞서 엘리야가 왕의 사자들과 만났던 바로 그 산(3절)임을 의미한다. 따라서 본 절은 엘리야가 여호와의 사자의 명령대로 시행한 후(3, 4절) 도망하지 않고 아하시야가 취할 다음 단계의 행동을 조용하고 냉정하게 기다리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Dake). 한편 분명하지는 않으나 일부 학자들은 엘리야가 앉아 있던 산이 갈멜 산이었던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Baker, Delitzsch). 사실 갈멜 산은 엘리야가 바알의 선지자들과 싸웠던 곳으로서(왕상 18장) 본 장의 주제와 깊은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그 주체는 바로 하나님의 사자와 왕의 사자 간의 싸움인데 그 싸움의 승패를 결정짓는 심판자는 앞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왕상 18:38) 바로 하늘에서 내려온 불이었다(10, 12절).
이르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 내려오라 하셨나이다. 여기서 ‘내려오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레다’인데 ‘싸우려 산에서 내려오다’, 또는 ‘홍수처럼 급히 내려오다’라는 뜻의 동사 ‘야라드’의 능동태 명령형이다. 따라서 이는 아하시야가 일국의 왕으로서 엘리야에게 명령하고 있는 말임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하나님의 사람이여’는 선지자를 부를 때 흔히 쓰는 호칭이다(삼상 2:27, 9:6, 10). 그러나 아하시야가 엘리야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대우하지 않은 점으로 보아 여기서는 엘리야를 빈정대는 말임을 알 수 있다. 즉 엘리야를 향하여 명령을 내리는 아하시야 왕의 태도는 존경보다는 경멸에 가까운 것이었다. 한편 ‘이르되’로 번역된 히브리어 ‘예다베르’는 피엘형(Piel, 강조형 능동)으로서 ‘거듭거듭 말한다’라는 뜻이다. 이처럼 동일한 말을 두 번 세 번 반복함으로써 엘리야의 감정을 자극한 것으로 보아 오십부장 역시 아하시야의 명령을 전달할 때 동일한 경멸의 자세를 취하였음이 분명하다.
1:10 내가 만일 하나님의 사람이면. 이 말은 자신의 권위를 실제로 증명해 보이겠다는 일종의 선포이다. 즉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이제 엘리야는 왕의 권위보다 더 큰 하나님의 권위를 그들에게 증명해 보이겠다는 말인 것이다.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 ‘불’을 뜻하는 히브리어 ‘에쉬’는 문자적으로 자연적인 불을 의미한다. 그러나 특별한 경우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며(출 3:2, 13:21, 22, 19:18) 비유적으로는 ‘진노의 심판’을 나타낸다(계 20:14, 15). 소돔과 고모라는 여호와께서 내리신 유황 불로 멸망했고(창 19:24), 예수께서도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는 불에 던져질 것이라고 심판의 말씀을 선포하셨다(마 7:19). 따라서 엘리야가 “내가 만일 하나님의 사람이면”이라고 한 가정적인 표현의 말은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불을 내려주심으로 말미암아 그 신적 권위가 증명되었다. 한편 이처럼 엘리야가 아하시야의 오십부장에게 불 심판을 선고한 까닭은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첫째는 오십부장의 불손한 태도를 징치(懲治)하기 위함이며, 둘째는 아하시야 왕의 완악함을 경고하기 위함이다.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 ‘불’을 뜻하는 히브리어 ‘에쉬’는 문자적으로 자연적인 불을 의미한다. 그러나 특별한 경우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며(출 3:2, 13:21, 22, 19:18) 비유적으로는 ‘진노의 심판’을 나타낸다(계 20:14, 15). 소돔과 고모라는 여호와께서 내리신 유황 불로 멸망했고(창 19:24), 예수께서도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는 불에 던져질 것이라고 심판의 말씀을 선포하셨다(마 7:19). 따라서 엘리야가 “내가 만일 하나님의 사람이면”이라고 한 가정적인 표현의 말은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불을 내려주심으로 말미암아 그 신적 권위가 증명되었다. 한편 이처럼 엘리야가 아하시야의 오십부장에게 불 심판을 선고한 까닭은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첫째는 오십부장의 불손한 태도를 징치(懲治)하기 위함이며, 둘째는 아하시야 왕의 완악함을 경고하기 위함이다.
1:11 왕이 다시 … 보내니. 아하시야가 왕이라는 공직자의 위치에서 두 번이나 같은 행위를 시행했다는 것은 이미 개인적인 차원을 떠나 국가적인 의지를 표명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물론 그 배후에는 아하시야의 행위를 막을 만한 신하들이 없었던 탓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엘리야에 대한 아하시야 왕의 완악한 태도는 더욱더 완강해져 갔다. 이는 곧 어리석음과 패역함의 극치가 아닐 수 없다.
속히 내려오라. ‘속히’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메헤라’로서 ‘서둘러서, 빨리’라는 뜻이다. 이것은 ‘내려오라’는 말을 더욱 강조해 주는 것으로서 권위주의 의식(意識)이 잔뜩 들어 있는 말이다. 사실 왕이 사자를 보낼 때는 공식적인 용어를 쓰기 마련이다. 따라서 본 절에 나타난 이러한 용어는 선지자 엘리야의 권위에 대한 경멸과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정면 도전으로 보여진다. 즉 아하시야는 하늘로부터 불이 임하는 심판을 당하고서도(10절) 회개하지 않고 오히려 더욱더 교만한 자세로 엘리야와 하나님을 대적한 것이다(Keil, Matthew Henry, Wycliffe).
속히 내려오라. ‘속히’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메헤라’로서 ‘서둘러서, 빨리’라는 뜻이다. 이것은 ‘내려오라’는 말을 더욱 강조해 주는 것으로서 권위주의 의식(意識)이 잔뜩 들어 있는 말이다. 사실 왕이 사자를 보낼 때는 공식적인 용어를 쓰기 마련이다. 따라서 본 절에 나타난 이러한 용어는 선지자 엘리야의 권위에 대한 경멸과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정면 도전으로 보여진다. 즉 아하시야는 하늘로부터 불이 임하는 심판을 당하고서도(10절) 회개하지 않고 오히려 더욱더 교만한 자세로 엘리야와 하나님을 대적한 것이다(Keil, Matthew Henry, Wycliffe).
1:12 보다 완강해진 왕의 거만한 태도에 비해 엘리야 선지자의 태도는 어떠한가? 엘리야는 처음과 동일하게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여 선지자의 권위를 나타내었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발견할 수 있다. (1) 엘리야는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된 태도를 취함으로써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신분을 잘 지켰다. 이런 점은 과거 모세가 크게 한 번 실수함으로써(민 20:11)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2) 엘리야는 더욱더 거만해진 두 번째 오십부장의 불손함을 잘 견딤으로써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면모를 잃지 않았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종’ 된 자로서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겸손함과 일관된 자세를 잘 유지하는 것은 현대의 사역자들에게도 요청되는 필수적인 기본 덕목이다.
1:13 올라가서 엘리야의 앞에 …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여기서 주목해야 할 사실은 앞의 두 오십부장(9, 11절)과 다른 세 번째 오십부장의 겸손한 태도이다. 특히 두 번째 오십부장의 태도와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 즉 두 번째 오십부장은 전임자가 징벌을 받은 사실을 알면서도 산 아래에서 엘리야에게 내려오라고 큰 소리쳤다. 그러나 세 번째 오십부장은 두 전임자를 교훈삼아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엘리야에게 공손한 태도를 표하고 있다.
나의 … 생명을 당신은 귀히 보소서. 여기서 ‘귀히 보소서’란 말은 히브리어 ‘티카르’를 번역한 것이다. 이 단어는 ‘귀하게 여기다, 존중하다’라는 뜻의 동사 ‘야카르’의 미완료 변형으로서 어떻게든 긍휼을 베풀어 달라는 간절한 탄원이다. 그런데 세 번째 오십 부장의 이러한 간구와 겸손함은 아하시야 왕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왜냐하면 아하시야는 두 차례에 걸친 하나님의 심판에도 불구하고(9-12절)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은 채 또 다시 엘리야를 체포하러 세 번째 군사들을 파송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 번째 오십부장은 엘리야의 권위와 하나님의 권능을 깨닫고 아하시야의 명령과 상관없이 엘리야의 발 앞에 무릎 꿇었다(Matthew Henry’s Commintary).
나의 … 생명을 당신은 귀히 보소서. 여기서 ‘귀히 보소서’란 말은 히브리어 ‘티카르’를 번역한 것이다. 이 단어는 ‘귀하게 여기다, 존중하다’라는 뜻의 동사 ‘야카르’의 미완료 변형으로서 어떻게든 긍휼을 베풀어 달라는 간절한 탄원이다. 그런데 세 번째 오십 부장의 이러한 간구와 겸손함은 아하시야 왕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왜냐하면 아하시야는 두 차례에 걸친 하나님의 심판에도 불구하고(9-12절)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은 채 또 다시 엘리야를 체포하러 세 번째 군사들을 파송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 번째 오십부장은 엘리야의 권위와 하나님의 권능을 깨닫고 아하시야의 명령과 상관없이 엘리야의 발 앞에 무릎 꿇었다(Matthew Henry’s Commintary).
1:14 불이 … 살랐거니와. 본 절은 세 번째 오십부장이 두 전임자들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징벌을 자신의 교훈으로 삼았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계속되는 하나님의 징벌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고 더욱 완악해지는 아하시야 왕의 태도와 좋은 대조를 이룬다. 그런데 이처럼 하나님의 심판을 깨닫고 두려워하여 간정하는 자는 반드시 구원을 얻는다(15절, 시 149:4).
1:15 여호와의 사자가 엘리야에게 이르되. 3절에서 언급되었던 ‘여호와의 사자’가 본 절에서 다시 등장하였다. 이것은 여호와께서 바로 지금까지 엘리야를 보호하고 계셨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그의 권위를 지탱해 주셨음을 의미한다.
그를 두려워하지 말고 함께 내려가라. 여기서 ‘그’는 아하시야 왕을 가리킨다. 그리고 ‘그’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미파나이우’로서 ‘그의 면전에’라는 뜻이다. 즉, 여호와의 사자는 엘리야로 하여금 아하시야 왕 앞에 나아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권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두 번의 징벌을 내리시고 난 후에 엘리야를 아하시야 앞에 보내시는 걸까?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이 추론해 볼 수 있다. 첫째, 이제는 아하시야에게 직접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데 방해가 되는 외적인 장애물이 제거되었기 때문이다. 둘째, 이제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백성들이나 신하들이 모두 분명하게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즉, 두 차례에 걸친 심판으로 인해(9-12절) 이제는 백성들이나 신하들 가운데 세 번째 오십부장과 같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을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당신의 심판을 행하심에 있어서 단지 징벌만을 하지 않으신다. 그 심판 속에는 후대의 하나님의 백성들 뿐만 아니라 당대의 백성들에게 주는 귀한 교훈이 담겨 있는 것이다.
그를 두려워하지 말고 함께 내려가라. 여기서 ‘그’는 아하시야 왕을 가리킨다. 그리고 ‘그’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미파나이우’로서 ‘그의 면전에’라는 뜻이다. 즉, 여호와의 사자는 엘리야로 하여금 아하시야 왕 앞에 나아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권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두 번의 징벌을 내리시고 난 후에 엘리야를 아하시야 앞에 보내시는 걸까?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이 추론해 볼 수 있다. 첫째, 이제는 아하시야에게 직접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데 방해가 되는 외적인 장애물이 제거되었기 때문이다. 둘째, 이제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백성들이나 신하들이 모두 분명하게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즉, 두 차례에 걸친 심판으로 인해(9-12절) 이제는 백성들이나 신하들 가운데 세 번째 오십부장과 같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을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당신의 심판을 행하심에 있어서 단지 징벌만을 하지 않으신다. 그 심판 속에는 후대의 하나님의 백성들 뿐만 아니라 당대의 백성들에게 주는 귀한 교훈이 담겨 있는 것이다.
1:16 본 절의 내용은 3, 4절의 반복일 뿐만 아니라 왕의 사자들에 의해 왕에게 전달된 동일한 말이다(6절). 그러나 이제 아하시야 왕 앞에서 엘리야 선지자가 이 말씀을 직접 선포하는 것은 대단히 의미가 깊다. 즉 엘리야는 우상을 섬기는 포악한 아하시야 왕을 향해서 그의 불신앙을 선포함으로써 어떠한 상황에 처할지라도 굴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조금도 변경함이 없이 담대히 외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는 참된 용기와 담대함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고후 5:6).
1:17 엘리야가 전한 여호와의 말씀대로. 여기서 ‘대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전치사 ‘케’로서 ‘… 와 동일하게, … 처럼’이라는 뜻이다. 즉 이는 엘리야가 선포한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도 틀림없이 그대로 성취되었음을 가리킨다. 이와 같이 열왕기서에 기술된 역사의 전반을 살펴볼 때 선지자가 선포한 예언이 그대로 성취된 것은 곧 하나님께서 그 선지자의 권위를 보증해 주고 계신다는 분명한 증거가 된다(왕상 14:18, 22:13, 왕하 2:22, 10:17, 24:2).
여호람이 그를 대신하여 왕이 되니. 70인역(LXX)과 수리아역(Peshitta)과 라틴어 역본(Vulgate)에는 ‘여호람’(Jehoram)이란 말 뒤에 ‘그의 형제’라는 말이 추가되어 있다. 그리고 공동번역, Living Bible, RSV 등도 그대로 따르고 있다. 그러나 맛소라 히브리 본문에는 이 말이 없다. 아마도 그 이유는 ‘여호람’이 ‘아하시야’의 형제라는 사실을 당대에는 누구나 다 아는 일반적인 상식에 속한다고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70인역(LXX) 등이 ‘그의 형제’라는 단어를 추가함으로써 오늘날의 우리들에겐 도움이 되고 있다. 즉, 이는 당시 아하시야에게 아들이 없었다는 사실과 여호람이 그의 형제라는 사실을 동시에 보여주는 주석적 역할을 하고 있다.
유다 왕 … 여호람의 둘째 해였더라. 본 절과 달리 3:1에서는 유다 왕 여호사밧의 제18년에 이스라엘 왕 여호람이 왕위에 오른 것으로 되어 있다. 반면 8:16에는 유다 왕 여호람이 왕위에 오른 해가 이스라엘 왕 여호람의 제5년이었다고 되어 있다. 즉 한 곳에서는 이스라엘 왕 여호람이 유다 왕 여호람보다 약 4년 먼저 왕위에 올랐다고 기록되어 있고 다른 곳에서는 약 1년 늦게 왕위에 올랐다고 서로 모순되게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서로 모순되는 연대 기록은 성경 기자들의 기록상의 오류로 인한 것이 아니다. 대신 그 원인은 근본적으로 이스라엘의 섭정 제도(regency)에 있다. 즉 성경의 연대 기록은 어떤 왕의 섭정 개시 년도부터 계산되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정식으로 등극한 해부터 계산되기도 한다. 따라서 아하시야의 형제 여호람이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른 연대를 계산함에 있어서도 본 절에서는 유다 왕 여호람이 섭정을 시작한 해를 기준으로 계산한 반면, 8:16에서는 유다 왕 여호람이 정식 등극한 해를 기준으로 계산한 것으로 보면 아무런 문제가 없게 된다(Keil & Delitzsch Commentary).
여호람이 그를 대신하여 왕이 되니. 70인역(LXX)과 수리아역(Peshitta)과 라틴어 역본(Vulgate)에는 ‘여호람’(Jehoram)이란 말 뒤에 ‘그의 형제’라는 말이 추가되어 있다. 그리고 공동번역, Living Bible, RSV 등도 그대로 따르고 있다. 그러나 맛소라 히브리 본문에는 이 말이 없다. 아마도 그 이유는 ‘여호람’이 ‘아하시야’의 형제라는 사실을 당대에는 누구나 다 아는 일반적인 상식에 속한다고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70인역(LXX) 등이 ‘그의 형제’라는 단어를 추가함으로써 오늘날의 우리들에겐 도움이 되고 있다. 즉, 이는 당시 아하시야에게 아들이 없었다는 사실과 여호람이 그의 형제라는 사실을 동시에 보여주는 주석적 역할을 하고 있다.
유다 왕 … 여호람의 둘째 해였더라. 본 절과 달리 3:1에서는 유다 왕 여호사밧의 제18년에 이스라엘 왕 여호람이 왕위에 오른 것으로 되어 있다. 반면 8:16에는 유다 왕 여호람이 왕위에 오른 해가 이스라엘 왕 여호람의 제5년이었다고 되어 있다. 즉 한 곳에서는 이스라엘 왕 여호람이 유다 왕 여호람보다 약 4년 먼저 왕위에 올랐다고 기록되어 있고 다른 곳에서는 약 1년 늦게 왕위에 올랐다고 서로 모순되게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서로 모순되는 연대 기록은 성경 기자들의 기록상의 오류로 인한 것이 아니다. 대신 그 원인은 근본적으로 이스라엘의 섭정 제도(regency)에 있다. 즉 성경의 연대 기록은 어떤 왕의 섭정 개시 년도부터 계산되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정식으로 등극한 해부터 계산되기도 한다. 따라서 아하시야의 형제 여호람이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른 연대를 계산함에 있어서도 본 절에서는 유다 왕 여호람이 섭정을 시작한 해를 기준으로 계산한 반면, 8:16에서는 유다 왕 여호람이 정식 등극한 해를 기준으로 계산한 것으로 보면 아무런 문제가 없게 된다(Keil & Delitzsch Commentary).
1:18 남은 사적은 …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성경에는 아하시야의 사적이 엘리야와 관련해서 죄를 범했다는 본 장의 기록밖에 없다. 그러나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많은 사건이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었고 본서가 기록될 당시 사람들은 아하시야의 여타 사적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아무튼 성경의 기록에서 분명히 알 수 있는 사실은 그가 심히 악을 행하였다는 것이다(대하 20:35).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 이 책은 신구약 성경 66권 중의 한 권인 역대기(歷代記)가 아니다. 대신 이는 본서 저자가 활용한 자료들 중의 하나인 이스라엘 왕들의 국정 일지(國政日誌)를 가리킨다.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왕상 14:19 주석을 참조하라.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 이 책은 신구약 성경 66권 중의 한 권인 역대기(歷代記)가 아니다. 대신 이는 본서 저자가 활용한 자료들 중의 하나인 이스라엘 왕들의 국정 일지(國政日誌)를 가리킨다.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왕상 14:19 주석을 참조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