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 본 절은 나봇 사건의 시간적, 공간적 배경을 설명한다. 두 차례에 걸친 아람과의 교전에서 승리를 거둔 아합(20장)은 당시 이스라엘에 별궁을 지어 두고 사치와 방탕 생활에 빠졌던 것으로 짐작된다. 바로 그 즈음에 아합은 나봇의 포도원을 자신의 유흥지에 편입시키고자 하는 탐욕에 사로 잡혔다.
이스르엘. 므깃도와 벧산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 오늘날의 제린(Zerin)으로 추정되는 성읍이다. 구약 시대 당시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었는데 아합은 특별히 이곳에 별궁을 건설, 종종 거주하였던 듯하다.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18:46 주석을 참조하라.
나봇. ‘나봇’은 아마도 ‘싹트다’는 말에서 유래한 이름일 것으로 추정된다(Ward). 나봇의 조상들은 이스라엘에서 대대로 포도 재배를 해온 것으로 보이니 그러한 직업과 관련된 이름이 붙여졌던 것 같다.
포도원. 팔레스타인의 식물 가운데 하나인 포도와 이를 재배하는 포도원은 많은 사람들에게 재정의 원천이 되었다(Ross). 신 20:6은 포도원을 만들고서도 그 첫 수확을 보지 못한 자에게는 병역 의무를 면제하여 귀가 조치 하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팔레스타인에서 포도원이 갖는 경제적 비중을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신 7:13 주석 참조.
이스르엘. 므깃도와 벧산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 오늘날의 제린(Zerin)으로 추정되는 성읍이다. 구약 시대 당시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었는데 아합은 특별히 이곳에 별궁을 건설, 종종 거주하였던 듯하다.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18:46 주석을 참조하라.
나봇. ‘나봇’은 아마도 ‘싹트다’는 말에서 유래한 이름일 것으로 추정된다(Ward). 나봇의 조상들은 이스라엘에서 대대로 포도 재배를 해온 것으로 보이니 그러한 직업과 관련된 이름이 붙여졌던 것 같다.
포도원. 팔레스타인의 식물 가운데 하나인 포도와 이를 재배하는 포도원은 많은 사람들에게 재정의 원천이 되었다(Ross). 신 20:6은 포도원을 만들고서도 그 첫 수확을 보지 못한 자에게는 병역 의무를 면제하여 귀가 조치 하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팔레스타인에서 포도원이 갖는 경제적 비중을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신 7:13 주석 참조.
21:2 채소 밭. 여기서 ‘채소’(히, 야라크)란 녹색의 풀 종류를 말한다. 그리고 ‘밭’(히, 간)은 오히려 ‘뜰’ 또는 ‘정원’이라고 해야 옳다. 그러므로 ‘채소 밭’이란 ‘푸른 정원’을 가리키는 말이다(공동번역). 보통 이러한 정원은 여름의 뜨거운 열기를 피하는 장소로 고안되곤 했다. 그리고 또한 종종 우상 숭배의 장소로 이용되기도 하였다(사 1:29, 65:3, 66:17).
만일 네가 좋게 여기면. 이에 해당하는 원문은 문자적으로 ‘눈에 좋거든’이란 뜻이다. 물론 이 말은 상대방의 의사를 존중하는 표현이다. 여기서 비록 왕이라도 남의 토지를 맘대로 몰수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비록 초기의 이상(理想)은 많이 퇴색하였지만, 백성들에게 기업으로 분배한 땅은 원래 하나님의 소유이므로 권력자라도 그 소유관계를 함부로 변경할 수는 없다는 이스라엘 전통의 구속력을 보게 된다(레 25:23). 그러나 이것은 형식적인 제한일 뿐 왕정 시대가 열린 이래 왕들은 끊임없이 자신의 토지 소유를 확장하려 들었다. 사실 고대 근동의 왕들은 모두 대지주였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왕들조차 이를 흉내냈다는 현실적 사실은, 조건은 어떠하든지 하나님의 백성이 꿈꾸던 삶의 형태는 아니었다. 어쨌든 지금 아합이 시도하는 토지 소유의 확대는 일찍이 사무엘이 경고했던 바에 부합한다(삼상 8:12, 14). 즉 백성들은 자신의 것이 아닌 왕의 토지를 경작해야 하며, 거기서 수확한 농산물은 더 이상 생산자인 백성 자신의 것이 아니다. 그리고 왕은 자꾸 백성들의 포도원과 감람원을 빼앗아 자기 신복(臣僕)들의 손에 넘겨 준다. 이러한 경고는 신정 왕국 이스라엘에서 왕은 어디까지나 백성을 위해 존재하는 봉사자여야 했지만, 실제로는 모든 백성이 오히려 왕을 위해 존재하게 되는 타락이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 이를 입증이라도 하려는 듯 아합이 나봇의 포도원을 탐내고 있는 것이다. 아무튼 아합이 나봇의 포도원을 소유하려는 표면적 구실은 무엇이든 그 실제적 동기는 왕권의 극대화를 위한 토지 소유의 확대 도모로 볼 수 있다.
만일 네가 좋게 여기면. 이에 해당하는 원문은 문자적으로 ‘눈에 좋거든’이란 뜻이다. 물론 이 말은 상대방의 의사를 존중하는 표현이다. 여기서 비록 왕이라도 남의 토지를 맘대로 몰수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비록 초기의 이상(理想)은 많이 퇴색하였지만, 백성들에게 기업으로 분배한 땅은 원래 하나님의 소유이므로 권력자라도 그 소유관계를 함부로 변경할 수는 없다는 이스라엘 전통의 구속력을 보게 된다(레 25:23). 그러나 이것은 형식적인 제한일 뿐 왕정 시대가 열린 이래 왕들은 끊임없이 자신의 토지 소유를 확장하려 들었다. 사실 고대 근동의 왕들은 모두 대지주였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왕들조차 이를 흉내냈다는 현실적 사실은, 조건은 어떠하든지 하나님의 백성이 꿈꾸던 삶의 형태는 아니었다. 어쨌든 지금 아합이 시도하는 토지 소유의 확대는 일찍이 사무엘이 경고했던 바에 부합한다(삼상 8:12, 14). 즉 백성들은 자신의 것이 아닌 왕의 토지를 경작해야 하며, 거기서 수확한 농산물은 더 이상 생산자인 백성 자신의 것이 아니다. 그리고 왕은 자꾸 백성들의 포도원과 감람원을 빼앗아 자기 신복(臣僕)들의 손에 넘겨 준다. 이러한 경고는 신정 왕국 이스라엘에서 왕은 어디까지나 백성을 위해 존재하는 봉사자여야 했지만, 실제로는 모든 백성이 오히려 왕을 위해 존재하게 되는 타락이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 이를 입증이라도 하려는 듯 아합이 나봇의 포도원을 탐내고 있는 것이다. 아무튼 아합이 나봇의 포도원을 소유하려는 표면적 구실은 무엇이든 그 실제적 동기는 왕권의 극대화를 위한 토지 소유의 확대 도모로 볼 수 있다.
21:3 조상의 … 여호와께서 금하실지로다. 나봇의 이와 같은 대답은 그가 여호와를 믿는 사람이며, 율법에 충실하려는 인물이었음을 분명히 보여 준다. 아합이 후한 보상을 주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봇이 이를 거부한 것은 그 포도원이 선조 대대로 전해 내려온 유산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이유는 자손들에게 대를 이어 전해야 할 유산인 선조의 유업을 매각하는 것이 불법으로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1) 가난하여 토지를 팔았을 때 근족이 무를 것, (2) 궁핍하여 무를 날짜를 연기할 때는 연기된 기한을 계속하여 무를 것, (2) 무를 힘이 없을 때 그 토지를 산 자가 희년(禧年)에 돌려 줄 것 등을 율법으로 명시하셨다(레 25:23-28).
나봇처럼 전통의 신앙에 충실하려는 인물이 아합 시대와 같은 변질된 시대에는 많지 않았을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1) 가난하여 토지를 팔았을 때 근족이 무를 것, (2) 궁핍하여 무를 날짜를 연기할 때는 연기된 기한을 계속하여 무를 것, (2) 무를 힘이 없을 때 그 토지를 산 자가 희년(禧年)에 돌려 줄 것 등을 율법으로 명시하셨다(레 25:23-28).
나봇처럼 전통의 신앙에 충실하려는 인물이 아합 시대와 같은 변질된 시대에는 많지 않았을 것이다.
21:4 근심하고 답답하여. 이에 앞장에서도 언급된 구절로서 내적 격동으로 인해 속이 타거나 기분이 언짢은 상태를 가리킨다. 20:43 주석 참조. 그런데 아합의 심리상태에 대해 거듭 이러한 표현이 사용된 것에서 우리는 그의 완악함과 패역(悖逆)함을 엿볼 수 있다.
침상에 누워 … 식사를 아니하니. 본 절에서 아합은 마치 투정하는 어린 아이처럼 유치하다. 즉 그는 갖고 싶은 것을 갖지 못하게 되자 심통난 아이처럼 식사를 거절하고 누워버린 것이다. 이와 같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에 있어서 전혀 성인다운 면모롤 보이지 않는 아합에게서 독자들은 그가 왕으로서 너무 졸렬한 인물이었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사실 이스라엘에 외국의 우상 숭배가 도입되고 번창되게 된 원인(16:29-33)에는 아합의 이런 줏대없고 성숙치 못한 사람됨이 한몫을 차지하였다. 한편 아합의 소유욕이 빚어낸 이 우스갯거리는 결국 나봇 살인이라는 엄청난 죄악으로까지 발전하였다(5-16절). 여기서도 우리는 죄가 죄를 유발한다는 죄의 속성(약 1:15)을 확인할 수 있다.
침상에 누워 … 식사를 아니하니. 본 절에서 아합은 마치 투정하는 어린 아이처럼 유치하다. 즉 그는 갖고 싶은 것을 갖지 못하게 되자 심통난 아이처럼 식사를 거절하고 누워버린 것이다. 이와 같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에 있어서 전혀 성인다운 면모롤 보이지 않는 아합에게서 독자들은 그가 왕으로서 너무 졸렬한 인물이었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사실 이스라엘에 외국의 우상 숭배가 도입되고 번창되게 된 원인(16:29-33)에는 아합의 이런 줏대없고 성숙치 못한 사람됨이 한몫을 차지하였다. 한편 아합의 소유욕이 빚어낸 이 우스갯거리는 결국 나봇 살인이라는 엄청난 죄악으로까지 발전하였다(5-16절). 여기서도 우리는 죄가 죄를 유발한다는 죄의 속성(약 1:15)을 확인할 수 있다.
21:5 이세벨이 그에게 나아와 이르되. 아합의 무기력하고 유치한 면은 도리어 이세벨의 강하고 과단성 있는 성격을 부각시킨다. 본 절에서도 이세벨은 아합의 아내로서가 아니라 마치 후견인 같은 모습으로 등장한다. 즉 그저 드러누워 끙끙 앓는 아합에 비해, 질문을 통해 사태를 파악하려는 이세벨은 훨씬 적극적이다. 그래서 아합과 이세벨의 관계에 있어 늘상 끌려 다니는 쪽은 아합이었다. 19:1 주석 참조.
21:6 아합이 일의 자초 지종을 이세벨에게 고하고 있는 본 장면에서 다음과 같은 점을 유념해야 한다. (1) 대체로 이스라엘에 비해 훨씬 전제 군주적 성격이 강한 두로 출신의 이세벨(더구나 이 여자는 잔혹한 폭군 아버지 밑에서 자랐음을 기억해야 한다)에게 아합의 말이 얼마나 어리석게 들렸을까 하는 문화적 차이점이다(16:31). (2) 아합은 마치 어머니에게 자신이 할 수 없는 것을 하소연하는 어린 아이처럼 처신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관계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일찍이 자신이 신봉하던 우상 종교 도입을 요청하는 이세벨에게 아합이 여호와 신앙의 바람막이가 되기에는 분명히 역부족이었을 것이다(16:31-33). 아합이 펼친 종교 정책에는 언제나 이세벨의 입김이 작용했던 까닭도 바로 이 때문이다.
21:7 왕이 지금 이스라엘 나라를 다스리시나이까. 본 절은 의문문이 아니다. 히브리 원문상 이는 ‘한 나라의 통치자가 왜 그 모양입니까’라는 힐난조의 말이다. 여기서 이세벨이 가긴 왕권 개념은 이스라엘인들의 전통적 개념과는 다른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즉 이세벨은 고대 근동의 전제 군주가 일반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권력을 염두에 두면서 본 절과 같은 발언을 한 것이다. 그러나 이미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이스라엘의 왕권은 보다 제한적이었다. 2절 주석 참조. 즉 왕이라 하더라도 그는 다른 백성과 마찬가지로 하나님 앞에서 율법 준수의 의무를 져야 했다(신 17:14-20). 이 점은 고대 근동의 거의 무제한적 왕권에 비해 훨씬 많이 행동의 제약을 받았음을 의미했다. 그래서 아합은 비록 왕이라 할지라도 자기 부모의 유업 외에 타인의 유업을 함부로 탈취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세벨의 눈에는 그 같은 아합의 행동이 어리석기 짝이 없고 왕답지 못한 처사로 비쳤을 것이다.
내가 … 드리리이다. 나봇의 말 중 ‘여호와께서’ 금하신 일(3절)을 ‘내가’ 주겠다고 말하는 이세벨의 언동에서, 그녀가 정녕 이스라엘을 해치는 대적임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처럼 이세벨은 아합으로 하여금 악을 행하도록 격려하여, 하나님 앞에서 마땅히 걸어야 할 삶의 방향을 왜곡하도록 부추긴 암적(癌的) 존재였다.
내가 … 드리리이다. 나봇의 말 중 ‘여호와께서’ 금하신 일(3절)을 ‘내가’ 주겠다고 말하는 이세벨의 언동에서, 그녀가 정녕 이스라엘을 해치는 대적임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처럼 이세벨은 아합으로 하여금 악을 행하도록 격려하여, 하나님 앞에서 마땅히 걸어야 할 삶의 방향을 왜곡하도록 부추긴 암적(癌的) 존재였다.
21:8 아합의 이름으로 … 그 인을 치고.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고대인들이 사용하던 인장(印章)의 용도 역시 다양했다. 즉 인장은 의식서 날인, 재산 증서의 신빙성 보장, 공문서의 권위 보증 등 여러 효능을 가졌다. 본 절에서 이세벨이 거짓 편지를 쓴 후 아합의 도장으로 인친 것도 그 내용이 의심할 바 없는 것임을 표시하기 위함이었다. 즉 이세벨은 백성들의 눈을 감쪽 같이 속이기 위해 왕의 인장을 도용하는 짓도 서슴지 않았다. 한편 당시의 도장은 오늘날과 비슷한 형태 외에도 굴려서 인을 찍는 원통형 인장, 그리고 인장 반지도 있었다. 창 41:42 주석 참조.
치고. 이에 해당하는 원어 ‘하탐’은 그 자체로 ‘인을 찍다, 봉인하다’는 뜻을 갖고 있다. 그런데 어떤 문서를 ‘하탐’하는 것은 남이 그 내용을 알 수 없도록 비밀에 붙이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아합의 친서는 비밀리에 이스르엘의 장로와 귀족들에게 전달되었을 것이다.
귀족. 이에 해당하는 원어 ‘호르’는 성경에 ‘귀족’으로 번역되어 있다(전 10:17, 렘 27:20). 그러나 이들의 지위나 직무가 무엇이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카일(Keil)은 이들을 행정관들(the members of the magistracy)로 보고 있다.
치고. 이에 해당하는 원어 ‘하탐’은 그 자체로 ‘인을 찍다, 봉인하다’는 뜻을 갖고 있다. 그런데 어떤 문서를 ‘하탐’하는 것은 남이 그 내용을 알 수 없도록 비밀에 붙이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아합의 친서는 비밀리에 이스르엘의 장로와 귀족들에게 전달되었을 것이다.
귀족. 이에 해당하는 원어 ‘호르’는 성경에 ‘귀족’으로 번역되어 있다(전 10:17, 렘 27:20). 그러나 이들의 지위나 직무가 무엇이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카일(Keil)은 이들을 행정관들(the members of the magistracy)로 보고 있다.
21:9 금식을 선포하고. 이스라엘 사회에 있어서 공적인 금식 선포는 공동체 내의 악행 및 죄에 대해 집단적 참회를 촉구하는 것이다(삼상 7:6, 14:24). 즉 한 개인의 죄는 그 사람만을 단죄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공동체 전체의 회개와 관계 개선이 요구된다는 사고 방식이 담긴 행위이다. 그러나 본 절의 금식 선포는 도리어 악행을 하고자 하는 음모에서 발단된 그릇된 성격의 것이었다. 즉 이세벨은 아직 드러나지 않은 가증스러운 죄악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성읍에 하나님의 저주가 임하고 있다는 위기 의식을 불러 일으키려고 이스라엘 성읍에 금식을 선포한 것이다. 여기서 ‘아직 드러나지 않은 가증스러운 죄악’이란 물론 나봇이 하나님과 왕을 저주하였다는 날조된 죄를 의미한다(10, 13절).
나봇을 백성 가운데에 높이 앉힌 후에. 즉 나봇을 피고인의 신분으로 재판정에 앉힌 것을 가리킨다. 그런데 아무런 까닭도 모르는 체 이처럼 재판정에 끌려나온 나봇은 필시 어리둥절하였을 것이다. 13절 주석 참조.
나봇을 백성 가운데에 높이 앉힌 후에. 즉 나봇을 피고인의 신분으로 재판정에 앉힌 것을 가리킨다. 그런데 아무런 까닭도 모르는 체 이처럼 재판정에 끌려나온 나봇은 필시 어리둥절하였을 것이다. 13절 주석 참조.
21:10 불량자. 이에 해당하는 원어 ‘베네벨리야알’은 문자적으로는 ‘무가치함의 아들들’이란 뜻이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타인에게 쓸모없는 존재가 아니라 보다 적극적으로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존재들을 가리킨다.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삿 19:22 주석과 삼상1 0:27 주석을 참조하라.
두 사람을. 사람을 사형에 처하려면 두세 사람의 증언을 요구하는 것이 율법의 규정이다(신 17:6). 이 규정을 최소한도로 만족시키기 위해 이세벨은 두 명의 비류를 포섭하도록 지시한 것이다.
하나님과 왕을 저주하였다 하게 하고. 모세의 율법은 하나님을 모독하거나 저주함은 물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세움을 입은 지도자들도 저주하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다(출 20:7, 22:28). 우리는 이러한 규례를 어긴 탓에 한 이스라엘 여인의 아들이 사형에 처해진 사례를 발견할 수 있다(레 24:10-16). 이와 관련 성경은 ‘누구든지 자기 하나님을 저주하면 죄를 당할 것’이라고 거듭 경고하였다(레 24:15). 그런데 이세벨은 바로 이 규정을 이용하여 나봇을 사형에 처하도록 지령을 내리고 있다.
돌로 쳐죽이라. 율법상 돌로 쳐죽이는 형벌은 우상 숭배자(신 13:10), 신접하거나 박수가 된 자(레 20:2, 27), 여호와의 이름을 모독하며 저주한 자(레 24:14), 간음한 여인(신 22:21) 등에게 가해졌다. 이러한 형 집행 절차는, 먼저 사형수의 옷을 벗기고 손을 묶고 밖으로 끌고 나가 처형대 위에 올려 두면, 한 증인이 그를 밀어 뜨리고 이어 두 번째 증인이 큰 돌로 먼저 쳤다. 그 후 둘러 선 무리가 함께 돌을 들어 쳤는데 이때 죽은 자를 위한 애곡이 금지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공개적, 공동적 돌 처형법은 무엇보다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경각심과 연대(連帶) 의식을 심어 주는 목적이 있었다. 신 13:10, 11 주석 참조.
두 사람을. 사람을 사형에 처하려면 두세 사람의 증언을 요구하는 것이 율법의 규정이다(신 17:6). 이 규정을 최소한도로 만족시키기 위해 이세벨은 두 명의 비류를 포섭하도록 지시한 것이다.
하나님과 왕을 저주하였다 하게 하고. 모세의 율법은 하나님을 모독하거나 저주함은 물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세움을 입은 지도자들도 저주하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다(출 20:7, 22:28). 우리는 이러한 규례를 어긴 탓에 한 이스라엘 여인의 아들이 사형에 처해진 사례를 발견할 수 있다(레 24:10-16). 이와 관련 성경은 ‘누구든지 자기 하나님을 저주하면 죄를 당할 것’이라고 거듭 경고하였다(레 24:15). 그런데 이세벨은 바로 이 규정을 이용하여 나봇을 사형에 처하도록 지령을 내리고 있다.
돌로 쳐죽이라. 율법상 돌로 쳐죽이는 형벌은 우상 숭배자(신 13:10), 신접하거나 박수가 된 자(레 20:2, 27), 여호와의 이름을 모독하며 저주한 자(레 24:14), 간음한 여인(신 22:21) 등에게 가해졌다. 이러한 형 집행 절차는, 먼저 사형수의 옷을 벗기고 손을 묶고 밖으로 끌고 나가 처형대 위에 올려 두면, 한 증인이 그를 밀어 뜨리고 이어 두 번째 증인이 큰 돌로 먼저 쳤다. 그 후 둘러 선 무리가 함께 돌을 들어 쳤는데 이때 죽은 자를 위한 애곡이 금지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공개적, 공동적 돌 처형법은 무엇보다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경각심과 연대(連帶) 의식을 심어 주는 목적이 있었다. 신 13:10, 11 주석 참조.
21:11 장로와 귀족들이 … 쓴 대로 하여. 이스라엘의 장로와 귀인들이란 무엇보다도 백성들의 권익 수호와 율법 준수를 위해 모범적으로 행동해야 할 위치에 있는 계층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이세벨이 율법을 악용하는 범죄에 별 저항없이 동조하였다. 이는 곧 법관이 법을 악용(惡用)하는 것과 같은 형국이며 아합 시대 수뇌부들의 타락을 단적으로 입증해 주는 사례이다.
이세벨의 지시. 본 절은 장로와 귀족들이 받은 밀서가 비록 아합의 명의와 낙인으로 되어 있지만(8절), 그 모의 주체는 이세벨임을 밝히고 있다. 아마도 이런 사실은 편지를 받은 장로와 귀인들도 짐작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세벨의 잔혹성을 익히 알고 있었으므로 그 명령을 거역할 생각은 추호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면 이 장로와 귀족들은 왕비 이세벨에 영합하여 기왕에 누리던 사회적 지위와 이익을 보존하려던 자들일지도 모른다. 즉 이런 부류들은 세태의 흐름에 영합하여 이세벨에 협조하면서 이스라엘에 변화(사실은 변질이라 해야 할)를 가져오는 진보주의자를 자처했을 것이다.
이세벨의 지시. 본 절은 장로와 귀족들이 받은 밀서가 비록 아합의 명의와 낙인으로 되어 있지만(8절), 그 모의 주체는 이세벨임을 밝히고 있다. 아마도 이런 사실은 편지를 받은 장로와 귀인들도 짐작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세벨의 잔혹성을 익히 알고 있었으므로 그 명령을 거역할 생각은 추호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면 이 장로와 귀족들은 왕비 이세벨에 영합하여 기왕에 누리던 사회적 지위와 이익을 보존하려던 자들일지도 모른다. 즉 이런 부류들은 세태의 흐름에 영합하여 이세벨에 협조하면서 이스라엘에 변화(사실은 변질이라 해야 할)를 가져오는 진보주의자를 자처했을 것이다.
21:12 시대를 막론하고 금식은 개인적로나 사회적으로 가치있는 신앙 훈련으로 인식되어 오고 있다. 그러나 도덕성, 윤리성이 결여된 종교적 의무로서의 제반 의식은 본래의 취지와 순수성이 왜곡당하기 쉽다. 즉 알맹이가 빠진 형식이란 불의와 거짓을 가려주는 잘못된 도구로 전락되기 십상이다. 그러기에 금식의 오용(誤用) 역시 자주 예언자들의 비난을 받아야 했던 주제 중 하나이다(사 58:4-6). 본 절 역시 금식의 순수성을 해쳤던 역사적 사건 중 일례(一例)이다. 9절 주석 참조.
21:13 본 절에 나오는 재판은 무엇인가 졸속 재판의 냄새가 난다. 정상적인 재판 절차에서는 피고의 유죄 사실을 입증하는 증인뿐만 아니라 피고의 혐의를 벗겨 줄 증인도 동석하는 게 보통이다(시 109:31, 잠 14:25). 그러므로 나봇에게 공정한 기회가 주어졌다면 불량배들의 무고에 대해 자신을 변호해 줄 증인을 확보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통상 있게 마련인 원고(고발자)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도 수상하다. 따라서 나봇은 영문도 모르고 끌려나와 순전히 형식적인 재판 끝에 희생된 것이다. 참고로 당시 이스라엘의 재판 절차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일반적으로 소송 사건은 고발자(원고)로 등장한 어느 개인에 의해 시작되었으며(신 25:7), 고발은 대부분의 경우 구두로 하였으나 특별한 경우에는 문서로도 가능하였다(사 65:6, 단 7:10). 그리고 법정에는 재판관과 원고 외에도 피고와 증인들이 동석하였다. 한편 재판이 진행되면, 원고와 피고는 각각 사실 증명을 위한 증거품들을 제시했으며(출 22:13, 신 22:13-17), 재판관은 그것들을 자세히 조사하고 기타 고발 사항 및 변호 사항들을 모두 심리(審理)한 후 최종적으로 증인들을 세웠다. 이때 형(刑)의 확정, 선고를 위해서는 최소한 2명의 증인이 요구되었으며, 거짓 증인으로 판명된 자는 도리어 피고에게 뒤집어 씌우려고 했던 만큼의 형벌을 대신 받아야 했다(신 19:15-21).
21:14 이세벨에게 통보하기를. 이미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비록 아합의 명의로 편지는 왔지만 나봇 살해 음모는 이세벨이 주도했다는 사실을 장로와 귀족들은 알고 있었다. 11절 주석 참조. 그래서 그 결과는 이세벨에게 통보된 것이다.
나봇이 … 죽었나이다. 왕하 9:26에는 본 사건과 관련 ‘나봇의 피와 그 아들들의 피’가 언급되고 있다. 이로 미루어 보면 나봇의 처형 당시 아들들도 함께 몰살당했음이 분명하다. 사실 이때 나봇만 죽였다면 그 아들들이 조상의 유업에 대한 권리를 주장했을 것이다(민 16:27, 수 7:24, 25).
나봇이 … 죽었나이다. 왕하 9:26에는 본 사건과 관련 ‘나봇의 피와 그 아들들의 피’가 언급되고 있다. 이로 미루어 보면 나봇의 처형 당시 아들들도 함께 몰살당했음이 분명하다. 사실 이때 나봇만 죽였다면 그 아들들이 조상의 유업에 대한 권리를 주장했을 것이다(민 16:27, 수 7:24, 25).
21:15 그 이스르엘 사람 … 포도원을 차지하소서. 혹자는 이 말에서 이세벨의 득의 만만하고 표독(慓毒)한 감정을 읽어낸다(Hammond). ‘차지하소서’는 ‘이어받다, 상속하다’는 뜻의 원어 ‘야라쉬’에서 온 말이다. 당시 우상 숭배자의 성읍이나 뒤로부터의 탈취들은 모두 여호와께 바쳐졌듯이(신 13:16) 피정복자나 범죄자의 소유는 모두 왕의 재산으로 귀속되었다(Lange, Keil & Delitzsch). 그러므로 아합은 이제 외견상 합법적으로 나봇의 포도원을 가지게 된 것이다.
21:16 곧 일어나. 70인역(LXX)은 이 같은 행동에 앞서 아합이 옷을 찢고 베를 두르는 동작을 한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만일 그게 사실이라면 이세벨은 아합이 나봇의 포도원을 합법적으로 탈취할 수 있도록 보다 교묘히 일을 꾸몄을 것이다. 즉 나봇의 죽음은 외견상 일국의 통치자에게 안타까움을 주는 한 백성의 비극으로 꾸며질 필요가 있었다. 이에 따라 이세벨은 아합이 공식석상에서는 그 같은 제스처를 취하는게 유리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러나 거짓은 항상 이율 배반적인 양면성을 노출하게 마련이다. 즉 옷을 찢으면서 애통해 하는 척하던 인물이 서둘러 나봇의 포도원을 취하려 일어서는 행위는 아무래도 조화되지 않는다. 여하튼 이제 아합은 원하던 것을 갖게 된 어린 아이처럼 일어나 이스르엘로 내려갔다.
21:17 여호와의 말씀이 … 임하여 비록 이세벨과 아합이 감쪽같은 완전 범죄를 자신했을지라도 실상 모든 사람을 감찰하시며 감추인 것을 드러내시는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다(욥 34:21, 시 102:19, 잠 15:3, 사 18:4, 렘 11:20).
21:18 사마리아에 있는 … 아합. 이 말은 독자들에게 좀 혼란스러움을 안겨 준다. 왜냐하면 아합은 현재 나봇의 포도원을 차지러 이스르엘로 내려갔다고 해놓고(16절) 다시 ‘사마리아에 거하고’ 있다는 말을 하기 때문이다. 사실 한 인간이 한 장소에 머물러 있으면서 동시에 다른 장소에 있을 수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혹자는 이 말을 그저 ‘사마리아에 보좌가 있는 … 아합’ 식으로 이해하자고 제안한다(Hammond). 그러나 본 절과 관련하여 우리는 우선 현재 엘리야가 있는 장소가 사마리아 아닌 다른 곳임을 기억하자. 또한 사마리아와 이스르엘은 불과 30여 km 밖에 떨어지지 않은 거리임을 기억하자. 18:45 주석 참조. 이렇게 볼 때 먼 데 떨어진 엘리야에게 ‘사마리아에 있는 아합에게 가봐라. 그가 지금 나봇의 포도원에 가 있다’는 말은 모순이 아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사마리아에 있는’이라는 말이 삽입되므로써 19절의 예언의 정확성이 보다 쉽게 이해될 수 있다는 점이다. 즉 19절은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은 곳’(즉 이스르엘)에서 아합의 피도 핥게 되리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22:38에 의하면 개들이 아합의 피를 핥은 곳은 ‘사마리아 못’이다. 이러한 차이는 외견상 모순으로 보인다. 그러나 본 절의 기록으로 보면, 아합의 왕궁이 위치한 곳과 나봇의 포도원이 위치한 곳을 통틀어 ‘사마리아’라 불러도 무방한 형편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19절의 예언의 신빙성은 손상되지 않는 것이다.
21:19 네가 죽이고 또 빼앗았느냐. 이 말 속에는 ‘네가 이럴 수가 있느냐!’ 하는 비분(悲憤)과 탄식의 어감이 어려 있다. 즉 이는 아합의 범죄에 통탄하시는 하나님의 심정을 알게 해주는 표현이다. 참고로 나봇 살해 사건 외에도 아합이 저지른 죄상들을 나열해보면 우상 숭배(16:32), 음란한 이방 여인과의 혼인(16:31), 여호와 선지자들 핍박(19:1-3), 하나님이 죽이기로 작정한 벤하닷을 놓아줌(20:42) 등을 들 수 있다. 응당 여호와 신앙의 수호자였어야 할 이스라엘 왕 아합이 도리어 이같이 참람한 죄악들만을 저질렀으니 하나님의 진노가 더욱 더 컸음은 지극히 당연하다(20-26절).
21:20 내 대적자여. ‘대적자’란 ‘적의가 있다’는 뜻인 ‘아야브’에서 온 말이다. 즉 이는 서로 중오와 적의를 품는 관계에 사용되는 말이다. 이러한 단어를 아합이 구사하고 있는 데서 그가 평소에 얼마나 엘리야를 눈의 가시처럼 여겼는지 읽을 수 있다. 아마도 아합의 눈에 엘리야는 사사건건 자신의 일을 반대하는 것을 업(業)을 삼는 최악의 인물로 비쳤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적대적 태도가 갈멜 산 사건 이후로도 계속되었다는 것은 놀랄 만하다(18:17). 그러나 끝까지 회개하기를 거절하는 자는 하나님을 대적으로 삼은 셈이니 그러한 태도가 하나님의 사람에게로 향하여 표출되기 마련이다.
네가 나를 찾았느냐. 개역한글 성경의 본 번역은 엘리야가 마치 점잖게 아합에게 알현을 요청한 듯이 보이게 한다. 그러나 ‘찾았느냐’에 해당하는 원어 ‘마차’는 ‘발견하다’는 뜻이다. 즉 이는 갑자기 나타난 대적에게 들켰다는 어감(語感)이 서린 말이다. 그러므로 아합의 이 말은 ‘아이구 이 원수가 또 나타났구나’ 또는 ‘하필 이 작자에게 걸려 내가 하려고 하는 일이 괴롭게 되었구나’라는 의미를 지닌 것이다.
네가 네 자신을 팔아. ‘자신을 팔아’(히, 히트마케르카)란 ‘스스로 자신을 … 의 노예 상태가 되게 하다’는 뜻이다. 즉 아합은 죄를 범하는 일에 완전히 몰두하여 자신을 돌아볼 여유조차 없을 정도였던 것이다. 사실 아합은 나봇의 포도원을 탈취하면서 앞뒤 돌아보지 않고 살인까지 저지를 정도로 탐욕의 노예가 되었다. 물론 그 일은 이세벨의 충동질과 계교를 통해 저질러졌으나 아합의 욕심 때문에 추진된 일임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므로 아합은 탐욕에 이끌려 자신을 죄의 노예가 되게 하였고 그 결과 살인과 탈취를 거리낌없이 저질렀다고 말할 수 있다(롬 7:14).
네가 나를 찾았느냐. 개역한글 성경의 본 번역은 엘리야가 마치 점잖게 아합에게 알현을 요청한 듯이 보이게 한다. 그러나 ‘찾았느냐’에 해당하는 원어 ‘마차’는 ‘발견하다’는 뜻이다. 즉 이는 갑자기 나타난 대적에게 들켰다는 어감(語感)이 서린 말이다. 그러므로 아합의 이 말은 ‘아이구 이 원수가 또 나타났구나’ 또는 ‘하필 이 작자에게 걸려 내가 하려고 하는 일이 괴롭게 되었구나’라는 의미를 지닌 것이다.
네가 네 자신을 팔아. ‘자신을 팔아’(히, 히트마케르카)란 ‘스스로 자신을 … 의 노예 상태가 되게 하다’는 뜻이다. 즉 아합은 죄를 범하는 일에 완전히 몰두하여 자신을 돌아볼 여유조차 없을 정도였던 것이다. 사실 아합은 나봇의 포도원을 탈취하면서 앞뒤 돌아보지 않고 살인까지 저지를 정도로 탐욕의 노예가 되었다. 물론 그 일은 이세벨의 충동질과 계교를 통해 저질러졌으나 아합의 욕심 때문에 추진된 일임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므로 아합은 탐욕에 이끌려 자신을 죄의 노예가 되게 하였고 그 결과 살인과 탈취를 거리낌없이 저질렀다고 말할 수 있다(롬 7:14).
21:22 네 집이 … 되게 하리니. 여로보암과 바아사는 각각 자신의 왕조를 열었으나 불과 2대째에 가서 부하의 모반으로 멸문(滅門)을 당한 인물들이다(15:25-31, 16:8-14). 그런데 이들이 동일한 운명을 가져야 했던 이유는 한 국가와 지도자로서 백성들을 우상 숭배에로 이끄는 동일한 잘못을 범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에 본격적으로 이방의 우상을 도입한 아합이(16:31-33) 같은 심판을 당하게 되었다는 것은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다. 한편 훗날 실제로 아합의 아들 여호람(혹은 요람)은 부하 예후의 모반으로 인해 죽음을 맞게 되고, 아합의 가문은 모두 무참한 참살(慘殺)을 당한다(왕하 99:21-26, 10:1-17, 대하 22:8).
나를 노하게 하고. ‘노하게 하다’에 해당하는 원어 ‘카아스’는 점차로 격분에 이르도록 자극한다는 뜻이 있다. 즉 참으려고 애씀에도 불구하고 거듭 자극을 가함으로써 마침내 분노케 하는 행위를 말한다. 사실 인간들의 계속적인 우상 숭배는 하나님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마침내 절정의 분노를 발하게 하는 죄이다(출 20:3-6). 그러나 실상 이러한 분노는 당신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역설적 표현과 같다. 출 20:5 주석 참조.
나를 노하게 하고. ‘노하게 하다’에 해당하는 원어 ‘카아스’는 점차로 격분에 이르도록 자극한다는 뜻이 있다. 즉 참으려고 애씀에도 불구하고 거듭 자극을 가함으로써 마침내 분노케 하는 행위를 말한다. 사실 인간들의 계속적인 우상 숭배는 하나님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마침내 절정의 분노를 발하게 하는 죄이다(출 20:3-6). 그러나 실상 이러한 분노는 당신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역설적 표현과 같다. 출 20:5 주석 참조.
21:23 개들이 … 먹을지라. 임종을 평안히 맞이하여 조상들의 무덤에 같이 묻힌다는 것은 이스라엘인들이 생각하는 행복한 죽음의 방식이다. 반면 객사(客死)를 당해 시체가 짐승의 먹이가 된다는 것은 저주받은 죽음이었다. 14:11 주석 참조. 그런데 이세벨에게 예고된 죽음의 방식은 이보다 처참하다. 즉 생전에 부귀, 영화와 권세를 누리던 이세벨에게 이스르엘 성읍 곁에서 개들의 먹이가 되는 죽음이 예고된 것이다. 그것은 곧 이세벨의 전 삶을 송두리째 저주 아래 둔다는 부정적 상징성이 강하게 암시된 죽음이다. 그리하여 그 죽음을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죽은 자의 생전의 삶의 방식과 모든 행적이 저주받아 마땅한 그릇된 것임을 생각케 할 것이다. 사실 이세벨은 아합을 충동질하여 온갖 죄악 가운데 놀아나게 한 장본인이었으니 그 삶이 욕된 것이었다고 밖에 달리 평가할 수 없다(25절). 한편 이세벨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는 훗날 정확하게 성취되었다(왕하 9:30-37).
21:24 개들이 먹고 … 새가 먹으리라. 아합 가문에 속한 자들이 당할 치욕스러운 죽음과 하나님의 강렬한 노여움을 강조해 주는 일종의 관용적 표현이다.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14:11 주석을 참조하라.
21:25 본 절은 죄의 역학 관계를 보여주는 절이다. 즉 여기서 우리는 먼저 인간을 그 아래 노예처럼 두려 하는 죄의 권세를 보게 된다. 그러나 인간이 죄의 노예가 되는 것은 욕심에 이끌려 스스로 죄에 자신을 내어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신의 죄에 대한 책임은 스스로에게 있음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약 1:13-15). 다음으로 우리는 여기서 죄에 대한 판별 기준이 하나님 보시기에 어떠한가에 달려 있음을 확인케 된다. 사실 죄에 대해 주관적이고 자의적(自意的)인 정당화를 시도하는 것이 죄짓는 자의 일반적 성향이다.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 어떠한가라는 절대적인 기준에 입각할 때 죄인은 자신의 죄를 자각할 수 밖에 없다. 또한 여기서 우리는 죄를 짓도록 권유하는 자기 외부의 객관적 조건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사실 아합의 생애가 하나님을 거스리는 것을 일관되게 한 주요 원인은 악독한 이사벧을 아내로 맞아들인 것(16:31)이라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이 죄의 주관적, 객관적 조건들은 서로 맞물려 그 열매를 만들어 낸다. 그러므로 이러한 제반 요소들을 함께 경계해 나가는 것이 죄의 예방에 효과적인 도움이 될 것이다.
그의 아내 이세벨에게 충동하였음이라. ‘충동하다’에 해당하는 원어 ‘수트’는 ‘꾀다, 유혹하다’는 뜻이다. 즉 이는 어떤 사람으로 하여금 잘못된 행위를 하도록 부추기고 선동하는 교활한 행위를 가리킨다. 사실 아합의 처지를 이보다 더 정확히 요약할 말은 없을 것이다. 그는 음란한 계집의 호림에 넘어간, 그리고 권력욕에 사로잡힌 여인의 간교한 치맛자락에 놀아난 전형적 인물이었다. 물론 아합도 우매한 결점을 소유하고는 있었지만, 이세벨을 아내로 맞이하지만 않았더라면 그렇듯 비참한 말로로 치닫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의 아내 이세벨에게 충동하였음이라. ‘충동하다’에 해당하는 원어 ‘수트’는 ‘꾀다, 유혹하다’는 뜻이다. 즉 이는 어떤 사람으로 하여금 잘못된 행위를 하도록 부추기고 선동하는 교활한 행위를 가리킨다. 사실 아합의 처지를 이보다 더 정확히 요약할 말은 없을 것이다. 그는 음란한 계집의 호림에 넘어간, 그리고 권력욕에 사로잡힌 여인의 간교한 치맛자락에 놀아난 전형적 인물이었다. 물론 아합도 우매한 결점을 소유하고는 있었지만, 이세벨을 아내로 맞이하지만 않았더라면 그렇듯 비참한 말로로 치닫지는 않았을 것이다.
21:26 아모리 사람의 모든 행함 같이. ‘아모리 사람’은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 이주하기 전의 거민을 가리킨다(창 10:16, 출 3:8, 대상 1:14, 겔 16:3). 그런데 ‘아모리 사람’이라는 종족적 호칭만 갖고는 팔레스타인 역사에서 명멸(明滅)한 여러 족속, 국가들과의 관계를 밝혀내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신앙과 관련하여 ‘아모리 사람’이 던져 주는 의미는 분명하다. 즉 그들은 우상을 섬겼고 음란하고 부정한 행위를 벌이는 사람들이었다(수 24:15, 삿 6:10, 레 18:28, 20:22, 23).그리고 그들이 팔레스타인을 이스라엘에 내줘야 했던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는 것이 성경의 설명이다(창 15:16). 그렇다면 ‘아모리 사람’의 땅을 인수한 이스라엘은 적어도 그들과는 다른 삶을 살아야 할 책임이 있었다.
21:27 엘리야로부터 하나님의 심판을 선고받은 아합(17-26절)은 지금까지와는 달리 완악함을 버리고 하나님 앞에서 회개의 자세를 취한다. 본 절과 29절을 통해 판단하건대 아합의 회개는 비록 일시적인 것이기는 하나 그 순간에 있어서 만큼은 결코 가식적이거나 표면적이지는 않았던 것 같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하나님께서 그에게 선포하신 재앙을 아합 당대에서 그의 아들 대에로 연기하시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아합이 이처럼 회개하고 나서도 다시 악을 행했다는 데 있다(22:8, 26, 27). 즉 아합은 일시적으로는 회개하였으나 지속적으로 회개의 참된 열매를 맺지는 못하였다. 따라서 그의 회개는 다윗의 회개(시 51편)와는 본질적으로 달랐다.
옷을 찢고 … 굵은 베에 누우며. 본 절에 열거된 행위는 모두 회개와 겸손 또는 극한 슬픔을 표시하는 행위들이다(스 9:3, 에 4:1). 29절은 이 모든 행위의 성격을 ‘겸비함’으로 요약하고 있다. 즉 겉옷을 찢는 행위는 자신의 능력과 신분을 상징하는 겉옷의 훼손을 통해 자신을 아무것도 아닌 자로 낮추는 행위이다. 그리고 ‘베’(히, 사크)로 만든 옷은 종종 슬픔과 자기 비하(卑下)의 표시였는데 이것은 시신(屍身)을 베로 감싸는 관습과 연관이 있는 듯하다(창 37:34, 사 37:1, 막 15:46, 눅 23:53). 그 뿐 아니라 금식 역시 생명 현상을 지속케 하는 음식을 끊음으로써 자신을 하잘 것 없는 존재로 여기는 자기 부인(否認)의 행위이다.
옷을 찢고 … 굵은 베에 누우며. 본 절에 열거된 행위는 모두 회개와 겸손 또는 극한 슬픔을 표시하는 행위들이다(스 9:3, 에 4:1). 29절은 이 모든 행위의 성격을 ‘겸비함’으로 요약하고 있다. 즉 겉옷을 찢는 행위는 자신의 능력과 신분을 상징하는 겉옷의 훼손을 통해 자신을 아무것도 아닌 자로 낮추는 행위이다. 그리고 ‘베’(히, 사크)로 만든 옷은 종종 슬픔과 자기 비하(卑下)의 표시였는데 이것은 시신(屍身)을 베로 감싸는 관습과 연관이 있는 듯하다(창 37:34, 사 37:1, 막 15:46, 눅 23:53). 그 뿐 아니라 금식 역시 생명 현상을 지속케 하는 음식을 끊음으로써 자신을 하잘 것 없는 존재로 여기는 자기 부인(否認)의 행위이다.
21:29 겸비함. 이에 해당하는 원어 ‘카나’는 ‘꺾이다, 복종하게 되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단어의 본래 의미는 ‘새가 날개를 접다’이다. 여기서 새가 날개를 접는다는 것은 곧 자신의 최대 강점을 포기하는 모습이다. 대개 동물의 세계에서는 자신의 강한 면모를 스스로 포기함으로써 상대방에 대한 전의(戰義) 상실과 굴복을 표시하곤 한다. 그러므로 아합이 겸비한 자세를 취했다는 것은 곧 하나님께 대적하기를 멈추고 항복을 표하였음을 뜻한다.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모습이긴 해도 아합의 이러한 태도는 다시 이스라엘의 타락에 끼친 이세벨의 영향에 눈을 돌리게끔 한다. 즉 비록 우매(愚昧)한 자로 묘사되긴 해도 이세벨과의 결혼만 아니었다면 아합도 그토록 배도(背道)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아들의 시대에야 … 내리리라. 여기서 그 아들이란 아합의 아들이자 아하시야의 형제인 여호람(또는 요람)을 가리킨다. 22절 주석 참조. 한편 이기주의적, 논리적 사고에 익숙한 현대인에게 본 절은 당혹감을 안겨 준다. 즉 왜 징벌이 애꿎은 아들에게 내려야 하는가 이다. 이 문제를 다루기란 쉽지 않다. 죄, 기질, 성향의 유전, 교육적 환경, 즉 가치 및 태도의 후천적 습득 등 여러 가지 합리적 설명들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인간의 연대성(連帶性), 즉 서로의 운명에 깊숙이 개입할 수 밖에 없는 인간 존재에 대한 통찰과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의 주권과 뜻에 돌리는 신앙적 사고 방식에 입각해 본 절을 대한다면 문제의 실마리를 풀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출 20:5, 6 주석을 참조하라.
그 아들의 시대에야 … 내리리라. 여기서 그 아들이란 아합의 아들이자 아하시야의 형제인 여호람(또는 요람)을 가리킨다. 22절 주석 참조. 한편 이기주의적, 논리적 사고에 익숙한 현대인에게 본 절은 당혹감을 안겨 준다. 즉 왜 징벌이 애꿎은 아들에게 내려야 하는가 이다. 이 문제를 다루기란 쉽지 않다. 죄, 기질, 성향의 유전, 교육적 환경, 즉 가치 및 태도의 후천적 습득 등 여러 가지 합리적 설명들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인간의 연대성(連帶性), 즉 서로의 운명에 깊숙이 개입할 수 밖에 없는 인간 존재에 대한 통찰과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의 주권과 뜻에 돌리는 신앙적 사고 방식에 입각해 본 절을 대한다면 문제의 실마리를 풀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출 20:5, 6 주석을 참조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