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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 아람의 벤하닷 왕. 본 절의 벤하닷은 일찍이 이스라엘 왕 바아사(Baasha)와 동맹을 맺은 바 있던 벤하닷 1세(B.C. 900-860)의 아들이다. 그런데 벤하닷 1세는 지중해 무역로 확보를 위해 오므리(아합의 아버지)와도 전쟁을 벌여 이스라엘 국경의 여러 성읍을 탈취해 갔다. 그러나 본 장에서 벤하닷 2세(B.C. 860-841)가 아합을 위협하는 까닭은 이스라엘 침략에 목적이 있기보다는 실제로 앗수르와의 전투에 이스라엘을 끌어내어 연합군이 되게 하려는 의도에서였던 것으로 추축된다(Bowman). 이 무렵 앗수르의 살만에셀 3세(B.C. 859-824)는 서서히 벤하닷의 아람(시리아)을 위협해 오고 있었다.

왕 삼십이 명. 당시 아람(Aram)은 여러 개의 소규모 지역 국가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 중 다메섹 왕 벤하닷이 주도권을 잡자 타지역의 왕들에 대한 군주-봉신 관계가 형성되었다. 본 절의 32명의 왕들은 바로 벤하닷에게 조공과 병역을 바치는 아람의 소왕들이다.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삼하 10:6 주석을 참조하라.

 

20:2 벤하닷이 그에게 이르되. 원문은 ‘벤하닷은 말하다!’(히, 아마르 벤하닷)와 같이 대단히 거만한 말투이다. 즉 여기서 ‘아마르’는 ‘명령하다’는 의미로 사용된 것이다(수 11:9, 대하 29:24, 에 9:25). 이는 곧 왕이 신하에게나 하는 말투이다. 따라서 한 나라의 군주가 다른 나라의 군주에게 이와 같이 말을 했다는 것은 충동과 도발의 의도를 지닌 것이다.

 

20:3 네 은금은 내 것이요 … 내 것이니라. 이와 같은 벤하닷의 자극적인 언사(言辭)는 아합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었다. 심지어 아합의 아내들까지 자신의 소유로 주장하는 데서 이스라엘의 왕권을 자신의 발 아래로 완전 복속시키려는 벤하닷의 탐욕이 노골적으로 드러난다(삼하 16:21, 22, 왕상 2:22). 이제 이를 좀더 세분화하면 다음과 같다. (1) 은금의 요구는 실질적인 국력의 약화로 인해 이스라엘이 벤하닷에게 완전히 굴복하게 하려는 조치이다. (2) 처(妻)의 요구는 이스라엘 왕권의 독자성과 존엄성 상실을 겨냥한 처사이다. 2:17 주석참조. (3) 자녀들의 요구는 일종의 인질, 볼모를 요구한 것이다. 한 마디로 이상과 같은 벤하닷의 요구는 이스라엘을 자신의 완전한 식민지로 전락시키겠다는 의도였다.

 

20:4 내 주 왕이여. 이 호칭은 일반적으로 신하가 왕을 부를 때 사용하는 것이다(삼상 24:8, 26:17). 아합은 벤하닷의 막강한 위세에 눌려서 그에게 신하의 예(禮)를 표하였다.

나와 내 것은 다 왕의 것이니이다. 이 말은 아합이 눈앞의 위기국면을 넘기기 위하여 전술적으로 항복한 것일 뿐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이 점은 벤하닷이 자기의 요구를 실제로 관철하려 들자 아합이 분노하는 데서도 알 수 있다(7절).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아합은 대단히 유약한 인상을 주고 있다. 그는 당시 아람의 막강한 위세에 겁을 먹고 어떻게 해서든 화친하려고 생각했던 것 같다.

 

20:5 이미 … 내게 넘기라 하였거니와. ‘넘기다’에 해당하는 원어 ‘나탄’은 요구하는 것을 ‘내주다’는 뜻이다. 따라서 2, 3절의 벤하닷의 언동은 단순한 위협이 아니라 단호한 실제적 요구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요구에 대해 아합은 단호한 거절도 실제적인 수락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로 답변을 했다.

 

20:6 수색하여. 이에 해당하는 원어 ‘하파스’는 ‘찾다’는 뜻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이는 약탈물을 뒤져 찾아낸다든지 도망자롤 찾아내려는 등의 움직임을 가리킨다(창 44:12, 삼상 23:23, 왕하 10:23).

네 눈이 기뻐하는 것. 여기서 ‘네 눈이’는 특별한 관심이 집중되어 있는 방향을 말한다. 그리고 ‘기뻐하는’(히, 마흐마드)은 사랑스러운 아내에 대하여 기뻐하듯 확실히 기뻐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네 눈이 기뻐하는 것’이란 아합이 특별히 귀중히 여기어 아끼는 모든 것을 말한다. 즉 여기에는 물건 뿐만 아니라 사람들도 포함된다.

 

20:7 장로. ‘장로’(히, 자켄)들이란 원래 지역 공동체를 유지하는 권위자요 대표자들로서 왕정 시대에는 왕의 신하와 같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정부가 임명하는 관원과는 달리 지역 자체에서 이미 존재가 뚜렷한 사람들로서 단지 왕정 체제 질서내에 편입되어 있을 뿐이다. 이들은 일반 행정 뿐 아니라 전쟁시에도 현명한 충고와 조언을 하는 역할을 하였다(Davies). 그런데 이들의 동의와 지지가 왕에게 중요했던 것은 왕정의 근간을 이루는 노동력과 군사력을 바로 이 지역민들로부터 얻어내어야 했기 때문이다. 즉 아합이 설령 일전(一戰)을 불사할 결심을 해도 장로들의 동의가 없이는 전투력에 차질을 빚는 것이다.

이 사람이 … 알라. ‘이 사람’에 해당하는 원어 ‘제’는 경멸과 조소가 담긴 말이다. 즉 이 말은 ‘이 자’ 혹은 ‘이 작자’ 정도의 어감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본 절은 ‘이 자가 추구하는 악을 보라’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때 ‘보다’(히, 라아)는 말은 단순한 응시가 아닌 ‘주목하여 살피다’는 뜻이다. 여기서 우리는 아합이 장로들의 의분을 자아내어 자신의 전의(戰意)에 호응토록 유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 보냈으나 내가 거절하지 못하였노라. 혹자는 군주가 신하들 앞에서 이렇게 부끄러운 고백을 했겠는가 의심한다(Hammond). 그러나 이 말의 의도가 장로들로 하여금 분노케 하여 전의를 다지려는 것임에 주목하여야 한다. 즉 본 절은 ‘너희들의 왕이 힘이 없어 그토록 수모를 당해야 했다’는 이면(裏面)의 의미를 담고 있다.

 

20:8 모든 장로와 백성들이. 이 말은 장로와 백성의 대표들로 이루어진 협의체와 같은 기구를 가리킨다. 즉 이는 국가의 중대사를 협의하기 위하여 모인 일종의 범국민적 비상시국 대책 위원회를 가리킨다. 그러나 엄밀히 따져 이는 ‘성회’(聖會)로도 번역될 수 있는 이스라엘의 ‘총회’(總會)와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이에 관해서는 민 16:2 주석을 참조하라.

왕은 듣지도 말고 허락하지도 마옵소서. 장로들과 백성들의 한결같은 의견을 집약하고 있는 본 구절 속에는 아합 왕의 소아적(小我的)이고 경솔한 처신에 대한 책망이 내포되어 있다. 사실상 아합의 굴욕적 태도로 인하여 아람 왕 벤하닷의 기세는 한층 거만해졌으며, 선민(選民) 이스라엘의 긍지는 땅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다(4-6절). 따라서 백성들 중 대다수는 가만히 앉아서 아람의 약탈을 지켜보기 보다는 차라리 싸우다 죽는 편을 원하였던 것 같다. 특히 그들 중 여호와를 경외하는 경건한 무리들은 성지 유린을 막기 위해 강경 대응책을 적극 지지하였을 것이다.

 

20:9 내 주 왕께 말하기를. 이미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아합이 벤하닷을 가리켜 ‘내 주 왕’이라 칭하는 것은 여전히 굴욕적인 자세이다. 4절 주석 참조. 그러나 이러한 아합의 처세는 다분히 외교적 실리를 겨냥한 것이라는 점 또한 배제할 수 없다. 즉 아합은 표면적으로는 비록 굴욕적으로 보이더라도 최대한의 양보를 통해 승산없는(적어도 아합이 보기에) 전쟁을 피하려는 계산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완전 복속(服屬)을 겨냥하고 온 벤하닷은 처음부터 속셈이 달랐다. 즉 그는 이스라엘의 외교적 굴복이 아닌 실제 굴복을 목표한 것이다. 3절 주석 참조.

처음에 … 이것은 내가 할 수 없나이다. 이 말에서 벤하닷의 첫 번째 요구와 두 번째 요구가 내용에 있어 차이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벤하닷의 첫 번째 요구는 전쟁에 패한 왕으로서의 배상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3절). 그러나 두 번째 요구는 아합의 궁전은 물론 그의 온 백성들의 집까지도 뒤져 약탈하겠다는 일종의 수도(首都) 점령을 의미하는 것이었다(6절). 그러므로 아합의 대답은 최대한 협상의 폭은 첫 번째 요구까지이며 그 이상의 요구에 대해서는 들어 줄 수 없다는 내용인 셈이다. 그런데 7, 8절을 참고해 보면 장로와 백성들은 벤하닷의 첫 번째 요구에 이미 분노를 느끼고는 단호한 거절의 의지를 표명하였음을 알 수 있다. 반면 아합은 백성들의 의지를 확인한 후에도 지극히 유약하고 타협적인 자세를 견지한다. 이같이 아합의 줏대없고 유약한 모습은 본문에서 이세벨의 강렬한 성격과 함께 이스라엘의 신앙 타락의 한 원인으로 암시되기로 한다. 19:1, 2 주석 참조.

 

20:10 사마리아의 … 족할 것 같으면. 아합 왕의 미온적인 태도로 인해 격노한 벤하닷은 고대 근동 특유의 과장된 표현을 통해 더욱 거센 위협을 가한다. 즉 본 절에 담긴 의미는 두 가지인데 아람군의 무차별 살상과 공략으로 말미암아 사마리아 성은 철저히 잿더미로 변하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또한 아람군의 수효가 매우 많기 때문에 초토화된 사마리아 성의 모든 부스러기들로는 아람군들의 손에 채울 수 없을 것이라는 말이다.

 

20:11 갑옷 입는 자 … 자랑하지 못할 것이라. 여기서 ‘갑옷 입은 자’란 이제 막 싸움의 준비를 하는 자를 가리킨다. 그리고 ‘갑옷 벗는 자’란 전쟁을 끝내고 전투복을 벗는 자를 가리킨다. 따라서 본 절은 아직 싸워 보지도 않고 결과를 장담하지 말라는 뜻이다.

 

20:12 장막. ‘장막’(히, 수코트)은 ‘오두막’이란 뜻이다. 여기서는 고대 근동의 사막에서 왕과 장수들을 위해 설치하는 병영내의 가건물을 가리킨다.

마시다가. 이에 해당하는 원어 ‘쇼테’는 곧 ‘술을 마시다가’란 뜻이다. 이는 우리말에서도 ‘마신다’는 말만 가지고 음주를 완곡하게 묘사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한편 전쟁터에 와서까지도 한가롭게 술을 마시는 벤하닷의 모습은 그가 얼마나 이스라엘군을 깔보았는지 증거해 준다.

진영을 치라. 원문에는 흔히 ‘진영’이라는 말로 번역되는 ‘마하네’나 ‘타하나’ 같은 명사가 나와 있지 않다. 그러나 마치 ‘위치로!’하는 군대식 명령이 곧 군대로 하여금 맡은 바 위치에 포진하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본 절 역시 ‘치다’는 말 속에 이미 그 같은 의미가 층분히 포함되어 있다.

 

20:13 한 선지자가. 이 선지자가 누구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이믈라의 아들 미가야라는 주장도 있으나 22:8에 의해 부인된다. 왜냐하면 본 절의 선지자는 아합에게 기쁜 예언을 전하나 미가야는 한 번도 아합에게 좋은 예언을 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Hammond). 또한 메시지의 성격으로 보아서 이 선지자는 엘리야가 아닌 것도 분명하다. 왜냐하면 아합에 대한 엘리야의 메시지는 대체적으로 경고와 심판의 내용만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18:18, 21:20-26). 따라서 이 선지자는 당시의 무명(無名)의 선지자 생도 중 한 사람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35절 주석 참조.

너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본 장에는 아합이 벤하닷에게 승리를 거두는 이야기가 나온다(16-21, 26-34절). 엘리야의 투쟁과 아합의 범죄를 그려 나가던 본서 기자가 이처럼 본 장에서 갑자기 아합의 승리를 수록한 것에 대해 독자들은 이상하게 생각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본 절은 아합이 심판받아 마땅한 왕임에도 불구하고 대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일에 대한 신학적 답변을 제시해 준다. 즉 하나님은 당신의 크신 권능을 나타내심으로써 오직 당신만이 환난날의 구원자시요(시 9:9) 모든 축복의 근원이 되심을 아합은 물론 온 백성들에게 거듭 거듭 알려주시고자 하신 것이다. 요컨대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당신의 영원하신 언약을 상기시키려는 집요한 노력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8:9, 삿 2:1, 대상 11:3, 대하 23:16 등). 그런데 이상과 같은 사실에도 불구하고 향후(向後)의 태도에서 입증되듯이 아합은 하나님의 은총 앞에 감격하여 회개하기는 커녕 여전히 하나님의 은혜를 한갖 위기 극복을 위한 수단 정도로 간주하였을 뿐이다. 따라서 그러한 아합의 태도는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색욕(色慾)거리로 바꾼 것이나 진배없다(유 1:4). 아합이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것도 실상은 이러한 이유에서이다(22:29-40).

 

20:14 각 지방 고관의 청년들. ‘각 지방 고관’이란 아합의 행정 구역을 관할하는 지방 장관들을 가리킨다. 그런데 비록 본문은 상세한 기록을 삼가하고 있지만 계속 이어지는 기록으로 볼 때(15-20절) 벤하닷의 침공이 개시되자 이들 지방 장관들은 자기 휘하의 군사들을 거느리고 수도 사마리아에 집결, 농성(籠城)을 계획했던 듯하다. 한편 본 절에서 ‘청년’(히, 나아르)은 ‘젊은 청년’을 의미한다. 특히 군사적 맥락에서 사용될 때 이 단어는 대개 ‘병사들’을 가리킨다(수 6:23, 삿 9:54, 삼상 9:2, 25:5, 삼하 2:14). 그러므로 ‘각 지방 고관의 청년들’이란 지방 장관들이 끌고 온 군대를 의미하는 말이다. 이들은 출중한 무용(武勇)으로 인해 특별히 뽑힌 정예병들로 보인다.

누가 싸움을 시작하리이까. ‘시작하리이까’는 ‘공격을 개시하다’는 뜻인 ‘아사르’에서 온 말이다. 그러므로 본 절은 ‘누가 맨 처음 공격을 개시하리이까’라는 뜻이다. 그런데 공동번역은 이를 “진두에는 누가 설 것입니까?”로 옮겼다. 이는 원어에 함축된 뜻이 개역 성경에 비해 더 잘 전달된 번역이라고 할 수 있다.

 

20:15 이스라엘군의 병력을 소개하는 본 절은 그 왜소한 규모를 알림으로써 더욱더 전쟁의 승리가 진정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느끼게 해준다. 즉 최소한 10만 이상의 적과 대치한 이스라엘군은 불과 7,232명인 것이다(29절). 그런데 이처럼 소수의 병력으로 대군을 격파한 전공(戰功)이 오로지 하나님의 능력에 기인한 것이라는 모티프(motif)는 구약에 자주 등장한다(창 14:14-16, 삿 7:16-22).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이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삼상 14:6).

 

20:16 그들이 정오에 나가니 이처럼 이스라엘 1차 선발대는 밝은 대낮에 당당히 기습을 감행하였다. 대개 소수의 병력으로는 야간 기습을 감행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이스라엘군은 그렇게 하지 않고 적군의 의표를 찌른 것이다.

벤하닷은 … 마시고 취한 중이라. 여기서 ‘취하다’(히, 쉬코르)는 말은 판단이 흐려지고 상황에 적절히 대처할 수 없을 만큼 무기력해진 상태를 가리킨다. 따라서 벤하닷은 제정신을 잃을 정도로 술에 취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아람군은 벤하닷과 아람 소국(小國)의 여러 왕들이 연합한 연합군이었다(1절). 따라서 그들은 일사불란한 협동 체계를 갖추기가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벤하닷과 32 왕들이 자기들의 수만 믿고 자만심에 빠져 대낮부터 술을 퍼먹고 있었다. 그러니 그들은 이스라엘군의 공격에 효과적이고 질서 있는 대응이 어려웠을 것이다.

 

20:17 정탐꾼을 보냈더니. 원문에는 ‘정탐꾼’에 해당하는 용어가 따로 보이지 않는다. 단지 ‘벤하닷이 보낸 그들이 말하기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들의 목적이 척후 활동에 있음이 분명하므로 ‘정탐꾼’이라고 호칭한 것이다. 그런데 18절로 미루어 볼 때 정탐꾼들의 보고는 좀 명확하지 못했던 것 같다. 왜냐하면 보고를 받은 벤하닷이, 진출한 이스라엘군의 목적이 무엇인지 정확히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정탐꾼들 역시 맨처음 진출한 ‘각 지방의 고관의 청년들’이 너무나 소수였기 때문에 분명한 판단을 내리지 못했던 것 같다.

 

20:18 본 절 역시 당시 벤하닷의 자만심이 어느 정도였는지 잘 보여 준다. (1) 즉 이스라엘군이 화친하러 나오든 싸우러 나오든 무조건 사로 잡으라는 명령에서 그가 앞서 아합의 답변(11절)에 몹시 분노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Hammond). (2) 다음으로 사로잡으라는 명령에서 우리는 당시 벤하닷이 이스라엘군을 맞붙어 싸울만한 상대로 여기고 있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즉 벤하닷은 설령 이스라엘군이 싸우러 나왔을 경우에도 어른이 어린아이 다루듯 쉽게 그들을 제압하여 사로잡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토록 자만심에 빠져 있는 벤하닷과 같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신다(잠 16:5, 벧전 5:5).

 

20:19 그들을 따르는. 원문은 ‘그들의 뒤에’라는 뜻이다. 여기서 우리는 당시 ‘각 지방 고관의 청년들’과 7,000명의 수도 방위 병력(15절)간의 관계 및 임무를 추측해 볼 수 있다. 즉 본 절에 의거할 때 당시 각 지방 고관의 청년들은 특별한 용맹과 무예로 선봉대의 임무를 맡음과 동시에, 수도 방위 병력의 단위부대를 이끄는 하급 지휘관 역할도 한 것으로 보인다.

 

20:20 각각 적군을 쳐죽이매. 원문은 ‘각자 자기가 맡은 적을 치매’라는 뜻이다. 이로 미루어 보건대 이스라옐 정예병들은 비록 소수이긴 하지만 각기 습격해야 할 요소(要所)들을 정하는 등 철저하고 조직적인 사전 계획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적진을 강타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런데 이러한 승전의 원리는 성도들의 영적 전투에 있어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엡 6:10-20).

 

20:21 크게 이겼더라. 원문은 ‘들이쳐서 큰 학살을 하다’는 뜻이다. 이러한 표현에서 당시 아람군은 대군임에도 불구하고 변변한 대항도 못한 채 죽임 당했음을 알 수 있다.

 

20:22 왕은 가서 … 알고 준비하소서. 아합에게 내린 선지자의 예언처럼 싸움을 준비하고 훈련된 자만이 다가올 영적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다. 오직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무장할 때(엡 6:10-13, 벧전5:9) 연승이 약속될 것이다. 따라서 아합은 선지자의 말에 순종하여 즉각적으로 회개하고 여호와의 능력에 힘입어 싸움을 준비해야만 했다.

해가 바뀌면. 이에 해당하는 원문 ‘테슈바트 하샤나’는 ‘해의 되돌아감’(the return of the year)이란 뜻으로 ‘명년 봄’을 의미한다. 이와 유사한 표현으로는 ‘테쿠파트 하샤나’가 있는데 이는 ‘해의 회전’(the turning of the year)란 뜻으로 ‘명년 가을’을 의미한다. 한편 근동 지방의 겨울은 우기(雨期)에 해당하므로 전쟁을 하기에는 적당치 않았다. 그러므로 당시의 침공은 대개 건기(乾期)인 여름에 이루어졌다. 그러나 얕잡아 보던 상대에게 의외의 패배를 당하는 수치에 절치부심한 벤하닷은 해가 바뀌자 마자 재차 이스라엘을 침공하려고 했을 것이다.

 

20:23 그들의 신은 산의 신이므로. 고대의 다신론적 관념에 따르면 한 신은 보통 한 지역 또는 한 기능을 맡는 신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여호와는 아람인들 눈에 산(山)의 신(神)이었다. 주변 국가들이 이스라엘의 신을 이처럼 산의 신이라 믿은 데는 나름대로 역사적인 이유가 있다. 이스라엘은 아직 왕정 시대가 도래하지 않았던 시절, 가나안 주민들과 끊임없는 갈등과 분쟁을 겪고 있었다. 그 때 철 병거와 마병을 소유한 가나안의 도시 국가들에 대하여 효과적으로 대항하기 위해 이스라엘인들이 잡은 거점은 팔레스타인의 여러 산악 지대이다. 즉 그러한 장소에서는 가나안의 우수한 병기들이 크게 효력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삿 4:1-16). 더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산악지대에서 물을 찾아내고 거기서 거주하는 적응력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모든 점이 곧 주변 부족 및 국가들에게 이스라엘의 신은 산의 신이라는 인상을 강하게 남겨 놓았다.

우리가 만일 평지에서 그들과 싸우면 … 강할지라. 군사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첫 번째 전투에서 패한 아람 왕의 신복들은, 가장 큰 패인(敗因)을 신의 능력에서 찾았다(23절). 또한 그러한 미신적 배경 외에 객관적 전략 면에 있어서도 그들은 평지에서 싸우는 것이 우세하리라는 판단을 내렸을 것이다. 왜냐하면 평지에서는 기습 공격이 쉽게 먹혀들지 않으며 더구나 아람군은 기병들과 전차 병들을 많이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1, 25절).

 

20:24 제하여 … 떠나게 하고. ‘제하여 떠나게 하고’에 해당하는 원어 ‘하세르’는 ‘돌이키다, 떠나다’는 뜻인 ‘수르’에서 온 말이다. 여기서는 32왕들(1절)이 아람 연합군 내에서 맡았던 임무를 해제하도록 권고하는 말로 쓰였다. 즉 벤하닷의 신복들은 나름대로 이전의 패인(敗因)을 분석한 것이다. 그리하여 왕들의 지휘 체계에 구멍이 났다고 판단한 것이다. 사실 왕들은 서로 다른 이해 관계 때문에 성의 있게 전투에 임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초반 접전에서 이스라엘군에게 밀리자 책임을 다하지 않고, 그대로 퇴각하기 바빴을 것이다. 그러므로 벤하닷의 신복들은 이번에는 그런 결함을 제거하고 전쟁에 임하자고 건의한 것이다.

그들 대신에 총독들을 두시고. 비록 아람 소국(小國)의 32 왕들이 명색상 군 통솔자들이었기는 하지만 그들이 실제 전투 지휘 능력에 있어서 뛰어났던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벤하닷의 신복들은 벤하닷에게 그들 대신 실제 작전에 능한 군대 장관들로 병력을 통솔하도록 요청한 것이다.

 

20:25 군대를 … 보충하고. 혹자는 앞서 벤하닷의 신복들이 32 왕들을 연합군에서 배제하자고 한 것(24절)은 곧 지원군들의 철수를 주장한 것이라고 풀이한다(Bähr). 그러나 본 절은 군대를 이전 규모로 복원할 것을 건의하는 말이다. 특히 여기서 ‘보충하고’(히, 티메네)는 ‘수를 세다’는 뜻인 ‘마나’에서 온 말이다. 그러므로 이는 정확히 이전에 유지했던 군대의 숫자 만큼 보충하자는 뜻이다. 그런데 각 왕들의 휘하 부대를 제외하고 단지 벤하닷의 다메섹군만으로 그만큼의 군대를 보유할 수 있으리라곤 생각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24절에서 볜하닷 신복들의 건의는 다만 각 단위부대의 지휘관인 32 왕들만 실제적으로 유능한 장관들로 교체하자는 뜻이었음이 분명해진다.

그 말을 듣고 그리하니라.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의 당혹감, 의지할 곳 없는 자의 외로움. 이러한 자들이 선택하는 길은 겉만 화려한 사망의 길이다(잠 2:18, 시 1:6). 인간의 생각에 일견 번쩍이는 섬광 같은 지혜도 하나님의 깊은 경륜을 따를 수 없다.

 

20:26 해가 바뀌니. 즉 ‘명년 봄이 되매’ 22절 주석 참조.

소집하고. 이에 해당하는 원어 ‘파카드’ 역시 ‘마나’와 비슷하게 ‘수를 세다’는 뜻이다. 25절 주석 참조. 그러나 그 의미는 많이 차이가 난다. 즉 ‘마나’는 산술적인 의미에서 ‘계산하다’인데 반해, ‘파카드’에는 ‘아랫 사람을 감독하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따라서 본 절의 ‘소집하다’는 말은 전쟁에 나갈만한 성인 남자의 수를 센다는 뜻으로 곧 병력 소집을 의미한다.

아벡. 아벡 또는 아빅의 뜻은 ‘샘터, 강바닥, 요새’이다. 그런데 성경에는 같은 지명이지만 서로 다른 곳이 몇 군데 나오므로 혼돈해서는 안 된다(수 13:4, 삿 1:31, 삼상 4:1, 왕하 13:17), 그 중에서 본 절의 아벡은 트랜스 요르단 북부 지역에 위치한 성읍으로 다메섹과 벧산 또는 이스르엘 골짜기를 연결하는 도로상에 위치하였다.

 

20:27 두 무리의 적은 염소 떼 구약 시대에 팔레스타인에서 목자들이 치던 염소 떼의 규모는 대개 양 떼보다 작았으며 그나마 방목을 하여 한산하게 흩어져 있었다고 한다(Bähr). 따라서 본 절과 같은 표현은 당시 이스라엘군의 규모가 아람군에 비하여 얼마나 작은 것이었는지를 쉽게 알 수 있게 해준다. 더구나 평지에서는 숨길 수 없으므로 그 규모가 적나라하게 노출된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미약한 군대를 들어 아람대군을 전멸하셨다(29, 30절).

 

20:28 하나님의 사람. 원문에는 이 단어에 정관사 ‘하’가 붙어 있다. 따라서 이 사람은 13, 22절에 나오는 선지자와 동일인인 것으로 보인다.

여호와의 말씀에 …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온 우주 만물의 창조주시요 통치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일개 지역신으로 간주한 아람인들의 처사는 여호와 신앙에 비추어 볼 때 용서받을 수 없는 모독 행위이다. 23절 주석 참조.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아벡 평지에서의 전투를 통해, 아랍인들의 편협하고 우매한 생각을 무너뜨림은 물론 이스라엘 백성들로 그렇듯 허탄한 이교 사상에 물들지 않도록 미연에 조치를 강구하고자 하셨다. 한편 오늘날 일부 신학자들 중에도 그리스도교의 생성 배경을 이스라엘 역사의 발전 과정에 종속시키고자 하는 이들이 있다. 즉 원래 여호와는 씨족신 내지는 부족신이었으나 가나안 정착 이후로는 주로 국가신으로 받들어졌으며, 그 후 예수에 의해 문자 그대로 온 인류의 신으로 발전 소개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들은 얄팍한 인지에 근거한 추측으로서, 창세로부터 종말에 이르기까지의 온 인류와 우주의 역사를 꿰뚫고 있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경륜을 의심함으로 나온 것이다(엡 1:4).

 

20:29 일곱째 날에 접전하여. ‘접전하다’에 해당하는 원어 ‘카라브’ 는 ‘전투에 들어가다’는 뜻이다. 그런데 두 군대가 바로 접전하지 않고 왜 하필 일곱째 날이 되어서야 전투를 개시하였을까? 패배한 적이 있는 아람군(16-21절)이 신중한 공세를 취하기 위해서라든지(Hammond), 7을 행운의 숫자로 여기는 이스라엘인들의 관념 때문이라든지(Bähr) 하는 주장들도 물론 일면의 통찰을 제공하기는 하지만,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개입(28절)에 의한 승리라는 점에서 여리고의 승리와 아벡의 승리가 갖는 유사점에 주목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즉 여호수아 당시 여리고 성읍도 일곱째 날에 함락되었다(수 6:1-21).

십만 명을 죽이매.. 여기서 ‘죽이다’로 번역된 원어 ‘나카’는 ‘치다, 격파하다’라는 뜻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본 절은 10만 대군을 모두 죽였다는 뜻이라기 보다는 그들을 격파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왜냐하면 뒤이어 타오는 절에서 남은 자 27,000 명이 아벡으로 도망하여 성읍으로 들어갔다는 언급이 있기 때문이다(30절).

 

20:30 그 성벽이 … 위에 무너지고. 이처럼 아벡 성이 무너진 현상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에 여러 가지 설명이 제시되었다. 즉 지진이라든가 이스라엘군의 작업에 의한 결과라든지 하는 식이다(Bähr, Hammond). 그러나 본문은 상세한 방식을 본문이 알리지 않으므로 억지로 추측할 필요는 없다. 중요한 점은 이 사건이 여호와를 무소 부재하신 분으로 선포하는 사건이라는 점이다(Keil & Delitzsch). 즉 인위적인 수단에 대한 언급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성이 붕괴된 일은 명백히 여리고 성의 전례에 비교된다(수 6:20). 그리고 두 사건의 유사성에서 아벡 성의 붕괴는 여리고 성의 붕괴를 일으킨 같은 주체, 즉 하나님에 의한 결과라는 인상을 남긴다. 사실 평지에 위치한 아벡 성의 붕괴는 여호와가 산의 신만이 아님을 명백히 알리는 사건이었다(23, 28절).

벤하닷은 … 골방으로 들어가니라. 본 절의 ‘골방’(히, 헤데르 베헤데르)은 ‘가장 깊숙한 내실’을 의미하는 ‘헤데르’가 두 번 거듭된 말이다. 즉 이는 ‘골방 중의 골방’이란 뜻이다. 사실 대개의 성은 유사시에 대비해 은밀히 숨을 곳이 만들어져 있다. 벤하닷이 피신한 곳도 아벡 성내의 바로 그와 같은 장소였다.

 

20:31 이스라엘 집의 왕들은 인자한 왕이라. 여기서 이스라엘의 왕정(王政)이 당시 고대 근동의 주변 국가들에게 어떻게 비쳤는지 그 일면을 포착할 수 있다. 즉 대개의 주변 국가들에 비해 이스라엘의 왕들은 덜 포학하고 덜 전체적인 것으로 비친 것이다. 그런데 이같은 이스라엘 왕정의 특성은 무엇보다도 이스라엘이 출애굽의 경험을 기초로 하여 출발한 민족이라는 사실에서 비롯되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즉 애굽왕권의 포학성을 익히 경험한 이스라엘 자손은 비록 역사적 요구에 따라 왕정 시대를 개막하긴 했으나, 율법으로 왕권에 상당한 제동을 가하였던 것이다(신 17:14-20). 그러므로 비록 자체의 기준(즉 율법)으로 볼 때는 열왕의 성향은 대체로 타락한 것이었지만, 주변 국가들의 눈에는 어질게 보인 것 같다.

굵은 베 … 머리에 쓰고. 이러한 행동은 죄인이 용서를 빌거나 또는 상대방에게 항복을 표할 때 취하던 고대의 관습적 자세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굵은 베는 ‘참회’의 표시이며 테두리(rope)는 ‘굴복’의 표시이다(Bähr). 그런데 ‘테두리를 머리에 쓰다’(히, 하발림 베라슈누)라는 말은 요세푸스의 주장을 참조하면, ‘줄을 목에 걸다’로 이해된다. 이때 줄을 목에 걸었다는 것은 자신의 생사가 오로지 상대의 결정에 달렸다는 완전한 굴종의 표시이다.

 

20:32 왕의 종 벤하닷. 여기서 ‘왕의 종’이란 말은 신하의 신분을 자청하는 굴복의 표시이다. 앞서 4절에서 ‘내 주 왕이여’라는 굴욕적 표현을 써야 했던 인물은 이스라엘 왕 아합이었다. 그러나 이제 본 절에서 상황은 완전히 역전되어 처지가 뒤바뀌었다. 그런데 이처럼 엄청난 역전은 벤하닷의 교만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였다(28-30절).

내 생명을 샅려 주옵소서. 이처럼 비참한 벤하닷의 간구는 한때 기세 등등했던 그의 오만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6, 10절). 이렇듯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낮추어 티끌 속에 묻어 버리시며(욥 40:11-13) 자신의 힘을 믿고 악한 계교와 횡포를 일삼는 무리들로 하여금 스스로의 올무에 빠져 들게 만드신다(시 141:9, 10).

그는 내 형제. 여기서 ‘형제’(히, 아흐)란 말은 이웃 나라끼리 사용하는 공식적 외교 용어일 경우, ‘동맹국’ 또는 ‘동맹국의 수반(首班)’을 가리킨다. 본 절의 경우가 바로 이러한 의미인데 이는 아합의 경솔한 발언이 아닐 수 없다. 즉 아람 왕 벤하닷은 이스라엘의 대적이자 여호와 하나님을 모독한 자이다. 28절 주석 참조.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벤하닷을 멸하기로 작정하셨다(42절). 그런데 아합이 벤하닷을 가리켜 ‘내 형제’라고 하였으니 이는 큰 잘못이었다.

 

20:33 징조로 여기고. 이에 해당하는 원어 ‘나하쉬’는 ‘열심히 관찰하다’는 뜻도 지니고 있다. 이때 이 말은 곧 어떤 결과를 판단해 내기 위해 열심히 동정을 살펴보는 동작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본 절은 항복 소식을 전하러 온 벤하닷의 신복들이 과연 벤하닷의 생명을 구할 수 있을지 열심히 살피는 교활한 눈매를 연상하게 한다.

얼른 받아 대답하여. 벤하닷의 신복들은 아합 왕이 자신이 뱉은 말을 철회할 수 없도록 얼른 그 말을 받아 되풀이 하였다. 이렇게 된 이상 아합으로서는 설령 자신의 말을 철회할 마음이 생기더라도 체면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열왕기 기자로부터 역대 최악의 왕으로 평가받는 아합은 줏대없음과 함께(19:1) 이처럼 경솔한 면도 노출시키고 있다.

왕이 그를 병거에 올린지라. 이처럼 아합이 벤하닷을 자신의 병거에 태운 것은 곧 그와의 동반자 관계를 나타내는 것이다. 즉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모독하고 또한 이스라엘 영토를 침략한 벤하닷에게 아합은 마치 동료처럼 행동하고 있는 것이다. 32절 주석 참조. 그런데 아합의 이처럼 애매한 처신은 곧 아합 통치의 성격을 은연 중 드러내보여 주는 행동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아합의 통치는 외국과의 교류와 경제에 의존하는 기반 위에 기초하고 있었다. 그래서 심지어 아합이 속한 오므라 왕조는 순수 이스라엘 혈통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아무튼 아합이 이방 여인을 왕비로 맞아들인 점(16:31)이나 우상 숭배를 자행한 점(16:32, 33), 이스라엘의 여호와 신앙을 경시한 점 등은 모두 이스라엘의 민족적 입장에 대치되는 처사들이었다. 즉 그 모든 행위들은 피아(彼我)를 구별 못하는 어리석은 행동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아합이 지금 벤하닷을 자신의 병거에 함께 태우고 있음 역시 그 같은 어리석음을 다시 한번 드러내 주고 있는 행위였다. 한편 아합의 이러한 처사를 다른 각도에서 살핀다면, 그는 아람 같은 강국(强國)과 적대하기를 피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20:34 내 아버지께서 … 빼앗은 모든 성읍. 혹자는 이 말을 15:20-22에 기록된 내용과 동일시하면서, 벤하닷이 바아사(Baasha, B.C. 909-886)를 아합의 부친으로 착각했을 것이라 추측한다(Hammond). 그러나 이 견해는 별로 설득력이 없다. 아합의 부친 오므리(Omri, B.C. 885-874)는 당시 주변 세계에 널리 알려진 왕이었다. 일찍부터 이스라엘과 때로는 친선, 때로는 적대 관계를 맺어 온 아람국들이 바하사와 오므리를 구별못할 리 없다. 더구나 사마리아 성읍은 바아사 당시 아직 존재하지도 않았다. 사마리아가 건축된 때는 오므리 시대이다(16:24). 또한 우리는 열왕기가 왕정 시대의 모든 사건을 수록하고 있지 않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전쟁이 벤하닷 1세와 오므리 사이에 있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다메섹에서 … 거리를 만드소서. 대부분의 학자들은 본 절에서 말하는 ‘거리’(히, 후초트)를 도시의 특정 지역에 세워진 무역 시장으로 해석한다(Montgomery, Keil & Delitzsch, R. D. Patterson). 그렇다면 아마도 이전까지는 사마리아에만 아람의 무역시장이 있어 아람인들만이 일방적인 이득을 취하고 있었던 것 같다. 더구나 다메섹에 ‘거리’를 만들도록 한다는 조치가 항복의 조건으로 제시되는 것을 보면, 거기서 올릴 수 있는 수입이 컸던 것 같다.

이 조약으로 인해 당신을 놓으리라. 이처럼 아합이 몇몇 성읍의 반환과 무역 이익을 보장 받고서 벤하닷을 살려준 조치는 이스라엘의 여호와 신앙가들에겐 납득할 수 없는 행위였다. 즉 그들에게는 분명 아합의 처사가 눈앞의 조그마한 경제적 이익과 하나님의 공의(公義)를 맞바꾼 불순한 결정으로 보였을 것이다(42절).

 

20:35 선지자의 무리. 이에 해당하는 원어 ‘베네 하느비임’은 ‘선지자의 아들들’(sons of prophets)이란 뜻이다. 그러나 이 말은 문자적으로 선지자의 혈육을 이르는 말은 아니다. 대신 이는 B.C. 11세기 경 사무엘 시대부터 등장하기 시작한 선지자 학교의 생도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러한 선지자 집단들은 엘리사의 활동과 관련해서도 자주 등장하고 있다(왕하 2:3, 3:11, 4:1, 38, 6:1, 2).

친구. 이에 해당하는 원어 ‘레아’는 ‘교제하다, 사귀다’는 뜻인 ‘라아’에서 온 말이다. 여기서 이는 선지자 생도의 동료, 즉 함께 생활하고 교제하는 친구를 가리킨다.

너는 나를 치라. 아합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심판을 선고할 선지자가 왜 이처럼 얻어맞아야 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추정컨대 이는 장차 아합이 하나님께로부터 심판을 당하게 되리라는 사실을 예시하기 위함인 듯하다(Pulpit Commentary). 아무튼 본문의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기 위해 온갖 고초마저 무릅쓰는 등 하나님의 신실한 종으로서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20:36 선지자의 친구는 선지자의 단호한 결의 속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분변치 못하고 인간적 정리(情理)에 사로잡혀 치지 못하였다(35절). 그러나 본 절에서 보듯 그는 그로 인해 사자의 밥이 되는 끔찍한 저주를 당하였다. 이에 대하여 독자(讀者)들은 상당향 의아심을 품을 수 있다. 그러나 아합 왕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그만큼 크고 단호하였다는 사실을 이해한다면 그러한 의아심은 해소될 수 있을 것이다. 즉 선지자의 친구는 인간적 정리에 연연하기 보다는 먼저 하나님의 뜻에 순복했어야 했다.

 

20:37 그 사람이 … 상하도록 친지라. ‘상하도록’은 ‘타박상을 입히다’는 뜻의 원어 ‘파차’이다. 그런데 다음 절에서 선지자는 눈을 붕대로 감고 있다. 물론 이는 변장의 목적이기도 하지만, 아마도 이때 타박상올 입은 곳이 눈부위였던 것 같다. 한편 본 절에 등장한 익명의 인물 역시 선지자 생도 중 한 명이다. 왜냐하면 ‘또 다른’에 해당하는 원어 ‘아헤르’는 같은 종류의 다른 사람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 절의 ‘또 다른 사람’이란 ‘또 다른 선지자 생도’임이 분명하다.

 

20:38 수건으로 자기의 눈을 가리어 ‘수건’으로 번역된 원어 ‘아페르’는 ‘덮개’ 또는 ‘붕대’로 번역하는 것이 낫다. 즉 선지자는 눈 부위에 입은 타박상 때문에 붕대를 두른 것이다. 한편 성경에서 ‘수건’으로 번역되는 원어는 ‘테불림’이나 ‘마스웨’ 등이 있다(출 34:33, 겔 23:15).

 

20:39 왕을 불러 이르되 이 선지자는 왕께 판결을 청하는 한 백성으로 가장하였다. 본래 왕정 시대 이전에 다스리는 자의 주된 직무는 재판이었다. 이러한 전통은 왕정 시대에도 계속 유지되었다. 물론 행정 기능이 세분화되고 보다 발달된 제도의 형태를 취한 왕정 시대에 왕이 직접 판결을 내리는 경우는 드물었을 것이다(대상 23:4, 대하 19:5-7). 그러나 하급 기관에서 판결하기 어려운 경우나 백성이 판결에 승복할 수 없어 왕에게 직접 호소하는 경우도 드물게 있었던 것 같다(3:16-28).

한 사람이 … 하였거늘. 여기서 ‘한 사람’은 문맥상 고급 장교를 의미한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전장에서 사로잡은 ‘포로’를 의미한다. 따라서 본 절의 비유는 다음과 같은 면에서 전달코자 하는 메시지를 이끌어내기에 안성맞춤이라 할 수 있다. 군의 계율 상 상관의 명령은 절대 복종을 요구하는 것이 통례이며 더구나 전쟁 상황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그런데 이스라엘군에서 궁극적으로 최고 상관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므로,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전쟁 포로를 함부로 풀어준 아합의 처사(31-34절)는 당연히 엄벌에 처해져야 한다(42절). 한편 아합 왕으로서는 이 비유가 자신을 겨냥한 것인 줄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것은 선지자의 연극이 실제 같았고, 이스라엘 내에 아합 자신 보다 높은 상관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자신에게 해당하는 심판을 스스로 선고한 꼴이 되고 말았다(40절). 이 땅에서 아무리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도 자기 위에 하나님이 계신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은 한 달란트. 한 달란트는 34 kg이다. 그리고 은 한 달란트는 일반 노동자 6,000 일의 임금에 해당한다. 이는 일반 평민이 내기에는 너무나 큰 액수임을 알 수 있다.

 

20:40 이리 저리 일을 볼 동안에 주된 임무를 망각하고 다른 일로 마음이 분주한 상태를 가리킨다. 즉 덜 중요한 것들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을 희생시킨 경우를 가리킨다. 아합은 경제적 이익을 부지런히 계산하느라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기로 작정한 사람을 놓아 주는 잘못을 범한 것이다.

네가 … 당하여야 하리라. 아합의 이 말은 이제 최종적 판결을 선포한 것이다. 따라서 이 판결이 자신에게 해당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는 한 마디도 항변할 수 없었다(41-43).

 

20:41 수건을 벗으니 … 알아본지라 이 선지자의 얼굴을 아합 왕이 알고 있었으리라고 보긴 어렵다. 그렇다면 선지자가 머리에 감은 붕대(38절)는 상처뿐만 아니라 선지자 생도임을 나타내는 이마의 표시도 가렸을 것이다. 성경 기록에 따르면 당시 선지자들은 여호와께 대한 헌신의 표시로 이마나 양팔에 표식을 하는 관습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겔 9:4, 사 44:5, 슥 13:6). 그러므로 그가 붕대를 풀자 아합은 그가 선지자임을 식별할 수 있었을 것이다.

 

20:42 내가 멸하기로 작정한 사람 ‘멸하기로 작정하다’에 해당하는 원어 ‘하람’은 본래 ‘금하다, 저주하다’는 뜻이다. 대체로 이 말은 ‘철저히 파괴하려는 목적으로 구별해 두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면 가나안 정복 당시 여호수아가 진멸한 도시들은 모두 여호와께서 ‘하람’한 도시이다(수 6:21, 8:26, 10:28, 11:11 등). 마찬가지로 벤하닷은 하나님께서 ‘하람’한 인물이다. 즉 다른 어떤 목적이 개입할 수 없는, 부정적 의미에서 구별된 것이다. 그런데 아합은 몇 가지 이익을 위해 벤하닷을 풀어주었다(34절). 이제 아합은 바로 선지자의 비유 중 포로를 놓쳐 상관으로부터 징계를 당하게 된 자의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이다(39-40절).

네 손으로 … 대신하리라. 왕의 판결을 되받아 고스란히 왕 자신에게 돌리는 화법은 나단 선지자의 경우에서도 이미 본 바 있다(삼하 12:7). 사실 자신의 실책은 합리화시켜 가리고, 남의 경우에는 신랄하고 공정한 판단을 주장하는 게 죄 된 인간의 모순된 모습이다. 즉 내로남불인 것이다. 따라서 선지자들의 이 같은 화법은 비유나 우화라는 거울을 통해 자신의 실상을 은폐하지 못하게 하는 방식이다.

 

20:43 근심하고 답답하여 이에 해당하는 원어 ‘사르 웨자에프’는 ‘불쾌하고 기분 나쁜 심정으로’라고 번역할 수 있다. ‘사르’는 질책이나 거절을 당하였을 때 화가 나는, 즉 반항적 상태를 나타내는 말이기 때문이다. 선지자의 질책은 나단의 질책과 비슷했으나 반응은 다윗의 것과 아합의 것이 많이 달랐다. 다윗은 즉시 회개하였지만(삼하 12:13), 아합은 도리고 분(忿)을 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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