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 주석, 열왕기상 19장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19:1 말하니. 원어 ‘나가드’는 ‘알게 하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말에는 ‘넌지시 알리다’는 뜻의 어감(語感)이 들어 있다. 때문에 보통 이 동사로 설명되는 관계란 마치 공범자(共犯者)들끼리 갖는 동료의식처럼 친밀한 관계이다. 따라서 아합이 어느 정도로 이세벨과 밀착되어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한편 본 절은 아합이 앞 장에서 목도한 이적과 바알 선지자 모두를 칼로 죽인 엘리야의 위업(18:30-467)에 질려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일국(一國)의 통치자인 아합은 줏대없이 그 모든 사실을 왕후 이세벨에게 말한다. 이러한 아합의 유약한 면은 본서 여기저기에서 나타나는 이세벨의 과단성과 극명하게 대조된다(21:7).

 

19:2 내일 이맘때에는. 진노한 이세벨은 왜 그 날 당장 엘리야를 처단하려고 하지 않았을까? 이에 대하여 주석가들은 이세벨이 엘리야를 위협하여 멀리 쫓아내려는 의도를 가졌기 때문으로 설명한다(Bähr, Keil & Delitzsch, Matthew Henry, Wordsworth). 왜냐하면 갈멜 산상의 승리로 말미암아 백성들의 환호에 싸인 엘리야(18:30-40)를 직접적으로 처단하기는 어렵다고 이세벨이 판단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세벨의 잔인하고 과감한 성격을 감안할 때 그 같은 설명은 설득력이 적다고 보는 주석가도 있다. 아무튼 본 장은 적어도 이세벨의 위협이 실제적인 생명의 위협이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3, 10, 14절).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성명과 같게 하리라. 여기서 ‘저 사람들’이란 앞서 엘리야가 처단한 450인의 바알 선지자들을 가리킨다(18:22, 40). 따라서 이 말에는 엘리야를 반드시 죽이겠다는 이세밸의 극심한 증오와 비장한 각오가 들어 있다. 그녀가 아합으로부터 하나님의 크신 능력에 대하여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이처럼 더욱 완악해진 것은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신들이 …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이세벨의 맹세 속에 담긴 이 말은 의미 심장하다. 특히 엘리야가 한 분 하나님을 두고 맹세한 것과 대조된다. 참신이신 한 분 하나님과 단절된 인간은 이처럼 주위의 모든 것, 특히 자신의 이익과 관련된 것들을 신격화하게 된다. 어쨌든 인간은 두 주인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눅 16:13). 따라서 한 분 하나님께 굳건히 헌신하든가 아니면 다른 모든 것에 굴복하든가 둘 중 하나를 택하여야 할 것이다.

 

19:3 이 형편을 보고. 본 절에 해당하는 원어 ‘라아’는 단순히 ‘바라보다’는 뜻이다. 어떤 영역본들은 당시의 상황에서 엘리야가 가졌을 정서적 반응에 주목하여 이를 ‘두려워했다’(he was afraid)로 번역하였다(Modern Language, RSV). 한글 공동번역도 같은 경우로써 이와 비슷하게 ‘두려워 떨며’로 번역하였다.

생명을 위하여 … 브엘세바에 이르러. 이세벨의 단호한 경고를 받은 엘리야는 할 수 없이 도피길에 오른다. 이적과 능력의 종으로서의 모습을 온 백성들에게 보였던 엘리야(18:30-46)가 불과 하루 만에 이처럼 황망히 도피길에 오르는 모습은 이해하기 어렵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와 동일하게 연약한 성정(性情)을 지닌 엘리야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엘리야가 행한 이적적 권능이란 오직 여호와께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사실도 깨닫게 된다. 한편 브엘세바(Beersheba)는 유다 네겝(Negeb) 지방의 한 성읍이다. 이곳은 팔레스타인 최남단 지역으로서 곧 헤브론 남서쪽 55 km 지점이다. 삼상 3:20 주석 참조. 따라서 엘리야는 이세벨의 권세가 미치지 못하는 남 왕국 유다의 남쪽 국경 지대로 피신하였음을 알 수 있다.

사환을 … 머물게 하고. 엘리야가 행한 이 조치에서 당시 그가 얼마나 큰 좌절감을 느끼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사실 가장 큰 승리 뒤에 찾아온 위협은 극도의 무력감과 허탈감을 낳는다. 이러한 상태에서 야기되기 쉬운 극도의 고립감을 엘리야는 자신의 사환조차 동행하지 못하도록 함으로써 표출하고 있다(Lange).

 

19:4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이스라엘 역사상 ‘광야’는 엘리야와 같은 예언자들에게는 특별한 의미를 갖는 곳이다. 왜냐하면 끊임없는 이교도의 우상 숭배 영향을 받아야했던 가나안 정착 시기와 달리, 과거 이스라엘의 광야 유랑 시절(민 33:1-49)은 그들 역사에 있어 가장 순수한 신앙을 보존했던 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언자들에게는 흔히 도시 문화에 대한 혐오와 함께 광야에 대한 동경이 발견된다고 한다(Talmon). 더구나 엘리야가 들어간 광야는 ‘하나님의 산 호렙’으로 나아가는 첫 문턱이다. 즉 처음부터 엘리야는 호렙 산을 목적으로 하고 여정을 시작한 것이다(Hammond).

하룻길. 구약 시대 당시 히브리인들이 거리를 나타내던 관용적 표현이다. 정확한 수치로 환산하기는 어려우나 ‘하룻길’은 약 32~40 km이다.

로뎀 나무. 로뎀 나무(broom tree, NIV, RSV)는 사막의 메마른 골짜기나 하상(河床)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관목이다. 콩과의 식물로서 흰 꽃이나 연보라색 꽃을 피우는데 대개 1~2 m의 높이이다. 오늘날 아랍인들은 이 나무를 ‘금작화’(genista Retem 또는 genista Monosperma)라고 부른다. 이 나무는 광야에서 바람과 햇볕을 잘 막아 주기 때문에 대상(隊商)들에게 매우 환영받는 나무이다. 그러나 사막에 거주하는 족속들은 이를 땔감으로 사용하기도 한다(Lange, Robinson, Keil & Delitzsch).

여호와여 …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불(fire)과 능력의 선지자 엘리야(18:30-46)가 인간의 연약한 모습을 하나님 앞에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그런데 이것은 또한 어쩔 수 없이 연약한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선지자 요나도 이와 비슷한 탄원을 하나님께 드린 적이 있지 않은가(욘 4:8)!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권능을 힘입어 큰 기적과 역사를 이룬다고 할지라도 항상 우리는 인간의 연약성을 생각하며 늘 겸손한 자세를 가져야 한다.

넉넉하오니. 이에 해당하는 원어 ‘라브’는 ‘충분하다’(enough)는 뜻이다. 그러나 본 절은 문자대로의 뜻과는 달리 희망을 상실한 사람의 체념을 표현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공동번역은 그러한 뜻을 보다 직접적으로 “이제 다 끝났습니다”로 표현하였다.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낫다’에 해당하는 원어 ‘토브’는 보통 ‘선하다, 좋다’는 뜻이다. 그리고 질이나 가치에 있어 상대적으로 우수한 경우를 가리켜 쓰기도 한다. 그런데 여기서 엘리야가 자신이 조상들에 비해 나을 바가 없다고 한 말은 구체적으로 무얼 의미하는가? 우선 본 절은 엘리야가 자신을 ‘못난 놈’으로 자조하는 비애 섞인 말임을 기억하라. 그 다음 엘리야는 이스라엘을 여호와께 돌아오도록 하는 일을 필생의 사명으로 삼았던 사람임을 기억하라. 그런데 그 사명이 성공한 듯 보이는 순간에 닥친 위기(1, 2절)는 그로 하여금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자의 좌절과 허탈감에 빠지게 하였다. 그러므로 그러한 비탄속에서 이제 엘리야는 지금까지 조상들이 겪은 이스라엘 역사의 성공과 실패에서 자신 역시 한걸음도 더 나가지 못했다는 실망을 말하고 있다.

 

19:5 천사가 … 먹으라 하는지라. 70인역(LXX)에는 ‘천사’가 ‘어떤 이’로 나와 있다. 그러나 7절에서 다시 언급된 바와 같이 여기 언급된 ‘천사’는 ‘여호와의 사자’ 곧 구약시대 당시 이 땅에 현현(顯現)하신 그리스도이시다. 이와 관련해서는 창 16:7 주석을 참조하라. 한편 앞서 엘리야는 하나님께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4절)라고 기도하였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로 하여금 땅 위에서 더 살도록 격려하며 기적적으로 음식을 공급해 주셨다(6절). 이는 곧 하나님의 사랑에 기인한 긍휼과 크신 은혜이다.

어루만지며. 이에 해당하는 원어 ‘나가’는 특별히 하나님의 어루만지심에 대해 사용할 수 있는 말이다(단 8:18, 10:16). 그리고 이때 하나님의 만지심은 상황을 변화시키며 새 힘을 주는 능력으로 작용한다. 또한 하나님의 만지심은 그 대상이 자신에게 속한 존재라는 의미를 주기도 한다(7절).

 

19:6 숯불에 구운 떡. 이에 해당하는 원어 ‘우가트 레차핌’은 ‘뜨거운 돌 위에 놓인 떡’이란 뜻이다. 당시 초장(草場)을 찾아 이리저리 유랑 생활을 하던 사막의 유목민들은 돌을 달구어 그 위에서 떡을 구웠다. 그런데 바로 그와 같은 떡이 엘리야에게 제공된 것이다.

 

19:7 네가 갈 길을 다 가지 못할까 하노라. 원문상으로 ‘네가 가야할 길이 너무도 크다’는 말이다. 이는 곧 엘리야가 여행해야 할 거리가 아직도 많이 남았다는 뜻이다. 이러한 표현에서 엘리야의 광야행은 처음부터 행선지가 정해진 것이었음을 알게 된다. 4절 주석 참조. 그 목적지는 호렙 산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실망과 비탄에 지친 엘리야는 여행을 지속할 여력도 의욕도 없었다. 천사의 도움은 바로 이러한 시점에서 엘리야가 침체를 이겨내도록 음식과 휴식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5절 주석 참조.

 

19:8 사십 주 사십 야. 브엘세바에서 호렙 산까지는 대략 350 km로서 정상적으로 꾸준히 걸을 경우 십여 일 정도면 갈 수 있는 거리이다. 따라서 엘리야의 광야 40일은 행진만을 위한 기간이 아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즉 엘리야는 이 기간 동안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때로는 금식도 하며 때로는 기도하면서 호렙 산을 향해 나아갔을 것이다. 그런데 그 기간이 40일이었다는 것은 모세와 예수 그리스도의 경우를 연상시켜 준다(신 9:9, 마 4:2). 특히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40일 동안 호렙 산에서 식음을 전폐하고 여호와 앞에 있었다(신 9:18). 그러므로 엘리야의 광야 40일도 모세의 경우에 비추어서 그 의미를 파악해야 한다. 즉 이때 40은 인내의 한계를 채우는 수로서 그 이후엔 상황의 변화를 초래케 하는 것이다. 사실 여호와의 진노로 멸망 받아야 마땅할 백성들이 계속 보존케 된 것은 모세의 40일간 중보 기도 덕분이었다(신 9:18, 19). 이와 마찬가지로 더 이상 손 쓸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이스라엘의 배교(왜냐하면 갈멜 산에서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큰 변화가 없었으므로)에 대해 엘리야가 홀로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짐을 지고 하나님을 찾은 기간이 바로 본 절의 사십 주야인 것이다.

하나님의 산 호렙. 호렙 산(Mount Horeb)은 과거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그 밑에서 장막을 쳤으며 모세가 여호와와 대화를 나누었던 신성한 시내 산(Mount Sinai)와 동일시된다(출 19장). 그러나 그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확인된 바 없으며 단지 오늘날의 예벨 무사(Jebel Musa)가 아닌가 추정할 뿐이다.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출 3:1주석을 참조하라. 이제 엘리야는 일찍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자신을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계시하셨던 바로 그 장소에 실의에 빠진 채 도착하였다.

 

19:9 엘리야가 그 곳 굴에 들어가. 굴에 해당하는 원어 ‘메아라’ 앞에는 정관사 ‘하’가 붙어 있으므로 ‘그 굴’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엘리야가 들어간 굴은 호렙 산에서 흔히 발견되어지는 일반적인 굴이 아니라 여호와의 영광이 지날 때에 모세가 피해 있었던 반석 틈(출 33:22)일 가능성도 있다(Matthew Henry’s Commentary).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이 질문은 새로운 사실을 묻는 물음이 아니고 도리어 질문 받는 자를 일깨우는 물음이다. 즉 하나님은 엘리야의 실망과 체념을 이미 알고 계시면서 물으신 것이다. 바로 이 질문은 엘리야 자신을 냉정히 성찰케 하는 도전이 되었다. 그리하여 일종의 전환과 갱신의 계기를 마련하는 기능을 하게 되는 것이다. 즉 이러한 대화의 과정을 통해서 엘리야는 하나님의 경륜을 깨닫고 또한 자신에게도 할 일이 남아 있음을 발견케 되는 것이다(Keil & Delitzsch).

 

19:10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 18:15 주석 참조.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 말(히, 칸느 키느티)은 ‘질투하다’는 뜻의 히브리어 ‘카나’가 두 번 반복된 말이다. 즉 이는 ‘질투하고 질투하더니’라는 뜻이다. 이는 곧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떠나서 이방신들을 숭배하는 작태에 엘리야가 심히 분노한 것을 가리킨다. 이때 그의 질투는 바로 질투하시는 하나님과 뜻을 같이 하는 데서 나온 열정이다(출 20:5).

오직 나만 남았거늘. 원문은 ‘나, 나만 남았다’는 식의 표현이다. 이는 곧 엘리야의 탄식과 하소연이 그 호흡까지 느껴질 정도의 표현이다. 더구나 ‘나만’에 해당하는 원어인 ‘바드’(alone)는 ‘분리되어 고립되다’는 개념이 강조되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 말에서 우리는 당시 엘리야가 얼마만큼 고립감을 느끼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그러나 실상 이는 엘리야의 잘못된 생각이다. 그 당시 이세벨의 박해 가운데서도 오바댜가 숨겨 놓은 100명의 선지자(18:4)와 하나님께서 보호하신 7천 명의 순결한 자가 남아 있었다(18절).

 

19:11 여호와 앞에서 산에 서라. 본 절의 의미가 무엇인지는 분명치 않다. 그런데 공동번역의 경우 이를 “야훼 앞에 있는 산 위에 서 있거라”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문장의 전후 관계상 “여호와 앞에서”는 나가서 산 위에 서는 행동 전체를 받는다. 즉 엘리야가 산 위에 서는 행동이 곧 여호와 앞에 서는 행동과 동일시되고 있는 것이다. 아무튼 본 절은 과거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당신의 영광을 보여 주셨듯이(출 33:17-23) 이번에는 엘리야에게도 당신을 보여 주시기 위하여 엘리야의 주목(注目)을 촉구하는 말이다.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은 여호와의 이름을 선포한다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출 33:19). 즉 이는 여호와께서 당신을 간절히 찾는 자에게 자신을 알리시는 한 방편이다. 그런데 이때 중요한 점은 ‘지나가다’는 뜻의 원어 ‘아바르’는 움직임의 개념이 강하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고정된 사물을 관찰하는 것처럼 움직이는 대상을 관찰할 수는 없다. 이는 마치 바람은 그 움직임을 볼 수 있으되 형상을 볼 수는 없는 것과도 같다(요 3:8). 이처럼 하나님은 인간에게 당신을 알리시는 방식에서도 인간의 수중에 들지 않는 방식으로 자신을 선포하신다.

강한 바람 … 지진. 비단 이것들 뿐 아니라 다음 절에 나오는 ‘불’ 등은 여호와께서 현현(顯現)하실때 일반적으로 수반되는 현상이다(출 19:16-20). 그러나 정작 본 절에선 여호와께서 그 가운데 계시지 아니하셨다. 그러기에 바람, 지진, 불 따위는 표적을 구하는 종교가들에게는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굉장한 증거임에 틀림없겠지만 선지자 엘리야의 마음을 압도하지는 못했다. 그 대신 엘리야의 마음을 압도한 것은 그러한 현상들 다음에 들려온 ‘세미한 소리’(12절)였다. 즉 이것이야말로 엘리야에겐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분명한 증거였다. 오늘날 우리들도 성경을 통해 들려주시는 그 세미한 소리를 들어야 한다(시 119:105).

 

19:12 세미한 소리. ‘세미한’에 해당하는 원어 ‘데마마 다카’는 ‘고요하다’(히, 다맘)와 ‘곱다’(히, 다크)의 결합어이다. 즉 섬세한 것을 표현하는 단어 둘이 동원되어 대단히 미세함을 강조하고 있다. 더구나 강한 바람과 지진, 불이 있은 후의 ‘세미함’이란 더욱 뚜렷한 대조를 보여 준다. 한편 ‘소리’(히, 콜)는 신약에서의 ‘포네’와 마찬가지로 ‘음성’이라 함이 더욱 적절하다(계 1:10, 4:1 등). 그런데 ‘하나님의 소리’로서 사용되는 경우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뜻한다. 그리고 이때 하나님의 음성이란 외적인 것이라기보다 성령에 의해 듣는 자의 의식에 각인(刻印)되는 내적 감화(感化)이다(고전 2:10-14). 그 결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은 영적 깨달음을 갖게 된다(Pope).

 

19:13 겉옷으로 엎굴을 가리고. 이것은 엘리야가 마침내 하나님께서 임재하셨음을 인식하고 취하는 행동이다. 즉 하나님을 직접 대면할 경우 살 수 없기 때문에 엘리야는 겉옷으로나마 자신의 얼굴을 가린 것이다. 출 33:20 주석 참조. 한편 모세가 호렙 산에서 하나님의 지나가심을 경험할 때는 여호와께서 친히 손으로 모세를 덮으셨다(출 33:22, 23).

 

19:14 하나님의 물으심에 대한 엘리야의 답변은 10절에서와 마찬가지로 아직도 두려움과 절망의 심경을 역력히 반영하고 있다. 즉 엘리야는 하나님의 위엄과 임재를 체험하고서도(11, 12절) 여전히 부정적인 심경을 떨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엘리야를 위로하며 앞으로의 구체적 사명에 대하여 알려주셨다(15-18절). 그러자 비로소 엘리야는 용기를 회복하고 과단성 있는 결단을 내리는데(19-21절) 인간은 연약하나 하나님은 강하시다는 사례를 보여 주는 한 표본이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19:15 네 길을 돌이켜. 이 말은 단순히 왔던 경로를 되밟아 돌아가라는 말과는 다르다. 왜냐하면 실제로 엘리야가 명령 받은 행로는 다메섹으로 가는 방향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돌이키라’는 말은 내적인 태도와 의식의 전환을 지시하는데 그 의미가 있다. 즉 이는 실망과 낙담을 안고 왔던 길을 새로운 사명과 과제를 받아 들고 돌아가게 됨을 말하는 것이다. 사실 인생에 할 일이 남아있다는 의식이야말로 낙담과 무의미를 극복케 하는 첩경이다.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하사엘은 본래 아람 왕 벤하닷의 군대 장관이었다. 그러나 그는 벤하닷을 죽이고 왕위에 올라 이후 자주 이스라엘을 공격하여 괴롭힌다(왕하 8:13-29, 13:1-3). 그러므로 본 절은 하나님께서 하사엘을 이스라엘 징계의 채찍으로 사용하실 계획을 알리시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어려운 문제는 엘리야가 언제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었는가이다. 실상 16절까지에서 언급되는 하사엘, 예후, 엘리사 중 그 누구도 엘리야의 기름 부음을 받지 않았다(왕하 8:12-15, 9:1-10). 그러나 이 난점은 ‘기름 부음’을 문자적으로가 아니라 다음과 같이 폭넓게 해석할 때 해결된다. 즉 여기서 ‘기름 붓다’라는 말은 꼭 문자적으로만 해석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하기 위해 어떤 사명을 부여하는 것(시 105:15, 사 45:1)이나 따로 구별하는 것(출 30:26)을 의미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19:16 님시의 아들 예후. 사실 예후는 님시의 손자이고 여호사밧의 아들이다(왕하 9:2). 히브리어의 ‘아들’(히, 벤)은 ‘자손’을 의미하기도 한다. 본래 이스라엘 군대 장관 중 하나였던 예후는 훗날 라못 길르앗 출정시 반란을 일으켜 오므리 왕조를 무너뜨린다(왕하 9:1-10:17), 이때 예후는 무자비한 학살과 숙청으로 아합 가문을 진멸하였고, 이로써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하신 말씀은 성취되었다.

아벨므홀라. 이 지명의 뜻은 ‘춤추는 초장’이다. 그러나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아직 알려지지 않고 있다. 다만 유세비우스(Eusebius)는 벧산 남쪽 16 km 지점의 한 유적지를 아벨므홀라로 추정한다. 삿 7:22 주석 참조.

엘리사. ‘엘리사’란 이름은 ‘하나님은 구원이시다’라는 뜻이다. 농부였지만 상당한 재산가였던 아버지 밑에서 열두 겨리 소를 부릴 수 있었던 그는 엘리야의 부름에 즉각 응하여 선지자가 되었다(19-21절). 그리하여 엘리야가 승천한 이후(왕하 2장) 엘리사는 약 50년간(B.C. 848-797년경) 북 왕국에서 활약하게 된다. 한편 학자들은 엘리야→엘리사의 계승이 모세→여호수아의 계승과 많은 점에서 유사하다고 본다(Stek).

 

19:17 본 절에 보이는 하사엘-예후-엘리사의 연결은 일견 납득이 가지 않는다. 왜냐하면 서로 이해 관계가 다르고 입장이 상충되는 세 사람이 마치 같은 목적을 위해 노력하는 동료처럼 그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서로 대립하는 국가의 왕들인 하사엘과 예후가 의식적으로 같은 목적을 품고 활동했을리 만무하다. 그러나 이들은 어떤 의미에서든 북 왕국에 재난과 죽음을 가져다 준 인물들이다. 15, 16절 주석 참조. 따라서 그러한 그들의 활동이 이스라엘의 우상 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관점과 연결될 때, 본 절과 같은 표현이 가능하다. 한편 본 절에서 ‘예후의 칼을 피하는 자를 엘리사가 죽이리라’는 표현은 앞서 ‘기름부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문자적으로 취할 바가 못된다. 15절 주석 참조. 즉 이는 엘리사가 직접 죽인다는 말이 아니라 그의 사역이 결과적으로 이스라엘에 많은 심판을 가져다 준다는 뜻이다.

 

19:18 칠천 명을 남기리니. ‘남기리니’에 해당하는 원어 ‘샤알’은 대단히 의미 심장한 말이다. 원래 신정 국가(神政國家)인 이스라엘의 정치적 운명은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백성들의 신앙에 좌우되었다(출 19:5,6). 따라서 극도로 타락하고 혼미한 시대는 하나님의 심판과 파멸을 불러 올 것이 자명하다. 그런데 그러한 위기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는 공동체의 미래를 지속케 할 소수의 무리를 항상 남겨 놓으셨다. 이때 남은 자들은 하나님의 주권적 택정(擇定)하심 안에서 유지되고 보존된다는 은총적 의미가 있다. 즉 이 경우 심판의 시대에도 불구하고 신실한 자를 남기셔서 역사를 지속케 하시는 하나님의 자비에 초점이 있다(Stark, Jenni). 한편 본 절에서 ‘칠천 명’은 실제의 수가 아니라 상징적인 수로 받아들이기도 한다(Keil 등). 즉 이는 완전수인 7과 관련된 수로서 미래의 역사를 담당하기에 충분한 숫자가 남아 있음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19:19 열두 겨릿소. 한 ‘겨리’(히, 체메드)는 한 멍에를 나란히 멘 한 쌍의 소를 말하기도 하고, 그 한 쌍의 소가 하루 종일 갈만한 토지 단위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런데 전자의 뜻을 취할 경우 엘리사는 24 마리의 소를 앞세워 밭을 간 셈이다.그렇다면 아마도 본문에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다른 일꾼들이 그와 함께 일하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한편 토지 단위로서의 한 겨리는 8분의 5에이커, 즉 약 2,520 평방미터에 해당한다고 한다(Sellers).

열두째 겨릿소와 함께 있더라. 이 말 역시 열두째 쌍의 소를 부린다는 뜻일 수도 있고 열두째 밭을 맡아 간다는 뜻일 수도 있다. 그러나 20절 초반을 참고할 때 열두 번째 쌍의 소를 맡아 부렸다는 뜻이 옳은 것 같다.

겉옷을 그의 위에 던졌더니. 보통 겉옷은 그 사람의 직무를 나타내는 역할을 한다. 특히 엘리야의 경우 그의 외모와 함께 특이한 복장은 항간에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렇게 볼 때 엘리야가 겉옷을 엘리사에게 던져준 것은 자신의 직무를 대신하라는 매우 상징적이고 효과적인 전달 방식이었다(Hammond, Keil & Delitzsch). 그러기에 엘리사 역시 이 동작에 담긴 의미를 즉각 알아 차렸다(20, 21절).

 

19:20 그가 소를 버리고 … 달려가서. 부르심에 즉각 응답하는 것은 성경에 나오는 소명자들의 비교적 공통된 특징이다(마 4:18-22, 눅 5:27-29). 아마도 엘리사는 민족의 우상숭배에 대하여 깊이 탄식해 왔던 인물로서 평소부터 엘리야의 활약에 마음깊이 동조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기에 더욱 그는 엘리야의 부름에 조금도 주저함 없이 떨치고 일어날 수 있었을 것이다.

청하건대 나를 내 부모와 입맞추게 하소서. ‘입맞춤’은 이스라엘인들의 일상적 인사법이다. 본 절에서의 엘리사의 청원은 눅 9:59의 경우와는 다르다. 즉 눅 9:59에 나오는 사람은, 부친의 생존 기간 동안은 예수를 따를 수 없다는 식의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반면에 엘리사는 자신을 낳아 주시고 길러 주신 부모님께 응당 드려야 할 인사를 드리려 한 것이다.

내가 네게 어떻게 행하였느냐. 혹자는 이 말을 약간 힐난조의 말로 본다(Rawlinson, Wordsworth). 그러나 앞뒤 문맥으로 볼 때 이 말은 긍정의 뜻이다. 즉 이는 ‘안 될 이유가 뭐 있겠느냐’는 뜻이다. 사실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행한 것은 선지자적 직무에의 초대이다. 그런데 이 초대는 곧 부모와의 이별을 의미한다. 따라서 부모에게 입맞추고 오겠다는 엘리사의 요청은 어떤 주저함도 아니다. 도리어 이는 부모와의 영원한 이별을 감지하고 그 운명을 기꺼이 감수하겠다는 결단의 표시이다. 그러므로 엘리야 역시 수락한 것이다(Lange).

 

19:21 한 겨릿소를 가져다가 잡고. 이 경우는 당연히 ‘한 쌍의 소’를 도축(屠畜)하였다는 뜻이다. 19절 주석 참조.

소의 기구를 불살라. 이제까지 농부였던 엘리사가 농기구를 불사른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전적인 헌신과 결단의 상징적 표시이다. 따라서 이것은 일종의 의식(儀式)이라 할 수 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엘리사가 구태여 농기구를 불사를 까닭이 없었을 것이다.

고기를 삶아 백성에게 주어 먹게 하고. 여기서 ‘백성’이란 당시 엘리사와 함께 밭을 갈았던 일꾼들 뿐 아니라 그의 친척과 친구, 이웃 모두를 의미할 것이다. 즉 엘리사는 이제 이들과 헤어지는 마당에서 마지막 석별의 잔치를 나누고 있는 것이다(Pulpit Commentary).

엘리야를 따르며 수종 들었더라. 열왕기에서는 엘리야→엘리사의 계승을 모세→여호수아의 계승과 대비하려는 의도가 있다(Stek). 본 절은 바로 그에 해당하는 것이다. 즉 여호수야가 모세의 수종을 든 것처럼 엘리사도 엘리야의 수종을 든 것이다(출 24:13, 수 1:1). 한편 왕하 3:11에 의하면, 엘리사를 ‘엘리야의 손에 물을 붓던 사밧의 아들’로 소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