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 주석, 열왕기상 18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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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 많은 날이 지나고 제삼년에. ‘많은 날’(히, 야밈 라빔)이란 표현은 ‘세월이 제법 많이 흘렀음’을 나타낸다. 그런데 언제로부터 계산해서 세월이 많이 흘렀다는 말인가? 아마도 이는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의 집에 체류하기 시작한 때(17:8-16)로부터 일 것이다. 그 이유는 본 절에서 ‘제삼년에’라는 설명이 곧 이어 나오기 때문이다. 즉 히브리적 시간 계산 방법에 의할 때 ‘제삼년에’ 이르기까지의 시간은 실제로 만 3년이 못된다는 것이 분명하다. 더욱이 신약성경에 의하면, 엘리야 시대의 가뭄은 3년 반 동안 계속되었다고 한다(눅 4:25, 약 5:17). 따라서 본 절의 ‘제삼년에’는 엘리야가 아합에게 가뭄을 선포한 때(17:1)를 기점으로 잡고 계산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Pulpit Commentary, Lange, Keil & Delitzsch).

너는 가서 아합에게 보이라. ‘보이라’(히, 라아)는 말은 문자적으로는 물론 ‘가서 만나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 말에 함축되어 있는 뜻은 보다 넓고 깊다. 그 중에서도 특히 주목할 만한 점은 이 단어가 ‘제시하다, 증명해 보이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즉 이 동사에 의해 표현되는 행동은 앞서 선행된 어떤 예시, 예견에 대한 결정적 증거 제시의 행동이라 할 수 있다. 본 장에서 엘리야의 행적은 이러한 의미에 부합된다. 즉 엘리야는 일찍이 아합에게 가뭄을 예언한 바 있다(17:1). 그런데 지금 엘리야는 가뭄 종식의 예언을 위해 다시 아합과 만나도록 명령 받는다. 왜냐하면 엘리야가 그 같은 선포를 하여야만 가뭄과 같은 자연력의 고삐를 쥐고 계신 분은 바알(Baal)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심이 명백해지기 때문이다. 17:1 주석 참조. 그러므로 이제 아합에게 ‘보이러’가는 엘리야의 행동은 여호와의 하나님되심을 ‘증명해 보이러’ 가는 행동이라 할 수 있다.

 

18:2 사마리아에 기근이 심하였더라. 사마리아는 아합에 의해 소위 자연의 풍요로움과 생산의 풍부를 보장한다는 바알 신을 섬기는 중심지가 된 곳이다(16:29-33). 그런데 바로 그 곳이 기근(饑饉)으로 고통 받고 있다는 점은 본서 기자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는 다름 아니라 바로 바알 숭배의 허구성을 폭로해 주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한편 여기서 ‘심하였더라’(히, 하자크)는 말은 ‘아주 맹렬하였다’로 번역할 수 있다. 이는 곧 그 이상 더할 수 없을 가뭄이 사마리아를 덮쳤다는 말이다.

 

18:3 왕궁 맡은 자 오바댜. ‘오바댜’는 ‘여호와를 섬기다’는 뜻이다. 특히 이 이름 속에 담긴 동사 ‘아바드’는 ‘노예처럼, 종처럼 섬기다’는 뜻을 갖고 있다. 그런데 사실 이름 그대로 오바댜는 지극한 열심으로 여호와를 섬긴 사람이었다. 즉 당시 바알 숭배의 심장부라 할 아합 궁중의 고위직에 있었던 자였음에도 그가 여호와의 선지자 백 명을 숨겨 주었다는 사실(4절)은 그의 신앙의 열성과 순수함을 짐작케 해준다. 한편 ‘오바댜’는 구약에서 비교적 자주 등장하는 이름이다(대상 3:21, 7:3, 8:38, 9:16, 대하 17:7, 34:12, 스 8:9). 따라서 동명이인(同名異人)을 혼동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지극히. ‘지극히’(히, 메오드)는 ‘대단히, 지극히’ 등의 뜻을 갖는 부사이다. 그런데 성경에서 이 단어는 하나님을 섬기는 바람직한 태도를 묘사하기 위해 자주(구약에서 약 300회) 사용되었다(신 6:5, 왕하 23:25). 한편 신약에서 이 단어는 ‘마음과 힘(mind and strength)을 다하여’로 번역되어 있는데 이러한 표현은 이 말이 갖는 의미를 잘 드러내 준다(막 12:30, 눅 10:2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경외하다’에 해당하는 원어 ‘야레’에는 ‘두려워하다, 놀라워 하다’는 뜻도 들어 있다. 이는 곧 하나님과 접해 본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체험적 신앙을 강조해 준다.

 

18:4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멸할 대에. 이 때가 언제인지 명확치 않으나 학자들은 대개 엘리야의 가뭄 선포(17:1) 이후로 본다(Hammond). 그렇게 보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엘리야의 정면 도전(가뭄 선포)에 대한 보복 조치였으리라는 추정(Hess, Menken)이다. (2) 가뭄이 시작되자 그 원인을 여호와 선지자들의 저주 탓으로 보고 일종의 주술적 조치로 박해를 가했을 것이라는 추정이다(Hess, Menken). 한편 이세벨(Jezebel)에게 박해를 당한 ‘선지자들’이란 아마도 선지자 학교의 생도들일 것이다(Bähr, Hammond, Keil, K. Austel).

선지자 백 명을 … 굴에 숨기고. 사마리아 북서쪽 약 60 km 지점에 위치한 갈멜산(Mount Carmel) 주변에는 당시 약 2,000개의 석회굴이 있었다고 한다(Montgomery). 따라서 오바댜가 선지자들을 숨긴 곳도 이 지역 어느 곳일 것으로 추정된다. 사실 역사적으로도 갈멜산 일대는 피난자들의 은신처였는데 신약 시대에는 일명 ‘은자(隱者)의 고장’이라 불릴 정도였다.

가지고. 원래 ‘가지고’에 해당하는 원어 ‘라카흐’는 ‘취하다, 움켜 쥐다, 채어가다’ 등의 뜻이다. 따라서 이 동사는 대단히 역동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이는 이세벨의 마수가 시시각각 닥쳐오는 절박한 시점에서 재빠르게 선지자들을 빼돌리는 오바댜의 긴박한 움직임을 연상시켜 주는 단어이다.

 

18:5 물 근원. ‘근원’에 해당하는 원어 ‘메에’는 본래 ‘창자, 생식기’ 등을 뜻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무엇인가를 산출해 내는 내부의 근원을 가리킨다. 따라서 본 절의 ‘물 근원’은 ‘물이 흘러나오는 근원이 되는 곳’을 의미함을 알 수 있다. 즉 수원지를 가리킨다.

말과 노새를 살리리니. 극심한 가뭄과 기근 중에 아합의 관심이 이처럼 말과 노새 보호에 쏠려 있음은 주목할 만하다. 비록 혹자는 그것이 움직일 수 없는 우리 속의 짐승을 위한 불가피한 처사로 변호하지만(Hammond), 아합의 일차적 관심이 백성에 있지 않았음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이는 당시 아합의 권력 기반이 말과 노새가 상징하듯 군사력과 상업력에 있었지, 여호와로부터 위탁받은 백성들로부터의 신망(信望)에 있지 않았음을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18:6 아합은 홀로 이 길로 가고. 아합이 왕의 신분으로써 호위 군사나 수행원도 없이 홀로 탐색에 나섰다는 것은 이상하다. 그러므로 본 절에서 ‘홀로’(히, 레바드)란 말은 ‘따로, 별개로’의 뜻인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 한편 사막 지대의 군주나 족장이 일반적으로 그러하듯, 당시 극심한 가뭄 상황에서 아합 왕이 직접 수원지 탐색에 나선 일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Pulpit Commentary).

 

18:7 그가 알아보고. 오바댜와 옐리야가 이전부터 교분이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서로의 소문은 들어 알고 있었을 것이다. 특히 오바댜 편에서 볼 때 엘리야를 식별하기란 비교적 쉬웠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 항간에는 엘리야의 명성과 함께 그의 옷차림과 특이한 용모가 비교적 상세히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왕하 1:8).

엎드려 말하되 내 주 엘리아여.. 오바댜가 취한 이러한 태도와 언사(言辭)에서 그가 엘리야를 향해 품고 있는 존경심의 정도를 엿볼 수 있다. 물론 오바댜는 당대의 고관이고(3절) 엘리야는 일개 야인(野人)에 불과하다. 그러나 여호와 신앙가인 오바댜가 고군 분투하는 신앙의 전사(戰士) 엘리야에게 존경심을 품지 않았을리 없다. 더욱이 엘리야가 행하는 권능은 놀라운 것이며(17:13-24) 오바댜 역시 이를 잘 알고 있었음이 분명하다(12절). 따라서 오바댜는 지금 엘리야에게 하나님의 선지자에 대한 최대의 경의를 표하고 있다. 특히 여기서 ‘주’에 해당하는 ‘아도나이’는 ‘아돈’(‘주인’, ‘소유자’라는 뜻)의 강조형으로서 오직 인간과 만물의 소유주이자 지배자이신 하나님을 부를 때 사용하는 호칭이다. 그런데도 오바댜가 엘리야를 ‘내 주’라고 칭한 것은 그에 대한 존경심에서는 물론 이스라엘의 운명이 하나님의 사자(使者)인 엘리야의 손에 달려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18:8 엘리야가 여기 있다 하라. 원문에는 ‘엘리야가 여기 있다’는 말이 단지 ‘힌네 엘리야후’로 되어 있다. 이때 ‘힌네’는 주의를 환기시키는 감탄사로서 ‘보라!’와 같은 말이다. 그러므로 문자적으로 본 절은 ‘보라, 엘리야다!’란 단순하면서도 생생한 표현이다. 한편 본문의 내용으로 미루어 보아 당시 엘리야에게는 전국적인 수배령이 내려져 있었던 듯하다. 그런 시점임을 감안할 때 본 절은 대단한 박력의 정면 도전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우리와 성정(性情)이 같은 사람 엘리야가 이 같은 용기를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 아합을 만나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이미 주어졌기 때문임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된다(1절, 약 5:17).

 

18:9 무슨 죄를 범하였기에 … 넘겨. 여기서 ‘넘겨’로 번역된 ‘나탄’은 ‘주다’(give)는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러나 구약에서 약 2,000회 정도 사용되는 이 동사는 의미 또한 다양하고 광범위하다. 즉 이는 ‘만들다, 지불하다, 놓아 두다’ 등 번역상 다양한 형태와 의미를 띨 수 있다. 그러나 본 절은 ‘무슨 죄를 범하였기에’라는 문구가 이미 의미 파악의 열쇠로 주어져 있다. 즉 여기서 ‘넘겨’는 죄의 대가로 인한 응징, 형벌의 개념으로 사용된 것이다(8:32 등). 한편 오바댜가 아합 왕에게 엘리야 발견 사실을 보고하는 것이 곧 죽음과 동일시된 까닭은 10절 이하, 특히 12절에 나온다. 즉 오바댜는 자신이 엘리야를 찾았다고 아합에게 알린 후에 만약 엘리야가 사라진다면 자신의 생명이 위태로울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18:10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이는 앞서 사르밧 과부의 맹세와 동일한 표현이다(17:12). 그러나 이는 당시 아직 여호와 신앙에로 개종하지 아니하였던 사르밧 과부의 말과는 의미상 차이가 있다. 왜냐하면 오바댜는 분명 여호와를 경외하는 인물이고 여호와 역시 오바댜의 하나님이시지만 여기서는 보다 특별한 의미에서 하나님을 가리켜 ‘엘리야의 하나님’으로 호칭하고 있기 때문이다(왕하 2:14).

당신을 … 나라가 없었는데. 이 말은 일종의 과장법을 사용한 표현이다. 비록 아합 통치 하의 이스라엘이 강력했다지만, 당대 근동의 패권을 모두 가진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가 모든 나라와 족속을 속속들이 뒤졌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16:29 주석 참조. 여하튼 본 절은 당시 아합이 엘리야를 체포하려고 얼마나 혈안이 되어 있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즉 아합은 가능한 범위 내에서는 힘껏 엘리야를 체포하려고 혈안이 되었던 것이다. 아마도 그 이유는 아합이 당시 가뭄의 원인을 엘리야의 저주(17:1) 탓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Hammond, 17절). 그러므로 그 저주를 해소하려는 주술적 조치와 적개심 때문에 아합은 그토록 열심히 엘리야를 수배한 것이다.

 

18:11 네 주. 여기서 ‘주’라는 말은 원어 ‘아돈’으로 일반적인 군주(君主)나 주인을 가리키는 단어이다. 7절 주석 참조. 본 절에서는 오바댜가 섬기던 당시의 이스라엘 왕 아합(B.C. 874-853)을 가리킨다.

 

18:12 여호와의 영이 … 이끌어 가시니라. 오바댜가 ‘여호와의 영’, 즉 하나님께서 갑작스럽고도 신비스러운 방법으로 엘리야를 다른 곳으로 이동시키지 않을까 염려하고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오바댜의 염려는 당시 이스라엘인들이 하나님을 초자연적인 능력의 소유자로 믿었음을 시사해 준다. 한편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신약 시대에도 하나님의 영(靈)이 이와 같은 갑작스럽고 신비스러운 방법으로 빌립(Philip)을 옮긴 사실을 볼 수 있다(행 8:39).

어려서부터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라. 여기서 ‘어리다’는 말의 기본형인 명사 ‘나아르’는 이유기(離乳期)에서 사춘기를 지난 청소년까지를 모두 포함하는 말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성경에서 이제 겨우 젖 뗀 유아 모세와 다 자란 압살롬을 똑같이 ‘나아르’로 부르는 경우를 발견할 수 있다(출 2:6, 삼하 12:16, 14:21, 18:5). 그러므로 ‘나아르’는 한 인간의 개체적인 틀이 거의 완성, 고정되는 중요한 시기를 지칭한다 할 수 있다. 그런데 오바댜는 바로 그처럼 중요한 시기에 여호와를 향한 신앙을 훈련할 수 있었던 사람이다. 따라서 그의 신앙이 가진 안정성, 확고성을 가히 짐작해볼 수 있다.

 

18:13 내가 … 먹인 일이 내 주에게 들리지 아니하였나이까. 오바댜는 자신의 공로를 자랑하려고 이와 같은 말을 하는게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바댜가 이와 같이 말한 것은 단지 자신이 엘리야와 한 편에 속하는 사람임을 밝히려는 것이다. 또한 이는 엘리야에 대한 자신의 신뢰를 여실히 드러내기 위함이다. 즉 오바댜는 엘리야가 여호와의 계시로 말미암아 그러한 비밀스러운 일조차도 알고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18:14 이제 당신의 말씀이 … 나를 죽이리이다. 이러한 말 가운데서 우리는 오바댜의 당혹감과 불안감을 느낄 수 있다. 즉 당시 오바댜는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아합과 만나 죽게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12). 그리고 그 사실은 자신에게는 곧 죽음을 의미한다고 여겼다. 그러나 오바댜의 그 같은 염려는 아직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을 모르고 있는 상태에서 빚어진 기우(杞憂)였다(15절, Matthew Henry’s Commentary).

 

18:15 섬기는. 이에 해당하는 원어 ‘아마드’는 문자적으로 ‘ … 앞에 서다’(stand before)의 뜻이다. 그런데 본 절에서처럼 ‘여호와 앞에 서다’와 같이 쓰이는 경우, 신학적으로 (1) 중보 기도를 위해 선다는 의미와 (2) 헌신과 충성의 표시로 선다는 두 가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런데 본 절에서는 이 중 (2)의 의미를 채택하여 ‘섬기다’로 번역한 것이다. 사실 하나님께 충성스러운 삶이란 자신이 언제나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의식(意識)에 기초한 것이다.

만군의 여호와. 여기서 ‘만군’(히, 체바오트)이란 곧 ‘군대들’(armies)이란 말이다. 이처럼 하나님을 ‘만군의 여호와’로 호칭하는 경우는 구약에서 261회나 된다. 본래 이 명칭은 이스라엘의 군대를 지휘하시는 하나님(삼상 17:45)을 뜻하였으나 후에는 천군 천사를 다스리는 하나님(22:19)을 뜻하는 말로 발전되었다. 따라서 결과적으로 이 말은 강한 군사적 의미와 함께 온 세계에 대한 여호와의 통치권을 의미한다. 삼상 1:3 주석 참조. 한편 ‘만군의 여호와’란 호칭은 열왕기에서는 처음으로 본 절에 등장하였다. 이 호칭은 이사야, 예레미야 등 예언서에 많이 등장한다(사 1:9, 2:12, 8:13, 렘 6:6, 20:12, 32:14).

오늘. 학자들 간에는 여기서의 ‘오늘’(히, 하욤)이 꼭 문자대로의 오늘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다(Bähr). 물론 ‘하욤’을 문맥과 함께 ‘지금’ 혹은 ‘이번에는’과 같이 풀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아합을 꼭 만날 것이라는 엘리야의 결의에 찬 표현으로서의 본 절은 그대로 ‘오늘’의 의미로 두는 것이 훨씬 낫다. 그러기에 대부분의 영역본들도 이를 ‘오늘’(today)로 번역하고 있다(KJV, RSV, Living Bible 등).

보이리라. 1절 주석 참조.

 

18:16 오바댜가 가서 아합을 만나. 여기서 ‘만나다’에 해당하는 원어 ‘카라’는 의도적인 만남을 말한다.

말하매 아합이 … 만나러 가다가. 아합이 중대사인 ‘꼴 구하는 일’(5절)을 간단히 포기하고 이처럼 즉각 엘리야를 만나려 한 것을 보면, 엘리야의 비중이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 비중이란 실상 아합이 엘리야를 어떤 식으로든 가뭄의 원인으로 결부시켜 생각한 데서 비롯된다. 10절 주석 참조. 그런 점은 다음 절에서 아합이 엘리야를 가리켜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로 부른데서도 나타난다. 그러므로 엘리야 출현 소식을 접한 아합은 이제야 가뭄의 원인을 해소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을 것이다(Hammond). 그렇다면 그 것보다 더 서두를 일이 어디 있겠는가!

 

18:17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 ‘괴롭게 하다’에 해당하는 원어 ‘아카르’는 대개 사회에 부정적 영향을 끼치는 행동을 가리키는 말이다. 즉 아합은 지금 엘리야를 나라 전체에 해악(害惡)을 끼치는 국적(國賊)으로 몰아 붙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말은 오로지 아합 편에서의 논리만을 반영한 것이다. 우상 숭배 장려 정책을 펴 나가는 아합 왕조(16:29-33)에 대한 엘리야의 평소 행동은 국정을 어지럽히는 훼방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을 심각한 위기로 몰아넣은 가뭄은 그의 저주(아합이 보기엔) 이후에 시작되었다(17:1). 따라서 어느 모로 봐도 엘리야는 아합에게 불길하고 눈에 가시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그러나 사실 아합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의식할 수 있었다면, 그래서 자신의 행위를 자기 바깥의 척도(즉 하나님)로 비쳐 볼 수 있었다면, 문책의 대상은 분명히 달라졌을 것이다. 즉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라고 비난받을 자는 엘리야가 아닌 바로 아합 자신인 것이다(18절).

 

18:18 당신과 당신의 아버지의 집이 괴롭게 하였으니. 엘리야는 가뭄의 책임을 전가시키려는 아합의 비난에 대하여 이처럼 똑같이 원어 ‘아카르’ 동사를 사용하여 아합을 힐난한다. 17절 주석 참조. 즉 가뭄이라는 국가적 재난에 책임이 있는 편은 자신이 아닌 바로 아합과 그의 왕조라는 반박이다. 여기서 ‘당신의 아버지의 집’은 곧 오므리(아합의 아버지) 왕조를 가리킨다. 사실 아합 가문은 아합의 부친 오므리(B.C. 885-874)가 왕조를 연 이래 더욱 가증한 우상 숭배 정책을 시행함으로써 하나님의 진노를 격발시켰다(16:25, 26, 30-33). 따라서 엘리야와 같은 선지자가 민족사의 정도(正道)를 그르치는 오므리 왕조에 대하여 호평(好評)할리 만무하다. 본 절에서 엘리야가 단지 아합 개인을 비난하는 데 그치지 않고 ‘당신의 아버지의 집’까지 함께 공박하고 있음도 그 같은 이유에서이다(Matthew Henry).

당신이 바알들을 따랐음이라. 물론 오므리 왕조 이전의 왕 중에도 금송아지 숭배 등으로 하나님을 진노케 한 여로보암(Jeroboam, B.C. 930-910) 같은 악왕(惡王)이 있었다(12:25-33). 그러나 아합의 가증한 죄악은 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스라엘에 본격적으로 바알(Baal) 숭배를 도입했다는 데에 있다. 이와 관련해서는 16:31, 32 주석을 참조하라.

 

18:19 그런즉. 원문은 ‘웨 잇타’(and now)이다. 그 뉘앙스는 이렇다. 지금 서로를 재난의 원인으로 비난하니(17, 18절) ‘이제 기필코’(앗타, now) 시비를 가리도록 하자! 그런즉 대단한 박력의 도전이 행간(行間)에 넘쳐 흐르고 있다.

이세벨의 상에서 먹는. ‘상에서 먹는다’는 말은 본문의 문맥상 ‘공급과 지원을 받는다’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Pulipt Commentary). 왜냐하면 당시 왕비의 식탁에서 850명이나 되는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이 함께 식사했다고 생각하기 어렵기 때문다. 사실 ‘상’(히, 슐한)은 그 식탁에 둘러 앉은 자들 사이의 ‘교제’를 은유하는, 보다 중요한 용법을 갖고 있다(시 69:22, 128:3: 단 11:27). 한편 본 절로 미루어 이세벨은 마치 바알과 아세라 선교사처럼 이스라엘에 바알 및 아세라 숭배 의식을 위해 인력을 양성했음을 알 수 있다.

갈멜 산. ‘갈멜’은 ‘정원’ 또는 ‘과수원’을 의미한다. 이 산은 지중해 쪽에 위치한 갈멜 산맥(Mountains Carmel)의 일부로서 각종 식물이 무성하고 또한 석회 동굴이 많은 곳이다. 4절 주석 참조. 이 갈멜 산이 여호와 종교와 바알 종교의 대결 장소로 선택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갈멜 산은 엘리야, 엘리사의 경우에서 보듯 여호와 신앙인들에게도 특별한 장소였지만(왕하 2:25, 4:25), 동시에 바알에게 바쳐진 성소이기도 하였다. (2) 갈멜 산은 이스라엘과 바알 종교의 본산지인 두로 사이의 중간 지점에 위치하였다.

 

18:20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에게로 … 모으니라. 여기서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이란 이전의 세겜 총회(12:1)에 상응하는 말이다(Montgomery). 즉 이스라엘 각 지파의 대표자 집단을 의미하는 것이다. 12:1 주석 참조. 그런데 21절 이하의 내용으로 보아 갈멜 산에는 이 대표자 집단들이 집합했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본 절은 당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이 전국 각지에 퍼져 활동하였음을 암시한다. 왜냐하면 아합이 이들을 집합시키기 위해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에게 기별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로 미루어 보건대 이 무렵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은 이전 여호와의 제사장과 레위인들의 역할을 모두 장악했던 것으로 보인다.

 

18:21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원문에서 ‘둘 사이에서’는 즉 ‘두 의견(opinion)으로(혹은 사이에서)’이다. 그리고 ‘머뭇머뭇 하려느냐’는 ‘절뚝거리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를 문자적으로 옮기면 ‘어느 때까지 두 의견으로 나뉘어 절뚝거리려느냐’는 뜻이 된다. 이는 곧 단순히 당시 백성들의 미온적인 태도를 지적하기 보다는 분열상을 지적, 그 해소를 촉구하는 말이다. 이로 보아 당시 이스라엘은 여호와 신앙과 바알 숭배를 혼합하려는 세력과 순수 여호와 신앙 세력으로 나뉘어져 있었을 것이다(Bähr, Keil). 그런데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박해했던 데서도 알 수 있듯, 그 두 신앙은 양립할 수 없는 것이었다(4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백성들은 왕실의 강압적 우상 숭배 정책에 눌린 나머지, 조상 대대로 이어져 왔던 전통적인 여호와 신앙을 고수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하여 그것을 거부하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상태에 있었다. 그리하여 결국 그들은 하나님과 바알을 겸하여 섬기는 미지근한 신앙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노를 격발(激發)시켰다(마 6:24, 계 3:16).

백성이 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는지라. 이 장면을 수 24:16 이하와 비교해 보면 아합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 상태를 알 수 있다. 즉 여호수아 당시 ‘하나님과 다른 신 중 과연 누구를 섬길 것인지 결정하라’는 요구에 그 시대의 백성들은 즉각 ‘다른 신을 섬기다니 말이 되는가, 여호와가 우리의 하나님이시다’고 응답하였다. 그러나 아합 시대의 백성들은 묵묵부답이었다. 그들은 아직껏 하나님과 바알을 겸하여 섬기려는 어정쩡한 상태에 있었던 것이다(마 6:24).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항상 차든지 뜨겁든지 하는 것이다(계 3:15).

 

18:22 나만 홀로 남았으나. 이 말은 당시 여호와의 선지자가 정말 단 한 명만 남았음을 말하고자 함인가? 그렇지 않다. 이는 다만 지금 여호와 선지자로서 활동하는 자는 엘리야 자신 홀로이며, 이제 그는 단신으로 다수의 바알 선지자와 맞서게 되었다는 극적인 대조에 강조점이 있을 뿐이다(Hammond, Montgomery). 그리고 이렇게 이해해야만 앞서 오바댜가 숨긴 100명의 선지자(4절)가 그동안 죽임을 당했으리라는 불필요한 추측(Thenius)을 하지 않게 된다.

바알의 선지자는 사백오십 명이로다. 이 부분이 독자들을 당혹시키는 까닭은 19절의 ‘바알의 선지자 사백오십 명과 아세라의 선지자 사백 명’과 일견 모순되어 보이는 탓이다. 즉 19절에는 이교(異敎) 선지자들의 총수가 850인으로 언급되어 있는데 본 절에는 오직 450인만 언급되어 있는 탓에 혼란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다. 더구나 25절과 40절에서도 오직 ‘바알의 선지자’만 언급되어 있다. 그런데 이에 관한 주석가들의 의견을 종합해 보면 이는 다음과 같이 이해, 정리될 수 있다. (1) 아세라 선지자 400명은 갈멜 산의 대결에 참여하지 않았다(25절). 따라서 그들은 학살을 당하지 않았다(40절). (2)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바알의 선지자와 아세라의 선지자가 엄밀히 구분되는 것은 아니다. 즉 그들은 모두 ‘바알의 선지자’로 통칭(通稱)될 수 있다. (3) 그렇다면 아합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이세벨이 일부(아세라의 제사장?)를 보내지 않은 탓에 갈멜 산 대결에는 450인의 바알 선지자만이 참석하였을 것이다(Bähr, Keil 등).

 

18:23 엘리야는 여호와와 바알 중 어느 신이 참신인지를 결정하기 위해 희생 번제(犧牲燔祭) 방법을 제시했는데, 이는 백성들과 바알 선지자들 모두에게 합리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왜냐하면 희생 번제는 이스라엘과 이방 지역을 막론하고 고대 팔레스타인에서 예배의 기본적인 형식이었기 때문이다(Lange).

각을 떠서.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동사 ‘나타흐’는 ‘잘라서 조각 조각으로 나누다’(cut in pieces)는 뜻이다. 이는 곧 희생(犧牲) 제사에 쓰일 제물을 취급하는 방식을 말한다(출 29:17, 레 1:6, 12, 삿 20:6).

 

18:24 이름을 부르라.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이름은 단순히 개인의 호칭이 아니라 그 인격의 본질과 특성을 대변하는 것이다. 즉 이름과 존재는 불가 분리한 관계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상대방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곧 그 존재의 응답을 기대하는 행위이다. 그리고 이때 그 이름의 존재가 실존(實存)한다면 필연코 응답이 있을 것이다. 본 절 역시 이와 같은 맥락에서 바알이 허구의 존재가 아니라면, 그 이름을 부르는 요청에 응답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밝히리라는 사고 방식을 가지고 있다.

불로 응답하는 신. 비단 이스라엘 뿐 아니라 고대 근동 세계의 희생제사는 제물을 불로 사르는데 초점이 있다. 즉 신이 불태워진 제물을 흠향할 때 비로소 인간의 성의가 가납된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는 곧 신이 있어서 차려진 제물을 받아들인다면 그는 불로 응답하리라는 생각에서 비롯된 믿음이다. 그런데 바알은 자연력을 지배하는 신이자 태양과 불의 신이었다. 그러므로 불로 응답하는 일은, 바알이 참신이라면, 그의 전문 분야와도 같다. 그런데도 바알은 끝내 침묵하고 말았으니(25-29절) 그 허구성이 여실히 드러나고 만 것이다. 한편 이처럼 그 신의 가장 핵심 요소를 공략하여 허구성을 드러내는 방식은 일찍이 모세가 10가지 재앙으로써 애굽의 거짓 신들을 무색하게 한 것과 비견된다(출 7:4-12:34).

 

18:25 너희는 많으니 먼저 … 부르라. 본 절은 결과적으로 엘리야의 승리(30-40절)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요소들을 담고 있다. 즉 엘리야는 바알 선지자들에게 우선권을 줌으로써, 하나님께 대한 신앙으로 말미암는 확고한 자신감을 드러내어 보였다. 다시 말해 우선권을 가진 바알 선지자들이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였으나, 결국 실패하였다는 사실은 그들에게 큰 굴욕을 안겨주었던 반면(26-29절) 엘리야의 승리를 더욱 값지고 위대한 것으로 부각시켜주는 역할을 하여 준 것이다.

 

18:26 아침부터 낮까지. 여기서 ‘아침’(히, 보케르)은 ‘이른 아침’, 즉 동이 트고난 직 후를 의미한다. 그런데 바알 선지자들이 이렇게 일찍부터 회합을 가진 이유는 무더운 팔레스타인의 기후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다음으로 ‘낮’(히, 초하르)은 다음 절에서 ‘정오’로 번역된 바로 그 단어이다. 그러므로 바알 선지자들은 이미 5-6시간 정도를 바알의 이름을 부르며 뛰논 것이다.

응답하소서. 이에 해당하는 원어 ‘아나’는 본래 ‘보다, 향하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는 자신들을 외면치 말고 사랑과 관심을 갖고 ‘쳐다 봐 달라’는 간절한 염원(念願)의 말이었다.

뛰놀더라. 이에 해당하는 원어 ‘파사흐’는 본래 ‘절뚝거리다’는 뜻으로 이미 21절에 나온 단어이다. 21절 주석 참조. 그런데 여기서 이 단어가 의미하는 바가 정확히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에 다음과 같은 의견으로 나뉘어 있다. (1) 당시 바알 선지자들이 추었던 광란(狂亂)의 춤(28절)을 비꼬아 표현한 것이다(Pulit Commentary). (2) 당시 바알 선지자들이 추었던 춤의 형태가 실제로 절뚝거리는 동작으로 이루어져 있었음을 지적하는 것이다(Davis). 이상의 두 견해 중 어느 쪽을 취하여도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엘리야가 계속적으로 바알 선지자들을 조롱한 것으로 보아(27절) 첫 번째 견해가 보다 타당하다고 여길 수 있다. 한편 이스라엘 역사상 춤은 자주 예배 의식의 일부로 포함되었다. 즉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넜을 때나 여호와의 절기에 실로의 처녀들이 포도밭에서 춤춘 것, 법궤 앞에서 춤을 춘 다윗 등과 같은 예를 찾아 볼 수 있다(출 15:20, 삿 21:16-24, 삼상 18:6, 삼하 6:14). 그러나 이러한 춤도 참된 찬양의 대상자에 대한 진솔한 경외의 표현이 아니라면 본 절에서 보듯 그것은 광란의 몸짓에 불과하다. 출 15:20 주석 참조.

 

18:27 그는 신인즉. 바알 선지자들이 아침부터 오정에 이르기까지 간절히 바알의 이름을 불렀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자 엘리야는 바알 우상의 허구성을 유한한 인간에 빗대어 조롱조로 폭로하고 있다.

묵상하고 있는지. 바알 선지자들이 그토록 발악하고 있는데(26, 28절) 바알은 물러 앉아 묵상에 잠겨 있다면 그것처럼 웃기는 장면은 없을 것이다.

잠깐 나갔는지. ‘나가다’에 해당하는 원어 ‘수그’는 ‘옮기다, 이동하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본 절은 ‘잠깐 자리를 옮겼는지’의 뜻이다. 이는 ‘좀 쉬려고 물러갔는지’ 정도의 뉘앙스를 지닌 말이다(Rashi). 하지만 신이 쉬어야 한다는 것은 우스운 말이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신다(사 40:28).

길을 행하는지. 여기서 ‘길’(히, 데레크)은 ‘여행’(대개 수 일이 걸리는)을 의미한다. 그런데 신이 여행을 떠나서 자신의 경배자들의 청원을 듣지 못한다는 것은 곧 그 유한성(有限性)을 알려 준다. 그러나 이와 달리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무소 부재(無所不在)하신 분이시다(시 139:7-12).

잠이 들어서 깨워야 할 것인지. 팔레스타인 지방에서는 무더위로 인해 한낮에 낮잠을 자는 습관이 있다. 엘리야의 조롱은 바로 그러한 습관을 염두에 둔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신다(시 121:3, 4).

 

18:28 규례를 따라 … 상하게 하더라. 본 절에서 처럼 피가 흐르기까지 자해하는 습성은 피가 신비한 효능으로 신을 감동시킨다는 이교적 관념 때문이다(Plutarch). 즉 당시 이교도들은 자해와 고행을 신에 이르는 길을 여는 일종의 공로로 간주하였다. 한편 본 절은 바알 선지자들의 한낮, 팔레스타인의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의 광란을 묘사함으로써 마지막 안간 힘을 써서 바알에게 호소하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준다. 그러나 성경은 그러한 자해 행위는 물론이거니와 지나친 금욕주의적 태도 또한 자의적(自意的) 숭배의 소산으로 간주하여 참된 경건에는 아무런 유익도 주지 못하는 것이라 하였다(골 2:20-23).

 

18:29 미친 듯이 떠들어. 이에 해당하는 원어 ‘네부아’의 문자적 뜻은 ‘미친듯이 예언하다’이다. 이 예언이 참된 예언이 아님은 물론이다. 사실 이러한 예언은 광란에 찬 자해 행위자들이 한숨과 신음을 토로하는 현상에 불과하다(Movers). 그리고 이러한 예언이란 대개 비인격적인 외적 조작, 즉 주문(呪文)으로 어떤 영향을 끼치려는 주술적 성격이 짙은 것이다. 따라서 본 절의 이 말은 일종의 주문, 신비한 웅얼거림인 것으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저녁 소제 드릴 때까지. 요세푸스의 기록에 따르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저녁 소제를 드리던 시간은 오늘날의 오후 3시 쯤(유대력의 9시)에 해당한다고 한다(A. Edersheim, Pulit Commentary). 이때 신약 당시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간 시간과도 일치한다(행 3:1). 한편 ‘소제’(히, 민하)란 매일 아침 저녁으로 드리는, 비교적 간단한 제사이다. 이 제사에는 희생제물이 아닌, 떡과 과자가 바쳐졌다(출 29:28-41, 민 28:3-8). 이 소제의 의미는 백성들이 자신의 일상적이고 전체적인 삶을 하나님께 위탁한다는 뜻이다.

아무 소리도 … 돌아보는 자가 아무도 없더라. 이 부분에는 ‘전혀 없다’는 뜻인 ‘아인’이 세 번이나 거듭된다. 이 단어는 26절에도 두 번이나 나오는데 전체적으로 점층법적 강조의 효과를 준다.

 

18:30 내게로 가까이 오라. 엘리야가 이처럼 백성들을 가까이 오라고 부른 이유는 다음과 같이 추정된다. (1) 이제까지 바알 제단 근처에 모여 있던 백성들을 여호와의 제단 주위로 불러 모으기 위함이다. (2) 이제부터 시도하려는 자신의 모든 행위(32-39절)에 어떠한 거짓도 없음을 명백히 증거하기 위함이다(Hammond).

무너진 여호와의 제단을 수축하되. ‘수축하다’에 해당하는 원어 ‘예라페’는 ‘고치다’는 뜻이다. 즉 이는 전혀 새로운 것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부너진 것을 고쳐 세우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갈멜 산상에는 일찍이 여호와의 제단이 서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본서는 아합의 아내 이세벨이 여호와의 제단을 헐고 선지자들을 죽이는 등 대대적인 탄압을 가했음을 증거해 준다(4절, 19:10). 따라서 갈멜 산의 여호와 제단도 이때 헐렸다고 봄이 타당하다.

 

18:31 돌 열두 개를 취하니. 여기서 엘리야의 행동은 약속의 땅 입성시의 여호수아의 행동과 비슷하게 보인다(수 4:9). 그런데 북 왕국의 선지자로 활동하였던 엘리야가 이처럼 ‘열두 개의 돌’을 취하여 돌단을 쌓은 것은 매우 의미 심장하다. 비록 하나님의 징계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분단되었지만(12:24) 그들 모두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었음을 엘리야는 바로 깨닫고 있었다. 한편 왕국 분열 이래로 멸망에 이르기까지 두 왕국은 한번도 재통일을 이룩하지 못했다. 더욱이 앗시라아에 포로로 잡혀간 북 이스라엘 백성들 중 대부분은 영원히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지 못한채 이스라엘 집안의 ‘잊혀진 열 지파’로 사라져갔다. 하지만 ‘열두 지파 온 이스라엘’을 향하신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은 ‘열두 사도’의 터전 위에 건축된 영적 이스라엘 곧 교회를 통해 성취되었다(창 35:9-12, 삼하 7:16, 계 7:4-8).

이 야곱은 … 하신 자더라. 이 부분에서는 이스라엘을 각성케 하는 여러 요소들을 찾아 볼 수 있다. 야곱, 이스라엘, 여호와가 바로 그것이다. 우선 ‘야곱’(Jacob)에서 이스라엘 열두 지파는 한 조상에서 비롯된 혈통적 단일성을 가진 존재들임이 부각된다(창 35:22-26). 그리고 그 야곱이 ‘이스라엘’(곧 민족의 이름이 된)로 불린 것(창 32:24-28)에서는 이스라엘 민족이 여호와께로부터 소명을 받은 백성임이 강조된다. 즉 이스라엘 민족은 소명의 주체이신 ‘여호와’를 섬길 때에만 민족적 정기를 흐리지 않는 민족이 될 수 있는 것이다(출 19:5, 6).

 

18:32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원문 ‘브쉠 여호와’는 ‘여호와의 이름으로’(in the name of Jehovah)라는 뜻이다. 즉 ‘의지하여’는 번역시 추가된 말이다. 그런데 본서 기자가 굳이 ‘여호와의 이름’과 관련하여 엘리야의 제단 쌓는 행위를 설명하는 이유는, 그 제단이 다른 누구에게도 아닌 바로 여호와께만 드려지기 위한 것임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즉 이름이란 어떤 사물이나 사람을 다른 것들과 구별해주는 기능을 한다. 24절 주석 참조. 따라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쌓은 제단은 다른 어떤 것과도 동일시할 수 없는 독특한 것이 된다. 아무튼 이상과 같은 사실에 의거할 때 본 절은 ‘여호와께만 봉헌하기 위해’, 혹은 ‘여호와만을 기념하기 위한’이라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가능하다.

곡식 종자 두 세아. ‘세아’(Seah, 창 18:6에는 ‘스아’로 번역되어 있음)는 구약시대 당시 고체의 부피를 재는 단위이다. 1세아는 1/3 에바(Ephah)로서 약 7.6 리터이다. 그러므로 ‘두 세아’는 약 15리터 정도의 양임을 알 수 있다.

둘 만한. 이 말의 뜻이 정확히 무엇을 말하는지 알기 어렵다. 즉 두 세아 정도의 곡식을 부어도 될 만큼이라는 뜻인지, 두 세아의 곡식 종자를 심어도 될 만큼이라는 뜻인지 분명치 않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전자, 즉 용량을 의미하는 쪽으로 기울어 있다(Bähr, Hammond 등).

 

18:33 송아지의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고. 레 1:3-9에는 소(혹은 송아지)를 잡아 번제로 드리는 것에 관하여 기록되어 있다. 즉 그 때에는 제단에 장작을 펴 놓고 그 위에 각을 뜬 제물을 벌여 놓아야 한다. 그러므로 지금 엘리야는 그 같은 율법의 규정을 따라 행하고 있는 것이다.

통 넷에 물을 채워다가 … 부으라. 여기서는 ‘통’(히, 카드)의 용량을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이는 당시 팔레스타인 여인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하던 물 항아리(17:12, 14, 16, 창 24:43, 45, 삿 7:16, 19, 20)를 가리키기 때문이다(Pulpit Commentary). 그러나 다음 절까지 살펴 보면, 번제물과 나무 위에는 무려 열두 통의 물이 부어진 셈이 된다. 그런데 율법 규정에 있지도 않은 이러한 행위의 목적은 명확하다. 즉 엘리야는 이로써 거짓이 전혀 없다는 인상을 명백히 백성들에게 주려 한 것이다. 30절 주석 참조. 또한 이처럼 온통 물로 적셔진 제물에 불을 붙이는 일은 오직 하나님의 초자연적 능력으로써만 가능함을 주지시키려 한 것이다(38절). 한편 교부들의 증언에 따르면 고대의 이교 제사장들 중에는 제단 밑에 빈 공간을 판 뒤 그 속에서 불을 붙이고서 이를 이적이라고 속이는 자들이 종종 있었다고 한다(Pulit Commentary, Keil & Delitzsch Commentary).

 

18:34 세 번째로 그리하라. 그러므로 물붓기는 도합 3회 실시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구약에서 일반적으로 동일한 행동이 반복되는 것은 최종적이고 결론적이라는 의미를 갖게 된다. 예를 들면 레아는 3명의 아들을 낳자 비로소 야곱의 완전한 아내가 되었다고 생각한다(창 29:34). 또한 전 장(前章)에서 엘리야가 죽은 아이의 몸 위에 자기 몸을 펴서 엎드린 것도 3회이다. 그러므로 백성들의 의혹을 없애기 위한 물 붓기는 3회로 그 의미롤 충분히 달성한 것이다. 한편 이와 관련 혹자는 4통씩 3회의 물 붓기로 도합 열두 통의 물을 사용한 것도 이스라엘 12지파를 상징하기 위한 의도적인 작업이라고 말한다(Bähr). 31절 주석 참조. 그런데 극심한 가뭄 중에(17:1, 7) 이 열두 통의 물은 어디서 길어온 것일까? 혹자는 이를 지중해에서 길어 온 바닷물로 추측하고(Mattew Henry), 갈멜 산 옆을 통과하는 기손 시네(Kishon Brook)에서 길어 왔으리라는 추측도 있다. 기손은 수많은 지류에서 물을 공급받아 일 년 내내 물이 마르지 않는 물줄기라고도 한다(Beek).

 

18:35 제단으로 두루 흐르고. 원문에는 ‘제단으로’란 말에 ‘주위, 주변’을 의미하는 원어 ‘사비브’가 부기(附記)되어 있다. 따라서 이는 ‘제단 주위에(물이) 두루 흐르다’는 뜻이다. 즉 많은 물을 들이부은 결과(33, 34절) 돌로 쌓은 제단(31, 32절)이 온통 물이 줄줄 흐르는 상태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형편에서는 이교 제사장들이 제단 밑에 한 사람을 숨겨 불 붙이는 것과 같은 속임수는 불가능하다(Stanley).

 

18:36 저녁 소제 드릴 때에. 이는 이미 앞에서 언급된 말이다. 29절 주석 참조. 그런데 29절에서의 시점이 본 절에 중복되는 것에 독자들은 다소 어리둥절할 것이다. 그러나 30절 이하 지금까지의 엘리야의 모든 행동이 바알 선지자들의 광란이 계속되는 중에 이루어졌다고 본다면 별 무리가 없다.

아브라함과 … 이스라엘의 하나님.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은 이스라엘 민족의 뿌리라 할 조상들이다. 그런데 그 조상들의 하나님으로서 여호와를 각별히 호칭하는 이유가 의미 심장하다. 즉 여호와는 그 조상들에게 하나님으로 자신을 선포하셨다(출 3:6). 그 결과 여호와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고 그들은 여호와의 백성이 되었다. 이러한 독특한 계약 관계는 이스라엘이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자손이라고 믿는 한 파기(破棄)될 수 없다. 즉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아닌 무엇이 되지 않는 한 여전히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여호와 한 분 뿐이시다. 이 점을 강조하기 위해 엘리야는 본 절에서 야곱의 이름조차 훗날 이스라엘 민족의 이름이 된 ‘이스라엘’로 호칭하고 있다. 31절 주석 참조.

주께서 … 알게 하옵소서. 엘리야의 본 기도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요지로 구성되어 있다. 즉 (1) 여호와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는 고백, (2) 엘리야 자신은 단지 하나님의 종이라는 고백, (3) 엘리야 자신의 모든 행위는 오직 주의 말씀대로 행하는 것이라는 고백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요소들은 모두 하나님의 영광만을 드러내는 것이라는 특징을 가진다. 사실 엄청난 이적이란 이적 자체와 그것을 행하는 자가 크게 부각될 위험이 있다. 그러나 엘리야는 애초에 이적도, 이적을 행하는 자신도 단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는 도구로 제한하고 있다. 이러한 겸손과 공손함은 그가 본 절에서 사용한 ‘종’(히, 에베드)이라는 단어 속에 잘 표현되어 있다. 왜냐하면 원래 ‘에베드’의 기본적인 의미는 ‘노예’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 절은 하나님의 영광을 전면에 내세우고 자신은 겸손히 옆으로 비켜 선 엘리야의 참된 선지자적 모습을 보여준다(Mattew Hanry).

 

18:37 여호와여 … 내게 응답하옵소서. ‘응답하옵소서’는 26절에서 바알 선지자들이 사용한 것과 같은 히브리어 ‘아나’이다. 그런데 본 절은 ‘아나’가 두 번 반복되어 기도의 간절함을 보여준다. 사실 바알 신지자들의 광란의 기도(26-29절)에 비하면 엘리야의 기도는 매우 짧다. 그러나 그 간명(簡明)한 기도 속에는 진실되고 순전한 정열이 들어 있다. 하나님은 말을 많이 해야 들으시는 분이 아니시다(마 6:7). 마치 사랑하는 자식에게 지극한 관심을 가진 어버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짧은 한 마디의 말도 놓치지 않으신다. 그러나 그 한 마디에는 진심이 들어있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본 절의 엘리야의 기도는 중언부언하지 않고 하나님께 꼭 아뢸 것만 진실하게 구한 기도이다.

되돌이키심. 이에 해당하는 원어 ‘사바브’는 마음이나 자세의 변화를 뜻한다. 그 중에서도 특히 이는 하나님 앞에서 갖게 된 변화의 상태를 가리키는데 자주 쓰인다(대하 29:6). 본 절에서도 역시 이 단어는 은총의 회복, 즉 백성들의 회개를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알게. 이에 해당하는 원어 ‘야다’는 지식적으로 아는 것 이상의 보다 폭넓은 뜻을 함축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참신이든 우상이든 신과 관련될 때는 ‘관계’에 역점이 주어지는 말이다(신 13:3, 삼상 2:12, 렘 4:22). 따라서 본 절에서 이 말은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정상 관계를 회복시켜 달라는 청원으로 이해할 수 있다.

 

18:38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대부분의 학자들은 여기서의 ‘여호와의 불’이란 ‘번개’와는 다른 초자연적인 불이었을 것으로 추측한다(Lange, Keil & Delitzsch, H. Austel). 한편 구약시대 당시 하나님께서는 대개 다음과 같은 경우에 하늘로부터 초자연적인 불을 내리셨다. (1) 당신의 언약을 보증하실 때(창 15:17), (2) 하나님께서 친히 나타나실 때(출 3:2), (3) 하나님께서 당신의 능력을 증거하실 때(출 9:24), (4) 인간의 제사를 받으실 때(레 9:24) 등이다.

번제물과 … 흙을 태우고. 여호와의 불에 의해 태워진 것은 번제물 뿐 아니라 이처럼 나무, 돌, 흙까지였다. 이러한 사실은 다음과 같은 점을 강조해 준다. (1) 여호와의 불이 얼마나 강렬했었는지를 보여준다. (2) 동시에 거기애는 어떠한 거짓의 여지도 없었음을 독자들에게 납득시킨다. 사실 제단 밑에 사람을 숨겨 불을 붙이는 거짓으로서는 도저히 이만한 화력(火力)을 낼 수 없었을 것이다. 33절 주석 참조.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 여기서 ‘핥은지라’(히, 라하크)는 불길이 혀처럼 널름거리며 도랑물을 증발시키는 장면을 잘 표현해 준다.

 

18:39 본 절에는 ‘여호와의 불’의 이적을 접한 당시 백성들의 경악과 두려움이 어떠했는지 엿볼 수 있는 요소가 두 가지 있는데 (1) 즉각 엎드린 점. (2) 여호와가 하나님이시라는 명쾌한 시인을 반복한 점이다. 이러한 백성의 모습을 21절과 비교하면 그 차이가 선명히 느껴진다. 그것은 마치 졸음이 쏟아지는 한낮에 느닷없이 떨어진 폭탄의 광음을 듣는 충격과도 같다.

 

18:40 바알(Baal)이 거짓 신이라는 사실이 폭로되자 백성들은 엘리야의 명령에 따라 바알 선지자들을 한 사람도 남김없이 기손 시냇가에서 죽였다. 이러한 행위는 일견 지나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여호와의 공의(公義)를 나타내는 일이었기에 필요 불가결한 것이었다. 즉 이 일은 하나님의 계명(신 13:6-9, 17:2-7)에 대한 순종 행위였다.

그들에게 이르되 … 도망하지 못하게 하라. 엘리야의 승리는 너무도 완벽혀여 450명의 바알 선지자들로서도 항변할 수 없는 것이었다. 때문에 이들은 달아나려고 했을 텐데 이들을 잡기 위해서 이제 엘리야는 백성을 동원하고 있다.

기손 시내. 여기서 ‘시내’(히, 나할)는 ‘강’으로도 번역될 수 있다. 한편 기손 강(Kishon Brook)은 므깃도 근처의 여러 샘들로부터 발원하여 갈멜 산맥과 나란히 걸쳐진 에스드렐론 광야를 흐른다. 이 강은 갈멜 산 근처에서 제법 넓은 폭을 유지하기도 하는데 대개 건기(乾期)에는 폭 100m 이하의 작은 강이 된다(Beek). 따라서 엘리야가 바알 선지자들과 대결할 당시는 극심한 가뭄 중이었던 점(5절, 17:1-7)을 고려하면 ‘시내’라는 말은 적절한 표현이 아닐 수 없다. 한편 기손 강은 과거 사사 시대 당시 바락이 시스라를 무찔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 곳으로도 유명하다(삿 5:19-21).

 

18:41 올라가서. 이 말은 엘리야가 아합에게 기손 시내에서 갈멜 산 어디 쯤엔가 설치되어 있을 왕의 장막으로 이동할 것을 제안하는 말이다. 이로 보아 아마도 아합은 갈멜 산상의 대결 현장과 기손 시내의 바알 선지자 처형 현장에 내내 동참했던 것 같다.

먹고 마시소서. 아합은 대결의 긴장감 때문에 온종일 음식을 입에 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엘리야가 음식을 권하는 이 말에는 ‘이제 더 이상 근심하지 마십시오’하는 어감(語感)이 들어 있다(Pulpit Commentary). 원래 사람이 음식을 끊는 것은 슬픔, 근심 등을 표하는 상징적 행동이다. 따라서 이제 엘리야가 아합에게 음식을 권하는 것은 그러한 근심의 원인이 제거되었음을 시사한다. 한편 그동안 아합에게 직접적인 근심의 원인이 된 것은 물론 가뭄일 것이다(5절). 그러나 엘리야가 보기에 그 가뭄이란 우상 숭배에서 비롯된 하나님의 징계일 뿐이다(17:1). 따라서 우상 숭배자들을 처단한 현시점에 있어서는 곧 가뭄이 끝나리라고 엘리야는 확신하였다.

큰 비 소리가 있나이다. 여기서 ‘소리’(히, 콜)란 말은 원래 ‘음성’ 혹은 ‘목소리’라고 해야 더 적절한 단어이다. 즉 이는 ‘누구의 음성에 귀기울이다’와 같은 용법으로 사용된다(창 4:23, 21:12, 삼하 22:7). 아무튼 본 절은 엘리야가 믿음의 귀로써 아직 누구도 듣지 못하는 비의 목소리를 듣고 있음을 보여 준다(43-45절).

 

18:42 땅에 꿇어 엎드려. 야고보는 본 절과 관련하여 엘리야가 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었다고 언급하였다(약 5:17, 18). 사실 당시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비를 지면에 내리리라’(1절)고 약속하셨다. 그러나 엘리야는 하나님의 약속만을 믿고 가만히 앉아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이 사실의 실현을 위하여 다시 기도하였다.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이러한 자세의 의미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두 가지로 이해할 수 있다. (1) 복종을 표현하는 무릎 꿇음과 겸손을 표현하는 깊숙한 머리 숙임이 결합된 자세로서 그 기도의 간절함을 드러내는 행동이다. (2) 외부에 대한 시각(視覺)을 차단함로써 보다 깊숙한 내면의 기도의 경지로 몰입하기 위한 행동이다(Bähr).

 

18:43 바다쪽. 갈멜 산 정상에서는 서쪽으로 지중해를 바라볼 수 있다(Gate). 여기서 ‘바다쪽’이란 바로 그 지중해 쪽을 의미한다.

일곱 번. 히브리인들의 숫자의 상징적 의미에서 ‘7’은 하나님의 수이자 완전한 승리의 수로 쓰인다. 따라서 엘리야가 사환에게 일곱 번 확인해 보라고 지시한 것은 곧 기도의 씨름에서 응답을 받고야 말겠다는 다부진 결의의 표시이자 하나님께서 끝내는 응답하시리라는 완전한 신뢰의 표시이기도 하다.

 

18:44 사람의 손 만한. ‘손’(hand)으로 번역된 원어 ‘카프’는 ‘손바닥’(palm)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일반적으로 ‘손’을 가리키는 단어는 ‘야드’이다. 공동번역은 이 부분을 ‘손바닥 만한’으로 적절히 번역하였다.

비에 막히지 아니하도록. ‘막히다’에 해당하는 원어 ‘아차르’는 ‘꼭 닫다, 기다리게 하다’는 뜻이다. 여기서는 많은 비로 인해 보행을 방해 받는 광경을 말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그런데 이처럼 손바닥 만한 구름에서 엄청난 양의 비를 예상하는 것은 그만큼 확고한 엘리야의 확신을 보여준다. 한편 기손 강은 갈멜 산 바로 아래로 흐르며 여러 갈래의 시내가 합류되어 있다. 40절 주석 참조. 따라서 큰 비가 내릴 때에는 기손 강의 범람으로 말미암아 그 주변 일대는 통행이 불가능하였다. 이에 엘리야는 아합을 염려하여 길이 막히기 전에 갈멜 산에서 떠나도록 재촉하고 있는 것이다. 이상에서 볼 때 엘리야는 이스라엘과 그 왕을 ‘괴롭게 하는 자’가 아니라 참으로 그들을 위하는 자라는 사실이 분명히 드러난다(17절). 따라서 아합은 이제 지난 날의 과오를 깨끗이 청산하고 여호와의 통치를 대행하는 자로서의 본분으로 돌아와야 마땅하였다. 그러나 아합은 여전히 하나님을 거역하는 길을 집요하게도 고집하였으며 끝내는 참혹한 말로 맞기에 이른다(22:38).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여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쌓는 패역한 자의 전형을 발견한다(롬 2:4, 5).

 

18:45 조금 후에. 이에 해당하는 원문은 ‘손이 앞뒤로 재빠르게 움직이는 동안’이라는 뜻이다(Ewald). 이는 곧 큰 비가 올 것에 대비해 이런 저런 준비를 하는 동안을 말한다. 그러므로 바다 저편의 손바닥만한 구름(44절)이 얼마나 급속도로 폭우로 변했는지 알 수 있다.

이스르엘. 과거 솔로몬의 다섯 번째 행정 구역에 속하였던 성읍으로서 아합, 아하시야, 요람 당시 왕의 궁궐로 사용되었던 곳이다(왕하 9:15). 이곳은 갈멜 산 남동쪽 20여 km 지점에 위치하였는데 곧 길보아 산 부근이다. 그런데 당시 이 성읍은 이스르엘 평야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다(Beek). 한편 훗날 아합은 이곳 이스르엘(Jezreel) 사람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는 악행을 저지르기도 하였다(21장). 4:12 주석 참조.

 

18:46 여호와의 능력이 엘리야에게 임하매. 원문을 문자적으로 풀이하면 ‘여호와의 손이 엘리야에게 있었다’는 뜻이다. 즉 원문에는 ‘여호와의 능력’이란 말이 ‘여호와의 손’(히, 야드 야훼)으로 나와 있다. 때문에 대부분의 영역본들은 이를 ‘주님의 손’(the hand of the Lord)으로 번역하고 있다(KJV, RSV, Modern Language). 그러나 Living Bible은 의미를 충분히 살려 본 절을 ‘주께서 엘리야에게 특별한 능력을 주셨다’(the Lord gave special strength to Elijah)로 번역하였다. 여기서 ‘여호와의 손’은 엘리야를 아합의 마차보다 더 빨리 달리게 한 ‘하나님의 권능’을 의미한다.

허리를 동이고. 달리는 데 지장이 없도록 긴 옷의 아랫 부분을 묶었다는 말이다(출 12:11). 한편 비유적인 의미로 ‘허리를 동이다’라는 말은 어떤 행동을 위해 자신을 긴장시킴으로써 준비한다는 뜻을 나타내기도 한다(렘 1:17).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출 12:11 주석을 참조하라.

이스르엘로 들어가는 곳까지. 엘리야는 이스르엘 성읍 안까지 들어가지는 않고 그 어귀에 머물렀다. 이는 아합의 반응을 주시하기 위해서였으며, 동시에 이세벨의 격노를 예상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아합이 홀로 도피하기에 급급한 것을 보면 우상 숭배 정책을 그대로 고수하려는 그의 의도를 읽을 수 있다. 만약 아합이 엘리야를 하나님의 참된 선지자로 존경하였다면, 엘리야가 혼자 달려가도록 그냥 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합 앞에서 달려갔더라. 갈멜 산에서 이스르엘 평원을 가로질러 이스르엘 성읍 어귀까지 이르는 길의 거리는 대략 22.4 km이다. 이 거리를 엘리야는 아합의 마차 앞에서 달린 것이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말이나 마차 앞에서 달리는 것은 시종(侍從)이나 심부름꾼의 위치를 자처했다는 의미가 있다. 그렇다면 본 절은 엘리야 역시 아합의 종으로 처신했다는 말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오히려 이는 이제 엘리야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여호와이심이 증명되었음을 시위하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때 아합은 그 인물 자체의 도덕적 평가를 떠나서 이스라엘의 통치자라는 상징적 의미로서만 기능한다. 즉 갈멜 산 대결 현장에서 귀환하는 이스라엘 왕이 여호와의 선지자를 전령의 위치로 앞세웠다면 그것은, 여호와와 바알 중 어느 신이 참신인가를 결정하는 싸움에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바알이 아닌 여호와로 판결났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상징적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서 엘리야는 아합의 앞에서 달리면서 나름의 축하 행진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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