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가서 아합에게 보이라. ‘보이라’(히, 라아)는 말은 문자적으로는 물론 ‘가서 만나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 말에 함축되어 있는 뜻은 보다 넓고 깊다. 그 중에서도 특히 주목할 만한 점은 이 단어가 ‘제시하다, 증명해 보이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즉 이 동사에 의해 표현되는 행동은 앞서 선행된 어떤 예시, 예견에 대한 결정적 증거 제시의 행동이라 할 수 있다. 본 장에서 엘리야의 행적은 이러한 의미에 부합된다. 즉 엘리야는 일찍이 아합에게 가뭄을 예언한 바 있다(17:1). 그런데 지금 엘리야는 가뭄 종식의 예언을 위해 다시 아합과 만나도록 명령 받는다. 왜냐하면 엘리야가 그 같은 선포를 하여야만 가뭄과 같은 자연력의 고삐를 쥐고 계신 분은 바알(Baal)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심이 명백해지기 때문이다. 17:1 주석 참조. 그러므로 이제 아합에게 ‘보이러’가는 엘리야의 행동은 여호와의 하나님되심을 ‘증명해 보이러’ 가는 행동이라 할 수 있다.
지극히. ‘지극히’(히, 메오드)는 ‘대단히, 지극히’ 등의 뜻을 갖는 부사이다. 그런데 성경에서 이 단어는 하나님을 섬기는 바람직한 태도를 묘사하기 위해 자주(구약에서 약 300회) 사용되었다(신 6:5, 왕하 23:25). 한편 신약에서 이 단어는 ‘마음과 힘(mind and strength)을 다하여’로 번역되어 있는데 이러한 표현은 이 말이 갖는 의미를 잘 드러내 준다(막 12:30, 눅 10:2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경외하다’에 해당하는 원어 ‘야레’에는 ‘두려워하다, 놀라워 하다’는 뜻도 들어 있다. 이는 곧 하나님과 접해 본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체험적 신앙을 강조해 준다.
선지자 백 명을 … 굴에 숨기고. 사마리아 북서쪽 약 60 km 지점에 위치한 갈멜산(Mount Carmel) 주변에는 당시 약 2,000개의 석회굴이 있었다고 한다(Montgomery). 따라서 오바댜가 선지자들을 숨긴 곳도 이 지역 어느 곳일 것으로 추정된다. 사실 역사적으로도 갈멜산 일대는 피난자들의 은신처였는데 신약 시대에는 일명 ‘은자(隱者)의 고장’이라 불릴 정도였다.
가지고. 원래 ‘가지고’에 해당하는 원어 ‘라카흐’는 ‘취하다, 움켜 쥐다, 채어가다’ 등의 뜻이다. 따라서 이 동사는 대단히 역동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이는 이세벨의 마수가 시시각각 닥쳐오는 절박한 시점에서 재빠르게 선지자들을 빼돌리는 오바댜의 긴박한 움직임을 연상시켜 주는 단어이다.
말과 노새를 살리리니. 극심한 가뭄과 기근 중에 아합의 관심이 이처럼 말과 노새 보호에 쏠려 있음은 주목할 만하다. 비록 혹자는 그것이 움직일 수 없는 우리 속의 짐승을 위한 불가피한 처사로 변호하지만(Hammond), 아합의 일차적 관심이 백성에 있지 않았음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이는 당시 아합의 권력 기반이 말과 노새가 상징하듯 군사력과 상업력에 있었지, 여호와로부터 위탁받은 백성들로부터의 신망(信望)에 있지 않았음을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엎드려 말하되 내 주 엘리아여.. 오바댜가 취한 이러한 태도와 언사(言辭)에서 그가 엘리야를 향해 품고 있는 존경심의 정도를 엿볼 수 있다. 물론 오바댜는 당대의 고관이고(3절) 엘리야는 일개 야인(野人)에 불과하다. 그러나 여호와 신앙가인 오바댜가 고군 분투하는 신앙의 전사(戰士) 엘리야에게 존경심을 품지 않았을리 없다. 더욱이 엘리야가 행하는 권능은 놀라운 것이며(17:13-24) 오바댜 역시 이를 잘 알고 있었음이 분명하다(12절). 따라서 오바댜는 지금 엘리야에게 하나님의 선지자에 대한 최대의 경의를 표하고 있다. 특히 여기서 ‘주’에 해당하는 ‘아도나이’는 ‘아돈’(‘주인’, ‘소유자’라는 뜻)의 강조형으로서 오직 인간과 만물의 소유주이자 지배자이신 하나님을 부를 때 사용하는 호칭이다. 그런데도 오바댜가 엘리야를 ‘내 주’라고 칭한 것은 그에 대한 존경심에서는 물론 이스라엘의 운명이 하나님의 사자(使者)인 엘리야의 손에 달려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당신을 … 나라가 없었는데. 이 말은 일종의 과장법을 사용한 표현이다. 비록 아합 통치 하의 이스라엘이 강력했다지만, 당대 근동의 패권을 모두 가진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가 모든 나라와 족속을 속속들이 뒤졌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16:29 주석 참조. 여하튼 본 절은 당시 아합이 엘리야를 체포하려고 얼마나 혈안이 되어 있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즉 아합은 가능한 범위 내에서는 힘껏 엘리야를 체포하려고 혈안이 되었던 것이다. 아마도 그 이유는 아합이 당시 가뭄의 원인을 엘리야의 저주(17:1) 탓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Hammond, 17절). 그러므로 그 저주를 해소하려는 주술적 조치와 적개심 때문에 아합은 그토록 열심히 엘리야를 수배한 것이다.
어려서부터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라. 여기서 ‘어리다’는 말의 기본형인 명사 ‘나아르’는 이유기(離乳期)에서 사춘기를 지난 청소년까지를 모두 포함하는 말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성경에서 이제 겨우 젖 뗀 유아 모세와 다 자란 압살롬을 똑같이 ‘나아르’로 부르는 경우를 발견할 수 있다(출 2:6, 삼하 12:16, 14:21, 18:5). 그러므로 ‘나아르’는 한 인간의 개체적인 틀이 거의 완성, 고정되는 중요한 시기를 지칭한다 할 수 있다. 그런데 오바댜는 바로 그처럼 중요한 시기에 여호와를 향한 신앙을 훈련할 수 있었던 사람이다. 따라서 그의 신앙이 가진 안정성, 확고성을 가히 짐작해볼 수 있다.
만군의 여호와. 여기서 ‘만군’(히, 체바오트)이란 곧 ‘군대들’(armies)이란 말이다. 이처럼 하나님을 ‘만군의 여호와’로 호칭하는 경우는 구약에서 261회나 된다. 본래 이 명칭은 이스라엘의 군대를 지휘하시는 하나님(삼상 17:45)을 뜻하였으나 후에는 천군 천사를 다스리는 하나님(22:19)을 뜻하는 말로 발전되었다. 따라서 결과적으로 이 말은 강한 군사적 의미와 함께 온 세계에 대한 여호와의 통치권을 의미한다. 삼상 1:3 주석 참조. 한편 ‘만군의 여호와’란 호칭은 열왕기에서는 처음으로 본 절에 등장하였다. 이 호칭은 이사야, 예레미야 등 예언서에 많이 등장한다(사 1:9, 2:12, 8:13, 렘 6:6, 20:12, 32:14).
오늘. 학자들 간에는 여기서의 ‘오늘’(히, 하욤)이 꼭 문자대로의 오늘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다(Bähr). 물론 ‘하욤’을 문맥과 함께 ‘지금’ 혹은 ‘이번에는’과 같이 풀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아합을 꼭 만날 것이라는 엘리야의 결의에 찬 표현으로서의 본 절은 그대로 ‘오늘’의 의미로 두는 것이 훨씬 낫다. 그러기에 대부분의 영역본들도 이를 ‘오늘’(today)로 번역하고 있다(KJV, RSV, Living Bible 등).
보이리라. 1절 주석 참조.
말하매 아합이 … 만나러 가다가. 아합이 중대사인 ‘꼴 구하는 일’(5절)을 간단히 포기하고 이처럼 즉각 엘리야를 만나려 한 것을 보면, 엘리야의 비중이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 비중이란 실상 아합이 엘리야를 어떤 식으로든 가뭄의 원인으로 결부시켜 생각한 데서 비롯된다. 10절 주석 참조. 그런 점은 다음 절에서 아합이 엘리야를 가리켜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로 부른데서도 나타난다. 그러므로 엘리야 출현 소식을 접한 아합은 이제야 가뭄의 원인을 해소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을 것이다(Hammond). 그렇다면 그 것보다 더 서두를 일이 어디 있겠는가!
당신이 바알들을 따랐음이라. 물론 오므리 왕조 이전의 왕 중에도 금송아지 숭배 등으로 하나님을 진노케 한 여로보암(Jeroboam, B.C. 930-910) 같은 악왕(惡王)이 있었다(12:25-33). 그러나 아합의 가증한 죄악은 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스라엘에 본격적으로 바알(Baal) 숭배를 도입했다는 데에 있다. 이와 관련해서는 16:31, 32 주석을 참조하라.
이세벨의 상에서 먹는. ‘상에서 먹는다’는 말은 본문의 문맥상 ‘공급과 지원을 받는다’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Pulipt Commentary). 왜냐하면 당시 왕비의 식탁에서 850명이나 되는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이 함께 식사했다고 생각하기 어렵기 때문다. 사실 ‘상’(히, 슐한)은 그 식탁에 둘러 앉은 자들 사이의 ‘교제’를 은유하는, 보다 중요한 용법을 갖고 있다(시 69:22, 128:3: 단 11:27). 한편 본 절로 미루어 이세벨은 마치 바알과 아세라 선교사처럼 이스라엘에 바알 및 아세라 숭배 의식을 위해 인력을 양성했음을 알 수 있다.
갈멜 산. ‘갈멜’은 ‘정원’ 또는 ‘과수원’을 의미한다. 이 산은 지중해 쪽에 위치한 갈멜 산맥(Mountains Carmel)의 일부로서 각종 식물이 무성하고 또한 석회 동굴이 많은 곳이다. 4절 주석 참조. 이 갈멜 산이 여호와 종교와 바알 종교의 대결 장소로 선택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갈멜 산은 엘리야, 엘리사의 경우에서 보듯 여호와 신앙인들에게도 특별한 장소였지만(왕하 2:25, 4:25), 동시에 바알에게 바쳐진 성소이기도 하였다. (2) 갈멜 산은 이스라엘과 바알 종교의 본산지인 두로 사이의 중간 지점에 위치하였다.
백성이 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는지라. 이 장면을 수 24:16 이하와 비교해 보면 아합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 상태를 알 수 있다. 즉 여호수아 당시 ‘하나님과 다른 신 중 과연 누구를 섬길 것인지 결정하라’는 요구에 그 시대의 백성들은 즉각 ‘다른 신을 섬기다니 말이 되는가, 여호와가 우리의 하나님이시다’고 응답하였다. 그러나 아합 시대의 백성들은 묵묵부답이었다. 그들은 아직껏 하나님과 바알을 겸하여 섬기려는 어정쩡한 상태에 있었던 것이다(마 6:24).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항상 차든지 뜨겁든지 하는 것이다(계 3:15).
바알의 선지자는 사백오십 명이로다. 이 부분이 독자들을 당혹시키는 까닭은 19절의 ‘바알의 선지자 사백오십 명과 아세라의 선지자 사백 명’과 일견 모순되어 보이는 탓이다. 즉 19절에는 이교(異敎) 선지자들의 총수가 850인으로 언급되어 있는데 본 절에는 오직 450인만 언급되어 있는 탓에 혼란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다. 더구나 25절과 40절에서도 오직 ‘바알의 선지자’만 언급되어 있다. 그런데 이에 관한 주석가들의 의견을 종합해 보면 이는 다음과 같이 이해, 정리될 수 있다. (1) 아세라 선지자 400명은 갈멜 산의 대결에 참여하지 않았다(25절). 따라서 그들은 학살을 당하지 않았다(40절). (2)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바알의 선지자와 아세라의 선지자가 엄밀히 구분되는 것은 아니다. 즉 그들은 모두 ‘바알의 선지자’로 통칭(通稱)될 수 있다. (3) 그렇다면 아합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이세벨이 일부(아세라의 제사장?)를 보내지 않은 탓에 갈멜 산 대결에는 450인의 바알 선지자만이 참석하였을 것이다(Bähr, Keil 등).
각을 떠서.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동사 ‘나타흐’는 ‘잘라서 조각 조각으로 나누다’(cut in pieces)는 뜻이다. 이는 곧 희생(犧牲) 제사에 쓰일 제물을 취급하는 방식을 말한다(출 29:17, 레 1:6, 12, 삿 20:6).
불로 응답하는 신. 비단 이스라엘 뿐 아니라 고대 근동 세계의 희생제사는 제물을 불로 사르는데 초점이 있다. 즉 신이 불태워진 제물을 흠향할 때 비로소 인간의 성의가 가납된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는 곧 신이 있어서 차려진 제물을 받아들인다면 그는 불로 응답하리라는 생각에서 비롯된 믿음이다. 그런데 바알은 자연력을 지배하는 신이자 태양과 불의 신이었다. 그러므로 불로 응답하는 일은, 바알이 참신이라면, 그의 전문 분야와도 같다. 그런데도 바알은 끝내 침묵하고 말았으니(25-29절) 그 허구성이 여실히 드러나고 만 것이다. 한편 이처럼 그 신의 가장 핵심 요소를 공략하여 허구성을 드러내는 방식은 일찍이 모세가 10가지 재앙으로써 애굽의 거짓 신들을 무색하게 한 것과 비견된다(출 7:4-12:34).
응답하소서. 이에 해당하는 원어 ‘아나’는 본래 ‘보다, 향하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는 자신들을 외면치 말고 사랑과 관심을 갖고 ‘쳐다 봐 달라’는 간절한 염원(念願)의 말이었다.
뛰놀더라. 이에 해당하는 원어 ‘파사흐’는 본래 ‘절뚝거리다’는 뜻으로 이미 21절에 나온 단어이다. 21절 주석 참조. 그런데 여기서 이 단어가 의미하는 바가 정확히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에 다음과 같은 의견으로 나뉘어 있다. (1) 당시 바알 선지자들이 추었던 광란(狂亂)의 춤(28절)을 비꼬아 표현한 것이다(Pulit Commentary). (2) 당시 바알 선지자들이 추었던 춤의 형태가 실제로 절뚝거리는 동작으로 이루어져 있었음을 지적하는 것이다(Davis). 이상의 두 견해 중 어느 쪽을 취하여도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엘리야가 계속적으로 바알 선지자들을 조롱한 것으로 보아(27절) 첫 번째 견해가 보다 타당하다고 여길 수 있다. 한편 이스라엘 역사상 춤은 자주 예배 의식의 일부로 포함되었다. 즉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넜을 때나 여호와의 절기에 실로의 처녀들이 포도밭에서 춤춘 것, 법궤 앞에서 춤을 춘 다윗 등과 같은 예를 찾아 볼 수 있다(출 15:20, 삿 21:16-24, 삼상 18:6, 삼하 6:14). 그러나 이러한 춤도 참된 찬양의 대상자에 대한 진솔한 경외의 표현이 아니라면 본 절에서 보듯 그것은 광란의 몸짓에 불과하다. 출 15:20 주석 참조.
묵상하고 있는지. 바알 선지자들이 그토록 발악하고 있는데(26, 28절) 바알은 물러 앉아 묵상에 잠겨 있다면 그것처럼 웃기는 장면은 없을 것이다.
잠깐 나갔는지. ‘나가다’에 해당하는 원어 ‘수그’는 ‘옮기다, 이동하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본 절은 ‘잠깐 자리를 옮겼는지’의 뜻이다. 이는 ‘좀 쉬려고 물러갔는지’ 정도의 뉘앙스를 지닌 말이다(Rashi). 하지만 신이 쉬어야 한다는 것은 우스운 말이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신다(사 40:28).
길을 행하는지. 여기서 ‘길’(히, 데레크)은 ‘여행’(대개 수 일이 걸리는)을 의미한다. 그런데 신이 여행을 떠나서 자신의 경배자들의 청원을 듣지 못한다는 것은 곧 그 유한성(有限性)을 알려 준다. 그러나 이와 달리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무소 부재(無所不在)하신 분이시다(시 139:7-12).
잠이 들어서 깨워야 할 것인지. 팔레스타인 지방에서는 무더위로 인해 한낮에 낮잠을 자는 습관이 있다. 엘리야의 조롱은 바로 그러한 습관을 염두에 둔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신다(시 121:3, 4).
저녁 소제 드릴 때까지. 요세푸스의 기록에 따르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저녁 소제를 드리던 시간은 오늘날의 오후 3시 쯤(유대력의 9시)에 해당한다고 한다(A. Edersheim, Pulit Commentary). 이때 신약 당시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간 시간과도 일치한다(행 3:1). 한편 ‘소제’(히, 민하)란 매일 아침 저녁으로 드리는, 비교적 간단한 제사이다. 이 제사에는 희생제물이 아닌, 떡과 과자가 바쳐졌다(출 29:28-41, 민 28:3-8). 이 소제의 의미는 백성들이 자신의 일상적이고 전체적인 삶을 하나님께 위탁한다는 뜻이다.
아무 소리도 … 돌아보는 자가 아무도 없더라. 이 부분에는 ‘전혀 없다’는 뜻인 ‘아인’이 세 번이나 거듭된다. 이 단어는 26절에도 두 번이나 나오는데 전체적으로 점층법적 강조의 효과를 준다.
무너진 여호와의 제단을 수축하되. ‘수축하다’에 해당하는 원어 ‘예라페’는 ‘고치다’는 뜻이다. 즉 이는 전혀 새로운 것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부너진 것을 고쳐 세우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갈멜 산상에는 일찍이 여호와의 제단이 서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본서는 아합의 아내 이세벨이 여호와의 제단을 헐고 선지자들을 죽이는 등 대대적인 탄압을 가했음을 증거해 준다(4절, 19:10). 따라서 갈멜 산의 여호와 제단도 이때 헐렸다고 봄이 타당하다.
이 야곱은 … 하신 자더라. 이 부분에서는 이스라엘을 각성케 하는 여러 요소들을 찾아 볼 수 있다. 야곱, 이스라엘, 여호와가 바로 그것이다. 우선 ‘야곱’(Jacob)에서 이스라엘 열두 지파는 한 조상에서 비롯된 혈통적 단일성을 가진 존재들임이 부각된다(창 35:22-26). 그리고 그 야곱이 ‘이스라엘’(곧 민족의 이름이 된)로 불린 것(창 32:24-28)에서는 이스라엘 민족이 여호와께로부터 소명을 받은 백성임이 강조된다. 즉 이스라엘 민족은 소명의 주체이신 ‘여호와’를 섬길 때에만 민족적 정기를 흐리지 않는 민족이 될 수 있는 것이다(출 19:5, 6).
곡식 종자 두 세아. ‘세아’(Seah, 창 18:6에는 ‘스아’로 번역되어 있음)는 구약시대 당시 고체의 부피를 재는 단위이다. 1세아는 1/3 에바(Ephah)로서 약 7.6 리터이다. 그러므로 ‘두 세아’는 약 15리터 정도의 양임을 알 수 있다.
둘 만한. 이 말의 뜻이 정확히 무엇을 말하는지 알기 어렵다. 즉 두 세아 정도의 곡식을 부어도 될 만큼이라는 뜻인지, 두 세아의 곡식 종자를 심어도 될 만큼이라는 뜻인지 분명치 않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전자, 즉 용량을 의미하는 쪽으로 기울어 있다(Bähr, Hammond 등).
통 넷에 물을 채워다가 … 부으라. 여기서는 ‘통’(히, 카드)의 용량을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이는 당시 팔레스타인 여인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하던 물 항아리(17:12, 14, 16, 창 24:43, 45, 삿 7:16, 19, 20)를 가리키기 때문이다(Pulpit Commentary). 그러나 다음 절까지 살펴 보면, 번제물과 나무 위에는 무려 열두 통의 물이 부어진 셈이 된다. 그런데 율법 규정에 있지도 않은 이러한 행위의 목적은 명확하다. 즉 엘리야는 이로써 거짓이 전혀 없다는 인상을 명백히 백성들에게 주려 한 것이다. 30절 주석 참조. 또한 이처럼 온통 물로 적셔진 제물에 불을 붙이는 일은 오직 하나님의 초자연적 능력으로써만 가능함을 주지시키려 한 것이다(38절). 한편 교부들의 증언에 따르면 고대의 이교 제사장들 중에는 제단 밑에 빈 공간을 판 뒤 그 속에서 불을 붙이고서 이를 이적이라고 속이는 자들이 종종 있었다고 한다(Pulit Commentary, Keil & Delitzsch Commentary).
아브라함과 … 이스라엘의 하나님.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은 이스라엘 민족의 뿌리라 할 조상들이다. 그런데 그 조상들의 하나님으로서 여호와를 각별히 호칭하는 이유가 의미 심장하다. 즉 여호와는 그 조상들에게 하나님으로 자신을 선포하셨다(출 3:6). 그 결과 여호와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고 그들은 여호와의 백성이 되었다. 이러한 독특한 계약 관계는 이스라엘이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자손이라고 믿는 한 파기(破棄)될 수 없다. 즉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아닌 무엇이 되지 않는 한 여전히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여호와 한 분 뿐이시다. 이 점을 강조하기 위해 엘리야는 본 절에서 야곱의 이름조차 훗날 이스라엘 민족의 이름이 된 ‘이스라엘’로 호칭하고 있다. 31절 주석 참조.
주께서 … 알게 하옵소서. 엘리야의 본 기도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요지로 구성되어 있다. 즉 (1) 여호와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는 고백, (2) 엘리야 자신은 단지 하나님의 종이라는 고백, (3) 엘리야 자신의 모든 행위는 오직 주의 말씀대로 행하는 것이라는 고백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요소들은 모두 하나님의 영광만을 드러내는 것이라는 특징을 가진다. 사실 엄청난 이적이란 이적 자체와 그것을 행하는 자가 크게 부각될 위험이 있다. 그러나 엘리야는 애초에 이적도, 이적을 행하는 자신도 단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는 도구로 제한하고 있다. 이러한 겸손과 공손함은 그가 본 절에서 사용한 ‘종’(히, 에베드)이라는 단어 속에 잘 표현되어 있다. 왜냐하면 원래 ‘에베드’의 기본적인 의미는 ‘노예’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 절은 하나님의 영광을 전면에 내세우고 자신은 겸손히 옆으로 비켜 선 엘리야의 참된 선지자적 모습을 보여준다(Mattew Hanry).
되돌이키심. 이에 해당하는 원어 ‘사바브’는 마음이나 자세의 변화를 뜻한다. 그 중에서도 특히 이는 하나님 앞에서 갖게 된 변화의 상태를 가리키는데 자주 쓰인다(대하 29:6). 본 절에서도 역시 이 단어는 은총의 회복, 즉 백성들의 회개를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알게. 이에 해당하는 원어 ‘야다’는 지식적으로 아는 것 이상의 보다 폭넓은 뜻을 함축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참신이든 우상이든 신과 관련될 때는 ‘관계’에 역점이 주어지는 말이다(신 13:3, 삼상 2:12, 렘 4:22). 따라서 본 절에서 이 말은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정상 관계를 회복시켜 달라는 청원으로 이해할 수 있다.
번제물과 … 흙을 태우고. 여호와의 불에 의해 태워진 것은 번제물 뿐 아니라 이처럼 나무, 돌, 흙까지였다. 이러한 사실은 다음과 같은 점을 강조해 준다. (1) 여호와의 불이 얼마나 강렬했었는지를 보여준다. (2) 동시에 거기애는 어떠한 거짓의 여지도 없었음을 독자들에게 납득시킨다. 사실 제단 밑에 사람을 숨겨 불을 붙이는 거짓으로서는 도저히 이만한 화력(火力)을 낼 수 없었을 것이다. 33절 주석 참조.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 여기서 ‘핥은지라’(히, 라하크)는 불길이 혀처럼 널름거리며 도랑물을 증발시키는 장면을 잘 표현해 준다.
그들에게 이르되 … 도망하지 못하게 하라. 엘리야의 승리는 너무도 완벽혀여 450명의 바알 선지자들로서도 항변할 수 없는 것이었다. 때문에 이들은 달아나려고 했을 텐데 이들을 잡기 위해서 이제 엘리야는 백성을 동원하고 있다.
기손 시내. 여기서 ‘시내’(히, 나할)는 ‘강’으로도 번역될 수 있다. 한편 기손 강(Kishon Brook)은 므깃도 근처의 여러 샘들로부터 발원하여 갈멜 산맥과 나란히 걸쳐진 에스드렐론 광야를 흐른다. 이 강은 갈멜 산 근처에서 제법 넓은 폭을 유지하기도 하는데 대개 건기(乾期)에는 폭 100m 이하의 작은 강이 된다(Beek). 따라서 엘리야가 바알 선지자들과 대결할 당시는 극심한 가뭄 중이었던 점(5절, 17:1-7)을 고려하면 ‘시내’라는 말은 적절한 표현이 아닐 수 없다. 한편 기손 강은 과거 사사 시대 당시 바락이 시스라를 무찔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 곳으로도 유명하다(삿 5:19-21).
먹고 마시소서. 아합은 대결의 긴장감 때문에 온종일 음식을 입에 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엘리야가 음식을 권하는 이 말에는 ‘이제 더 이상 근심하지 마십시오’하는 어감(語感)이 들어 있다(Pulpit Commentary). 원래 사람이 음식을 끊는 것은 슬픔, 근심 등을 표하는 상징적 행동이다. 따라서 이제 엘리야가 아합에게 음식을 권하는 것은 그러한 근심의 원인이 제거되었음을 시사한다. 한편 그동안 아합에게 직접적인 근심의 원인이 된 것은 물론 가뭄일 것이다(5절). 그러나 엘리야가 보기에 그 가뭄이란 우상 숭배에서 비롯된 하나님의 징계일 뿐이다(17:1). 따라서 우상 숭배자들을 처단한 현시점에 있어서는 곧 가뭄이 끝나리라고 엘리야는 확신하였다.
큰 비 소리가 있나이다. 여기서 ‘소리’(히, 콜)란 말은 원래 ‘음성’ 혹은 ‘목소리’라고 해야 더 적절한 단어이다. 즉 이는 ‘누구의 음성에 귀기울이다’와 같은 용법으로 사용된다(창 4:23, 21:12, 삼하 22:7). 아무튼 본 절은 엘리야가 믿음의 귀로써 아직 누구도 듣지 못하는 비의 목소리를 듣고 있음을 보여 준다(43-45절).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이러한 자세의 의미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두 가지로 이해할 수 있다. (1) 복종을 표현하는 무릎 꿇음과 겸손을 표현하는 깊숙한 머리 숙임이 결합된 자세로서 그 기도의 간절함을 드러내는 행동이다. (2) 외부에 대한 시각(視覺)을 차단함로써 보다 깊숙한 내면의 기도의 경지로 몰입하기 위한 행동이다(Bähr).
일곱 번. 히브리인들의 숫자의 상징적 의미에서 ‘7’은 하나님의 수이자 완전한 승리의 수로 쓰인다. 따라서 엘리야가 사환에게 일곱 번 확인해 보라고 지시한 것은 곧 기도의 씨름에서 응답을 받고야 말겠다는 다부진 결의의 표시이자 하나님께서 끝내는 응답하시리라는 완전한 신뢰의 표시이기도 하다.
비에 막히지 아니하도록. ‘막히다’에 해당하는 원어 ‘아차르’는 ‘꼭 닫다, 기다리게 하다’는 뜻이다. 여기서는 많은 비로 인해 보행을 방해 받는 광경을 말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그런데 이처럼 손바닥 만한 구름에서 엄청난 양의 비를 예상하는 것은 그만큼 확고한 엘리야의 확신을 보여준다. 한편 기손 강은 갈멜 산 바로 아래로 흐르며 여러 갈래의 시내가 합류되어 있다. 40절 주석 참조. 따라서 큰 비가 내릴 때에는 기손 강의 범람으로 말미암아 그 주변 일대는 통행이 불가능하였다. 이에 엘리야는 아합을 염려하여 길이 막히기 전에 갈멜 산에서 떠나도록 재촉하고 있는 것이다. 이상에서 볼 때 엘리야는 이스라엘과 그 왕을 ‘괴롭게 하는 자’가 아니라 참으로 그들을 위하는 자라는 사실이 분명히 드러난다(17절). 따라서 아합은 이제 지난 날의 과오를 깨끗이 청산하고 여호와의 통치를 대행하는 자로서의 본분으로 돌아와야 마땅하였다. 그러나 아합은 여전히 하나님을 거역하는 길을 집요하게도 고집하였으며 끝내는 참혹한 말로 맞기에 이른다(22:38).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여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쌓는 패역한 자의 전형을 발견한다(롬 2:4, 5).
이스르엘. 과거 솔로몬의 다섯 번째 행정 구역에 속하였던 성읍으로서 아합, 아하시야, 요람 당시 왕의 궁궐로 사용되었던 곳이다(왕하 9:15). 이곳은 갈멜 산 남동쪽 20여 km 지점에 위치하였는데 곧 길보아 산 부근이다. 그런데 당시 이 성읍은 이스르엘 평야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다(Beek). 한편 훗날 아합은 이곳 이스르엘(Jezreel) 사람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는 악행을 저지르기도 하였다(21장). 4:12 주석 참조.
허리를 동이고. 달리는 데 지장이 없도록 긴 옷의 아랫 부분을 묶었다는 말이다(출 12:11). 한편 비유적인 의미로 ‘허리를 동이다’라는 말은 어떤 행동을 위해 자신을 긴장시킴으로써 준비한다는 뜻을 나타내기도 한다(렘 1:17).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출 12:11 주석을 참조하라.
이스르엘로 들어가는 곳까지. 엘리야는 이스르엘 성읍 안까지 들어가지는 않고 그 어귀에 머물렀다. 이는 아합의 반응을 주시하기 위해서였으며, 동시에 이세벨의 격노를 예상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아합이 홀로 도피하기에 급급한 것을 보면 우상 숭배 정책을 그대로 고수하려는 그의 의도를 읽을 수 있다. 만약 아합이 엘리야를 하나님의 참된 선지자로 존경하였다면, 엘리야가 혼자 달려가도록 그냥 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합 앞에서 달려갔더라. 갈멜 산에서 이스르엘 평원을 가로질러 이스르엘 성읍 어귀까지 이르는 길의 거리는 대략 22.4 km이다. 이 거리를 엘리야는 아합의 마차 앞에서 달린 것이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말이나 마차 앞에서 달리는 것은 시종(侍從)이나 심부름꾼의 위치를 자처했다는 의미가 있다. 그렇다면 본 절은 엘리야 역시 아합의 종으로 처신했다는 말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오히려 이는 이제 엘리야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여호와이심이 증명되었음을 시위하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때 아합은 그 인물 자체의 도덕적 평가를 떠나서 이스라엘의 통치자라는 상징적 의미로서만 기능한다. 즉 갈멜 산 대결 현장에서 귀환하는 이스라엘 왕이 여호와의 선지자를 전령의 위치로 앞세웠다면 그것은, 여호와와 바알 중 어느 신이 참신인가를 결정하는 싸움에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바알이 아닌 여호와로 판결났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상징적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서 엘리야는 아합의 앞에서 달리면서 나름의 축하 행진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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