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셉. 디셉은 엘리야의 고향으로 여섯 번이나 언급되지만 정확한 위치는 알 길이 없다(21:17, 28, 왕하 1:3, 8, 9:36). 다만 길르앗 북방 산악 지대에 위치한 현재의 리스팁(Listib)일 가능성이 있다(Cohen). 한편 외경 토빗서 1:2에는 납달리에 있는 게데스의 남쪽 한 지역이 ‘디셉’으로 언급되고 있다. 만일 ‘디셉 사람’이란 말이 여기에서 유래된 것이라면 엘리야는 디셉에서 출생하여 길르앗에 정착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N. Glueck).
엘리야. ‘엘리야’(또는 엘리야후)는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는 뜻이다. 실제로 엘리야의 생애는 그 같은 이름의 뜻과 어울린다. 성경에는 엘리야의 가계(家系)가 언급되지 않지만 그는 B.C. 9세기의 유명한 선지자로서 아합 왕(B.C. 874-853) 때부터 아하시야 왕(B.C. 853-852) 때까지 북 왕국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특히 그는 모세에 버금가는 인물로서 유대인들의 추앙을 받았는데 예수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 세례 요한의 정체를 확인하면서 그가 엘리야인지 물어 볼 정도였다(요 1:21).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 이 짧은 어구에 함축된 의미는 대단히 크다. 즉 본 절은 크게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1)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다는 뜻이다. 이 말은 바알 숭배가 만연한 당시의 상황에 대해 강한 거부의 뜻을 담고 있다. 즉 이는 이스라엘의 참신은 여호와이지 바알이 아니라고 항변한다. (2) 그리고 그 여호와가 바로 ‘내가 섬기는’ 하나님이시다는 뜻이다. 이 말에는 바알을 섬기는 무리가 다수인 당시의 형편이 잘 반영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는 그 속에서 자신의 현주소와 입장을 밝히는 신앙 고백인 동시에 자신이 여호와께로부터 보냄 받은 대사(大使)임을 밝히는 말이다.
여호와께서 … 맹세하노니. 이러한 표현은 구약 시대 당시 일반적인 맹세의 형식이긴 하다(18:10, 렘 5:2, 16:14, 호 4:15). 그러나 단지 상투적 어구만이 아니고 당시 상황에서의 진솔한 신앙고백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 의미는 분명해진다. 즉 바알 및 우상 숭배 세력이 지배적인 상황 속에서 ‘살아있는 참신은 여호와’라는 이 어구의 말은 담대한 도전의 성격을 띤 것이다.
내 말이 없으면 …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 때를 따라 적절히 내리는 단비는 성경에서 종종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의 결과로 언급되고 있다(신 11:11, 14, 욥 5:10, 28:26, 36:27, 시 147:8). 그리고 그 반면에 백성이 우상 숭배에 빠지면 하늘은 더 이상 비를 내리지 않아 생명을 쇠약하게 하며 땅을 메마르게 하리라는 경고도 아울러 언급되어 있다(신 11:17, 28:24). 그런데 수 년간 비가 없으리라는 본 절의 가뭄 예언 역시 아합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우상 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예언이다(16:26-33). 더욱이 여호와의 말씀이 없는 한 가뭄이 계속될 것이라는 엘리야의 선언은 바알 숭배에 대한 정면 도전이다. 왜냐하면 당시 바알(Baal)은 땅에 비를 내리는 등 생산력을 주관하는 신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같은 능력조차도 여호와의 장중에 있다는 이 예언은 곧 바알이 생명없는 거짓 신임을 폭로하는 것이다(Lange).
요단 앞. ‘앞’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알 페네’는 창 16:12에서 ‘동방’으로 번역되었는데 여기서도 ‘동쪽’으로 번역함이 더 타당할 듯 하다(Keil & Delitzsch, Pulit Commentary). RSV 등 대다수 영역본과 한글 공동번역도 이를 ‘동쪽’으로 번역하고 있다.
그릿 시냇가. ‘그릿’은 ‘분리, 단절’이란 뜻이다. 그러므로 이 시내는 어떠한 지역을 구분하는 경계선 구실을 했던 것 같다(Hammond). 한편 이 시내의 정확한 위치는 아직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엘리야가 길르앗 사람인 점(1절)에 비추어 볼 때 이는 요단 동편 길르앗의 동굴 지대에 있는 시내 중 하나일 것이다(Cohen).
숨고. ‘숨고’는 문자 그대로 ‘피하다, 감추다’는 뜻의 ‘사타르’에서 온 말이다. 그러므로 이 동사에서 엘리야의 심판 예언(1절)이 있은 후 아합과 이세벨의 즉각적인 위협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아마도 아합의 입장에서 엘리야의 선포는 민심을 교란하는 유언 비어요 반 정부적인 도전으로 비쳤을 것이다. 그러나 그 같은 위협만이 피신의 원인은 아니다. 아직은 여호와 신봉자와 이방신 숭배자 간의 정면 대결(18장)의 시기가 무르익지 않았기에 하나님께서는 당분간 엘리야에게 몸을 숨기도록 명하신 것이다(Lange, Matthew Henry, R. D. Patterson).
그 곳 과부에게 명령하여 … 하였느니라. 하나님의 종 엘리야의 은신처가 이방인, 그것도 무력한 과부과 있는 곳이었다는 것은 선민(選民) 이스라엘의 큰 수치이다. 이는 곧 당시 이스라엘이 얼마나 배교의 늪에 깊이 빠져 있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한편 고대의 가부장적 사회에서 ‘과부’(히, 알마나)는 남편이 없으므로 인해 사회, 경제적 지위가 비천한 존재였다(신 24:17). 그러나 하나님은 그처럼 약한 자를 들어 존귀하게 사용하셨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한 특징이며(고전 1:26-31) 누구든 하나님 앞에서 자랑치 못하게 한다(Matthew Henry).
음식을 주게. 이 말에 해당하는 원어 ‘카르케레카’는 ‘간직하다’는 뜻에서 온 말이다. 즉 이는 단순한 음식 제공을 넘어서 ‘정성을 다해 보살핌’의 의미가 담겨 있다.
물을 … 내가 마시게 하라. 아합 당시의 가뭄은 이스라엘 뿐 아니라 팔레스타인 여러 지역에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그렇다면 물이 귀한 상황에서 낮선 나그네의 물 요구는 대단한 부담이 되었을 것이다. 비록 근동에서는 식수 대접이 거의 신성한 의무처럼 여겨졌다 하더라도 말이다(Pulpit Commentary). 그러나 이는 사르밧 과부가 넘어야 할 첫 번째 시험이었다. 한편 엘리야가 물을 달라는 요구를 통해 자신을 대접할 과부를 식별하는 장면은 아브라함의 종이 이삭의 신부감을 찾는 장면을 연상케 한다(창 24:17, 요 4:7).
나는 …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 엘리야의 요청에 과부가 당황한 까닭은 그나마 남은 밀가루는 최후의 만찬용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떡 하나를 요구한 엘리야의 한 마디는 과부에게는 자신의 전부를 요구하는 엄청난 요청이 아닐 수 없었다. 훗날 예수의 말씀 가운데 이 과부가 신앙의 표본으로 등장하게 된 이유도 바로 이처럼 생사(生死)의 갈림길에서 그녀가 순종의 길을 따랐기 때문이다(눅 4:24-26, 21:2). 한편 이스라엘이 바알 숭배에 몰두하는 동안 바알 숭배의 본 고장에서 한 과부가 바알 신앙을 포기했다는 점은 참으로 경이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 우리는 아무리 캄캄한 흑암 속에서도 이처럼 하나님의 구원의 빛이 역사할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사 42:16, 마 4:16, 골 1:13).
먼저 … 그 후에.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이행, 즉 믿음으로 가는 과정은 논리적인 순차성을 따라 자연히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그 과정에는 의지적 선택에 의한 결단의 단계가 포함된다. 엘리야의 말 속에서 그러한 결단의 촉구가 드러나는 곳이 바로 이 부분이다. 즉 떡을 만들되 먼저 엘리야에게 가져 오고 차후 자신과 아들을 위해 만들라는 말이다. 최후의 양식, 이것으로 마지막이라는 생각!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것을 바치라 하신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의 특성은 모든 면에서 우선순위를 하나님과 그분의 영광에 두는 것이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 6:33).
여러 날. ‘여러 날’(히, 야밈)은 며칠 정도가 아닌, 상당히 오랜 기간을 의미한다. 그런데 14절에 따르면 사르밧 과부의 집에 밀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은 시기는 다시 비가 내릴 때까지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 기간은 적어도 2년 이상이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왜냐하면 당시 가뭄은 3년 6개월 간이나 지속되었으니(약 5:17) 그동안 엘리야가 그릿 시냇가에 머문 기간(2-7절)을 빼더라도 엘리야는 사르밧 과부의 집에서 2년 이상 음식을 공급 받았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상과 같이 사르밧 과부는 선지자 엘리야를 영접함로써 선지자의 보상을 받음은 물론(마 10:41) 자신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온 가족에게까지 구원의 은총을 끼쳤다.
숨이 끊어진지라. ‘숨’(히, 네샤마)은 생명 현상의 대표적인 기능인 호흡(breath)을 가리킨다. 이는 곧 21절의 ‘혼’(히, 네페쉬)과 동의어이다. 그러므로 본 절처럼 ‘호흡이 하나도 남지 않았다’는 말은 ‘혼이 나갔다’, 즉 ‘생명이 없어졌다’는 뜻이다.
당신이 나와 더불어 무슨 상관이 있기로. 과부에게 있어서 독자(獨子)란 대개 유일한 생의 희망인 법이다. 그런데 그 아들이 죽자 과부는 층격을 받고 엘리야와의 관계를 부정한다. 즉, 사르밧 과부는 엘리야에게 ‘내가 당신을 선대(善待)한 결과가 도리어 이것입니까? 내가 당신에게 섭섭하게 대한 일이라도 있었단 말입니까?’라고 항변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그동안 과부가 엘리야를 공궤했던 것은 그가 하나님의 선지자였으므로 선지자의 대접을 한 것이다. 그럼으로써 과부는 선지자의 보상을 받았던 셈이다. 15절 주석 참조. 그런데 갑자기 아들이 죽자 그것은 과부에게 있어서 이 모든 것을 일순간에 허무한 것으로 만들 정도의 큰 고통이 된 것이다.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이 말에는 재난이나 질병을 자신의 죄와 결부시켜 생각하는 고대인들의 통념적 사고 방식이 잘 담겨 있다(욥 4:7, 요 9:2 등). 즉, 사르밧 과부는 아들의 죽음을 자신의 죄값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사실 엘리야 같은 선지자가 옆에 있음으로 해서 과부는 자신의 죄에 대해 더욱 민감한 의식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과부의 아들이 죽은 것은, 비록 엘리야조차도 당혹스러워 했지만(19-11절) 도리어 이것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기 위함’이었다(요 9:3). 즉, 아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건(22-24절)을 통해 사르밧 과부는 하나님의 크신 능력과 보다 밝은 계시를 깨닫게 됨으로써 더욱 성숙된 신앙으로 발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유대인만의 하나님이 아닌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신다는 진리(롬 3:29)를 보여주는 사건이기도 하니 이로써 사르밧 과부는 더욱더 진실되게 여호와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Keil & Delitzsch). 한편 본 절의 ‘생각나게’에 해당하는 원어 ‘자카르’는 ‘기억하다, 회상하다’는 뜻이다. 그런데 혹자는 이를 ‘하나님 앞에 등록하다’는 뜻으로도 풀이한다(Skinner). 그렇다면 이 말은 사르밧 과부의 죄가 하나님 앞에 기록된 보고서처럼 정식 등록되어 심판이 즉각 떨어지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셈이다(단 7:10).
자기가 거처하는 다락에. 이스라엘인들의 ‘다락’(히, 알리야)은 우리 생각과는 달리 그 집의 가장 좋은 처소이다. 왜냐하면 팔레스타인과 같은 뜨거운 기후의 지방에서 지붕 위에 있는 방은 비교적 통풍이 잘되는 쾌적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엘리야가 다락에 기거하고 있었다는 것은 사르밧 과부로부터 환대를 받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러한 환대에도 불구하고 사르밧 과부가 큰 불행을 당하였으니 그곳에 체류하고 있는 엘리야로서도 난처하고 민망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또. ‘또’로 번역된 원어 ‘감’은 문맥상 ‘기어코’ 또는 ‘결국’의 의미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왜냐하면 ‘또’로 번역할 경우 이번과 같은 경우가 그 전에 또 있었음을 전제하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한글 공동번역은 이를 ‘기어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즉 이는 아이의 죽음을 그대로 당신의 최종 결론으로 삼으시겠냐는 하나님께 대한 엘리야의 항변이다.
혼으로 그의 몸에 돌아오게. 이 말은 헬라의 이원론적 사상에서 볼 수 있듯이 마치 인간이 혼과 몸으로 구성된 이원론적 존재임을 시사하는 듯하다. 그러나 여기서 ‘혼’으로 번역된 ‘네페쉬’는 ‘생명, 목숨’을 의미할 따름이다. 17절 주석 참조. 그러므로 ‘혼이 몸에 돌아오다’는 말은 목숨을 되살려 달라는 말일 뿐이다.
살아났느니라. 이에 해당하는 원어 ‘하이’는 ‘산 채로 있다’ 또는 ‘생명을 회복하다’는 뜻의 ‘하야’에서 온 말이다. 따라서 이는 문맥상 ‘되살아 났다’는 뜻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 원래 구약이 보여 주는 하나님은 인간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이는 곧 침묵과 비밀로 자신을 감추지 않으시고 도리어 자신을 드러내시는 하나님을 말한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말씀은 자주 선지자의 입술을 통해 전달된다. 따라서 이때 선지자의 입은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와 궁극성을 지키기 위해 자의적(恣意的) 조작이 아닌 진실만을 말할 것이 요구된다. 즉, 이때 그의 입은 곧 하나님의 입과 일치 되어야 한다(렘 15:19). 그런데 비단 선지자 뿐 아니라 일반적으로 말해서도 ‘입’(히, 페)은 개인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확인시켜 주는 기관이다(시 141:3). 그러므로 지금까지 엘리야가 겪은 사건은 엘리야의 입과 하나님의 입 사이의 일치성이 일시적이나마 의심받은 위기의 사건이요(17-21절) 동시에 잠시 후 그 일치의 공고성이 확증됨으로써(22, 23절) 하나님 말씀의 권위와 궁극성이 더욱 입증된 승리의 사건이라 하겠다. 아무튼 이후 이 사건은 그 시대를 향한 엘리야의 모든 발언에 권위를 부여해 주는 효과를 발휘하였을 것이다.
진실한 줄 아노라. ‘진실한’에 해당하는 원어 ‘에메트’는 그 확실성을 분명히 신뢰할 수 있는 ‘진실’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 단어는 하나님 말씀의 본성을 지적할 때에 자주 사용되었다(시 119:142, 151, 160, 단 10:21). 그러므로 사르밧 과부가 하나님의 말씀이 진실한 것임을 시인한 점은 이제 그녀가 보다 확고한 신앙 상태에 이르렀음을 보여 준다. 선민(選民)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던 시대에 이처럼 한 이방인 과부가 하나님의 말씀을 진실하다고 고백한 사건은 예수께서도 인용하실 만큼 뜻깊은 사건이었다(눅 4:2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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