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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 길르앗. ‘길르앗’은 ‘증거의 돌무더기’라는 뜻으로 여겨진다(Guthrie Jr.). 그렇다면 신앙의 암흑기인 아합 시대에 여호와 신앙의 증거자 엘리야가 이 지방에서 배출된 점은 의미가 있다. 길르앗이라는 지명은 넓게는 남쪽 아르논 강에서 북쪽 야르묵 강에 이르는 요단 동편 일대를 가리킨다(Cohen). 이곳은 곡창 지대와 목축지로 유명하였는데, 일찍이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가 이곳을 자신들의 기업(基業)으로 요구할 정도였다(민 32:1-5).

디셉. 디셉은 엘리야의 고향으로 여섯 번이나 언급되지만 정확한 위치는 알 길이 없다(21:17, 28, 왕하 1:3, 8, 9:36). 다만 길르앗 북방 산악 지대에 위치한 현재의 리스팁(Listib)일 가능성이 있다(Cohen). 한편 외경 토빗서 1:2에는 납달리에 있는 게데스의 남쪽 한 지역이 ‘디셉’으로 언급되고 있다. 만일 ‘디셉 사람’이란 말이 여기에서 유래된 것이라면 엘리야는 디셉에서 출생하여 길르앗에 정착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N. Glueck).

엘리야. ‘엘리야’(또는 엘리야후)는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는 뜻이다. 실제로 엘리야의 생애는 그 같은 이름의 뜻과 어울린다. 성경에는 엘리야의 가계(家系)가 언급되지 않지만 그는 B.C. 9세기의 유명한 선지자로서 아합 왕(B.C. 874-853) 때부터 아하시야 왕(B.C. 853-852) 때까지 북 왕국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특히 그는 모세에 버금가는 인물로서 유대인들의 추앙을 받았는데 예수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 세례 요한의 정체를 확인하면서 그가 엘리야인지 물어 볼 정도였다(요 1:21).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 이 짧은 어구에 함축된 의미는 대단히 크다. 즉 본 절은 크게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1)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다는 뜻이다. 이 말은 바알 숭배가 만연한 당시의 상황에 대해 강한 거부의 뜻을 담고 있다. 즉 이는 이스라엘의 참신은 여호와이지 바알이 아니라고 항변한다. (2) 그리고 그 여호와가 바로 ‘내가 섬기는’ 하나님이시다는 뜻이다. 이 말에는 바알을 섬기는 무리가 다수인 당시의 형편이 잘 반영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는 그 속에서 자신의 현주소와 입장을 밝히는 신앙 고백인 동시에 자신이 여호와께로부터 보냄 받은 대사(大使)임을 밝히는 말이다.

여호와께서 … 맹세하노니. 이러한 표현은 구약 시대 당시 일반적인 맹세의 형식이긴 하다(18:10, 렘 5:2, 16:14, 호 4:15). 그러나 단지 상투적 어구만이 아니고 당시 상황에서의 진솔한 신앙고백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 의미는 분명해진다. 즉 바알 및 우상 숭배 세력이 지배적인 상황 속에서 ‘살아있는 참신은 여호와’라는 이 어구의 말은 담대한 도전의 성격을 띤 것이다.

내 말이 없으면 …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 때를 따라 적절히 내리는 단비는 성경에서 종종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의 결과로 언급되고 있다(신 11:11, 14, 욥 5:10, 28:26, 36:27, 시 147:8). 그리고 그 반면에 백성이 우상 숭배에 빠지면 하늘은 더 이상 비를 내리지 않아 생명을 쇠약하게 하며 땅을 메마르게 하리라는 경고도 아울러 언급되어 있다(신 11:17, 28:24). 그런데 수 년간 비가 없으리라는 본 절의 가뭄 예언 역시 아합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우상 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예언이다(16:26-33). 더욱이 여호와의 말씀이 없는 한 가뭄이 계속될 것이라는 엘리야의 선언은 바알 숭배에 대한 정면 도전이다. 왜냐하면 당시 바알(Baal)은 땅에 비를 내리는 등 생산력을 주관하는 신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같은 능력조차도 여호와의 장중에 있다는 이 예언은 곧 바알이 생명없는 거짓 신임을 폭로하는 것이다(Lange).

 

17:2 여호와의 말씀이 … 임하여. ‘임하여’에 해당하는 원어 ‘하야’는 원래 ‘되다, 존재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는 정적(靜的)인 상태를 의미하기 보다는 대단히 역동적인 상태를 가리킨다. 그러기에 본 절에서도 하나님의 말씀과 관련, 그저 ‘있다’라고 하지 않고 ‘오다, 임하다’ 등으로 번역한 것이다. 한편 한 시대의 다수를 홀로 상대해야 할 신앙의 용사 엘리야에게는 이처럼 하나님께서 수시로 말씀을 통해 세세하게 지시하셨다. 이는 곧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소명을 주셨을 뿐 아니라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까지도 은혜 가운데 주셨음을 의미한다.

 

17:3 여기서 떠나 동쪽으로 가서. 앞서 엘리야는 아합을 찾아가 경고했을 것이다(1절). 그러므로 ‘여기서’는 아합의 왕궁이 있는 사마리아일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성경에서 ‘동쪽으로’는 일반적으로 요단 강 동편을 말한다.

요단 앞. ‘앞’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알 페네’는 창 16:12에서 ‘동방’으로 번역되었는데 여기서도 ‘동쪽’으로 번역함이 더 타당할 듯 하다(Keil & Delitzsch, Pulit Commentary). RSV 등 대다수 영역본과 한글 공동번역도 이를 ‘동쪽’으로 번역하고 있다.

그릿 시냇가. ‘그릿’은 ‘분리, 단절’이란 뜻이다. 그러므로 이 시내는 어떠한 지역을 구분하는 경계선 구실을 했던 것 같다(Hammond). 한편 이 시내의 정확한 위치는 아직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엘리야가 길르앗 사람인 점(1절)에 비추어 볼 때 이는 요단 동편 길르앗의 동굴 지대에 있는 시내 중 하나일 것이다(Cohen).

숨고. ‘숨고’는 문자 그대로 ‘피하다, 감추다’는 뜻의 ‘사타르’에서 온 말이다. 그러므로 이 동사에서 엘리야의 심판 예언(1절)이 있은 후 아합과 이세벨의 즉각적인 위협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아마도 아합의 입장에서 엘리야의 선포는 민심을 교란하는 유언 비어요 반 정부적인 도전으로 비쳤을 것이다. 그러나 그 같은 위협만이 피신의 원인은 아니다. 아직은 여호와 신봉자와 이방신 숭배자 간의 정면 대결(18장)의 시기가 무르익지 않았기에 하나님께서는 당분간 엘리야에게 몸을 숨기도록 명하신 것이다(Lange, Matthew Henry, R. D. Patterson).

 

17:4 까마귀들에게 명령하여. 혹자는 까마귀가 부정한 조류(레 11:5)라 하여 ‘까마귀’(히, 오르빔)를 ‘아랍인들’(히, 아르빔)이나 ‘상인들’(히, 오리빔) 또는 ‘오렙 사람들’(히, 오레빔)로 수정할 것을 제안한다(Hammond, Kimchi). 그러나 이러한 견해와는 달리 오히려 본문은 까마귀로 읽어야 할 강조점을 지닌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온통 바알 숭배로 돌아선 시점에 여호와 신앙의 용사 엘리야를 지탱해준 것은 까마귀, 이방인 과부(9-16절)라는 역설의 강조점을 본문은 담고 있기 때문이다(Lange, H. Austel, Keil & Delitzsch). 즉, 이스라엘이 부정한 것들로 여긴 요소들이 도리어 이스라엘의 구원과 정화에 기여한 것이다.

 

17:5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하여 곧 가서. 엘리야가 예언 선포 이후(1절) 이처럼 잠적해버린 사실을 놓고 그 당시 비웃은 사람들이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엘리야는 피신을 수치로 여기지 않고 즉각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였다. 즉 엘리야는 사람의 취향과 기질에 영합하여 영웅이 되기보다 자신을 잊고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하고 있는 것이다(갈 1:10).

 

17:6 까마귀들이 … 떡과 고기를. 까마귀는 본래 시체와 썩은 것들을 즐겨 먹는 날짐승이다. 그런데 그런 까마귀가 엘리야에게 음식을 가져다 주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기적적인 능력을 증언해 주는 것이다. 이처럼 까마귀도 순종케 하는 하나님의 능력은 엘리야에게 깊은 감명과 용기를 주었을 것이다. 즉 여호와 신앙의 열의가 대단한 엘리야의 눈에는 당시 우상 숭배에 열중하는 백성의 모습이 마치 부패한 시체를 탐하는 까마귀떼처럼 가망 없어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까마귀도 순종하는 도구로 사용하셨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도 여호와의 강권적 은총으로 말미암아 변화될 수 있지 않겠는가? 이런 생각은 엘리야의 심령에 선지자적 소명을 더욱 강화시켜 주었을 것이다.

 

17:7 땅에 비가 내리지 아니하므로. 18:1과 야고보서 5:17에 의하면 당시 이 같은 가뭄은 3년 6개월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1절 주석 참조.

 

17:8 그릿 시냇물(3절)이 말라버리자 하나님께서는 이제 엘리야를 위하여 새로운 공급지를 알려주신다. 그 곳은 곧 사르밧으로(9절) 엘리야는 가뭄이 끌날 때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17:9 사르밧. ‘사르밧’은 ‘염색하다’는 뜻에서 온 명칭이다. 따라서 사르밧은 두로와 시돈 등과 마찬가지로 베니게의 명물인 염료 생산지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성읍은 헬라어로는 ‘사렙다’로 불리는데(눅 4:26) 오늘날의 수라펜드(Surafend)로서 두로와 시돈 가운데 쯤에 위치한 지중해 연안의 도시이다(Keil & Delitzsch). 그런데 이곳은 이세벨의 부친 시돈 왕 엣바알이 다스리는 지역이다(16:31). 결국 이세벨이 여호와 신앙인들을 탄압하고 있을 때 정작 엘리야는 이세벨의 고향 깊숙이 숨어버린 셈이다. 이 점은 마치 바로의 궁전에서 온전히 양육받은 모세를 방불케 하는 것으로서 대적자의 심장부가 도리어 하나님의 사람을 위한 피난처와 은신처가 된 기막힌 역설이다(출 2:10).

그 곳 과부에게 명령하여 … 하였느니라. 하나님의 종 엘리야의 은신처가 이방인, 그것도 무력한 과부과 있는 곳이었다는 것은 선민(選民) 이스라엘의 큰 수치이다. 이는 곧 당시 이스라엘이 얼마나 배교의 늪에 깊이 빠져 있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한편 고대의 가부장적 사회에서 ‘과부’(히, 알마나)는 남편이 없으므로 인해 사회, 경제적 지위가 비천한 존재였다(신 24:17). 그러나 하나님은 그처럼 약한 자를 들어 존귀하게 사용하셨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한 특징이며(고전 1:26-31) 누구든 하나님 앞에서 자랑치 못하게 한다(Matthew Henry).

음식을 주게. 이 말에 해당하는 원어 ‘카르케레카’는 ‘간직하다’는 뜻에서 온 말이다. 즉 이는 단순한 음식 제공을 넘어서 ‘정성을 다해 보살핌’의 의미가 담겨 있다.

 

17:10 나뭇가지를 줍는지라. 이는 거리에 떨어져 있는 모든 나뭇가지를 주워 땔감으로 쓸 수 밖에 없는 과부의 형편을 나타낸다. 만일 과부에게 경제적 여유가 있었다면 종을 부려 땔감을 해오게 하였거나 아니면 시장에서 땔감을 구입하였을 것이다(Matthew Henry).

물을 … 내가 마시게 하라. 아합 당시의 가뭄은 이스라엘 뿐 아니라 팔레스타인 여러 지역에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그렇다면 물이 귀한 상황에서 낮선 나그네의 물 요구는 대단한 부담이 되었을 것이다. 비록 근동에서는 식수 대접이 거의 신성한 의무처럼 여겨졌다 하더라도 말이다(Pulpit Commentary). 그러나 이는 사르밧 과부가 넘어야 할 첫 번째 시험이었다. 한편 엘리야가 물을 달라는 요구를 통해 자신을 대접할 과부를 식별하는 장면은 아브라함의 종이 이삭의 신부감을 찾는 장면을 연상케 한다(창 24:17, 요 4:7).

 

17:11 청하건대 … 떡 한 조각을 내게로 가져오라. 처음에 한 부탁을 거절치 않자 엘리야는 과부에게 이제 좀더 큰 부탁을 한다. 즉 극심한 가뭄으로 인해 그렇잖아도 더욱 식량이 없는 과부에게 떡을 요청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엘리야의 다소 무리한 부탁은 자신에게 음식을 제공할 과부가 누구인지 알아보는 데 목적이 있었으니(9절) 사르밧 과부는 이 두 번째 시험도 통과하여야 했다(Bähr).

 

17:12 당신의 하나님. 어떤 주석가들은 과부의 이 같은 말에서 그녀가 이미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섬기는 자였다는 해석을 하기도 한다(Keil & Delitzsch, Lange). 하지만 이 말은 정반대의 의미를 내포한 것이다. 즉 우리는 그녀가 ‘나의 하나님’이 아닌 ‘당신의 하나님’이라고 한 것에 주목해야 한다(Pulpit Commentary). 다시 말해 이스라엘과 전통적으로 교류가 많던 베니게의 한 여인으로서 이 과부는 엘리야가 이스라엘 사람인 것을 알고 단지 이스라엘의 민족 신을 호칭한 것 뿐이다. 사실 이 과부가 여호와 신앙을 받아들이게 된 시점은 어디까지나 그녀가 엘리야의 말을 청종한 그 순간이다(14, 15절). 아무튼 정작 선민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말씀에 청종치 않은 반면 이방인 과부는 선뜻 그 말씀을 받아들인 점이 주목된다. 그러기에 거기에서 엘리야는 하나님이 예비하신 봉사자가 누군지 분명히 확인하였을 것이다.

나는 …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 엘리야의 요청에 과부가 당황한 까닭은 그나마 남은 밀가루는 최후의 만찬용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떡 하나를 요구한 엘리야의 한 마디는 과부에게는 자신의 전부를 요구하는 엄청난 요청이 아닐 수 없었다. 훗날 예수의 말씀 가운데 이 과부가 신앙의 표본으로 등장하게 된 이유도 바로 이처럼 생사(生死)의 갈림길에서 그녀가 순종의 길을 따랐기 때문이다(눅 4:24-26, 21:2). 한편 이스라엘이 바알 숭배에 몰두하는 동안 바알 숭배의 본 고장에서 한 과부가 바알 신앙을 포기했다는 점은 참으로 경이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 우리는 아무리 캄캄한 흑암 속에서도 이처럼 하나님의 구원의 빛이 역사할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사 42:16, 마 4:16, 골 1:13).

 

17:13 두려워하지 말고. ‘두려워하지’에 해당하는 원어 ‘야레’는 ‘무서워하다’ 외에도 ‘존경하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하나님이 두려움의 대상이 되면 그것은 지헤의 토대로서 하나님께 대한 외경심이라는 이상적(理想的)인 것이 된다. 그러므로 사르밧 과부가 단순한 정서적 반응으로서의 두려움에서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으로 전환되는 것이 곧 믿음으로 이행되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본 절에서 엘리야가 지적하는 과부의 두려음은 불확실한 장래에 대한 불안으로서 부정적이고 극복되어야 할 어떤 것이다. 그런데 어떤 정서의 극복이란 이성이나 논리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보다 차원이 높은 정서의 대체로서 완결된다. 즉 과부의 장래에 대한 두려움은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으로 대체될 때 비로소 온전히 해소될 수 있다.

먼저 … 그 후에.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이행, 즉 믿음으로 가는 과정은 논리적인 순차성을 따라 자연히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그 과정에는 의지적 선택에 의한 결단의 단계가 포함된다. 엘리야의 말 속에서 그러한 결단의 촉구가 드러나는 곳이 바로 이 부분이다. 즉 떡을 만들되 먼저 엘리야에게 가져 오고 차후 자신과 아들을 위해 만들라는 말이다. 최후의 양식, 이것으로 마지막이라는 생각!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것을 바치라 하신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의 특성은 모든 면에서 우선순위를 하나님과 그분의 영광에 두는 것이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 6:33).

 

17:14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 이처럼 엘리야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란 표현을 사용한 것은 사르밧 과부가 이방인이며 적어도 아직까지는 개종한 자가 아님을 다시 한번 시사해 준다(Hammond). 12절 주석 참조.

 

17:15 그와 엘리야와 그의 식구. 12, 13절에 의하면 사르밧 과부에게는 가족이라곤 아들 하나밖에 없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도 본 절에서 ‘식구’(히, 바이트), 즉 권속(眷屬)이란 말이 나온 것으로 보아 아마도 이들은 사르밧 과부에게 임한 축복의 소식을 듣고 온 그녀의 친척들을 가리키는 것 같다(Lange, Pulpit Commentary).

여러 날. ‘여러 날’(히, 야밈)은 며칠 정도가 아닌, 상당히 오랜 기간을 의미한다. 그런데 14절에 따르면 사르밧 과부의 집에 밀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은 시기는 다시 비가 내릴 때까지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 기간은 적어도 2년 이상이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왜냐하면 당시 가뭄은 3년 6개월 간이나 지속되었으니(약 5:17) 그동안 엘리야가 그릿 시냇가에 머문 기간(2-7절)을 빼더라도 엘리야는 사르밧 과부의 집에서 2년 이상 음식을 공급 받았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상과 같이 사르밧 과부는 선지자 엘리야를 영접함로써 선지자의 보상을 받음은 물론(마 10:41) 자신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온 가족에게까지 구원의 은총을 끼쳤다.

 

17:16 통의 가루가 … 없어지지 아니하니라. 혹자는 본 절에 묘사된 현상을 합리적으로 설명하려 시도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무익한 일이다. 왜냐하면 본 절은 하나님의 초자연적 개입과 말씀을 확실히 이루심에 초점을 두고 있는 것이지 현상 자체의 건조한 설명을 요구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여하튼 본 절의 기적은 엘리사가 가난한 과부에게 기름을 가득 채워주었던 기적(왕하 4:1-7)과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연상케 한다(막 6:41-43).

 

17:17 그 집 주인 되는 여인. ‘주인’(히, 바알라)는 ‘여주인’란 뜻이다. 즉, 엘리야가 거처하는 집의 소유주인 여성, 곧 과부를 말한다. 그런데 그냥 과부라 하지 않고 굳이 그 집의 주인인 점을 밝히는 이유는 다음에 이어지는 상황의 곤경을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다. 즉 엘리야가 몸을 의탁한 집 주인의 아들이 병들어 죽고, 그 재앙이 엘리야의 기거와 결부되면서 발생하는 위기의 성격(18절)을 두드러지게 하려는 것이다.

숨이 끊어진지라. ‘숨’(히, 네샤마)은 생명 현상의 대표적인 기능인 호흡(breath)을 가리킨다. 이는 곧 21절의 ‘혼’(히, 네페쉬)과 동의어이다. 그러므로 본 절처럼 ‘호흡이 하나도 남지 않았다’는 말은 ‘혼이 나갔다’, 즉 ‘생명이 없어졌다’는 뜻이다.

 

17:18 하나님의 사람. 그 말과 행위에 있어서 진정한 선지자를 일컬을 때 자주 사용되는 용어이다. 13:1 주석 참조. 사르밧 과부는 엘리야가 베푼 이적을 보고서 엘리야가 진정한 여호와 하나님의 선지자였음을 확신한 게 분명하다(15, 16절).

당신이 나와 더불어 무슨 상관이 있기로. 과부에게 있어서 독자(獨子)란 대개 유일한 생의 희망인 법이다. 그런데 그 아들이 죽자 과부는 층격을 받고 엘리야와의 관계를 부정한다. 즉, 사르밧 과부는 엘리야에게 ‘내가 당신을 선대(善待)한 결과가 도리어 이것입니까? 내가 당신에게 섭섭하게 대한 일이라도 있었단 말입니까?’라고 항변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그동안 과부가 엘리야를 공궤했던 것은 그가 하나님의 선지자였으므로 선지자의 대접을 한 것이다. 그럼으로써 과부는 선지자의 보상을 받았던 셈이다. 15절 주석 참조. 그런데 갑자기 아들이 죽자 그것은 과부에게 있어서 이 모든 것을 일순간에 허무한 것으로 만들 정도의 큰 고통이 된 것이다.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이 말에는 재난이나 질병을 자신의 죄와 결부시켜 생각하는 고대인들의 통념적 사고 방식이 잘 담겨 있다(욥 4:7, 요 9:2 등). 즉, 사르밧 과부는 아들의 죽음을 자신의 죄값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사실 엘리야 같은 선지자가 옆에 있음으로 해서 과부는 자신의 죄에 대해 더욱 민감한 의식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과부의 아들이 죽은 것은, 비록 엘리야조차도 당혹스러워 했지만(19-11절) 도리어 이것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기 위함’이었다(요 9:3). 즉, 아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건(22-24절)을 통해 사르밧 과부는 하나님의 크신 능력과 보다 밝은 계시를 깨닫게 됨으로써 더욱 성숙된 신앙으로 발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유대인만의 하나님이 아닌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신다는 진리(롬 3:29)를 보여주는 사건이기도 하니 이로써 사르밧 과부는 더욱더 진실되게 여호와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Keil & Delitzsch). 한편 본 절의 ‘생각나게’에 해당하는 원어 ‘자카르’는 ‘기억하다, 회상하다’는 뜻이다. 그런데 혹자는 이를 ‘하나님 앞에 등록하다’는 뜻으로도 풀이한다(Skinner). 그렇다면 이 말은 사르밧 과부의 죄가 하나님 앞에 기록된 보고서처럼 정식 등록되어 심판이 즉각 떨어지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셈이다(단 7:10).

 

17:19 여인의 품에서 받아 안고. 사르밧 과부가 품에 안을 정도인 것으로 보아 당시 그녀의 아들은 퍽 어렸던 것 같다(Hammond). 따라서 그처럼 어린 자식의 죽음은 그녀에게 애처로움을 더해 줬을 뿐 아니라, 자신의 죄를 생각나게 하였다.

자기가 거처하는 다락에. 이스라엘인들의 ‘다락’(히, 알리야)은 우리 생각과는 달리 그 집의 가장 좋은 처소이다. 왜냐하면 팔레스타인과 같은 뜨거운 기후의 지방에서 지붕 위에 있는 방은 비교적 통풍이 잘되는 쾌적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엘리야가 다락에 기거하고 있었다는 것은 사르밧 과부로부터 환대를 받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러한 환대에도 불구하고 사르밧 과부가 큰 불행을 당하였으니 그곳에 체류하고 있는 엘리야로서도 난처하고 민망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17:20 부르짖어. 이에 해당하는 원어 ‘카라’는 도움을 호소하여 급히 부르는 절박함과 안타까움을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과부의 아들의 죽음과 과부의 항변은 엘리야를 당황하게 했음을 알 수 있다. 즉, 이는 당시 엘리야 자신도 미처 하나님의 뜻을 충분히 깨닫지 못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그러나 엘리야는 기도의 사람이었다. 그러기에 그는 당혹한 일을 당하여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그리고 그 결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는 간구하는 자의 기도에 반드시 응답하시는 살아계신 분이심이 드러났다(24절).

또. ‘또’로 번역된 원어 ‘감’은 문맥상 ‘기어코’ 또는 ‘결국’의 의미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왜냐하면 ‘또’로 번역할 경우 이번과 같은 경우가 그 전에 또 있었음을 전제하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한글 공동번역은 이를 ‘기어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즉 이는 아이의 죽음을 그대로 당신의 최종 결론으로 삼으시겠냐는 하나님께 대한 엘리야의 항변이다.

 

17:21 그 아이 위에 몸을 세 번 펴서 엎드리고. 이 행위가 무얼 의미하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손을 얹고 기도할 때의 간절함 및 치유자의 자기 투신의 극단적 확대 형태일 가능성이 높다. 즉, 이는 하나님의 능력이 자신의 몸을 통해 죽은 아이에게 전달되므로 그 아이가 소생(蘇生)할 것을 염원하는 신앙적 행동이다(Schmidt). 물론 여기에는 간절한 염원 외에도 의식적(ritual) 요소가 담겨 있는 것이 사실이다. 즉, 세 번 엎드린 것이 그것인데 여기서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만 아이의 소생이 가능하다고 하는 엘리야의 믿음을 엿볼 수 있다. 왜냐하면 ‘3’이란 숫자는 하나님의 ‘완전 수’이기 때문이다. 한편 성경에는 본 절과 비슷한 장면이 더 나오는데 곧 엘리사와 바울의 경우에서 찾아 볼 수 있다(왕하 4:34, 행 20:9 이하).

혼으로 그의 몸에 돌아오게. 이 말은 헬라의 이원론적 사상에서 볼 수 있듯이 마치 인간이 혼과 몸으로 구성된 이원론적 존재임을 시사하는 듯하다. 그러나 여기서 ‘혼’으로 번역된 ‘네페쉬’는 ‘생명, 목숨’을 의미할 따름이다. 17절 주석 참조. 그러므로 ‘혼이 몸에 돌아오다’는 말은 목숨을 되살려 달라는 말일 뿐이다.

 

17:22 여호와께서 엘리야의 소리를 들으시므로. ‘소리’(히, 콜)에 귀를 기울였다는 말은 곧 기도의 응답을 의미한다. 그런데 본 절에서 ‘들으시므로’에 해당하는 원어 ‘샤마아’는 특히 ‘이해하며 경청하는’ 세심한 동작을 의미한다. 즉 이는 엘리야의 항변하는 듯한 기도속에 담긴 처지와 곤경, 다급한 마음을 통틀어 이해하시는 하나님의 경청 자세를 잘 나타내준다. 한편 엘리야는 신약에서도 기도의 대표적 인물로 언급된다(약 5:17).

 

17:23 다락에서 방으로 내려가서. 17절 이하의 사건에서 다락과 방은 이야기의 전개상 다분히 상징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즉 고대 근동 지방에서 다락이란 귀빈 접대의 장소이다. 19절 주석 참조. 그런데 아이가 죽었을 때 엘리야는 다락 아닌 방으로 불려와 있다(17, 18절). 이는 곧 다락으로 상징되는 환대를 받게 했던 하나님의 선하심이 의심받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다음 장면에서 엘리야는 죽은 아이를 안고 다시 다락에 올라와 하나님께 호소한다(19-21절). 그리고 여기서 지금까지 그가 다락에 머무를 수 있었던, 또 앞으로 계속 있게 할 참된 힘의 소재가 분명해진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엘리야의 기도에 응답하사 죽은 아이가 소생하였기 때문이다(22절). 따라서 이제 엘리야가 두 번째 다락에서 방으로 내려갈 때는 이전의 당혹스럽고 비루한 처지가 아니다. 대신 엘리야는 당당하게 하나님의 능력의 증거를 안고 내려가는 것이다. 이처럼 외면상 똑같은 동작이긴 하나 거기에 실린 의미의 차이는 엄청나다. 때문에 여기서 모든 의심을 종식 시키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극적 강조는 더욱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

살아났느니라. 이에 해당하는 원어 ‘하이’는 ‘산 채로 있다’ 또는 ‘생명을 회복하다’는 뜻의 ‘하야’에서 온 말이다. 따라서 이는 문맥상 ‘되살아 났다’는 뜻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17:24 이제야. ‘이제야’(히, 앗타제)는 ‘앗타’(now)와 ‘제’(this)의 결합어이다. 즉 ‘이제 이것으로’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 이는 죽은 아이 소생 사건으로 인해 사르밧 과부가 더욱더 확실히 엘리야를 신뢰하게 된 것을 의미한다.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 원래 구약이 보여 주는 하나님은 인간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이는 곧 침묵과 비밀로 자신을 감추지 않으시고 도리어 자신을 드러내시는 하나님을 말한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말씀은 자주 선지자의 입술을 통해 전달된다. 따라서 이때 선지자의 입은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와 궁극성을 지키기 위해 자의적(恣意的) 조작이 아닌 진실만을 말할 것이 요구된다. 즉, 이때 그의 입은 곧 하나님의 입과 일치 되어야 한다(렘 15:19). 그런데 비단 선지자 뿐 아니라 일반적으로 말해서도 ‘입’(히, 페)은 개인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확인시켜 주는 기관이다(시 141:3). 그러므로 지금까지 엘리야가 겪은 사건은 엘리야의 입과 하나님의 입 사이의 일치성이 일시적이나마 의심받은 위기의 사건이요(17-21절) 동시에 잠시 후 그 일치의 공고성이 확증됨으로써(22, 23절) 하나님 말씀의 권위와 궁극성이 더욱 입증된 승리의 사건이라 하겠다. 아무튼 이후 이 사건은 그 시대를 향한 엘리야의 모든 발언에 권위를 부여해 주는 효과를 발휘하였을 것이다.

진실한 줄 아노라. ‘진실한’에 해당하는 원어 ‘에메트’는 그 확실성을 분명히 신뢰할 수 있는 ‘진실’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 단어는 하나님 말씀의 본성을 지적할 때에 자주 사용되었다(시 119:142, 151, 160, 단 10:21). 그러므로 사르밧 과부가 하나님의 말씀이 진실한 것임을 시인한 점은 이제 그녀가 보다 확고한 신앙 상태에 이르렀음을 보여 준다. 선민(選民)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던 시대에 이처럼 한 이방인 과부가 하나님의 말씀을 진실하다고 고백한 사건은 예수께서도 인용하실 만큼 뜻깊은 사건이었다(눅 4:2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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