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 주석, 열왕기상 1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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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 하나니의 아들 예후. “예후”란 이름은 “그는 여호와이시다”란 뜻이다. 그런데 본 절의 예후는 오므리 왕조에 반란을 일으킨 북(北) 이스라엘의 10대 왕 예후와는 동명이인(同名異人)이다(왕하 9:2). 한편 예후의 아버지 하나니(Hanani)는 유다 왕 아사의 실책을 경고하다 옥에 갇힌 인물이다(대하 16:7-10). 그리고 그의 아들인 예후는 본 장에서처럼 바아사를 책망했을 뿐 아니라 여호사밧 왕을 아합왕과 연합한 일로 책망하였다(대하 19:2).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과 예후 부자(父子)가 모두 하나님의 신실되고도 용맹스러운 선지자였음을 알 수 있다.

바아사를 꾸짖어 이르시되. 유다의 선자자인 예후가 이처럼 이스라엘 왕 바아사(15:28-34)를 책망한 것은 당시 정세(15:32)로 보아 매우 이례적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에 함축되어 있는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간파할 수 있다. 즉 당시 예후의 예언 속에는 당신의 언약 백성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끝없는 관심과 배려가 암시되어 있다. 다시 말해 남북 왕국으로 분단되기는 했으나 남(南) 유다 뿐 아니라 북(北) 이스라엘 또한 동일하게 하나님의 언약 속에 포함된 백성이었으므로 하나님께서는 남 왕국의 선지자 예후를 통해 북 왕국에 대한 예언을 선포하신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이 만든 어떠한 인위적 방법이 굳건하더라도 언제 어디서든 선포되어야 한다(렘 3:12).

 

16:2 내가 너를 티끌에서 들어 … 되게 하였거늘. “티끌”(히, 아파르)은 “회색이 되다, 빻다”에서 유래된 말이다. 문자적으로는 “티끌, 흙”의 뜻이지만 여기서는 사회적으로 “비천한 신분”을 의미한다. 14:7의 여로보암에 대한 언급이 “백성 중에서 들어 주권자가 되게 하고”인 것과 비교하면 이는 훨씬 비하(卑下)적인 표현임을 알 수 있다. 아무튼 본 절은 바아사의 출신 신분이 매우 비천하였음과 그가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로 말미암았음을 상기시켜 준다. 즉 바아사는 왕통을 이은 자도 아니었으며 큰 지파 출신도 아니었는데도, 여로보암의 집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14:14) 왕이 되었다. 만일 그가 역사 속에서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이 같은 손길(마 10:29-31)을 발견하였더라면 배은 망덕한 여로보암의 전철을 되풀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H. Austel).

주권자. 이에 해당하는 원어 “나기드”는 “어떤 것을 사람 앞에 눈에 띄도록 높이 두다”는 말에서 유래된 단어이다. 즉 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두드러지게 탁월한 인물을 가리킨다. 한편 바아사가 비천한 계급임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이스라엘의 주권자가 된 것은 물론 그의 용맹이 탁월했기 때문이기도 하나 그 용맹은 궁국적으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따라 바아사에게 주신 것이다.

노엽게 하였은즉. 15:30 주석 참조.

 

16:3 쓸어버려. 이에 해당하는 원어 “바아르”는 본래 “불태우다, 소멸하다”는 뜻이다. 특히 이는 “불태워 완전히 연소시키는 것”을 강조하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이 단어는 사악한 자를 징벌하는 하나님의 격분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었다. 한편 이후에도 선지자들은 반역한 이스라엘이 거룩하신 하나님께로부터 받게 될 징벌을 묘사하기 위해 이 단어를 사용한 예가 있다(사 30:27, 렘 7:20 등).

여로보암의 집 같이 되게 하리니. 앞서 2절이 바아사의 죄를 우상 숭배 곧 하나님께 대한 배은 망덕으로 규정하고 있음에 비해 본 절은 이제 그에 상응하는 하나님의 징벌이 무엇인지를 밝히고 있다. 그것은 바로 바아사의 가문을 “여로보암의 집 같이” 되게 한다는 것이다. 이에 해당하는 구체적 내용은 다음 4절에서 언급되고 있다.

 

16:4 죽은즉 개가 먹고. 이는 여로보암 가문을 향한 저주로 사용됐던 말(14:11)과 동일한 문구로써, 비참한 말로는 물론 사후에도 치욕을 면치 못할 바아사의 운명에 대한 예언이다. 그런데 바아사가 여로보암이 지은 것과 같은 동일한 죄(14:9)에 빠진 이상(2절) 이처럼 여로보암이 받은 형벌과 똑같은 형벌을 받게 됨은 지극히 마땅하다. 한편 이렇듯 엄정하고 단호한 공의의 심판은 오늘날 일시적 탐욕이나 영달에 눈이 어두워 불의와 영합하는 모든 자들에게도 동일하게 임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성도들은 잠시 오욕의 낙을 누리기 보다는 영원한 진리를 위해 영예로운 고난을 택하는 것이 마땅하다(히 11:25).

 

16:5 바아사의 … 권세. 여기서 “권세”는 강력한 왕권(王權)을 의미한다. 그런데 혹자는 이를 바아사가 용감하고 전투적인 인물임을 나타내는 단어로 이해하기도 한다(Ewald). 그러나 앞서 유다 왕 아사에게도 같은 단어가 적용되었음을 볼 때 이는 본래대로 통치에 있어서 강력하고 힘이 있었음을 지적하는 단어로 봄이 타당하다(Keil & Delitzsch).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15:23 주석을 참조하라.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 14:19주석 참조.

 

16:6 디르사. 세겜(Shechem, 12:25)에 이어 두 번째로 북(北) 이스라엘의 수도(首都)가 된 왕도(王都)이다. 세겜 동북쪽 11 km 지점에 있는데 전략적으로 중요한 요충지였다. 14:17 주석 참조.

그의 아들 엘라. “엘라”는 상수리나무 비슷한 어떤 나무의 명칭이면서(Guthrie, Jr), 또한 과거 다윗과 골리앗이 싸운 계곡의 지명이기도 하다(삼상 17:2, 19). 이곳은 깁브돈 부근의 인접 지역인데 깁브돈은 바아사가 나답을 죽이고 자신의 왕조를 창건한 곳이다(15:27, 28). 이로 볼 때 아마도 바아사는 그 지역에 대한 애착 때문에 자신의 아들의 이름을 엘라(Elah)로 지은 것 같다(Hammond).

 

16:7 본 절은 1, 2절이 별 의미없이 반복된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본 절은 2절에서 생길지도 모를 오해를 막으려고 추가된 해설적 성격의 절이다(Bähr, Hammond, Keil). 이때 오해란 바아사가 하나님께로부터 소명(召命)을 받아 여로보암의 집을 멸하였다고 생각하는 오해이다. 그러나 본 절에 분명히 나타나듯 바아사는 단지 이기적 동기로 그렇게 했을 뿐이다. 즉 본 절은 바아사가 우상 숭배 죄악을 저질었을 뿐 아니라 여로보암 일족을 살해한 일도 고발하고 있다(”또 그의 집을 쳤음이더라”). 다시 말해 바아사가 여로보암 왕조를 전복시키고 왕위를 찬탈한 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야심과 정권욕(政權慾) 때문이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바아사를 도구로 삼아 패역한 여로보암 가문을 징계한 것뿐이다(15:25-30).

행위. 이에 해당하는 “마아쉐”는 “행하다, 만들다”에서 온 말이다. 이는 물건을 만드는 것과 관련해서는 “기량, 솜씨”를 의미한다. 그러나 그 외에는 윤리적 행위를 지칭 하는데 대개 부정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출 23:24, 스 9:13 등). 여기서도 바아사가 저지른 부당한 행위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16:8 유다의 아사 왕 제이십육년에. 아사의 즉위를 B,C. 910년경으로 볼 때 이때는 곧 B.C. 886년경이다.

엘라가 … 이 년 동안 그 왕위에 있으니라. 엘라는 아사 제27년째에 자신의 군대 장관 시므리에게 살해당한다(9, 10절). 따라서 엘라는 만 2년도 통치하지 못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곧 앞서 나답이 당한 것과 똑같은 재난이라 할 수 있다(15:28).

 

16:9 마시고 취할 때에. 15절의 정황으로 미루어 보아 이 때는 북 왕국의 군대가 깁브돈에 출정하여 공략 중에 있었던 때이다. 그런데 그러한 시점에 왕이 대신의 집에서 연회(宴會)를 열고 있었다는 것은 올바르지 않았음을 알려준다. 더구나 당시 신하의 향응(響應)를 받았다는 것은 품위에 어긋난 행위라는 지적도 있다(Rawlinson). 따라서 이 모든 것은 엘라의 인품에 결점이 있었음을 암시한다. 신복 시므리의 역심(逆心)도 어느 정도 이런 면에서 기인했을 수 있다. 즉 그는 엘라를 왕으로서는 모자라는 인물로 비웃었을 수 있다.

신하 … 시므리가 왕을 모반하여. 성경에서 시므리에 대해서는 아버지의 이름도 출신 지파도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이제 본 절에 의하면 그는 오므리와 함께 군부 내의 실력자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즉 시므리는 북 왕국 병거대의 절반을 이끄는 군대 장관이었다. 그런데 본서 기자가 이러한 시므리를 언급함에 있어 굳이 “신하”란 단어를 덧붙이고 있는 의도는 다음과 같이 추정된다. 즉 솔로몬의 신하이던 여로보암이 반역하여 세운 북(北) 이스라엘 왕국이 줄곧 신하의 하극상으로 인해 오욕(汚辱)의 역사를 되풀이하였음을 지적하려는 것이다(Hammond). 한편 시므리는 또 한 사람의 군대 장관인 오므리가 깁브돈 출정 중에 있을 때 왕궁 수비를 맡고 있었던 것 같다(15-17절). 그리고 그 때 왕이 술에 취하자 정권 탈취라는 야심적 기회를 포착하였을 것이다.

 

16:10 쳐죽이고. 이 단어가 연상시켜 주는 잔혹성은 3절의 심판 예언 중 “쓸어버려”가 주는 참담한 이미지에 상응한다. 즉 엘라가 당한 수치스럽고 비참한 죽음은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 선고와 그림처럼 맞아 떨어지고 있다.

유다의 아사 왕 제이십칠년. 이때는 곧 엘라 즉위 이듬해인 B.C. 885년경이다. 8절 주석 참조. 그런데 이처럼 무력으로 왕위를 빼앗은 자의 아들이 통치 2년을 넘기지 못하고 피살되는 사례는 엘라에 이어 북 왕국 역사에서 두 번이나 더 발생된다(왕하 15:13, 14, 23-26).

 

16:11 남자. 이에 해당하는 원어 “샤탄”은 “벽을 향해 소변 보다”에서 유래된 말이다. 서서 소변 보는 것은 여자와 구별되는 남자의 주요 특징 중 하나이다.

그의 친족이든지 그의 친구든지 … 남기지 아니하고. 반역으로 차지한 왕권을 굳히기 위해서 시므리가 한 첫 조치는 이처럼 앞서 바아사가 행한 것(15:29)보다 더 광범위한 학살이었다. 즉 시므리는 엘라의 일족 뿐만 아니라 그들의 친구들까지도 몰살시켜 버렸다. 물론 본 절에서 가리키는 “친족”은 엄밀히 (1) 유산 상속의 권리 및 (2) 피의 복수 의무를 지닌 친족들을 가리킨다(Hammond, 레 25:26, 민 35:19, 룻 2:12,13 등), 따라서 이들은 언제든지 후환이 될 가능성이 짙은 대상이다. 그러나 시므리는 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복수 가능성을 철저히 봉쇄하려고 엘라의 친구들까지도 학살 대상에 포함시켰다. 이상에서 보듯 정당치 못한 권력 찬탈은 항상 그에 따른 불안감을 갖게 되고 따라서 온갖 자구책(自救策)을 강구하게 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상 시므리는 누구보다도 단명한 7일 천하의 찰나를 누렸을 뿐이다. 따라서 이는 곧 하나님께서 집을 세우지 않으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다(시 127:1)는 진리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16:12 멸하였는데. 이에 해당하는 원어 “샤마드”는 “파괴하다, 진멸시키다”는 뜻이다. 이는 곧 전쟁이나 대량 학살과 같은, 갑작스러운 큰 재난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단어는 대개 복수나 하나님의 심판을 내용으로 하는 문맥에서 사용된다. 본 절에서도 시므리가 바아사 왕가를 멸절시킨 것은 곧 하나님의 심판 예언이 그대로 실현된 경우이다. 즉 이는 불로 태워 재로 만들듯이 바아사 일족에게 심판을 내리시갰다는 예언이 성취된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입에서 한 번 발하여진 말씀은 반드시 성취된다(사 55:10, 11).

 

16:13 그들의 헛된 것. “헛된 것”에 해당하는 원어 “하벨”은 “무가치한 것”을 뜻한다. 이는 본래 “공연한 헛수고”나 “무의미한 것”을 가리키나 여기서는 우상(偶像)을 가리킨다(전 2:11, 6:7, 8:10, 사 49:4). 즉 이는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떠났을 때 섬길 수밖에 없는 “거짓 신”들을 가리킨다. 그런데 실상 거짓 신들을 섬기는 일이란 참된 신이신 하나님과 분리된 채 미망(迷妄)을 헤매는 “헛된 것”이 아닐 수 없다.

노하시게 하였더라. 이는 이미 앞서 2절에서 언급된 단어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단어와 관련, 열왕기에서 “우상 숭배는 하나님을 노하시게 하는 죄”라는 공식(公式)을 계속해서 볼 수 있다(15:30, 21:22, 22:53, 왕하 17:11, 23:26)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15:30 주석을 참조하라.

 

16:14 남은 사적. “사적”에 해당하는 원어 “다마르”는 일명 “행적”으로도 번역되는 단어이다(14:19). 그런데 본서 기자가 엘라의 다른 행위들에 대하여서 일절 침묵하고 있음은 상대적으로 엘라의 죄악(13절)을 보다 두드러지게 고발해 주는 효과를 준다. 14:19 주석 참조.

 

16:15 칠 일 동안 왕이 되니라. 본문 후반을 참고하면, 시므리가 1주일 동안이라도 재위(在位)할 수 있었던 것은 깁브돈 출정군이 디르사로 회군(回軍)하는 데 1주일이 걸렸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회군한 군대는 마침내 시므리의 왕 행세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러한 시므리의 7일 천하는 3일 천하로 끝난 과거 우리나라의 갑신정변(1884년)을 생각나게 해준다. 그런데 시므리가 엘라를 죽이고 왕위에 올랐으나 이처럼 단명(短命)한 것은 백성들이 그의 반란에 동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16-18절). 이러한 사실에서 우리는 시므리가 백성들의 신뢰를 얻지 못했음을 알 수 있는데 아마도 그 까닭은 시므리가 매우 잔인한 성품의 소유자였기 때문일 것이다(11절).

때에 백성들이 … 있더니. 수도 디르사의 왕궁에서 왕관 쟁탈전이 벌어지는 시점에 백성들은 전쟁터에 나가 있었다. 이처럼 백성이 전쟁터에 있는 동안 향연을 벌인 엘라의 모습이 무책임하고 경박한 왕권을 상징하듯(9절), 백성 부재의 현장에서 벌어진 왕위 쟁탈전은 백성과 무관한, 백성을 소외시킨 정통성 결여의 권력 다툼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깁브돈을 향하여 진을 치고 있더니. 이스라엘은 일찍이 나답 왕 때에도 깁브돈을 공격한 적이 있는데 그 때 나답은 바아사에 의해 살해되었다(15:27). 그런데 그 때로부터 25년이 지난 지금 이스라엘은 또다시 깁브돈을 공략 중이며 이 기간 동안 시므리 역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18절). 그러므로 이 사실은 다음과 같은 점을 알려준다. (1) 동일한 범죄에 대한 동일한 심판이 동일한 장소와 관련하여 일어났다는 것(13절, 15:25-30)은 하나님의 심판의 오의(奧義)를 보여 준다. (2) 이스라엘의 내란은 불레셋에게 유익을 주었다. 한편 솔로몬 당시, 블레셋 지경(地境)은 이스라엘의 판도 내에 있었다(4:21). 그러나 솔로몬 사후 블레셋은 이스라엘의 통치권에서 이탈하였다. 그래서 이때부터 이스라엘은 실지(失地)를 회복하려 안간힘을 썼는데 블레셋 공략을 위한 전초 기지인 깁브돈을 주요 공격 목표로 삼은 것도 이 때문이다.

 

16:16 진 중 백성들. 이는 본 절 하반부와 다음 절에 나오는 “이스라엘 무리”와 같은 말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여기서 진 중 백성들이란 깁브돈 출정군을 가리키므로 “이스라엘 무리”라는 호칭은 적절치 않아 보인다. 따라서 이상과 같은 사실에도 불구하고 본서 기자가 이들을 “이스라엘 무리”로 호칭한 데에는 다음과 같은 까닭이 있을 것이다. (1) 오므리가 비교적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범위한 인심을 얻은 인물이었음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2) 실제로 이스라엘의 차기 주권자가 된 인물 역시 오므리임(23절)을 강조하기 위함이다(Montgomery).

왕을 죽였다는 말을 들은지라. 시므리의 왕위 찬탈 소식에 접한 백성의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엘라가 통치 기간 중 민심(民心)을 샀었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시므리 및 그의 즉위 과정이 백성의 수긍을 받지 못하였음은 분명하다. 아마도 이는 시므리의 왕위 찬탈 자체가 대역무도한 불법이었을 뿐 아니라 엘라 가문과 그 친척, 친구들에 대한 시므리의 난폭하고 잔혹한 살해 행위(11절) 또한 백성들의 혐오감을 불러 일으켰기 때문일 것이다.

진에서 … 왕으로 삼으매. 오므리(Omri)는 전쟁터에서 군대의 추대를 받아 왕이 되었다(Mattew Henry). 따라서 그가 명실 공히 북 왕국 전체의 왕으로 군림하기까지는 좀더 많은 세월이 필요하였다. 즉 오므리는 시므리를 제거하고 난 뒤에도(17, 18절) 디브니(Tibni)라는 경쟁자와 약 5 년(B.C. 885-881년)간의 내전을 치뤄야 했다(21-23절).

 

16:17 이에 … 에워쌌더라. 16절과 본 절에 의거할 때 시므리의 7일간 재위 기간(15절) 동안 다음과 같은 일이 일어났음을 알 수 있다. 즉 (1) 시므리의 모반 소식이 깁브돈 출정군에게 전달됨, (2) 진 중에서 백성들이 오므리로 왕을 삼은 후 디르사로 회군함. (3) 오므리 휘하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궁에서 농성하는 시므리군을 격파함 등이다. 이상에서 보듯 오므리의 행동은 매우 민첩하고 신속했다. 그리하여 시므리는 미처 준비를 갖추기도 전에 들이닥친 오므리군을 상대해야 했을 것이다. 이로보아 오므리는 군사적으로 유능한 인물이었음에 틀림없다. 비록 열왕기 본문은 그런 사실들을 무시하고 있지만, 지금까지 전해지는 모압 비문(Moabite stone)에 나타나 있듯 실상 오므리는 재위 기간 중 모압을 정복하는 등 많은 군사적 성공을 거두었다(Maclean).

 

16:18 왕궁 요새. “요새”는 “높다”는 뜻에서 온 말이다. 따라서 이는 왕궁 내에서도 특별히 높은 곳에 있는, 최후의 요새와 같은 장소일 것으로 보인다.

불을 지르고 그 가운데에서 죽었으니. 수리아역(Peshitta)은 본 절과 관련, 오므리군이 공격차 왕궁 요새에 불을 놓은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본문은 명백히 시므리의 자살을 말하고 있다. 즉 디르사 성이 함락되자 시므리는 최후의 도피처인 왕궁 요새로 도피했으나 파죽지세로 몰려오는 오므리 군대를 목도하고서는 절망 끝에 불을 지르고 자살한 것이다. 사실 시므리는 자신이 잔혹한 유혈극을 벌였던 인물이었으니(9-11절) 왕권 쟁탈전에서 자비란 기대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아무튼 이처럼 자살로 최후를 마친 시므리에게서 우리는 철두철미 자의성(恣意性)으로 일관한 그의 생애를 본다. 즉 그가 추구한 왕권은 스스로의 권력욕에서 기인했을 뿐 하나님께로부터 봉사의 직분을 받았다는 자각의 흔적이 전혀 없다. 15절 주석 참조. 따라서 신정 정치의 이상을 품은 열왕기 사가(史家)가 그런 시므리에게 조금의 정통성도 인정할 수 없음은 물론이다. 그리고 시므리와 오십 보 백 보의 인물들이 들락날락 했던 북 왕국 왕권 자체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시선을 던지고 있음은 당연하다.

 

16:19 그가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며. 혹자는 본 절을 시므리가 7일 천하(15절) 동안 우상 숭배를 행했음을 비난하는 절이라 단정한다(Bähr). 그러나 “여로보암의 길”이라는 범주에는 우상 숭배와 함께 주인을 배반한 죄가 포함된다(12:19). 그러므로 본 절에서 시므리에게 적용된 “여로보암의 길”은 하극상(下剋上)의 범죄에 보다 강조점이 있다 하겠다. 훗날 이세벨도 요람 왕을 죽인 예후에게 “주인을 죽인 너 시므리여 평안하냐”는 말을 하고 있다(왕하 9:31). 이처럼 당시 시므리는 “주인을 죽인 자”라는 고착된 이미지로 보통 명사화 될 정도였다. 그러므로 본 절 역시 시므리의 그런 범죄를 지적한 경우로 보는 것이 옳다.

 

16:20 시므리의 남은 행위 … …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본 절은 이스라엘 열왕의 결말 공식(5, 6, 14, 27, 28절, 14:19, 20, 15:31)에 맞추어 시므리의 결국을 마무리하려 애쓴 흔적이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 절에는 “남은 사적”, “무릇 행한 일”, “열조와 함께 자매” 등의 상투적 어구가 빠져 있다. 그리고 재신에 “그가 반역한 일”이란 문구가 삽입되어 있다. 이는 이미 19절에서 언급하였듯이 시므리의 행적이 반역자로 규정되었음을 보여준다.

 

16:21 기낫의 아들 디브니. 이곳을 제외하고는 디브니에 대한 성경상의 기록은 없다. 그런데 깁브돈 출정군을 이끌고 돌아와 시므리를 격파한 오므리(15-18절)와 경쟁하는 일은 어는 정도 군사력에 자신이 있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학자들은 대개 디브니를 당시 엘라(8, 9절)의 세 군대 장관(시므리, 오므리, 디브니) 중 한 명이었을 것으로 추측한다(Ward). 한편 디브니의 경우 아버지의 이름이 등장하지만 오므리의 경우는 생략되어 있다(16, 17, 22, 23절). 이 점에 착안하여 디브니는 이스라엘 명문가의 후손이지만 오므리는 정통 이스라엘의 혈통이 아닐 것으로 추정하는 자도 있다(Maclean).

 

16:22 디브니가 죽으매 오므리가 왕이 되니라. 본 절이 강조하는 바는 이제 북 왕국이 약육강식의 무대가 되어버렸다는 점이다. 즉 이제 누구든지 힘만 있으면 왕이 되는 나라가 된 것이다. 다시 말해 신정 정치의 이상으로써 왕권에 정통성을 부여하는 하나님의 기름부음, 제사장적 승인, 국민의 동의(1:38, 39) 등이 일절 무시되고 대신에 무력에 의한 힘 제일주의가 횡행하게 된 것이다. 과거 여로보암이 형식적이긴 해도 자신의 왕권을 여호와 종교와 접목시키려 한 것(12:25-33)에 비하면, 이러한 현상은 불법의 노골화로써 일종의 위헌(違憲)적 현상이다. 한편 깁브돈에서 선포한 오므리의 왕권(16절)은 햇수로 5년(아사 27년~아사 31년)간의 내전을 거친 뒤에야 비로서 확정되었다(23절).

 

16:23 본 절의 연대 문제는 얼핏 매우 혼란스럽다. 자체 내의 일관성이 결여되어 있기 째문이다. 즉 본 절은 오므리의 즉위 연대를 아사 31년(B.C. 880년경)으로 말하면서도 재위 기간은 12년(아사 27년~아사 38년)으로 말한다. 이것은 오므리의 공식 즉위 연대를 그가 디브니를 격파한 시점부터 잡은 반면(22절) 재위 기간은 깁브돈에서의 옹립 시점(16절)부터 잡은 탓이다. 여하튼 깁브돈을 기점으로 오므리 왕조가 출범하였는데 오므리로부터 여호람에 이르기까지 오므리 왕조의 총 통치 기간은 44년간(B.C. 885-841)이다(Pulpit Commentary).

 

16:24 은 두 달란트로 … 사마리아 산을 사고. 1 달란트(Talent)를 대략 34kg으로 봄으로 은 두 달란트는 68kg 정도이다. 오므리가 사마리아 산을 구입함에 있어 비싼 가격을 치뤘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런데 여기서 정작 중요한 점은 오므리가 이 산을 매입한 것이 율법에 위반되는 행위였다는 점이다. 즉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서 토지는 하나님께 속한 것인 동시에 각 백성들이 영원한 기업으로 후손에게 물려주도록 정해진 것이었다. 따라서 율법은 토지를 영구적으로 매매하는 것을 엄격히 규제하였다(레 25:23-28). 물론 다윗이 아리우나의 타작 마당을 산 경우가 있기는 하나(삼하 24:21), 오므리의 경우와는 그 성격이 달랐다. 즉 아리우나는 이방 족속인 여부스 사람이었으며, 그의 타작 마당을 다윗이 구입한 것도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따라 종교적 목적에서 그리 하였다. 한편 오므리의 불법적 토지 매입은 그의 아들 아합에게도 영향을 준 듯하다. 아합은 기업으로 물려 받은 나봇의 포도원을 강제로 취하였다(21:1-16).

사마리아. 사마리아는 예루살렘 북쪽으로 약 67 km, 지중해 동쪽으로 약 40 km 가량 떨어진 팔레스타인 중앙 산맥의 한 언덕에 위치한 성읍이다(Beek). 이곳은 북 왕국의 전(前) 수도였던 세겜에서 북서쪽으로 약 10 km가량 떨어진 곳이다.

그 산 위에 성읍을 건축하고. 당시는 오므리가 디브니를 물리치고 공식적으로 왕위에 오른지 2년 째 되던 해엿다. 그 때에는 정국(政局)이 어느 정도 수습되었으므로 오므리는 새로운 왕궁 건축과 수도 정비 사업에 전력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사마리아 성 건축 원인은 대략 다음과 같이 추정할 수 있다. (1) 여로보암에 의해 건축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왕궁은 시므리에 의해 불타 버렸고(18절), 수도 디르사 또한 그동안의 극렬한 전투로 말미암아 파괴되었을 것이기 때문(17, 22), (2) 새로운 왕조에 걸맞는 새 도읍을 정하고자 하는 욕망에서, (3) 사마리아의 지형학적 우수성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후대에 북 왕국을 공격한 여러 나라의 군대가 끝내 사마리아는 점령하지 못했고, 강대국 앗수르조차도 장기적인 포위 공격 끝에야 함락시킬 수 있었던 점에 의해서도 뒷받침 된다(20:1-30, 왕하 6:24, 18:9, 10).

 

16:25 그 전의 모든 사람보다 더욱 악하게. 26절로 미루어 보아 오므리의 죄악은 무엇보다도 여로보암의 경우와 같이 우상 숭배의 죄악인듯하다(12:28-30). 그런데 본 절에서 보듯 오므리는 이전 누구보다 더욱 악하게 행했다고 고발당한다. 하지만 그 구체적인 이유에 대해서는 설명이 없다. 그러나 그의 아들 아합이 시돈의 공주 이세벨과 결혼하고 우상 숭배에 열을 올린 것(29-33)을 보면, 이미 오므리 시대에 이방과의 교류 및 우상 숭배의 정책적 장려가 있었지 않았나 추측해 볼 수 있다.

 

16:26 헛된 것들. 13절 주석 참조.

노하시게 하였더라. 원어 “카아스”는 특히 자신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극한 분노와 흥분 상태에 이르는 것을 가리킨다.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15:30 주석을 참조하라.

 

16:27 오므리의 … 그가 부린 권세. 비록 열왕기는 오므리를 종교적 관점에서 악한 왕으로 묘사하지만(25, 26절) 오므리는 실로 강력하고 유능한 통치자였다. 즉 (1) 오므리가 모압을 정복했다고 기록된 모압 비문(Moabite stone)의 발굴, (2) 앗수르 왕 살만에셀 2세(Sharmaneser Ⅱ)의 기록에 이스라엘을 언제나 오므리의 집으로 칭한 사실, (3) 이 시기에 유다와의 효과적인 외교로 내전이 없었다는 점 등에서 오므리의 진면목은 충분히 발견된다(Maclean 등). 그런 까닭에 그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생략되어도 “오므리가 … 부린 권세”라는 어구가 첨가되고 있는 것이다.

 

16:28 사마리아에 장사되고. 왕들이 수도(首都)에 자기 묘실이 있어 죽은 후 그 곳에 매장되는 것은 관례이다(Hammond). 그러나 앞서 유혈 쿠데타와 내전 등으로 인해 빈번히 정권이 교체된 북 왕국의 험난한 역사를 고려할 때 이는 매우 평안한 죽음이다. 한편 여기서 “장사되고”(히, 이카베르)는 “묻다, 매장하다”는 뜻이다. 이로 보아 오므리의 매장은 굴이 아닌, 땅에 묻는 형태로 이루어진 듯하다.

 

16:29 아사 왕 제삼십팔년에. 이때는 곧 B.C. 874년경이다.

아합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니라. “아합”이란 이름은 “아버지의 형”이라는 뜻으로 추정된다(Maclean). 그런데 혹자는 이 이름의 뜻을 “아버지의 형제”로 풀어 아합은 부친 오므리와 마찬가지로 불경한 인물임을 나타낸다고 주장한다(Hammond). 만일 이 이름이 부친에 대한 존경 때문에 부친과의 관련성을 강조하는 이름이라면, 오므리가 거둔 성공적 업적을 본받고자 한 마음을 표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실제로 아합도 부친 못지 않게 군사, 외교면에서 유능한 통치자였던 점이 이를 뒷받침해 준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열왕기의 종교적 관점으로 볼 때 아합은 부친 오므리보다 더 심각한 반신앙적 인물이었다(30절).

이십이 년 동안 … 다스리니라. 아합의 재위 기간은 B.C. 874-853경이다. 이 무렵 북 왕국 주변 정세는 오므리 당시의 기본 구도와 큰 차이가 없다. 즉 아람(Aram)의 위협에 대해서는 북 왕국 이스라엘이 시돈(베니게)과 동맹하여 대립하는 한편, 유프라테스 동편의 앗수르의 증가하는 압력에 대해서는 일단 대립을 지양하고 관망하는 양상을 띤다. 따라서 이러한 일시적 안정 정세의 추이(推移)는 북 왕국의 종교에도 영향을 끼쳤는데 곧 아합 이하 모든 백성들이 영적으로 나태하여 쉽게 우상 숭배 죄에 물들은 것이다(31-33절, 18:21).

 

16:30 그의 이전의 모든 사람보다 … 악을 더욱 행하여. 이처럼 아합은 이전의 열왕보다 더한 극도의 혹평을 받는다. 그 이유는 이전의 왕들이 우상 숭배를 사사로이 행했을지라도 아합처럼 공식 제사에 이방 종교를 끌어들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합이 타락하게 된 데에는 시돈 왕녀 이세벨과의 결혼이 큰 원인으로 작용하였다(31-33절).

 

16:31 가볍게 여기며. 원어는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며”, “시시하게 보며”라는 뜻이다. 따라서 아합 왕은 여로보암의 우상 숭배 정도는 죄로 생각지도 않을 정도로 완악한 심령의 소유자였다고 할 수 있다.

시돈 사람의 왕. 두로와 시돈은 페니키아(Phoenicia)의 두 도시 국가였으나, 시돈이 더 오랜 항도(港都)였기 때문에 페니키아 전체의 대명사로도 불린다. 즉 두로 왕이 시돈까지 지배하게 되는 경우에도 그를 “시돈 왕”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러기에 두로 왕 히람 2세도 “시돈 왕”이라 불린 적이 있다. 한편, 오므리는 아합을 페니키아 왕의 딸 이세벨(Jezebel)과 결혼시켰다. 이스라엘과 페니키아 사이에 맺어진 이러한 관계는 비록 정치적으로는 편리했지만 결국 그것은 이스라엘 속에 바알 숭배를 들여오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에게는 영적으로 치명적인 것이었다. 두로 또는 페리키아 신은 바알 멜가트(Ball Melgart)라 불리는데 이 신은 가나안의 더 오래된 신인 바알과도 일치한다.

엣바알. “엣바알”은 “바알이 그와 함께 있다”는 뜻이다. 엣바알은 원래 아스드롯 신전의 제사장이었는데 펠레스(Pheles) 왕 (히람의 후손)을 살해하고 왕위를 찬탈하였다(Comey, Keil & Delitzsch).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는 32년간 통치 하다가 68세에 죽은 것으로 나온다. 한편 이세벨의 극성스럽고 잔인한 성품(19:2)은 이러한 부친에게서 물려받은 것으로 짐작된다.

이세벨. 이 이름의 정확한 뜻은 모르나 우가릿 본문(Ugarit text)을 참조할 때 바알을 가리키는 “즈불”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엣바알의 딸 이세벨은 두 가지 특징이 두드러진 인물이다. 즉 전제 군주적 권력욕이 대단함과 동시에 바알 숭배에 극성스러우리만치 충성했다는 점이다(Harver). 그런데 이러한 특성은 유다 왕 여호람과 혼인하여 훗날 남 왕국의 여왕이 된 이세벨의 딸 아달랴(Athaliah)에게도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왕하 8:18).

아내를 삼고. 이는 곧 시돈과 이스라엘의 동맹 관계를 위한 정략적 결혼이다. 그런데 이 동맹은 정통적 우호 관계나 상업적 이익 외에도 당시 벤하닷(Benhadad)이 이끄는 아람 세력(20장)에 공동 대처키 위한 것이다(Maclean). 29절 주석 참조. 한편 이세벨은 마치 열정적 선교사처럼 이스라엘의 신을 바알로 대치하려 한 듯하다. 아합이 사마리아에 바알 신당을 세우게 된 것도 이러한 이세벨의 극성 탓인 것으로 여겨진다.

 

16:32 사마리아에 … 쌓으며. 이로써 이제 북 왕국의 수도 사마리아가 바알 숭배의 중심지가 되었다(Gates). 여호와의 성전이 서 있는 예루살렘과 비교하면 시사하는 바가 자못 의미심장하다. 한편 “사마리아에 건축한 바알의 신전”은 아직까지 그 흔적조차 발굴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이 신전은 아합의 궁전의 일부에 속한 것으로 추측된다. 최근 발굴자의 보고에 따르면 아합 궁전은 팔레스타인에서 발굴된 어느 건축물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훌륭한 것이었다고 한다.

 

16:33 아세라 상. 아세라(Asherah)는 고대 근동의 여러 지방에서 숭배된 풍요의 여신이다. 초기에는 아세라와 아스다롯(Ashtaroth)이 동일한 신으로 오해되었으나 후대의 연구 결과 서로 다른 신인 것으로 드러났다. 이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14:15 주석을 참조하라.

심히 … 여호와를 노하시게 하였더라. 여기서 “심히”에 해당하는 원어는 “야사프”라는 동사이다. 이는 “더하다, 증가시키다”는 뜻이다. 즉 아합의 행위는 이전 왕들이 하나님을 분노케 한 것보다 더욱 분노를 증가시키는 행위였다는 말이다. 아무튼 이처럼 여호와 앞에 범죄하여 그분의 노를 격발시킨 결과 아합과 이세벨의 말로는 비참하였다(22:25). 즉 선지자 엘리야의 예언대로(21:23, 24) 아합의 피는 개들의 먹이가 되었으며(22:38), 이세벨은 예후의 창에 찔려 머리와 손, 발을 제외하고 전부 개들의 먹이가 되었다(왕하 9:33-37). 이렇듯 이들의 참혹한 죽음은 자업자득(自業自得)이었음과 동시에 거룩하신 하나님의 엄정한 심판의 결과였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마지막 심판의 날에 패역하고 완고한 무리들에게 임하게 될 영원한 형벌은 이보다 더욱 비참할 것이다(막 9:48, 49).

 

16:34 히엘 … 스굽을 잃었으니. 여리고(Jericho)는 본래 베냐민 지파에 배당되었던 땅이다(수 18:21). 그런데 10 지파의 반란(12:16-20)으로 이스라엘 왕국에 속하게 되었으며 이후 북 왕국의 국경 성읍이 되었다. 아마도 아합(Ahab)은 이 여리고 성읍을 재건함으로 요단 강을 가로지르는 길목을 장악하려 했을 것이다. 그리고 히엘(Hiel)은 이 건축 사역의 책임자로 임명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히엘은 여리고를 재건하는 도중 두 아들을 잃었다. 이는 곧 일찍이 여호수아가 발(發)한 경고(수 6:26)를 무시한 탓인데 당시의 예언이 약 500년의 세월이 흐른 후 문자 그대로 성취된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일점 일획도 어김없이 온전히 이루어진다는 사상(삼상 15:29, 마 5:18)을 확인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