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 그 때에. ‘그 때에’는 13장 말미의 ‘여로보암의 범죄 행위’(13:33, 34)와 본 장의 ‘여로보암의 아들이 병든 것’을 서로 연관시키는 말이다(Hammond). 특히 ‘때’(히, 에트)라는 단어는 퍽 광범위한 용법을 지니고 있으나 기본적으로 어떤 특유한 시점을 각별히 지적하는 말이다. 따라서 ‘그 때에’는 여로보암이 범죄 행위를 계속하던 당시를 애써 지적하는 말이다. 즉 이 말을 중심으로 전후 문맥을 살펴 보면 여로보암의 아들이 병이 난 것은 여로보암의 소행 탓이라는 해석이 은연 중 나온다.
아비야. 이름의 뜻은 ‘여호와는 나의 아버지시라’ 이다. 일명 아비얌(Abijam)이라고도 하는 유다 왕 르호보암의 아들 아비야(Abijah, 31절, 대하 11:22)와 혼돈되기 쉬우나 실상은 동명 이인(同名異人)이다. 성경에는 그가 하나님 앞에서 선한 자였다는 사실 외에(13절) 달리 알려진 행적이 없다.
병든지라. ‘병든지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할라’는 ‘약해지다, 슬픔에 젖다’는 뜻도 함께 지니고 있다. 그런데 병이 들면 육체적으로 약해질 뿐 아니라 심정적으로도 슬퍼지기 마련이다. 따라서 이 동사의 외연에는 병든 심신의 모든 상태가 포함되어 있다. 아무튼 본 절에서 이 동사는 병자 아비야 자신 뿐 아니라 여로보암 가문 전체의 근심과 슬픔까지도 느낄 수 있게 해준다(Matthew Henry).
아비야. 이름의 뜻은 ‘여호와는 나의 아버지시라’ 이다. 일명 아비얌(Abijam)이라고도 하는 유다 왕 르호보암의 아들 아비야(Abijah, 31절, 대하 11:22)와 혼돈되기 쉬우나 실상은 동명 이인(同名異人)이다. 성경에는 그가 하나님 앞에서 선한 자였다는 사실 외에(13절) 달리 알려진 행적이 없다.
병든지라. ‘병든지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할라’는 ‘약해지다, 슬픔에 젖다’는 뜻도 함께 지니고 있다. 그런데 병이 들면 육체적으로 약해질 뿐 아니라 심정적으로도 슬퍼지기 마련이다. 따라서 이 동사의 외연에는 병든 심신의 모든 상태가 포함되어 있다. 아무튼 본 절에서 이 동사는 병자 아비야 자신 뿐 아니라 여로보암 가문 전체의 근심과 슬픔까지도 느낄 수 있게 해준다(Matthew Henry).
14:2 자기 아내에게 이르되. 아들의 병이 여로보암에게 큰 근심거리였음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여로보암과 아내가 직접 나서야 할 지경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로보암은 선지자 아히야에게 아들의 운명을 묻는 일을 정작 자신이 수행하지 않고 대신 아내에게 맡기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읽을 수 있다. (1) 일단 여로보암은 선지자 아히야의 예언 능력을 신뢰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전에 아히야가 자신이 왕 될 것을 예견했었기(11:29-40) 때문이다(J. B. Payne, Matthew Henry, Lange). (2) 그러나 여로보암은 자신이 직접 아히야와 대면하기를 꺼렸다. 그 이유는 지금까지 자신이 아히야가 권고한 순종의 길(11:37, 38)과는 거리가 먼 생활을 해왔기 때문이다(R. D. Patterson, Keil & Delitzsch, Pulpit Commentary). (3) 따라서 그러한 거리낌이 자신의 아내에게도 여로보암의 아내라는 사실을 감추도록 요구하게 했다. (4) 때문에 결국 여로보암의 아내는 평범한 아낙네로 변장하여 아히야를 방문하였다(4, 5절).
실로. ‘실로’는 벤엘 동북쪽 약 16 km 지점에 위치한 에브라임 지파의 성읍이다. 이곳은 여호수아 시대에서 사무엘 시대 동안 법궤와 성막이 머무른 적 있는 종교 중심지이다(삼상 4:3,4). 그런데 이곳은 목초와 물은 많아도 적을 방어하기에는 좋지 않은 지형이었다(Reed). 여로보암이 실로를 제쳐 두고 벧엘을 종교 중심지로 삼은 것은 이러한 군사적 측면도 계산되었을 것이다(12:29 주석 참조). 한편 17절은 당시 여로보암의 집이 ‘디르사’(Tirzah)에 있었다고 말한다. 그런데 디르사에서 실로까지는 48 km 이상의 거리이다. 따라서 여로보암의 아내는 제법 먼 거리를 여행해야 했다.
실로. ‘실로’는 벤엘 동북쪽 약 16 km 지점에 위치한 에브라임 지파의 성읍이다. 이곳은 여호수아 시대에서 사무엘 시대 동안 법궤와 성막이 머무른 적 있는 종교 중심지이다(삼상 4:3,4). 그런데 이곳은 목초와 물은 많아도 적을 방어하기에는 좋지 않은 지형이었다(Reed). 여로보암이 실로를 제쳐 두고 벧엘을 종교 중심지로 삼은 것은 이러한 군사적 측면도 계산되었을 것이다(12:29 주석 참조). 한편 17절은 당시 여로보암의 집이 ‘디르사’(Tirzah)에 있었다고 말한다. 그런데 디르사에서 실로까지는 48 km 이상의 거리이다. 따라서 여로보암의 아내는 제법 먼 거리를 여행해야 했다.
14:3 떡 열 개와 과자와 꿀 한 병. 이스라엘 백성들은 선지자적 일을 하는 사람에게 예물을 주는 것이 상례(常例)였다(13:7, 창 18:4, 19:2, 43:24, 삼상 9:7, 8). 그런데 본 절에서 여로보암이 지시한 예물의 양은 속임수를 쓰려는 목적을 갖고 있다(Lange, Hammond, Keil). 왜냐하면 떡 열 개와 과자와 꿀 한 병은 평민이 보통 준비할 수 있는 정도의 분량이기 때문이다. 즉 여로보암은 자신의 아내의 신분을 왕비가 아닌 보통 사람으로 나타내려고 획책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2절과 본 절은 여로보암의 용의 주도한 면모를 보여 준다. 그러나 그의 치밀한 머리가 하나님의 전지 전능하심에 대해서 무지했다는 것은 불행이 아닐 수 없다. 즉 그는 자신의 책략에만 눈이 어두워 하늘에서 세상 모든 거민을 하감하고 계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눈동자(시 33:13, 14)를 미처 인식치 못했다(5, 6절).
14:4 눈이 어두워. 여러 학자들은 이를 노령으로 인해 생기는 시력 장애로 풀이한다(Bähr, Keil 등). 왜냐하면 ‘눈이 어두워’(히, 카무 에이나요)의 문자적인 뜻은 ‘눈이 멈추다’이기 때문이다.
14:5 너는 이러이러하게 대답하라. 여로보암의 계략(2, 3절)은 눈먼 아히야를 충분히 속일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시(啓示)는 여로보암의 기만책은 물론 여로보암 집안의 장래(6-16절), 그리고 대답의 방식까지도 일러주셨다. 사실 건강하고 용의 주도한 인물인 여로보암과 늙고 눈까지 먼 인물인 아히야가 벌인 게임의 승부는 뻔한 것 같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즉 여로보암이 아히야의 어두워진 눈은 속일 수 있었을지 몰라도 하나님의 눈은 속일 수 없었다. 이러한 사실은 오늘날 성도들에게도 큰 위로와 용기를 준다. 곧 우수한 인간적 재능이 하나님의 일을 함에 있어서 큰 도움이 될 수 있음은 사실이지만, 그 자체만이 내세워질 때는 오히려 큰 올무로 작용하기도 한다. 반면에 비록 여러 면에서 인간적 결점을 지니고 있다 할지라도 겸허하게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려는 자는,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으 부끄럽게 하시는’ 당신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귀한 도구로 쓰임 받을 수 있는 것이다(고전 1:27).
14:6 어찌하여. ‘어찌하여’(히, 라마 제)는 물론 몰라서 한 말이 아니다. 이는 어디까지나 ‘왜 이렇게 호들갑을 떠는가’ 할 때 ‘왜 이렇게’에 해당하는 냉소적 어감을 지닌 말이다(사 1:11, 암 5:18). 그러므로 이 말은 마치 세상의 군왕들이 떠들썩하게 나서서 하나님을 대적하지만, 정작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웃으시는 광경을 연상케 해준다(시 2:1-4).
다른 사람인 체하느냐. 여로보암은 자신의 아내를 변장시켜 아히야가 알아보지 못하도록 의도하였다(2절). 그러면서도 여로보암은 앞 일을 내다보는 아히야의 능력만은 이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는데 이는 곧 일종의 점술가를 대하는 태도에 해당한다. 즉 여로보암은 자신을 감춤으로써 아히야와 인격적 관계 맺기를 거부하면서도 기복의 도구로 하나님의 사람인 아히야를 이용하려 든 것이다(Keil & Delitzsch). 그런데 이런 태도는 하나님의 능력을 그분과의 인격적 관계에서 파악하지 않고 하나의 도구적 사물로 인식하는 왜곡된 형태이다. 그러기에 신약에 이르러는 심지어 돈으로 물건을 사듯 하나님의 능력만을 구입하겠다는 어처구니 없는 인물도 등장한다(행 8:9-24). 한편 이처럼 아내를 변장시켜 선지자를 만나게한 여로보암의 모습은 과거 스스로 변장한 채 신접한 여인을 만난 사울과 비교된다(삼상 28:8-19). 더구나 이들 모두 심판의 예언을 선고 받았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흉한 일. ‘흉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카쉐’는 ‘엄격하다, 가혹하다’는 뜻에서 나온 말이다. 본문에서 이는 여로보암 가문의 멸절을 선언하는 심판의 가혹함을 묘사하는 데 쓰였다(10, 11절).
전하리니. 여기서 ‘전하다’(히, 샬루흐)라는 말은 본래 ‘보내다’(send)는 뜻이다. 이는 곧 선지자들의 메시지란 어디까지나 하나님께서 보내신 말씀임을 일깨워 준다(사 9:8, 슥 7:12). 이제 아히야는 하나님께로부터 보냄받은 메시지를 다시 여로보암의 아내에게 전한다. 그러기에 이 메시지, 즉 심판의 예언은 훗날 반드시 성취되고 말 것이다.
다른 사람인 체하느냐. 여로보암은 자신의 아내를 변장시켜 아히야가 알아보지 못하도록 의도하였다(2절). 그러면서도 여로보암은 앞 일을 내다보는 아히야의 능력만은 이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는데 이는 곧 일종의 점술가를 대하는 태도에 해당한다. 즉 여로보암은 자신을 감춤으로써 아히야와 인격적 관계 맺기를 거부하면서도 기복의 도구로 하나님의 사람인 아히야를 이용하려 든 것이다(Keil & Delitzsch). 그런데 이런 태도는 하나님의 능력을 그분과의 인격적 관계에서 파악하지 않고 하나의 도구적 사물로 인식하는 왜곡된 형태이다. 그러기에 신약에 이르러는 심지어 돈으로 물건을 사듯 하나님의 능력만을 구입하겠다는 어처구니 없는 인물도 등장한다(행 8:9-24). 한편 이처럼 아내를 변장시켜 선지자를 만나게한 여로보암의 모습은 과거 스스로 변장한 채 신접한 여인을 만난 사울과 비교된다(삼상 28:8-19). 더구나 이들 모두 심판의 예언을 선고 받았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흉한 일. ‘흉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카쉐’는 ‘엄격하다, 가혹하다’는 뜻에서 나온 말이다. 본문에서 이는 여로보암 가문의 멸절을 선언하는 심판의 가혹함을 묘사하는 데 쓰였다(10, 11절).
전하리니. 여기서 ‘전하다’(히, 샬루흐)라는 말은 본래 ‘보내다’(send)는 뜻이다. 이는 곧 선지자들의 메시지란 어디까지나 하나님께서 보내신 말씀임을 일깨워 준다(사 9:8, 슥 7:12). 이제 아히야는 하나님께로부터 보냄받은 메시지를 다시 여로보암의 아내에게 전한다. 그러기에 이 메시지, 즉 심판의 예언은 훗날 반드시 성취되고 말 것이다.
14:7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 이러한 표현이 강조하고 있는 것은 이스라엘과 여호와 사이의 관계가 불가분리의 각별한 것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본 절의 행간에 감추어진 아히야의 심정은 여로보암이 ‘그러한 각별한 관계를 파기한’데 대한 상처와 분노이다. 한편 본문에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조되는 표현이 있다면 그것은 9절의 ‘다른 신’이다.
주권자가 되게 하고. ‘되게 하고’는 원래 ‘위임하다’는 뜻의 히브리어 ‘나탄’에서 온 말이다. 그러므로 백성의 주권자가 된다는 것은 전횡자(專橫者)가 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대신 백성의 주권자는 어디까지나 우주의 참된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위임받은 백성을 겸손히 다스려야 하는 제한된 봉사자일 뿐이다. 그런데도 여로보암은 저들을 우상 숭배 죄악으로 몰고 갔다(12:25-33).
주권자가 되게 하고. ‘되게 하고’는 원래 ‘위임하다’는 뜻의 히브리어 ‘나탄’에서 온 말이다. 그러므로 백성의 주권자가 된다는 것은 전횡자(專橫者)가 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대신 백성의 주권자는 어디까지나 우주의 참된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위임받은 백성을 겸손히 다스려야 하는 제한된 봉사자일 뿐이다. 그런데도 여로보암은 저들을 우상 숭배 죄악으로 몰고 갔다(12:25-33).
14:8 찢어내어. 여기서 이 말은 한 왕조에서 왕조의 일부를 분리해 냄을 의미하는 상징적 표현이다(11:30, 삼상 15:28). 한편 성경에서 이와 유사한 표현인 ‘옷을 찢는다’ 함은 비통함과 회개의 표시이기도 하다(창 37:29, 민 14:6, 수 7:6, 호 13:8). 따라서 나라가 찢어졌다는 것은 비통한 현실이기도 하거니와 나라 전체에 회개를 촉구하는 표시이기도 하다.
다윗 … 같지 아니하고. 본문은 마치 여로보암의 소행을 놓고 판결을 내리는 법정의 장면과도 같다. 그런데 여로보암의 행위를 판단하는 기준이 남방 왕조의 다윗인 점이 흥미롭다. 즉 아히야는 이전의 예언에서 여로보암에게 다윗의 신앙을 본받으라고 이미 충고한 바 있는데(11:38), 여기서는 다윗에 견주어 그를 책망하고 있다. 하지만 여로보암에게 있어서 다윗은 적대(敵對) 가문의 전왕(前王)으로서 증오의 대상이었을 뿐 따라야 할 모본은 아니었다. 한편 본서에서 다윗은 여로보암 뿐만 아니라 유다와 이스라엘 열왕들의 모본이 될 만한 신앙 인물로 제시되고 있는(15:3, 11) 반면, 여로보암은 우상 숭배의 대표적 인물로서 언급되고 있다(15:34, 16:26, 30).
다윗 … 같지 아니하고. 본문은 마치 여로보암의 소행을 놓고 판결을 내리는 법정의 장면과도 같다. 그런데 여로보암의 행위를 판단하는 기준이 남방 왕조의 다윗인 점이 흥미롭다. 즉 아히야는 이전의 예언에서 여로보암에게 다윗의 신앙을 본받으라고 이미 충고한 바 있는데(11:38), 여기서는 다윗에 견주어 그를 책망하고 있다. 하지만 여로보암에게 있어서 다윗은 적대(敵對) 가문의 전왕(前王)으로서 증오의 대상이었을 뿐 따라야 할 모본은 아니었다. 한편 본서에서 다윗은 여로보암 뿐만 아니라 유다와 이스라엘 열왕들의 모본이 될 만한 신앙 인물로 제시되고 있는(15:3, 11) 반면, 여로보암은 우상 숭배의 대표적 인물로서 언급되고 있다(15:34, 16:26, 30).
14:9 네 이전 사람들보다도 더 악을 행하고. 여기서 ‘이전 사람들’이란 말이 가리키는 범위 및 이해 방식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1) 이전의 왕들, 즉 사울, 다윗, 솔로몬과 같은 선왕(先王)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Living Bible). 그러나 이 경우 비교 대상의 범위가 작으므로 여로보암의 악을 강조하기에는 조금 부족한 느낌이 있다. (2) 이전의 사사(士師)들까지 포함하는 걸로 볼 수 있다(Hammond). 그러나 이는 지나친 비약일 수 있다. (3) 다만 여로보암의 극악 무도함을 표현하는 수사적 관용 어법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이상의 세 견해 중 어느 쪽을 선택하든, 이는 우상 숭배에 빠진 바 있는 선대(先代)의 인물이 결코 여로보암보다는 악하지 않았다는 의미를 알려 주기에 부족함이 없다. 사실 과거 솔로몬 같은 성군(聖君)도 한 때 혼미하여 우상 숭배에 빠진 적이 있었지만 여로보암처럼 체계적이고 정책적으로 우상 숭배를 전국에 확산시키지는 않았다(11:1-8).
너를 위하여. 비록 여로보암이 자신의 종교 정책을 전통적 신앙으로의 복귀로 홍보했을지라도 본심은 참된 신앙적 동기에 있지 않았다(12:25-33). 즉 여로보암은 단지 유다와의 체제 경쟁의 맥락에서 자신의 정권 안보를 위해 종교 정책을 펼쳤을 뿐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이제 본문에서 그러한 여로보암의 불순함을 간단한 한 마디, ‘너를 위하여’로 통렬히 지적하신다. 사실 겉치레와 간판이 무엇이든 ‘하나님을 위’한 참동기가 결여된 제사는 불법이다. 그리고 그런 제사는 무엇인가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 즉 우상을 향한 제사이다.
네 등 뒤에 버렸도다. 이 표현(겔 23:35)은 하나님을 최대한으로 경멸하고 무시했음을 나타낸다(Bähr, Keil, Pulpit Commentary). 즉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성실히 섬기는 태도를 가리켜 종종 ‘눈을 하나님을 향하여 두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시 25:15, 119:37, 123:2, 141:8). 그런데 여로보암의 행위는 하나님께로부터 눈을 돌렸을 뿐 아니라, 아예 등을 돌려 버린 것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등 뒤에’라는 표현이 갖는 모욕과 경멸의 정도를 짐작할 수 있다. 더구나 여기에 ‘버리다’(히, 샬라크)라는 말이 추가됨으로서 모욕의 정도는 최대한 증가된다. 왜냐하면 이 ‘버리다’는 말은 어떤 것을 무가치한 것처럼 유기(遺棄)해버리는 행위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즉 이는 여로보암이 하나님을 쓰레기로 여겼다는 말이다.
너를 위하여. 비록 여로보암이 자신의 종교 정책을 전통적 신앙으로의 복귀로 홍보했을지라도 본심은 참된 신앙적 동기에 있지 않았다(12:25-33). 즉 여로보암은 단지 유다와의 체제 경쟁의 맥락에서 자신의 정권 안보를 위해 종교 정책을 펼쳤을 뿐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이제 본문에서 그러한 여로보암의 불순함을 간단한 한 마디, ‘너를 위하여’로 통렬히 지적하신다. 사실 겉치레와 간판이 무엇이든 ‘하나님을 위’한 참동기가 결여된 제사는 불법이다. 그리고 그런 제사는 무엇인가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 즉 우상을 향한 제사이다.
네 등 뒤에 버렸도다. 이 표현(겔 23:35)은 하나님을 최대한으로 경멸하고 무시했음을 나타낸다(Bähr, Keil, Pulpit Commentary). 즉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성실히 섬기는 태도를 가리켜 종종 ‘눈을 하나님을 향하여 두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시 25:15, 119:37, 123:2, 141:8). 그런데 여로보암의 행위는 하나님께로부터 눈을 돌렸을 뿐 아니라, 아예 등을 돌려 버린 것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등 뒤에’라는 표현이 갖는 모욕과 경멸의 정도를 짐작할 수 있다. 더구나 여기에 ‘버리다’(히, 샬라크)라는 말이 추가됨으로서 모욕의 정도는 최대한 증가된다. 왜냐하면 이 ‘버리다’는 말은 어떤 것을 무가치한 것처럼 유기(遺棄)해버리는 행위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즉 이는 여로보암이 하나님을 쓰레기로 여겼다는 말이다.
14:10 여로보암에게 속한 사내. 원문의 문자적 표현은 ‘여로보암에게 속한, 벽에다 오줌 누는 자들’이다. 이는 곧 여로보암 가문의 모든 남자들을 가리킨다.
이스라엘 가운데 매인 자나 놓인 자나. ‘매인 자나 놓인 자’는 관용적 표현으로서 ‘모든 사람’을 의미한다(21:21, 신 32:36, 왕하 9:8). 따라서 이 말은 앞서 ‘여로보암에게 속한 사내’와 같은 의미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매인 자와 놓인 자의 자세한 의미에 대해서는 학자들간에 다음과 같이 견해가 서로 다르다. 즉 이는 곧 (1) 기혼자와 미혼자(Keil), (2) 종과 자유인(Thenius, Gesenius), (3) 연소자와 연장자(Lange)를 가리킨다는 등 각각의 설명이 다르다. 그런데 원문이 주는 뜻에 일차적으로 근접한 풀이는 역시 ‘종과 자유인’이라 하겠다. 왜냐하면 원문은 ‘종에서 풀려나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공동번역도 본 절을 ‘자유인이든 종이든’으로 옮겼다.
거름더미를 쓸어 버림 같이. 여기서 ‘거름더미’(히, 갈랄)은 길에 굴러다니는 똥을 말한다. 원어에 비해 한글의 ‘거름’은 좀 점잖은 느낌을 준다. 왜냐하면 ‘거름’은 더럽긴 해도 쓸모있는 무엇이란 의미를 주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갈랄’은 원래 ‘구르다’라는 뜻의 동사이다. 그런데 본 절에서는 ‘길에 굴러다니는 것’, 즉 ‘똥’(히, 겔)이란 의미로 쓰이고 있다. 아무튼 본 절은 여로보암 일족의 멸망이 마치 길에 굴러 다니는 똥을 치우듯 더러우며, 조금의 미련도 없이 수행될 것임을 시사해 준다(15:28-30).
말갛게 쓸어 버릴지라. 본래 원문에는 ‘말갛게’에 해당하는 부사가 나와 있지 않다. 그러나 ‘쓸어 버리다’는 뜻의 동사 ‘바아르’가 없애되 완진히 없애는 강렬함을 지닌 말이다. 그래서 그러한 강렬함을 전하기 위해 ‘말갛게’를 첨가하여 번역한 것이다. 똥을 치우면서 조금이라도 남길 사람은 없을 것이다(MatthewHenry).
이스라엘 가운데 매인 자나 놓인 자나. ‘매인 자나 놓인 자’는 관용적 표현으로서 ‘모든 사람’을 의미한다(21:21, 신 32:36, 왕하 9:8). 따라서 이 말은 앞서 ‘여로보암에게 속한 사내’와 같은 의미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매인 자와 놓인 자의 자세한 의미에 대해서는 학자들간에 다음과 같이 견해가 서로 다르다. 즉 이는 곧 (1) 기혼자와 미혼자(Keil), (2) 종과 자유인(Thenius, Gesenius), (3) 연소자와 연장자(Lange)를 가리킨다는 등 각각의 설명이 다르다. 그런데 원문이 주는 뜻에 일차적으로 근접한 풀이는 역시 ‘종과 자유인’이라 하겠다. 왜냐하면 원문은 ‘종에서 풀려나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공동번역도 본 절을 ‘자유인이든 종이든’으로 옮겼다.
거름더미를 쓸어 버림 같이. 여기서 ‘거름더미’(히, 갈랄)은 길에 굴러다니는 똥을 말한다. 원어에 비해 한글의 ‘거름’은 좀 점잖은 느낌을 준다. 왜냐하면 ‘거름’은 더럽긴 해도 쓸모있는 무엇이란 의미를 주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갈랄’은 원래 ‘구르다’라는 뜻의 동사이다. 그런데 본 절에서는 ‘길에 굴러다니는 것’, 즉 ‘똥’(히, 겔)이란 의미로 쓰이고 있다. 아무튼 본 절은 여로보암 일족의 멸망이 마치 길에 굴러 다니는 똥을 치우듯 더러우며, 조금의 미련도 없이 수행될 것임을 시사해 준다(15:28-30).
말갛게 쓸어 버릴지라. 본래 원문에는 ‘말갛게’에 해당하는 부사가 나와 있지 않다. 그러나 ‘쓸어 버리다’는 뜻의 동사 ‘바아르’가 없애되 완진히 없애는 강렬함을 지닌 말이다. 그래서 그러한 강렬함을 전하기 위해 ‘말갛게’를 첨가하여 번역한 것이다. 똥을 치우면서 조금이라도 남길 사람은 없을 것이다(MatthewHenry).
14:11 성읍에서 죽은즉 개가 먹고 … 새가 먹으리니. 여로보암에 대한 하나님의 강렬한 노여움을 강조하기 위한 반복적 표현이다. 시체가 무덤에 안장(安葬)되지 못하고 아무렇게나 버려지는 것은 히브리인에게 있어서 큰 수치였다(13:30 주석 참조). 더구나 시신이 야수(野獸)의 밥이 되는 것은 사자(死者)에 대한 최대의 오욕과 불명예라 할 수 있다(삼상 17:46, 시 79:2, 렘 7:33, 16:4, 34:20, 겔 29:5). 한편 본 절에서 야수 대신 개가 언급된 것은 당시 거리에는 주인도 없이 돌아다니며 짐승들의 시체를 뜯어먹는 들개들이 많았기 때문이다(시 59:6, 14).
이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음이니라. 이처럼 ‘여호와께서 말씀하심’은 마치 어떤 공문서로 하여금 비로소 권위와 효력을 갖게 하는 서명 날인과 같다. 왜냐하면 여호와의 말씀은 인간의 말과 달라서 식언(食言)함이 없기 때문이다(삼상 15:29).
이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음이니라. 이처럼 ‘여호와께서 말씀하심’은 마치 어떤 공문서로 하여금 비로소 권위와 효력을 갖게 하는 서명 날인과 같다. 왜냐하면 여호와의 말씀은 인간의 말과 달라서 식언(食言)함이 없기 때문이다(삼상 15:29).
14:12 너는 일어나 … 가라. 본문에서 여로보암의 아내의 역할은 일종의 사자(使者, messenger)이다. 즉 그녀는 처음에 올 때에는 여로보암의 사자였으나(1-4절) 이제 갈 때에는 아히야의 사자가 된 셈이다. 이러한 전환에서 의미 변화(意味變化)가 발생한다. 즉 여로보암의 아내는 처음에 아이의 생사 여부를 물으러 왔다. 그러나 이제 돌아갈 때 그녀는 여로보암 가문에 임할 하나님의 심판(6-11절)과 그 증거로서 자신의 아이가 죽게 될 것(12, 13절)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여로보암에게 알려야 하는 입장이 되었다. 즉 말씀의 전언(傳言)과 징조의 해석이 그녀에게 임무로 부과된 셈이다. 결국 여로보암이 아내를 이용하며 아히야를 속이려던 것이 이제는 거꾸로 아히야가 그녀를 통하여 여로보암을 꾸짖게 된 것이다.
네 발이 … 죽을지라. 여로보암의 병든 아들(1절)은 결국 죽을 운명임이 드러났다. 여로보암이 애초에 아히야에게 묻고자 했던 점이 바로 이것이었다(3절). 그러나 이제 그 아이의 죽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표적으로서의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고 있다. 그리고 그 점이 우연과 구별되는 근거로는 ‘발이 성에 들어갈 때’라는 특정한 시점과 아이의 죽음의 순간이 일치한다는 데 있다. 17절을 보면, ‘발이 성에 들어갈 때’는 ‘집 문지방에 이를 때’로 보다 상세하게 언급된다. 이러한 요소가 아이의 죽음과 아히야의 예언이 갖는 일치를 우연의 일치로 돌릴 수 없게 한다(Keil & Delitzsch).
네 발이 … 죽을지라. 여로보암의 병든 아들(1절)은 결국 죽을 운명임이 드러났다. 여로보암이 애초에 아히야에게 묻고자 했던 점이 바로 이것이었다(3절). 그러나 이제 그 아이의 죽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표적으로서의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고 있다. 그리고 그 점이 우연과 구별되는 근거로는 ‘발이 성에 들어갈 때’라는 특정한 시점과 아이의 죽음의 순간이 일치한다는 데 있다. 17절을 보면, ‘발이 성에 들어갈 때’는 ‘집 문지방에 이를 때’로 보다 상세하게 언급된다. 이러한 요소가 아이의 죽음과 아히야의 예언이 갖는 일치를 우연의 일치로 돌릴 수 없게 한다(Keil & Delitzsch).
14:13 본 절은 아이의 죽음을 역설적으로 차라리 행운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물론, 이후 여로보암 가문에 밀어 닥칠 심판(10-11, 14-16절)을 생각할 때 그렇다는 것이다. 한편 이러한 본 절의 구조는 전반부가 아이의 죽음이 갖는 상대적 행복의 요소를, 후반부가 이에 대한 해석을 말하는 것으로 이루어졌다. 그중 먼저 전반부에서 아이의 죽음은 (1) 온 백성의 애도를 받을 수 있음과 (2) 묘실에 매장될 수 있음이 지적된다. 따라서 아무데나 버려져 짐승의 먹이가 될 다른 가족의 주검에 비하면(11절) 이는 거의 축복에 가까은 죽음이다. 다음으로 본 절 후반부는 아이의 이 같은 죽음의 이유를 ‘그가 하나님을 향하여 선한 뜻을 품었기 때문’으로 풀이한다. 아무튼 본 장에서 우리는 아이의 병, 혹은 죽음을 놓고 서로 엇갈린 시각이 있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즉 아이의 병과 죽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 여로보암에게는 불행과 슬픔으로 비쳤다(1, 2 주석 참조). 그러나 선지자 아히야가 보기에는 그것은 차라리 행복이었다(잠 20:24, 사 55:8, 9, 롬 11:33).
그가 … 선한 뜻을 품었음이니라. 11절 예언의 예외로서 오직 아비야만이 온 백성의 애도를 받으며 묘실에 들어갈 수 있게 된 이유를 설명한다. 즉 여기서 ‘선한’(히, 토브)은 어떤 사람의 욕망이나 의지의 방향을 나타내준다. 다시 말해 여로보암의 아들이 가진 의지는 ‘하나님을 향해’ 선하고자 했던 것이다. 한편 유대교 랍비 전승에 의하면, 이 아들은 절기를 지키러 예루살렘으로 가는 백성들을 저지하라는 부친의 명령을 어기고, 오히려 길에 세운 장애물을 치워 주었다고 한다(Bähr, Pulpit Commentary). 아무튼 여로보암의 모든 권속들에게 닥쳤던 참화(15:29)를 겪지 않고 평안히 죽음을 맞이한 아비야의 경우는 ‘의인들은 악한 자들 앞에서 불리어가도다’라는 말씀을 생각나게 한다(사 57:1).
그가 … 선한 뜻을 품었음이니라. 11절 예언의 예외로서 오직 아비야만이 온 백성의 애도를 받으며 묘실에 들어갈 수 있게 된 이유를 설명한다. 즉 여기서 ‘선한’(히, 토브)은 어떤 사람의 욕망이나 의지의 방향을 나타내준다. 다시 말해 여로보암의 아들이 가진 의지는 ‘하나님을 향해’ 선하고자 했던 것이다. 한편 유대교 랍비 전승에 의하면, 이 아들은 절기를 지키러 예루살렘으로 가는 백성들을 저지하라는 부친의 명령을 어기고, 오히려 길에 세운 장애물을 치워 주었다고 한다(Bähr, Pulpit Commentary). 아무튼 여로보암의 모든 권속들에게 닥쳤던 참화(15:29)를 겪지 않고 평안히 죽음을 맞이한 아비야의 경우는 ‘의인들은 악한 자들 앞에서 불리어가도다’라는 말씀을 생각나게 한다(사 57:1).
14:14 그 날에. ‘그 날에’(히, 제 하욤)는 문자적으로는 ‘이 날’(this day)이다. 그런데 이 말은 평면선상의 어느 시간으로서 이 날 혹은 저 날을 일컫는게 아니다. 오히려 이는 헬라어의 ‘카이로스’처럼 ‘결정적인 순간’(decisive moment)으로서의 의미를 갖고 있다. 즉 자연 발생적이 아닌, 돌발적 박진감으로 들이닥치는 결정적인 시점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 이는 ‘마침내 때가 이르면 바로 그 날에’와 같은 어감을 지닌 말이다.
언제냐 하니 곧 이제라. 본 절에서 이 부분이 주는 당혹감은 다음과 같은 데서 유래한다. 문맥상 ‘그 날에’가 하나님께서 한 왕을 일으키시는 날과 일치함은 분명하다. 임박하는 날은 좌우간 미래의 어느 때이다. 그런데 지금 여기서는 심판의 때가 ‘바로 지금’(even now!)이라고 말하고 있다. 얼핏 이것은 모순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말은 거의 종말론적 언어이다. 즉 너무나 확실한 결정이여서 이미 되었다고도 말할 수 있고, 되고 있는 중 혹은 되어질 것으로도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에 해당하는 ‘앗타’는 ‘막, 방금’을 의미하면서도 동시에 ‘이제부터’를 의미하기도 하기 때문이다(시 113:2, 사 48:6). 그러므로 본 절은 심판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말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다(Hammond).
언제냐 하니 곧 이제라. 본 절에서 이 부분이 주는 당혹감은 다음과 같은 데서 유래한다. 문맥상 ‘그 날에’가 하나님께서 한 왕을 일으키시는 날과 일치함은 분명하다. 임박하는 날은 좌우간 미래의 어느 때이다. 그런데 지금 여기서는 심판의 때가 ‘바로 지금’(even now!)이라고 말하고 있다. 얼핏 이것은 모순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말은 거의 종말론적 언어이다. 즉 너무나 확실한 결정이여서 이미 되었다고도 말할 수 있고, 되고 있는 중 혹은 되어질 것으로도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에 해당하는 ‘앗타’는 ‘막, 방금’을 의미하면서도 동시에 ‘이제부터’를 의미하기도 하기 때문이다(시 113:2, 사 48:6). 그러므로 본 절은 심판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말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다(Hammond).
14:15 이스라엘을 쳐서. 이제 여로보암 가문의 파멸 예언(14절)은 그 대상을 북 왕국 전체로 확대되고 있다. 이러한 전이(轉移)의 예는 9:5-9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 이처럼 왕과 백성이 함께 심판을 받는 것은 그들의 공동 운명적 유대 관계를 암시한다. 즉 백성들도 여로보암의 정책을 묵묵히 따름으로서(12:30) 결국 그에게 동조한 셈이기 때문이다. 한편 이처럼 백성들이 동조한 우상 숭배는 여로보암 사후에도 계속되어 북 왕국 역사 전체을 질곡(桎梏)에 빠뜨리게 된다. 그러고 보면 북 왕국의 우상 숭배는 왕과 백성의 상호작용에 힘입어 만연하게 된 셈이다.
물에서 흔들리는 갈대. ‘갈대’에 해당하는 원어 ‘카네흐’는 ‘가지, 줄기’ 등으로 번역되기도 하지만, 이는 이차적으로 파생되어 나온 뜻이다(창 41:5, 출 25:34, 겔 42:16). 본래 ‘갈대’의 일차적인 뜻은 기본적으로 ‘연약함’이다. 예를 들면 성경에서 애굽은 이스라엘이 의지할 수 없는 ‘상한 갈대’로 비유되기도 한다(왕하 18:21, 사 42:3, 겔 29:6, 7 등). 그러므로 ‘물에 흔들리는 갈대’는 강대국에 시달리는 약소국의 처지릍 빗대는 말로 풀이할 수 있다.
뽑아. 이에 해당하는 원어 ‘나타쉬’는 뿌리채 뽑는 것, 즉 근절(根絶)을 의미한다. 그런데 미 5:14 에 의하면 ‘뽑혀야할 것’은 아세라상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정작 아세라상을 뿌리 뽑지 않았다. 그래서 거꾸로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뿌리 뽑히게 된 것이다(신 11:16, 17).
강 너머로 흩으시리니. 강은 유프라테스를 말하며(창 31:21, 삼하 10:16), 본 절의 예언은 이스라엘 멸망 후 앗시리아로 끌려갈 사건을 말해주는 것이다. 실제로 이 사건은 왕하 17:16, 18:11에 기록되었듯이 B.C. 722년에 성취되었다.
흩으시리니. 이에 해당하는 원어 ‘자라’는 본래 ‘키질하다, 까부르다’는 뜻이다. 즉 이는 곡식을 키질하여 찌꺼기를 바람에 날림으로써 깨끗하게 하는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비유적 의미로 사용될 때는 응징, 정화(淨化)의 의미로 쓰인다(레 26:34, 렘 15:7, 49:32, 슥 1:19). 즉 이 말은 파괴적 응징으로만 그치지 않고 정화라는 긍정적 측면도 함께 내포하고 있다.
아세라. 아세라(Asherah)는 페니키아와 가나안의 풍요의 여신이다. 그런데 이 여신에 관한 난제는 아스다롯 및 바알과의 관계 문제이다. 비교적 초기에는 많은 학자들이 아세라와 아스다롯(Ashtaroth)을 동일시했다. 그러나 후대의 연구 결과 및 발굴과 함께 아세라는 아스다롯과 구별되는 또 다른 여신임이 밝혀졌다(Reed). 어쨌든 아세라는 분열 왕국 시대에 여호와 신앙의 주요 적으로 등장한다. 엘리야가 활동할 무렵, 이세벨의 식탁에서 먹는 아세라의 선지자는 무려 400명이 었다(18:19). 또 아세라 숭배는 남 왕국까지 잠식해 들어갔다. 요시야의 종교 개혁은 아세라 숭배를 근절시키는게 주요 과제 중 하나였다(왕하 23:4-14).
물에서 흔들리는 갈대. ‘갈대’에 해당하는 원어 ‘카네흐’는 ‘가지, 줄기’ 등으로 번역되기도 하지만, 이는 이차적으로 파생되어 나온 뜻이다(창 41:5, 출 25:34, 겔 42:16). 본래 ‘갈대’의 일차적인 뜻은 기본적으로 ‘연약함’이다. 예를 들면 성경에서 애굽은 이스라엘이 의지할 수 없는 ‘상한 갈대’로 비유되기도 한다(왕하 18:21, 사 42:3, 겔 29:6, 7 등). 그러므로 ‘물에 흔들리는 갈대’는 강대국에 시달리는 약소국의 처지릍 빗대는 말로 풀이할 수 있다.
뽑아. 이에 해당하는 원어 ‘나타쉬’는 뿌리채 뽑는 것, 즉 근절(根絶)을 의미한다. 그런데 미 5:14 에 의하면 ‘뽑혀야할 것’은 아세라상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정작 아세라상을 뿌리 뽑지 않았다. 그래서 거꾸로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뿌리 뽑히게 된 것이다(신 11:16, 17).
강 너머로 흩으시리니. 강은 유프라테스를 말하며(창 31:21, 삼하 10:16), 본 절의 예언은 이스라엘 멸망 후 앗시리아로 끌려갈 사건을 말해주는 것이다. 실제로 이 사건은 왕하 17:16, 18:11에 기록되었듯이 B.C. 722년에 성취되었다.
흩으시리니. 이에 해당하는 원어 ‘자라’는 본래 ‘키질하다, 까부르다’는 뜻이다. 즉 이는 곡식을 키질하여 찌꺼기를 바람에 날림으로써 깨끗하게 하는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비유적 의미로 사용될 때는 응징, 정화(淨化)의 의미로 쓰인다(레 26:34, 렘 15:7, 49:32, 슥 1:19). 즉 이 말은 파괴적 응징으로만 그치지 않고 정화라는 긍정적 측면도 함께 내포하고 있다.
아세라. 아세라(Asherah)는 페니키아와 가나안의 풍요의 여신이다. 그런데 이 여신에 관한 난제는 아스다롯 및 바알과의 관계 문제이다. 비교적 초기에는 많은 학자들이 아세라와 아스다롯(Ashtaroth)을 동일시했다. 그러나 후대의 연구 결과 및 발굴과 함께 아세라는 아스다롯과 구별되는 또 다른 여신임이 밝혀졌다(Reed). 어쨌든 아세라는 분열 왕국 시대에 여호와 신앙의 주요 적으로 등장한다. 엘리야가 활동할 무렵, 이세벨의 식탁에서 먹는 아세라의 선지자는 무려 400명이 었다(18:19). 또 아세라 숭배는 남 왕국까지 잠식해 들어갔다. 요시야의 종교 개혁은 아세라 숭배를 근절시키는게 주요 과제 중 하나였다(왕하 23:4-14).
14:16 여로보암의 죄로 … 범죄하게 하였음이니라. 본 절의 구조를 분석해 보면, 전반부에는 일견 납득하기 어려운 진술이 등장한다. 즉 여로보암 개인의 죄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가 버림받은 것처럼 언급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때 이스라엘은 공시적(共時的), 통시적(通時的) 개념이다. 즉 이는 여로보암 당대의 북 왕국만을 지칭하는게 아니라 이후의 북 왕국 역사 전체를 포괄하는 말이다. 그런데 후반부는 전반부의 불합리한, 혹은 비약적인 전후 관계에 비교적 합리적인 설명을 더하고 있다. 즉 여로보암은 자신이 타락하면서 결국 이스라엘 역사 전체를 오염시킨 인자(因子)가 되었다는 것이다(13:33). 이는 곧 여로보암을 기점으로 해서 왕국의 전체를 통시적으로 꿰뚫는 본 서 기자의 거시적(巨視的) 안목을 보여준다.
14:17 디르사. 이로 보아 여로보암은 그의 치세 초기에 수도를 세겜(12:25)에서 디르사로 옮긴 것 같다. 한편 디르사는 세겜 동북쪽 11 km 지점에 위치한 오늘날의 텔루사(Telluzah) 또는 텔 엘파라(Tell el-Farah)라고도 불리는 곳이다. 이 지역은 수리아 등의 북방 지역에 대한 전략적 요충지였으니 아마도 여로보암은 군사적 이유로 인해 이곳으로 수도를 옮긴 것 같다(Reed).
집 문지방에 이를 때에. 여기서 ‘집’(히, 하바이트)이라는 표현은 12절의 ‘성읍’(히, 하이라)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정밀하게 정확한 순간을 가리키는 말이다. 즉 이는 ‘성내에서도 왕의 집 곧 궁전의 문지방’하는 식으로 보다 자세히 표현한 것이다.
집 문지방에 이를 때에. 여기서 ‘집’(히, 하바이트)이라는 표현은 12절의 ‘성읍’(히, 하이라)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정밀하게 정확한 순간을 가리키는 말이다. 즉 이는 ‘성내에서도 왕의 집 곧 궁전의 문지방’하는 식으로 보다 자세히 표현한 것이다.
14:18 온 이스라엘이 … 슬퍼하니. 이처럼 온 백성이 이 왕자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장례를 치렀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점들을 관찰할 수 있다. (1) 국장(國葬)이 치루어진 것으로 보아 아마도 이 왕자는 다음 왕위에 오를 후계자였던 것 같다(Bähr, Keil & Delitzsch, Matthew Henry). (2) 여기서 ‘슬퍼하다’(히, 사파드)라는 말은 ‘가슴을 치다, 통곡하다’는 뜻으로 특히 사람의 무고한 죽음에 대해 가슴을 치고 크게 소리내어 우는 경우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이 왕자는 지금까지 백성의 촉망을 받던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백성의 이러한 기대는 그가 경건한 인물이었다는 점과 무관하지 않다(13절). 왜냐하면 왕으로서 하나님께 순종한다는 것은 곧 백성에 대해서도 무도(無道)하지 않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12:7).
14:19 남은 행적(行蹟). 여기서 ‘행적’(히, 디베르)은 ‘말하다’에서 유래된 명사이다. 이 단어는 보고(report) 혹은 기록된 행동을 의미한다(대상 29:29). 따라서 이는 여로보암 재위시의 활동이 기록상으로 남아 있는 것이 많이 있었음을 알려준다. 그러나 열왕기 기록자에게 있어서는 여로보암의 업적과 활동은 마치 눈에 보이지도 않는 것처럼 모두 무시되었다. 즉 본서에서 여로보암은 단지 북 왕국 우상 숭배의 원인자로서만 고발되었을 따름이다(16절).
역대지략. 이 책은 왕실의 여러 가지 기록을 참고해서 편찬한 국정일지(國政日誌)이다. 이는 구약 성경 중 한 권인 역대기(歷代記)와는 엄연히 구분된다. 한편 이 일지를 계속 기록해 나가는 것은 왕실 서기관들의 주된 임무 중 하나였다(Kraft). 아무튼 ‘역대지략’에 해당하는 원어 ‘데베레 하야밈’은 ‘매일의 말(기록)들’이란 뜻으로 이 일지의 특성을 잘 나타내 준다(Pulpit Commentary). 본서 기자는 북 왕국 왕들에 관해 기록할 때 이 일지를 참고하였다(15:31, 16:5, 14, 20, 27, 22:39, 왕하 1:18, 10:34, 13:8, 12, 14:15, 28, 15:11, 15, 21, 26, 31). 그런데 남 왕국에도 이와 비슷한 역대지략이 있었다(14:29, 15:7 등).
역대지략. 이 책은 왕실의 여러 가지 기록을 참고해서 편찬한 국정일지(國政日誌)이다. 이는 구약 성경 중 한 권인 역대기(歷代記)와는 엄연히 구분된다. 한편 이 일지를 계속 기록해 나가는 것은 왕실 서기관들의 주된 임무 중 하나였다(Kraft). 아무튼 ‘역대지략’에 해당하는 원어 ‘데베레 하야밈’은 ‘매일의 말(기록)들’이란 뜻으로 이 일지의 특성을 잘 나타내 준다(Pulpit Commentary). 본서 기자는 북 왕국 왕들에 관해 기록할 때 이 일지를 참고하였다(15:31, 16:5, 14, 20, 27, 22:39, 왕하 1:18, 10:34, 13:8, 12, 14:15, 28, 15:11, 15, 21, 26, 31). 그런데 남 왕국에도 이와 비슷한 역대지략이 있었다(14:29, 15:7 등).
14:20 왕이 된 지 이십이 년. 대개의 학자들은 여로보암이 왕위에 추대된 해(12:16-20)를 B.C. 930년경으로 본다. 그렇다면 본 절이 가리키는 때는 B.C. 910년경이다.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자매. 아히야의 불길한 예언(10, 11, 14-16절)에 비하면 열왕기의 간략한 기록은 마치 여로보암이 평온한 임종을 맞은 듯이 보이게 한다. 그러나 역대기에 의하면 여로보암은 유다 왕 아비야에게 벧엘마저 빼앗기는 패전의 수모를 겪은 후 죽었다. 그리고 역대기는 그 사실을 ‘여호와의 치심을 입어’ 죽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대하 13:13-20). 그래서 여러 주석가들은 여로보암이 패전의 여파로 얻은 지병 때문에 죽은 것으로 보고 있다(Bähr, Matthew Henry).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자매. 아히야의 불길한 예언(10, 11, 14-16절)에 비하면 열왕기의 간략한 기록은 마치 여로보암이 평온한 임종을 맞은 듯이 보이게 한다. 그러나 역대기에 의하면 여로보암은 유다 왕 아비야에게 벧엘마저 빼앗기는 패전의 수모를 겪은 후 죽었다. 그리고 역대기는 그 사실을 ‘여호와의 치심을 입어’ 죽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대하 13:13-20). 그래서 여러 주석가들은 여로보암이 패전의 여파로 얻은 지병 때문에 죽은 것으로 보고 있다(Bähr, Matthew Henry).
14:21 나이가 사십일 세라. 르호보암 역시 여로보암과 마찬가지로 세겜 회담의 결렬 이후 왕위에 을랐으니 B.C. 930년이 그의 원년(元年)이다(12:17). 그런데 12장에선 르호보암의 동년배들을 가리켜 ‘어린 사람’으로 부르고 있다(12:8). 때문에 41세의 장년을 어린 사람이라고 부른 모순을 해소하려고 혹자는 본 절에 나오는 르호보암의 나이를 ‘21세’로 수정하려고 한다(Bähr). 그러나 12장에서의 ‘어린 사람’이란 말은 문맥상 ‘노인’들에게 대조되는 자들의 경박함을 강조하려는 냉소적 의미의 단어이다. 12:8 주석 참조. 더구나 르호보암이 21세에 즉위해 17년간 통치하고 죽었다면 37세의 한창 나이에 요절한 셈이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이에 대해 아무런 언급이 없다. 그러므로 21세로 수정하는 것보다 41세로 두는 편이 더 자연스럽다.
여호와께서 … 택하신 성 예루살렘. 예루살렘이 이스라엘의 유일한 중앙 성소로 택정(擇定)된 사실에 대해서는 8:16 주석을 참조하라. 그런데 본 절에서 예루살렘이 이처럼 장황하게 소개되고 있는 이유는, 그러한 신앙의 중심지가 우상 숭배가 만연한 장소로 변질되었음(22-28절)을 은연중 부각시키고자 함이다(Keil 등).
십칠 년 동안 다스리니라. 이에 따르면 르호보암의 재위 기간은 B.C. 930~913년이 된다.
어머니의 이름은 나아마요 암몬 사람이더라. 유다 왕들의 경우에만 모친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은 열왕기의 특징이다(15:2, 10, 22:42). 이는 왕들에게 주는 모친의 영향력이 지대함을 알게 해준다(Pulpit Commentary). 그러나 이 영향력이 혹자의 말처럼 언제나 존경받을 만한 건전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Bähr). 본 절 역시 오히려 불길한 영향력을 느끼게 해준다. 즉 르호보암의 모친 나아마(Naamah)는 솔로몬이 가까이 했던 이방 여인 중 하나로 밀곰(혹은 몰록)을 숭배하던 암몬의 여인이다(11:1-8). 그러므로 르호보암의 우상 숭배 경향은 그 모친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Mauchline).
여호와께서 … 택하신 성 예루살렘. 예루살렘이 이스라엘의 유일한 중앙 성소로 택정(擇定)된 사실에 대해서는 8:16 주석을 참조하라. 그런데 본 절에서 예루살렘이 이처럼 장황하게 소개되고 있는 이유는, 그러한 신앙의 중심지가 우상 숭배가 만연한 장소로 변질되었음(22-28절)을 은연중 부각시키고자 함이다(Keil 등).
십칠 년 동안 다스리니라. 이에 따르면 르호보암의 재위 기간은 B.C. 930~913년이 된다.
어머니의 이름은 나아마요 암몬 사람이더라. 유다 왕들의 경우에만 모친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은 열왕기의 특징이다(15:2, 10, 22:42). 이는 왕들에게 주는 모친의 영향력이 지대함을 알게 해준다(Pulpit Commentary). 그러나 이 영향력이 혹자의 말처럼 언제나 존경받을 만한 건전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Bähr). 본 절 역시 오히려 불길한 영향력을 느끼게 해준다. 즉 르호보암의 모친 나아마(Naamah)는 솔로몬이 가까이 했던 이방 여인 중 하나로 밀곰(혹은 몰록)을 숭배하던 암몬의 여인이다(11:1-8). 그러므로 르호보암의 우상 숭배 경향은 그 모친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Mauchline).
14:22 유다가. 이처럼 본서 기자가 ‘르호보암이’라고 하지 않고 ‘유다가’로 기록한 점은 우리의 주목을 끈다. 그런데 본 절과 병행 구절인 대하 12:1을 보면, 르호보암이 율법을 버리자 백성들이 이를 본받은 것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본 절의 ‘유다’는 16절에서의 여로보암과 북 왕국 백성 간의 관계와 같은 상호 작용을 함축하고 있다. 그런데 대하 12:1은 르호보암이 율법을 저버린 이유를 국가의 강성함으로 인한 교만에 둔다.
노엽게 하였으니. ‘노엽게 하였으니’는 ‘질투하다’(히, 카나)에서 온말이다. 즉 이는 ‘질투를 야기시키다’는 뜻이다. 따라서 본 절에는 하나님과 당신의 백성들 간의 특별한 관계가 암시되어 있다. 즉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을 신부 대하듯 하시기 때문에(계 19:8, 겔 16:8-14) 때로는 그들로 기뻐하시는가 하면 질투하시기도 하신다(출 20:5, 사 62:5). 이는 한갖 피조물에 불과한 인생들을 하나님께서 얼마나 소중히 여기시는지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관계는 신약에 더욱 밝히 계시되어 있는 데,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는 신랑과 신부 혹은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 비유된다(마 25:1 이하, 엡 5:25-33, 계 21:2).
노엽게 하였으니. ‘노엽게 하였으니’는 ‘질투하다’(히, 카나)에서 온말이다. 즉 이는 ‘질투를 야기시키다’는 뜻이다. 따라서 본 절에는 하나님과 당신의 백성들 간의 특별한 관계가 암시되어 있다. 즉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을 신부 대하듯 하시기 때문에(계 19:8, 겔 16:8-14) 때로는 그들로 기뻐하시는가 하면 질투하시기도 하신다(출 20:5, 사 62:5). 이는 한갖 피조물에 불과한 인생들을 하나님께서 얼마나 소중히 여기시는지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관계는 신약에 더욱 밝히 계시되어 있는 데,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는 신랑과 신부 혹은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 비유된다(마 25:1 이하, 엡 5:25-33, 계 21:2).
14:23 산 위에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 가나안 족속들은 대개 높은 산, 푸른 나무 아래에 우상 및 우상을 섬기는 처소를 설치하였다(렘 2:20, 3:6, 겔 6:13, 왕하 16:4, 17:10, 대하 28:4). 따라서 르호보암이 ‘산 위에와 푸른 나무 아래’에 산당과 각종 우상을 세웠다는 것은 곧 그가 가나안 족속들의 이교(異敎)에 영향받았음을 시사해 준다. 이와 관련해서는 신 12:2 주석을 참조하라.
우상. 이에 해당하는 원어 ‘마체바’는 본래 ‘기둥’(pillar)이란 뜻이다. 그런데 아마도 여기서는 남신(男神) 바알에게 봉헌된 석상(石像)을 가리키는 듯하다(Hammond).
아세라 상. 이는 남신 바알과 함께 한 장소에 나란히 세워진 여신상(女神像) 아세라를 가리킨다. 한편 ‘아세라’에 대해서는 15절 주석을 참조하라.
우상. 이에 해당하는 원어 ‘마체바’는 본래 ‘기둥’(pillar)이란 뜻이다. 그런데 아마도 여기서는 남신(男神) 바알에게 봉헌된 석상(石像)을 가리키는 듯하다(Hammond).
아세라 상. 이는 남신 바알과 함께 한 장소에 나란히 세워진 여신상(女神像) 아세라를 가리킨다. 한편 ‘아세라’에 대해서는 15절 주석을 참조하라.
14:24 남색하는 자. ‘남색(男色)하는 자’(히, 카데쉬)는 단순한 동성 연애자를 의미하는게 아니라 이방 신전의 남창(男娼)을 말한다. 이들은 아세라 여신을 섬기는 신전에 소속된 남창들로서 의식(儀式) 중의 매음 행위에 동원되었다(Bähr, Jacobsen). 그런데 이러한 자들이 남 왕국 내에 존재했다는 사실은 우상 숭배의 만연도 의미하지만, 아울러 여호와 신앙으로 결집된 이스라엘 공동체 의식이 이미 허물어지고 있다는 증거이다. 왜냐하면 이들의 짐승 같은 성행위는 사악한 이교 제의(異敎祭儀)에 속한 것이고, 그러한 제의가 성행했음은 곧 신정(神政) 국가가 지향하는 가치(출 20:1-17)의 변질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남북을 막론하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뜻에 맞는 신정국가 건립 목표를 잊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국민. 곧 가나안 원주민을 가리킨다. 이들의 종교의식이나 생활풍속은 음란하기 이를 데 없어 차마 입에 담을 수 없을 정도였다(레 18:3-25). 하나님께서 이들을 멸절시켜 버리도록 명하신 이유도 궁극적으로는 그러한 우상 숭배 및 종교 의식을 파하시기 위함이었던 것이다(신 7:2). 그러나 여호수아 정복 후에도 일부 가나안 거민들은 여전히 잔존 세력으로 남아 있었으며(수 11:13, 15:63, 16:10), 결국 이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타락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가증한 일. 이에 해당하는 원어 ‘토에바’는 ‘몹시 싫어하다, 지독하게 미워하다’는 뜻에서 온 말이다. 이는 곧 하나님께서 가나안인들의 우상 숭배나 사악한 습속(習俗)을 얼마나 혐오하셨는지 잘 나타내준다.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국민. 곧 가나안 원주민을 가리킨다. 이들의 종교의식이나 생활풍속은 음란하기 이를 데 없어 차마 입에 담을 수 없을 정도였다(레 18:3-25). 하나님께서 이들을 멸절시켜 버리도록 명하신 이유도 궁극적으로는 그러한 우상 숭배 및 종교 의식을 파하시기 위함이었던 것이다(신 7:2). 그러나 여호수아 정복 후에도 일부 가나안 거민들은 여전히 잔존 세력으로 남아 있었으며(수 11:13, 15:63, 16:10), 결국 이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타락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가증한 일. 이에 해당하는 원어 ‘토에바’는 ‘몹시 싫어하다, 지독하게 미워하다’는 뜻에서 온 말이다. 이는 곧 하나님께서 가나안인들의 우상 숭배나 사악한 습속(習俗)을 얼마나 혐오하셨는지 잘 나타내준다.
14:25 르호보암 왕 제오년에. 즉 B.C. 926년경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 무렵 근동에는 심각한 정세 변화가 있었다. 즉 솔로몬 시대는 이스라엘을 크게 위협할 만한 강대국의 등장이 없었다(14:20-25). 그러나 르호보암이 즉위했을 때 남쪽 애굽에는 이미 보다 호전적이고 패권주의적인 22대 왕조가 들어서 있었다. 한편 본 절과 병행 구절인 대하 12:2에는 ‘그들이 여호와께 범죄하였으므로’란 구절이 삽입되어 유다의 타락과 시삭의 침공 사건 간의 인과(因果) 관계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
시삭. 애굽 22대 왕조를 창시한 리비아 부족의 족장 쉐숑크(Sheshonk)를 가리킨다(Keil & Delitzsch Commentary). 11:40 주석 참조. 그는 강력한 무력을 배경으로 애굽의 중앙 정부를 위협하다가 마침내 애굽 전역의 통치자로 등극한다. 그리고 자신의 통치 기간(B.C. 940-915) 중 강력한 애굽 부흥의 기치를 들고 주변국가들에 대해 패권주의적 정책을 수행해 나간다(Wilson). 팔레스타인 지역에 대한 전면적인 침공도 아마 이러한 정책의 맥락에서 결정되었을 것이다. 한편 혹자는 시삭의 침공이 여로보암의 선동에 의한 것이었다는 주장(Bähr)을 하기도 하는데 근거가 없다. 그 이유는 (1) 여로보암에 대하여 비판적인 시각을 지닌 본서 기자가 본문에서 그 일을 빠뜨렸을리 없고, (2) 시삭의 정복 범위는 북 왕국 이스라엘도 포함되고 있기 때문이다. 26절 주석 참조.
시삭. 애굽 22대 왕조를 창시한 리비아 부족의 족장 쉐숑크(Sheshonk)를 가리킨다(Keil & Delitzsch Commentary). 11:40 주석 참조. 그는 강력한 무력을 배경으로 애굽의 중앙 정부를 위협하다가 마침내 애굽 전역의 통치자로 등극한다. 그리고 자신의 통치 기간(B.C. 940-915) 중 강력한 애굽 부흥의 기치를 들고 주변국가들에 대해 패권주의적 정책을 수행해 나간다(Wilson). 팔레스타인 지역에 대한 전면적인 침공도 아마 이러한 정책의 맥락에서 결정되었을 것이다. 한편 혹자는 시삭의 침공이 여로보암의 선동에 의한 것이었다는 주장(Bähr)을 하기도 하는데 근거가 없다. 그 이유는 (1) 여로보암에 대하여 비판적인 시각을 지닌 본서 기자가 본문에서 그 일을 빠뜨렸을리 없고, (2) 시삭의 정복 범위는 북 왕국 이스라엘도 포함되고 있기 때문이다. 26절 주석 참조.
14:26 다 빼앗은지라. 열왕기의 기록은 마치 시삭(Shishak)이 예루살렘만을 집중 강타하여 성전과 왕궁의 보물을 탈취하는 데 주력한 듯 보이게 한다. 그러나 실상 시삭의 침공은 팔레스타인 전역을 휩쓴 것이었다. 그 결과 남북 왕국의 성읍이 약 150여개나 정복 당하였다(Wilson). 그렇지만 예루살렘 성전은 이스라엘의 핵(核)이므로, 이곳이 약탈당했다는 것은 전체 이스라엘이 유린된거나 다름없다. 즉 성전, 왕궁의 보물, 솔로몬의 금방패 등은 이스라엘 황금기의 대표적인 자랑거리였다. 그러므로 이 자랑거리가 약탈당했다는 것은 이스라엘 역사의 번영기가 완전히 끝났음을 시사해 준다.
14:27 그 대신 놋으로 방패를 만들어. 이 놋방패는 금방패의 대용(代用)이다. 그런데 어쩌면 작은 것처럼 보이는 이 변화가 곧 한 시대에서 다른 한 시대의 전환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즉 금방패로 대표되는 황금기의 종식과 놋방패로 대표되는 쇠퇴기의 시작이 암시되고 있는 것이다(Dentan, Matthew Henry’s Commentary).
14:28 본 절에서는 다음과 같은 점들이 관찰된다. (1) 시삭의 침공 후에도 어쨌든 르호보암은 계속 왕노릇 할 수 있었다. (2) 성전의 제사도 계속되었다. (3) 쇠락한 느낌을 지을 수 없지만 왕의 행차에 위엄을 갖추려는 노력도 계속되었나. 이상의 요소들이 강조하는 바는 ‘다 멸절되지 않고 남은 것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같은 사실은 곧장 하나님께서 선지자 스마야를 통해 주셨던 약속을 상기시켜 준다. 그것은 곧 다윗과 예루살렘을 위해 다윗 왕조를 존속시켜 주겠다는 은총의 약속이다(11:13, 32, 36).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11:12, 13 주석을 참조하라.
14:29 르호보암의 남은 사적. ‘사적’(히, 디베르)은 19절의 ‘행적’과 같은 말이다. 한편 역대기는 르호보암이 행했던 건축 사업이라든지 각처에서 남하해 온 제사장들을 받아들인 일 등 따위를 비교적 상세히 서술하고 있다(대하 11:5-23, 12:1-8). 그러나 열왕기는 르호보암에 대한 본질적 해석의 줄기만 남긴 채 가지치기를 하였다. 즉 르호보암 역시 남 왕국 우상 숭배에 대해 책임이 있는 부정적인 왕으로 발췌, 서술한 것이다(21-24절).
유다왕 역대지략. 이 책은 북 왕국의 역대지략(19절)과 마찬가지로 왕실 서기관이 편찬한 남 왕국의 국정 일지이다. 열왕기 기록자는 남북 왕조의 왕실 일지를 모두 참고 자료로 갖고 있었던 것이다. 19절 주석 참조.
유다왕 역대지략. 이 책은 북 왕국의 역대지략(19절)과 마찬가지로 왕실 서기관이 편찬한 남 왕국의 국정 일지이다. 열왕기 기록자는 남북 왕조의 왕실 일지를 모두 참고 자료로 갖고 있었던 것이다. 19절 주석 참조.
14:30 르호보암과 … 항상 전쟁이 있으니라. 왕국 분열 초기의 남북 전쟁 위험은 일보 직전에 스마야 선지자에 의해 제지되었다(12:21-23). 그러나 본 절은 그 후 남북간의 분쟁이 항상 있어왔다고 서술한다. 그래서 혹자는 본 절을 ‘남북간에 적대감이 있었다’는 정도의 의미로 이해하려 들기도 한다(Keil). 그러나 ‘전쟁’에 해당하는 원어 ‘밀하마’는 언제나 구체적 전투를 의미할 뿐, 심리적 적대감을 가리킨 용례(用例)는 없다(창 14:2, 민 31:21, 대상 19:14 등). 그러므로 본 절 표현대로 지속적인 국지적(局地的) 전투가 남북간에 있어왔던 걸로 받아들여야 한다. 한편 적어도 본 절에서 남북간의 분쟁은 양 국가간의 대립이라기보다 한 국가 안에 존재했던 두 세력간의 주도권 다툼이라는 성격으로 이해하는 편이 더 무난할 것 같다. 왜냐하면 원래 다윗 왕조의 창립은 느슨한 지파 동맹의 비효율성을 지양하여 탄생한 일종의 부족 연맹 국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윗 당시에는 비교적 우세한 부족이 타부족들을 통합하여 다스렸다. 그런데 그 후 솔로몬의 통치는 그러한 부족 연맹 국가에서 보다 공고한 중앙 집권적 왕정 국가에로의 발돋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기에 솔로몬의 제도 정비는 각 지파의 자체 결집력을 효과적으로 해체하고 왕권 중심으로 흡수하려는 노력의 흔적을 보였다(4:1-19). 그러나 솔로몬 통치 말기는 솔로몬 체제가 내적 갈등을 흡수하는 데 실패하였음을 보여 준다. 즉 르호보암 왕권에 반발한 여로보암과 북부 열 지파는 바로 이 체제에서 이탈한 세력일 뿐이다(12장). 그러므로 남북간의 분쟁은 서로 정통성을 주장하는 두 체제간의 경쟁 맥락을 띨 뿐 전혀 이질적인 두 국체(國體)간의 대립으로 보기는 어려운 것이다. 여하튼 하나의 신앙에 바탕한 하나님의 백성이 이처럼 둘로 나뉘어 강대국의 유린을 당하는 시점에서도 늘상 서로 다투었다는 것은 비극이 아닐 수 없다.
14:31 다윗 성. 다윗이 여부스족에게서 빼앗아 왕궁으로 삼았던 시온 성(삼하 5:7)을 가리킨다. 2:10 주석 참조.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나아마요 암몬 사람이더라. 르호보암의 모친의 이름이 그 출생지와 더불어 재차 언급되었다(21절). 이처럼 언급이 반복된 이유는 다음과 같이 추정된다. (1) 르호보암이 우상 숭배자로 타락함에 있어서 이 암몬 여인의 영향이 컸음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아마도 그녀는 유다 땅에 암몬의 가증한 우상 ‘몰록’을 성행시킨 장본인이었을 것이다(23절, 11:7). (2) 솔로몬의 실책이 그 아들에게 미친 악영향을 드러내 보이기 위함이다(신 28:28). (3) 모든 백성들에게 여인의 어그러진 처신에 대해 경계시키기 위함이다. 현숙한 아내와 자애로운 어머니로서의 여인의 역할에 대해서는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할 것이다. 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에 한 여인이 남편과 자녀는 물론 나아가서 사회에 미치는 악영향 또한 엄청난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하나님께서는 특히 이방 여인과의 통혼을 금하셨다(신 7:3).
아비얌. 이 이름의 철자는 매우 다양하게 나타난다(‘아비야’ 또는 ‘아비야후’). 1절 주석 참조. 그러나 대개의 학자들은 ‘여호와는 나의 아버지이시다’는 뜻의 ‘아비야’란 이름(대하 12:16, 13:1, 21)을 기초로 하여 다음과 같은 견해들을 피력한다. (1) 아비야는 즉위명이고 아비얌은 본명이라는 견해, (2) 아비얌은 아비야끝에 암(am)을 덧붙인 애칭이라는 견해, (3) 철자의 혼동으로 인해 생겨난 이름들이라는 견해, (4) 아비얌은 아비야에 ‘얌’이라는 가나안의 바다신 명칭을 첨가한 것이라는 견해(MacLean)등이다. 그런데 대다수의 주석가들은 이상의 견해들 중에서 철자의 혼돈이 정확한 설명일 것으로 본다(Hammond 등). 한편 르호보암은 18명의 아내와 60명의 첩이 있었지만 그중 마아가(Maacah)를 가장 총애하였다. 그래서 마아가의 소생 아비얌을 일찌감치 왕위 계승자로 지목해 놓았다(대하 11:21, 22).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나아마요 암몬 사람이더라. 르호보암의 모친의 이름이 그 출생지와 더불어 재차 언급되었다(21절). 이처럼 언급이 반복된 이유는 다음과 같이 추정된다. (1) 르호보암이 우상 숭배자로 타락함에 있어서 이 암몬 여인의 영향이 컸음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아마도 그녀는 유다 땅에 암몬의 가증한 우상 ‘몰록’을 성행시킨 장본인이었을 것이다(23절, 11:7). (2) 솔로몬의 실책이 그 아들에게 미친 악영향을 드러내 보이기 위함이다(신 28:28). (3) 모든 백성들에게 여인의 어그러진 처신에 대해 경계시키기 위함이다. 현숙한 아내와 자애로운 어머니로서의 여인의 역할에 대해서는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할 것이다. 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에 한 여인이 남편과 자녀는 물론 나아가서 사회에 미치는 악영향 또한 엄청난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하나님께서는 특히 이방 여인과의 통혼을 금하셨다(신 7:3).
아비얌. 이 이름의 철자는 매우 다양하게 나타난다(‘아비야’ 또는 ‘아비야후’). 1절 주석 참조. 그러나 대개의 학자들은 ‘여호와는 나의 아버지이시다’는 뜻의 ‘아비야’란 이름(대하 12:16, 13:1, 21)을 기초로 하여 다음과 같은 견해들을 피력한다. (1) 아비야는 즉위명이고 아비얌은 본명이라는 견해, (2) 아비얌은 아비야끝에 암(am)을 덧붙인 애칭이라는 견해, (3) 철자의 혼동으로 인해 생겨난 이름들이라는 견해, (4) 아비얌은 아비야에 ‘얌’이라는 가나안의 바다신 명칭을 첨가한 것이라는 견해(MacLean)등이다. 그런데 대다수의 주석가들은 이상의 견해들 중에서 철자의 혼돈이 정확한 설명일 것으로 본다(Hammond 등). 한편 르호보암은 18명의 아내와 60명의 첩이 있었지만 그중 마아가(Maacah)를 가장 총애하였다. 그래서 마아가의 소생 아비얌을 일찌감치 왕위 계승자로 지목해 놓았다(대하 11:21,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