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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의 사람’이란 ‘선지자’(히, 나비)를 가리키는 또 다른 표현이다. 그러나 ‘나비’와 ‘하나님의 사람’ 사이에는 약간의 의미 차이가 있으니 곧 전자가 ‘선지자의 소명’을 강조하는 단어라면 후자는 선지자가 수행하고 있는 ‘하나님의 사역’을 강조하는 단어라 하겠다(H. Austel, R. D. Patterson). 아무튼 이 ‘하나님의 사람’이란 용어는 대개 두 가지 경우에 사용되고 있는데 곧 다음과 같다. (1) 하나님의 일을 하는 익명의 대상을 지칭하는 경우(삼상 2:27, 대하 25:7). (2)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는 자에 대한 존칭으로 사용되는 경우(신 33:1, 왕상 17:18, 대하 8:14 등). 그 가운데서도 특히 이는 열왕기 저자가 자주 사용하는 표현이라는 특징을 지닌다(12:22, 20:28, 왕하 1:9, 4:7, 5:8, 6:6, 8:2 등). 한편 이 ‘하나님의 사람’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유다 출신의 선지자란 사실 이외에는 달리 알 수 있는 바가 없다. 그런데도 학자에 따라선 선지자 잇도(대하 9:29)나(Josephus) 스마야(대하 12:15)일 것으로 추정한다(Tertullian). 그러나 잇도나 스마야가 비교적 오랫동안 활약한 선지자들임에 반해 이 ‘하나님의 사람’은 본 장에 등장, 잠시 활동하다 죽고 말았으니(20-24절) 틀린 주장들이다(Lange, Pulpit Commentary).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공동번역은 이를 ‘야훼의 말씀을 전할 임무를 띠고’로 번역하고 있다. 왜냐하면 여기서 ‘말미암아’에 해당하는 원어 ‘비’는 ‘안에’(in)란 뜻으로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들린 상태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여기서도 우리는 선지자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는데 곧 하나님의 말씀과 지시가 있을 때 그 말씀을 받아 대언(代言)하며 선포하는 것이다(Pulpit Commentary, Keil & Delitzsch).

유다에서부터 벧엘에 이르니. 이처럼 남 왕국 유다의 선지자가 북(北) 이스라엘의 왕 여로보암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키 위해 벧엘에까지 여행하였다는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는 당시 북 왕국에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할 참선지자들이 없었다는 간접적인 증거가 된다. 이같은 사실은 당시 벧엘에 살던 늙은 선지자마저 진리를 증거하는 대신 거짓을 말했던 점(11-19절)에 의해서도 뒷받침 된다.

여로보암이 … 분향하는지라. 여로보암이 북(北) 이스라엘의 절기인 8월 15일을 맞이하여 벧엘에서 친히 제의(祭儀)를 집전한 것을 가리킨다. 이에 관한 내용은 12:32 주석을 참조하라.

 

13:2 제단아 제단아 하나님의 사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여로보암과 그 백성들을 향하여 외치지 않고 제단을 향하여 선포하고 있다는 점이 주목을 끈다. 이것은 물론 환유법(換喩法)적 표현의 일종이다(Bähr). 왜냐하면 제단을 향한 경고는 곧 그 주제자(主祭者)나 경배자 모두를 위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요시야라 이름하는 아들을 낳으리니. 특정 일물의 이름이 예언되고 있다는 점에서 본 절은 매우 드문 형태의 예언이다. 그래서 그 진정성이 의심받기도 한다.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다음과 같은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 (1) 원래의 예언은 특별히 ‘요시야’란 이름을 지적했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Rawlinson). (2) 후대의 기록자가 본 절의 예언은 요시야 왕에 해당한다고 해석하여 주(註)를 달았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는 동안 이 주(註)가 본문에 끼어들게 되었다(Hammond). 그러나 우리는 먼 후대의 실제 인물의 이름이 예언되었다고 하여 그 진정성을 의심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천지만물을 지으시고 친히 자신의 뜻대로 주관하시고 예정하시는 하나님께서 후대 특정 인물의 이름 하나 계시해 주시는 것은 너무도 쉬운 일이기 때문이다(단 2:28). 한편 요시야 왕이 유다의 왕으로 즉위한 것은 여로보암에 비해 약 300년 뒤인 B.C. 640년경이다.

제사장 … 뼈를 네 위에서 사르리라. 이 예언은 훗날 요시야 왕에 의해 그대로 실현된다(왕하 23:20). 그런데 이 예언의 내용은 순전치 못한 벧엘의 제단(1절, 12:32, 33)을 최대로 모욕하고 경멸하는 것이다(Hammond). 왜냐하면 뼈를 제단 위에 불사르고 제사장들을 그 위에서 죽이는 행위가 얼마나 큰 모욕인지는 민 19:13을 참조해 보면 확실해지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시체를 만진 사람도 성막에 들어올 수 없는 자로 규정되고 있다. 한편 사마리아인들은 사람의 뼛가루를 성전에 뿌림으로써 성전에 대한 극도의 경멸을 표한 바 있다고 한다(Josephus).

 

13:3 징조. ‘징조’(히, 모페트)는 ‘이적’ (출 4:21, 대상 16:12, 시 105:5, 6)으로도 번역되긴 하나 여기서는 전조(前兆), 즉 앞 일을 미리 나타내 보이는 조짐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때 이 조짐은 다만 그 앞 일을 지시하는 기능으로 한정된다. 즉 본문에서 ‘제단이 갈라지고 재가 쏟아지는’ 현상(5절)은 훗날 요시야의 숙정(肅正)을 미리 알리는 조짐으로서 기능하고 있다(왕하 23:15-20). 그러므로 이는 예언자의 선포 내용에 권위를 더해 주는 부수 현상(附隧現像)일 따름이다. 즉 ‘징조’란 어디까지나 그 이적 자체의 경이성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다. 한편 하나님께서 그의 사자를 통하여 말씀을 전달하고(2절) 그 말씀을 입증하기 위해 이처럼 즉각적으로 이적을 보이신 것은, 당시 백성들의 신앙 상태가 매우 퇴락하였음을 시사하는 단적인 예이다(출 4:21, 대상 16:12, 13, 시 105:5, 6). 특히 여로보암은 자신의 신체에 발생한 경고의 이적을 직접 체험하고서도 잠깐 놀랐을 뿐(4절) 곧 완패(頑悖)한 심령으로 되돌아갔으며, 결국에는 그의 온 집이 멸절당하는 화를 당한다(33, 34절, 15:27-30).

 

13:4 여로보암 왕이 … 들을 때에. 본문이 전하는 이야기의 극적 구조는 다음과 같은 요소에서 두드러지고 있다. 즉 여로보암이 자신의 정책적 성공을 도모하기 위한 종교행사를 거행하는 중간에(1절, 12:25-33) 홀연 하나님의 심판의 예언이 임했다. 이는 곧 훗날 벨사살 왕의 잔치 자리에 손가락이 나타나 심판의 글자를 쓴 내용과 유사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단 5:1-9, 17-28). 즉 축제, 잔치 등의 요소가 심판, 파멸과 대비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어떤 절정의 순간에 돌연 그에 대한 심판이 들려왔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이러한 돌발성(突發性)은 심판 선고가 주는 충격을 훨씬 강하게 만든다. 즉 여로보암은 막 분향하던 참에 들려온 심판 선포에 소스라쳐 놀람과 분노의 당혹한 숨결을 내뿜고 있다.

편 손이 말라 다시 거두지 못하며. 여로보암은 자신의 종교 정책이 순탄하게 진행되어 마침내 거국적인 종교 행사를 가지게 된 마당에 갑작스런 선지자의 출현과 모욕적 발언이 있자 극도로 분노하였을 것이다. 그리하여 손을 들어 신복들에게 체포 명령을 내렸으나 그 순간 손이 말라버렸다. 이는 하나님의 초자연적 역사로 말미암은 마비 현상이었을 것이며, 다음과 같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1) 하나님께서는 모든 권능의 근원이 당신께 있음을 입증하였으며, 그 권능으로 말미암은 심판을 미리 경고하셨다(욥 12:13, 37:23). (2)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일을 수행하는 자를 늘 보호하고 계신다(시 17:8). 따라서 대적들의 어떠한 핍박도 주의 종들을 상하게 할 수 없다(단 6:22, 행 16:26).

말라. ‘말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야베쉬’는 ‘시들다’는 뜻이다. 기본적으로 이는 식물이 수분이 없어 메마르는 모양을 가리킨다(욥 18:16, 시 102:11, 사 19:7, 렘 12:4, 겔 17:9). 그러나 이 ‘야베쉬’는 또한 ‘심판’을 의미한다. 땅이 마르고 가뭄이 드는 것은 그 자체로 하나님의 심판이다(사 15:6, 19:5-7, 렘 12:4, 50:38).

 

13:5 재가 제단에서 쏟아진지라. 여기서 ‘재’는 희생(犧牲) 제물인 짐승을 태우고 난 뒤 남은 재를 가리킨다. 그런데 레위기에 나오는 제사 규례에 따르면 이러한 재는 제사장이 긁어모아 제단 동편 진 밖 재버리는 곳으로 가지고 가 그 곳에다 버리게 되어 있다(레 1:16, 6:10, 11). 그런데 본 절에서 재가 제단에 쏟아졌다는 것은 곧 하나님께서 여로보암의 희생제사를 열납치 않으셨음과 그 제사와 제단이 부정(不淨)하다는 사실을 의미한다(Lange, Keil & Delitzsch).

 

13:6 네 하나님 여호와. 여로보암이 하나님을 ‘내 하나님’으로 부르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으로 말한 사실에 주목하라. 이에 대하여 학자들은 대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1) 불법한 여로보암이 감히 자기 하나님으로 부를 엄두를 못냈다는 주장(Matthew Henry, Wordsworth). (2) 이는 다만 ‘너를 보내신 그분께’라는 정도의 의미라는 주장(Bähr, Hammond). 그런데 여로보암의 이후 행적과 그 심령의 완악함을 볼 때 첫 번째 주장은 신빙성이 없다(33, 34절). 따라서 위의 견해 중 후자의 설명이 보다 적절하다고 하겠다(Pulpit Commentary).

은혜를 구하여. ‘은혜를 구하여’(히, 힐라 에트페네)는 문자대로는 ‘얼굴을 어루만지다’는 뜻이다. 즉 이는 악을 행하는 자를 심판하시려고 ‘얼굴’(히, 프네)을 드신 하나님께 기도함으로써 그분의 진노를 누그러뜨려 달라는 간청이다.

 

13:7 나와 함께 집에 가서 쉬라. 여로보암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이러한 제안을 하게 된 이유는 회유(懷柔)에 초점을 두고 설명되어야 한다. 즉 자신의 왕권을 수호키 위해 여호와 신앙의 규례마저 무시한 여로보암(12:27-33)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사람과 함께 한 하나님의 능력은 가슴 섬뜩한 일이었다(3-6절). 즉 이는 그의 왕권에 대한 백성들의 의심을 살만한 것으로서, 자칫 국내적 소란을 일으킬 가능성이 다분한 것이었다. 때문에 하나님의 사람의 소리가 신적 권능이 없다는 것을 백성들에게 보여줄 필요가 있었으며, 그러기 위해서 그를 뇌물로 회유시키려 했던 것이다(Bähr).

 

13:8 왕과 … 물도 마시지 아니하리니. 고대 근동 지방에 있어서 집으로의 초대와 식사는 우호 및 친교의 표시였다(창 13:1-8, 19:1-3). 따라서 본 절은 우상 숭배자들과의 어떤 교제도 나누지 않겠다는 뜻으로서, 우상 숭배자들에 대한 강렬한 적대감과 백성들에 대한 경고를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 특히 히브리인들은 전통적으로 우상 숭배자 혹은 불경건한 자들과는 식사를 함께 하지 않았으며(요 4:9), 사도 바울은 성도들이 교제를 금할 대상으로서 탐람하는 자, 우상 숭배자, 후욕하거나 술취하거나 토색(討索)하는 자, 분쟁을 조성하는 자 등을 꼽은 바 있다(롬 16:17, 고전 5:11, 살후 3:6, 14, 딤후 3:5, 약 4:4, 요이 10절).

 

13:9 왔던 길로 되돌아가지 말라. 하나님의 사람에게 이러한 명령이 내려진 까닭은 돌아가는 도중에 어떤 이유로든 벧엘 사람들과 더불어 지체됨을 방지하려는 것이었다(Keil & Delitzsch).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람이 벧엘에 들어간 것은 오직 경고를 발하기 위함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하한 사귐이나 지연이라도 이 경고의 심각성에 영향을 주기 마련이었다(Matthew Henry). 그런데 이 모든 주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람이 실수한 대목은 바로 이 부분이다. 즉 그는 벧엘 선지자의 거짓말에 속아서 ‘왔던 길을 되돌아가’ 식사 초대에 응하였다(18, 19절). 한편 본문에서 왔던 길로 되돌아가지 않는다는 말은 다음 두 가지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1) 벧엘에 들어올 때 취한 길을 나갈 때는 취하지 않는다는 뜻(10절). (2) 일단 진행한 통로를 여하한 이유로든 돌이키지 않는다는 뜻(16, 17절).

 

13:10 이에 다른 길로 가고. 여기까지는 하나님의 사람이 성공적으로 자기 소임을 다하였음을 보여준다. 한편 벧엘은 예루살렘 북쪽 20 km 지점으로 남 왕국 유다와의 번경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12:29 주석 참조. 이로 보아 하나님의 사람이 유다 어느 지방에서 왔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그가 벧엘까지 온 것이 그리 먼 여행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무튼 그의 사명은 홀연히 벧엘에 나타나 경고를 던지고는 지체없이 사라지는 것이었다.

 

13:11 늙은 선지자. 이 선지자에 대한 평가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인해 대개 부정적이다. (1) 자신의 아들들로 하여금 여로보암이 세운 절기 행사(12:32, 33)에 참여하도록 허용했다는 점. (2) 여로보암 치하에서 ‘마음을 오로지 하여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구하는 자들’(대하 11:16)이 대거 남 왕국의 예루살렘으로 남하했는데도 불구하고 이 선지자는 벧엘에 남아 있었다는 점. (3) 받지도 않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고 거짓말 한 점(18절).

이 날에 … 말씀도 … 아버지에게 말한지라. 이처럼 늙은 선지자의 아들들은 아버지에게 그 날의 사건을 낱낱이 고하였다. 즉 하나님의 사람의 저주의 내용과 빙조(2-5절) 및 하나님의 사람이 취해야할 행동 지침(8, 9절) 등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늙은 선지자가 들어 알게 되었다는 사실은 그가 취한 다음 행동을 짐작하는데 도움이 된다. 즉 그는 아들들의 말을 듣고서는 이 하나님의 사람을 만나보고자 하는 강한 충동에 사로잡혔을 것이다(13, 14절).

 

13:12 그가 어느 길로 가더냐. 이러한 물음은 늙은 선지자가 하나님의 사람이 속박되는 금기 사항(9절)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하여 이미 그에게는 어떤 식으로든 하나님의 사람을 꾈 요량(料量)이 서 있었던 것이다(15-19절).

 

13:13 나귀에 안장을 지우라. 도보로 귀로에 오른 하나님의 사람(10절)을 신속히 쫓아가 만나보겠다는 강한 의지를 담고 있다. 늙은 선지자의 이러한 신속함과 단호함은 본문의 앞 부분에서 하나님의 사람이 보여준 것과 비슷하다. 반면 하나님의 사람의 태도는 본문의 뒷부분으로 갈수록 느슨해지고 풀어진 인상을 준다(14, 19절). 한편 늙은 선지자가 이렇듯 하나님의 사람을 만나보겠다는 열의를 보인 이유는 다음 서너 가지로 추정할 수 있다. (1) 자신의 우유부단한 태도로 말미암은 자책과 갈등을 해소하기 위한 최선책을 하나님의 사람에게 물어보기 위해서. (2) 자신이 처한 답답한 상황을 호소하고, 스스로 합리화할 수 있는 근거를 확보하기 위해. (3)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고 이적을 행한 선지자를 만나보고자 하는 순수한 열의에서. 한편 ‘나귀’는 고대 근둥 지방에 있어서 보편적인 승용(乘用) 동물이었다(삿 1:14, 10:4, 12:4, 삼상 25:20, 삼하 17:23, 왕하 4:24).

 

13:14 상수리나무. 원문에는 ‘하엘라’, 즉 ‘그 상수리나무’로 되어 있다. 따라서 이 상수리나무는 어느 특정 장소의 잘 알려진 나무였거나 아니면 다른 것에 비해 훨씬 커서 현저하게 눈에 띄었던 것으로 추측된다(Hammond). 한편 상수리나무(oak)는 크고 단단한 재질을 가진, 높이 20-25m가량의 나무이다. 성경에서 이 나무는 종종 ‘힘, 위엄, 장수’ 따위를 상징하였다.

앉은 것을 보고. 커다란 상수리나무 그늘 아래서 쉰다는 것은 여행자에게 큰 위안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이 잘 알려진 장소에 ‘앉아’ 있었다는 것은 그가 가진 사명의 성격에 비추어 볼 때 어딘가 석연찮다. 저주와 혐오의 장소인 벧엘에서 잠시도 머무르지 않는 것 역시 그의 사명에 포함된 것이었다(8, 9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앞의 성공에 방심한 탓인지 유혹의 가능성에 자신을 노출시키고 있다. 이것은 경고의 냉혹성을 보여 주어야 할 그의 사명에 아무래도 맞지 않는 것이다.

대답하되 그러하다. 유다에서 온 하나님의 사람은 그 솔직함과 순진함에서 늙은 예언자의 노회(老獪)함(8절)과 비교된다. 즉 그는 타인이 묻는다고 그대로 자신을 드러내고 있다.

 

13:15 나와 함께 집으로 가서 떡을 먹으라. 이것은 하나님의 사람에 대한 정면 도전이라 할 수 있다. 즉 벧엘의 노선지자는 하나님의 사람이 지켜야 할 금기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사항으로 도전하고 있다. 그러나 비록 피곤한 중이라도 하나님의 사람이 앞서 보인 직절(直節)을 쉽게 포기할 리는 없다(16, 17절). 따라서 늙은 선지자는 다음 단계의 회유를 준비해야 했다.

 

13:16 이 곳에서. 이로 미루어 하나님의 사람은 아직 벧엘 경내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로 하여금 누구와도 교제를 나누지 못하게 한 이유는, 혐오스런 금송아지 숭배가 행해지는 장소(12:32, 33)에 대한 경고를 나타내기 위함이었다(1-5절). 그런데 아직까지 그가 벧엘 경내를 벗어나지 않고 상수리나무 아래에 앉아 쉬고 있는 모습(14절)은 어딘가 부주의와 방심의 인상을 준다. 그래서 여러 주석가들은 이 장면에서 이미 잘못이 시작되었다고 지적한다(Bähr 등).

 

13:17 떡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며.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끝까지 준행하는 자와 함께 하신다. 본 절의 선지자가 받았던 유혹, 이는 현대를 살아가는 모든 자들이 당면한 밥(물질)의 문제이다. 그러나 성도들은 이 유혹을 물리친 그리스도의 능력을 힘입어(마 4:3,4) 이겨낼 수 있다.

 

13:18 나도 그대와 같은 선지자라. 앞의 정면 도전(15절)이 저항을 받자 늙은 선지자가 취한 다음 단계는 하나님의 사람의 경계심을 늦추게 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도 같은 선지자의 부류에 속함을 밝힌다. 사실 누구든 자신과 비슷한 일을 하는 사람을 만나면, 경계 의식을 낮추고 동료 의식을 갖기 쉽다. 그런데 늙은 선지자의 자기 신분 표명은 무엇보다도 다음에 이어지는 자신의 말에 권위를 부여하기 위함이었다. 즉 ‘선지자’(히, 나비)란 말에 담긴 뜻 그대로 그는 자신이 ‘대변인’, 즉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代言)할 수 있는 존재임을 강조한 것이다. 사실 그에게 있어서는 그것만이 하나님의 사람을 설득할 수 있는 길이었다.

천사가 … 내게 이르기를. 여기서 ‘천사’(히, 말라크)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자(使者)를 가리킨다(창 22:11, 15, 31:11, 민 22:32, 삿 13:3, 16 등). 그런데 혹자는 천사가 통보해 주는 말씀의 권위가 개개인의 마음에 확신시켜 주는 하나님의 주관적 말씀보다 더 높은 것일 거라고 주장한다(Pulpit Commentary). 그렇지 않고는 하나님의 사람이 선뜻 벧엘 선지자의 말에 수긍하지 않았을 거라는 추정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은 자신이 앞서 받은 계시와 벧엘 선지자의 말 간에 상충되는 내용이 있음을 깨닫고서는 심사 숙고하여 참과 거짓을 분별하여야 했으나 그리 하지 아니하였다.

속임이라. ‘속임이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키헤쉬’는 ‘가장하다’는 뜻이다. 그런데 거짓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장한다는 것은 거짓 선지자의 대표적 형태이다. 한편 예수께서 광야에서 시험 받으실 때에도 마귀는 하나님의 말씀을 빙자하여 시험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것에 미혹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물리치셨다(마 4:1-11).

 

13:19 이에. 즉 ‘늙은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장하는 바람에’라는 뜻이다. 비록 하나님의 사람이 신속히 벧엘 경내를 벗어나지 않고 상수리나무 아래에서 휴식한 것은 실수라 하더라도, 실상 그가 왔던 길을 되돌아가게 된 주된 원인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러한 본문은 순진 무구한 유다의 선지자와 거짓말하는 벧엘의 선지자를 뚜렷이 대비시켜 준다.

 

13:20 그들이 상 앞에 앉아 있을 때에. 본 장이 전해주는 이야기의 특징은 언제나 어떤 사건의 진행 중에 이에 대한 부정(No)의 말씀이 들려 온다는 점이다. 4절 주석 참조. 본 절 역시 이러한 특징을 보여 준다. 즉 벧엘의 선지자와 하나님의 사람이 식사를 채 끝마치기도 전(곧 금지된 교제 행위를 완료하기 전)에 이에 대한 심판의 선고가 들려오고 있다.

여호와의 말씀이 … 선지지에게 임하니. 본 장의 이야기가 갖고 있는 또 하나의 극적 요소는 반전(反轉)에 있다. 즉 앞에서 여로보암에게 징계를 선포했던 자(2절)가 지금은 도리어 징계를 선포 받게 된다(21, 22절). 그것도 자기를 대접하겠다고 초대한 거짓 선지자의 입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된 것이다.

 

13:21 외쳐 이르되. ‘외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카라’는 그 자체로 이미 어떠한 메시지의 선포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는 또한 메시지를 받는 자의 어떤 응답을 ‘불러내는’(call out) 말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카라’는 앞서 하나님의 사람이 여로보암에 대해 했던 행위이다(2절). 그러나 지금은 자신이 ‘카라’를 받는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통해 다음 사항을 생각해 볼 수 있다. (1) 하나님의 일꾼들은 끝까지 충성해야 한다(히 3:14, 계 2:10). 솔로몬의 경우를 예로 들면, 그는 전무 후무한 지혜를 소유하였으나 훗날 영적 방만상태에 빠져 귀중한 은사를 간수하지 못함으로써 하나님의 호된 진노를 받았다(11:3-13). 반면에 사도 바울은 구원에의 확신 가운데서 수많은 일들을 감당해 내었음에도 불구하고,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 따라가노라’고 고백하였다(빌 3:13, 14). (2) 하나님의 일을 완수하는 것은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사이다(고전 15:10). 따라서 주의 일꾼된 자들은 스스로 교만해질 것이 아니라 겸허하게 순종하는 자세를 견지해야 향다. (3) 하나님의 공의는 지극히 엄정하다. 즉 하나님은 한 때의 업적을 핑계삼아 방만 상태에 빠져드는 것을 결코 허용치 않으신다.

 

13:22 네 시체가 네 조상들의 묘실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조상의 묘실, 즉 가족의 무덤에 묻히지 못함은 곧 객사(客死)를 의미한다. 따라서 이는 우리말로 하면 ‘고향의 선산(先山)에 묻히지 못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히브리인들에게도 고향과 친척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객사한다는 것은 큰 비극이었다. 어쨌든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금기 사항(8, 9절)을 어긴 결과 늙은 선지자의 예언대로 객사하여 타관 사람의 묘실에 장사된다(30절).

묘실. ‘묘실’(히, 케베르)은 ‘매장하다’에서 파생된 말이다. 우리말에서 ‘무덤’이 ‘묻다’에서 온 거와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히브리인들의 묘지는 대개 천연 동굴이나 인공 동굴을 이용한 것이다. 그리고 시체에 닿으면 부정하다는 믿음 때문에 묘지는 보통 성읍이나 마을 바깥에 위치하였다(레 21:1, 민 6:6, 19:13). 그런데 동굴을 묘지로 사용하는 관습은 이스라엘인들의 가나안 정착 이후 가나안인들에게서 배운 것이라 한다(Reed).

 

13:23 자기가 데리고 온 선지자가. 개역한글 성경의 이러한 번역은 좀 애매한 표현이다. 만일 이 말대로 이해한다면 본 절은 ‘자기(벧엘의 늙은 선지자)가 데리고 온 선지자(하나님의 사람)’를 가리키는 셈이 된다. 그러나 본 장은 일관되게 ‘선지자’라는 용어를 오직 벧엘의 늙은 선지자에게만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본 절만이 예외가 된다고 보기 어렵다. 더구나 여러 학자들의 문법적 분석과 그 결론도 본 절이 20, 26절과 다를바 없다는 것이다(Bähr 등). 그렇다면 이 말은 개역한글 성경과는 달리 ‘그(하나님의 사람)를 데려온 선지자(벧엘의 늙은 선지자)’로 이해되어야 한다.

나귀에 안장을 지우니라. 유다에서 온 하나님의 사람은 지금까지 줄곧 도보로 다녔었다(1, 10절). 그런 그에게 이제 나귀 한 마리가 주어졌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1) 이유야 어떻든, 앞서 왕의 선물을 거절한 그가 벧엘에서 결국 선물 하나를 받은 셈이다(7절). (2) 벧엘의 늙은 선지자가 하나님의 사람에게 나귀를 내준 것은 친절의 표시이기도 하지만, 자기로 인해 지체된 데 대한 보상 행위일 수도 있다. 즉 이러한 행위에는 시간의 지연으로 인해 생긴 저주(22절)를 시간의 단축으로 해독(解毒)해 보려는 측면도 있다. 추측컨대 이러한 인위적인 제재(除災) 경향은 이 노(老) 종교가의 특징인 것 같다.

 

13:24 사자. 사자는 성경 시대의 팔레스타인에 흔한 맹수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벧엘의 산간 지대와 요단 계곡의 숲은 사자의 서식처였다(왕하 2:24, 렘 49:19, 슥 11:3). 하지만 이처럼 번성했던 사자도 점차 자취를 감추게 되었는데 13세기경 므깃도(Megiddo) 부근의 레드자(Ledja)에서 죽임당한 후 팔레스타인에서는 멸종하고 말았다.

만나. ‘만나’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마차’는 ‘발견하다’는 뜻이다. 이는 ‘우연히 맞닥뜨리다’ 보다는 좀더 능동적으로 ‘구하다가 마침내 따라잡다’ 또는 ‘찾다가 끝내 발견하다’는 의미를 지닌다(신 4:29, 잠 1:28, 사 55:6, 렘 29:13 등). 14, 28절에서의 늙은 선지자의 행동이 바로 이 ‘찾아가 발견하는’ 행동이다. 그런데 이와 마찬가지로 본 절의 사자 역시 하나님의 사람을 ‘쫓아가’ 덮친 것이다.

나귀는 그 곁에 서 있고 사자도 그 시체 곁에 서 있더라. 이 사건에 담긴 초자연성은 본 장면이 지닌 예외성(例外性)에서 드러난다. 보통, 사자라는 맹수는 주리지 않는 한 함부로 사람을 공격하는 일이 드문 동물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람을 공격한 사자는 그를 죽여만 놓고 그 시체를 먹거나 어디로 물어가지 않았다. 더구나 이상한 것은 나귀조차 달아나지 않고 그 자리에 머물러 있으며 사자 역시 그 자리에 있다는 점이다. 상식적이지 않은 이러한 요소들이 이 사건에 담긴 초자연적 목적에 생각이 가게 한다(Keil & Delitzsch).

 

13:25 지나가는 사람들이 … 보고. 이스라엘의 행인들은 그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던 유다 선지자의 시체와 그 특이한 죽음 현장을 목격하고서, 늙은 선지자의 성읍에서 뿐만 아니라 그들의 발길이 닿는 곳마다 그것을 화제 거리로 삼았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이 죽임을 당하게 된 원인을 알고 그들은 큰 두려움을 느꼈을 것이다.

 

13:26 선지자가 듣고. 행인들의 이야기를 들은 벧엘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21, 22절)이 실현된 데 대한 경외감과 하나님의 사람에게 대한 동정심과 죄책감 등으로 말미암아 복잡한 심경에 사로잡혔을 것이다. 그러기에 그는 부랴부랴 사건 현장으로 달려가 그 현장을 직접 목격하고는 그 일이 하나님의 초자연적 역사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것임을 확신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또한 자기를 통해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졌듯이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 선포된 말씀 또한 그대로 성취되리라는 확신에 이르게 되었을 것이다(32절).

어긴. ‘어긴’(히, 마라)은 ‘쓰게 하다, 반역하다’는 뜻이다. 즉 이는 곧 불순종과 배반으로 인해 하나님의 심정을 쓰리게 하는 것을 나타낸다. 따라서 이 동사에는 하나님의 사람이 귀환 도중에 겪은 불행(24절)을 확연히 조명해 주는 의미 해석이 들어 있다. 즉 그는 스스로의 불순종으로 인해 그 같은 불행을 만난 것이다. 이에 관한보다 자세한 내용은 20, 21절 주석을 참조하라.

넘기시매. ‘넘기시매’(히, 나탄)는 ‘위임하다, 허락하다’는 뜻이다. 곧 하나님께서 자신의 주권적 목적을 위해서 어떤 대리물의 행동을 허용하시는 것이다. 이러한 동사 사용에서 사자 습격 사건(24, 25절)을 바라보는 늙은 선지자의 관점을 볼 수 있다. 즉 그것은 단순한 재난이 아니라 하나님의 징계였다는 시각이다.

 

13:27 나귀에 안장을 지우라. 이는 13절과 동일한 표현이며 동일한 신속함이다. 그러나 이제 늙은 선지자의 내심은 그 때와는 엄청나게 달라졌다. 즉 앞서와는 달리 이제 그는 전체 사건에 일정하게 작용하는 한 의지(意志)를 자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다시 말해 노련한 종교가로서 그가 발휘할 수 있는 술수로서는 도저히 가리울 수 없는 하나님의 권능이 거기에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이 시사하는 바는 벧엘 제단의 어용 신학자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벧엘 제단에 대하여 절대적인 부정(absolutey No!)의 선고(1-5절)를 내리셨다는 것이다. 한편 벧엘의 늙은 선지자는 발람과 유사하다는 지적도 있다(Montgomery, 민 22:1-24:25).

 

13:28 시체. ‘시체’(히, 네벨라)는 ‘시들다’(히, 나벨)라는 동사에서 온 말이다. 이 동사에는 시들은 잎사귀나 말라버린 초목의 이미지가 담겨 있다. 이처럼 생명의 시듦이나 말라버림은 하나님의 심판을 비유하는데 사용되며, 그 자체로도 하나님의 심판이다. 4절 주석 참조.

길에 버린 바 되었고. 다른 민족들에게서와 마찬가지로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도 시체가 매장되지 않고 방치되는 것은 큰 수치의 표시였다(삼하 2:10 이하, 삼상 31:11-13 등). 그리고 이는 종종 하나님의 심판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신 28:62, 렘 7:23, 26:23, 사 5:25). 따라서 하나님의 사람의 시신이 길에 버려져 있는 것은 그 자체로 이미 하나님의 심판을 나타낸다. 그 뿐 아니라 그렇게 심판 받은 시체가 벧엘에 버려져 있었다는 것은 그 성읍에 수치와 부정(不淨)을 안겨 주는 것이기도 하다(신 21: 1-9). 한편 하나님의 사람에게 가해진 이러한 징벌은 일견 너무 가혹한 처사인 것 같다. 그러나 그 일은 개별적인 측면에서가 아닌, 벧엘 제단에 대한 하나님의 극한 분노와 혐오라는 맥락에서 파악되어야 한다(1-5절). 그리고 그렇게 커다란 혐오에 비추어 보면 하나님의 사람이 저지른 실수는 결코 경미(輕微)한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즉 비록 동정의 여지는 있지만, 그가 벧엘로 돌아와 식사를 함께 한 것(15-19절)은 그 성읍에 내린 경고의 엄중함을 격감시키는 행위였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시체가 벧엘에 버려지는 죽임을 당하게 하셔서라도 경고의 준엄함을 손상받지 않게 하신 것이다.

나귀와 사자는 … 찢지도 아니하였더라. 나귀와 사자가 이때까지 기이한 연출을 계속하고 있었던 까닭이 분명해진다. 즉 이들은 하나님의 사람의 주검의 의미를 분명히 알고 이를 보전(保全)해 줄 인물의 도착을 기다린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벧엘의 노선지자가 도착하자 이것으로 그 동물들의 소임은 끝난 것이다. 24절 주석 참조.

 

13:29 들어. ‘들어’(히, 나사)는 ‘들다, 메다’는 뜻이다. 즉 늙은 선지자는 시신을 들어 나귀에 실은 것이다. 그 일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지 않고 늙은 선지자가 손수 했다는 사실은 그가 하나님의 사람에 대한 깊은 사죄와 자책감에 사로잡혀 있었음을 반영한다. 26절 주석 참조.

자기 성읍으로 들어가서. 늙은 선지자가 왜 하나님의 사람의 시신을 벧엘로 옮겼는지 까닭이 분명치 않다. 가장 가능성 있는 추측은 하나님의 사람의 묘를 벧엘에 둠으로써 그 성읍에 대한 지속적인 경고와 교훈의 표시로 남게 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벧엘의 노(老) 종교가는 회오(悔悟)를 통해 전체 사건의 의미를 깊이 자각했을 뿐만 아니라 마지막에 이르러선 하나님 편에 선 적극적인 봉사를 한 셈이다.

 

13:30 그 시체를 … 내 형제여 하며. 본 절에는 세 가지 요소가 들어 있다. 즉 (1) 하나님의 사람의 시신을 늙은 선지자 자신의 묘에 장사한 것, (2) 애곡, (3) ‘오호라 내 형제여’라는 호칭 등이 그것이다. 이상은 일단 히브리인들의 장례식에 관습적으로 따르는 요소라고 볼 수 있다(렘 22:18). 그러나 관습적이라 해서 이 일을 무덤덤히 여기거나 부정적으로 해석할 수 없다. 혹자는 시신을 남의 땅, 남의 무덤에 묻은 것은 잔인한 처사라고 주장한다(Hall). 그러나 실상 하나님의 사람의 주검을 자기 무덤에 안장한 늙은 선지자의 행동은 거꾸로 하나님의 사람에 대한 깊은 존경의 표시이다(Hammond, 창 23:6, 룻 1:17). 그러기에 신약에서 아리마대 사람 요셉도 예수를 자신의 묘에 장사했다(마 27:57-60).

오호라 내 형제여. 히브리인들의 장례 절차에 있어서도 애곡(哀哭)은 필수요소였다. 그런데 이 때 애곡할 의무가 있는 자는 가까운 친척들이었으며(창 23:2, 삼하 11:26), 여기에 구경꾼들이 가담하여 같이 울거나(삼상 25:1, 삼하 1:11) 직업적으로 만가를 부르며 울어주는 사람들도 있었다(대하 35:25, 렘 9:16-19, 암 5:16). 한편 벧엘 선지자는 사자(死者)에 대한 깊은 조의(弔意)의 표시로서 자신 뿐만 아니라 가족을 포함하여 모을 수 있는 인원을 총동원하여 애곡한 것 같다.

 

13:31 내가 죽거든 … 장사하되. 앞 절과 관련, 혹자는 벧엘의 늙은 선지자가 하나님의 사람을 ‘친척’으로 예우하여 장례 지낸 것이라 한다(Bähr). 그러나 본 절은 친척 이상의 그 무엇을 보여 준다. 왜냐하면 늙은 선지자의 유언은 자신을 하나님의 사람과 한 묘실에 ‘합장’(合葬)해 달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일은 부부 사이에나 볼 수 있는 일이다(창조 25:7-10).

내 뼈를 그의 뼈 곁에 두라. 이 역시 하나님의 사람에 대한 ‘최대한의 경의의 표시’이다(Bähr 등). 그리고 이는 유다에서 온 하나님의 사람이 참선지자임을 벧엘 선지자가 인정하고 또 이념적 동의를 표한 것이기도 하다. 한편 이 유언 덕분에 결과적으로 훗날 벧엘 선지자 자신의 주검도 안전하게 보존되었다. 즉 약 300년 후 요시야 왕이 우상 숭배자들의 뼈들을 거두어 불사를 때 하나님의 사람이 묻힌 묘실은 손대지 않았다(왕하 23:16-18). 이와 관련 혹자는 벧엘의 늙은 선지자가 이러한 결과를 미리 예상하고 유언한 것이라고 주장한다(Matthew Henry). 벧엘 선지자가 하나님의 사람의 예언이 필히 이루어질 것을 믿었음을 볼 때 이는 전혀 타당성 없는 주장만은 아니다(32절).

 

13:32 사마리아 성읍. ‘사마리아’란 지명은 여로보암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는 그 때로부터 약 50년 뒤에 새로 생긴 지명이다. 즉 오므리가 사마리아 산을 사서 성읍을 건축한 후 그곳을 북 왕국의 수도로 결정하면서 새로 정한 명칭이다(16:24). 따라서 이는 벧엘의 늙은 선지자의 입에서 나온 정확한 말로 보기 어려우며, 후대 기록자가 자기 당대의 용어를 구사한 것으로 봐야 한다(Keil, H. J. Austel, R. D. Patterson). 즉 본 절에서 열왕기 기자는 벧엘 선지자의 말을 그대로 언급하지 않고, 다만 그 말의 의도를 충분히 살려 기록 당시의 언어로 표현한 것이다. 다시말해 사마리아는 오므리 왕 이후로 북(北) 이스라엘의 수도였으므로 사마리아에 대한 경고는 곧 북(北) 이스라엘 전체에 대한 경고와 다름 없었던 것이다.

모든 산당을 향하여 외쳐 말한 것. 2절과 비교할 때, 하나님의 사람의 예언은 본 절에서 그 대상 범위가 좀더 넓게 잡혀 있다. 이러한 확장은 후대의 상황이 반영, 첨가된 것이다. 즉 2절은 막연하게 어떠한 산당을 말하고 있으나 본 절은 ‘사마리아 성읍들의 모든 산당’으로 명료하게 그리고 더 광범위하게 제시되어 있다. 따라서 이는 자의적(自意的) 첨가라고 할 수는 없지만 비교적 후대의 상황이 적용된 기록임은 분명하다.

 

13:33 이 일 후에도 … 돌이키지 아니하고. 본 장에서 ‘하나님의 사람 이야기’는 결국 본 장 전체의 구도상 여로보암의 완악함을 한층 강조하는 효과를 내고 있다. 즉 그렇게 엄중한 경고를 받고도 여로보암은 타락과 배교의 길에서 돌이키지 않았다는 말이다. 한편 분열 왕국 시대의 첫 부분에 해당하는 본 장이 이처럼 여로보암의 완악성을 강조하는 이유가 있다. 즉 분열 왕국 시대의 남 왕국 유다에는 그래도 가끔 하나님을 경외하는 왕들이 나타나곤 했다. 그리고 이러한 왕들이 등장할 때마다 여호와 신앙은 부흥했다(Schultz). 그러기에 열강의 틈새에서도 남 왕국의 존속 연한은 북 왕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길었다(북 왕국 멸망은 B.C. 722년, 남 왕국 멸망은 B.C. 586년). 따라서 이러한 사실은 결국 남북 왕국 각각의 신앙 상태와 결부된다. 즉 비록 전체적으로 쇠락해가는 진행 방향이긴 했어도 남 왕국의 역사는 간간(間間)이 부흥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원동력의 배후에는 다윗이라는 이상적 군왕이 서 있었다(11:9-13, 삼하 7:8-16). 하지만 이에 반해 북 왕국의 왕들은 예외없이 우상 숭배에 몰두함으로서 악한 왕이라는 평가를 면치 못한다. 그런데 여로보암이야말로 북 왕국에 이러한 우상 숭배의 풍조를 뿌리내린 장본인이다. 말하자면 후대의 왕들은 그가 조성한 토양에서 그의 선례를 본받아 우상숭배에 열중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후대 사가(史家)들의 신앙적 관점에서 북 왕국 우상 숭배의 원인(原因)인 여로보암의 완악함이 주목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특히 본 절의 ‘이 일 후에도 … ’ 부분은 바로 그러한 초점이 모아진 곳이다.

일반 백성. 비단 레위 지파 출신 뿐 아니라 일반 모든 백성을 가리킨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12:3 주석을 참조하라.

삼았으므로. ‘삼았으므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밀레에트 야도’는 문자대로는 ‘손을 채우다’이다. 이 말은 제사장직 수여를 의미하는 전문 용어이다(Keil). 한편 아론 자손만이 제사장이 될 수 있다는 규례(출 28:1-4)를 무시한 여로보암의 이러한 정책은 북 왕국 내에 진정한 여호와 종교가 발붙일 여유를 없애려는 것이었다. 그러기에 신앙의 자유와 참예배를 갈구하는 자들은 부득이 유다를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대하 11:13-17). 12:31 주석 참조.

 

13:34 이 일이 … 죄가 되어. ‘이 일’이란 앞에서 언급된 여로보암의 모든 죄악된 행위를 총칭하는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즉 이는 (1) 금송아지 숭배(12:28, 29) (2) 보통 백성으로 제사장을 삼음(12:31, 13:33) (3) 자기 마음대로 절기를 정함(12:32, 33) 등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여로보암이 그러한 소행을 계속했다는 것이 본 절에서 지적하는 요점이다.

멸망하게 되니라. ‘멸망하게 되니라’(히, 샤마드)는 ‘끝내다, 완전히 잡아 꺾다’는 뜻이다. 이 말은 완전히 멸망되어 자취도 남지 않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실제로 훗날 여로보암 왕조는 2대로 그치고 멸절되고 만다. 즉 여로보암의 아들 나답이 즉위 2년만에 살해당하면서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했다(15:2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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