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 르호보암. ‘르호보암’은 ‘백성이 창대하기를 기원하나이다’라는 뜻이다. 이는 ‘여로보암’의 이름의 뜻이 ‘백성들의 수가 많아지게 하소서’인 것과 좋은 대비를 이룬다. 때문에 이러한 두 이름의 유사성에 주목하여 이 이름들을 다같이 백성의 권리를 강조하려는 의도가 담긴 명칭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Maclean). 한편 르호보암은 암몬 여인 나아마의 소생으로 솔로몬의 독자였다(14:21, 31, 대하 12:13). 따라서 솔로몬 사후 당연히 아비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왕위에 올랐다(11:43). 르호보암이 즉위할 때 그의 나이는 41세였는데 그 때로부터 그는 17년간 통치하였다(14:21). 대략 B.C. 930~913년 (솔로몬의 즉위를 B.C. 970년으로 보고) 기간이 르호보암의 재위 기간이다.
세겜. ‘세겜’은 ‘등성이, 비탈’이라는 뜻으로 추정된다. 이 세겜은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약 58 km 떨어진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그 곳은 곧 그리심 산과 에발 산 사이의, 사방으로 통하는 교차 지점이다. 그래서 세겜은 예로부터 이스라엘 종교, 정치의 중심지였다(Reed). 또 이곳은 에브라임에 속한 지역이기도 하다(수 20:7, 삿 9:1이하). 이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수 17:7 주석을 참조하라.
온 이스라엘이 그를 왕으로 삼고자 하여. 여기서 ‘온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열두 지파 전체가 아닌 북쪽의 열 지파를 말한다(Bähr, Hammond). 이처럼 ‘이스라엘’이라는 호칭이 열 지파만을 일컫던 전례가 없지 않다(삼하 2:9, 10, 17, 28). 한편 이스라엘 열 지파가 세겜에서 르호보암의 면담을 요구한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1) 백성들의 승인이 이스라엘 왕의 즉위에 있어 필수 요건이였기 때문이다(1:39, 삼상 2:15, 삼하 2:4, 5:3, 대하 29:22). (2) 그동안 소외되었던 북쪽 지파의 권리를 호소하려는 의도에서였다(4절).
세겜. ‘세겜’은 ‘등성이, 비탈’이라는 뜻으로 추정된다. 이 세겜은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약 58 km 떨어진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그 곳은 곧 그리심 산과 에발 산 사이의, 사방으로 통하는 교차 지점이다. 그래서 세겜은 예로부터 이스라엘 종교, 정치의 중심지였다(Reed). 또 이곳은 에브라임에 속한 지역이기도 하다(수 20:7, 삿 9:1이하). 이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수 17:7 주석을 참조하라.
온 이스라엘이 그를 왕으로 삼고자 하여. 여기서 ‘온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열두 지파 전체가 아닌 북쪽의 열 지파를 말한다(Bähr, Hammond). 이처럼 ‘이스라엘’이라는 호칭이 열 지파만을 일컫던 전례가 없지 않다(삼하 2:9, 10, 17, 28). 한편 이스라엘 열 지파가 세겜에서 르호보암의 면담을 요구한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1) 백성들의 승인이 이스라엘 왕의 즉위에 있어 필수 요건이였기 때문이다(1:39, 삼상 2:15, 삼하 2:4, 5:3, 대하 29:22). (2) 그동안 소외되었던 북쪽 지파의 권리를 호소하려는 의도에서였다(4절).
12:2 얼굴을 피하여. ‘얼굴을 피하여’는 어떤 불쾌한 이유로 서로 마주 대하는 것을 피하는 것을 말한다(시 102:2, 겔 39:23). 한편 이와 유사한 표현이 성경에 간혹 나오는데 ‘반하여 얼굴을 드는 것’은 적대감의 표현이며(렘 21:10), ‘얼굴을 빛나게 하는 것’은 우호적인 영접의 의미(민 6:25)이다(Dentan).
애굽에 있는 중에. 본 절과 병행 구절인 대하 10:2에는 ‘애굽에서 돌아오매’로 되어 있다. 문맥상으로 볼 때 대하의 번역이 더 타당한 둣하다. 아히야의 예언(11:31, 35, 37, 38)을 잊지 않았을 여로보암이 솔로몬의 사망 소식(11:43)을 듣고 귀국하지 않았다면 도리어 이상하다. 70인역(LXX) 및 수리아역(Peshitta), RSV, NIV, 그리고 공동번역 등은 본 절을 ‘애굽에서 돌아와 있었는데’(returned from Egypt)로 번역하고 있다.
애굽에 있는 중에. 본 절과 병행 구절인 대하 10:2에는 ‘애굽에서 돌아오매’로 되어 있다. 문맥상으로 볼 때 대하의 번역이 더 타당한 둣하다. 아히야의 예언(11:31, 35, 37, 38)을 잊지 않았을 여로보암이 솔로몬의 사망 소식(11:43)을 듣고 귀국하지 않았다면 도리어 이상하다. 70인역(LXX) 및 수리아역(Peshitta), RSV, NIV, 그리고 공동번역 등은 본 절을 ‘애굽에서 돌아와 있었는데’(returned from Egypt)로 번역하고 있다.
12:3 무리가 … 그를 불렀더라. 본 절로 보아 북쪽 지파들의 반란(16-20절)이 표면화되기 이전부터 여로보암은 그들의 지도자격이었던 것 같다. 이러한 사실은 여로보암이 북쪽 지파 중 유력한 지파인 에브라임의 지도자 가문 출신인 점에서 설명될 수 있다. 11:26, 28주석 참조. 물론 본시점에서 북쪽 지파들이 르호보암을 거부하기로 결정하고 있었던 것은 아직 아니다(4절). 단지 유동적인 형편에서 여로보암은 북쪽 지파들의 대변자(代辯者)가 되어 줄 것을 부탁받은 것일 뿐이다(Lange). 본 절에서 ‘이스라엘의 온 회중’은 1절과 마찬가지로 북쪽 열 지파를 가리킨다. 한편 이스라엘의 역대 왕들은 모두 남쪽 지파에서만 배출되었다(사울은 베냐민, 다윗과 솔로몬은 유다). 그런데 이들이 왕위에 오를 때에는 남쪽 지파는 물론 북쪽 지파들의 승인을 얻는 과정이 필요했다. 이제 본 절은 북쪽 지파들이 르호보암에게도 마찬가지 절차를 밟게 했음을 알려준다. 이러한 사실에서 엿볼 수 있는 점은 분열 왕국 이전에도 북쪽 지파와 남쪽 지파 사이에는 일종의 구별 의식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회중. ‘회중’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카할’은 신명기 기자가 온 이스라엘의 국민적 종교 집회를 지칭할 때 자주 사용한 단어이다. 한글개역 성경은 대개 ‘총회’로 번역하고 있다(신 5:22, 9:10, 10:4, 18:16 등). 이에 관하여서는 민 16:2 주석을 참조하라.
회중. ‘회중’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카할’은 신명기 기자가 온 이스라엘의 국민적 종교 집회를 지칭할 때 자주 사용한 단어이다. 한글개역 성경은 대개 ‘총회’로 번역하고 있다(신 5:22, 9:10, 10:4, 18:16 등). 이에 관하여서는 민 16:2 주석을 참조하라.
12:4 왕의 아버지가 우리의 멍에를 무겁게 하였으나. ‘멍에’(히, 올)는 짐승들을 부릴 때 목에 씌우는 기구로서 나무나 쇠로 만든다. 이 말을 사용한 것은 솔로몬이 시킨 노역이 매우 가혹한 것이었음을 알려준다. 성경에서 ‘멍에’는 비유적인 의미로 어떤 속박과 노예 상태를 의미하는데 사용되었다(레 26:13, 사 14:25, 렘 27:8, 11, 12). 사실 솔로몬은 성전과 궁전을 짓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기타 여러 사업을 위하여 백성들에게 무모하리만큼 많은 부역과 세금을 부과하였다(5:14-17, 10:14). 따라서 본 절에 드러난 불평이 전혀 근거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본 절에 드러난 백성들의 태도에도 문제점이 내포되어 있다. (1) 솔로몬 당시의 활발한 통상 교역은 전반적으로 백성들의 소득 수준을 향상시켰다. 따라서 그에 부응할 노동력의 제공은 필연적이었다. (2) 솔로몬의 건축사업 중에는 무모했던 부분들도 있었겠지만, 대부분은 하나님의 영광과 왕국의 번영을 만방에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백성들은 이러한 거국적인 행사에 헌신적으로 참여해야 했으며, 개인적 손익 계산보다는 자부심을 표해야 마땅했을 것이다. (3) 설령 통치자가 잘못을 범했다 할지라도 모반을 꾀하기 보다는 그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마땅하였다. 왜냐하면 다윗 왕가를 향한 하나님의 영원하신 약속을 그들 또한 듣고 순복한 바 있었기 때문이다(삼하 5:1-3). (4) 더구나 백성들은 스스로 세운 왕 여로보암의 치세하에서도 부역과 세금의 의무를 여전히 지녔으니(25절) 부역과 세금의 가중성만을 이유로 그들이 르호보암을 배척한 것(16-20절)은 큰 잘못이었다.
가볍게 하소서. 애굽에서 무거운 강제 노역에 시달리다 벗어난 자들의 후손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이다(출 2:23, 6:6). 그런데 그들이 다시 자기들의 왕에게 강제 노역을 감해 달라고 간청해야 하는 것은 비극이 아닐 수 없었다.
가볍게 하소서. 애굽에서 무거운 강제 노역에 시달리다 벗어난 자들의 후손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이다(출 2:23, 6:6). 그런데 그들이 다시 자기들의 왕에게 강제 노역을 감해 달라고 간청해야 하는 것은 비극이 아닐 수 없었다.
12:5 삼 일 후에 다시 내게로 오라. 이처럼 르호보암이 백성들의 요구에 바로 대답하지 아니하고 삼 일 뒤로 미룬 이유는 다음과 같이 추정된다. (1) 역대 왕들과 달리 선뜻 왕의 승인을 얻지 못하고 난관이 있자 이를 숙고할 기회를 가지려 하기 위함이었다. (2) 예루살렘(세겜에서 약 58 km 떨어진)에서 상의할 모사(謀士)들을 소집할 시간을 얻으려 했기 때문이다. 한편 예루살렘에서 세겜까지는 그 거리로 보아 나귀를 탄다 해도 하루가 꼬박 걸렸을 것이다(Hammond).
하매 백성이 가니라. 르호보암의 요청에 순순히 말을 듣는 백성에게서 아직까지 그들에겐 반역의 의도가 없었음을 본다. 이 같은 사실은 앞서 그들의 요청(4절)이 진지한 것이었음도 입증해 준다. 따라서 처음부터 그들이 르호보암에 대한 반역을 예비했다는 견해(Bähr 등)는 성립하기 어렵다.
하매 백성이 가니라. 르호보암의 요청에 순순히 말을 듣는 백성에게서 아직까지 그들에겐 반역의 의도가 없었음을 본다. 이 같은 사실은 앞서 그들의 요청(4절)이 진지한 것이었음도 입증해 준다. 따라서 처음부터 그들이 르호보암에 대한 반역을 예비했다는 견해(Bähr 등)는 성립하기 어렵다.
12:6 솔로몬의 생전에 그 앞에 모셨던 노인들. 본 절에서 ‘노인’(히, 자켄)은 단순히 연로한 자를 지칭하기보다 국가 행정에 직간접으로 영향을 끼치던 장로들을 의미한다. 출 3:16 주석 참조. 이들은 솔로몬의 성공과 실패를 몸소 체험했던 바 통치의 묘(妙)와 백성의 생리에 익숙한 노련함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 중에는 솔로몬의 행정 구역을 담당했던 원로대신들도 있었을 것이다(4:2-6). 그렇다면 이들이야말로 이스라엘 지역 사회의 문제를 근접한 데서 가장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인물들이다.
충고하여. 특히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겸손히 제시하는 의견을 말한다. 즉 여기서 이는 왕인 르호보암에게 원로들이 진언(進言)하는 것을 가리킨다.
충고하여. 특히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겸손히 제시하는 의견을 말한다. 즉 여기서 이는 왕인 르호보암에게 원로들이 진언(進言)하는 것을 가리킨다.
12:7 오늘 이 백성을 섬기는 자가 되어 그들을 섬기고. 장로들의 이 직언(直言)은 여호와 신앙에 입각한 이스라엘의 전통적이고도 이상적인 군주관이 반영된 말이다. 즉 왕은 백성들에게 봉사하는 종으로서 하나님께서 선택한 자이다. 이러한 이상은 실제로 왕은 율법에 복종해야 하는 인물로 간주하는 사고 방식으로 표현된다(신 17:14-20). 즉 왕의 권력은 무제한의 것이 아니고 율법에 담긴 민사법과 전통의 규정들에 의해 규제되었다(삼하 11:1 이하, 16:4, 24:14 등). 왕에게 이와같은 법의 정신과 의무를 일깨워 주는 역할이 장로들에게 있었다(삼상 10:25, 삼하 5:3, 왕하 11:17). 그러나 권력욕에 사로잡힌 왕들은 율법의 정신과 규정에 제한당하는 것을 싫어하였다. 하지만 지도적 위치에 있는 자들은 특권 의식에 사로잡혀 무리들 위에 군림하려 해서는 아니되며, 도리어 섬기고 헌신하는 자세로 맡은 바 직무에 충실해야 한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
섬기고. ‘섬기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바드’는 ‘봉사하다, 일하다’는 뜻으로 구약에서 자주(290회) 등장하는 말이다. 이는 그만큼 구약이 담고 있는 굵직한 정신의 일맥(一脈)을 나타내 주는 말이다. 그런데 이 ‘아바드’는 사물과 사람 및 하나님 모두를 향해 사용된다. 즉 이 단어는 사람이 자연을 경작한다든지 종이 주인에게 봉사한다든지 또는 성도가 하나님을 섬긴다든지 하는 모든 경우에 사용되고 있다(창 2:5, 29:15, 렘 22:13, 신 15:19, 삿 9:28, 삼상 11:1 등). 그 가운데서도 본 절에서 이 단어는 왕으로서의 백성에 대한 행동의 본질적 성격이 곧 ‘섬김’임을 강조해 주고 있다. 따라서 위에 있는 자는 섬기는 자라는 성경의 정신은 여기서도 발견된다(눅 22:25, 26).
좋은 말. ‘좋은 말’은 본래 상대방으로 하여금 기쁨과 행복을 느끼게 해줄 수 있는 말을 가리킨다. 그런데 여기서는 백성들의 요구에 대하여 승낙하는 것을 가리킨다. 즉 장로들은 르호보암에게 백성들의 요구(4절)를 들어주도록 충고하고 있다.
섬기고. ‘섬기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바드’는 ‘봉사하다, 일하다’는 뜻으로 구약에서 자주(290회) 등장하는 말이다. 이는 그만큼 구약이 담고 있는 굵직한 정신의 일맥(一脈)을 나타내 주는 말이다. 그런데 이 ‘아바드’는 사물과 사람 및 하나님 모두를 향해 사용된다. 즉 이 단어는 사람이 자연을 경작한다든지 종이 주인에게 봉사한다든지 또는 성도가 하나님을 섬긴다든지 하는 모든 경우에 사용되고 있다(창 2:5, 29:15, 렘 22:13, 신 15:19, 삿 9:28, 삼상 11:1 등). 그 가운데서도 본 절에서 이 단어는 왕으로서의 백성에 대한 행동의 본질적 성격이 곧 ‘섬김’임을 강조해 주고 있다. 따라서 위에 있는 자는 섬기는 자라는 성경의 정신은 여기서도 발견된다(눅 22:25, 26).
좋은 말. ‘좋은 말’은 본래 상대방으로 하여금 기쁨과 행복을 느끼게 해줄 수 있는 말을 가리킨다. 그런데 여기서는 백성들의 요구에 대하여 승낙하는 것을 가리킨다. 즉 장로들은 르호보암에게 백성들의 요구(4절)를 들어주도록 충고하고 있다.
12:8 버리고. ‘버리고’(히, 아자브)는 주로 선한 것, 마땅한 것을 저버리는 경우에 사용되는 말이다(신 28:20, 31:16, 삿 10:10, 렘 1:16). 즉 본 절에서 르호보암은 율법의 정신으로 뒷받침된 장로들의 진언을 저버리고 있다. 특히 본 문맥에서 ‘아자브’는 ‘무시하다’는 뜻이 강하다. 이것은 단순히 아둔함에서 비롯되는 불찰이기보다는, 탐탁치 않은 감정과 나란히 가는 의도적인 배제이다. 그리고 그 배후에는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르고 싶은 오만한 욕구가 잠재해 있다. 이렇게 볼 때 르호보암은 부친 솔로몬의 생애 중 후반부의 어두운 면을 물려받은 흔적이 엿보인다. 즉 당시 솔로몬은 부강함에 집착하여 율법의 정신에 위배되는 행동을 했던 것이다(11:1-13).
자기 앞에 모셔 있는 … 어린 사람들. 이들은 현재 르호보암의 신하로서 6절의 ‘솔로몬의 생전에 그 앞에 모셨던 노인들’, 즉 현재는 원로가 된 솔로몬의 신하들과 대비된다. 이 본문이 전하는 사건의 한 측면에는 르호보암 내각 내부에 존재하던 신구 세력간의 대립이 은연 중 표출되고 있다. 그런데 그 같은 대립과 갈등은 곧 이어 완전히 드러난다(10, 11절).
자기와 함께 자라난. ‘함께 자라난’이 시사하듯, 이들 소년들은 르호보암과 같은 경험을 통해 사물과 인간에 대해 같은 관점, 같은 경향을 갖게 된 부류라 하겠다. 즉 이들은 하나의 ‘파당성’(派黨性)을 가진 무리인 것이다.
어린 사람들. ‘어린 사람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옐레드’는 ‘낳다, 태어나다’는 뜻의 ‘얄라드’에서 온 말로 갓 태어난 어린아이로부터 장성한 청년에 이르기까지 사용할 수 있는 단어이다. 그런데 르호보암이 41세 때 왕위에 오른 것으로 보아 여기서는 40대의 동년배들을 가리킴이 분명하다(14:21). 왜냐하면 이들은 르호보암과 함께 자랐다고 언급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여기서 ‘어린 사람들’은 왕성한 활력으로서의 젊음을 내포한 긍정적인 말이 아니다. 대신 이는 6절의 ‘노인’과 날카롭게 대비되어, 경험이 불충분하고 사려깊지 못한 부정적 면이 강조되는 ‘어린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들은 르호보암과 마찬가지로 권력과 힘을 추종(追從)하되 책임의 면을 고려하지 않는 ‘힘 지향적’ 인물들이다. 이들의 용렬(庸劣)함은 상황을 도리어 악화시키는 강경책을 진언하는 데서 여실히 드러난다(10, 11절).
자기 앞에 모셔 있는 … 어린 사람들. 이들은 현재 르호보암의 신하로서 6절의 ‘솔로몬의 생전에 그 앞에 모셨던 노인들’, 즉 현재는 원로가 된 솔로몬의 신하들과 대비된다. 이 본문이 전하는 사건의 한 측면에는 르호보암 내각 내부에 존재하던 신구 세력간의 대립이 은연 중 표출되고 있다. 그런데 그 같은 대립과 갈등은 곧 이어 완전히 드러난다(10, 11절).
자기와 함께 자라난. ‘함께 자라난’이 시사하듯, 이들 소년들은 르호보암과 같은 경험을 통해 사물과 인간에 대해 같은 관점, 같은 경향을 갖게 된 부류라 하겠다. 즉 이들은 하나의 ‘파당성’(派黨性)을 가진 무리인 것이다.
어린 사람들. ‘어린 사람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옐레드’는 ‘낳다, 태어나다’는 뜻의 ‘얄라드’에서 온 말로 갓 태어난 어린아이로부터 장성한 청년에 이르기까지 사용할 수 있는 단어이다. 그런데 르호보암이 41세 때 왕위에 오른 것으로 보아 여기서는 40대의 동년배들을 가리킴이 분명하다(14:21). 왜냐하면 이들은 르호보암과 함께 자랐다고 언급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여기서 ‘어린 사람들’은 왕성한 활력으로서의 젊음을 내포한 긍정적인 말이 아니다. 대신 이는 6절의 ‘노인’과 날카롭게 대비되어, 경험이 불충분하고 사려깊지 못한 부정적 면이 강조되는 ‘어린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들은 르호보암과 마찬가지로 권력과 힘을 추종(追從)하되 책임의 면을 고려하지 않는 ‘힘 지향적’ 인물들이다. 이들의 용렬(庸劣)함은 상황을 도리어 악화시키는 강경책을 진언하는 데서 여실히 드러난다(10, 11절).
12:9 백성이 내게 말하기를. 장로들의 충고를 무시해 버린 르호보암의 오만으로 미루어(6-8절) 백성들의 간청에 대해 그가 어떻게 느꼈을지 짐작할 수 있다. 권력 지향적인 르호보암에게 있어서 자신의 무제한적 욕구 충족을 위해서 백성들의 굴종이 필요했을 것이다. 따라서 그런 그에게 제시된 백성들의 요구(4절)는 그의 야심에 타격을 주는 내용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자존심 상하는 일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12:10 내 새끼 손가락이 내 아버지의 허리보다 굵으니. 이 수사학적 표현을 분석하면 다음과 같은 두 대비(對比) 사실을 지적할 수 있다. (1) 굵기의 비교로서, 신체 중 가장 가느다란 부분인 새끼 손가락과 가장 굵은 부분인 허리가 대비된다. (2) 내적 의미 연관의 비교로서, 새끼 손가락이 표상하는 손끝의 간릉(幹能)한 재주 정도와 허리가 표상하는 힘의 근원지(사 45:1, 시 69:23)가 서로 대비된다. 결국 이 말은 르호보암이 부친 솔로몬보다 훨씬 능력이 많다는 의미이다(Pulpit Commentary). 그런데 실상 이는 르호보암의 능력에 대해 과장된 찬사를 보내기 위한 비유적 표현이다. 원로들의 충정어린 자문이 노련한 경험에서 나온 지혜로운 것이었음에 반해, 소인배들의 조언은 아첨으로 가득찼으며 젊은 왕의 혈기를 충동질하기에 적절하였다. 만일 왕이 원로들의 조언을 따랐다면, 백성들은 반역의 구실을 잃게 되었을 것이고 르호보암 자신은 왕국 분열을 조장하는 범죄를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처럼 사탄은 우리 주위를 둘러싸고 끊임없이 유혹을 해온다. 르호보암은 왕직을 수행하기에 앞서 일종의 테스트를 받고 있었던 것으로(막 1:12, 13) 사탄의 유혹에 넘어감으로서 통일 왕국이라는 큰 그릇을 소유하기에 부적격자로 판명되었다.
12:11 더욱 무겁게 할지라. 원래 ‘무겁다’는 말(히, 카베드)에는 ‘가혹하다’ 외에도 ‘슬프다’는 뜻도 들어있다. 사실 가혹한 대접을 받는 사람은 슬픔도 느끼기 마련이다. 아무튼 본 절은 백성들에게 이전보다 더 혹독하게 속박을 가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한 처사가 백성들의 슬픔을 가중시키리라는 것은 당연하다.
채찍. 본 절의 ‘채찍’에 해당하는 원어는 ‘쇼트’인데, 죄를 징책하는 의미의 ‘채찍’, 즉 ‘네가’와는 구별된다(삼하 7:14, 시 89:32). 다시 말해 이는 단지 문자 그대로의 ‘채찍’을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통치상의 가혹함과 잔인성을 표상해 준다.
징계하였으나. 하나님께 있어서 이 말의 원어 ‘야사르’는 대개 인간의 변화 및 회개를 겨냥한 긍정적인 의도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좀 혹독하게 말해서 솔로몬의 ‘야사르’는 단지 자신의 이기적 욕구 충족을 위해 백성을 쥐어짠 것이다. 4절 주석 참조.
전갈 채찍. 대개의 학자들은 본 절의 ‘전갈 채찍’(히, 아크랍)을 동물(전갈은 곤충이 아니라 절지 동물)로서의 전갈이 아니라, 어떤 종류의 채찍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한다. 즉 앞서의 채찍이 단순히 가죽으로 된 끈인데 본 절의 ‘전갈 채찍’은 이 가죽끈에 쇠조각을 박은 채찍이란 주장이다(H. Austel, Gates, Patterson, Montgomery). 한편 전갈(scorpion)은 꼬리 끝에 독침이 있어 이에 쏘이면 극심한 고통을 겪게 하는 동물이다. 그래서 계시록에서도 전갈은 극도의 고통에 비유되었다(계 9:5).
채찍. 본 절의 ‘채찍’에 해당하는 원어는 ‘쇼트’인데, 죄를 징책하는 의미의 ‘채찍’, 즉 ‘네가’와는 구별된다(삼하 7:14, 시 89:32). 다시 말해 이는 단지 문자 그대로의 ‘채찍’을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통치상의 가혹함과 잔인성을 표상해 준다.
징계하였으나. 하나님께 있어서 이 말의 원어 ‘야사르’는 대개 인간의 변화 및 회개를 겨냥한 긍정적인 의도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좀 혹독하게 말해서 솔로몬의 ‘야사르’는 단지 자신의 이기적 욕구 충족을 위해 백성을 쥐어짠 것이다. 4절 주석 참조.
전갈 채찍. 대개의 학자들은 본 절의 ‘전갈 채찍’(히, 아크랍)을 동물(전갈은 곤충이 아니라 절지 동물)로서의 전갈이 아니라, 어떤 종류의 채찍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한다. 즉 앞서의 채찍이 단순히 가죽으로 된 끈인데 본 절의 ‘전갈 채찍’은 이 가죽끈에 쇠조각을 박은 채찍이란 주장이다(H. Austel, Gates, Patterson, Montgomery). 한편 전갈(scorpion)은 꼬리 끝에 독침이 있어 이에 쏘이면 극심한 고통을 겪게 하는 동물이다. 그래서 계시록에서도 전갈은 극도의 고통에 비유되었다(계 9:5).
12:12 모든 백성. 1절의 ‘온 이스라엘’과 동일한 말이다. 자세한 내용은 1절 주석을 참조하라.
이는 왕이 명령하여 … 하였음이라. 백성들이 아직까지 왕의 명령을 따르고 있음을 재차 특기(特記)하고 있는 구절이다. 5절 주석 참조. 따라서 이때까지 백성들은 다윗 왕조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버리지 않았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이후에 벌어진 파국은 르호보암의 불찰에 결정적인 원인이 있는 것이다(13-20절). 그런데 르호보암의 잘못이 갖는 성격은 우둔한 강압책이라는 표면적인 것보다 율법 정신에 투철치 못한데서 찾아야 한다(7절).
이는 왕이 명령하여 … 하였음이라. 백성들이 아직까지 왕의 명령을 따르고 있음을 재차 특기(特記)하고 있는 구절이다. 5절 주석 참조. 따라서 이때까지 백성들은 다윗 왕조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버리지 않았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이후에 벌어진 파국은 르호보암의 불찰에 결정적인 원인이 있는 것이다(13-20절). 그런데 르호보암의 잘못이 갖는 성격은 우둔한 강압책이라는 표면적인 것보다 율법 정신에 투철치 못한데서 찾아야 한다(7절).
12:13 포학한 말. 원문에는 단지 ‘포학하게’(harshly)로 되어 있다. 그런데 ‘포학하게’는 ‘난폭하다, 고집이 세다’는 뜻을 지닌 히브리어 ‘카샤’에서 온 말이다. 이 ‘카샤’는 본래 무거운 멍에에 짓눌린 소를 참기 어려운 정도로 혹사시키는 농경의 한 장면에서 비롯된 단어이다. 그러므로 ‘카샤’는 그 행위의 주체에는 완고함이, 그 행위의 객체에는 참기 어려움이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 과거 애굽의 노예생활시 바로가 히브리 노예에 대해 그러했다(출 1:14, 6:9, 신 26:6). 또한 훗날 이스라엘인들의 바벨론 포로 생활 역시 ‘카샤’로 인해 참기 어려운 것이었다(사 14:3). 결국 ‘카샤’란 단어에서 발견되는 르호보암의 마음가짐은 애굽의 바로가 그랬드이 고집세고 완악한 바로 그것이다(출 7:3, 13:15).
노인의 자문. 6, 7절 주석을 참조하라.
노인의 자문. 6, 7절 주석을 참조하라.
12:14 내 아버지는 … 징치하리라. 본 절은 르호보암이 앞서 소년들의 충고 내용을 그대로 읊고 있는 장면이다(11절). 본 절은 그 수사학적 표현의 훌륭함에도 불구하고 실제 내용상의 우둔함과 무자비성이 돋보인다. 대신 표현상의 뛰어난 기교는 도리어 르호보암의 악함을 돋보이게 하는 데 사용되고 있다. 그러므로 르호보암의 강경한 대답은 3일 동안 일말의 기대를 품고 있던 백성들(5절)의 마음을 좌절시키기에 충분하였다.
12:15 이 일은 여호와께로 말미암아 난 것이라. 인간 만사(萬事)를 주장하시는 분은 정녕 만유(萬有)의 주재자 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시다(시 103:19, 단 4:34, 35). 아무튼 본 절이 직접적으로 가리키는 바는 바로 백성들의 요청에 대한 르호보암의 거부이다(12-14절). 다시 말해 본 절은 남북 분열의 파국으로 가는 전환점이 바로 르호보암의 어리석은 결정 때문에 빚어졌음을 지적해 준다. 한편 여기서 ‘이 일’에 해당하는 원어 ‘십바’는 ‘사태, 운명의 전환’(a turn about of fate)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본 절은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르호보암의 운명을 전환시키셨음을 증거해 준다(Montgo-mery).
실로 사람 아히야. 솔로몬 때부터 르호보암에 이르기까지의 기간 동안 활약했던 에브라임 지파 출신의 선지자이다. 11:29 주석 참조.
이루게. ‘이루게’에 해당하는 원어 ‘쿰’은 어떤 결정이 유효한 것으로 확정, 확립되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이 말은 르호보암이 백성의 요구를 거절하는 그 순간(12-14절)이 곧 하나님의 심판 판결(11:35,36)이 확정되는 순간이었음을 일깨워 준다.
실로 사람 아히야. 솔로몬 때부터 르호보암에 이르기까지의 기간 동안 활약했던 에브라임 지파 출신의 선지자이다. 11:29 주석 참조.
이루게. ‘이루게’에 해당하는 원어 ‘쿰’은 어떤 결정이 유효한 것으로 확정, 확립되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이 말은 르호보암이 백성의 요구를 거절하는 그 순간(12-14절)이 곧 하나님의 심판 판결(11:35,36)이 확정되는 순간이었음을 일깨워 준다.
12:16 온 이스라엘. 1절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이라는 명칭이 북쪽 지파에 한해 사용된 대표적 구절 중 하나이다(삼하 2:9, 17, 3:10, 19:41, 20:1). 왜냐하면 ‘온 이스라엘’(all Israel)이라는 표현에도 불구하고 이는 17절의 ‘유다 성읍들에 사는 이스라엘 자손’과는 뚜렷하게 구별되기 때문이다. 한편 북 왕국이 멸망한 이후에는 ‘이스라엘’이란 용어가 남 왕국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기도 했다(사 5:7, 미 3:1).
왕이 듣지 아니함을 보고. 북쪽 지파가 결정적으로 다윗 왕조와 결별을 결심하게 된 것이 바로 이 순간임을 보여준다.
대답하여. 이에 해당하는 원어(야쉬부 … 다바르)은 ‘말을 보내다’는 뜻이다. 이로 보아 아마도 북쪽 지파들은 자신들의 대표자를 왕에게 보내 자신들의 결의 사항을 전달한 듯하다.
다윗과 … 이새의 아들에게서 받을 유산이 없도다. 이 말은 반복을 피하기 위한 시적인 대구법으로 이루어져 있다. 즉 그 의미상 같은 내용이 각기 다른 말로 표현되고 있다. 그럼으로써 다윗 왕조에 대한 반감을 보다 효과적으로 증폭(增幅)시켜 준다.
너희의 장막으로 돌아가라. ‘돌아가라’는 말은 원문에 없는 첨가어(添加語)이다. 그러나 단지 ‘너희의 장막으로’(To your tents!)라는 말만으로도 ‘집으로 돌아가라’(Go home!)는 뜻이 된다(Montgomery). 한편 여기서 시대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가옥’이란 말대신 ‘장막’(히, 오헬)이 사용된 것은 옛 유목 생활에서 발생하여 굳어진 관습적 표현이다. 8:66 주석 참조.
네 집이나 돌아보라. ‘집’에 해당하는 원어 ‘바이트’는 ‘족속’으로도 번역할 수 있다(수 17:17, 삿 1:22, 10:9, 삼하 19:20 등). 그러므로 본 절은 다윗 가문은 자기가 속한 지파, 즉 유다 지파나 통치하라는 뜻이다. 따라서 이는 달리 말해 다른 지파에 대해서는 왕노릇하여 참견하지 말라는 뜻이기도 하다.
왕이 듣지 아니함을 보고. 북쪽 지파가 결정적으로 다윗 왕조와 결별을 결심하게 된 것이 바로 이 순간임을 보여준다.
대답하여. 이에 해당하는 원어(야쉬부 … 다바르)은 ‘말을 보내다’는 뜻이다. 이로 보아 아마도 북쪽 지파들은 자신들의 대표자를 왕에게 보내 자신들의 결의 사항을 전달한 듯하다.
다윗과 … 이새의 아들에게서 받을 유산이 없도다. 이 말은 반복을 피하기 위한 시적인 대구법으로 이루어져 있다. 즉 그 의미상 같은 내용이 각기 다른 말로 표현되고 있다. 그럼으로써 다윗 왕조에 대한 반감을 보다 효과적으로 증폭(增幅)시켜 준다.
너희의 장막으로 돌아가라. ‘돌아가라’는 말은 원문에 없는 첨가어(添加語)이다. 그러나 단지 ‘너희의 장막으로’(To your tents!)라는 말만으로도 ‘집으로 돌아가라’(Go home!)는 뜻이 된다(Montgomery). 한편 여기서 시대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가옥’이란 말대신 ‘장막’(히, 오헬)이 사용된 것은 옛 유목 생활에서 발생하여 굳어진 관습적 표현이다. 8:66 주석 참조.
네 집이나 돌아보라. ‘집’에 해당하는 원어 ‘바이트’는 ‘족속’으로도 번역할 수 있다(수 17:17, 삿 1:22, 10:9, 삼하 19:20 등). 그러므로 본 절은 다윗 가문은 자기가 속한 지파, 즉 유다 지파나 통치하라는 뜻이다. 따라서 이는 달리 말해 다른 지파에 대해서는 왕노릇하여 참견하지 말라는 뜻이기도 하다.
12:17 유다 성읍들에 사는 이스라엘 자손. 단순히 유다 지파라 하지 않고 좀더 포괄적으로 ‘유다 성읍에 사는 이스라엘 자손’으로 기록했음에 유의해야 한다. 즉 이는 유다 지파가 아니면서도 르호보암에 동조하여 유다 지경(地境)에 머무른 사람들이 있음을 시사한다. 그런데 이들이 누군가 하는 문제는 이들이 유다의 ‘성읍’(cities)에 사는 사람들이었다는 기록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즉 앞서 솔로몬이 벌인 활발한 국제무역(10장)은 이스라엘 사회상에 많은 변모를 가져왔다. 그 중 하나가 수도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도시 문화의 발달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변화는 농경 사회를 배경으로 한 지파 의식을 약화시키고, 도시의 재력(財力)과 경제 활동을 중심으로 한 도시 주민들을 형성하였다. 그런데 이 도시 주민 중에는 비록 북쪽 지파 출신이지만, 농경 중심의 북 왕국이 갈라져 나가는데 동조하기 싫어한 사람들도 많았던 것이다(Morgenstern).
12:18 역꾼의 감독 아도람. 개역한글판 성경 및 영어 성경에 아도니람(Adoniram) 또는 하도람(Hadoram, 대하 10:18)으로 번역되어 있는 이 ‘역꾼의 감독’ 이름은 원문에 ‘아도람’으로 나와있다. 그리고 이 아도람은 본래 선왕(先王) 솔로몬의 주요 관원 중 한 명이었다(4:6). 그런데 그가 다윗 시대의 ‘아도람’과 동일 인물인지는 분명치 않다(삼하 29:24). 어쨌든 본 절의 아도람은 강제 노동의 감독관으로 상당히 이골이 난 사람임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백성들에게는 혐오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닐 수 없었다. 한편 무거운 세금과 강제 노동 때문에 10 지파가 이탈하겠노라고 선언한 판국에(16절) 르호보암이 아도람을 그들에게 파견한 것은 어떠한 상황하에서도 강압정책을 계속 고수하겠다는 표시였다. 따라서 10 지파는 아도니람을 돌로 쳐죽일 뿐아니라 르호보암의 신변마저 위협할 정도로 분노하였다.
급히. ‘급히’에 해당하는 원어 ‘아메츠’는 ‘힘있게 하다’는 뜻이다. 이는 곧 르호보암이 달아나는 일에 힘을 내야 할 정도로 위급한 상황이었음을 시사해 준다.
급히. ‘급히’에 해당하는 원어 ‘아메츠’는 ‘힘있게 하다’는 뜻이다. 이는 곧 르호보암이 달아나는 일에 힘을 내야 할 정도로 위급한 상황이었음을 시사해 준다.
12:19 오늘까지. 이 말은 남북 왕국의 대치 상태를 전제하는 표현이다. 그런데 열왕기의 최종 기록 연대는 남북 왕국이 모두 멸망하고 난 뒤의 시기(B.C. 561-537년)이다. 아마도 이러한 사태는 본서 저자가 왕국시대 당시의 어떤 사본 내용을 그대로 차용(借用)했기 때문에 빚어진 현상일 것이다. 그리고 그 사본은 유다 왕국의 실록과 같은 문서일 것으로 추측된다. 왜냐하면 본 절의 기록 내용이 상당히 다윗 왕조에 우호적인 성격(북 왕국의 행동을 ‘배반’으로 표현하고 있음)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12:20 온 이스라엘이 여로보암이 돌아왔다 함을 듣고. 이는 세겜에서 르호보암과 북쪽 지파가 대면하는 데 여로보암이 동행했다는 앞의 기록과 모순되는 듯하다(3, 12절). 그러나 본 절의 ‘온 이스라엘’은 문자 그대로의 온 백성으로 이해하고, 앞에서 세겜에 갔던 ‘온 이스라엘’은 북쪽 지파의 대표자들만을 지칭했던 걸로 이해할 수 있다(Bähr, Hammond).
공회. ‘공회’(히, 에다)는 ‘지정하다’에서 온 말이다. 이는 대개 약속된 모임과 무리(congregation)를 동시에 지칭한다. 한편 본 절에서 여로보암은 북 이스라엘 10지파가 자발적으로 구성한 ‘공회’에 초빙되어 왕으로 추대되고 있다.
왕으로 삼았으니. 북 왕국 이스라엘의 초대 왕 여로보암이 즉위한다. 르호보암의 어리석음(12-19절)은 이처럼 북쪽 10 지파로 하여금 다윗 가문으로부터 분리해나가는 당위성을 제공해 주었다. 그런데 망명자 여로보암의 초빙(2, 3절)과 그의 왕위 등극은 북쪽 지파의 민의에 따라 공회에서 결정된 것으로써, 다윗-솔로몬 치하시 자신들의 의사 표시를 제대로 하지 못하던 것과는 상당한 차이를 드러낸다. 그러나 이 사건은 인간의 눈으로 볼 때 민주적으로 보일지 모르나, 선민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사이에 맺어진 계약 관계를 생각할 때, 계약을 파기하는 행위, 즉 자신의 이익과 주장을 관철시키려는 이기주의적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본서 저자는 이후 열왕의 즉위를 기록할 때 남과 북에 차이를 둔다. 즉 남 왕국 왕들의 즉위시에는 르호보암의 예에서 보듯, (1) 즉위시의 연령, (2) 통치 기간, (3) 모친의 이름 등이 공식처럼 언급된다(14:21, 15:1, 2, 9, 10, 22:41, 42). 그러나 북 왕국의 왕들의 경우에는 즉위 연령, 모친의 이름이 생략된다(15:25, 33, 16:8). 아마도 이러한 구성의 특징은 본서 기자가 여러 자료를 참조하는 가운데 자기 격식에 맞춰 본서를 기록한 특징이라고 볼 수 있다(Szikszai).
공회. ‘공회’(히, 에다)는 ‘지정하다’에서 온 말이다. 이는 대개 약속된 모임과 무리(congregation)를 동시에 지칭한다. 한편 본 절에서 여로보암은 북 이스라엘 10지파가 자발적으로 구성한 ‘공회’에 초빙되어 왕으로 추대되고 있다.
왕으로 삼았으니. 북 왕국 이스라엘의 초대 왕 여로보암이 즉위한다. 르호보암의 어리석음(12-19절)은 이처럼 북쪽 10 지파로 하여금 다윗 가문으로부터 분리해나가는 당위성을 제공해 주었다. 그런데 망명자 여로보암의 초빙(2, 3절)과 그의 왕위 등극은 북쪽 지파의 민의에 따라 공회에서 결정된 것으로써, 다윗-솔로몬 치하시 자신들의 의사 표시를 제대로 하지 못하던 것과는 상당한 차이를 드러낸다. 그러나 이 사건은 인간의 눈으로 볼 때 민주적으로 보일지 모르나, 선민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사이에 맺어진 계약 관계를 생각할 때, 계약을 파기하는 행위, 즉 자신의 이익과 주장을 관철시키려는 이기주의적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본서 저자는 이후 열왕의 즉위를 기록할 때 남과 북에 차이를 둔다. 즉 남 왕국 왕들의 즉위시에는 르호보암의 예에서 보듯, (1) 즉위시의 연령, (2) 통치 기간, (3) 모친의 이름 등이 공식처럼 언급된다(14:21, 15:1, 2, 9, 10, 22:41, 42). 그러나 북 왕국의 왕들의 경우에는 즉위 연령, 모친의 이름이 생략된다(15:25, 33, 16:8). 아마도 이러한 구성의 특징은 본서 기자가 여러 자료를 참조하는 가운데 자기 격식에 맞춰 본서를 기록한 특징이라고 볼 수 있다(Szikszai).
12:21 유다 온 족속과 베냐민 지파. 베냐민 지파가 르호보암의 편으로 남았다는 사실은 다소 이상하게 보인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을 배출했던 베냐민 지파는 이후 계속하여 다윗 왕조에 적대적이었기 때문이다(삼하 2:15, 3:7 이하, 16:5 이하, 20:1,2). 혹자는 이 문제를 수도(首都) 예루살렘이 유다와 베냐민 경계선 위에 있었던 사실(수 18:28)에서 해결한다(Hammond). 즉 유다와 분리될 경우에 생길 예루살렘의 상실을 베냐민 지파가 원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공동의 이해 관계가 옛 불화에도 불구하고 두 지파의 연합을 이루게 한 셈이다(Pulpit Commentary). 그러나 이상의 사실에도 불구하고 베냐민 지파 전체가 일치된 행동을 한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벧엘, 길갈 등과 같은 베냐민 지파의 성읍은 북 왕국에 편입되었기 때문이다(29절).
싸워 … 돌리려 하더니. 이처럼 무력과 강경 일변도인 르호보암의 모습에서 ‘힘-지향적’ 특성을 읽을 수 있다(14, 18절).
싸워 … 돌리려 하더니. 이처럼 무력과 강경 일변도인 르호보암의 모습에서 ‘힘-지향적’ 특성을 읽을 수 있다(14, 18절).
12:22 스마야. ‘스마야’란 이름은 ‘여호와께서 들으셨다’는 뜻이다. 그런데 성경에서 스마야 선지자에 관해 알려진 사실은 다음 세가지 뿐이다. (1) 본 장에서 르호보암의 군사 행동을 중지시킨 일(23, 24절). (2) 애굽 왕 시삭의 예루살렘 침입 때 유다 백성들의 회개를 촉구한 일(대하 12:5). (3) 역대기 저자가 르호보암의 기사를 종결하면서 ‘선지자 스마야와 선견자 잇도의 족보책’을 인용한 사실(대하 12:15). 이로 미루어, 스마야는 르호보암 당시 남 왕국 유다에서 활약한 선지자로서, 당대의 역사적 사건들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대하 12:5-8).
12:23 유다 왕. 본 절에서 처음으로 ‘유다 왕’이라는 명칭이 사용되고 있다. 비록 본 절의 시점이 르호보암이 이스라엘의 재통일을 위해 북진을 준비하였을 때(21절)이지만 이미 왕국 분열은 기정 사실이었다(11:29-39). 따라서 반쪽만의 왕이 되기를 싫어하는 르호보암에게 본서 저자는 냉정히 ‘유다 왕’으로 호칭하는 직절(直節)함을 보이고 있다. 이로 보아 본서 저자는 왕국 분열을 하나님의 심판으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24절).
그 남은 백성. 여기서는 북쪽 지파 사람들이면서 유다 성읍에 거주하는 자들을 가리킨다. 17절 주석을 참조하라.
그 남은 백성. 여기서는 북쪽 지파 사람들이면서 유다 성읍에 거주하는 자들을 가리킨다. 17절 주석을 참조하라.
12:24 형제. 본 절에서 ‘형제’(히, 아흐)는 공동 조상에게서 나온 광범위한 후손을 모두 지칭하는 말이다. 사실 북 왕국 이스라엘도 남 왕국 유다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점에서 모두 ‘이스라엘 자손’이며 형제이다. 이와 같이 민족 공동체의 단일성을 나타내는 경우 ‘형제’란 말은 보통 ‘이스라엘 자손’이라는 말과 병행되어 등장한다(레 25:46-48, 신 3:18, 24:7 등).
이 일이 나로 말미암아 난 것이라. 이스라엘 남북 분열을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의 결과로 받아들임에 있어서 북부의 선지자 아히야나 남부의 선지자 스마야가 모두 일치하고 있음을 보여준다(11:31-33). 15절 주석 참조.
이 일이 나로 말미암아 난 것이라. 이스라엘 남북 분열을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의 결과로 받아들임에 있어서 북부의 선지자 아히야나 남부의 선지자 스마야가 모두 일치하고 있음을 보여준다(11:31-33). 15절 주석 참조.
12:25 세겜을 건축하고. 새로이 수립된 북 왕국의 체제 정비에 있어서 여로보암이 첫 번째로 한 일은 수도를 정하는 것이었다(Dentan). 그리하여 그 수도는 븍쪽 지파들의 정치 종교적 중심지인 세겜으로 결정되었다(1절). 본 절은 이제 이와 관련하여 여로보암이 수도 세겜의 방비를 강화하는 등의 건설 작업을 수행하였음을 보여준다. 1절 주석 참조.
부느엘. 개역한글 성경에 ‘브누엘’(Penuel, 삿 8:8)로도 번역되어 있는 ‘부느엘’은 ‘브니엘’(Peniel)을 가리키는 또 다른 이름이다. 이곳은 세겜 맞은 편, 그리고 요단 강 동편 얍복 강가에 위치하였는데 야곱이 이곳에서 하나님을 대면하였다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창 32:30). 아마도 여로보암은 수도인 세겜의 동쪽 방어를 위해 이곳에 요새를 세웠을 것이다.
부느엘. 개역한글 성경에 ‘브누엘’(Penuel, 삿 8:8)로도 번역되어 있는 ‘부느엘’은 ‘브니엘’(Peniel)을 가리키는 또 다른 이름이다. 이곳은 세겜 맞은 편, 그리고 요단 강 동편 얍복 강가에 위치하였는데 야곱이 이곳에서 하나님을 대면하였다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창 32:30). 아마도 여로보암은 수도인 세겜의 동쪽 방어를 위해 이곳에 요새를 세웠을 것이다.
12:26 나라가 이제 다윗의 집으로 돌아가리로다. 비록 세겜을 정치적 구심점으로 삼았지만 여로보암의 마음을 불안케하는 것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다윗 이래로 신앙의 중심지로 자리잡은 예루살렘의 종교적 기능 때문이었다(27절, 삼하 6장). 그러므로 여로보암에게는 남 왕국과의 철저한 분리를 위해서도 어떤 종교적 구심점을 마련할 필요가 있었다. 이것이 바로 여로보암 우상 숭배(28-33절)의 발단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여로보암의 우상 숭배 정책은 경건한 신앙인들에게 중대한 도전으로 다가왔으니 그들 중 상당수는 신앙의 자유를 위해 목숨을 건 탈출을 시도하였다(대하 11:13-16).
12:27 올라가면. 북(北) 이스라엘 지역에서 볼 때 예루살렘이 실제로는 아랫쪽 남방임에도 불구하고 ‘올라가다’(히, 알라)는 표현이 사용되고 있다. 이는 변두리가 중심 지역에 대해 갖는 관계성 때문일 것이다. 즉 이 말은 이스라엘인들에게 있어서의 예루살렘의 지위와 중요성을 암시해 준다. 다시 말해 솔로몬의 성전건축 이후 예루살렘은 북쪽 지파들에게도 명실상부한 신앙의 구심점 역할을 해 왔던 것이다(6-8장).
그들의 주 르호보암. 문자대로라면, 여로보암도 르호보암이 정통성을 지닌 왕임을 인정하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Wordsworth). 왜냐하면 르호보암의 앞에 ‘주’(히, 아돈)라는 호칭이 달려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유다를 옹호하는 본서 저자가 여로보암의 행동 동기를 설명하는 가운데 사용한 호칭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Hammond). 따라서 본 절의 표현 그대로 여로보암이 르호보암을 정통 왕으로 인정했다고 보기 어렵다.
그들의 주 르호보암. 문자대로라면, 여로보암도 르호보암이 정통성을 지닌 왕임을 인정하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Wordsworth). 왜냐하면 르호보암의 앞에 ‘주’(히, 아돈)라는 호칭이 달려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유다를 옹호하는 본서 저자가 여로보암의 행동 동기를 설명하는 가운데 사용한 호칭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Hammond). 따라서 본 절의 표현 그대로 여로보암이 르호보암을 정통 왕으로 인정했다고 보기 어렵다.
12:28 이에 계획하고. 여기서 ‘이에’는 26, 27절의 음습(陰濕)한 동기를 가리킨다. 그리고 26, 27절은 28-33절의 원인에 해당한다. 다음으로 ‘계획하고’(히, 이와아츠)는 ‘의논하다’는 뜻이다. 즉 여로보암은 그가 염려하는 문제를 여러 사람과 더불어 의논한 것이다.
금송아지를 만들고. 이처럼 여로보암이 금송아지를 만든 의도는 물론 북 왕국 백성들을 차단하여 예루살렘 성전 순례를 막으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이유만으로 단순히 본 절의 금송아지를 이방의 우상 숭배와 동일시할 수는 없다. 사실 성전 순례를 원하는 백성들은 그야말로 여호와 신앙에 투철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런 그들에게 만일 여로보암이 우상 숭배를 강요했다면, 그것이야말로 자멸의 길이다. 이렇게 볼 때 금송아지는 적어도 시초에는 전통적인 여호와 신앙과 관련된 것으로 인식되었던 같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이는 여호와의 발등상으로서의 상징을 지녔던 것으로 추측된다(Gray). 다음과 같은 몇 가지가 이러한 판단에 도움을 줄 것이다. (1) 소의 형상은 여호와의 힘과 능력을 나타내는 전통적 상징이었다는 점(Dentan). (2) 비록 중심적인 지위는 갖지 못했어도 솔로몬의 성전에서도 소의 형상은 발견된다는 점(7:25). (3) 예후, 엘리야 등이 바알 제의를 공격할 때에도 금송아지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는 점(Cobern).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송아지 형상은 과거 모세 당시처럼 우상으로 사용될 위험성을 충분히 안고 있다(출 20:4-6). 그러기에 이스라엘 역사상 금송아지 형상은 상징으로 머물지 않고 우상화된 적이 종종 있다(호 8:5 이하, 12:11, 13:2). 본 절에서의 여로보암의 행위 역시 결과적으로는 예루살렘 성전 제사를 어지럽히는 이방 종교와의 혼합을 낳았다. 더구나 본문에 의하면, 여로보암은 참된 제사의 동기를 갖지 않고 금송아지 형상을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여로보암은 ‘이스라엘을 범죄하게 한’ 인물로 낙인 찍힌다(15:30, 34, 16:2, 19, 26).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의 신들이라. 이는 출 32:4에서 언급된 말로서, 여기에는 하나님과의 언약 자체를 거부케 하려는 의도가 은연 중에 표현되어 있다. 즉 과거 시내 산 아래에서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섬겼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목자로서의 모세를 인정치 않았을 뿐만 아니라, 모세를 통하여 나타내신 여호와의 언약도 거부하였다(출 32:1-6). 그런데도 본 절에서 여로보암은 모세 당시의 패역했던 상황을 의도적으로 상기시킴으로써,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언약을 거부하도록 종용하고 있다. 물론 솔로몬 말기의 부패상과 르호보암의 폭정 등을 경험하였던 백성들 중 대다수에게, 하나님의 언약이 더 이상 쓸모 없는 것이라 주장한 여로보암의 말이 그럴듯 하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목전의 이익을 위해 하나님마저 팔아버리는 행위에 대한 형벌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마 26:14-16, 27:3-10).
금송아지를 만들고. 이처럼 여로보암이 금송아지를 만든 의도는 물론 북 왕국 백성들을 차단하여 예루살렘 성전 순례를 막으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이유만으로 단순히 본 절의 금송아지를 이방의 우상 숭배와 동일시할 수는 없다. 사실 성전 순례를 원하는 백성들은 그야말로 여호와 신앙에 투철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런 그들에게 만일 여로보암이 우상 숭배를 강요했다면, 그것이야말로 자멸의 길이다. 이렇게 볼 때 금송아지는 적어도 시초에는 전통적인 여호와 신앙과 관련된 것으로 인식되었던 같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이는 여호와의 발등상으로서의 상징을 지녔던 것으로 추측된다(Gray). 다음과 같은 몇 가지가 이러한 판단에 도움을 줄 것이다. (1) 소의 형상은 여호와의 힘과 능력을 나타내는 전통적 상징이었다는 점(Dentan). (2) 비록 중심적인 지위는 갖지 못했어도 솔로몬의 성전에서도 소의 형상은 발견된다는 점(7:25). (3) 예후, 엘리야 등이 바알 제의를 공격할 때에도 금송아지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는 점(Cobern).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송아지 형상은 과거 모세 당시처럼 우상으로 사용될 위험성을 충분히 안고 있다(출 20:4-6). 그러기에 이스라엘 역사상 금송아지 형상은 상징으로 머물지 않고 우상화된 적이 종종 있다(호 8:5 이하, 12:11, 13:2). 본 절에서의 여로보암의 행위 역시 결과적으로는 예루살렘 성전 제사를 어지럽히는 이방 종교와의 혼합을 낳았다. 더구나 본문에 의하면, 여로보암은 참된 제사의 동기를 갖지 않고 금송아지 형상을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여로보암은 ‘이스라엘을 범죄하게 한’ 인물로 낙인 찍힌다(15:30, 34, 16:2, 19, 26).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의 신들이라. 이는 출 32:4에서 언급된 말로서, 여기에는 하나님과의 언약 자체를 거부케 하려는 의도가 은연 중에 표현되어 있다. 즉 과거 시내 산 아래에서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섬겼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목자로서의 모세를 인정치 않았을 뿐만 아니라, 모세를 통하여 나타내신 여호와의 언약도 거부하였다(출 32:1-6). 그런데도 본 절에서 여로보암은 모세 당시의 패역했던 상황을 의도적으로 상기시킴으로써,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언약을 거부하도록 종용하고 있다. 물론 솔로몬 말기의 부패상과 르호보암의 폭정 등을 경험하였던 백성들 중 대다수에게, 하나님의 언약이 더 이상 쓸모 없는 것이라 주장한 여로보암의 말이 그럴듯 하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목전의 이익을 위해 하나님마저 팔아버리는 행위에 대한 형벌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마 26:14-16, 27:3-10).
12:29 벧엘에 두고 … 단에 둔지라. 이처럼 여로보암이 북 왕국의 예배 중심지로서 특별히 벧엘과 단을 택하게 된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1) 이 두 장소는 전통적으로 신성한 곳으로 여겨져 왔기 때문이다. 즉 벧엘은 과거 아브라함과 야곱이 단을 쌓은 곳이며(창 12:8, 13:3, 4, 28:11-19, 31:13, 35:1) 사사 시대에는 언약궤가 오랫동안 이곳에 있었다(삿 20:26). 그리고 단은 그 자체의 신당과 제사장을 소유했던 곳으로서 그 제사장직이 모세의 후손들에 의해 계속 이어졌었다(삿 18:30, 31). (2) 벧엘은 북(北) 이스라엘의 남방 경계 지역에(수 18:13), 단은 북방 경계 지역에 위치하였는데(수 19:47) 북(北)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들에게 거리상의 편의를 제공하기 위함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실로 대신 단이 선정된 데서도 잘 나타난다. 즉 실로는 여러 면에서 단보다 더 예배 중심지로 적합하였으나(수 18:1, 삿 21:19, 삼상 1:11) 벧엘과 마찬가지로 남방지역에 위치했기 때문에 선택되지 않은 것이다.
벧엘. ‘벧엘’은 ‘하나님의 집’이란 뜻이다(창 12:8). 이곳은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20 km 가량 떨어진, 현재의 베이틴(Beitin)이다. 본래 지명은 루스(Luz)로서(창 28:19) 베냐민과 에브라임의 경계선상이면서 동시에 남북 왕국의 경계선상이기도 한 능선에 위치하였다. 이곳에는 좋은 샘이 많이 있어 일찍부터(B.C. 3500년경?) 성읍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오랜 예배 중심지이기도 하다(Jamieson).
단. ‘단’은 ‘심판하신다’는 뜻이다. 팔레스타인 최북단의 도시로서 두로와 다메섹을 잇는 무역로를 굽어 보며 서 있다. 이러한 단이 벧엘과 더불어 제2의 성소로 선정된 이유는 북 왕국에서도 북쪽에 거주하는 백성의 편의를 위한 것이었다(Hammond). 그런데 바알 숭배의 본산지인 두로와 잦은 교류를 하는 단에 세워진 금송아지 형상은 아무래도 위험했다(White).
벧엘. ‘벧엘’은 ‘하나님의 집’이란 뜻이다(창 12:8). 이곳은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20 km 가량 떨어진, 현재의 베이틴(Beitin)이다. 본래 지명은 루스(Luz)로서(창 28:19) 베냐민과 에브라임의 경계선상이면서 동시에 남북 왕국의 경계선상이기도 한 능선에 위치하였다. 이곳에는 좋은 샘이 많이 있어 일찍부터(B.C. 3500년경?) 성읍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오랜 예배 중심지이기도 하다(Jamieson).
단. ‘단’은 ‘심판하신다’는 뜻이다. 팔레스타인 최북단의 도시로서 두로와 다메섹을 잇는 무역로를 굽어 보며 서 있다. 이러한 단이 벧엘과 더불어 제2의 성소로 선정된 이유는 북 왕국에서도 북쪽에 거주하는 백성의 편의를 위한 것이었다(Hammond). 그런데 바알 숭배의 본산지인 두로와 잦은 교류를 하는 단에 세워진 금송아지 형상은 아무래도 위험했다(White).
12:30 이 일이 죄가 되었으니. ‘이 일’이 가리키는 것은 여로로암이 금송아지 형상을 벧엘과 단에 둔 일이다(29절). 그런데 이 일이 죄로 판단되는 까닭은 다음과 같은 이유때문이다. (1) 이는 십계명을 어긴 행위이기 때문이다(출 20:4). (2) 이는 하나님이 선택하신 성소(예루살렘)를 무시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신 12:5). (3) 그 결과 이스라엘에 우상 숭배가 만연하게 되었기 때문이다(Pulpit Commentary).
이는 백성들이 … 경배함이더라. 본 절의 해석에 대하여선 학자들마다 의견이 분분하다. 그러나 크게 다음과 같이 세 가지 입장으로 정리될 수 있다. (1) “백성들이 ‘하나같이’ 숭배했다”로 보는 입장(Ewald). (2) “백성들이 ‘한 무리는 벧엘로 한 무리는 단으로’ 숭배하러 갔다”로 보는 입장(Rawlinson 등). 한편 이와 유사한 설명으로 “백성들이 두 곳으로 갔는데, 그 먼 단에까지 숭배하러 갔다”는 해석도 있다(Bähr). (3) 초기에는 백성들이 단으로만 숭배하러 갔다고 보는 입장(Hammond). 이상의 세 견해 중 비교적 타당한 것은 두 번째 견해인데 이와 관련하여 카일(Keil)은 “단에까지 이르는 모든 백성이 숭배하였다”는 신축성 있는 해석을 제시하고 있다.
이는 백성들이 … 경배함이더라. 본 절의 해석에 대하여선 학자들마다 의견이 분분하다. 그러나 크게 다음과 같이 세 가지 입장으로 정리될 수 있다. (1) “백성들이 ‘하나같이’ 숭배했다”로 보는 입장(Ewald). (2) “백성들이 ‘한 무리는 벧엘로 한 무리는 단으로’ 숭배하러 갔다”로 보는 입장(Rawlinson 등). 한편 이와 유사한 설명으로 “백성들이 두 곳으로 갔는데, 그 먼 단에까지 숭배하러 갔다”는 해석도 있다(Bähr). (3) 초기에는 백성들이 단으로만 숭배하러 갔다고 보는 입장(Hammond). 이상의 세 견해 중 비교적 타당한 것은 두 번째 견해인데 이와 관련하여 카일(Keil)은 “단에까지 이르는 모든 백성이 숭배하였다”는 신축성 있는 해석을 제시하고 있다.
12:31 산당들을 짓고. 예루살렘 성전이 갖는 신앙의 구심점 역할을 훼방하기 위해 여로보암이 취한 조치 중 하나이다. 즉 과거 예루살렘 성전이 건축되기 전까지는 백성들이 주로 산당에서 예배하였는데(3:2, 삼상 9:12) 이제 여로보암은 다시 백성들로 하여금 그같은 산당에서 예배하도록 획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산당들은 성전과 달리 언약의 법궤도 임재의 보증도 없는 곳이다(Keil). 이러한 산당에는 가나안 종교의 우상 숭배 의식과 결합할 가능성 및 유혹이 늘 있어 왔다. 이에 관해서는 삼상 9:12 주석을 참조하라.
보통 백성. 우리말에서 ‘보통’이 갖는 순한 어감(語感)과 달리 원문의 ‘미크초트’는 ‘황폐하다’는 뜻으로 좀 냉소적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보통’이란 말은 ‘아무나 마구 되는 대로’ 정도의 비웃음 띤 표현이다. 한편 모세의 율법에는 레위인들만이 제사장직을 수행하도록 규정되어 있다(출 28:1-4). 그런데도 여로보암이 레위 사람들 대신 ‘보통 백성’으로 제사장을 삼은 결과 레위인들은 신앙의 순결을 지키기 위하여 대거 남 왕국으로 남하하고 말았다(대하 11:13-17). 이러한 사실이 암시하는 바는 이스라엘 전역에 퍼져 율법과 하나님 섬기는 법을 가르치는 레위인들의 고유 사명이 여로보암에 의해 훼손된 점이다(Hanke). 민 35:1-8 주석 참조. 따라서 이는 여로보암의 불법성을 두드러지게 나타내 준다.
보통 백성. 우리말에서 ‘보통’이 갖는 순한 어감(語感)과 달리 원문의 ‘미크초트’는 ‘황폐하다’는 뜻으로 좀 냉소적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보통’이란 말은 ‘아무나 마구 되는 대로’ 정도의 비웃음 띤 표현이다. 한편 모세의 율법에는 레위인들만이 제사장직을 수행하도록 규정되어 있다(출 28:1-4). 그런데도 여로보암이 레위 사람들 대신 ‘보통 백성’으로 제사장을 삼은 결과 레위인들은 신앙의 순결을 지키기 위하여 대거 남 왕국으로 남하하고 말았다(대하 11:13-17). 이러한 사실이 암시하는 바는 이스라엘 전역에 퍼져 율법과 하나님 섬기는 법을 가르치는 레위인들의 고유 사명이 여로보암에 의해 훼손된 점이다(Hanke). 민 35:1-8 주석 참조. 따라서 이는 여로보암의 불법성을 두드러지게 나타내 준다.
12:32 여덟째 달 곧 그 달 열다섯째 날로 절기를 정하여. 솔로몬 성전의 절기는 7월 15일(유대력)이었다(8:2). 이 절기는 장막절(the Feast of Tabernacles)로서 한 해의 추수를 기념하는 축제의 절기이다(8:2, 65, 9:25). 그런데 여로보암이 이 절기의 날짜를 8월 15일로 잡은 것은 자의(恣意)대로 한 것이 아니고 북쪽 전통의 복원(復元)이다. 즉 북쪽은 원래 남쪽에 비해 수확이 한달 가량 늦었다(Bähr, Keil). 그러나 여로보암의 진정한 목적은 절기의 자연성을 회복하려는 게 아니다. 다만 이는 백성들이 7월의 장막절에 예루살렘을 방문치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즉 여로보암은 이로써 체제 경쟁에 있어 나름의 종교적 정통성을 구색(具色) 갖추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절기를 7월로 통일되게 지키도록 한 율법과 상반되는 것이다(레 23:34). 따라서 이 역시 죄악된 행동이 아닐 수 없다. 한편 이와같은 절기의 분열은 곧 통일 왕국의 정치적 분열에 이어 종교적 분열도 완성되었음을 보여준다.
그와 같이 행하여. 이는 곧 남 왕국 유다에서 행하는 것과 비슷하게 제사 의식을 흉내냈음을 말한다. 즉 절기 때의 제의(祭儀)는 단지 한 장소(벧엘)에서, 왕이 친히 집전(執典)한 것이다(Hammond, 8:62-66, 9:25).
그와 같이 행하여. 이는 곧 남 왕국 유다에서 행하는 것과 비슷하게 제사 의식을 흉내냈음을 말한다. 즉 절기 때의 제의(祭儀)는 단지 한 장소(벧엘)에서, 왕이 친히 집전(執典)한 것이다(Hammond, 8:62-66, 9:25).
12:33 자기 마음대로 정한. 원문은 “그의 마음(히, 레브)에서 궁리해 낸(히, 바다)”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바다’는 나쁜 의미에서 무엇을 궁리한다는 부정적 어감이 들어있는 단어이다.
분향하였더라. 원래 ‘분향하다’에 해당하는 원어 ‘카타르’는 분향 뿐 아니라 모든 번제를 지칭할 수 있는 전문적 용어이다. 그러나 그 문맥상 부정적인 이교 제사와 연결되는 경우에는 대개 ‘분향하다’로 번역되고 있다(대하 25:14, 28:4, 렘 1:16, 18:15, 44:17, 호 2:13 등). 그 대신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주로 ‘불사르다’로 번역된다(출 29:18, 레 1:15, 3:16, 4:19 등). 그런데 본 절에서 여로보암의 제사는 그 부정적 의미가 채택되어 ‘분향하다’로 번역되었다. 여로보암에 대한 열왕기의 부정적 시각에 비추어 볼 때 이는 적절한 표현이 아닐 수 없다(15:30, 34, 16:2 등).
분향하였더라. 원래 ‘분향하다’에 해당하는 원어 ‘카타르’는 분향 뿐 아니라 모든 번제를 지칭할 수 있는 전문적 용어이다. 그러나 그 문맥상 부정적인 이교 제사와 연결되는 경우에는 대개 ‘분향하다’로 번역되고 있다(대하 25:14, 28:4, 렘 1:16, 18:15, 44:17, 호 2:13 등). 그 대신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주로 ‘불사르다’로 번역된다(출 29:18, 레 1:15, 3:16, 4:19 등). 그런데 본 절에서 여로보암의 제사는 그 부정적 의미가 채택되어 ‘분향하다’로 번역되었다. 여로보암에 대한 열왕기의 부정적 시각에 비추어 볼 때 이는 적절한 표현이 아닐 수 없다(15:30, 34, 16:2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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