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 주석, 열왕기상 08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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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이에. 본 절 초두에 나오는 ‘이에’(히, 아즈)란 말은 솔로몬이 장로와 족장들을 소집하는 행동이 7:51에서 솔로몬 왕이 여호와의 성전을 위하여 만든 모든 것을 마친 후에 이어지는 행동임을 시사해 준다. 그런데 문제는 2절에서 보듯, 장로와 족장들이 솔로몬 왕에 의해 소집된 시점이 유대 종교력 ‘칠월’이라는데서 발생한다. 왜냐하면 6:38은 성전 건축을 마친 시점이 솔로몬 즉위 11년 ‘불월’ 곧 ‘팔월’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팔월’에 끝난 일 다음에 ‘이에’로 이어지는 사건이 ‘칠월’일 수 있는가? 이 문제, 즉 성전 봉헌식이 이루어진 시기 문제에 대하여 크게 다음 세 가지 견해가 있다. 즉 (1) 성전이 완공된 해(솔로몬 즉위 11년)의 7월이라는 견해(Ewald, Hammond). 이는 8월에 가서야 비로소 성전이 완공되었으나(6:38). 거국적인 대절기인 초막절에 맞추기 위해 한 달 앞당겨 봉헌식을 거행했다는 견해이다. (2) 성전 완공 다음 해의 7월이라는 견해(Bähr, Patterson). 성전은 솔로몬 즉위 11년, 즉 B.C. 959년 8월에 완공되었으나 성전 기구를 만드는 데 근 1년 정도 걸렸을 것이므로(7:13-50), 봉헌식은 건축 후 11개월만에 비로소 거행될 수 있었다는 견해이다. (3) 솔로몬의 궁전 완공(7:1-12) 이후라는 견해(Keil, Thenius). 이들은 9:1-10에 근거하여 성전 봉헌식은 성전 완공 13년 후인 궁전 완공 이후에 거행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전 완공 후 봉헌식까지 13년이나 기다렸다는 이 세 번째의 견해는 무리이다.
여기서 우리는 기본적으로 첫 번째 견해의 입장에서 다음 몇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1) ‘아즈’는 상당히 폭넓은 말이므로 성전 완성 한 달 전을 가리키는 것도 가능하다. (2) 6:38의 ‘팔월’은 본 장의 봉헌식까지 다 끝난 시점일 수 있다. (3) 모든 마루리가 팔월에 끝났더라도 성전의 봉헌식은 전통적인 절기, 즉 칠월의 장막절에 맞추는 것이 의의가 깊으므로 앞당겨 했을 가능성이 있다. (4) 오랜 숙원 사업이자 거국적 최대 관심사인 성전 봉헌식을 해를 달리할 정도로 미루었을 까닭이 없다(Pulpit Commentary).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태여 성전 기구 제작(7:13-50) 기간을 고려한다면, 그래서 완전한 끝마무리 이후에 성전의 봉헌식을 치루었을 것이라고 본다면, 두 번째의 견해도 일리가 있다(Expositor’s Bible Commentary).

여호와의 언약궤를 다윗 성 곧 시온에서 메어 올리고자 하여. 여기서 ‘시온’(Zion)은 예루살렘 남동쪽에 자리잡고 있는 구릉 이름인데, 이곳에 세워진 산성을 다윗이 여부스 족속으로부터 빼앗아 ‘다윗 성’(the City of David)이라 명명하였다(삼하 5:7). 그리고 다윗은 이곳 다윗 성에다 장막을 설치하고 여호와의 언약궤(법궤)를 임시로 안치하여 놓았었다(삼하 6:1-19).

이스라엘 장로와 … 족장들을 예루살렘에 있는 자기에게로 소집하니. 광야를 유랑하던 시절의 모세 성막에서 이제 영구적 건물인 솔로몬 성전으로 법궤의 자리를 옮기는 봉헌식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뜻깊은 역사적 순간이었다. 따라서 이스라엘 민족의 모든 지도자들과 백성의 대표자들이 모두 소집된 자리에서 성전 봉헌식은 공개적으로 성대히 거행되어야 했다. 그런데 여기서 ‘장로와 족장들’은 중앙 집권적 정부가 임명하는 관료와는 구별되는 사람들이다. 즉 그들은 인격이나 지혜, 무용 등의 탁월함으로 인해 혈연 및 지파 공동체 내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는, 이른바 자연 발생적인 공동체내의 유지나 지도자들이다(Davies). 그런고로 이들은 성전 건축에 관해 의논할 당시에도 다윗에 의해 소집된 바 있으며(대상 28:1-3), 건축 재료를 위해 자신들의 보물들을 기꺼이 바치기도 하였다(대상 29:6-9). 이렇듯 성전은 범민족적 사역에 의해 건축되었으므로,그 봉헌식에 있어서 국민의 대표자인 이들을 소집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다윗 역시 궤를 옮겨오던 당시 “이스라엘에서 뽑은 무리 삼만 ”을 소집하였었다(삼하 6:1).

 

8:2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다 … 모이고. ‘이스라엘’은 열두 지파로 구성된 민족 전체 구성원들을 호칭하는 말이다. 여기서는 소집된 사람들, 즉 열두 지파의 대표자들(장로와 족장들)이 모인 것을 전 백성이 모인 것과 다름없는 것으로 본 것이다(Keil). 가장(家長)이 곧 가족 전체를 대표하던 고대의 사고 방식을 기억하면 쉽게 이해할 수있다.

에다님월 곧 일곱째 달. ‘에다님’은 ‘시내에 물이 흐른다’는 뜻이다(Gesenius). 유대 종교력으로 7월(오늘날 태양력의 9-10월에 해당)에는 특별히 건기가 끝나고 비가 내리기 시작하였다고 한다(Robinson). 곧 이른 비가 내리는 때로서, 이때 시내가 흘러내리기 때문에 명명된 월명(月名)인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특별히 ‘일곱째 달’이란 설명 어구가 첨가된 것은 이 달의 이름이 바벨론 포로 이후에는 ‘티스리’로 바뀌었기 때문이다(Keil).

절기에. 원래 ‘절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그’에 관사를 붙여 ‘헤하그’가 되면 그 자체로 ‘초막절’(장막절)을 의미하는 이름이 된다(대하 7:8, 느 8:14, 사 30:29, 겔 45:23, 25). ‘초막절’은 유대 종교력 칠월 15일부터 시작하여 칠 일간 거행되는 절기로, 연중 절기 중 가장 크고 즐거울 뿐만 아니라 제일 마지막으로 거행되는 수확의 절기였다. 그리고 본래 이 절기는 광야의 유랑 생활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다(출 23:16, 34:22, 레 23:33-36, 민 29:12-32, 신 16:13-16). 그런데 이 초막절에는 계약 율법이 낭독되는 순서가 있었는데, 이로 미루어 ‘초막절’은 계약 갱신의 목적을 지닌 것이기도 하였다(Rylaarsdam). 따라서 바로 그러한 절기에 율법의 돌판이 담긴 법궤를 성전에 안치하는 것은 매우 의미 깊은 일이었다. 아울러 초막적(장막절, 수장절) 행사는 광야 생활 동안 지켜 보호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념하면서, 동시에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사 풍성한 수확을 거두게 해주신 하나님의 은총을 감사하는 절기였다. 이런 의미에서 초막절을 맞이하여 광야 생활 이후 유리 방황하던 언약궤를 영구한 안식의 장소인 솔로몬 성전에 안치시키는 일은 매우 뜻깊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8:3 제사장들이 궤를 메니라. 민수기의 규례에 따르면, 법궤는 레위인들이 메어야 했다. 그러나 손을 대어 만질 수는 없었다(민 4:15). 그런데도 다윗은 블레셋인들에게 빼앗겼던 법궤를 회수할 때 그것을 수레에 싣게 하였고, 게다가 웃사는 손을 대기까지 함으로써 하나님의 징계를 받은 적이 있었다(삼하 6:3-7). 이제 솔로몬은 규정대로 궤를 운반하였다. 한편, 병행 구절인 대하 5:4에서는 ‘레위 사람이 궤를 메니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는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궤를 멘 자들은 ‘레위족 제사장들’이었기 때문이다(대하 5:7). 원래 언약궤의 운반은 레위인 가운데서도 고핫 자손에게 맡겨졌으며(민 3:30, 31), 언약궤(법궤)에 덮개를 씌우거나 벗기는 일 등 언약궤를 실제로 돌보고 감독하는 일은 언제나 고핫 자손 중에서도 제사장 계통인 아론의 자손들에게 속한 일이었다(민 4:5-15). 그런데 여기서 솔로몬이 언약궤의 운반을 고핫 자손에게 맡기지 않고 상위 직위인 제사장들에게 직접 맡긴 것은, 성전 봉헌식을 더욱 경건하고 비중있게 거행하려는 의도에서였던 것 같다(수 3:6, 15, 17, 대상 15:11, 12). 그리고 이처럼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직접 멘 실례는 매우 의미 깊은 역사적 사건, 예를 들면 요단 강 도하시(수 3:6, 17), 여리고 성 포위시(수 6:6) 등에 이미 시행된 적이 있다.

 

8:4 여호와의 궤. ‘법궤’(레 16:2), ‘언약궤’(민 10:33), ‘증거궤’(출 26:33) 등으로 불리우는 이 궤는 다윗 성, 곧 시온 산 위 ‘다윗이 친 장막 가운데’ 근 40여년간 머물러 있었다(삼하 6:17).

회막. 보통 ‘장막’ 또는 ‘성막’으로 불리던 ‘회막’은 실로와 놉을 거쳐 당시에는 기브온에 있었다(대하 1:3). 따라서 ‘언약궤’는 다윗 성으로부터, ‘회막’은 기브온 산당에서부터 각각 솔로몬 성전으로 운반되었다.

성막 안의 모든 거룩한 기구들. 이 모세 성막의 옛 기구들은 이제 그것들(놋제단, 향단, 떡상, 촛대 등)을 대신할 솔로몬 성전의 새 기구들이 제작되었으므로(7:23-50), 더 이상 사용되지 않고 옮겨져 성전 창고에 보관되었을 것이다(7:51).

제사장과 레위 사람이 그것들을 메고 올라가매. 제사장들은 특별히 언약궤를 메고, 레위인들은 성막과 여타 성막의 모든 기구들을 광야 여정에서처럼 그 옮기는 방식과 절차를 따라 예루살렘의 솔로몬 성전으로 옮겼을 것이다(Keil, 민 4:1-33).

 

8:5 궤 앞에 있어 양과 소로 제사를 지냈으니. 아마도 법궤는 지성소에 안치되기 전 제단이 있는 안뜰에 우선 놓여졌던 것 같다. 그리고 왕과 백성들은 이때 법궤 앞에서 감사와 기쁨의 제사를 성대히 베풀었던 것 같다(Keil). 따라서 이때의 희생제사는 단순히 정결만을 위한 예식이라기보다 잔치와도 같은 기쁨과 감사의 행사였다(3:15). 즉 성전의 낙성식으로 갖는 축하의 순간이었다(Gates).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는 법궤가 지성소에 안치되기까지 백성들이 노래하며 춤추었다고 한다. 한편, 그런데 이때의 희생제사는 감사와 축하의 의도 외에도 법궤와 관련된 이전의 불상사들(삼상 4:17, 18, 6:19, 삼하 6:7)과 같은 화를 피하기 위한 의도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Hammond).

 

8:6 여호와의 언약궤를 자기의 처소로. 성전의 핵심인 그 처소가 바로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이다. 그런데 원래 하나님의 임재를 실제로 나타내 주던 것은 법궤였다. 따라서 법궤 자체가 하나님 자신과 동일시 되기도 하였다(민 10:35, 36). 그러므로 법궤가 성전의 자기 ‘처소’(히, 마콤) 즉 제 위치에 안치됨으로써, 성전을 성전답게 하는 가장 요긴한 부분의 일이 마무리되었다. 아무튼 모세 성막의 다른 모든 기물들은 솔로몬 성전의 규모에 맞추어 모두 새롭게 제작되었지만, 하나님의 임재와 통치를 상징하는 이 언약궤(법궤)만은 시내 산에서 만들어진(출 25:10-22, 37:1-5) 바로 그것을 그대로 옮겨와 솔로몬 성전의 지성소에 안치시켰던 것이다.

내소. 본 절에서 ‘내소’로 번역된 히브리어 ‘데비르’는 6:16, 17에서 ‘내소’로 번역된 바로 그 단어이다.

지성소 그룹들의 날개 아래라. 언약궤(법궤)는 금으로 만들어진 그룹들의 펼쳐진 날개 아래 안치되었다. 6:23-28 주석 참조.

 

8:7 날개를 펴서 궤와 그 채를 덮었는데. 법궤와 채(pole, 출 25:13), 곧 법궤에 속한 부분은 모두 그룹의 날개 아래 그늘에 있어 설혹 지성소 문을 열었을 때라도 항상 어두운 상태로 있게 하였다(12절).

 

8:8 채가 길므로 채 끝이 … 밖에서는 보이지 아니하며. 본 절이 설명하는 상태를 정확히 이해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본 절을 기록한 목적이 전래의 성막 규정을 솔론몬 성전 역시 그대로 따르고 있음을 보여 주기 위함인 듯하다(Keil). 그런데 출 25:15의 규정에 의하면, 채를 법궤의 고리에 꿴 채로 두어야 했다. 어쨌든 본 절의 상태를 여러 가지로 추측 설명하려는 시도들이 있었은데, 다음과 같은 주장이 비교적 타당해 보인다. (1) 동서로 길게 위치한 성전에 대해 법궤는 남북으로 길게 위치하였을 것이다(Bähr, Patterson). 왜냐하면 성전 전면을 바라보고 서 있는 그룹의 날개 그늘에 법궤와 채가 온전히 덮일 수 있는 적절한 위치가 남북이기 때문이다. (2) 본 절의 기록상 관찰자의 위치는 성소의 우편, 즉 지성소 휘장의 왼쪽을 젖혀 볼 수 있는 자리였을 것이다(Hammond, Montgomery). (3) 그리고 이 관찰자는 아마도 지성소에 들어가는 대제사장을 돕는 제사장 중 하나였을 것이다(Hammond).

그 채는 … 그 곳에 있으며. 법궤 운반용 ‘채’(pole)는 법궤의 고리에 꿰어진 상태로 있었는데(출 25:13, 15),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과거 광야 생활 동안 나그네로 지냈음을 상기시켜 준다(Patterson).

오늘까지. 본서(열왕기서)는 바벨론 포로 이후에 기록되었다(서론, 기록 연대). 그러므로 본서가 기록될 당시에 솔로몬 성전은 파괴되었고(B.C. 586년), 따라서 법궤에 딸린 채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여기서 ‘오늘까지’란 말은 솔로몬 성전의 파괴 이전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러한 사실은 저자가 본서를 기록할 때 이전의 기록물을 그대로 사용했다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Keil, Hammond).

 

8:9 궤 안에는 두 돌판 외에 아무것도 없으니. 히브리서 9:4에 의하면, 언약궤 안에는 본래 ‘십계명 두 돌판’ 외에도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가 있었다. 그러나 솔로몬 성전 완공 후(B.C. 959년) 법궤를 지성소에 안치시킬 때 십계명 두 돌판 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것을 보면 나머지 것들은 모세 시대 이후 여호수아 시대와 사사 시대, 그리고 사울과 다윗 시대를 거치는 근 500여년 동안에 없어진 듯하다. 아마도 엘리 제사장 시절 법궤가 블레셋에게 일시 탈취당했을 때(삼상 4:3-11) 유실된 듯하다(Hammond). 그러나 혹자들은 본래 언약궤 안에는 십계명 두 돌판만 들어있었을 뿐(출 25:16, 40:20, 신 10:5), 만나 항아리와 싹난 지팡이는 ‘여호와 앞에’(출 26:33) 곧 ‘증거궤 앞에’(민 17:10) 두었었다고 본다(Keil, Bähr). 그리고 히브리서 9:4의 말은 후대 유대 전승에 기인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견해 역시 완전히 배격할 수는 없다.

호렙. 시내 산의 여러 봉우리 중 하나로 추정되는 ‘호렙 산’(Mt. Hored)은 율법이 주어지고 하나님과의 언약이 맺어진 곳으로(신 4:10-13), 통칭 ‘시내 산’과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 출 3:1 주석 참조.

 

8:10 구름이 여호와의 성전에 가득하매. 혹자는 여기서 ‘구름’을 번제단 위에서 타오른 희생제물의 연기 구름일 것이라고 보았으나(Bertheau), 여기서 ‘구름’은 하나님의 임재를 가시적으로 드러내주는 영광스러운 ‘그 구름’(the cloud)이었다. 한편, ‘구름’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아난’에는 ‘흐림, 안개’란 뜻도 있다. 그러나 한글 성경에는 언제나 구름으로 번역되어 있다. 그리고 성경에서 사용된 구름은 항상 하나님의 나타나심과 연관되어 등장한다(시 18:11, 사 4:5, 단 7:13, 마 17:5, 계1:7). 예를 들면 시내 산과 그리고 출애굽의 여정에서 하나님께서 당신을 나타내실 때는 항상 구름이 그분을 둘러싸고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출 19:16, 24:15-18). 원래 구름은 신의 직접적인 광채를 대면할 때 파생되는 인간의 죽음을 방지하기 위한 신의 옷이라는 사상이 이러한 기록의 배후에 있다(Moor). 그러므로 구름은 곧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임재를 가시적으로 볼 수 있는 표식이 된다. 이러한 구름이 이전에 성막 봉헌시에도 나타났고(출 40:34, 35), 지금 성전 봉헌시에도 나타난 것이다. 따라서 이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이전의 모세 성막을 승인하셨던 하나님께서 이제 새로이 솔로몬 성전을 자신의 임재 처소로 승인하셨다는 것이다(Patterson, Hommond, Keil).

 

8:11 제사장이 그 구름으로 말미암아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으니. 이 장면 역시 구름 때문에 회막에 들어갈 수 없었던 모세와 비교된다(출 40:35). 즉 그 때의 일이 지금에도 되풀이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결국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전의 모세 성막과 마찬가지로 솔로몬 성전 역시 자신의 영광의 거처로 인정하셨다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

이는 여호와의 영광이 여호와의 성전에 가득함이었더라. ‘여호와의 영광’이 ‘구름’과 동일한 것인가 아니면 구별되는 다른 것인가로 학자들 사이에 논란이 있다. 혹자는 다른 특별한 언급이 없고, 12절은 단지 캄캄한 곳에 계신 하나님을 말하므로 본 절은 그저 캄캄한 구름을 지칭한다고 본다(Bähr). 그러나 더 많은 이들은 여기서 ‘영광’은 ‘구름’과는 구별되는 것으로 보고, 어떤 ‘밝은 빛’, ‘맹렬한 불’ 같은 것으로 설명한다(Hammond, Keil). 여기서 우리는 그 구체적 형태는 결정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영광’은 ‘구름’과는 구별되는 것으로 밝힐 수 있다. ‘구름’과 ‘영광’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본래 하나님의 영광은 너무 강렬해서 인간이 직접 대면할 수 없는 것이다(출 33:20). 바로 그렇기 때문에 구름은, 인간에게 자신을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외피(外皮) 구실을 하는 것이다(10절).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구름이 곧 영광 자체일 수 없음도 분명해진다. 그러므로 본 절이 전해 주는 ‘짙은 구름’은 그만큼 강렬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영광’ 자체와는 구별되는 것임도 알게 해 준다. 한편, 이처럼 구약 시대에는 ‘빽빽한 구름’으로 당신의 임재의 가시적 표식을 삼으신 하나님께서는, 신약 시대에는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로써 당신의 임재를 알리사 교회의 시작을 기념하셨다(행 2:2).

 

8:12 여호와께서 캄캄한 데 계시겠다 말씀하셨사오나. 언제 어디서 하나님이 그같은 말씀을 하셨는지 다른 본문에서 찾아 볼 수 없다. 그래서 혹자는 본 절을 “여호와께서 … 계시려고 의도하셨으나”라는 뜻으로 이해한다(Thenius). 본 절에서 ‘말씀하다’에 해당하는 ‘아마르’는 ‘의도하다’라는 뜻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마르’는 그 동사의 주어가 하나님이신 경우에는 대체로 계시, 즉 당신을 알게 하시는 행동을 의미한다. 따라서 본 절의 의미는 ‘하나님은 캄캄한 데 계신 분이심을 알게해 주셨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 보다 타당하다. 실제로 하나님께서 구름과 흑암 속 캄캄한 곳에 거하신다는 구절은 많이 찾아 볼 수 있다(출 19:9, 20:21, 레 16:2, 신 4:11, 5:22, 시 18:11, 97:2). 따라서 솔로몬은 이러한 상황을 기억하고 이처럼 말한 것 같다. 그런데 그 구절들에서 ‘흑암’ 또는 ‘캄캄함’이 의미하는 바는 인간의 접근 불가능함, 또는 생각 불가능함을 가리킨다. 따라서 본 절의 ‘캄캄한 데 계신 하나님’이란 표현은 결국 인간의 한계를 초월해 계시는 하나님의 지존(至尊)하심을 시인하는 표현이다.

 

8:13 내가 참으로 주를 위하여 계실 성전을 건축하였사오니. 본 절은 외견상 12절의 내용과 상충(相衝)되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12절은 제한 받을 수 없는 하나님의 초월성과 지존하심을 고백한 구절인 반면, 본 절은 바로 그 하나님을 성전이라는 한 장소에 제한시킬 수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 절은 솔로몬이 성전에 구름이 가득함을 보고 하나님의 임재가 허락되었음을 확신하고 하는 말이다(Keil). 결국 성막에서든 성전에서든 그 곳을 자신의 처소로 삼으시는 분은 하나님 자신이지, 인간의 자의적 결정이 하나님의 처소를 고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본 절의 표현 속에는 그렇게 지존하신 하나님을 감히 모시고자 하는 솔로몬의 겸비함이 들어 있다고 볼 수 있다(27절). 그러므로 12절과 13절은 인간의 한계를 초월해 계시는 ‘지존하신 하나님’을 강조하고 있음과 아울러, 그렇게 고귀하신 하나님을 감히 성전에 모시고자 함에서 비롯된 솔로몬의 겸비한 심령이 표현되어 있다.

주께서 영원히 계실 처소. 이렇게 표현할 수 있는 근거로 다음 두 가지가 제시된다. (1) 광야를 유랑하던 시절의 성막이 갖는 이동성과 임시성에 대해 정착과 안정이 있는 성전의 영구성. (2) 다윗과 그의 후손에게 영구한 왕위를 세워 주시겠다는 삼하 7:14-16의 약속.

 

8:14 얼굴을 돌이켜. 그 때까지 솔로몬은 성전에 구름이 나타나는 장면을 응시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Hammond). 이것은 13절의 솔로몬의 말이, 성전에 가득한 구름이 임함을 보고 하나님의 임재를 확신하여 발언한 내용이라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뒷받침해 준다.

온 회중을 위하여 축복하니. 축복은 제사장만의 고유 권한이라는 데 근거해서(민 6:22-27), 혹자는 본 절의 솔로몬의 축복을 “권한은 없지만 그저 축하로서 했을 뿐”이라고 해석했고(Hammond), 혹자는 “제사장의 축도를 대신 수행한 것”이라고 각기 해석했다(Stanley). 그러나 (1) ‘축복하다’에 해당되는 ‘바라크’의 용법은 실로 다양한데, 때로는 백성이 왕을 축복하는 경우에도 사용되었고(66절), (2) 축도가 아닌 광범위한 의미의 ‘축복’은 제사장에게만 국한된 것이 결코 아니었다(창 14:19, 신 7:12-16). 결국 문맥으로 보아 본 절의 축복은 하나님의 축복을 확신한 공동체의 우두머리가 백성들에게 선포하는 경축사와도 같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8:15 여호와께서 그의 입으로 내 아버지 다윗에게 말씀하신 것. 선지자 나단을 통해 다윗에게 주어졌던 하나님의 약속으로서, ‘왕위’와 ‘성전 건축’ 등에 대한 ‘다윗 계약’을 가리킨다(삼하 7:2-17, 대상 22:6-12, 28:1-10).

그의 손으로. 성경에서 ‘손’(히, 야드)이란 말의 사용 용법이 여러 가지이므로, 그 의미 또한 다양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손’과 같은 형태로 사용되게 되면 보통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 또는 능력을 의미하게 된다. 좀 더 살펴보면 ‘손’은 (1) 어떤 사람이나 사물에 대한 책임 및 권한을 나타내며, (2) 어떤 일을 수행할 수 있는 실질적 능력 등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비와 긍휼로 말씀하실 뿐만 아니라, 말씀하신 바를 이루실 능력도 가지고 계신 분이심을 솔로몬은 고백하는 것이다.

이루셨도다.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말씀하신 대로 (1) 아들 솔로몬을 세워 다윗의 위(位)에 앉도록 하사 나라를 견고케 하셨다(삼하 7:12). (2) 또한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신 대로 솔로몬으로 하여금 여호와의 집, 곧 성전을 건축케 하셨다(삼하 7:13).

 

8:16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날. 이 날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은총과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오랜 노예 생활에서 해방된 날로서, 선민 이스라엘이 신정 국가로서 첫 발을 내디딘 날이다. 따라서 이스라엘 역사의 주요 국면, 주요 사건 등에서 이 출애굽 사건은 끊임없이 상기되고 회고된다.

내 이름을 둘 만한 집. 구약 사상에서 ‘이름’(히, 쉠)은 단순한 호칭이나 명찰 같은 것이 결코 아니다. 이름은 그 이름의 소유자가 갖고 있는 총체적이고도 본질적인 성품을 나타낸다(창 27:36, 32:28, 삼상 25:25 등). 즉 이름은 바로 그 이름을 가진 존재 그 자체이다. “이름이 있는 곳에 그 이름의 주인공이 있다”(Schmidt). 그러므로 성전에 하나님의 이름을 둔다는 것은 곧 하나님 자신의 임재를 의미한다. 즉 하나님께서 당신의 존재를 그 곳에 계시하시고, 또한 당신의 권위와 영광을 그 곳에 두시겠다는 의미이다(신 12:5). 그러므로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에 관심을 갖고 거룩히 지키시기를 게을리 하지 않으신다(겔 20:9, 39:7). 결국 이름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30절)이 땅의 백성들 사이에 있을 수 있도록 하는 통로요 매개체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이름을 둔 집, 성전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 사이에 임재하신 처소로서 하나님께 ‘허락받은’ 곳이 된다.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름을 두는’ 주체는 인간이 아니고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성전이든 성물이든 그 자체가 하나님을 속박해 둘 수 없음을 의미한다. 실제로 후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 신앙에서 돌아섰을 때 성전은 무의미한 건물로 전락되었고 결국 파괴되고 말았다(사 1:10-17).

아무 성읍도 택하지 아니하고. 본 절과 병행 구절인 대하 6:5, 6을 참고하면, 이 말은 ‘다른 지파의 어느 성읍도 뽑히지 않고 오직 유다 지파의 예루살렘이 뽑혔다’는 의미를 보충해야 뜻이 분명해진다.

다만 다윗을 택하여. 본 절은 수많은 나라들 중 유독 이스라엘을 택하사 제사장 나라로 삼으시고(출 19:6), 또한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들 중 유독 다윗을 택하사 왕으로 세우신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상기시키고 있다(시 78:70). 한편 본 절을 통해 솔로몬은 (1) 자신을 비롯한 모든 백성들이 자고함에 빠지지 않도록 경계하였으며 (2) 하나님의 크신 위엄과 주권 앞에 전적으로 순종할 것을 다짐하였고 (3) 하나님의 은총을 찬양하고자 하였다.

 

8:17 마음이 있었더니. ‘마음’으로 번역되는 히브리어 ‘레브’ 또는 ‘레바브’는 ‘심장’(heart)이란 뜻을 갖고 있다(렘 11:20, 17:10). 따라서 본 절의 ‘마음’은 단지 의도, 사고, 기억 같은 개별적인 심리 기능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심장을 비롯하여 감정, 의지 등을 통틀어 열렬히 희망함을 의미한다. 한편, 삼하 7:2, 대상 17:1 등을 보면, 다윗은 성전을 건축 하고픈 마음을 강렬히 시사했었다.

 

8:18 이 마음이 네게 있는 것이 좋도다. 다윗이 품은 성전 건축의 마음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일단 그 자체는 기쁘게 생각하심을 표현한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본 절을 “네게 있는 것은 좋도다”로 이해하면 문맥상의 뉘앙스가 보다 잘 전달된다. 공동번역은 “ … 생각하는 것은 기특한 일이다”로 번역하고 있다.

 

8:19 그러나 너는 그 성전을 건축하지 못할 것이요. 다윗이 성전을 건축하지 못하는 이유를 우리는 다음의 두 본문에서 발견할 수 있다. (1) 삼하 7:5-7. 여기서 하나님은 백향목집(성전)을 별로 필요없는 것으로 말씀하신다. (2) 대상 22:8. 여기서 하나님은 다윗이 피를 많이 흘린 사람이라는 이유로 성전 건축을 허락하지 않으신다. 그런데 이 둘은 서로 무관한 이유들을 제시하는 것 같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공통점이 있다. 즉 (1)에서 하나님이 성전을 원치 않으신 이유는 이스라엘이 천막을 치고 옮겨 다녀야 하는 불안정한 처지에 있었기 때문이었고, (2)는 다윗이 수많은 전쟁을 통해 이스라엘의 안정을 위해 노력해야 했던 인물임을 말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다윗은 이전 시대와 마찬가지로 성전을 지으리만큼 안정된 시대에 속한 인물이 못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불안정의 이유’로 인해 평화 중에 건축되어야 할 성전은 차기 세대로 미루어져야만 했다. 그리고 바로 그런 까닭에 하나님은 다윗이 성전 짓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네 아들 그가 … 성전을 건축하리라. 여호와를 향한 다윗의 열심은 성전 건축을 위한 소원으로 불타올랐으며, 이를 구체화시키기 위해 다윗은 건축 자재를 마련하는 등 다각도의 노력을 기울였다(대상 22:2-16).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다윗의 마음을 기쁘게 받으셨을 뿐만 아니라 성전 양식까지 자세히 계시해 주셨다. 그렇지만 정작 성전 건축 사업만큼은 솔로몬에게 위임하셨다(대상 28:12-20). 여기서 하나님의 주권 개념이 여실히 드러났으며, 그러한 하나님의 뜻 앞에 흔쾌히 순복한 다윗의 신앙 자세 또한 후세의 귀감이 될 만한 것이었다.

 

8:20 이제 … 말씀하신 대로 이루시도다. 본 절에서 ‘이루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동사 ‘쿰’은 원래 ‘일어나다’ 또는 ‘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본 절은 ‘말씀하신 대로 세우셨다’로 번역할 수 있다(Hammond). 그런데 ‘쿰’이 하나님의 언약과 관련된 문맥에 사용될 때면 ‘확립하다’ 또는 ‘확정짓다’란 의미를 가지게 된다. 즉 체결된 언약을 확실하게 하는 순간을 표현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본 절은 솔로몬이, 이전에 부친 다윗과 하나님 사이에 맺은 언약(삼하 7:13)이 눈 앞에서 실현됨을 보고 하는 말이다.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이름’은 그것에 의해 호칭되는 사물이나 사람의 ‘존재’ 그 자체를 상징한다. 따라서 ‘여호와의 이름’은 곧 그분의 존재 자체를 의미한다(16절). 이런 점에서 성전은 하나님의 지상 임재의 상징적이고 가시적인 처소인 것이다.

 

8:21 조상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실 때에. 이처럼 ‘출애굽’ 사건과 ‘성전 건축’ 사건을 긴밀하게 연관시키고 있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즉 (1) 성전의 핵심, 즉 성전의 가치를 결정짓는 요체는 그 곳이 하나님의 임재가 약속된 장소라는 데 있다. (2) 그런데 이 임재를 보증 또는 표징하는 것은 바로 ‘언약궤’이다. (3) 그리고 이 언약궤가 있을 수 있었던 것은 출애굽 당시 시내 산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맺은 언약의 사실에 기인한다. (4) 고로 성전 건축의 의의 및 가치는 출애굽을 기점으로 해서만 설명될 수 있다(6:1).

세우신. 여기서 ‘세우다’는 히브리어 ‘쿰’이 아니라 ‘카라트’이다. 그런데 ‘카라트’는 언약과 관련된 문맥에서는 ‘쿰’과는 달리 ‘언약을 체결하다’ 또는 ‘언약을 개시(開始)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게 된다(20절, 5:12).

여호와의 언약을 넣은 궤. 즉 ‘법궤’ 또는 ‘증거궤’로도 불리는 ‘언약궤’를 가리키는데, 이 언약궤 속에는 여호와 언약의 핵심이자 요체인 ‘십계명’이 기록된 두 돌판이 들어 있었다(출 25:16, 40:20, 신 10:5). 그리고 이 언약궤는 성전의 가장 깊숙한 내소, 곧 ‘지성소’에 안치되어 있었다(6절).

 

8:22 회중과 마주서서. 여기서 솔로몬의 자세와 방향이 의문시 된다. 왜냐하면 (1) 본 장 54절과 대하 6:13은 솔로몬이 무릎을 끓고 기도하였다고 명백히 밝히고 있으며, (2) 성전을 향해 등을 돌리고 회중을 향하여 기도했다는 것은 있음직하지 못하다는 의심 때문이다. 이에 대해 (1) 솔로몬의 자세 문제는 그가 처음에는 일단 섰다가 곧 무릎을 끓었던 것으로 보이며(Montgomery), (2) 방향 문제는 본문을 그대로 취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말할 수 있다. 비록 수정하자는 주장이 있긴 해도(Hammond), 특별히 그래서는 안 된다는 규정을 발견할 수 없는 한 무리한 수정을 할 수는 없다. 오늘날 예배에서 기도자가 회중을 마주 보는 자세로 기도하는 일은 흔치 않은가! 한편 솔로몬이 봉헌 기도를 드리기 위해 서있는 자리는 번제단 앞 뜰 가운데 특별히 마련된, 길이와 너비 5규빗(약 2.3m) 높이 3규빗(약 1.4m) 되는 일종의 연단(演壇)이다(대하6:13).

하늘을 향하여 손을 펴고. 성경 용례상 ‘하늘 또는 하나님을 향하여 손을 편다’는 말 자체가 곧 ‘기도하는 것’을 의미하는 표현으로 종종 사용된다(Hammond, 출 9:29, 사 1:15). 그런데 히브리어 ‘파라스’, 즉 손을 펴거나 뻗치는 행위는 보통 ‘간청’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러한 동작을 하늘을 향하여 하게 되면 곧 하나님께 간구하는 의미의 자세가 되는 것이다. 아무튼 여기서 솔로몬은 이스라엘 백성의 대표자로서 공적 예배를 인도하는 목자 또는 중보자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고 이하 전개되는 솔로몬의 기도는 성경에서 가장 훌륭하고 위대한 공중 기도의 하나이다.

 

8:23 위로 하늘과 아래로 땅에 주와 같은 신이 없나이다. 이 말은 많은 신들 중에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제일(第一, the first)이라는 뜻이 아니라, 천지간에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만이 유일(唯一, the only)하신 신임을 의미하는 말이다(삼하 7:22, 22:32). 비록 타민족의 눈에 여호와는 이스라엘만의 국가신으로 비쳤지만(왕하 5:17), 이스라엘은 천지간에 여호와 하나님만이 오직 한 분이신 유일신으로 알고 믿었다(신 6:4). 한편 본 절과 비슷한 표현을 우리는 출 15:11, 신 4:39, 시 86:8 등에서 발견할 수 있다.

온 마음으로 … 행하는 종들에게 … 은혜를 베푸시나이다. 신 7:9과 동일한 의미를 함축한 구절로서, 이는 솔로몬 자신의 체험에서 우러나온 진솔한 신앙 고백인 동시에 오늘날 성도들에게 던지는 신앙적 메시지이기도 하다. 각박하기 이를 데 없는 생활 전선(戰線)에서 시달리는 자들에게 있어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기란 불가능해 보일 때가 많다. 그러나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에게는 당신의 베푸시는 은혜와 도우시는 권능이 반드시 함께 할 것이라고 약속되었다(시 27:9, 125:1). 또한 우리의 머리털까지 세시며 우리를 눈동자처럼 보호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시 17:8, 마 10:30, 히 13:8). 따라서 성도들은 목전의 환난에 좌우되지 아니하고 살든지 죽든지 하나님만 의지하고 그 뜻대로 살아감으로써, 성숙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영광스러운 면모를 드러낼 수 있어야 할 것이다(빌 1:20).

 

8:24 입으로 말씀하신 것을 손으로 이루심. 위로 하늘과 아래로 땅에서 유일하신 하나님 여호와는 천지 만물을 홀로 주관하시는 주권자이시므로, 그분의 입으로 약속하신 바는 무엇이든지 주권자의 크신 능력의 손으로 반드시 이행하실 수 있다. 15절 주석 참조.

오늘날과 같으니이다. 히브리어 ‘카욤 하제’(as it is today)는 3:6에서와 같이 눈 앞에 전개된 일들이 바로 하나님의 언약 성취임을 인식함과 동시에 하나님의 신실성에 대한 감사를 담고 있는 표현이다.

 

8:25 여호와여 주께서 … 다윗에게 말씀하시기를. 이 말씀의 핵심은 삼하 7:8-16의 메시지, 곧 위대한 다윗 언약 속에 나타나 있다. 그러나 보다 구체적으로는 솔로문에 대한 다윗의 마지막 유언(2:4) 속에 나타나 있다.

자기 길을 삼가서. ‘삼가다’(히, 샤마르)는 ‘지키다, 주의하다’는 뜻을 갖고 있다. 그런데 성경에서 이 말은 율법을 면밀히 주의하여 지키라는 의미로 자주 사용된다(출 20:6, 레 18:26, 신 26:16, 겔 11:20). 특히 우리말로 ‘삼가다’는 ‘조심하다’ 또는 ‘경계하다’라는 소극적인 뜻에 그치는데 반해, 히브리어의 ‘샤마르’는 보다 적극적인 뜻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즉 ‘샤마르’의 기본 개념은 ‘ … 에 대해 큰 관심을 기울이다’이다. 따라서 ‘샤마르’는 단순한 절제나 경계가 아닌 애정이 담긴 실천을 내포하고 있다. 즉 적극적인 관심을 갖고 면밀히 계획, 실천하는 행동적 의미가 짙은 말이다.

네가 내 앞에서 행한 것 같이. 다윗은 향후 이스라엘 열왕들의 행적을 판단하는 표준과 척도로서 제시된다(9:4, 15:11 등). 그런데 다윗이 그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인물이 될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그가 ‘하나님 앞에서 행하였다’는 말에 요약되어 있다.

내 앞에서 행하기만 하면. 조건절로 되어 있음에 주의하라.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는 곧 인격적 관계임을 강조해 준다. 사실 성전이든 언약궤든, 혹은 성례전이든 그 안에서 인간과 만나시는 분은 산 인격체이신 하나님이다. 언약에서도 마찬가지로 언약을 매개로 인간과 대면하시고 만나시는 하나님은 그 언약의 주인으로서이며 결코 언약에 속박된 상태가 아니다. 그러므로 솔로몬 및 다윗 왕조에 주어진 언약도 인격적 관계가 그러하듯 계약 당사자의 성실이 바탕이 되어야만 했다.

이제 … 그 하신 말씀을 지키시옵소서. 다윗에게 약속하신 바대로 솔로몬이 다윗의 왕위를 물려받았고, 또한 위대한 성전 건축 사업도 완료되었다(삼하 7:12, 13). 이제 남은 것은 다윗 가계를 통해 영원토록 왕위에 오를 자가 끊어지지 않는 것 뿐이었다. 솔로몬은 바로 이러한 약속도 이루어질 수 있도록 기도하고 있다. 그러나 그 약속에는 ‘만일 네 자손이 그 길을 삼가 … 진실히 내 앞에서 행하면’이라는 조건이 부가되어 있었다(2:4). 하지만 말년의 솔로몬은 하나님의 율법을 거역하고 말았다(11:6). 그 결과 솔로몬 이후 이스라엘은 남북으로 분열되었고, 북 왕국은 다윗의 혈통과 무관한 자에 의해 통치되었을 뿐만 아니라, 다윗의 혈통을 이어받은 유다 왕국 조차도 누적된 범죄로 말미암아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하는 운명에 처해졌다. 그러나 이렇듯 표면상으로는 하나님의 왕위 약속이 깨어졌다 하겠으나, 영원한 왕국에 관한 하나님의 숨겨진 경륜은 다윗의 자손으로 이 땅에 오신 만왕의 왕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온전히 성취되었다(눅 1:27). 요컨대 그러한 궁극적이고도 최종적인 약속 성취는, 첫째로 당신의 영광과 이름을 위해서이며, 둘째로 당신의 백성들을 향한 넘치는 사랑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다(시 23:3, 요 13:1).

 

8:26 하신 말씀이 확실하게 하옵소서. ‘확실하게 하다’로 번역된 원문은 ‘예아멘’이다. 그런데 이 말 속에 들어있는 기본형 ‘아멘’은 이미 말해진 것에 대해 확언할 때 사용되는 말이다(1:36). 따라서 25절 말미의 “ … 지키시옵소서”와 본 절의 “ … 확실하게 하옵소서” 같은 요구 형태의 기도는 이미 앞서 주어진 약속에 근거하는 기도이다. 물론 여기서 이미 주어진 약속은 선지자 나단을 통해 다윗에게 주어진, 소위 ‘다윗 언약’(삼하 7:12-16)을 가리킨다. 여기서 우리는 바람직한 기도의 한 모범, 즉 약속에 근거하여 드리는 기도를 발견할 수 있다.

 

8:27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근동 지방의 무수한 신들이 땅이나 산 등 제한된 지역의 신으로 믿어지고 숭배되던 당시의 환경 속에서 이같은 솔로몬의 올바른 신(神) 사상은 매우 돋보인다. 분명 솔로몬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충만한 지혜로 인해(3:12, 4:29-34) 이같은 올바른 사상을 소유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늘들의 하늘. ‘하늘들의 하늘’로 번역된 히브리어 ‘쉐메 핫샤마임’은 두 가지로 이해 가능하다. 즉 (1) 그것은 히브리어가 최상급을 나타낼 때 사용하는 평범한 표현일 뿐이라는 견해(Gaster). 이 경우는 ‘하늘 끝’ 또는 ‘아주 높은 하늘’(the highest heaven)이라는 뜻이 된다. (2) 그것은 히브리인들이 갖고 있는 일종의 우주관, 즉 하늘이 층층으로 되어 있다는 사상을 반영하고 있다는 견해(Schottgen). 이 경우 ‘하늘들의 하늘’은 그렇게 ‘겹쳐진 하늘 중 최상층’(heaven of heavens)을 의미하게 된다. 참고로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신화에서 최고의 신 아누(Anu)는 여러 층 중 최상층의 하늘에 거주했다고 한다(Gaster). 어쨌든 어느 쪽의 견해를 취하든 문맥상 본 절의 “땅과 하늘들의 하늘”은 천지, 곧 우주 전체를 의미하는 말이다. 즉 우주 전체로도 담아 낼 수 없을 하나님의 무한성을 수사적(修辭的)으로 표현한 말이다(렘 23:24).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성전이오리이까. 우주 전체로도 무한하신 하나님의 처소로서는 부족하거늘 하물며 일개 건물에 지나지 않는 조그마한 성전이 감히 하나님의 처소일 수 있겠느냐는 겸비의 표현이다. 그러므로 성전이 하나님의 처소일 수 있는 것은 성전 자체의 어떤 가치나 능력이 하나님을 메어 둘 수 있기 때문이 결코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성전이 결코 감당할 수 없는 무한하신 분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오직 은총으로 성전을 인간들 사이에 임재하시는 당신의 처소로 삼으신 것이다. 이러한 역동적인 사실을 망각하게 되면 심각한 오류를 낳게 된다. 실제로 후대의 타락한 이스라엘은 그 역사에서 자주 불순종과 불의에 빠지면서도, 무조건 성전을 마치 하나님이 묶여있는 장소처럼 생각하는 잘못된 신 개념을 가졌다(렘 7:4, 미 3:11). 결국 본 절에 내포된 의미는 다음 두 가지로 요약된다. (1) 하나님의 편재성(偏在性). 즉 하나님께서는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대주재(大主宰)이시므로, 사람의 손으로 건축된 성전에 국한되실 수 없다(행 17:24). (2) 당신의 백성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극진하신 사랑. 지존하신 하나님께서 땅 위에 당신의 임재를 상징하는 처소를 마련토록 하셨다는 사실 자체 속에 하나님의 무한한 비하와 크신 긍휼이 내포되어 있다. 이러한 하나님의 비하와 사랑은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죄인의 모습으로 성육신 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 절정에 달했다(롬 8:3, 히 1:3).

 

8:28 기도와 간구. 구약에서 ‘기도’를 의미하는 용어가 여럿 있지만 그 중에도 본 절에 나오는 ‘테필라’가 가장 많이 사용된다. 그리고 ‘테필라’는 동사 ‘팔랄’에서 파생되었다. 그런데 ‘팔랄’은 ‘중재하다’(intervene)란 뜻을 갖고 있다. 본 절은 솔로몬이 그의 백성들을 위해 기도 드리는 장면이다. 따라서 본 절의 ‘테필라’는 그 어원적 의미에 가장 적절하게 사용된 셈이다. 한편 ‘간구’(히, 테힌나)는 ‘자비롭다’ 또는 ‘불쌍히 여기다’는 뜻을 가진 동사 ‘하난’에서 파생된 말이다. 그런데 ‘하난’은 어떤 사람이 필요로 하는 바로 그 것을 주어야겠다고 진심으로 느끼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렇게 볼 때 솔로몬의 기도와 간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절실히 필요로 하는 것을 채워 주시도록 대신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의미에서 중보기도의 모범적 형태를 보여 준다고 하겠다.

부르짖음과 비는 기도. ‘부르짖음’은 ‘간구’와 마찬가지로 ‘하난’에서 온 말이다. 또한 ‘비는’이란 말도 ‘기도’와 마찬가지로 ‘팔랄’에서 온 말이다. 그런데 ‘하난’은 자비와 동정을 필요로 하는 어떤 슬픈 처지를 전제(前提)한다. 여하튼 이러한 어휘가 구사된 것은 어떠한 상황에서든지 오직 하나님만 의뢰코자 하는 간절하고도 절박한 심정이 토로되었기 때문이다.

 

8:29 전에 말씀하시기를. 아마도 선지자 나단이 다윗에게 성전 건축에 관한 하나님의 뜻을 전할 때(삼하 7:13)를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된다(Keil).

주의 눈이 주야로 … 향하여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성전에서, 그리고 성전을 향하여 기도를 드리는 근거가 제시되고 있다. 즉 그것은 성전 자체의 가치 때문이 아니라 “주의 눈이 주야로” 성전을 향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전은 그 곳을 향한 하나님의 자비와 그 곳을 향한 인간의 기도를 매개(媒介)해 주는 장소이다(단 6:10, 시 5:7, 욘 2:4). 이러한 성전의 핵심적 특성 및 기능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는 말속에 잘 요약되어 있다(사 56:7, 마 21:13). 한편 ‘주의 눈’에 대해선 9:3 주석을 참조하라.

 

8:30 이곳을 향하여 기도할 때에 … 들으시사 사하여 주옵소서. 사실 하나님은 무소 부재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하늘들의 하늘이라 할지라도 주의 거처로서 합당치 못하다(27절).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심히 낮아지셔서 이 땅 위에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짓도록 명하시고 허락하셨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성전을 당신과 인간의 만남과 교제의 장소로 삼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따라서 죄인이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가 죄를 용서받고 상호 교제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는 성전 뿐이었다. 이제 솔로몬은 이러한 점을 상기하면서, 약속대로 성전을 통해 주께 나아가고자 하는 자를 하나님께서 용납해 주실 것을 간구하고 있다.

주께서 계신 곳 하늘. 비록 본문이 하나님의 임재 처소로서 성전을 봉헌하는 장면이지만, 하나님의 진정한 거처는 ‘하늘’이라고 거듭 밝힘으로써 성전을 상대화시키고 있다(34, 36, 39, 43, 45, 49절). 한편, 본 절의 ‘하늘’은 우주 내의 어느 한 장소를 가리킨다기보다 성전을 포함하여 어떠한 제한된 장소라도 하나님의 참된 거처일 수 없다는 점을 선포하는 데 강조점이 있다. 즉 본 절은 솔로몬 성전이 하나님의 진정한 처소일 수는 없으며, 다만 하나님께서는 언약에 의하여 당신의 백성을 만나실 장소로서 땅 위에 그 곳을 지정하셨을 뿐이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하늘에 계신다는 말 속에는 하나님의 전지 전능성이 내포되어 있다. 곧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모든 인간의 일거수 일투족을 모두 감찰하신다는 것이다(39절). 이렇듯 치밀하신 주의 통찰은 경건한 자의 간구에는 보호하시는 은총으로, 그리고 패역한 자에게는 진노의 심판으로 작용하게 된다(시 91:4, 렘 17:10).

 

8:31 31~32절. 여기서부터 53절까지에는 솔로몬의 특별 간구 내용이 나오는데, 그 내용은 주기도문(마 6:9-13)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언약의 수인 ‘일곱(7) 가지 간구로 구성되어 있다(Bähr). 그 중 31~32절의 간구는 ‘맹세’에 관한 내용이다. 맹세에 관한 규례는 모세의 율법에도 규정되어 있는 데(출 22:11, 레 5:1, 4) 맹세는 그 형태야 어떻든 진리와 공의의 하나님 앞에서 사실성을 확증하는 것이었다(신 32:4, 사 65:16). 따라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한 바를 이행치 않거나 거짓 맹세를 하는 자는 공의롭고 지고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게 됨은 물론, 공동체 내에서 거짓과 불신 등의 여러 사회악을 조장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민 30:1-8). 그러므로 솔로몬이 일곱 가지 특별 간구 중 맹세에 관한 사항을 우선적으로 언급한 것은 다분히 의도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즉 솔로몬은 맹세의 신성함을 강조함으로써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보존되기를 바랐으며, 아울러 신정 국가 이스라엘에 공의와 의리가 확립되기를 원했다. 이런 점에서 본문의 간구는 주기도문의 첫째 부분인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는 구절과 그 내용이 있어서 일치한다. 왜냐하면 거짓 맹세는 주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맹세시킴을 받고. 어떤 사건의 재판에 있어 도저히 판결을 내릴 수 없거나, 증인들을 내세울 수 없게 되면 최종적으로 다툼 또는 판결을 끝맺기 위해(히 6:16) 맹세를 시켰다(Roland, 출 22:11). 예를 들면, 분실된 물건이 우연히 어느 사람의 수중에 있음이 발견되었을 때 그는 그 물건을 고의로 훔친 게 아니라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를 해야만 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은 그 맹세를 인정해야만 했다. 이것은 오직 맹세의 대상자가 되시는 진리의 하나님께서 판결할 문제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주의 제단. 성전 안뜰에 있는 ‘번제단’을 의미한다. 일반 백성들이 만일 성전에서 맹세할 경우에, 그들은 소위 ‘평민의 제단’인 번제단 앞에서 맹세하였다(마 5:23, 24).

 

8:32 심판하사. ‘심판하사’로 번역된 히브리어 ‘샤파트타’는 ‘재판하다’는 뜻을 가진 ‘샤파트’에서 유래된 말이다. 그런데 본래 ‘샤파트’는 ‘재판하다’라는 사법적 의미보다 더 광범위하게 사용된다. 즉 입법, 사법, 행정이 모두 포함된 통치 행위를 가리키는 데 사용된다. 그러나 여기서의 ‘샤파트타’는 사법적 의미의 ‘판단’을 수행하는 의미가 짙다. 왜냐하면 선악을 공정히 가려내서 그 행위대로 보응(報應)해 달라는 내용의 맥락에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악한 자 … 의로운 자 … 갚으시옵소서. 하나님은 인간의 선악에 대하여 보상과 처벌로 정당히 보응하신다는 사상은 성경의 주요 주제 중 하나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보응사상은 계약 관계에서 아예 공식화(公式化)되어 있다(Towner). 즉 하나님 말씀에의 순종 여하에 따라 저주와 축복의 보응이 임하리라는 것이다(신 28:1, 2). 그런데 이러한 보응은 곧 하나님의 공의의 속성에 근거하여 신정 국가의 공의를 올바로 세우고자 하는 데 목표가 있다. 솔로몬의 특별 간구 내용 중 무엇보다 먼저 등장하는 내용이 백성들의 맹세의 신실함과 공의로운 보응 사상이다. 이처럼 선민의 공동체 내에서 공의를 이루는 문제는 하나님 앞에 대단히 중요한 문제인 것이다(레 19:15, 신 16:18, 33:21, 시 35:24, 사 61:8 등).

 

8:33 33~34절. 솔로몬의 두 번째 특별 간구는 범죄의 결과 이스라엘이 적국에 패배할 경우 그에 대한 용서와 회복을 구하는 내용으로, 레 26:17, 신 28:25의 내용과 일치한다. 그는 사죄와 회복의 조건으로 (1) 주께로 돌아오는 것(진정한 회개), (2) 주의 이름을 인정하는 것(여호와 유일 신앙 회복), (3) 성전에서 주께 기도하는 것(참된 예배와 헌신)을 전제로 내세우고 있다. 용서를 구하는 자의 참된 마음 자세를 보여 준다.

주께 범죄하여 적국 앞에 패하게 되므로. 선민 이스라엘이 대적에게 패배하는 것은 곧 범죄로 인해 하나님의 징벌을 받는 것이었다(레 26:17, 39-42, 신 28:25, 48).

주께로 돌아와서 … 이 성전에서 주께 기도하며 간구하거든. 본 절은 적에게 패배하여 포로로 끌려간 경우를 말하고 있다. 신정(神政) 국가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전쟁의 패배는 곧 하나님의 징계요, 선민(選民) 이스라엘이 포로가 되어 자기 땅에서 추방당하는 것은 곧 하나님과의 단절을 의미했다(Greenberg, 호 9:3-5). 따라서 이스라엘이 다시 자기 땅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징계의 해제요 하나님께로의 귀환이다. 혹자는 본 절이 단순히 회개 기도를 의미하고, 포로의 경우는 다음 절(34절)에서 나온다고 보나(Hammond), 수긍할 수 없는 견해이다. 왜냐하면 (1) 문맥상 33절과 34절은 하나의 주제로 묶여지며, (2) 본 절의 “돌아와서”(히, 슈브)가 일단 추방을 전제한 표현이기 때문이다. 한편, “주의 눈이 주야로 보고 있는”(29절) 성전으로 돌아오는 것은 곧 주께로 돌아오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그리고 ‘기도하며 간구하는 것’은 자복하는 겸허한 심령으로 간절히 기도하는 상태를 가리킨다. 사실 간절함이 없는 기도는 진실성이 결여되어 외식으로 흐르기 쉽다(눅 18:1-8).

 

8:34 주는 하늘에서 들으시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므로, 비록 포로로 끌려간 이국 땅에서도 당신의 백성들에게 개입하셔서 그들을 다시 고국으로 귀환시키실 수 있다. 만일 하나님께서 성전에만 제한된 존재라면, 성전의 파괴는 곧 그의 거처의 상실을 의미하게 된다(왕하 25:9). 그리고 전쟁에서 패배한 여타 민족신들의 운명처럼 역사의 유물로서나 남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일정한 공간을 초월하여 계시는 분이시므로, 어느 곳에서든지 당신의 백성들이 당하는 고초를 감찰하사, 언제라도 도움을 베풀 수 있는 살아계신 전능자인 것이다.

조상들에게 주신 땅으로 돌아오게 하옵소서.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땅은 단순히 군사적 점령으로 획득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언약에 근거하여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기업이다(Williams). 따라서 그 땅에서 추방됨은 이스라엘의 위약(違約)으로 인한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의 결과이다. 이러므로 조상들에게 선물로 주신 땅, 곧 그들의 기업으로 돌아오는 것은 다시 계약에의 충실과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의미하는 것이다.

 

8:35 35~36절. 솔로몬의 세 번째 간구는 가뭄 즉 한재(旱災)의 심판을 당할 때, 그 심판으로부터 구원해 주실 것에 관한 내용이다(레 26:19, 신 28:23). 고온 건조한 팔레스타인 지역에서는 ‘비’가 하나님의 귀한 선물로 간주되었듯이(레 26:4, 신 11:11, 욥 5:10, 시 68:9), ‘가뭄’은 하나님의 혹독한 심판으로 간주되었다(레 26:19, 신 11:17, 28:23-24).

하늘이 닫히고 … 주께 벌을 받을 때에. 가뭄은 이스라엘의 자연 환경에서는 국가적 재난이었다(17:7, 18:1). 왜냐하면 팔레스타인은 샘이나 강이 흔치 않아서 가뭄이 한번 들면 아예 사람이 살 수 없는 황무지 같이 되기 때문이다(Scott). 이처럼 이스라엘의 농작물은 때를 따라 이른비(가을비)와 늦은비(봄비)가 오느냐 오지 않느냐에 절대적으로 달려있었다. 때문에 그들은 가나안 족속이 폭풍과 농작물의 신(神)으로 섬기는 바알(Baal)을 숭배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의 길에 빠질 때 하나님께서는 하늘 문을 닫고 오히려 비를 내려주지 않음으로 해서, 모든 축복의 제공자는 오직 하나님 뿐이심을 보여 주시고자 했다. 그런고로 당시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가뭄은 그저 자연적 재난이 아니라 그러한 재난을 통해 범죄한 백성을 징계하시는 하나님의 채찍이었다.

주의 이름을 찬양하고. 어떤 이름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바로 그 이름의 권위에 참여하여 그 대리자로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다(Abba). 따라서 어떤 이름을 찬양한다는 것은 바로 그 이름을 가진 이의 권위 및 주권을 찬양한다는 의미를 갖게 된다. 그러므로 징벌을 당한 이스라엘이 그 곤궁한 처지에서 주의 이름을 찬양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주권 및 그 보호하에 들어가는 것이요, 모든 우상 숭배에서 떠나 여호와 유일 신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의 죄에서 떠나거든. ‘떠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슈브’는 회개에 있어서 인간편의 행동들을 가장 포괄적으로 요약해 주는 말이다. 회개의 행동은 (1) 죄에서 돌아서서 (2) 선을 향해 나아가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런데 ‘슈브’에는 바로 이 두 가지 소극적, 적극적 의미가 모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떠나다’는 한글 표현이 갖는 소극적 의미에다가, 보다 적극적으로 선을 향해 나아간다는 의미도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한편 ‘슈브’는 포로 귀환을 의미하는 동사로도 자주 활용된다. 즉 포로 생활에서 돌아오는 것과 죄의 상태에서 돌이키는 것은 동일한 영적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33, 34절).

 

8:36 마땅히 행할 선한 길을 가르쳐 주시오며. ‘가르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야라’는 어떤 주체의 독자적이고 지배적인 행동을 가리킬 때 자주 사용된다. 즉 ‘던지다, 보내다, (활을) 쏘다’ 등의 의미로 사용된다(출 15:4, 시 64:7 등). 그런데 본 절에서의 ‘가르침’이란 재난을 겪는 중에 불현듯 임하는 깨우침과 같은 것이다. 즉 자신들이 원하지도 않던 가르침이 복병이 쏜 화살처럼 예기치 않게 날아드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본 절에서 하나님의 가르침은 인간의 내적 소질 개발과 같은 가르침이 아니라, 자신 안에서는 결코 그같은 깨달음을 스스로 가질 수 없는 무자격 자에게 재난을 통해 강권적으로 임하는 가르침이다. 이처럼 인간은 원치 않던 고통을 통해 ‘마땅히 행할 선한 길’을 발견하는 경우가 많다.

 

8:37 37~40절. 이 부분은 솔로몬의 네 번째 간구로서, 불순종과 배교의 결과 하나님의 징벌로 닥칠 수 있는 온갖 재앙들, 곧 기근, 전염병, 황충, 난리, 질병 등이 임할 때, 이스라엘이 그러한 징벌의 원인을 깨닫고 회개하면 용서와 사죄의 은총을 베푸사 그러한 모든 재난으로부터 구원해달라는 내용이다.

전염병. ‘전염병’(히, 데베르)은 ‘전염병’ 또는 ‘악성 유행병’을 의미한다. 특히 이 단어는 ‘기근’이나 ‘칼’ 같은 다른 단어와 항상 나란히 등장한다(렘 14:12, 21:7, 9, 24:10 등). 그리고 ‘전염병’도 하나님이 주시는 징벌로 이해되었다(삼하 24:10-17).

메뚜기나 황충. ‘메뚜기’로 번역된 히브리어 ‘아르베’는 문자적으로 ‘무리, 떼’를 의미한다. 성경에서 이 단어는 그대로 ‘메뚜기 떼’를 의미한다(삿 6:5, 7:12, 욥 39:20, 렘 46:23). 한편 ‘황충’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하실’은 ‘게걸스럽게 먹다’에서 유래된 말이다(Hammond). 이 곤충은 엄청난 농작물 피해를 가져왔기 때문에 그 같은 이름을 갖게 된 것 같다. 그런데 성경에서 그렇게 엄청난 재난을 가져 올 수 있는 곤충은 메뚜기이므로 ‘황충’은 곧 ‘메뚜기’이거나(McCullough), 아니면 적어도 메뚜기의 일종으로 간주되고 있다(Gesenius). 그렇다면 본 절의 ‘메뚜기나 황충’은 단지 하나의 대상, 즉 메뚜기 떼를 가리키는 것이 된다(신 28:38).

적국이 와서 성읍을 에워싸거나. 솔로몬 당시 애굽은 쇠퇴일로에 있었고 앗수르는 아직 미약한 세력에 불과했으므로, 당시의 강대국 이스라엘은 외세의 침략에 대해 별로 염려할 바 없었다. 그러나 솔로몬은 개인과 민족의 흥망 성쇠를 좌우하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철저히 믿고 있었으므로, 후대에 발생할지도 모를 재앙을 예견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예견은 결코 솔로몬의 기우(杞憂)에서 나온 것이 아님이 후일 역사적 사실로서 입증되었다(왕하 17:6, 25:8).

 

8:38 각각 … 마음에 재앙을 깨닫고. 여기서 ‘재앙’(히, 네가)은 이미 그 안에 ‘징벌’의 의미가 들어 있는 단어이다. 마치 아버지가 자식에게 벌을 주듯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재앙을 주신다(삼하 7:14, 시 89:32). 그런데 ‘네가’는 ‘ … 에 닿다, 만지다’란 뜻을 가진 ‘나가’에서 파생하였다. 이 ‘나가’는 감동(感動), 즉 하나님의 손길이 사람의 영혼에 접촉하신다는 의미로 사용된다(삼상 10:26). 한편 ‘깨닫고’에 해당하는 기본형은 ‘알다’란 뜻인 ‘야다’인데, 본 문맥에서는 ‘분별하다’는 의미로 쓰였다. 그러므로 본 절은 단순히 재앙이 임했음을 인지하는 상태가 아닌, 재앙에 담긴 징계의 의미와 목적을 충분히 분별해 내는 상태를 말한다. 한편, 본 절에서 특별히 강조된 사항은 (1) 죄에 대한 개개인의 인식 및 회개와 (2) 어떤 종교적 의식(儀式) 보다는 마음의 상태, 즉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오는 회개의 진실성이다. 진정 하나님께서는 각자의 철저한 죄의 인식을 통해 마음으로 회개하는 그 진실성과 겸허함을 보고 그 기도에 응답하실 것이다.

 

8:39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30절 주석 참조.

모든 행위대로 … 갚으시옵소서. 32절 주석 참조.

주만 홀로 사람의 마음을 다 아심이니이다.. 성경에서 ‘마음’(히, 레바브)은 정서 활동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인간의 전 인격적 핵심을 가리키는 말이다(Dentan). 이 핵(核)으로부터 정서, 지식, 의지의 활동이 일어나고 또한 외적 활동까지도 포괄하게 된다(18절). 그런데 이 인간의 마음은 오직 그 마음을 지으신 하나님만이 온전히 분별하시고 그에 따라 판결을 내리실 수 있다(렘 17:9, 10).

 

8:40 그리하시면 … 항상 주를 경외하리이다. ‘주를 경외함’은 이스라엘 신앙의 절대적인 가치이다. 즉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은 그 자체로서 추구해야 할 절대 가치인 것이다. 그러므로 본 절에서 기도가 응답된 결과로서 ‘주를 경외함’을 회복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신 31:13).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이를 하나님의 사유하심이 성도의 하나님 경외에 대한 조건부가 된다는 식의 의미로 이해해서는 아니된다. 여기서 솔로몬의 이 말은 (1) 다만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근거하여 그분의 긍휼을 간절히 바랐던 것이며, (2) 또한 사유(赦宥)하심에 풍성하신 하나님의 은총을 확신한 말이라고 볼 수 있다(시 130:4).

 

8:41 41~43절. 솔로몬의 다섯 번째 간구는 특별히 이방인들을 위한 중보 기도였다. 솔로몬이 이러한 간구를 드리게 된 표면적 동기는 당시 활발한 통상 교역으로 말미암은 이방인들과의 빈번한 접촉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Stanley).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하나님의 거처가 성전에만 국한되지 않듯이, 하나님의 섭리 및 통치가 이스라엘에만 한정되지 않음을 인식했기 때문이다(Rawlinson).

이스라엘에 속하지 아니한 자 … 이방인이라도. 본 절의 ‘이방인’(히, 노크리)은 이스라엘에 귀환한 자들을 일컫는 체류자(히, 게르)와는 구별된다(민 15:14 이하). 다시 말해 ‘노크리’는 이스라엘에 일시 방문한 상인이나 여행자들이다(Hamlin). 예를 들면 스바 여왕이나 나아만의 경우가 이에 해당된다(10:1-13, 왕하 5:1-19). 또한 정치적 목적으로 입국하는 각국의 사절들도 이에 포함될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본 절이 이방인들을 향해 개방성을 띤다는 점에서 꼭 이스라엘에 내방한 자들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즉 ‘세상 만민’을 향한 개방성이다(43절). 이처럼 이스라엘 뿐 아니라 이방인들까지도 포함하는 하나님의 전 우주적 통치, 곧 말씀(복음)의 전세계주의적 성격은 비록 희미하나마 구약 시대에도 면면이 흐르고 있는 주요 사상 중 하나이다(창 22:18, 출 22:21, 민 15:14-16, 시 22:27, 28, 사 49:6 등). 그러나 신약 시대에 이르러서는 이러한 사상이 보다 뚜렷히 나타난다(롬 3:29, 고전 8:6).

 

8:42 능한 손과 … 펴신 팔. 전능하신 하나님의 생생하고도 역동적인 보호, 섭리, 구원의 행동을 가리키는 의인법적 포현이다(출 6:6, 14:8).

와서 이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거든. 이러한 이방인들의 기도는 아마 어떤 경우에는 단순히 외교 사절로서 그 나라의 민족신에게 경의를 표하는 정도일 수도 있다(Montgomery). 혹은 단지 성전의 수려함과 명성 때문에 그 외양이나 잠시 보고자 방문했을 수도 있다(대상 22:5). 그러나 나아만의 경우처럼(왕하 5장) 좀더 절실하게 찾아 오는 이방인들도 있었을 것이다.

 

8:43 이방인이 주께 부르짖는 대로 이루사. 훗날 유대주의를 특징짓는 독선과 배타성을 감안하면 본 절의 이방인에 대한 개방성은 주목할 만하다. 그렇지만 원래부터 하나님은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모든 민족의 하나님이시다(사 11:9, 10, 롬 3:29).

땅의 만민 …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줄을 알게 하옵소서. 이방인의 기도에 응답해달라고 요청하는 이유가 밝혀진다. 즉 주의 이름을 알고 이스라엘의 신앙처럼 주를 경외하게 해달라는 것이다(왕하 5:15-19). 이처럼 이스라엘의 신앙은 일찍부터 세상 만민들에게 개방된 것이었다. 그러므로 신약에서 바울이 유대인이나 이방인 모두에게 열려진 구원을 말함으로써 편협한 유대주의에 반기를 들었을 때, 그것은 구약에 반대하려는 것이 아니라 구약을 옳게 증언하는 것이었다(롬 10:12, 13). 한편 성전을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다는 사상은 주의 이름을 성전에 두신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16, 29절). 여기서 강조점은 ‘주의 이름’에 있는 것이며, ‘성전’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처럼 ‘장소의 신학’이 아닌 ‘이름의 신학’을 내세움으로써, 솔로몬은 하나님이 특정 장소에 제한당하는 분이 결코 아님을 밝히 드러내려 했다(Anderson).

 

8:44 44~45절. 솔로몬의 여섯 번째 간구는 전쟁으로 말미암아 비록 멀리 떨어진 곳에 있을지라도, 그곳에서 성전을 향해 기도할 때 그 기도 역시 돌아보아 줄 것에 대한 간구이다. 솔로몬의 이러한 기도는, 성전은 단지 주의 이름이 머물고 있는 거처일 뿐 성전 그 자체가 어떤 효력을 발휘하는 신비의 장소가 아님을 시사해 준다(Patterson).

싸우고자 하여 주께서 보내신 길로 나갈 때.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전쟁은 언제나 하나님께 속한 일이었다(삼상 17:47). 그러므로 공격이든 방어이든 모든 전쟁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하는 일로 믿었다(Toombs). 그래서 본 절과 같이 전쟁터에 종군(從軍)하는 것을 “주께서 보내신 길”과 동일시할 수 있는 것이다. 같은 견지에서 전쟁에 임하는 병사들은 자신들을 하나님께 봉헌된 전사로 생각하였다(삿 5:2, 사 13:3).

성전이 있는 쪽을 향하여. 본 절과 48절은 이제까지의 경우들 보다는 훨씬 멀리 떨어진 장소를 시사하다. 즉 전쟁터와 적국에 포로로 잡혀간 것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단지 그들은 성전이 있는 ‘방향’ 쪽으로만 향할 수 있을 뿐이다. 그렇지만 그렇게 멀리 떨어진 장소에서나마 잊지 않고 방향만이라도 성전 쪽을 향하려는 간절함은 곧 하나님을 향하여 간절히 은총과 도움을 구하고자 하는 내적 열정 그 자체이다(Bähr). 그런고로 솔로몬은 그들이 그처럼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멸시치 않을 것으로 확신하고,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구했다. 그런데 이처럼 성전과 예루살렘을 향하여 바라보고 기도하는 행위는 포로기 이후에 유대인들에게 있어 하나의 관습처럼 굳어졌다(Bähr, 단 6:11).

 

8:45 돌아보옵소서. ‘돌아보옵소서’의 기본 어근인 ‘아사 미쉬파트’는 원래 ‘공의를 행하다’란 뜻이다. 이는 전쟁도 단지 인간들끼리의 분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로운 개입과 판결을 기다려야 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이 말은 이스라엘이 전쟁에 임함에 있어 하나님의 공의에 입각한 뚜렷한 명분을 내세울 수 있어야 할 것과 또한 전쟁 수행 과정에 있어서도 시종 하나님의 공의에 입각하여야 함을 뜻한다. 자기 민족의 이익을 무조건 편드는 여타 민족신들의 속성에 비해 오직 공의를 따라 판결을 행하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속성이 잘 나타나 있다.

 

8:46 46~51절. 솔로몬의 마지막 일곱 번째 간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죄값으로 적국에 포로가 되어 잡혀갔을 경우, 그들이 그 땅에서 자신들의 죄를 깨닫고 예루살렘과 성전쪽을 향하여 회개의 기도를 할 때 그 기도를 돌아보시고 응답해 달라는 내용이다. 아마도 솔로몬은 레 26:40-45과 신 30:1-10에 나타난 바, 회개하는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의 긍휼과 사죄의 은총이 임할 것이라는 회복의 약속에 근거하여 이 간구를 드린 것 같다. 바벨론 포로 생활의 애환과 회복에의 염원을 노래한 시편 137편을 연상케 하는 본문은 역사를 꿰뚫어 보는 솔로몬의 예리한 통찰력을 반영하고 있다. 혹자(Thenius)는 그 표현의 생생함 등을 이유로 본문이 포로 후기에 삽입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런 주장은 다음과 같은 근거로 타당성이 없다. (1) 솔로몬은 인간의 부패성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으므로(46a절) 이스라엘의 타락 및 그로 인한 포로 생활을 충분히 예감할 수 있었다. (2) 이스라엘의 포로됨에 관해서는 불순종에 따르는 징계로서 이미 오래 전 모세에 의해서도 경고된 바 있었다(레 26:33, 44, 신 28:25, 26). (3) 지나간 이스라엘의 패역했던 나날을 회고하면서, 솔로몬이 장래의 일들에 대해 깊은 우려를 표하였음은 당연한 일이다. 아무튼 가장 번영했던 시기에 가장 비운의 상황을 예감하고 경계한 솔로몬에게서 우리는 겸허하고 진지한 태도의 모범을 보게 된다(빌 3:12-16, 롬 12:16).

범죄하지 아니하는 사람이 없사오니. 이것은 솔로몬이 일곱 번째 간구(46-51)와 같은 내용의 기도를 하는 까닭을 설명하는 말이다. 즉 범죄하지 않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결국 그러한 범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적국에 포로로 잡혀가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다는 전제 하에 기도를 드리는 것이다(레 26:27-39, 신 28:64-68). 이것은 솔로몬이 인간의 전적 부패(total depravity)의 속성을 잘 알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보건대, 우리는 솔로몬의 지혜가 단순히 국정(國政) 사무나 자연 현상에 국한되지 않고, 인간의 본질에까지 이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욥 15:16, 렘 17:9, 롬 3:10-18).

넘기시매. ‘넘기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탄’에는 ‘내버려두다’ 또는 ‘허락하다’는 뜻이 들어 있다. 좀더 사법적인 의미로는 ‘대가를 지불토록 어떤 것을 넘겨준다’는 뜻으로 사용되기도 한다(창 23:9, 신 15:10 등). 그러므로 본 절 속에는 (1) 포로가 되는 것은 범죄의 대가를 치루는 것이며, (2) 적에게 패배하는 것도 하나님의 주권하에, 즉 하나님이 허락하셔야 가능한 일이라는 믿음이 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8:47 스스로 깨닫고. 직역하면 “자신의 심령으로 돌아오고”이다. 원래 죄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의도하신 제자리를 벗어난 상태이다. 그러므로 회개의 과정은 참된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것’이다.

우리가 범죄하여 반역을 행하며 악을 지었나이다. ‘범죄’(히, 하타)는 ‘목표에서 빗나감’을 의미하고, ‘반역’(히, 아와)은 ‘그릇됨, 어그러지고 구부러짐’을 의미한다. 그리고 ‘악을 짓다’(히, 라샤)는 ‘방종에 빠져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거역함’을 의미한다. 따라서 본 절은 한 번 빗나감으로써 점점 심각해지는 죄의 양상을 점증적으로 보여 준다. 한편 솔로몬의 이 말은 후일 바벨론 포로 시절에 경건한 유대인들에 의해 죄를 깊이 통회할 때 그대로 사용되었다(단 9:5, 시 106:6).

 

8:48 온 마음과 온 뜻으로. 이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기본 자세로, 신명기가 제시하는 규례와 일치한다(신 30:2, 6). 신 6:5 주석 참조.

조상들에게 주신 땅. 34절 주석 참조.

성전 있는 쪽을 향하여. 44절 주석 참조. 한편 본 절에서 우리는 기도할 때의 방향이 땅→성→성전으로 점점 좁아져 가고 있음을 보게 되는데, 이는 될 수 있는 한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을 사모해야 된다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

 

8:49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30절 주석 참조.

기도와 간구. 28절 주석 참조.

그들의 일을 돌아보시오며. 이에 해당하는 기본 동사 ‘미쉬파트’는 ‘판단하다’란 뜻이다. 곧 하나님께서 인간의 간구에 대해 공의와 긍휼로 판단하시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회개의 진실성 여부에 따라 기도에 응답하실 것이다. 45절 주석 참조.

 

8:50 허물. ‘허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페샤’는 ‘실수, 과오’란 뜻 보다는 더 강한 ‘반역’의 뜻을 갖고 있다. 즉 하나님께 저지르는 패역한 범죄라는 성격과 이로 인해 생긴 불화까지도 암시하는 말이다. 따라서 이같은 불화에서 생긴 하나님과의 간격이 인간으로 하여금 온갖 왜곡된 행동을 하도록 한다(욥 34:6, 시 36:1, 잠 17:19, 29:22 등).

불쌍히 여김을 얻게 하사. ‘불쌍히 여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라하밈’은 ‘부드러운 자비심’(tender mercy)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본 절에서 솔로몬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적들로 하여금 그러한 마음이 일어나도록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다. 여기서 솔로몬은 하나님을 이스라엘에 국한된 분으로서가 아니라, 이방 통치자의 마음까지도 당신의 뜻대로 지배하실 수 있는 분으로서 신앙하고 있다(시 106:44-46, 스 1:1). 그런데 그렇게 적들의 동정심이 일어나도록 하는 보다 근본적인 동인(動因)은 바로 하나님의 동정심이다. 즉 심판을 받아 마땅하지만 회개하는 이스라엘에게 다시 자비와 용서로 대하시는 하나님의 아버지 같은 ‘불쌍히 여김’이 있기 때문에 그런 일이 가능한 것이다. 또 한편 ‘라하밈’은 ‘태’ 또는 ‘자궁’으로 번역되는 ‘레헴’과 깊은 관련이 있다(3:26). 이는 마치 젖먹이 자식에 대한 어미의 마음처럼 이스라엘을 향해 지극한 애정과 안타까움을 갖는 상태를 가리킨다(시 106:44-46).

 

8:51 철 풀무 같은 애굽. ‘풀무’(히, 쿠르)는 금속을 제련하는 용광로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제련’이란 의미 보다는 철이라도 녹일 정도의 뜨거운 ‘열’이 강조되어, 애굽에서의 생활이 극심한 고통으로 가득했음을 비유로 말하고 있다. 신 4:20 주석 참조.

주의 소유. ‘소유’(히, 나할라)은 ‘소유’ 또는 ‘상속 재산’이란 의미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영구적인 소유’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주의 ‘나할라’라는 말은 그들이 결코 버림받을 수 없는 존재, 곧 하나님의 특별하신 소유로 주의 보호와 아낌 및 관심의 대상이라는 의미이다. 출 19:5 주석 참조.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이러한 믿음에 근거하여 비록 불순종으로 징벌을 받더라도 그것은 일시적인 것이고, 회개하면 마침내 원래의 위치로 회복될 것이라는 희망을 언제나 가질 수 있었다(출 34:9, 신 4:30, 31, 9:26, 시 33:12). 그런데 이처럼 이스라엘이 자신들을 주의 ‘나할라’라고 생각할 수 있었던 근거는 다름 아닌 하나님과의 ‘계약’이었다(출 19:5, 6, 렘 11:4). 따라서 이제까지 솔로몬의 모든 기도는 바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상대자로 삼으시고 언약을 맺은 사실에 근거하여 드려졌다. 솔로몬은 결코 이스라엘 자신의 미덕이나 공로에 근거해서 하나님께 호소할 수 없었다(신 7:6-11).

 

8:52 52~53절. 솔로몬의 일곱 가지 간구 내용(31~51절)을 결론적으로 요약한 부분이다.

눈을 들어. ‘눈’(히, 아인)은 성경에서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되었으나(시 119:18, 잠 6:17, 겔 6:9, 마 6:22), ‘하나님이 눈을 든다’는 표현은 인간을 살피시고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을 가리키는 비유적 표현이다(시 33:18, 34:15). 반면에 ‘하나님이 눈을 가린다’는 표현은 인간의 기도와 요청을 무시함을 의미한다(사 1:15).

종의 간구함 … 들으시옵소서. 기도를 시작할 때 사용된 문구(28, 29절)가 지금 기도를 마무리 짓는 부분에 다시 등장하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들어달라는 간청으로 앞뒤가 구성된 솔로몬의 기도는 51, 53절에서 보듯 이스라엘이 주의 소유라는 점을 이유로 들어 응답을 요청한 것이다.

 

8:53 주의 종 모세를 통하여 말씀하심 같이. 이는 출 19:3-6의 말씀을 가리킨다.

세상 만민 가운데에서 그들을 구별하여. 이 말은 출 19:6의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에 상응한다. 한편 ‘구별하다’(히, 바달)란 말 속에는 ‘분리되다, 차이를 만들다’는 뜻이 있는데, 이 말은 이스라엘이 이방 여러 나라와 특별히 구별되었다는 문맥에서 자주 등장한다(스 6:21, 느 9:2, 10:28). 그런데 ‘거룩’(히, 콰도쉬)에도 이러한 ‘구별’의 의미가 담겨 있다. 그리고 이러한 거룩 및 구별에는 단순히 속된 것에서 분리되는 것 외에도 적극적으로 하나님께 봉사하는 면이 들어 있다(Eichrodt). 출 19:6의 ‘제사장 나라’는 바로 그러한 구별의 적극적인 면을 알려 주는 것이다. 즉 이스라엘은 타민족과는 분리된 선민(選民)인 바 이는 이스라엘로 열방 중 제사장 나라로 봉사하도록 하기 위함이다(출 19:6 주석 참조).

주의 기업. 51절 주석 참조.

 

8:54 솔로몬이 무릎을 끓고. 기도할 때 솔로몬이 취한 자세에 관해서는 22절 주석을 참조하라. 한편, 무릎을 끓는 자세에는 (1) 탄원(단 6:10, 행 7:60, 엡 3:15), (2) 복종(왕하 1:13, 마 17:14, 눅 5:8), (3) 예배(19:18, 사 45:23) 등의 의미가 들어 있다(Davies). 일반적으로 무릎 꿇는 자세는 직립(直立) 자세를 포기함으로써, 자신의 열등함과 의존성 및 겸허함 등을 나타내는 자세이다(Crawley).

손을 펴서 하늘을 향하여. 22절 주석 참조.

기도와 간구. 28절 주석 참조.

아뢰기를. ‘아뢰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팔랄’은 ‘호소하다, 기도하다’는 뜻을 갖고 있는데, 여기서 ‘테필라’(기도)란 말이 파생되어 나왔다(28절). 그런데 ‘팔랄’은 ‘중개자로서 행동하다’는 뜻도 있다(Thomas). 그렇다면 본 장의 솔로몬의 기도는 그 좋은 본보기라 할 수 있다. 솔로몬의 기도는 백성들과 하나님 사이에서 일종의 중개자로서 행한 것이기 때문이다.

 

8:55 회중. ‘회중’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카할’은 특히 신명기에서 이스라엘의 전 국민적 신앙 집회를 가리키는 데 흔히 사용되었다(Pope). 즉 특별히 종교적 목적을 지니고 모인 무리를 뜻한다.

축복하며 이르되. 14절 주석 참조.

 

8:56 이하의 내용(56-61절)은 봉헌 기도 이후에 솔로몬이 백성들에게 하는 일종의 축사(祝辭)이다. 이에 반해 15-21절은 봉헌 기도에 앞선 인사말이라 볼 수 있다.

그가 … 태평을 주셨으니. 여기서 ‘태평’(히, 메누하)은 ‘안식’이란 뜻인데, 이 안식에의 약속은 신명기 12:9, 10에서 주어진 것이다. 비록 수 21:44에서 이 안식이 성취되었지만, 그것은 불완전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아직 많은 가나안 족속들이 도처에 있었고, 영구한 평화의 상징인 성전도 건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윗 시대의 정복을 거쳐 마침내 솔로몬 시대에 이르러 성전이 건축됨으로써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안식(태평)은 완전히 성취되었다. 솔로몬은 지금 이러한 사실을 감격스럽게 신앙 고백하고 있다.

말씀하신 대로. 이 역시 히브리어 ‘다바르’를 번역한 것이다. 24절 주석 참조.

모세를 통하여. ‘통하여’로 번역된 히브리어 ‘베야드’는 수단을 나타내는 전치사 ‘베’와 ‘손’이라는 뜻을 가진 ‘야드’의 결합이다. 따라서 이는 ‘모세의 손을 빌어’ 또는 ‘모세를 통해’라는 뜻으로 번역할 수 있다. 공동번역은 “모세를 시켜”로 번역하였다. 한편, 이처럼 솔로몬이 말하는 근거 구절로 우리는 레 26:3-13과 신 28:1-14의 내용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루어지지 아니함이 없도다. 여기서 ‘이루어지지 아니함’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팔’은 ‘떨어지다, 내던져지다’는 뜻을 갖고 있다. 따라서 이는 죽음이나 멸망 또는 방치 등을 지칭하는 데 쓰인다(삿 20:44, 애 1:7, 대상 20:8). 이처럼 전능자요 선지자인 하나님의 말씀 또는 약속은 호리라도 헛되이 땅에 떨어지는 법이 없다.

 

8:57 우리와 함께 계시옵고. ‘우리와 함께 있다’(히, 임마누)에 들어있는 전치사 ‘임’은 이미 그 개념 안에 ‘친교와 교제’의 의미를 담고 있다. 즉 ‘임’으로 수식되는 관계는 고난이든 번영이든 같이 경험하는 관계를 의미한다. 뿐만 아니라 이 관계는 지위나 신분에 관계없이 함께 동참하는 관계를 의미한다. 따라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가 ‘임’으로 수식된 것은 곧 인간과 같을 수 없는 하나님께서 인간과 함께 하셔서 수치든 실패든 공동으로 겪으시는 은총의 관계를 의미하다.

떠나지 마시오며. ‘떠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자브’는 ‘버리다, 포기하다’는 뜻도 있다.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소리치신 말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에서 ‘샤바크’(사박)란 말이 바로 이 ‘아자브’에 해당하는 아람어이다(마 27:46). 그러나 때로 하나님께서 성도를 일시 ‘아자브’하시는 경우는 (1) 연단을 위한 징계로 고통과 곤경에 일시 처하게 하시는 경우(시 22:1, 37:25, 사 41:17), (2) 그리고 인간의 심중에 있는 것을 알아보기 위한 경우(대하 32:31) 등이 있다.

버리지 마시옵고. ‘버리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타쉬’는 ‘배척하다, 거절하다’는 뜻을 갖고 있다. 따라서 ‘아자브’에 비해 ‘나타쉬’는 좀더 거부의 뜻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8:58 우리의 마음을 … 행하게 하시오며. 본 절은 백성들에게 율법을 순종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시도록 솔로몬이 하나님께 간청하는 장면이다. 이처럼 마음을 모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 수 있는 것도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힙입어야 가능하다. 이렇게 볼 때 57절에서 간구한 바 하나님의 ‘함께 하심’은 곧 본 절이 말하고 있는 ‘순종의 삶’을 가능케 하는 필수 조건이라 하겠다.

명령하신. ‘명령하다’(command)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차와’는 여러 맥락에서 활용되지만(룻 2:9, 삼상 17:20, 삼하 21:14), 특히 하나님이 그 주체인 경우는 다음과 같은 뜻이 있다. (1) 하나님의 명령은 곧 성취와 완성을 의미한다(시 33:9, 사 45:12). (2) 하나님께서 명령하실 때는 그것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과 수단도 같이 주신다(출 31:2-6). (3) 하나님의 명령은 곧 진실이다. 그리고 그 진실에 순종하는 자에게는 축복이 뒤따른다(신 28:8, 시 105:8). (4) 하나님이 명령하실 때는 수행해야 할 모든 것을 하나님 편에서 책임진다는 약속이 내포되어 있다(대상 16:15).

계명과 법도와 율례. ‘계명’(히, 미츠와)과 ‘법도’(히, 호크)와 ‘율례’(히, 미쉬파트)는 하나님께서 명하신 모든 말씀과 명령을 가리키는 중언법(重言法)적 표현이다(2:3, 신 4:1). 따라서 여기 언급된 세 가지 규례들을 지킨다는 것은, 곧 범사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삶을 의미한다.

 

8:59 내가 간구한 이 말씀 … 가까이 있게 하시옵고. ‘가까이 있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카라브’에는 좀더 역동적인 개념이 들어 있다. 즉 아주 가까이 다가가 친밀하게 접촉한다는 개념이 이 말 속에 들어 있다. 그 예로 성경에서 ‘카라브’는 가까이 있어 ‘볼 수 있고, 말할 수 있으며, 만질 수 있는’ 접촉을 의미하는 데 종종 사용되었다(출 32:29, 36:2, 레 10:4, 민 9:6). 따라서 본 절과 같이 솔로몬 자신의 기도가 하나님께 ‘카라브’ 될 수 있게 해달라는 요청에는, 마치 품안에 든 아기에게 기울이는 어머니의 지극한 관심처럼 자신의 기도에 관심을 기울여 달라는 간곡함이 담겨 있다.

날마다 필요한 대로. 즉 ‘매일의 필요한 것을’을 의미한다. 출 16:4, 마 6:11 등의 구절에서 같은 뜻의 말을 찾아 볼 수 있다. 진정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주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각자의 필요에 따라 매일의 필요한 은혜를 풍성히 채워주실 것이다.

 

8:60 세상 만민에게 … 알게 하시기를. 성전을 봉헌함에 있어, 솔로몬은 (1) 그 성전이 주의 이름과 영광을 보존하고 (2) 나아가 그 성전을 통해 열방에 주의 이름과 영광의 빛이 전달되어 여호와 하나님의 유일성(唯一性)이 온 천하에 밝히 드러나기를 기원하고 있다(43절).

여호와께서만 하나님이시고. 여기서의 ‘하나님’은 ‘하엘로힘’으로 정관사 ‘하’가 붙어있는 ‘그 하나님’(the God)이다. 즉 살아계셔서 당신의 백성들을 위해 친히 강한 손과 편 팔로 구원의 역사를 베푸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가리킨다. 따라서 진정 ‘여호와’만이 참되고 유일하신 신(神), 즉 ‘엘로힘’이신 것이다. 한편 본 절은 23절과 함께 신명기적 신앙 고백의 형태를 띠고 있다(신 4:35, 39).

 

8:61 온전히 바쳐. ‘온전히 바쳐’로 번역된 원어는 전치사 ‘임’이다. 이 ‘임’에 담겨있는 본래적 의미를 고려할 때(57절), 본 절과 같은 번역이 가능하다.

완전하게 하여 … 지킬지어다. ‘완전하다’(히, 샬렘)는 어떤 관계가 비뚤어짐 없이 건전하게 조화된 상태를 의미한다. 또한 그렇게 회복된 관계를 가리키기도 한다. 그런데 이 ‘샬렘’에서 ‘평화’를 의미하는 ‘샬롬’이 파생되어 나왔다. 따라서 하나님과 인간이 ‘샬롬’(평화)의 관계에 있는 상태를 곧 ‘샬렘’(완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본 절에서 보듯 그와 같은 ‘샬렘’(완전)의 결과 혹은 과정이 곧 ‘법도를 행하며 계명을 지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참고로 ‘완전’을 의미하는 헬라어 ‘텔레이오스’는 “완전히 성숙함, 그리고 지정된 목적에 도달함”을 의미하고, 라틴어 ‘페르펙투스’(perfectus)는 “처음부터 철저히 만들어진 것”을 의미한다(Campbell).

오늘과 같이. 성전 봉헌시 왕과 백성들의 마음 상태가 순종과 헌신으로 불타오르고 있었음을 시사해 준다. 이렇듯 당시에는 왕과 백성들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므로서 번영과 평안의 상태를 누렸으나, 후일 왕과 백성들이 가증한 우상 숭배의 죄악에 빠지고 말았다는 사실은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성도들은 인간의 죄악된 본성을 깊이 깨달아 늘 깨어 있기를 힘써야 한다(벧전 5:8).

 

8:62 왕과 함께 한 이스라엘. 성전 낙성식에 참여하고 있는 왕과 백성들 사이에 형성되어 있는 친밀하고 화합된 분위기를 엿볼 수 있는 표현이다(57, 61절). 여기에도 ‘화합, 동행, 친교’의 뜻을 가진 전치사 ‘임’이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 함께 제사를 드리는 왕과 백성들의 이러한 화목함은 신정(神政) 통치의 이상적인 모습이다. 이스라엘의 신정 통치의 관점에서 볼 때, 이 백성들은 곧 하나님의 백성이고 왕은 단지 하나님이 세운 백성의 목자일 뿐이다(삼상 13:14, 삼하 5:2).

다 여호와 앞에 희생제물을 드리니라. 언약궤 안치식(1-21절)과 솔로몬의 봉헌 기도(22-61절)가 끝난 후, 마지막으로 거대한 규모의 화목제가 드려짐으로써 성전 봉헌식은 그 절정에 달하였다. 병행 구절인 대하 7:4-10에는 악기를 동원하여 여호와를 찬양하는 장면까지 상세히 묘사되어 있다. 당시 여호와께 대한 감사와 헌신, 친교의 표시는 희생제물을 드리는 것이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기념비적 사건인 성전 봉헌식을 맞이하여 거대한 규모의 희생제를 드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63절).

 

8:63 화목제의 희생제물. 원어로는 ‘제바흐 쉘라밈’인데, 이 용어는 제사 후 그 고기를 먹을 수 있는 제사에만 쓰였다(삼상 1:21, 20:29 등). 신 27:7을 보면 “또 화목제(히, 쉘라밍)를 드리고 거기에서 먹으며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하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 레 7:15에 의하면 “감사함으로 드리는 화목제물의 고기”라고 기록되어 있다. ‘쉘라밈’을 드리는 동기는 즐거움과 감사이다(Milgrom).

소가 이만 이천 마리요. 양이 십이만 마리라. 이 숫자가 너무 많다고 생각한 일부 학자들은 본 절의 기록을 과장 또는 오기(誤記)로 생각하기도 한다(Montgomery, Thenius). 그러나 전반적인 정황으로 미루어, 이는 가능한 숫자이다(Keil, Bähr). 왜냐하면 (1) 보통의 화목제와 달리 성전 낙성식이라는 역사적 대사건을 위한 제사일 뿐 아니라, (2) 이 제사에 참여한 사람들은 ‘하맛 어귀에서부터 애굽 하수까지’의 전 국민(가장 및 대표들)으로 나타나고 있고(65절), (3) 원래의 번제단만으로 감당할 수 없어서 성전 앞뜰 가운데를 구별해 특별히 사용해야 할 정도였기 때문이다(64절). 그리고 제물(짐승)을 잡고 준비하는 일은 반드시 제사장이나 레위인들의 임무만은 아니었다. 이러한 일은 제물을 드리는 이스라엘 백성은 누구든지 할 수 있었다. 단지 희생제물의 피를 번제단 사면에 뿌리는 일만이 제사장의 직무였다(레 1:5, 6, 3:2, 8). 한편, 다윗 시대에 30세 이상의 레위인들이 38,000명이었으므로(대상 23:3), 비율에 따라 솔로몬 당시의 제사장들의 수효는 대략 2,000~3,000명 정도였을 것이다(Keil). 그러므로 이러한 전반적인 상황를 고려한다면, 낙성식 기간의 7일 동안 소 22,000 마리와 양 120,000 마리의 희생제물을 처리하는 데에는 큰 무리가 없었을 것이다. 참고로 요세푸스(Josephus)의 기록을 보면, 네로 황제 당시의 유월절에 양 250,000 마리가 2~3시간 동안에 제물로 드려졌다고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역대기를 비롯한 고대의 모든 역본들의 기록이 본문의 기록과 일치하다. 따라서 우리는 본문의 숫자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

봉헌식을 행하였는데. 여기서 ‘봉헌식’은 ‘시작하다, 봉헌하다, 창설하다’란 뜻의 ‘하나크’에서 파생된 말로, 가옥이나 성전 등을 완공한 후 이를 기념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 예식을 의미한다(신 20:5, 대하 7:5, 9). 한편, 후대 유대인들은 ‘하눅카’(Hanukkah)란 절기를 지켰는데, 이는 ‘수전절’(修殿節)이란 의미로 곧 수리아의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Antoochus Epiphanes)가 예루살렘 성전을 훼파하여 더립힌 것을 재건하고 성결케 하여 재봉헌한 것을 기념하는 절기이다.

 

8:64 거룩히 구별하고. 53절 주석 참조. 그런데 본 절에서 ‘거룩히 구별하다’란 말은 단지 한 단어 ‘카다쉬’를 번역한 것이다. 아마도 ‘거룩’의 기본 의미가 ‘구별’이기 때문에 이처럼 번역한 듯하다. 그런데 본래 사람이든 장소든 물건이든 그 자체의 거룩성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련 및 접촉 때문에 거룩하게 된다(Wood). 한편 ‘카다쉬’의 반대어 ‘홀’은 ‘속된 것’ 또는 ‘평범한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솔로몬은 여호와의 전 앞뜰, 곧 제사장의 뜰(6:36)을 거룩히 구별하여 임시적인 제단 장소로 삼았는데, 이는 본래 거룩히 구별된 번제단만으로는 봉헌식 때의 많은 희생제물들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8:65 칠 일과 칠 일 도합 십사 일. 성전 봉헌 절기 7일과 초막절 7일을 가리킨다(대하 7:8-10).

하맛 어귀. 하맛(Hamath) 왕국의 남쪽 경계는 곧 이스라엘의 북쪽 경계였다(Haldar, 민 13:21, 수 13:5, 삿 3:3). 이 나라는 후에 앗수르의 살만에셀 2세에게 정복된다.

애굽 강. ‘애굽 강’(히, 나하르 미츠라임)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에서 약속의 땅 가나안의 남쪽 경계선으로 나온다(창 15:18).그리고 여기서 강은 바로 나일 강을 가리킨다.

 

8:66 여덟째 날에. 이 날은 절기 ‘십사 일’ 중의 ‘여덟째 날’이 아니라 첫 번째 절기인 성전 봉헌 절기 7일이 끝나고 두 번째 절기의 ‘팔 일’째 되는 날, 즉 초막절 7일이 끝나고 난 다음 날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성전 봉헌 절기는 7월(에다님 월) 8일부터 14일까지 7일간 계속되었고, 이어 7월 15일부터 21일까지 7일간은 초막절(장막절)로 지켜졌다. 이어 7월 22일, 즉 초막절 절기 8일째에는 폐회 축제가 있었으며(레 23:33-39), 결국 백성들은 폐회 축제가 끝난 저녁 또는 다음 날, 곧 7월 23일에 각각 자신들의 집으로 돌아갔다(대하 7:10).

자기 장막으로 돌아가는데. 원래 ‘장막’(tent)은 짐승의 가죽으로 만든 이동식 거처로 이스라엘이 광야 유랑 시절에 사용했던 것이다. 그러나 솔로몬 시대 당시는 가나안 정착 이후로도 400여 년이 지난 때로, 이 때는 이스라엘도 집을 짓고 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 절에서 ‘장막으로 돌아가다’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집으로 돌아가다’라는 의미로 사용된(삼하 20:1, 삿 7:8) 관습화된 언어 표현이다(Keil, Hammond).

다윗과 …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모든 은혜로 … 즐거워하였더라. 성전 봉헌식을 마무리 짓는 본 절에서 솔로몬 대신 특별히 다윗의 이름이 거론된 것은, 성전 건축은 다윗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로 실질적인 성전 건축자는 다윗이었기 때문이다(Keil, Bähr). 즉 다윗의 아들 솔로몬은 단순히 다윗의 계획과 이상을 실행에 옮기는 역할을 감당했을 뿐이다(Hammo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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