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새의 아들 다윗이 말함이여. 여기서 다윗은 자신을 ‘이새의 아들’로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이새의 아들’이란 호칭은 사울 왕이 다윗을 비꼬아 말할 때, 나발이 다윗을 비난할 때, 그리고 세바가 다윗을 대항하여 난을 일으켰을 때 각기 사용한 호칭이었다(20:1, 삼상 20:30, 25:10). 따라서 다윗에게 있어서 ‘이새의 아들’이란 호칭은 ‘이스라엘의 왕’이란 호칭과는 대비되는 호칭으로서, 결코 명예로운 것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그의 보잘 것 없음과 비천함을 드러내는 호칭이었다. 따라서 다윗은 이 거룩한 노래를 시작함에 있어서, 자신의 어떠한 자랑거리도 나타내지 아니함으로써 오직 거룩한 하나님의 영광만을 드러내려고 이 호칭을 사용했던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말함이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네움’은 특별히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받은 말씀과 관련된 말이다. 즉, 이 말은 선지자가 그의 메시지를 전하기 전에 갖추었던 서론적 형식인 ‘여호와의 말이니라’에 사용되었던 용어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사실을 통해 이 시가 단순한 서정시가 아니라, 성령의 감동을 받은 다윗이 하나님의 메시지를 시적 형태로 전달한 것임을 알 수 있다(Keil, Pulpit Commentary).
높이 세워진 자 … 기름 부음 받은 자. 다윗은 본래 양 치는 미천한 목동이었으나,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께 선택되어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으로 기름 부음 받아 크게 높아진 자가 되었다는 뜻이다(22:34, 44).
이스라엘의 노래 잘하는 자. 실제 다윗은 양 치는 소년 시절부터 악기 잘 타는 자로 이스라엘에서 소문이 나 있었기 때문에, 사울 왕궁의 수금 연주자로도 활동했었다(삼상 16:16, 19, 23). 그러나 여기서 ‘노래’는 세속적인 음악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찬송을 의미한다(시 81:3, 98:5). 한편 다윗의 이러한 서언은 이전에 발람이 이스라엘과 열방의 미래에 대해 하나님의 메시지를 선포할 때 그 예언 초두에 도입한 서언과 유사하다(민 24:3, 4). 이로 볼 때 다윗 역시 선지자적 입장에서 자신의 노래를 미래적 차원으로 승화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Keil, Fay).
그의 말씀이 내 혀에 있도다. 이는 다윗이 자신의 입술을 주장하는 주체가 자신의 감정이나 의지가 아니라, 여호와의 영 곧 성령임을 고백한 말이다. 즉 지금 자신이 성령의 완전한 지배하에 있음을 고백한 말이다. 이와 같은 성령의 완전한 지배를 ‘성령 충만’이라 부른다(엡 5:18, 19). 그러므로 이것은 다윗의 노래가 신적(神的) 권위를 가질 수 있는 유일한 근거요 충분한 조건이다.
이스라엘의 반석. 이 역시 하나님에 대한 비유적 호칭으로서(22:3, 47), 흔들림 없는 하나님의 불변성(不變性)을 강조한다. 실로 하나님은 거대한 바위 덩어리 같이 영구히 변하지 않으시는 분으로서, ‘반석’(히, 추르)과 같은 속성을 지니신다(22:3 주석 참조). 그러므로 본 시는 다윗 언약(7:8-16)에 기초한 확신의 시로서, 한 번 약속하신 사실을 결코 변개치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불변성 또는 신실성을 강조하고 있다.
사람을 공의로 …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다스리는 자여. 이는 이상적(理想的)인 신정 국가의 왕의 자세를 보여 주는 구절로서 일차적으로는 다윗 자신을,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메시아’를 가리킨다. 즉 신정 국가의 이상적인 왕은 인간 사회에 대해서는 정의롭고(렘 23:5, 33:15), 하나님을 향해서는 경외심(시 7:8)을 갖춘 바로 그러한 신앙 인격자라야 했다. 다윗 왕은 바로 이러한 이상적인 신정 국가의 왕이었다. 그는 백성을 공의로 다스렸으며 하나님을 경외하였다. 따라서 다윗은 역대 유다 왕들을 하나님께서 판단하실 때 그 기준(基準)이 되었다(왕하 14:3, 18:3, 22:2). 이런 점에서 다윗은 그리스도의 그림자였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여기에 묘사된 이상적인 신정 국가의 왕은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진정 예수 그리스도는 종교, 도덕적으로 흠이 없으신 분으로서, 모든 인류를 공의로 판단하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한 참된 의미에서의 이상적인 왕이시다(시 2:1, 2, 겔 34:23, 24, 사 11:3-5).
영원한 언약을 세우사. 여기서 언약은 7장에 기록된 ‘다윗 언약’(7:8-16)을 의미한다. 특별히 여기서 다윗이 ‘영원한 언약’이라고 표현한 것으로 보아, 분명 다윗은 장차 자신의 가계를 통해 오실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세워질 영원한 나라를 바라보았음이 틀림없다.
만사에 구비하고 견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언약을 이루실 만반의 준비를 다 갖추고 계심을 의미한다. 여기서 우리는 언약을 세우실 뿐만 아니라, 그 언약을 이루시기 위해 쉴 새 없이 일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발견할 수 있다.
나의 모든 구원과 … 소원을 어찌 이루지 아니하시랴. 여기서 ‘나의 모든 구원’은 다윗과 다윗의 집에 약속하신 구원을, ‘나의 모든 소원’은 하나님의 언약 위에 기초하고 성령에 감동된 다윗의 거룩한 메시아 소원을 가리킨다. 다윗은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과 그분의 신실성에 근거하여, 이 모든 것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확신하고 있다.
불살리리로다. 여기서 ‘불’은 하나님의 진노와 그로 인한 심판의 상징이다(마 3:10, 13:30, 눅 19:27). 결국 사악한 자의 철저한 멸망이라는 냉혹한 심판 선언으로 마무리 짓고 있는 다윗의 이 노래는 (1) 메시아께서 통치하시고 건설하실 그 나라에서는 불의한 사탄의 세력이 완전 소멸될 것과(사 27:4), (2) 메시아의 의로운 통치에 대적하고, 그 나라를 해(害)롭게 할 무가치한 자에게 임할 심판의 필연성을 깨우치고 있다(마 25:30).
다그몬 사람 요셉밧세벳 … 에센 사람 아디노라고도 하는 자. 같은 내용의 기록인 대상 11:11에는 ‘다그몬 사람’이 ‘학몬 사람’으로, ‘요셉밧세벱’이 ‘야소브암’으로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다그몬’은 ‘학몬’에 대한 오기(誤記)이며, 그리고 ‘요셉밧세벳’은 이름이라기 보다는 ‘밧세벳에 거주하는 자’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그의 본 이름은 ‘야소브암’이며, ‘아디노’는 그의 별명이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그는 시글락에서 다윗과 합류하였으며(대상 12:6), 2만 4천 명으로 구성된 정월 첫반(다윗은 상비군을 12개의 군대로 나누고, 달마다 한 번씩 근무하도록 하는 체번제(替番制)를 실시하였다)의 반장이었다(대상 27:2).
군지휘관의 두목이라. 여기서 ‘군지휘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샬리쉬’는 ‘셋’이란 의미의 ‘샬로쉬’에서 파생된 용어로서, 지휘관 중의 지휘관, 곧 가장 뛰어난 세 장군을 의미한다(F. R. Fay). 이들은 왕이 전쟁에 참전할 때 병거에서 왕과 함께 있었으며, 왕 주변에서 특수 부대(호위병)를 지휘하였다(왕하 9:25, 10:25). 그러나 이들은 요압이나 아마사가 차지했던 전체 이스라엘 군대의 군장, 곧 ‘사르’와는 거리가 있는 직책이었다.
블레셋 사람들이 싸우려고 거기에 모이매. 같은 병행 구절인 대상 11:13에는 ‘바스담밈’에서 접전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바스담밈’은 삼상 17:1에 따르면, ‘에베스담밈’이다(Keil). 이 지명은 ‘피의 경계선’이란 뜻으로, 이스라엘이 블레셋과 무수한 전투를 벌인 곳이었으며, 국경 지역인 엘라 골짜기에 위치해 있었다(R. Payne Smith). 다윗이 골리앗을 죽인 곳도 바로 이곳이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물러간지라. 혹자는 이 구절이 블레셋을 대항하기 위해 진군해 나아가는 이스라엘 군대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고 주장한다(Lange, Smith). 그러나 여기서 ‘물러간지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알라’는 ‘밑에서 위로 올라가다’란 뜻으로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고지(高地) 위로 올라간 사실을 묘사하고 있다(Thenius, Böttcher). 즉, 이스라엘 사람들은 블레셋의 대단한 진용(陳容)에 놀라 높은 고지 위로 도망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10절 후반부에 기록된 ‘백성들은 돌아와서’란 말을 통해서 볼 때 더욱 분명해진다. 이렇게 볼 때, 다윗의 ‘샬리쉬’(3인의 용사) 중 하나인 엘르아살은 혼자서 적과 싸움을 하였던 것이다(Keil).
싸움을 돋우고.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라프’는 ‘조롱하다, 능욕하다’는 뜻으로, 세 용사가 블레셋 군의 비위를 건드려 싸움을 유도해 내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삿 8:15, 삼상 17:10, 26, 36, 45).
크게 이기게 하셨으므로. 원어상으로는 ‘큰 구원을 이루셨으므로’란 뜻이다. 즉 본서 저자는 이날의 승리가 엘르아살을 힘있게 붙드신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사기가 올라.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라하야’이다. 많은 주석가들은 이 말이 ‘레히’라는 지명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Lange, The Interpreter’s Bible, Josephus). 특히 이 말이 반드시 지명(地名)으로 해석되어야 하는 이유는 원문상 뒤이어 지시 부사인 ‘솸’(거기)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Thenius, Ewald). 한편, ‘레히’는 삼손이 나귀의 턱뼈로 블레셋 사람 천 명을 살해한 유서깊은 곳이다(삿 15:9, 14, 17, 19).
녹두나무. 병행 구절인 대상 11:13에는 ‘보리’로 기록되어 있다. 아마도 블레셋인들은 이스라엘의 농작물을 망쳐놓기 위해 이곳에 들어온 듯하다(Pulpit Commentary).
백성들은 … 도망하되. 여기서 ‘도망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누스’는 전투에서 패배하여 달아난다는 의미이다(10:14, 왕상 20:30).
삼십 두목 중 세 사람. 이 세 사람은 앞 절에 언급된 3인이 아니라 아비새와 브나야, 그리고 익명의 한 사람이다(18, 22절). 이들은 둘째 3인으로서 이들의 충성은 첫째 3인(야소브암, 엘르아살, 삼마, 8-12절)에 못지 않았으나 능력면에서 첫째 3인에게는 미치지 못하였다(23절).
아둘람 굴. 이곳은 다윗이 사울 왕의 추격을 피하여 은신한 곳이며, 이곳에서 다윗은 그의 가족 및 다른 동료들과 결합하였다(삼상 22:1, 2). 그 위치는 가드와 베들레헴의 중간, 곧 가드 남동쪽 약 16 km 지점이다. 최근에 성서 고고학자의 탐사로 이곳의 산 중턱에서 약 400명 정도가 거주할만한 큰 동굴 하나가 발견되었다.
때에 블레셋 사람의 한 무리가 르바임 골짜기에 진 쳤더라. 이 구절은 여기에 언급된 블레셋 전투가 5:17-25절에 기록된 전투와 같은 것임을 보여 주고 있다(Keil). 왜냐하면 양쪽 구절 모두에서 블레셋 사람들이 ‘르바임 골짜기’에 진을 쳤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르바임 골짜기’는 예루살렘 남서쪽에 위치한 골짜기이며,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의 경계 지역이었다(5:18). 또한 이 전투는 다윗이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된 직후, 통일된 다윗 왕국의 세력을 우려한 블레셋 족속이 선제 침공함으로써 발발되었다(5:17).
블레셋 사람의 요새는 베들레헴에 있는지라. ‘요새’(히, 맛차브)는 군부대를 의미하는 말이다(13:23, 14:1). 한편 블레셋 사람들은 아마도 길보아 전투(삼상 31:1-7) 때에 베들레헴을 차지한 듯하다.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 물. 성서 고고학자 리터(Ritter)에 따르면, 깊은 우물로부터 솟아나오는 이 물은 시원하고 깨끗한 냉수였다. 그러나 당시 다윗이 진 치고 있던 아둘람 근처의 물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때문에 그는 깨끗하고 시원한 이 물을 갈망했다(The Interpreter’s Bible, Lange). 유대 전승에 따르면, 이 우물은 베들레헴 동북쪽으로 약 15분 걸리는 지점에 위치해 있었으며, ‘다윗의 우물’이란 이름으로 전해 내려왔다고 한다(Keil). 한편, 다윗은 베들레헴 태생으로(16:2, 18), 어려서부터 이 우물 물을 마시고 자랐다.
다윗이 … 그 물을 여호와께 부어 드리며. 이는 다윗이 이 물을 여호와께 전제물로 드린 사실을 묘사하고 있다. 다윗은 이 물이 용사들의 피와 다름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다윗은 부하들의 피와도 같은 이 물을 자신이 마시지 않고 온전히 하나님께 전제물로 바쳐드린 것이다(Smith).
마시기를 즐겨하지 아니하니라. 그 이유는 ‘피를 먹지 말라’(레 17:10)는 율법의 조항을 다윗이 기억하였기 때문이었다. 즉 다윗은 세 용사가 떠온 물은 그들의 생명을 걸고 떠온 것이므로 그것을 그들의 피로 간주했던 것이다(Keil). 레 17:11 주석 참조.
세 사람 중에 이름을 얻었으니. 여기에서 ‘세 사람’은 혹자의 견해처럼 야소브암, 엘르아살, 삼마(8, 9, 11절)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Keil) 아비새, 브나야, 그리고 익명의 뛰어난 한 용사를 가리킨다. 따라서 ‘아비새’는 제2 용사단(히, 샬리쉬)의 두목이 되었다는 의미이다.
용맹스런 일. [히, 라브 페알림] 직역하면 ‘위대한 행위, 큰 일’이란 뜻이다. 구체적으로 그 ‘큰 일’은 여기서 세 가지로 제시된다. 즉 (1) 모압 아리엘의 아들 둘을 죽인 행위, (2) 눈 올 때에 함정에 내려가서 사자를 죽인 행위, (3) 막대기로 창을 가진 장대한 애굽 사람을 죽인 행위 등이다.
모압 아리엘의 아들 둘을 죽였고. 여기서 ‘아리엘’이 누구인지에 대한 견해는 둘로 나뉜다. (1) 혹자는 ‘아리엘’이 ‘신(神)의 사자(獅子)’란 의미로서, ‘아리엘의 아들 둘’은 ‘사자 같이 용맹스런 두 용사’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Keil, Lange). 또한 이에 대한 증거로서 지금도 아랍인들과 페르시아인들은 매우 뛰어난 용사를 가리켜 ‘아리엘’이라 부른다고 한다(Bochart). (2) 반면 혹자는 ‘아리엘’이 모압 왕의 이름일 것이라고 추측한다(Smith, Ewald, Thenius). 따라서 이 두 사람은 모압 왕 아리엘의 아들들(왕자들)일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원문상으로, 본 구절에는 ‘아들’이란 단어가 들어있지 않다. 따라서 이 견해를 따를 경우 ‘아리엘의 두 사람’이라는 애매한 말이 된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2)의 견해 보다는 (1)의 견해를 따르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듯하다.
눈이 올 때에 … 사자 한 마리를 쳐죽였으며. 팔레스타인의 사자는 페르시아 산(産) 사자에 속한다. 한편 구약 시대에 사자의 출현은 매우 흔했다. 따라서 성경은 사람이 사자에게 물려 죽은 사례들을 여려 군데에서 기록하였다(왕상 13:24, 20:36, 왕하 17:25). 이 사자들은 추운 날 눈이 많이 내려 먹이가 없어지면 민가로 내려와 사람들을 먹이로 삼았다. 따라서 사람들은 이러한 식인 사자를 잡기 위해 함정(큰 구덩이)을 만들곤 하였는데, 그 때에 갈고리와 같은 도구를 사용하였다(겔 19:4, 8). 그런데 ‘브나야’는 맨몸으로 ‘함정’(큰 구덩이)으로 뛰어들어가 사자를 때려잡은 것이다(삿 14:6, 삼상 17:34-36).
아사헬은 삼십 명 중의 하나요. ‘아사헬’은 요압과 아비새의 아우이자 다윗의 조카로, 그 발이 들노루 같이 빠른 용사였다(2:18). 그는 이스보셋의 군장 아브넬을 추격하다가 그의 창에 찔려 죽었다(2:23). 그런데 그가 삽십 인 중에 속하였다고 하였으므로 삼십 인의 구성은 최소한 그의 죽음 이전에 이루어진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아사헬은 다윗의 헤브론 치세 때 곧 사울 왕가의 이스보셋과의 내전 중에 전사했으므로, 30인의 구성은 다윗이 유다 지파의 왕으로 즉위한 직후 얼마 후에 이루어졌을 것이다(The Interpreter’s Bible).
엘하난. 여기 도도의 아들 ‘엘하난’(대상 11:26)은 21:19의 야일의 아들 엘하난과는 다른 인물이다(Keil).
엘리가. 역대상에는 그의 이름이 빠져 있다. 아마도 ‘엘리가’는 삼훗과 함께 하룻 사람이므로 생략되었을 것이다(Lange, Pulpit Commentary).
드고아 사람 익게스의 아들 이라. ‘드고아’는 베들레헴 남동쪽의 요새화된 성읍이며, 유다 광야에 속해 있다(대상 2:24, 암 1:1). 그리고 ‘이라’는 6월 장관이었다(대상 27:9). 한편, 그는 다윗의 대신이었던 야일 사람 ‘이라’와는 다른 인물이다(20:26).
후사 사람 므분내. ‘므분내’는 ‘십브개’의 오기(誤記)이다. 왜냐하면 21:18과 병행 구절인 대상 11:29에서 모두 ‘십브개’로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십브개’는 블레셋 거인 ‘삽’을 죽였으며(21:18), 다윗 군대의 제8월 장관이었다(대상 27:11).
느도바 사람 마하래. ‘느도바’는 베들레헴 부근 동북쪽에 위치한 곳이며(스 2:22, 느 7:26), 이곳에는 레위인의 향리가 있었다(대상 9:16). 오늘날의 ‘베이트 나티프’(Beit Nattif)로 추정되나(Robinson), 확실치는 않다. 한편 ‘마하래’는 10월 장관이었으며(다상 27:13), 유다 지파 출신이었다.
기브아 사람 리배의 아들 잇대. 여기 베냐민 사람 ‘잇대’는 가드 사람 잇대(15:19)와 다른 인물이다. 대상 11:31에서는 ‘이대’로 소개되어 있다.
가아스 시냇가에 사는 힛대. ‘가아스’ 시내는 에브라임 산지에 있는 가아스 산의 한 시내를 의미한다(수 24:30). 따라서 ‘힛대’는 에브라임 지파이다(Keil). 한편, 대상 11:32에서 그는 ‘후래’로 소개되어 있다. 아마 이러한 착오는 히브리어 알파벳 ‘달렛’과 ‘레쉬’의 혼동으로부터 야기되었을 것이다(Smith).
바르훔 사람 아스마웹. ‘바르훔’은 ‘바후림’으로 여겨진다(Keil, Lange, Smith). ‘바후림’은 예루살렘 동북쪽 약 6 km 지점이며, 이곳은 베냐민 지파의 성읍이었다(3:16, 16:5). 한편 대상 11:33에서는 ‘바하룸’으로 나타나 있다.
야센의 아들 요나단. 병행 구절인 대상 11:34에는 ‘하랄 사람 사게의 아들 요나단’으로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는 역대기의 기록이 정확한 것으로 보인다(Keil).
아랄 사람 사랄의 아들 아히암. 대상 11:35에서 ‘아히암’은 ‘사갈’의 아들로 소개되어 있다. 그리고 ‘아랄’ 사람도 역대기에서는 ‘하랄’ 사람으로 표기되어 있다.
길로 사람 아히도벨의 아들 엘리암. 길로 사람 ‘아히도벨’은, 한때 다윗의 모사였으나 배반하고 압살롬의 반역에 가담한 ‘아히도벨’을 가리킨다(15:12). 또한 ‘엘리암’은 우리아의 처 밧세바의 아버지였다(11:3, 23:34, 대상 3:5).
아랍 사람 바아래. ‘아랍’은 헤브론 근방에 있는 유다의 산악 지대이다(수 15:52). 한편, 대상 11:37에서는 “에스배의 아들 나아래’로 소개되어 있다.
갓 사람 바니. 대상 11:38에서는 ‘하그리의 아들 밉할’이라고 소개하였다.
요압의 무기를 잡은 자 브에롯 사람 나하래. ‘브에롯’은 기브온의 성읍이었으며 후에 베냐민 지파에 속하였다(수 9:17, 18:25, 삼하 4:2). 따라서 ‘나하래’는 기브온 족속일 가능성이 있다(The Interpreter’s Bible). 한편, ‘무기 잡은 자’란 의미는 ‘부관, 경호원, 호위병’이란 의미이다(삼상 14:1, 16:21, 31:4).
총수가 삼십칠 명이었더라. 본문(24-39절)을 따를 경우 용사의 수는 도합 31인이 된다. 그런데 여기 37인이라는 수는 다음과 같이 산정되었을 거시다. 첫째, (1) 첫 3인의 용사단(8-12절)과 (2) 둘째 3인의 용사단(13-23절) 및 (3) 셋째 그룹의 31인의 용사단(24-39절)의 수효를 합하여 산정했을 경우이다(R. Payne Smith). 혹은 둘째, (1) 첫 3인의 용사단(야소브암, 엘르아살, 삼마, 8-12절)과 (2) 둘째 3인의 용사단(13-23절) 중 그 이름이 밝혀진 2명(아비새, 브나야)과 (3) 그리고 셋째 그룹(24-39절) 중 수정된 본문(34절)에 따를 경우에 산정되는 32인의 수효를 합한 경우이다(Keil). 한편 이 용사들의 명단에는 ‘요압’의 이름이 빠져 있다. 그 이유로서 우리는 (1) 요압이 전군(全軍)의 군대 장관이었기 때문에 생략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Lange, The Interpreter’s Bible). (2) 그러나 또한 요압은 헌신적으로 충성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아브넬과 압살롬, 그리고 아마사 등을 살해하는 무자비한 행동을 하였고, 아울러 솔로몬 왕을 대적하는 반란에 가담하였기 때문에 본 명단에서 삭제되었으리라는 추측도 무시할 수 없다(Wycliffe Bible Commentary).
Previous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