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 주석, 사무엘하 1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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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 여호와께서 나단을 다윗에게 보내시니. 하나님께서 선지자 나단을 다윗에게 보내신 때는 다윗이 범죄한 이후(11:4, 5) 약 1년 정도는 되었을 때이다. 왜냐하면 그 때는 이미 밧세바가 다윗의 아이를 해산한 때였기 때문이다(14절).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처럼 다윗이 범죄한 후 즉시 견책하지 않으시고 약 1년 후에 견책하신 까닭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1) 다윗으로 하여금 죄로 말미암는 영적인 고통을 경험케 하여 다시는 죄를 범하고자 하는 욕망을 갖지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시 32:3, 4). (2) 다윗의 완악해진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여 열려지기를 기다리시기 위하여(시 32:5). 아무튼 이처럼 여호와께서 다윗을 회개시키기 위해 선지자 나단을 보내신 사실은 하나님께서 먼저 범죄한 인간에게 ‘찾아오시는 하나님’이심을 보여 준다(겔 34:11, 12). 사실 만약 하나님께서 인간을 찾지 않으셨다면 인간은 여전히 죄와 절망의 자리에 버려진 상태에 있을 것이다(롬 1:28). 한편 나단은 앞서 다윗이 성전 건축을 상의한 적이 있는 선지자이다(7:2). 특히 왕의 권세 앞에서도 당당히 진리의 말씀을 외치며 죄악을 지적하는 이 선지자의 용기는 타락한 세상 가운데서 선지자적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 성도들에게 새로운 힘과 소명감을 고취시켜 준다(행 4:13-22, 고전 4:1, 2).

한 성읍에 두 사람이 있는데. 이는 다윗의 무서운 범죄를 지적하기 위하여 나단 선지자가 사용한 비유이다. 나단이 이처럼 비유를 들어 다윗을 책망하고자 했던 이유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1) 한 나라의 왕인 다윗의 권세에 대한 직접적인 충돌을 피하여 다윗의 완고해짐을 막기 위함이다. (2) 우회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다윗 스스로가 자신의 죄를 기억하고 고백하도록 유도하기 위함이다. (3) 자신의 죄의 실상에 대해 둔감한 다윗에게 비유를 통해 그 죄의 참담한 실상을 분명히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처럼 비유는 완악하고 어리석은 죄인을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는 데 아주 효과적인 방법이다(사 5:1, 겔 17:3, 19:2, 3, 24:3, 마 13:34).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한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적절한 비유까지 예비하신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느낄 수 있다.

 

12:2 그 부한 사람은 양과 소가 심히 많으나. 여기서 ‘부한 사람’은 바로 다윗을 의미한다. 그리고 ‘양과 소’는 다윗의 수많은 처첩(妻妾)을 의미한다(3:2-5, 5:13-16, 대상 3:1-9). 나단이 이러한 비유를 통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는 이처럼 다윗이 많은 아내들을 거느리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만족하지 아니하고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에게 눈길을 돌렸다는 점(3, 4, 9절, 11:2-5, 27)이다 (Matthew Henry’s Commentary).

 

12:3 가난한 사람은 … 사서 기르는 작은 암양 새끼 한 마리뿐이라. 여기서 ‘사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카나’는 ‘한 개인의 사유 재산으로 획득한다’는 의미이다. 즉, 이 말에는 개인의 소유 개념이 강하게 반영되어 있다(창 4:1, 잠 4:7, 15:32, 16:16, 19:8, 룻 4:9, 10). 따라서 이 말은 작은 암양 새끼 하나가 어느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한 가난한 사람의 절대 소유임을 강조해 준다. 한편, 혹자는 여기서의 ‘작은 암양 새끼’에 대하여 단순한 재산의 개념으로 이해하려 하였다(Lange). 즉, 고대 근동 사람들은 가축을 그들의 부의 척도로 삼고 있었다는 지론(持論)이다(창 30:25-43, 민 32:1, 욥 1:3). 그러나 여기서 ‘작은 암양 새끼’는 단순한 재산 이상으로 주인의 온갖 사랑을 받고 재롱을 떠는 애완용 가축을 의미한다(Keil, Pulpit Commentary). 그 근거로서 우리는 근동 지방에서는 지금도 애완용 양을 키우는 관습이 있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Keil).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사실들을 종합해 볼 때 다음 두 가지 사실을 알게 된다. (1) 이 ‘작은 암양 새끼’는 다른 사람이 빼앗아갈 수 없는 오직 ‘가난한 사람’의 고유 소유였다는 점이다. (2) 또한 그것은 가난한 자가 극진히 사랑하고 길렀던 애완용 양이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러한 비유는 오직 하나뿐인 자신의 아내 밧세바(11:3)에 대한 우리아의 사랑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의 자식과 함께 자라며 … 딸처럼 되었거늘. 이는 곧 가난한 자에게 있던 암양 새끼 한 마리가 그에게 있어선 단순한 애완용 동물의 차원을 넘어 그 자신의 유일한 꿈과 희망이 담겨 있는 고귀한 존재임을 의미한다.

자라며 … 먹으며 … 마시며 … 누우므로. 암양 새끼와 가난한 주인 간의 동고동락 관계를 묘사한 말로서 곧 우리아와 밧세바 간의 애정 관계를 표현한 것이다. 따라서 다윗이 우리아의 가정을 파괴하기 이전에는 비록 물질적으로는 풍족하지 못하였지만 사랑과 희망이 넘치는 화목한 가정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12:4 행인 … 행인 … 자기에게 온 사람. 혹자는 이와 같이 열거된 동의어(同義語)들이 인간의 탐심의 발전 과정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주장한다(Augustine, Wordsworth). 즉, 처음의 ‘행인’(히, 헬렉크)은 탐심의 초기 단계로서 잠깐 머물다 떠나는 단계이며, 둘째의 ‘행인’(히, 오레아흐)은 보다 진보된 단계로서 상당히 오래 머무는 단계이며, 셋째의 ‘자기에게 온 사람’(히, 이쉬 하바 엘라우)은 완전히 탐심이 그 사람 속에 자리잡고 떠나지 않는 단계를 의미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그 일련의 동의어들은 어디까지나 같은 의미를 수사학적으로 다양하게 기술한 것일 뿐이다(Lange, Keil), 왜냐하면 본 절의 초점은 부자가 한 행인을 위해 가난한 자의 양 새끼를 빼앗은 강탈 죄를 부각시키는 데 있는 것이지 인간의 탐심이 어떻게 발전하는지 그 과정을 보여주는 데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편, 여기서 ‘행인’은 사막 지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여행객을 가리킨다. 히브리 관습상 이들은 어느 집에 가든 하룻밤 지낼 자리와 식사를 요청할 수 있었는데 그 경우 집주인은 그들의 요구에 응해 주어야 했다. 하지만 본 절에서 부자가 이러한 나그네를 대접하기 위해 자신의 소유를 사용하는 대신 오히려 가난한 자의 애지 중지하는 ‘암양 새끼’를 빼앗았다는 사실은 그의 소행이 마땅히 가중 처벌에 해당하는 악독한 범행임을 보여 준다.

 

12:5 다윗이 … 노하여. 나단의 비유가 다윗의 잠자던 양심을 일깨우는 데 성공하였음을 보여 주는 구절이다. 그렇지만 이는 분명히 자기 눈의 들보는 깨닫지 못하면서 남의 눈의 티끌에만 민감히 반응한 다윗의 모순된 태도가 아닐 수 없다(마 7:3, 4).

여호와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11:11 주석 참조.

이 일을 행한 그 사람은 마땅히 죽을 자라. 다윗은 이 말을 통하여 간음(11:4)과 살인(11:15)을 저지른 자신의 죄악에 대하여 스스로 율법에 따른 형벌(레 20:10, 24:17)을 선고한 셈이다.

 

12:6 네 배나 갚아 주어야 하리라. 네 배는 도둑에 대하여 율법이 규정한 배상 기준이다(출 21:37, 22:1). 지금까지 율법을 무시하고 범행을 저지른 다윗이 율법의 기준을 언급한 것은 너무나도 분명한 모순이다. 우리는 여기서 자신의 큰 죄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관대하고 타인의 적은 죄에 대해서는 너무나도 엄격한 타락한 인간성을 보게 된다.

 

12:7 당신이 그 사람이라. 지금까지의 나단의 비유를 남의 일로만 알고 정죄하던 다윗의 무딘 양심을 결정적으로 일깨워 주는 나단 선지자의 신적(神的) 선포이다. 즉, 나단은 자신의 사사로운 권위가 아닌 하나님의 엄숙한 권위로써 이제 범죄한 다윗을 정죄한다. 우리는 이러한 나단 선지자의 직고(直告)를 통하여 참된 선지자의 사명과 오늘날 교회의 선지자적 사명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된다. 그러나 이같은 사명의 배후에는 무엇보다 상대방을 사랑하는 관용의 정신이 있어야 하며 그렇지 못할 때에는 남을 판단하는 잘못을 범하게 된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마 18:21, 22).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 구원하고. 여기서부터 8절까지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다윗에게 베푸셨던 은총에 대한 언급이다. 즉 본 절과 8절은 어떠한 범죄를 저지르지 않고도 만족하게 지낼 수 있었던 다윗의 축복 받은 형편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이같은 사실에도 불구하고 다윗이 우리아를 죽이고 밧세바를 강탈한 행위(11장)는 정상 참작조차 할 수 없는 악랄한 범죄였다고 규정지을 수 있다. 그뿐 아니라 그러한 다윗의 범죄는 친히 풍성한 은혜를 체험한 자로서 그 은혜의 하나님을 배반한 배은 망덕한 행위였다고 할 수 있다.

 

12:8 네 주인의 집을 네게 주고. 여기서 ‘집’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בַּיִת 바이트’는 영구적인 거처, 가족이란 의미 이외에도 ‘나라’를 상징한다. 본 절에서도 이 말은 나라를 의미하며, 본 절은 한 때 다윗의 주인이었던 사울의 나라를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옮겨주신 것을 가리킨다(삼상 13:13, 14, 15:28, 29). 7:11 주석 참조.

네 주인의 아내들을 네 품에 두고. 이는 고대 근동 지방에서 정권이 교체될 때, 정복 군주가 이전 군주의 후궁들을 모두 거느렸던 당시의 관습을 언급한 것이다. 3:7 주석 참조. 그러나 이 말은 다윗이 사울을 대신하여 새로운 이스라엘의 왕이 된 사실을 의미할 뿐(2:1-4, 5:1-5), 다윗이 실제로 사울 왕의 전처들을 차지했음을 입증하는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성경 기록에 따르면(3:7, 삼상 14:50), 사울 왕에게는 본처 한 명과 후처 한 명만 있었는데, 그 중 한 명은 아브넬이 차지한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Keil, Lange, Pulpit Commentary).

부족하였을 것 같으면 내가 네게 … 더 주었으리라.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필요한 것이라면 언제든지 부족함 없도록 채워주셨는데도 불구하고 다윗이 과욕을 부려 범죄한 것을 책망한다. 즉 다윗은 무엇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탐욕과 정욕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범죄한 것이다. 성경이 무엇보다 탐욕과 정욕을 경계하도록 교훈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니, 귀 있는 자는 듣고 마음에 새겨 삼가야 할 것이다(잠 5장, 눅 12:15).

 

12:9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다윗이 범죄하게 된 근본 원인이다. 즉 그는 하나님의 율법을 경(輕)히 여겼기에 그에 따를 하나님의 진노를 생각치 않고 탐욕(11:2, 3)과 간음(11:4), 살인죄(11:15, 17)를 저지를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다윗에게 하나님께서 진노를 발하신 것(10-12절)은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롬 1:18)란 말씀이 정확히 적용된 경우가 아닐 수 없다.

악을 행하였느냐. 여기서 ‘악’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רַע 라아’는 하나님의 보응이 반드시 뒤따르는 악독한 죄를 의미한다. 11:27 주석 참조.

암몬 자손의 칼로 죽이고. 여기서 ‘죽이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라그’ 는 흔히 적개심을 품고 누군가를 살해하는 고의적인 행동을 뜻한다(수 10:11, 13:22, 사 10:4, 14:20). 따라서 본 절은 암몬 자손의 칼에 의해 우리아가 죽도록 획책한 다윗의 범죄는 왕과 신하 간의 신의(信義)의 관계를 고의적으로 끊어버린 도저히 용서받지 못할 죄임을 보여 준다. 한편, 우리는 하나님께서 다윗의 범죄의 성격에 대하여 이렇게 정확히 규명하신 사실을 통하여 인간의 범죄의 결과 뿐만 아니라 그 범죄의 동기와 원인까지도 간파해 내시는 하나님의 초월적인 통찰력을 재 확인하게 된다(대상 28:9).

 

12:10 칼이 네 집에서 영원토록 떠나지 아니하리라. 다윗 당대 뿐 아니라 다윗의 후손 대부분이 전쟁과 살인 사건에 휘말려 들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데 이 같은 예고는 훗날 암논의 죽음(13:28, 29), 압살롬의 반란 사건(18:14), 그리고 아도니야의 죽음(왕상 2:24, 25)을 통해 그대로 이루어졌다. 또한 솔로몬 사후 이스라엘 통일 왕국이 남북으로 분열되어 서로 반목 질시하게 된 것도 넓게는 이같은 예언의 성취로 볼 수 있다. 아무튼 이러한 다윗가의 재앙은 무고한 우리아를 살해한 죄(11:15)에 상응하는 하나님의 형벌이었다는 의미를 지닌다.

 

12:11 네 집에 재앙을 일으키고. 여기서의 ‘재앙’ 역시 다윗의 간음죄에 상응하는 형벌이다. 이에는 암논의 근친 상간(13:1-19), 그로 인한 압살롬의 암논 살해 사건(13:20-29) 등을 들 수 있다.

네 아내들과 더불어 백주에 동침하리라. 이 같은 예고 역시 압살롬이 다윗에게 반역한 후 이스라엘 온 백성이 보는 앞에서 다윗의 후궁들과 더불어 동침한 사건(16:21, 22)으로 인해 온전히 성취되었다.

 

12:12 너는 은밀히 행하였으나 나는 … 백주에 이 일을 행하리라. 다윗이 은밀하게 밧세바와 동침하고(11:4) 그 죄악의 열매를 감추려(11:5) 부지런히 애썼듯이(11:6-27) 인간의 모든 범죄는 사람의 눈을 피해 은밀하게 저질러지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그 모든 죄악은 숨겨질 수 없는데 그 까닭은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모든 인생을 하감(下鑑)하사 저희 모든 행사를 감찰하시기 때문이다(시 33:13-15). 따라서 인간의 모든 죄악은 하나님 앞에서 반드시 정죄당하고 심판당할 날이 있는데 그 같은 하나님의 심판은 공개적이고 공의로운 심판이 될 것이라는 것이 성경의 증언이다(전 12:14, 계 20:11-15).

 

12:13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비록 간단한 한 마디이지만 다윗의 진심이 응결되어 있는 진정한 회개요 자복이다. 즉 다윗은 자신의 범죄가 인간을 상해(傷害)한 것이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법을 무시한(9절) 대신(對神) 관계에서의 죄악이었음을 자백한 것이다. 이때 다윗이 지은 회개의 시(詩)가 곧 시편 32, 51편이다. 아무튼 이러한 다윗의 회개는 참된 회개의 전형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 특성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다윗은 나단 선지자의 책망을 들은 즉시 회개하였다(Lange). 이는 사울의 경우와 달리 그가 선지자의 대언적(代言的)인 말씀을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받았다는 증거이다. (2) 다윗의 회개는 매우 짧았다(Keil). 즉, 그의 회개에서 자신의 죄에 대하여 변명하려는 흔적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다(삼상 15:15, 20, 21, 시 51:3). (3) 다윗의 회개는 자신의 죄에 대해 숨김없이 토설(吐說)한 것이었다(시 32:5). 즉 그는 어떻게든 자신이 지은 죄악 중 하나만이라도 숨기려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모든 죄를 다 내어 놓고 사유하심을 간구한다(시 51:3, 9). (4) 다윗의 회개는 겸손한 회개였다(Rust). 즉, 그는 일개 선지자의 찌르는 듯한 말 앞에서 왕의 신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모든 죄를 어린 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고백하였다(시 51:1, 2).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 여기서 ‘사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바르’는 ‘치우다, 제거하다’란 뜻이다. 이는 곧 하나님께서 인간에게서 죄를 거두어 가신 후 본래 죄 없었던 것처럼 여겨 주시는 것을 가리킨다. 그런데 다윗의 간음죄와 살인죄는 특히 사형에 해당하는 중죄였으므로(레 20:10, 24:17) 하나님의 이러한 사죄하심은 곧 그의 목숨을 살려 주시는 은총이었다. 따라서 특별히 본 절에는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라는 말이 첨가되어 있는 것이다. 한편 이처럼 죄는 미워하고 반드시 심판하셔도 회개하는 죄인에게 대해서는 사유의 은총을 베푸시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한 특성이다(겔 18:23). 그러나 다윗의 경우에 있어서 이러한 하나님의 사죄의 은총은 하나님의 부정적(父情的)인 사랑 외에도 다윗 언약(7:4-17)에 대한 하나님의 성실하심에 기초한 것이었다는 또 다른 특징을 지닌다(Keil).

 

12:14 여호와의 원수가 … 얻게 하였으니. 이는 다윗의 범죄가 단순히 개인적인 차원의 범죄가 아니라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자의 범죄로서 신정 국가의 존립을 위태롭게 한 공적인 성격의 범죄였음을 알려 준다. 즉,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율법을 그 특징으로 삼는 신정 국가인데(출 19:5, 6, 신 6:1-9) 그 나라의 왕이 율법을 어기므로 하나님의 원수들에게 비방거리를 마련해 준 것이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비방거리를 없애기 위해 나라의 왕에게도 율법에 따라 공평하게 형벌하신다는 사실을 외적으로 보여 줄 필요가 있었다. 한편, 여기서 ‘여호와의 원수’에 대하여 혹자는 이방인들(Lange), 혹자는 이스라엘 내의 불신자들을 가리킨다고 해석한다(Pulpit Commentary). 그러나 이는 꼭 그렇게 보기보다는 이방인과 이스라엘인을 막론하고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반대하는 모든 자들을 포괄적으로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무난할 것이다(Keil, Hertzberg).

아이가 반드시 죽으리이다. 13절의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라는 말과 대조를 이루는 구절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죄를 사유(赦宥)해 주신 대신 당신의 공의를 이루며 영광을 회복하시기 위해 다윗의 죄의 열매인 ‘아이’(11:5, 27)를 요구하신 것이다(엡 5:2, 벧전 3:18). 이는 곧 그리스도교의 대속(代贖)의 진리를 예시해 주는것으로 하나님께서 죄인인 인간들을 사유해 주시는 대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요구하신 것과 같다(히 9장).

 

12:15 아이를 여호와께서 치시매. 14절에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징계가 이제 임하였음을 보여 주는 구절이다. 그런데 이는 보다 광의적(廣義的)으로 이해할 때 10-13절에서 예고된 다윗가의 재난이 이제 시작되고 있음을 암시해 주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12:16 다윗이 … 안에 들어가서 밤새도록 땅에 엎드렸으니. 여기서 ‘안에 들어가서’란 말은 다윗이 성소에 들어갔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께 철저한 기도를 드리기 위해 조그마한 골방(마 6:6)에 들어갔음을 의미한다(Lange, Keil, Pulpit Commentary). 그런데 이처럼 다윗이 골방에서 7일 동안(18절) 금식 기도를 드린 것은 자기의 죄 때문에 죽어가는 아이(14, 15절)를 하나님의 은총에 호소하여 살리기 위함이었다(22절). 특히 본 절에서 다윗이 ‘밤새도록 땅에 엎드려 있었다’는 표현은 그가 하나님께 구할 자격이 없으므로 오직 하나님의 자비하신 은총만을 기다린 애절한 형편을 잘 보여 준다.

 

12:17 그 집의 늙은 자들. 이에 대해 혹자는 이들이 다윗의 숙부들과 나이 많은 형들이었다고 주장한다(Ewald). 그러나 이는 확실한 근거없는 추측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여기서 ‘늙은 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자켄’은 성경에서 ‘장로’(창 50:7, 삼상 4:3, 왕상 8:1, 3)로도 번역된 말로서 ‘가장 나이 많고 신뢰받는 자’를 의미하기 때문이다(창 24:2). 따라서 여기서 이 말은 다윗의 신하 중 다윗에게 가장 신뢰받는 원로급 인사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Lange, Clerius, Keil).

 

12:18 왕이 상심하시리로다. ‘상심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사 라아’ 는 직역하면, ‘악을 행하다’이다. 따라서 이 말은 단순히 다윗 왕이 아이의 죽음으로 인해 괴로워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Lange), 한걸음 더 나아가 그가 자신의 건강을 해치는 어떤 행동을 하는 것까지도 의미한다(Keil, Hertberg).

 

12:19 없음.

 

12:20 다윗이 땅에서 일어나 … 먹은지라. 다윗의 신복들의 염려(17, 18절)와는 정반대로 다윗이 아이의 죽음에 대해 아무런 동요도 없이 오히려 기운을 차리는 장면이다. 따라서 이러한 다윗 왕의 의외적인 행동은 학자들간에 논란을 일으키기에 충분한데 대체로 다음과 같은 주장들이 제시되고 있다. (1) 혹자는 다윗 왕이 애초부터 아이를 위해 기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죄를 참회하기 위해 기도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Pulpit Commentary). 그러나 이 주장은 다윗 왕이 아이를 위해 기도했다고 한 본 장의 분명한 기록과 대치된다(16, 22절). (2) 또한 혹자는 다윗 왕이 그의 불행을 불굴의 의지로 딛고 일어선 것이라고 해석한다(Hertzberg, Schulz, Buddle). 그러나 이 해석은 다윗 왕이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식음(食飮)을 전폐한 채 하나님께 매달린 사실의 의미를 분명하게 보여주지 못한다. (3) 다윗 왕의 이러한 행동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겸손하게 그대로 받아들인 신앙적 행동이라고 보는 견해이다(Lange). 즉, 다윗은 지금까지 아이를 위해 금식하고 기도했으나 이제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게 드러났으니 죽은 아이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그대로 받아들였다는 주장이다. 이는 본 장의 기록과 일치할 뿐더러(22, 23절) 이후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죽은 아이 대신 솔로몬을 허락하신 사실과도 부합되므로(24, 25절) 타당한 견해라 할 수 있다.

 

12:21 없음.

 

12:22 여호와께서 … 살려 주실는지. 다윗이 지금껏 금식 기도한 것(16, 17절)은 아이를 살리기 위해, 좀더 정확하게는 아이의 생명을 거두어 가리라 하셨던 하나님의 뜻(14절)을 돌이키고자 하였음을 보여 주는 구절이다. 즉 다윗은 자신의 죄 때문에 고통 중에 신음하며 죽어가고 있는 아이(15절)를 보고 견딜 수 없는 안타까움과 아픔에 젖어 하나님께 자비를 간구치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12:23 지금은 죽었으니. 한번 떠난 인간의 생명은 돌이킬 수 없으며 또한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하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따라서 다윗은 죽은 아이에 대해 계속적으로 미련을 가지는 대신 하나님의 최종적 결정에 스스로를 복종시키므로 세상적 욕심을 버린 것이다. 이처럼 비록 범죄하였지만 회개함과 동시에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다윗의 자세는 매우 모범적이다. 즉 다윗은 인간의 생명까지도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음을 확신하므로 이제 자신의 아이의 죽음에 직면하여서도 평안을 유지할 수 있었다(욥 1:21, 시 36:9, 42:8).

나는 그에게로 가려니와 … 아니하리라. 이는 자신의 아이가 이제 죽어 행복한 곳에 갔을 것이라고 하는 다윗의 확신이 아니다. 대신 이는 단지 아이가 죽은 자들의 거처인 스올에 들어갔으므로 이제 다윗 자신은 생전에 아이를 만날 수 없다는 그의 생각을 피력한 말이다(Lange, Rust, Keil, Clericus). 즉, 구약 시대 당시 히브리인들은 자신들이 죽어서 곧장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침묵의 세계인 스올로 내려간다고 믿었다.

 

12:24 그의 아내 밧세바. 본서 기자는 이제 밧세바를 더 이상 ‘우리아의 아내’(15절, 11:26)라 하지 아니하고 ‘다윗의 아내’라고 부르고 있다. 이는 이제 하나님께서 밧세바를 다윗의 아내로 인정하셨음과 솔로몬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적자(嫡子)라는 사실을 증거해 준다.

위로하고. 이 말은 단순히 정신적인 차원의 위로 뿐만 아니라 실제적인 위로의 행위까지도 포함한다. 즉, 다윗 왕은 아이를 잃고 슬픔에 빠져 있는 그의 처 밧세바에게 새로운 아이를 낳아 주기 위한 실제적인 행동을 함으로써 그녀를 위로한 것이다. 따라서 이 말은 이어지는 ‘동침하였더니’란 말과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Hertzberg, Caspari).

솔로몬이라 하니라. 여기서 ‘솔로몬’(히, 쉘로모)은 ‘평강의 사람’이란 뜻이다. 다윗이 그의 이름을 솔로몬이라고 지은 동기에 대하여, 혹자는 이제 이 아이의 시대에는 다윗 자신의 시대에 있었던 것과 같은 피흘리는 처절한 전쟁(8, 10장)이 사라지고 하나님의 은혜로 평화의 시대가 도래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렇게 이름을 지은 것이라고 주장한다(Lange, Pulpit Commentary). 그러나 우리는 솔로몬이라고 하는 아이가 자신의 범죄에 대한 다윗의 진실한 회개 이후에, 하나님께서 다윗과 밧세바 가정에 사랑의 표시로 주신 선물이었다는 사실을 주목해 보아야 한다. 따라서 다윗이 그의 새 아이를 솔로몬이라고 이름한 것은 솔로몬의 출생이 하나님과 그 가정 사이에 ‘화목’관계가 회복된 사건으로 이해하였기 때문임이 분명하다(Keil).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를 보내어 이 아이의 이름을 지어주신 것(25절)에 의해서도 뒷받침된다. 그런데 이같은 솔로몬은 실상 밧세바가 다윗에게 낳은 넷째 아들이다(5:14, 대상 3:5). 그러나 여기서 솔로몬이 앞서 죽은 아이(18절)의 바로 다음에 태어난 것처럼 기술된 까닭은 아마 다음 두 가지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1) 하나님께서 솔로몬을 특별히 사랑하셨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이다(25절). (2) 장차 다윗의 왕위를 이을 계승자로서 솔로몬을 부각시키기 위함이다(왕상 1장). 한편, 본 장에서 솔로몬의 출생 기사는 랍바 성 함락 사건(26-31절)보다 앞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실상은 솔로몬의 출생 사건이 랍바 성의 함락 사건 이후에 있었을 것으로 확실히 여겨진다. 왜냐하면 이스라엘군의 랍바 성에 대한 포위 공격은 밧세바가 죽은 아이(18절)을 잉태하였을 때(11:5) 이미 진행되고 있었으며(11:1, 14-25) 솔로몬의 출생은 그로부터 약 2년 후의 일이기 때문이다(Keil, Lange, Clericus, Thenius). 따라서 우리는 본 기록 역시 연대별로 기록된 것이 아니라 앞의 내용과 연결시키기 위해 주제별로 기록된 것임을 알 수 있다. 5:11 주석 참조.

 

12:25 선지자 나단을 보내. 여기서 ‘보내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샬라’는 ‘어떤 특수한 임무를 맡기어 보낸다’는 의미를 가진다(민 13:16, 27, 14:36, 16:28, 29, 렘 19:14, 25:17, 시 105:26, 28, 사 55:11, 61:1). 따라서 나단 선지자가 다윗을 내방한 것은 다윗 가정에 대한 하나님의 새로운 뜻을 알리기 위한 직무 수행이었음을 알 수 있다(Keil).

그의 이름을 여디디야라 하시니. 여기서 ‘여디디야’란 이름은 ‘여호와의 사랑하심을 입은 자’란 뜻이다. 이 이름은 ‘사랑을 입은 자’라는 뜻의 ‘다윗’과 내용상 같은 점을 시사해 주기에 충분하다. (1) 하나님께서 회개한 다윗을 전보다 더욱 사랑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 솔로몬을 선물로 주셨다는 사실이다(Keil, The Interpreter’s Bible). (2) 다윗이 사형에 해당하는 죄악을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5절)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은총을 베푸사 그의 아들 중에 하나를 후계자로 선택하여 다윗 왕조가 영구히 계속되도록 하셨다는 사실이다(7:14-16). 즉, ‘여디디야’라고 하는 이름 속에는 하나님께서 이미 그를 다윗의 후계자로 선택하셨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Pulpit Commentary, Payne). 아무튼 이와 같은 사실만 보더라도 하나님께서는 다윗과 맺으신 언약을 성실히 이행하셨음을 충분히 알 수 있다(7:4-16).

 

12:26 요압이 … 랍바를 쳐서 그 왕성을 점령하매. 랍바 성 함락 사건이 솔로몬의 출생보다 먼저 일어난 사건임은 이미 앞에서 살펴본 바이다. 24절 주석 참조. 한편, 여기서 ‘왕성’(the royal city)은 랍바 성을 이루고 있던 두 성 중 하나의 성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성은 카일(Keil)의 주장처럼 27절의 ‘물들의 성읍’(the city of waters)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이 둘은 랍바 내의 각기 다른 두 성읍이다(Lange). 11:1 주석 참조.

 

12:27 물들의 성읍. 이는 왕성(王城)과 더불어 랍바 성을 이루고 있던 또 하나의 성이다. 즉 이는 얍복 강에서 흘러 들어온 물을 가두어 두었던 랍바의 수원지(水源池)를 지키기 위한 또 하나의 성이었다. 11:1 주석 참조.

 

12:28 이제 왕은 … 점령하소서. 랍바 성의 두 성 중 하나인 왕성(王城)을 탈취한 요압(26절)이 나머지 하나인 ‘물들의 성읍’을 탈취하기 전에(27절) 예루살렘에 있던 다윗 왕을 모셔오는 장면이다(Lange). 그런데 이처럼 요압이 직접 랍바 성을 완전히 함락시키지 않고 다윗을 초치(招致), 그로 하여금 랍바 성을 정복케 한 까닭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다음과 같이 견해를 달리한다. (1) 이러한 일은 그 당시 원정군(遠征軍)에게 흔히 있었던 일로서 이 일의 동기를 특별히 따질 필요가 없다는 견해이다(The Interpreter’s Bible). (2) 암몬족의 재산을 사적으로 노략하지 않고 당시의 국제적 계약(契約)에 따라 합법적으로 인수하기 위해서라는 견해이다(Hertzberg). (3) 그러나 이상의 제 견해는 본 장의 전체 문맥과 조화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러한 요압의 처신은 다분히 개인적인 소신이나 야망에서 나온 행위로 보아야 한다(Lange). 즉, 요압은 자기의 주인인 다윗 왕에 대한 존경심의 발로에서 그렇게 했거나 아니면 군대 장관이라는 자신의 현 위치를 더욱 강화하기 위해 다윗 왕에게 아부하는 의미에서 그렇게 했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본서에서 자주 보여지는 다윗 왕에 대한 요압의 맹목적인 헌신과 자기의 출세를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그의 이중적인 성격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11:17 주석 참조.

 

12:29 다윗이 … 랍바로 가서. 당시 다윗이 거처하던 예루살렘(11:1)에서 암몬의 수도 랍바까지는 약 70 km 정도의 거리이다. 따라서 요압의 전갈을 받은 다윗(27, 28절)은 그리 많은 시간을 소요하지 않고도 랍바에 당도할 수 있었을 것이다. 11:1 주석 참조.

 

12:30 그 왕의 머리에서. 여기서 ‘그 왕’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말캄’은 문법적으로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즉 이는 암몬족의 왕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으며(Keil), 또한 암몬 사람들의 우상인 ‘말감’(밀곰)을 가리키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Lange, Wevers, Wellhausen, Pulpit Commentary, The Interpreter’s Bible).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첫 번째 해석을 취할 경우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난제에 봉착하게 된다. (1) ‘그 왕’에서 ‘그’를 암몬 사람들을 지칭하는 인칭대명사로 보려면 그 앞 절에 암몬 사람들에 대한 언급이 나와야 하는데 없다는 점이다(Wellhausen). (2) 또한 본 절에 나오는 ‘보석 박힌 왕관’의 무게가 금 한 달란트에 달하는데 이는 사람이 오래 쓰고 앉아 있을 수 없는 무게라는 점이다. 따라서 우리는 본 절의 ‘그 왕’이란 당시 암몬인들이 자신들의 왕과 같은 존재로 섬기던 신(神)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금 한 달란트라. 여기서 달란트는 구약 시대 당시 히브리인들이 무게를 측정하던 도량형으로 1달란트는 34.27 kg에 해당된다.

다윗이 머리에 쓰니라.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34 kg이나 나가는 면류관은 다윗이 머리에 쓰기에는 너무나 무거운 것이다. 따라서 다윗은 암몬족의 면류관에서 보석만을 빼어 자신의 면류관에 부착한 후 이를 머리에 썼을 것이다. 아무튼 이러한 행위는 헛된 우상을 섬긴 암몬 사람들의 실패와 다윗 왕이 이제 암몬의 정복자가 되었음을 알리는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행위였음이 분명하다.

 

12:31 톱질과 써레질 … 하게 하니라. 본 절은 학자들간에 상당한 논란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왜냐하면 원문상 본 절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1) 다윗이 암몬인들에게 톱질이나 써레질 등과 같은 고역(苦役)을 시켰다는 해석이다(Hertzberg, Wycliffe). (2) 다윗이 톱이나 써레 등과 같은 도구로써 암몬인들을 무참히 살해했다는 해석이다(Keil, Lange, Pulpit Commentary). 이 중 어느 해석이 보다 타당한지는 판단하기 어렵다. 그러나 과거 암몬인들이 다윗의 신복에게 크나큰 수치를 안겨 주었던 점(10:4, 5)에 비추어 볼 때 본 절은 다윗이 어떤 식으로든 암몬인들에게도 잔인하게 복수한 것을 가리키는 구절임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