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흘 만에. 여기 ‘사흘’은 다윗 일행이 블레셋 군대로부터 떠난(29:11) 때부터 사흘이 되었음을 가리킨다(Keil). 이 기간 동안 다윗과 그의 군사들은 ‘아벡’으로부터 ‘시글락’까지 약 75 km를 행군했을 것이다(29:1).
아말렉 사람들이 이미 네겝과 시글락을 침노하였는데. 아말렉 족속들의 이같은 행위는 (1) 이전에 다윗이 자신들에게 행한 침노 행위(27:8, 9)에 대한 보복의 성격을 지니며(Fay, Keil), (2) 또한 생존을 위한 약탈물 확보(Smith) 등이 그 목적이었다. 그런데 이렇듯 아말렉 족속이 시글락을 침범할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보다도 그곳을 지키던 다윗이 북쪽 ‘아벡’으로 이동함으로써, 그곳이 무방비 상태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여기서 ‘네겝’은 유다의 남부 지역을 통칭하는 ‘네겝’(Negeb)를 가리킨다(27:10). 그런데 원래부터 이곳은 항상 아말렉 사람들로부터 침략의 위협을 받던 지역이었다(14:48). 그리고 ‘침노하였는데’에 해당하는 기본 동사 ‘파샤트’는 ‘흩뜨리다, 벗기다’란 의미로서, 이는 전쟁을 목적으로 하는 침략 행위라기 보다는 갑자기 급습하여 필요한 노획물을 약탈해 가는 노략 행위를 가리키는 단어이다(27:8).
한 사람도 죽이지 아니하고 … 끌고 … 갔더라. 아말렉 사람들이 이같이 사로잡아 간 까닭은 그들이 인정이 많아서가 아니라(15:2), 다만 (1) 무장하지 않은 연약한 자들이었으므로 그들의 공격에 대항치 않았으며 (2) 애굽에 노예로 팔 경우(창 37:25-28) 많은 수입을 올릴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실리(實利)를 추구하는 이방 아말렉 족속의 관행을 오히려 선하게 이용하심으로써, (1) 하나님의 백성을 보호하셨으며 (2) 다윗 가문(家門)을 통해 나타내시고자 하시는 당신의 계획을 차질없이 계속 진행시켜 나가셨다. 세밀한 구석까지 친히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자애로운 손길을 느낄 수 있다.
아히노암 … 아비가일. 25:3, 42, 43 주석 참조.
다윗을 돌로 치자 하니. 백성들이 이처럼 말한 이유는 재난의 책임이 전적으로 다윗에게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1) 다윗이 약탈을 생업으로 삼는 아말렉 사람들의 신경을 건드려 놨으며(27:8, 9), (2) 또한 다윗이 블레셋의 가드 왕 아기스의 말을 따라 시글락을 비워 둔 채 군사들을 모두 북쪽으로 이동시키는 등, 백성들의 보호자 혹은 지도자로서의 사명을 제대로 수행치 못했다고 본 것이다(Klein).
다윗이 크게 다급하였으나. 여기서 ‘다급하였다’(히, 야차르)는 ‘답답하다, 곤란하다’란 의미로서, 어떤 원인에 의하여 매우 난감한 상황에 처했을 때 느끼게 되는 답답한 감정 상태를 가리킨다(창 32:7, 삿 2:15, 10:9, 삼하 13:2).
그의 하나님 여호와. 여기서 ‘여호와’란 신 명칭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과의 계약을 신실하게 이행하시는 분임을 강조할 때 사용되는 하나님의 명칭이다(20:12, 15). 결국 저자는 여기서 이같은 하나님의 명칭을 사용함으로써, 그 때 다윗이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인식했으며, 또한 어떤 자세로 하나님을 신뢰했는지 분명히 보여 준다.
힘입고. 엄밀히 말하여 ‘ … 안에서’란 의미이다.
용기를 얻었더라. [히, 이트하제크] ‘힘을 내다, 견고히 하다’란 의미를 갖는 ‘하자크’의 재귀적 사역형이다. 따라서 이 말은 ‘(여호와 안에서) 자신을 위하여 스스로 힘을 내다’란 의미로 번역될 수 있다(삿 20:22, 대하 12:13, 17:1, 겔 7:13). 즉 이것은 여호와를 의뢰하는 확고한 신념에 근거하여 적극적인 방향으로 마음을 새로이 먹는 것을 가리킨다. 여기서 우리는 난관에 대처하는 다윗의 신앙을 엿볼 수 있다. 즉 이때 다윗은 휘하 군사들을 회유하는 설득이나 구구한 변명 대신 하나님께 그 어려운 문제를 맡기고 그분의 도우심을 전적으로 바라는 신앙인의 모습을 견지했던 것이다. 이처럼 성도는 환난을 당할 때 사람보다 먼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통해서 문제 해결을 시도해야 한다. 실로 신앙인이 불신자보다 월등한 점은 고난에 처했을 때 환경과 사람을 바라보지 않고 그 상황의 배후에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데 있다. 그리고 당신만을 소망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힘과 위로를 제공하신다(시 50:15, 사 40:31).
에봇을 내게로 가져오라. 이는 ‘우림과 둠밈’(출 28:30 주석 참조)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묻기 위함이었다(14:18, 23:9). 이는 당시 다윗의 신앙적 행동의 출발이 어디서부터인지를 잘 보여 준다. 즉 다윗의 신앙적 행동의 출발점은 하나님과의 대화와 교제에 있었다. 즉 그는 대제사장의 에봇을 통하여 하나님과 신령한 교통을 했으며, 결국 이것이 올바른 행동과 승리의 관건이 되었다. 이처럼 성도들이 항상 복되고 의로운 길을 걸을 수 있는 방책은 매사에 하나님과 교제하며 그분의 뜻에 따라서 생활하는 것이다(롬 12:1, 2, 엡 5:17). 한편, 대제사장의 의복인 ‘에봇’(Ephod)에 대해서는 출 28:6-14 부분의 주석을 참조하라.
여호와께서 그에게 대답하시되. ‘우림과 둠밈’(출 28:30)은 항상 어떤 질문에 대한 ‘가부’(可否)의 응답만을 했다. 따라서 ‘우림과 둠밈’이라는 계시 수단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이 직접 들려지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대제사장의 입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이 전달될 뿐이었다(Fay, Hengstenberg). 한편 여기서 우리는, 사울에게는 하나님의 모든 계시가 중단되었으나(28:6), 다윗에게는 이처럼 하나님의 뜻이 계속적으로 계시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이같은 대조를 통하여 본서 저자는, 이제 사울의 왕권은 완전히 쇠퇴하고 반면 다윗의 왕권은 일취 월장 흥왕하게 될 것임을 강력히 예시하고 있다.
함께 한 육백 명. 이것은 한 명의 항명자도 없이 다윗의 부하 전원이 다윗을 따랐음을 시사해 준다(27:2).
브솔 시내. ‘시글락’ 남쪽 약 24 km 지점으로, 유다 산악 지대에서 발원하여 ‘가사’ 남서쪽을 통해 지중해로 흘러 들어가는 시내이다(Raumer). 헤르츠베르그(Hertzberg)는 나름대로의 어원학적 분석을 근거로 하여, ‘브솔 시내’(Besor Brook)의 뜻을 ‘좋은 소식의 시내’로 본다. 한편 이곳은 오늘날 ‘와디 에스 쉐리아’(Wady es -Sheriah)로 추정되어진다(Keil, Fay, Smith).
뒤떨어진 자를 … 머물게 했으되. 이같은 결과가 나타나게 된 까닭은 (1) 다윗과 그의 휘하 군사들은 ‘아벡’으로부터 ‘시글락’까지 약 삼 일 길을 이미 행군하였기 때문에 매우 피곤한 상태였으며(1절), (2) 거기다가 쉬지도 못한 채로 온 힘을 다하여서 아말렉 족속을 밤낮 추적한 관계로 몹시 지쳤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다윗은 힘들어하는 200 명을 브솔 시내에서 쉬게 하였다. 물론 추격의 시급성을 모르는 바 아니었으나 지친 자들에게 무리한 강행군을 강요하지는 않았다. 이는 신앙에 기초를 둔 다윗의 인도적 조치였다. 더욱이 여기서 다윗은 하나님께서 남은 400 명과 함께 하신다면 600 명 이상의 힘을 발휘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던 것이다(대하 14:11, 12). 이와 같은 다윗의 신념은 하나님의 구원이 사람의 숫자에 있지 않음(14:6)을 입증하듯 다윗에게 큰 승리를 안겨다 주었다(16-20절).
브솔 시내를 건너지 못하는. 여기의 이 ‘브솔 시내’(Besor Brook)는 유다 남방의 산악 지역에서부터 흘러 가사(Gaza) 지역을 통과한 후 지중해로 빠지는 하천이다. 그러나 이 시내는 ‘와디’(Wady) 즉 ‘건천’(乾川)이기 때문에 우기(雨期)를 제외하고는 항상 강바닥이 말라 있었다. 바로 이같은 점에서 이때 다윗과 그의 부하들은 강물을 건너는 수고는 할 필요가 없었다. 다만 그 ‘브솔 시내’는 험한 골짜기를 따라 흘렀기 때문에, 비록 강바닥이 말라붙는 건기(乾期)라 할지라도 그 골짜기를 건너기는 쉽지 않았다. 그러므로 지친 군사들은 그 골짜기를 건너지 못하고 낙오할 수 밖에 없었다. 아마 이들은 이때 뒤에서 짐을 지키는 역할을 수행했을 것이다(24절, 25:13).
아말렉 사람의 종. 이것은 다윗의 ‘누구에게 속하였으며’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다.
사흘 전에 병이 들매. 여기서 ‘사흘 전’은 다윗이 아벡 근처에서 시글락을 향하여 출발할 즈음이다(29:10, 11, 30:1). 이때 아말렉 족속들은 시글락에 대한 노략질을 마치고 자신들의 본거지로 돌아가는 중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아말렉 사람들의 시글락 노략은 다윗이 아벡의 집결지에 도착했을 무렵에 이루어진 듯하다(29:1, 2). 한편 ‘병이 들매’(히, 할라)는 ‘약해지다, 쇠약하다’ 등의 의미로서, 병으로 인하여 움직일 기력을 상실한 상태를 가리킨다(삿 16:7, 사 57:10).
주인이 나를 버렸나이다. 고대 중근동 지역에서 노예가 주인으로부터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를 잘 보여주는 언급이다. 즉 주인은 병들어서 노동력을 상실한 이 종에게 치료를 해주고 먹을 것을 주는 등 보살필 경제적 가치를 느끼지 못하였을 것이기 때문에, 마치 물건 버리듯 들에 버린 것이다.
유다에 속한 지방. 이곳은 유다 땅의 남부 지역을 가리킨다(1절).
갈렙 남방. 이 ‘갈렙’은 이스라엘의 가나안 땅 정복기에 그나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에게 분배되었던, 헤브론을 중심으로 한 유다 남부 지역에 해당된다(수 21:12). 결국 아말렉 족속이 침범했던 지역으로서 애굽 소년에 의하여 언급된 세 지역 즉, ‘그렛 사람의 남방’과 ‘유다에 속한 지방’과 ‘갈렙 남방’은 팔레스타인의 모든 남쪽 지역을 망라하여 가리키는 것이다.
침노하고. 1절, 27:10 주석 참조.
당신이 나를 죽이지도 아니하고. 애굽 소년의 이 말은, 적군의 패잔병을 안내자로 이용한 후 그 효용 가치가 없으면 후환을 없애기 위해 미련없이 죽여버렸던 고대의 전쟁 풍습에 기인한다(Thenius, Smith). 즉 그 애굽 소년은, 다윗도 자신을 안내자로 이용한 후 목적이 달성되면 자신을 죽일 것으로 염려한 것이다.
내 주인의 수중에 넘기지도 아니하겠다고 … 맹세하소서. 만일 다윗이 종을 다시 주인에게 돌려준다면, 그 종은 이적(利敵) 행위를 한 혐의로 인하여 분명히 무참한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다. 바로 이같은 이유 때문에 그 애굽 소년은 다윗에게 맹세를 요구하였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여기 ‘하나님’(히, 엘로힘)은 이스라엘 사람들에 의해서는 창조주에 대한 호칭으로 사용되었지만, 이방인들에 의해서는 자신들의 이방 신에 대한 호칭으로 사용되었다(왕하 17:31, 33, 대하 33:15). 따라서 여기 애굽 소년에 의해 언급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아닌, 다만 자기가 섬기던 신(神)을 가리켰을 것이다.
그들이 … 편만하여. 여기의 ‘편만하여’(히, 나타쉬)는 무질서하게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 따라서 이 ‘편만하여’란 말은 당시 아말렉 족속들이 방심한 상태에 있었음을 시사해 준다.
블레셋 사람들의 땅과 유다 땅. 14절에서 애굽 소년에 의하여 언급된 여러 지역들을 말한다.
먹고 마시며 춤추는지라. 약탈을 생업으로 삼는 유랑 민족(베드윈)에게서 흔히 볼 수 있듯이, 성공적인 약탈 행위 이후 방탕하게 베푸는 주연(酒宴)을 가리킨다. 이때에는 경계심을 푼 상태에서 모두 정신없이 먹고 마시며 취하기 때문에, 기습 공격은 그대로 주효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이는 소수의 병력을 지닌 다윗의 공격 작전이 주효할 수 있었던 주요한 요인이었음이 분명하다(삿 8:11).
낙타를 타고 도망한 소년 사백 명. ‘낙타’는 팔레스타인 남방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공격할 때 많이 사용한 동물이었다(삿 6:5). 한편 여기 소년들은 가축 관리의 임무를 맡은 자들로 추측된다. 그렇다면 이들은 약탈한 가축들에게 먹이와 물을 주기 위하여 연회장으로부터 어느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을 것이고, 그 결과 다윗의 기습 공격을 당하여 자신들의 낙타를 타고 도망침으로써, 간신히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구원하였고. [히, 나찰] 앞의 ‘도로 찾고’와 동일한 단어이다. 이는 다윗의 ‘완전한 회복’과 ‘더욱 풍성한 회복’을 강조한다. 즉 다윗의 아말렉 공격 사건에는 다음과 같은 사실과 교훈이 깃들어 있다. (1) 이전에 탈취당했던 모든 것을 되찾았다(18, 19절). 이와 같이 신앙으로 살아가는 자는 과거에 죄악으로 상실했던 모든 것을 회복하게 된다(요 8:32, 14:27, 15:11). (2) 전리품을 노획했다(20절). 말하자면 다윗 군대는 시글락 사건 이전보다 더욱 풍성하게 소유하게 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오직 신앙으로 나아가는 성도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전화 위복(轉禍爲福)의 은총을 보게 된다. 실로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당신께 나아오는 자를 위하여 풍성한 은총을 예비해 놓고 계신다(요 10:10, 엡 3:20).
그 가축들을 앞에 몰고 가며. 이것은 ‘그 가축을 앞에서 몰고 가며’로 번역하는 것이 원문을 잘 살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자연스럽다(AV).
이는 다윗의 전리품이라. 이는 다윗의 업적과 무공(武功)을 칭찬하는 말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돌도 다윗을 쳐죽이려 했던 그들의 행동과는 매우 대조적이다(6절). 그러므로 후일 다윗은 왕이 되었을 때 이처럼 변덕스러운 인간의 마음보다는, 바위나 산처럼 늘 변치 않는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의뢰하였다.
다윗이 … 문안하매. 여기서 ‘문안하매’(히, 샤알 샬롬)는 ‘평강의 여부를 물어보다’란 뜻이다(삿 18:15). 이것은 다윗이 전투에 참여했던 자들에게처럼, 낙오한 자들에 대해서도 매우 호의적 감정을 갖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25:5).
함께 가지 아니하였은즉 … 주지 말고. 이같은 불량배들의 제안은 (1) 전투에 참여치 아니한 사람들에게도 전리품을 나누어 주었던 이스라엘의 역사적 관례와 상충되며(민 31:27) (2) 이스라엘이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도움에 따른 것이었으며(8, 23절) (3) 후방에서 소유물을 지키는 일도 작전상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는 점(25:13) 등으로 볼 때, 뒤에서 소유물을 지키던 자들에게 돌려져야 할 그들의 분깃을 돌려주지 않겠다는 것, 곧 그것을 자신들만 나누어 갖겠다는 것은 매우 잘못된 생각이었다.
여호와께서 … 보호하시고 … 그 군대를 … 넘기셨은즉. 이것은, 다윗이 불량배들의 제안(22절)을 부당하다고 판단했던 논리적 근거이다. 즉 탈취물을 얻을 수 있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인간은 탈취물의 처분에 대해서 왈가 왈부할 권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같은 다윗의 생각과 행위는 (1) 전쟁의 승리는 오로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며 (2) 전리품 또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고(23절) (3) 따라서 전쟁에 불참했던 용사들도 모두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같은 형제라는 연대 의식에 근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 아래 모인 공동체는 나눔과 사랑의 실천장이어야 한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행 2:44-47). 한편, 여기서 ‘보호하시고 … 넘기셨은즉’은 하나님께서 다윗의 군대에게 금번 아말렉 전투에서 허락하신 모든 은혜를 통틀어 말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율례와 규례. 성경 다른 곳에서는 ‘규례와 법도’라는 말로도 번역된 단어로서, 이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 신적(神的) 명령이나 규범 등을 강조하여 지칭하는 중언법적(重言法的) 표현이다. 신 4:1 주석 참조.
오늘까지 이르니라. ‘오늘’(히, 하욤 하제)은 본서의 기록 시기까지를 가리키는 관용어구이다. 한편 ‘이르니라’는 다윗의 규례가 그의 후계자들에 의하여 계속 지켜졌음을 시사해 준다.
여호와의 원수에게서 탈취한 것. ‘여호와의 원수’는 다음과 같은 의미를 담고 있다. 즉 (1) ‘여호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계약의 신실한 이행을 강조하는 하나님의 명칭이며 (2) 이스라엘은 그 하나님의 계약 백성이라는 점에서, 곧 ‘여호와의 원수’는 이스라엘의 원수였다. 여기서 다윗은 자신의 선물을 바로 이같은 자들로부터 ‘탈취한 것’이라고 함으로써, (1) 적지(適地)에서 망명 생활을 하지만 자신은 여전히 이스라엘을 사랑하며 (2) 하나님께서는 자신과 늘 함께 하셔서 자신을 승리로 이끌고 계심을 암시하고 있다.
선사하노라. [히, 베라카] 원문대로 직역한다면, ‘선물이다’란 뜻이다. 그런데 여기의 이 ‘베라카’라는 단어는 하나님의 축복을 가리키는 명사로서, 특별히 ‘하나님의 축복(은총)의 선물’(a gift of blessing)이란 의미이다(F. R. Fay). 그러므로 여기서 다윗은 바로 이같은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자신의 선물이 하나님의 축복의 결과임을 분명히 말하려고 한 것이다.
남방 라못. 브엘세바(8:2) 남동쪽 약 30 km 지점에 위치한 시므온 지파의 성읍으로 추정된다(수 19:8).
얏딜. 에스드모(28절, 수 15:50)의 남서쪽 약 8 km 지점으로, 유다 지파에 속한(수 15:48) 제사장의 성읍이다(수 21:14).
십못. 유다 남방(네게브)에 위치한 한 성읍 정도로만 알려질 뿐이다. 다른 사본들에는 ‘시브못’으로도 표기되었다(Keil).
에스드모아. 오늘날 ‘세무아’(Semuah)라고 하는 폐허지에서 찾아볼 수 있는 유다의 산악 성읍으로(Schubert, Robinson), 헤브론 남서쪽 약 16 km 지점에 위치한다(수 15:50, 21:14, 대상 6:57).
여라므엘 사람의 성읍. ‘여라므엘 사람’은 유다의 손자이자 베레스의 아들인 헤스론의 장자, ‘여라므엘’의 후손들을 가리키는 듯하다(대상 2:4, 5, 9). 이들은 브엘세바의 남쪽 지역(네게브)에서 살았다(27:10).
겐 사람의 성읍. ‘겐 사람’(the Kenites)은 모세의 장인 이드로의 후손들로서,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의 안내자들이 되어 함께 가나안 땅에 들어온 후 그곳에 정착하였다(15:6, 민 10:29-32, 삿 1:16). 이들은 유다 남방, 아말렉 사람들의 거주지 북쪽에서 거주했었던 것 같다(15:6, 27:10).
고라산. 네게브 지방의 변두리에 위치한 세펠라 지역의 한 부분인 ‘아산’과 동일한 곳이다(수 15:42). 처음 시므온 지파에게 소속된 성읍이었으나(수 19:7), 후일 제사장의 성읍으로 지정된 곳이다(대상 6:59).
아닥. 이 성읍은 헤브론 북서쪽 약 24 km 지점에 위치한 시므온 지파의 ‘에델’(수15:42, 19:7)과 동일 성읍으로 추정되기도 한다(Thenius).
왕래하던 모든 곳.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도피 생활을 하던 여러 지역들을 가리킨다. 이러한 지역 주민들은 대부분 억울한 도피자 다윗에게 먹을 것과 숨을 곳을 은밀하게 제공하여 주는 등 분명 다윗에 대하여 호의적이었을 것이다(Fay). 바로 이같은 이유 때문에 본서의 기자는 이들을 다윗의 ‘친구’라고 기록하였다(2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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