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 ‘십’은 헤브론 남동쪽 약 8 km, 마온 북쪽 약 10 km 지점에 있는 유다의 성읍이다. 23:14 주석 참조.
기브아. 사울의 고향이자 당시 이스라엘의 정치적 수도이다. 10:26 주석 참조.
다윗이 광야 앞 하길라 산에. ‘십 사람’들의 첫 번째 밀고 때의 장소는 ‘광야 남쪽’이었다(23:19). 그러나 여기서 언급된 ‘광야 앞’은 문자적으로는 ‘광야의 얼굴’이란 의미로서, ‘광야의 남쪽’과는 전혀 다른 ‘광야의 인접 지역’을 가리킨다(Drinkard, Driver, Klein). 따라서 아비가일과 결혼한 다윗은(25:42) 갈멜을 떠나서 십 사람들의 첫 번째 밀고 때에 거주했던 곳보다 약간 북쪽으로 올라간 듯하다.
하길라 산. ‘십 사람’들의 1차 밀고 당시에 다윗은 여기처럼 ‘하길라 산’이 아닌 ‘하길라 산 수풀 요새’에 있었다(23:19). 그런데 ‘하길라 산 수풀 요새’는 ‘십 황무지’의 또 다른 부분으로 보아야 한다. 그 같이 보아야할 이유는 여기의 ‘수풀’(히, 호레쉬)은 고유명사로서, 별도의 특정한 지점을 가리키는 지명이기 때문이다(23:15).
십 황무지. 23:14 주석 참조.
이스라엘에서 택한 사람 삼천. 이들은 ‘십 사람’의 1차 밀고 때에도 동원했던 사울의 정예병을 가리킨다. 24:2 주석 참조.
길 가에. 여기에 ‘길’ 은 예루살렘 방향에서 네겝(Negeb) 지방의 ‘아랏’(민 21:1)으로 통하는 대로(大路)를 가리킨다(Smith, Fay). 이같은 사실에서 볼 때, 본 절의 ‘하길라 산’은 십 황무지의 동쪽임이 분명하다. 아하로니(Aharoni)도 그의 ‘성경지도’(Bible Atlas)에서 이 사실을 지지하고 있다.
다윗이 광야에 있더니. 당시 다윗은 사울의 진 서쪽 지점 고지대에 위치했을 것이다. 이는 6절의 ‘진영에 내려가서’란 말에 의해 입증된다. 따라서 다윗은 사울의 동태를 잘 관측할 수 있었을 것이다.
사울이 진영 가운데에 누웠고. 여기의 ‘진영’(히, 마갈)은 ‘방책’(barricade)을 의미한다(17:20). 그런데 당시 이 ‘방책’은 병거 및 마차 등으로 이뤄졌을 것이다(Calvin, Smith, Keil). 한편 사울이 이같은 위치에서 잠을 잔 까닭은 말할 나위도 없이 자신의 몸을 외부로부터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백성은 그를 둘러 진 쳤더라. 이같은 언급은 앞의 ‘사울이 진영 가운데 누웠고’란 언급과 함께 다윗의 용맹성을 강조하려는 저자의 의도를 반영해 준다. 즉 저자는 여기서 당시 사울이 소지하던 창과 물병을 바로 위와 같은 삼엄한 방어망을 뚫고 들어가서 가져갔던 다윗의 확신에 찬 영웅적 행동을(11, 12절) 부각시키려는 것이다(Klein). 한편 여기서 ‘백성’은 사울의 3천 병사를 의미한다(2절, 14:2, 수 8:1).
스루야의 아들 … 아비새. ‘스루야’는 그녀의 어머니가 다윗의 아버지 이새에게 시집 오기 전 ‘나하스’라는 남자에게서 낳은 딸이다(삼하 17:25). 따라서 다윗의 이부(異父) 누이이다. 한편 ‘아비새’는 ‘아버지가 계신다’란 의미이다. 그런데 이 사람은 후에 비록 다윗의 용사 중 최상급인 ‘세 용사’ 그룹에는 끼지 못했지만, 그 다음인 ‘삼십 용사’ 그룹의 두령으로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삼하 23:18-19, 대상 11:20-21).
요압. 요압은 ‘여호와는 아버지이시다’라는 뜻이다. 이 사람은 다윗의 군대 장관이 되어 명실 공히 다윗의 제1무사(武士)로서 많은 공을 세웠다(삼하 5:6 이하, 8:16, 20:23, 대상 11:4 이하, 18:15, 27:34).
누가 … 내려가서. 다윗의 일행이 사울의 일행보다 상대적으로 높은 곳에 있었음을 보여 준다. 즉 그 때 사울은 ‘길 가’(3절)에 있은 반면 다윗은 ‘산’(1절)에 있었다.
아비새가 이르되 내가 함께 가겠나이다. 이것은 ‘아히멜렉’과 ‘아비새’ 중 ‘아비새’가 더 용기있는 인물이었음을 말해 준다. 아무튼 본서와 사무엘하의 저자는 ‘아비새’에 대해서는 다윗을 도왔던 훌륭한 인물로서 계속 말하지만, 본 절에서처럼 아히멜렉은 다윗의 요청에 침묵했던 것으로 나온다. 바로 이같은 사실은 아히멜렉이 성경의 무대에서 사라진 것이 그의 위와 같은 침묵과 결코 무관하지 않음을 시사해 준다(Klein). 여기서 우리는 ‘아히멜렉’이 ‘아비새’보다 먼저 언급되는 등 더 우위에 있었으나, 그 자신의 지나친 소심성 때문에 그 위치를 빼앗겼다는 사실을 주목해야만 할 것이다.
단번에 땅에 꽂게 하소서. 무방비 상태로 누워 자고 있는 사울에게 이같이 하기는 매우 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또한 사울의 부하들을 깨우지 않고 달아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단번’에 죽여야 했을 것이다.
그를 두 번 찌를 것이 없으리이다. 아비새의 이 말은 당시 사울이 완전 무방비 상태에 있었다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 아마 사울을 비롯한 모든 군사들이 긴 출정으로 인하여 매우 피곤했으므로 모두 곯아 떨어진 것 같다.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치면 죄가 없겠느냐. 그 첫째 이유이다. 즉 여호와께서 택하사 기름 부은 자는 어떤 경우에도 그 생명이 전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이다. 그러므로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사람이 침해하면, 곧 그것은 여호와의 주권을 침해하고 모독한 결과가 된다. 따라서 다윗은 이러한 원칙에 철저히 입각하여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인 사울의 생명을 하나님의 뜻에 맡겼다. 그러므로 다윗이 사울을 죽이지 아니한 것은 단순히 다윗의 관대한 성품이나 정치적 의도 때문이 아님이 분명하다.
그의 … 창과 물병만 가지고 가자. 이것은 다윗이 사울을 죽일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죽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증할 증거를 삼기 위함이었다(24:4).
머리 곁에 있는. 이것은 아비새의 말대로 다윗이 사울을 단칼에 죽일 수 있었던 사실을 강력히 시사하기 위한 언급이다. 왜냐하면 ‘머리’는 몸의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서, 이 부분까지 접근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곧 사울을 단번에 죽일 수 있었음을 가리키기 때문이다(8절).
여호와께서 … 깊이 잠들게 하셨으므로. 여기서 ‘깊은 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타르데마’란 단어는 아담의 몸에서 하와를 만들기 위하여 갈비뼈를 빼어내기 위해 하나님께서 아담을 깊은 잠에 빠뜨리시는 광경을 묘사하는 문맥에서 사용되었다(창 2:21). 또한 이 단어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동물을 쪼개게 하신 후, 그와의 언약이 비준되었음을 보여 주시기 위하여 그를 깊이 잠들도록 하시는 장면을 다루고 있는 문맥에서도 나타난다(창 15:32). 바로 이같은 사실에서 볼 때, 사울과 그의 일행이 다윗의 접근을 전혀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깊이 잠이 든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것임이 분명하다.
그들이 다 잠들어 있었기. 사실 이때 다윗은 아비새의 말대로 여호와께서 사울을 자신의 손에 붙이신 것으로 해석하여 사울을 죽임으로써, 자신의 생명도 보존할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왕좌에 즉시 오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다윗은 그러한 자신의 유익을 구하기에 앞서 기름 부음 받은 자에 대한 하나님의 전적 주권 사상을 더욱 존중함으로써, 끝까지 모든 일의 판단을 하나님께 맡겼다. 하나님은 이처럼 당신의 주권을 인정하는 다윗을 기뻐하셨고, 결국 당신의 선하신 계획을 다윗을 위해 베푸셨다. 즉 다윗은 선으로 악을 이긴 것이다(롬 12:1).
거리가 멀더라. 다윗이 이처럼 사울로부터 먼 거리에서 사울의 군대 장관 아브넬을 깨우고, 또한 사울과 대화를 하려고(14-25절) 한 까닭은 만일의 경우 사울에게서 도망갈 안전 거리를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이는 다윗이 사울의 변덕스런 감정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브넬아. ‘아브넬’은 골리앗과 싸워 이긴 다윗을 사울에게 데려가는 등 이미 다윗과 친교가 있었다(17:55-58, 20:25). 더구나 ‘아브넬’은 사울과 사촌간이며(14:50-51) 다윗은 사울의 사위였다는(18:27, 25:44) 점에서 본다면, 다윗과 아브넬이 상호 친분 관계를 갖고 있었다는 사실은 확실하다.
왕을 부르는 너는 누구냐. 이 말은 문자적 의미로 이해되서는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다윗은 사울이 아닌 아브넬을 불렀기 때문이다(14절). 따라서 우리는 이 말을, 다윗이 아브넬을 큰 소리로 불러 소란케 함으로써 잠자던 사울을 깨웠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Keil, Lange).
네 주 … 네 주. 여기서 ‘네 주’라는 말이 반복 기술된 것은 아브넬이 자신의 상전인 사울에 대한 경호 책임을 게을리했음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즉 아브넬은 자신의 ‘주’ 사울을 보호해야 했어야만 했다.
기름 부음 받은 너희 주를 보호하지 아니하였으니. 이것은 아비새가 사울을 죽이려 하던 것을(8절) 가로막았던 다윗의 행동과 잘 대조된다. 즉 다윗은 이같은 언급을 통하여 아브넬의 직무 유기와 자신의 선행(24:17-18)을 대조적으로 강조한다. 나아가 다윗의 이 말은 진정 사울을 지키고 보호해 줄 자로서 아브넬보다 자신이 더욱 적격자라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Keil). 따라서 자신은 사울을 해하고자 하는 의도는 추호도 없으며, 오해려 사울을 주(主)로 모시고 충성된 신하로서 지키고 보호해 줄 자라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강변하고 있다.
너희는 마땅히 죽을 자이니라. 문자적으로는 ‘너희는 죽음의 아들이니라’(20:31)란 뜻이다. 다윗이 여기서 아브넬과 병사들에 대하여 ‘죽음의 아들’이란 표현을 사용한 것은 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은 사울을 제대로 보호하지 않은 것은 곧 그를 죽인 것과 동일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9절).
내 아들 다윗아. 사울의 이같은 반응은, 다윗이 자신을 충분히 죽일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죽이지 않았던 사실을 인식한 결과였다(24:16). 아마도 이때 변덕스런 사울은 다윗을 아브넬보다 더 나은 호위병으로(16:21) 생각했을 것이다.
만일 왕을 충동시켜 나를 해하려 하는 이가 여호와시면. 여기서 다윗은, 하나님께서는 만유(萬有)의 근원이 되신다는 사상(대상 29:11, 시 103:19)에 근거하여 하나님을 선(善) 뿐만 아니라 악(惡)도 주관하시는 분으로 인정하고 있다. 따라서 여기서 다윗은,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징계하시기 위하여 사울을 충동시킬 수도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사울이 비록 다윗을 징계하는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됐다고 하더라도, 사울의 행위가 정당화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로부터 악이 나왔다고 함은 하나님께서 그 악을 교사(敎唆)했다는 뜻이 아니라, 단지 악인이 그 소욕대로 저지르는 악을 묵허했음을 의미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런고로 악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의 한 방편이며, 따라서 악한 행동 자체에 대한 책임은 항상 본인이 져야한다. 아무튼 다윗은 하나님께서 악한 자까지도 친히 주관하신다는 사상을 깊이 인식했기 때문에, 압살롬의 난을 피하여 도망 가는 자신을 향하여 온갖 모욕적 언사를 아끼지 않았던 시므이도, 자신을 징계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는 것으로 보고 그를 해하지 아니하였다(삼하 16:10-11).
여호와께서는 제물을 받으시기를. 다윗의 이 말에 대해서 학자들 간에 다양한 해석이 제시되었다. 즉 (1) 다윗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달게 죽겠다는 뜻(Hertzberg, Klein), (2) 사울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제물을 바쳐주기를 원한다는 뜻(Keil) 등이 있다. 그런데 첫째, 여기의 ‘제물’(히, 민하)은 하나님의 진노를 달래기 위하여(창 8:21) 그분 앞에서 태워지는 소제 제물의 향기를 가리키며, 둘째, 사울이 충동된 것이 하나님에 의한 것이 아니라 만일 ‘사람들’에 의한 것이라면 다윗이 아닌 그들이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본 절의 언급에서 볼 때, 하나님의 진노를 달래기 위하여 다윗 자신이 달게 죽겠다는 뜻인 (1)의 해석에 타당성이 있다.
만일 사람들이면 그들이 … 저주를 받으리니. 다윗은 엔게디 동굴 사건(24장) 직후에도 사울이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것은 간신(奸臣)들의 중상 모략 때문이라고 말한바 있었다. 물론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 가장 큰 동기는 악령의 영향하에 있는 사울의 증오심과 적개심 때문이지만, 이와 더불어 사울 주변에는 베냐민 사람 구시(시 7편)와 같은 중상 모리배들이 있어 그러한 사울의 증오심을 더욱 부추긴 것 같다. 24:9 주석 참조.
이는. [히, 키] 앞 부분의 이유를 설명해 주는 절(節)을 이끄는 접속사이다. 따라서 이 접속사 이하는 사울을 충동시킨 사람들이 저주를 받아야 될 이유를 말해준다.
너는 가서 다른 신들을 섬기라.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성막이 있는 땅, 그리고 하나님의 언약이 있는 땅인 이스라엘 땅을 떠나서 이방신을 섬기는 이방인들과 함께 사는 것을 뜻한다. 물론 사울을 충동시킨 자들이 이같은 말을 직접, 구체적으로 하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사울을 충동시켜 그로 하여금 다윗을 추격케 함은 곧 다윗에게 이스라엘 땅을 떠나서 살라고 하는 말과 동일한 것이다(Calvin). 그런데 다윗의 이같은 염려는 실제로 현실화되고 말았다. 즉 다윗은 사울로부터 오는 생명의 위협을 피하여 결국 이스라엘 땅을 떠나 블레셋 땅으로 들어가는 신세가 되고 만 것이다(27:1-2).
여호와의 기업에 참여하지 못하게 함이니이다. 여기서 ‘여호와의 기업’은 하나님의 백성 곧 이스라엘을 가리킨다(출 19:5). 그리고 ‘참여하지’(히, 하스타페아흐)는 ‘연합하다, 모이다’라는 의미의 동사 ‘사파흐’의 재귀적 사역형이다. 결국 이 말은 이스라엘이라는 언약 공동체의 유기체적 구성원이 됨을 가리킨다. 따라서 ‘참여하지 못하게 한다’라는 말은 그 언약 공동체에서 강제로 추방시킴을 가리킨다.
여호와 앞. 이 말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성막이 있으며, 따라서 그분께 제사와 경배를 드릴 수 있는 장소 곧 ‘이스라엘 땅’을 뜻한다(Hertzberg). 물론 하나님이 온 세상을 주관하시고 다스리시는 것이 사실이지만, 특별히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땅만을 특별한 약속의 땅으로 지정하셨음도 사실이었다(신 12:5). 그래서 모압 출신의 룻은 자신의 고향 모압 땅을 떠나 유다의 베들레헴으로 들어가면서 ‘여호와의 날개’ 아래로 들어간다고 말하였다(룻 2:12).
먼 이 곳에서. [히, 아르차 미네게드] 직역하면 ‘-(앞)으로부터 떨어진 (그) 땅에서’란 의미이다.
나의 피가 … 흐르지 말게 하옵소서. 다윗은 이 말을 자신이 타국 땅으로 쫓겨가게 될 경우 나타날 결과로 말한다. 따라서 다윗은 그러한 비극적인 결과가 나타나지 않도록 사울로 하여금 자신을 추격하는 일을 중지해 줄 것을 호소한다. 아울러 다윗은 여기의 이 언급을 통하여 만일 자신이 사울에게 쫓겨 이방 땅에서 죽게 될 경우 사울은 다윗 자신의 그 피에 대하여 결코 무관치 않으며, 그러므로 사울은 하나님께로부터 그에 합당한 댓가를 받을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즉, 만일 다윗 자신이 이방 땅으로 도망가 그곳 우상의 땅에서 죽게 된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사울의 추격으로 말미암은 것이므로 사울은 다윗 자신의 피를 흘리게 한 장본인이 되며, 그럴 경우 아벨로 하여금 피를 흘리게 했던 가인처럼(창 4:10) 사울 역시 하나님의 징벌을 받게 될 것이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산에서 메추라기를 사냥하는 자와 같이. 이것은 다윗을 잡아 죽이려고 추격하는 사울의 행동이 매우 어리석은 일임을 강조하는 말이다. 왜냐하면 ‘메추라기’는 ‘산’이 아닌 광야에 많기 때문이다(출 16:13-14, 민 11:31). 따라서 메추라기를 사냥하기 위해서는 메추라기가 떼지어 다니는 광야의 들로 나가는 것이 현명한 일이다. 그러나 사울은 어쩌다 산에 한 마리있는 메추라기를 잡으려고 설치는 사냥꾼 같이 무가치하고 어리석은 일을 지금 하고 있다는 의미이다(Winer). 아무튼 우리는 이 비유의 초점이 다윗을 추격하는 사울의 행위가 매우 무의미하고 어리석은 일임을 지적하는 데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이스라엘 왕이 한 벼룩을 수색하러. 여기서 다윗은 ‘이스라엘 왕’과 ‘벼룩’을 대조시키고 있다. 이같은 대조를 통하여 다윗은 사울이 자신을 죽이려 하는 일이 얼마나 무의미하고 어리석으며, 또한 얼마나 무가치한 일인지를 역설한다. 24:14주석 참조.
내 아들 다윗아. 이것은 다윗에 대하여 하등의 적의가 없음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이다(24, 16).
돌아오라. 옛 직책으로의 복귀를 가리킨다(18:13, 30). 또한 이것은 이방 땅으로 도망갈 필요도 없음을 강조하는 말이기도 하다(19-20절).
반드시 승리를 얻으리라. 사울의 이 말 역시 엔게디 동굴 사건(24장) 직후의 말(24:20)과 연관시켜 생각해 볼 때, 다윗이 사울 자신을 포함한 모든 대적들을 꺾고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를 것을 가리킨다(20:15, 16).
다윗은 … 사울은 … 돌아가니라. 이 표현은 성경에서 이별의 장면을 묘사할 대 사용되는 전형적 방식이다(24:23, 민 24:25). 그러나 특별히 여기서의 이 표현은 사울과 다윗이 아직껏 화해하지 못한 사실을 암시해 준다. 즉 “사울과 다윗의 마음은 하나 되지 못했다. 따라서 그들은 각기 자기 길을 따라 따로 가야만 했다”(Berleb Bible).
자기 곳. 여기의 ‘곳’(히, 마콤)은 24:23의 ‘집’과 동일한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2:20, 29:4, 왕상 8:21). 따라서 여기의 ‘곳’을 ‘집’이 아니라고 보고, 사울이 기브아의 자기 궁성으로 돌아가지 않은 채 다윗을 계속 쫓았다는 주장(Keil, Lange)은 잘못된 것이다(R. Payne Smi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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