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이스라엘 무리가 … 슬피 울며. 사무엘의 죽음에 대한 백성들의 슬픔은 마치 아비의 죽음에 대한 자식의 슬픔과도 같았다. 즉 이스라엘 온 백성이 하나 같이 애곡과 애통의 날을 보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러한 슬픔은 (1) 선지자로서 영적 정치적으로 완전히 쇠퇴했던 이스라엘을 회복시켰던 사무엘의 업적(7:3-16), (2) 사사로서 청렴 결백했던 사무엘의 인품(12:1-5) 때문이었을 것이다(1:1, 7:16).
라마 그의 집에서 그를 장사한지라. 여기서 라마는 사무엘의 고향이다(1:1, 7:16). 그리고 ‘집’은 문자적 의미의 ‘가옥’이라기 보다는 집(가옥)에 딸린 공지(空地)나 정원 또는 뜰을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Keil & Fay, Smith). 따라서 혹자(Klein)의 생각처럼 이를 ‘고향’이란 의미로까지 확대 해석할 필요가 없다. 유대 전승은 사무엘의 장지(葬地)가 미스바의 고지(高地)라고 주장하나, 지리적 여건상 타당성은 없다. 따라서 우리는 사무엘의 장지를 그가 살던 집에 딸린 정원의 공지나 뜰로 이해함이 좋을 것이다. 사실 이와 같은 장사법(葬事法)은 당시 고대 중근동 지역에 흔히 있었던 관례로서, 오늘날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서도 입증되고 있다.
다윗이 … 바란 광야로 내려가니라. 여기서 ‘바란 광야’는 시내 반도의 북쪽에 위치한 지역으로서(창 21:21, 민 10:12, 12:16, 13:3, 26), 아라비아 반도의 최남단부에 있는 오늘날의 ‘엘-티’(El-Tih)광야이다. 그런데 최근의 학자들(Klein, Hertzberg)은 (1) ‘바란 광야’는 팔레스타인과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다윗의 행동 반경으로 보기 힘들며 (2) 또한 바로 뒤의 2절 이하에서 ‘마온 광야’가 언급되고 있으므로, ‘바란 광야’를 ‘마온 광야’로 고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70인역(LXX)의 번역을 따른 주장이다. 그러나 Keil, Smith, Lange 등은 고전적 견해를 취하여 그냥 ‘바란 광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바란 광야’는 팔레스타인의 최남 도시 브엘세바와 뚜렷한 경계선 없이 인접한 광야로서, 역시 유다 광야와 경계선 없이 이어지는 광야이므로, 당시의 여건상 다윗이 이곳까지 도피했을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라 한다(Pulpit Commentary). 사실, 당시 사울 왕을 견제할 수 있었던 유일한 인물인 사무엘이 죽자, 그에 의해 기름 부음을 받은(16:12-13) 다윗은 사울에게서 더욱 멀리 도피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아무튼 다윗과 그 일행이 ‘엔게디 광야’를 떠나서 ‘바란 광야’로 내려갔다가, 자신들이 이전에 머물렀던(23:24-25) ‘마온광야’로 다시 올라 온 것은 식량 문제의 해결을 위함이었음이 분명하다(8, 11절).
그의 생업이 갈멜에 있고. 여기서 ‘생업’(히, 마아세)은 ‘일하다, 만들다’의 의미가 있는 동사 ‘아사’에서 파생된 명사이다. 따라서 여기 이 단어는 ‘일하는 곳’, 혹은 ‘돈을 벌게하는 출처’ 등으로 이해될 수 있다(창 46:33, 전 2:4). 한편 ‘갈멜’은 ‘마온’의 북쪽 약 1.6 km 지점으로, 이전에 사울이 아말렉 전투 후 자신의 명성을 높이기 위해 기념비를 세웠던 곳이다(15:12). 따라서 이 마을에서는 사울이 영웅시 되며, 사울의 영향력 역시 컸을 것임이 분명하다(Klein).
양이 삼천 마리요 염소가 천 마리. 소유주의 이름을 밝히기도 전에 이같이 재산을 먼저 언급함으로써, 본서의 저자는 ‘나발’(3절)이라는 인물보다 그의 부유함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 한편 여기의 이 가축들은 비록 욥이 소유한 재산, 곧 ‘양 칠천, 낙타 삼천, 황소 오백, 나귀 오백’(욥 1:3)보다는 적은 숫자이나, 당시 팔레스타인의 여러 형편을 기준으로 한다면 엄청난 숫자였음이 분명하다. 아무튼 ‘나발’은 이 많은 가축들을 마온 광야의 고지대에서 방목하고 있었을 것이다.
양 털을 깎고 있었으니. 4절 주석 참조.
그의 아내의 이름은 아비가일이라. ‘아비가일’은 ‘기쁘게 하는 자’ 또는 ‘기쁨을 주는 자’란 뜻이다. 이 여인은 후에 자신의 남편 ‘나발’이 죽자, 다윗의 아내가 되어 다윗의 둘째 아들 길르압을 낳았다(삼하 3:3, 대상 3:1).
총명하고 용모가 아름다우나. ‘총명하고’(히, 토바트 세켈)는 ‘지혜가 뛰어난, 명철한’이란 뜻이다. 그런데 이 단어는 성경에서 주로 하나님의 뜻을 잘 분별하는 사람에게 적용되었다(대상 22:12, 대하 30:22, 느 8:8, 시 111:10). 그리고 ‘용모가 아름다우나’(히, 예파트 토에르)는 남녀를 막론하고 내면적 외면적 아름다움을 동시에 갖춘 사람에게 적용되는 말이다(16:18, 아 4:10, 7:1, 6).
완고하고 행실이 악하며. ‘완고하고’(히, 카쉐)는 ‘거칠은, 굳은, 난폭한’이란 뜻이다. 이 단어는 성경에서 특히 하나님의 명령을 이행치 않으며, 또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칠 줄 모르는 ‘목이 곧은’ 사람에게 적용되었다(출 33:3, 5, 34:9, 신 9:6, 삿 2:19). 그리고 ‘악하며’(히, 라 마알랄림)는 성질을 가리키는 ‘완고하고’와는 달리, 능동적으로 악한 행위를 일삼는 것을 가리킨다.
그는 갈렙 족속이었더라. 여기서 ‘갈렙 족속’(히, 켈리보)은 히브리 본문의 독법(讀法, 케티브)을 따라 해석하면, ‘그는(그 마음의 소욕을 따라) 자기 마음대로 하는 자였다’란 뜻이다(Maurer). 그리고 70인역(LXX), 아랍역(the Arabic), 수리아역(the Syriac) 및 요세푸스(Josephus)는 이 말을 ‘개’란 뜻의 ‘켈레브’에서 파생된 말로 보고, 곧 ‘개 같이 야비한 자, 개처럼 성급하고 심술궂은 자’란 뜻으로 해석했다. 그러나 본 문맥상의 흐름으로 본다면, 이 말은 난외 독법(케리)을 따라 ‘갈렙 족속’이라고 번역될 수 있는 ‘켈리비’로 봄이 타당한 듯하다(Klein, Keil, Lange, Simth, Targum, Vulgate). 왜냐하면 여기서 ‘그는’(히, 웨후 - 직역하면 ‘그리고 그는’이란 뜻)이란 말은 ‘나발’이란 인물의 성격 묘사를 계속하고자 하는 말이 아니고, 그의 혈통, 조상 등 새로운 사실의 소개를 나타내고자 하는 말이기 때문이다(F. R. Fay). 따라서 개역한글판에서 ‘갈멜 족속’으로 번역된 말은 개역개정판처럼 마땅히 ‘갈렙 족속’으로 번역되어야 함이 타당하다. 그러므로 ‘나발’은 여호수아와 함께 가나안 정찰을 신실하게 수행했던(민 13:30) ‘갈렙의 후손’이었다. 한편 갈렙은 그 신실성으로 말미암아 모세로부터 헤브론을 중심한 유다 땅의 일부를 약속 받았었고, 그는 그 자신이 약속받은 그 땅을 정복했었다(민 13, 14장, 신 1:22-36, 수 14:6-15, 15:13-14). 한편 ‘마온’이라는 지명은 갈렙의 자손인 삼매의 아들 ‘마온’에게서 유래했다는 점에서 볼 때(대상 2:45), 바로 이 ‘마온’에 살던 ‘나발’은 ‘마온’이라는 인물의 후예인 듯하다.
너 … 네 집 … 네 소유의 모든 것도 평강하라. ‘평강하라’(히, 샬롬)는 히브리인들의 인사말이다. 히브리 사람들은 이와 같은 인사를 할 경우 인사를 받는 상대에게 그 인사말과 같은 ‘평강’이 실제로 임할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따라서 여기 ‘평강하라’는 말은 단순한 염원 그 이상의 성격을 갖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다윗은 구약 성경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는 인사, 곧 사람에게 뿐만 아니라 심지어 가축에게까지 ‘평강’을 기원하는 예절을 갖춘다. 이것은 나발로부터 필요한 식량을 얻으려 했던 다윗의 간절함과 결코 무관치 않을 것이다(대상 12:18).
평강하라. 히브리인들의 전통적 인사법으로서, 본 절에서 특별히 3번이나 강조된 것은 그 평화가 나발의 집안에 완전히 정착되기를 비는 다윗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대상 12:18). 다윗은 비록 현상황이 고통과 절망의 시간들이었지만, 그의 생명을 지탱시켜 주시며 원수의 잔학한 손아귀에서 보호해 주시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이러한 평강을 이웃에게 전할 수 있었다(눅 10:5). 이처럼 신앙인은 살아 계셔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환경을 초월하여 이웃에게 ‘평강’과 ‘복’과 ‘기쁨’을 전할 수 있어야 한다(창 12:1-3, 벧전 2:9).
네 목자들이 우리와 함께 있었으나. 이것은 그 때 다윗의 일행과 나발의 양을 치던 목자들이 모두 마온 광야에 있었던 사실을 가리킨다(2절).
우리가 그들을 해하지 아니하였고. 여기서 ‘해하지’(히, 헤클라메눔)는 ‘부끄럽게 하다, 수치를 주다, 괴롭게 하다’란 의미를 갖는 ‘칼람’의 사역형이다. 따라서 여기의 ‘해하지 아니하였고’는 무력을 사용하여 상대를 괴롭게 하는 행위를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삿 18:7). 나아가 이 말 속에는 나발의 양치기들이 평안히 그들의 가축을 먹일 수 있도록 돌보아 주었다는 의미도 들어 있다(Smith, Fay).
그들이 갈멜에 있는 동안에. 나발의 양들은 마온 광야에서 방목되었지만, 그 본거지는 ‘갈멜’이었다(2절).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나니. 이것은 다윗이, 마온 광야 남쪽에 사는 베드윈 족속 등과 같은 아랍 족속들의 약탈과 노략 행위로부터 나발의 목자와 양들을 적극적으로 보호했던 사실을 가리킨다(Keil). 다윗은 비록 사울에 의하여 쫓기는 몸이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을 외적의 손에서 보호해야 하는 자신의 사명을 결코 망각하고 있지 않았다(23:1-5).
네 종들과 네 아들 다윗. 이것은 자신을 겸손히 낮추며, 상대방에게는 존경과 헌신을 표시하기 위한 표현법이다. 즉 고대 중근동의 풍습상 연장자 또는 상급자에 대한 존경과 경의의 표시로 자신을 ‘아들’로 낮추어 부르는 일은 보편적이었다. 특히 이 말은 윗 사람에게 아버지가 베푸는 것과 같은 자애로운 은혜와 사랑을 기대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표현이다. 한편 이와 같은 표현법은 (1) 아람 왕 벤하닷에 의하여 엘리사 선지자에게(왕하 8:9), (2) 아하스 왕에 의하여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에게(왕하 16:7) 사용되었다.
주기를 원하노라. 다윗이 나발의 양 털 깎는 날을 택하여 이같은 요청을 한 까닭은, 이 날은 특별히 타인에게 은혜를 베푸는 날이었기 때문에, 이와 같은 자신의 요청에 대하여 나발이 특별히 불쾌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물론 그 때 다윗은 중근동의 풍습에 따라 자신이 나발의 양들을 지켜주었던 것에 대하여 정당한 대가를 요구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다윗은 그러한 방법을 택하지 아니하고, 양 털 깎는 날을 기다렸다가 최대의 예의를 갖춰 겸손히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던 것이다.
주인에게서 억지로 떠나는 종이 많도다. 나발의 이 말은 다윗이 사울과 원수의 관계가 된 사실을 염두에 둔 말이다. 즉 이같은 비유를 통하여, 나발은 다윗을 주인(사울)을 배반한 불충한 건달로 몰아가고 있다. 나발이 이같이 반응을 보인 것은, 나발이 살고 있던 갈멜이 사울의 전적비가 세워지는 등 사울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 있는 마을이라는 사실과 전혀 무관치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사울이나 그의 아들 요나단도 다윗을 차기의 왕으로 보는 이 때에(23:17, 24:20), 졸부에 불과한 나발이 다윗에 대하여 이같은 오만 불손한 태도를 취한 것은 그가 하나님의 뜻에 대단히 둔감한 어리석고 미련한 자라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여기서 ‘억지로 떠나는’(히, 하미트파르침)이란 말은 ‘깨어지다, 부서지다’란 의미를 갖는 ‘파라츠’의 재귀적 사역형이다. 따라서 이 단어는 ‘자신을 위하여(어떤 계약 관계를 일방적으로 깨뜨리고) 뛰쳐나가는’이란 의미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나발이 다윗을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사울을 배반한 자로 생각했음을 보여 준다.
어디로서인지 알지도 못하는 자들. 이 말은 다윗 일행이 사울을 피하여 정처없이 돌아다닌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 말이다. 따라서 나발은 다윗 일행을 주인에게 쫓겨 떠돌아 다니는 부랑아 내지는 건달로 몰아부친 것이다(Keil, Fay).
모욕하였나이다. 이 히브리어 단어의 기본형 ‘이트’는 ‘매우 화나게 하다, 격동시키다’란 의미인데(Davidson). 그 어원은 매나 독수리 등 맹금류를 쫓아내는 행위에서 연유한다.
상종할. [히, 하트할라케누] 이 단어는 ‘다니다, 왕래하다’란 의미를 갖는 ‘할라크’의 재귀적 사역형이다. 따라서 ‘자신들을 위하여 왕래하다’란 의미로 이해해야 하는데, 결국 이것은 나발의 하인들이 다윗의 보호를 요청했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암시해 준다고 할 수 있다.
떡 이백 덩이.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한 가족에게 필요한 떡의 양을 ‘떡 세 덩이’로 보았다(눅 11:5-8). 따라서 육백 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있던 다윗에게 이같은 양은 결코 많다고 볼 수 없다.
볶은 곡식 다섯 세아. 한 ‘세아’는 약 13.5리터이다. 따라서 ‘다섯 세아’는 약 70리터 정도에 해당되는 분량이다. 그런데 이처럼 그 양이 너무 적다는 이유 때문에 어떤 학자는 ‘오백 세아’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Ewald). 또한 같은 맥락에서 70인역은 ‘다섯 에바’로 번역했다. 그러나 앞에 언급된 떡의 양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음식물은 다윗의 출격 소식을 들은 아비가일이 그 노(怒)를 일단 진정시킬 목적으로 급히 준비하여 간단히 요리된 관계로 적을 수 밖에 없었다. 다라서 본문 그대로를 정확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한편 여기의 ‘볶은 곡식’은 야전(野戰)에 나가 있는 군인들에게 적절한 음식으로 인정되었다(17:17).
건포도 … 무화과. 이 같은 식품들은 지극히 곤비한 자들의 원기 회복을 위하여 매우 적절한 음식으로 사용되었다(30:11-12).
남편 나발에게는 말하지 아니하니라. 이것은 아비가일이 음식을 갖고 다윗에게 가는 것을 나발이 알게 될 경우 틀림없이 제지할 것이 뻔하였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현명한 자는 때에 따라 침묵하고, 때에 따라 말한다. 말하기에 적당한 때를 분별하는 것이야말로 매우 큰 지혜라고 할 수 있다(잠 15:23, 약 3:2).
따라 내려가더니. 이 말은 고지에서 저지로 내려가는 행위를 뜻하는 ‘야라드’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따라’는 문맥상의 의미 강화를 위한 번역자의 삽입이다.
다윗 … 마주 내려오는 것을 만나니라. 그 당시 다윗은 나발이 살고 있었던 ‘갈멜’의 맞은편 쪽 ‘요새’에 자리 잡고 있었음을 시사해준다. 즉 ‘마온 광야’는 여러 개의 고지(高地)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그 중의 하나가 ‘갈멜’이며, 또 다른 하나가 다윗이 머물고 있었던 ‘요새’였을 것이다.
허사라. [히, 쉐케르] 이 단어는 구약 성경의 용례상 주로 ‘거짓된’이란 의미로 사용된다(출 5:9, 레 6:3, 왕상 22:22, 시 63:11). 따라서 다윗은 이같은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나발이 자신에게 마땅히 주어야 할 수고의 대가를 교활하게 떼어먹었음을 은연중에 토로하고 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벌을 내리시고. 맛소라 사본(M.T.)과 칠십인역(LXX)은 ‘다윗의 원수들에게’로 되어 있다. 바로 이같은 사본상의 차이로 인하여 이 어구에 대한 여러 견해들이 제시되었다. (1) 맛소라 사본이나 칠십인역의 기록을 옳은 것으로 보고, ‘하나님은 다윗의 원수들에게 벌을 내리시고’로 해야 한다는 견해이다(Lange, Keil, Smith). 즉 랑게(Lange)와 카일(Keil)은, 당시 다윗이 나발에 대한 공격을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義)를 위한 싸움으로 생각함으로써, 이같은 형식의 저주를 했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스미드(Smith)는, 다윗이 ‘나발’이라는 명칭 대신에 ‘원수’라는 보다 특수한 용어를 사용한 것은, 그같은 용어의 사용에 따라 나발에 대한 자신의 저주가 훨씬 더 효험을 잘 나타낼 것이라는 미신적 판단의 결과라고 주장한다. (2) 맛소라 사본이나 칠십인역이 다윗 스스로가 자신에 대한 저주를 선언한다는 것은 불가하다는 판단에 따라 그같은 모순을 피하기 위하여 ‘원수들’이란 말을 공연히 삽입하였다고 보는 견해이다(Hertzberg, Klein, NIV, 공동번역). 이같은 견해를 주장하는 자들은, 구약 성경의 용례상 상대에 대하여 하나님의 저주를 직접적으로 선포하는 경우는 없으며, 그리고 본문과 동일한 저주의 형태가 때때로 언급되고 있다는 사실을 그 증거로 제시한다. 우리는 위의 두 가지 견해 중 첫째, 나발에 대한 자신의 공격 행위를 다윗 자신이 성전(聖戰)으로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며, 둘째, 다윗은 자신의 한(恨) 풀이를 위해서 하나님을 저주의 도구로 이용하려 할 만큼 미신적 사상의 소유자는 아니라는 점등으로 미루어 볼 때 (2)의 견해가 타당한 듯하다.
이 죄악을 … 내게로 돌리시고. 아비가일의 희생 정신이 돋보이는 말이다. 즉 아비가일은 남편 나발과 자기 집의 모든 남자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희생을 불사하고 다윗에게 간절히 용서를 빌었다.
주의 귀에 말하게 하시고. 여기서 ‘귀에 말하다’라는 표현은 반드시 필요한 내용을 상대에게 은밀하면서도 진지하게 전달하고 호소할 때 사용되는 표현이다(22:8, 신 31:11, 룻 4:4).
불량한 사람. [히, 이쉬 하벨리야알] 문자적으로는 ‘무익한 남자, 쓸모없는 남자, 무가치한 남자’란 뜻이다. 17절 주석 참조.
그의 이름이 그에게 적당하니 그의 이름이 나발이라. ‘어리석은, 미련한’이란 의미를 갖는 ‘나발’이라는 이름에 어울리게, 그 나발이라는 인물이 어리석고 미련한 행동을 했음을 가리킨다. 즉, 나발이 다윗을 하나님께서 택하신 차기 이스라엘의 왕으로 바로 보지 못한 채 (1) 오히려 사울을 배반한 불충한 떠돌이 종으로 몰아세웠으며(10절), (2) 다윗에게 주어야 할 마땅한 수고의 대가 지불을 거절한 것(11절) 등은 분명히 제 무덤을 스스로 파는 어리석고 미련한 일이었다.
그는 미련한 자. 문자적으로는 ‘그에게 어리석음이 있다’이다. 따라서 여기의 ‘미련한’(히, 네발라)은 ‘어리석은’(히, 나발)의 명사형이다.
여종은 … 소년들을 보지 못하였나이다. 이것은 나발의 허물을 아비가일 자신이 담당해야 할 이유이다. 즉 아비가일은 어리석은 나발을 제대로 감독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나발이 다윗을 진노하게 하는 큰 잘못을 범하였다는 것이다. 실제로 만일 아비가일이 자신의 남편 나발을 어리석은 자라고 생각했다면, 그녀는 남편의 행동을 주의깊게 지켜봐야만 하는 책임이 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이는, 결과적으로 어리석은 나발이 어리석은 짓을 하였는데, 그 모든 일에 대하여 다윗이 어리석은 나발을 상대로 복수할 일이 못되니 제발 마음을 둘리시고 용서해 달라는 뜻이다.
피를 흘려 친히 보복하시는 일을 여호와께서 막으셨으니. 아비가일의 이 말은, 그녀가 자신을 다윗의 유혈 보복을 중지케 하기 위하여 하나님에 의하여 보내진 사자(使者)로 자임(自任)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사실, 당시 다윗은 이글거리는 분노의 불길 속에 휩싸여 있었으므로, 어리석은 나발로 인해 자기 손으로 하나님의 뜻을 거슬러 피흘리는 복수의 범죄를 저지를 뻔하였다. 그러나 그 때 하나님께서는 지혜로운 아비가일을 통해 장차 왕위에 오르게 될 다윗을 영적으로 온전하게 보존하셨다(Klein, Fay).
나발과 같이 되기를. 즉 나발과 같이 어리석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여기서 구약 성경은 ‘어리석음’을 필연적으로 벌을 받게 되는 ‘불경건’과 항상 연결시키고 있음에 주목해야할 것이다(26:21, 시 14:1, 잠 14:17, 사 32:6, 렘 10:8). 따라서 ‘나발과 같이’(어리석게) 된다는 것은, 곧 그 어리석은 행위로 인하여 결국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을 받게 된다는 사상을 내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Keil & Delitzsch, Schmidt).
이 소년들에게 주게 하시고. 나발의 모욕적인 언사를 들은 것은 바로 이들이었기 때문에, 아비가일은 ‘예물’을 다윗이 아닌 ‘소년’들에게 주는 것처럼 표현했다. 그러나 물론 그 음식은 다윗의 요청에 따라, 그리고 다윗의 진노를 달래기 위하여 가져온 것이다.
여호와께서 반드시 … 든든한 집을 세우시리니. 이 말은 여호와께서 다윗의 왕권(王權)을 굳건하게 하실 것을 가리킨다(삼하 7:11, 26, 27, 왕상 2:24, 11:38). 그런데 여기의 ‘집’(히, 바이트)은 ‘가문, 일족’이란 의미이다(창 12:1, 삼하 3:6, 7:16). 그리고 ‘든든한’(히, 네에만)은 ‘신뢰하다, 믿다’란 의미를 갖는 동사 ‘아만’의 수동형 분사이다. 특히 이 단어는 신적(神的) 언약의 신실성을 강조하는 문맥에서 주로 사용된다(시 89:28-29, 사 55:3). 따라서 여기의 ‘든든한 집을 세우리니’라는 말은 (1) 다윗과 그의 후손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하시며 (2) 다윗의 후손 중 메시아(‘기름 부음을 받은 자’, 2:10)를 통하여(마 1:1) 하나님의 나라를 통치하실 것(고전 15:25, 빌 2:11)이라는 ‘다윗 언약’을 예시하는 말임이 분명하다(삼하 7:11). 그러므로 바로 이와 같은 예언적 영안의 소유자라는 점에서 ‘아비가일’은 가히 ‘총명한’ 여인이라 할 수 있다(3절). 한편 이같은 예언은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에 의하여 이미 언급된 바 있다(2:10).
이는. [히, 키] 이 단어는 앞 구절의 이유를 설명해 주는 구절을 이끄는 접속사로서, ‘왜냐하면’이란 의미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여호와의 싸움을 싸우심이요. ‘여호와의 싸움’은 하나님의 공의적 심판을 위하여 하나님의 절대적 도우심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방법에 따라, 하나님의 대적들과 싸우는 성전(聖戰)을 가리킨다(18:17, 삼하 5:19-23). 아비가일은 이처럼 다윗이 ‘성전(聖戰)을 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히 선택된 자임을 강력히 시사함으로써, 다윗으로 하여금 나발을 죽여 손에 피를 흘리는 사사로운 보복을 중지토록 하려고 한다. 아무튼 아비가일이 여기서 ‘성전 수행’을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기 위한 한 조건처럼 언급한 까닭은, ‘성전 수행’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고, 그 하나님의 뜻이 실현된 정치적 상황 가운데서 다윗도 왕위에 오를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아비가일은 ‘성전’(聖戰)과 ‘왕권’(王權)을 밀접한 관계 속에서 바라보고 있음이 분명하다.
악한 일을 찾을 수 없음이니이다. 이 구절에 대하여 다음 두 가지 해석이 제시된다. 즉 (1) 하나님의 도우심에 따른 다윗의 형통(Smith, Lagne, Keil), (2) 다윗의 윤리적 도덕적 무흠(Hertzberg, Klein) 등이다. 그런데 본 문맥은 첫째, 다윗의 왕권이 굳건하게 확립될 것을 말하고 있으며, 둘째, 본 절을 이은 29절의 내용이 다윗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적 보호를 다룬다는 점에서, (1)의 견해가 타당한 듯하다. 아무튼 이와 같은 축복스런 예언을 언급함으로써, 아비가일은 다윗으로 하여금 사소한 일에 얽매일 필요가 없음을 강변한다.
사람이 일어나서. 여기서 ‘사람’(히, 아담)은 단수라는 점에서, 다윗을 계속적으로 죽이려 했던 한 인물 ‘사울’을 가리킴이 분명하다(Smith). 아비가일은 사울이 다윗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는 사실을 넉넉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한편, 이 말은 더넓은 의미에서 사울처럼 다윗을 대적하는 모든 원수 및 그 세력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Fay).
내 주의 생명은 … 생명 싸개 속에 싸였을 것이요. 이 은유적 표현은 값진 보화나 귀중한 물건을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하여 그것을 ‘싸개’에 잘 싸서 묶어 두었던 고대 중근동의 풍습에서 유래했다(Abarbanel, Targum, Talmud). 한편 여기서 ‘싸개’(히, 체로르)는 ‘주머니’ 또는 ‘보자기’(bundle, KJV)를 가리킨다(욥 14:17, 잠 7:20). 아무튼 본 문구는 다윗의 생명은 하나님의 안전한 보호하에 있음을 가리킨다. 즉 여호와의 불꽃 같은 눈이 다윗의 생명을 항상 지켜 보호하고 있음을 가리킨다.
물매로 던지듯 … 던지시리이다. 오랫동안 물매를 사용했으며 심지어는 그것으로 블레셋의 골리앗을 죽이기까지 했던(17:49) 다윗은, 한 번 던져지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 물맷돌의 성질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바로 이같은 사실을 감지한 지혜로운 아비가일은 다윗의 원수의 생명을 물맷돌에 비유함으로써, 원수의 회복 불가능한 완전한 멸망을 설명하고 있다. 즉 여기서 아비가일은 ‘생명 싸개’ 속에 곱게 싸여 여호와의 품속에 간직되어 있는 다윗의 생명과, ‘물매 속의 물맷돌’처럼 멀리 날려 버려질 원수의 생명을 대조시킴으로써, 다윗의 궁극적 승리를 기원하고 또한 확신하고 있다.
모든 선을 … 행하사. 구체적으로는 여호와께서 다윗을 왕위에 올리는 일일 것이다.
지도자. [히, 나기드] 엄밀히 말하여 이 말은 ‘왕’을 의미하지는 않는다(9:16, 10:1). 그런데 아비가일이 여기서 ‘왕’을 의미하는 ‘멜렉’ 대신에 이 단어를 사용한 까닭은, 그 당시 사울이라는 ‘왕’(히, 멜렉)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여기의 이 ‘나기드’는 왕에 대한 조심스러운 은유적 표현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슬퍼하실 것도 없고. 여기서 ‘슬퍼하실 것’(히, 레푸카)은 ‘거침돌이 될 것’이란 뜻이다. 순간의 격분과 분노로 사람을 죽인 후 자신의 잘못을 나중에 깨달았을 때, 그 사람이 겪게 될 마음의 고통은 실로 대단할 것이다. 즉 두고 두고 양심의 거침돌이 되어 괴롭힐 것이다. 바로 그같은 예 중의 하나가 바로 밧세바 여인과의 간통 사실을 은폐하기 위하여 그의 남편 우리아를 죽였다가 다윗이 겪어야 했던 마음의 고통이 아니었겠는가(삼하 11:14-21, 시편 51편)!
마음에 걸리는 것. 여기서 ‘걸리는 것’(히, 레미크숄)도 앞의 ‘슬프게 하는 것’처럼 ‘걸림이 되다’란 의미이다(렘 50:32).
후대하실 때. 구체적으로는 ‘하나님께서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위(王位)에 올리실 때’를 가리킨다.
내 주의 여종을 생각하소서. 아비가일의 이 청원은 나발을 죽이지 말라는 자신의 청원을 들음으로써, 다윗이 후일 왕이 된 후에 마음의 고통을 당하지 않게 된다면 그것은 자신의 공로임을 은연 중에 드러내는 말이다. 그러나 여기서 아비가일의 이 말은 자신의 공치사에 핵심이 있지는 않다. 다만 이같이 말함으로써 아비가일은 어떻게 하든지 다윗이 자신의 간청을 듣게 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 이 말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에 대해서 당신의 계약적 의무를 신실하게 이행하신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하나님의 명칭이다(20:12).
찬송할지로다. 이같은 언급은 하나님의 오묘한 주권적 섭리에 따라 당신의 백성에게 행하신 놀랍고 위대한 일을 찬양하는 문맥에서 종종 나타난다(왕상 1:48, 5:7, 8:15, 56, 10:9, 눅 1:68, 엡 1:3).
네게 복이 있을지로다. 여기의 ‘복이 있을지로다’(히, 바라크)도 32절의 ‘찬송할지로다’와 앞의 ‘칭찬할지며’와 그 기본형이 동일한 단어이다. 따라서 여기의 이 단어는 다윗이 아비가일에게 복이 있기를 하나님께 비는 일종의 기도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삼하 14:22, 19:39). 바로 이같은 점에서 여기의 ‘복이 있을지로다’와 같은 성경적 축복 행위는, 복을 주는 주체자에 대한 분명한 인식도 없이 의례적으로 하는 우리나라 전래의 ‘복 받으세요’라는 축복적 인사와는 전혀 다르다.
남자. [히, 마쉐틴 베키르] 문자적으로 ‘벽을 향해 오줌을 누는 자’(one who urinates against the wall)란 뜻으로서, ‘남자’(man)를 가리키는 일반적 용어인 ‘이쉬’의 속어(俗語)이다. 22절 주석 참조.
크게 취하여. 양 털을 깎는 잔치 때에 술에 취하는 것은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보편적이었던 것 같다(삼하 13:23-28). 그러므로 나발이 그 당시의 풍습에 따라 이같이 취했다고 할지라도, 아무튼 술에 취하는 일 자체는 경건 생활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한다는 점에서 정죄되어 마땅하다(롬 13:13, 고전 5:11, 6:10). 따라서 성경은 ‘술취하는 일’을 어리석은 자의 한 특징으로 말하고 있다(잠 20:1, 23:21, 26:9, 눅 21:34).
마음에 기뻐하므로. 만취로 인해 정신을 잃을 정도로 방종의 상태에 빠져 있는 것을 가리킨다. 후에 다윗의 아들 압살롬은 자신의 여동생 다말을 겁탈했던 자신의 이복 형제 암논을 양 털 깎는 잔치에 초대한 후, 그가 바로 위와 같은 상태에 빠지면 그를 살해하려고 했었다(삼하 13:28).
아무 말도 하지 아니하다가. 여기서 ‘아무 말’이란 다윗이 나발의 모욕적인 응답(10-11절)에 격분한 나머지, 그를 죽이러 병사들을 데리고 쫓아왔던 사실을 가리킨다(13절). 그런데 아비가일이 여기서 이같이 행동한 까닭은 (1) 나발이 술에 취한 그 때는 잘잘못을 따질 상황이 아니었으며 (2) 술에 취한 나발에게 다윗이 그를 죽이려 했다는 말을 할 경우, 그는 정신적 충격을 크게 받을 것이 뻔하였기 때문이었다. 바로 이같은 점에서, 아비가일은 가히 ‘총명한 여인’이라 할 수 있다(3절).
낙담하여. 문자적으로는 ‘그의 마음이 그 사람 안에서 죽었다’(his heart died within him, KJV)란 뜻이다. 즉 나발의 ‘기뻐하던 마음’(36절)이 이제 ‘죽어버린 마음’이 되어버린 것을 뜻한다(Klein).
몸이 돌과 같이 되었더니. ‘돌과 같이 되었더니’라는 표현은 문자적으로 ‘돌이 되었더니’란 뜻으로, 즉 강한 충격에 의하여 어떤 심인성(心因性)질환에 걸린 것을 말한다.
여호와께서 나발을 치시매. 여기의 ‘치시매’(히, 나가프)는 ‘상처내다, 쳐부수다’란 의미로서, 신적(神的) 징벌 행위를 가리키는 단어이다(삼하 12:15, 슥14:18). 결국 나발의 죽음은 그의 어리석음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임이 분명하다(29절).
그가 죽으니라. 나발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다윗에게 자기 소유물 중 일부를 공급해 주어야 할 의무를 지니고 있었다. (1) 공적인 면에서 다윗은 나발이 속한 민족 이스라엘의 구원자였다(17:41-51, 18:5, 30, 19:8, 23:1-5). (2) 개인적인 면에서 다윗은 나발의 양 떼와 소유를 보호해 준 은인이었다(7절). (3) 이 외에도 나그네를 대접하라는 율법(신 10:18-19)을 생각한다면, 나발이 다윗 일행을 접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나발은 예의를 갖춘 다윗의 정당한 요구(4-9절)를 교만한 말로써 일축하였다(10-11절). 나발의 이 악한 행동은 스스로가 자기 무덤을 판 격이되고 말았다. 즉 나발은 그의 행동에 격분한 다윗(12-13절)에게 복수당하지는 않았지만, 결국 공의의 하나님에 의해 병으로 죽게됨으로써 보응을 받았다. 따라서 이러한 사건은 재물과 돈을 생의 최고 목표로 추구하는 자의 말로(末路)는 파멸이라(딤전 6:9-10)는 엄숙한 경고와 교훈을 제공하고 있다.
갚아 주사. [히, 라브] ‘시시비비를 가리다’란 뜻이다. 구체적으로는 하나님께서 다윗의 억울한 형편(2절)을 살피셔서, 그의 원수를 갚아 주신 것을 가리킨다(38절).
악행을 그의 머리에 돌리셨도다. 자신이 행한 악한 행위만큼 결국 자신이 그 악행의 대가를 받는 일을 가리킨다(왕상 2:44).
다윗이 아비가일을 … 아내로 삼으려고. 이와 같은 구혼(求婚)은 미망인의 법적 애곡 의무 기간인 칠 일이 지난 다음에 제안되었을 것이다(Smith). 그런데 다윗이 아비가일에게 구혼하게 된 이유는 다음과 같을 것이다. 즉 (1) 그녀는 지혜와 신앙에 있어서 자신의 내조자가 되기에 매우 적합하였으며(3, 33절) (2) 다윗의 처 미갈이 다른 남자와 재혼하였기(44절) 때문이다(Pulpit Commentary).
내 주의 여종은 내 주의 전령들. 이미 다윗의 수하에 있던 ‘전령’들처럼 아비가일도 다윗에게 ‘내 주’라는 말을 적용시킴으로써, 자신도 그들처럼 다윗의 사람이 될 것을 강력히 시사해 주고 있다.
발 씻길 종이니이다. 발 씻기는 행위는 종들이 하는 미천한 행위이다. 따라서 다윗의 구혼을 받은 아비가일은 그러한 다윗의 구혼은 자신의 분에 넘치는 과분한 것으로서 감사하게 받아 들임은 물론, 요구하신다면 다윗의 수하에 딸린 사환들의 발이라도 씻기는 지극히 미천한 일도 기꺼이 감당할 것이라고 겸손히 말하고 있다.
따르는 처녀 다섯과 함께. 여기의 ‘처녀 다섯’은 아비가일을 수종드는 시종들을 가리킨다(창 30:4, 9). 아비가일의 집은 대단한 부호였으므로, 이러한 개인 몸종이 있었을 것이이다.
전령. [히, 말아크] 이 단어는 주로 ‘하나님의 천사’ 및 그 밖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여기서는 아비가일이 다윗의 아내가 되기 위해 다윗에게 오고 있다는 소식을 전할 자라는 점에서 이와 같은 단어가 사용된 듯하다.
다윗의 아내가 되니라. 다윗이 아비가일을 자신의 아내로 맞이한 이 사건은 매우 의미 심장한 것이었다. 즉 순수한 애정이나 신앙적인 목적 이외에도, 후일 다윗은 유다의 왕이 되기 위하여 헤브론으로 입성할 때 유다 지파에 속한, 그것도 갈렙의 후예인 아비가일(3절 주석 참조)을 대동함으로써, 유다 지파 사람들의 호감을 얻을 수 있었다(Klein). 아무튼 이같은 결혼에 따라 다윗과 아비가일 사이에는 ‘길르압’(삼하 3:3)과 ‘다니엘’(대상 3:1)등, 최소 두 명의 아들이 출생하였다.
갈림에 사는. 문자적으로는 ‘갈림 출신인’이란 뜻이다. ‘갈림’은 ‘무더기’란 뜻으로, 이곳은 이사야 10:30에 따르면 예루살렘과 사울의 기브아 사이의 베냐민 지파의 땅에 위치한 성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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