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게디. ‘염소의 샘’(Spring of the goat)이란 뜻으로, 사해(死海)의 서부 중앙에 위치해 있는 요새지요, 석회석 고원 지대이며, 또 온천수가 있는 오아시스 지역이다. 후일 솔로몬은 사랑하는 자를 ‘엔게디 포도원의 고벨화 송이’에 비유하기도 했다(아 1:14). 한편 오늘날의 이곳 지명은 ‘아인 이디’(Ain-jidy)인데, 현재도 숨을 수 있는 많은 동굴들이 도처에 있다고 한다. 23:29 주석 참조.
삼천 명을 거느리고. ‘삼천’은 사울이 일찍이 수많은 블레셋 족속들을 무찌를 때 동원했던 수효와 동일한 병력 규모이다(13:2). 사울은 이 규모의 병력으로 다윗과 그의 추종자 육백 명(23:13)을 일시에 제거시키려 했던 것 같다. 아무튼 이처럼 사울이 다윗의 군대에 비해 5배나 많은 정예 병력을 동원하여 엔게디 광야까지 다윗을 추적한 것은 다윗의 무리를 섬멸하려고 단단히 각오했던 사울의 의지를 잘 나타내 준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의 비밀스런 보호 아래 있었던 다윗에게는 그와 같이 많고 강한 사울의 군대가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시 3:6).
들염소 바위. 이곳은 사해(死海)로 내려가는 벼랑의 한 지점으로, 그 가파름 때문에 들염소나 산양만이 생존하기에 적당한 곳이었으므로, 이러한 명칭이 부여된 것 같다(Robinson). 뿐만 아니라 당시 이 지역에는 충분한 풀과, 샘에서 넘쳐 흐르는 신선한 물로 인하여 들염소가 많이 야생할 수 있었던 것 같다(Danin). 오늘날에도 여행자들은 이 지역에서 서식하고 있는 많은 산양과 산염소를 발견한다고 한다(Thompson). 또한 이곳에는 은신하기 좋은 동굴이 많다고 한다(Fay).
굴이 있는지라. 그 당시 ‘굴’은 일반적으로 양을 돌보는 동안 목자들의 주거 장소로 이용되었다. 아울러 이러한 ‘굴’은 날씨가 추울 때는 동물들의 거처로도 이용되었다.
사울이 뒤를 보러 들어가니라. 여기서 ‘뒤를 본다’의 문자적 의미는 ‘발을 가리다’이다. ‘가리다’(히, 사카크)는 ‘덮다, 둘러싸다’란 뜻이다. 또한 ‘발을 가린다’는 말은 ‘용변을 보다’란 말의 완곡한 표현이다(Keil, Thenius). 히브리인들이 대변 보는 것을 이같이 표현한 까닭은 대변을 보려고 쪼그리고 앉을 때 옷자락에 의해 자신의 발이 덮여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말은 혹자들(Michaelis, Ewald, the Peshitta)의 주장처럼, ‘잠을 자다’란 뜻으로 볼 수 없다. 한편 사울이 바로 이같은 생리 현상을 해결하기 위하여 들어간 그 굴 안쪽에는 다윗의 일행들이 숨어 있었다.
다윗과 … 그 굴 깊은 곳에 있더니. 엔게디 요새(23:29) 지역에는 많은 동굴들이 있었다. 다윗과 그의 일행은 그 중 은신하기에 좋고 큰 어느 동굴 속에 숨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사울이 용변을 보기 위해 그 굴 속으로 들어온 것이다. 사울은 자기가 들어간 바로 그 굴에 숨어있던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 까닭은 (1) 동굴의 내부는 지척을 분간 못할 만큼 매우 어두웠으며, (2) 다윗과 그 일행은 캄캄한 그 굴의 깊숙한 곳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즉 동굴 입구는 볕이 드는 관계로 식별 가능하지만, 동굴 내부는 빛이 차단되기 때문에 캄캄했다. 따라서 동굴 내부의 다윗 일행은 사울의 행동을 관찰할 수 있었지만, 사울은 전혀 동굴 내부의 사정을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들(다윗의 부하들)은 지금 왕이 저희 권세 하에 있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친히 원수를 그들 손에 붙여 그를 멸할 수 있게 하신 분명한 증거라고 해석하였다. 다윗도 그 일을 그렇게 받아들이려는 유혹을 받았으나, 양심의 소리는 그에게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해하지 말라’고 말하였다”(부조와 선지자, 661).
다윗이 … 사울의 겉옷 자락을 … 베니라. 다윗은 동굴에 들어온지 오래 되어서 동굴의 어둠에 이미 적응이 되었으나, 사울은 그렇지 못하여 자신에게 가까이 근접해 온 다윗의 위와 같은 행동을 전혀 감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더구나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이 행동을 도왔을 것이 틀림없다(26:12). 한편 다윗이 이때 사울을 죽이지 아니하고 겉옷 자락만을 벤 까닭은 다음과 같다.
(1) 원수에 대한 복수는 인간이 아닌 하나님께서 하실 일임을 확신했다(12절).
(2) 죽일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죽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줄 수 있는 증거를 남김으로써, 자신이 사울을 해하려고 한다는 사울의 의심과 오해를 풀기 위해서였다(11절).
그러나 혹자는 다윗이 사울의 옷자락을벤 이 행동을 (1) 사울로부터 왕권을 빼앗으려는 강력한 욕심의 표현(Klein, Payne, 15:27-28, 왕상 11:29-31), (2) 또는 찢어진 옷자락으로 인하여 사울이 조롱의 대상이 되도록 하려는 의도(Payne) 등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이같은 견해들은 본 문맥에서 명확히 드러나고 있는 바 다윗의 신앙과 성품과는 결코 어울리지 않는다. 또한, 여기서 ‘겉옷’은 땅에 끌릴 정도로 긴 도포식 통옷으로서(2:19), 사울은 아마 용변을 보기 위하여 이 겉옷을 벗어 옆에 두었거나, 혹 입고 있었더라도 그 옷은 땅에 길게 늘어져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 다윗이 사울의 그 겉옷 자락을 베는 데 있어 큰 문제는 없었을 것이다(Fay). 더구나 사울은 그 때 긴장을 푼, 전혀 무방비의 상태에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 다윗의 행동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 다윗의 이 말은 사울이 하나님에 의하여 신정(神政) 왕국의 왕으로 임명된 자, 즉 하나님의 지상 대리자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즉 다윗은 사울을 단순한 권력자가 아니라 엄연히 여호와께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아(10:1), 선민 통치의 대권을 위임받은 자로 인정했기 때문에 사울을 해치지 않았다. 따라서 다윗은 사울을 결코 원수로 생각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가 충성을 다해 섬겨야 할 주인으로 생각했다. 바로 이같은 사실처럼 다윗이 사울을 해하지 않은 것이 철저하게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려는 신앙적 열심 곧 여호와 경외 사상에 근거한다는 점에서(C. J. Goslinga), 사울을 죽이지 않은 일과 관련하여 다윗을 정치 술수에 능한 인물 혹은 관대한 무사도(武士道) 정신을 가진 인물(Hertzberg)이라는 등 인간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지극히 부당하다.
내 주 왕이여. 사울을 향한 다윗의 이 호칭은 깊은 존경과 전적 복종의 뜻이 담겨있는 호칭으로서, 다윗은 자신이 여전히 사울의 충성스런 신하임을 강조하고 있다.
땅에 엎드려 절하고. 당시 다윗은 그 용맹과 지략 등으로 인해 주변 이방 국가의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다윗은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앞에서는 순한 양처럼 온유했고, 충실한 종처럼 겸손했다. 실로 이러한 겸손과 예의는 참된 그리스도인임을 입증하는 외적 증거가 된다. 진정 겸손한 자세로 진실을 말할 때 진정한 성도이다.
보소서 … 옷자락을 보소서. 다윗은 이 때 자신의 말을 입증하는 증거물로서, 사울의 베어진 겉옷 자락(4절)을 제시한다. 실로 다윗의 손에 들려있는 사울의 겉옷 자락은 사울의 의심이나 주위의 모든 중상 모략을 일소하는 증거물로서, 곧 다윗이 사울을 해할 마음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생생한 시각적 증거물이었다(F. R. Fay).
판단하사. [히, 샤파트] 공의적(公義的) 심판을 전제로 하며 시시비비를 가리는 법정의 재판 행위를 가리킨다(시 7:8, 96:13, 겔 18:30).
악은 악인에게서 난다. 이 속담은 악한 마음의 소유자만이 악을 행할 수 있다는 뜻이다(잠 13:16, 마 7:16-20, 12:35, 눅 6:43, 약 3:11-12). 바꾸어 말하면 ‘그 사람이 어떤 자인지는 그의 행위를 보아 알 수 있다’는 뜻인데, 따라서 이 속담은 ‘열매로 그 나무를 알 수 있다’(마 7:20)고 하신 예수의 말씀과 일맥상통한다. 다윗은 이 속담을 언급함으로써, 만일 자신에게 왕이 되고싶은 야욕이나 사울을 해할 악의가 있었다면 자신에게 기회가 왔을 때 사울을 죽였을 것이나, 그렇게 하지 아니하고 다만 겉옷 자락만 벤 것은 자신에게는 그러한 야욕이나 악의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Stoebe).
살펴 억울함을 풀어 주시고. ‘살펴’(רָאָה 라아)는 세심히 관찰하는 행위를 가리킨다(23:22). 그리고 ‘억울함을 풀어 주시고’(רִיב 리브)는 원래 ‘잔소리하다, 변론하다’란 뜻이나, 이 문맥에서는 특정한 일의 깊은 내막까지를 꼼꼼이 헤아리는 행위를 가리킨다(사 1:17, 호 2:2).
건지시기를. [שָׁפַט 샤파트] 이 말은 앞에 나오는 ‘심판하사’와 동일한 단어인데, 특별히 이 문맥에서는 ‘공정히 심판하사 자신의 무죄함을 입증하여 매임에서 벗어나게 하소서’란 의미이다(시 35:1, 43:1, 119:154).
너는 나보다 의롭도다. 하나님께 기대되던(15절) 판결이 사울에 의하여 먼저 이같이 행해지고 있다. 실로 증오심과 질투로 불타오르던 사울의 마음이 다윗의 진실하고도 겸손한 호소와 변호로 말미암아 녹아 내렸을 때, 사울은 사태를 바로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사울의 이러한 마음은 일시적인 감동에 근거한 사과에 불과할 뿐 진정 자신의 죄를 깊이 뉘우치는 회개는 아니었다. 이것은 얼마 후 사울이 또 다시 다윗을 죽이기 위해 추적한 사실로 보아 명백하다(26장). 이처럼 한 순간의 감정이나 감동으로 행해지는 사과는 진정한 회개에 이를 수 없고, 따라서 진실성이 결여된 것일 수 밖에 없다. 한편 ‘의롭도다’(히, 차디크)는 법정 용어로서, 법적 판단에 따른 무죄의 선언과 관련하여 사용된다(창 7:1, 신 4:8, 잠 18:5, 렘 12:1). 또한 이 단어는 하나님의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 곧 윤리.도덕적으로 선한 자에 대해서 주로 많이 사용된다(창 18:23, 삼하 4:11, 시 1:1, 겔 18:26).
여호와께서 나를 네 손에 넘기셨으나. 여기서 ‘넘기셨으나’(סִגְּרַנִי 시그라니)는 ‘닫다, 가두다’란 의미가 있는 ‘סָגַר 사가르’의 강조형이다. 그런데 이 단어는 여호와께서 당신의 뜻에 의하여 당신의 원수를 택한 백성에게 넘겨주는 것을 뜻하는 동사 ‘나탄’과는 전혀 다르다(23:4). 따라서 우리가 여기서 주목할 만한 사항은, 다윗의 부하들은 다윗이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결정적 기회를 가졌던 동일한 사건에 대하여 ‘나탄’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반면(4절), 사울 자신은 ‘사가르’라는 단어를 적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이것은, 다윗의 부하들은 사울과 다윗의 갈등과 다툼을 성전(聖戰)의 차원에서 보는 반면, 사울은 의도적으로 그렇게 보지 않고 개인적 차원의 정적(政敵) 관계로 국한시키고 있음을 강력히 시사해준다. 그러나 사울의 이러한 깨달음과 고백은 이전에 사울이 호언한 바(23:7), 하나님께서 다윗을 자신의 손에 붙이셨다고 하던 때와는 뚜렷이 대조된다(F. R. Fay).
아노니. [יָדַע 야다] 이는 일말의 의심없이 절대적으로 확신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처럼 사울의 뇌를 온통 뒤덮고 있던 시기와 증오, 의심과 적개심의 먹구름이 다윗의 진실한 호소로 인해 다 거두어진 이 순간 만큼은 사울도 모든 사실을 바로 인식할 수 있었고, 또 그 마음의 진실을 거짓 없이 다 말할 수 있었다. 다만 그러한 깨달음과 진실이 참된 회개에 이르지 못했고, 또 오래 지속되지 못한 것이 문제였다.
내 이름을 멸하지 아니할 것. 이것은 앞에 나오는 ‘내 후손을 끊지 아니하며’에 이어진 동의 대구법의 표현이다. 따라서 이 말은 ‘내 후손을 끊지 아니하며’와 동일한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즉 고대 중근동에서는 (1) ‘이름’을 곧 그 사람의 ‘인격’으로 간주했으며, (2) 또한 후손들은 조상에게 포함되는 것으로 인식됐다는 점(히 7:5) 등에서 볼 때, 사울의 ‘후손’이 멸절되는 것은 곧 사울이 멸절되는 것과 동일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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