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죄악이 … 죄가 무엇이기에. 다윗의 이 질문은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는 역설적 질문으로서, 곧 자신은 사울에게 죽임을 당할만한 아무런 죄악도 저지르지 않았다는 뜻이다. 한편, 여기의 ‘죄악’(히, 아온)과 ‘죄’(히, 핫타트)는 거의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는 단어들인데, 다윗은 이같은 동의어의 반복을 통하여 자신의 결백과 무죄를 강력히 호소한다.
내 생명을 찾느냐. ‘내 목숨을 노리는가’란 뜻이다(공동번역). 특별히 여기서 ‘찾다’(히, 바카쉬)란 불을 켜고 샅샅이 수색하는 행위를 가리킨다(출 4:19).
요나단이 슬퍼할까 두려운즉. 이것은, 사울이 다윗을 살해하려고 음모를 꾸몄을 경우 반드시 자신에게 알릴 것이라는 요나단의 호언 장담(2절)에 대한 다윗의 반론이다. 즉 사울은, 만일 자신이 다윗을 죽이려는 것을 요나단이 알면 다윗과 두터운 우정 관계에 있는 요나단이 (1) 다윗이 살해되는 것을 매우 슬퍼할 것이며, (2) 따라서 틀림없이 다윗에게 그 음모를 누설할 것을 예측하고, 그러한 사실만은 요나단에게 전혀 알리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에게 이것을 알리지 아니하리라. 즉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는 자신의 음모를 아들 요나단에게 알릴 경우 그에 관한 비밀이 누설될 것이 틀림없고, 그래서 결국 자신의 계획이 실패할 것이므로 다윗을 살해하려는 음모를 꾸민다고 해도 결코 그것에 관해서는 요나단에게 말해주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다.
나와 죽음의 사이는 한 걸음 뿐. 이 말은 요나단에게도 알려지지 않을 사울의 음모에 의해, 다윗 자신의 생명이 마치 사망의 문턱에 도달한 듯한 매우 긴박한 상황에 처해 있음을 비유적으로 강조하는 말이다. 즉 생명의 위협을 시시각각 피부로 절감하고 있다는 뜻이다.
내가 마당히 왕을 모시고 … 식사를 하여야. 초하루 때의 식사는 아마도 가족이나 친척 단위로 함께 모여 공동 식사를 했던 것 같다(Smith, Fay). 따라서 다윗도 사울의 사위였으므로(18:27). 마땅히 사울의 식탁에 참석하여야 할 자격과 의무가 있었다.
셋째 날 저녁까지 … 숨게 하고. 다윗이 요나단에게 이같이 요청한 까닭은 관례상 초하루 잔치는 이틀 동안 계속되었으므로(27, 34절). 이에 따라 ‘셋째 날’에야 요나단이 자신에게 사울의 반응(30, 31, 33절)을 알릴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들에. 문자적으로는 ‘그 들에’이다. 이처럼 여기에 정관사 ‘그’가 붙었다는 사실은 여기의 ‘들’이 다윗이 이미 지난 번에 숨었던 궁전 근처의 ‘들’이었음을 시사해 준다(19:2-3).
온 가족을 위하여. 여기의 ‘가족’(히, 미쉬파하)은 (1) 이새가 속한 유다 지파(Smith), (2) 이새의 가족(Klein) 등으로 주장된다. 그러나 첫째, 왕정(王政) 하에서 한 지파 전체가 왕의 허락 없이 모인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둘째, ‘베들레헴’은 유다 지파 전체가 모이기에는 너무 협소하며, 셋째, ‘매년제’(每年祭)는 소가족 단위로 드려진 제사(1:3)였다는 점에서 (2)의 견해가 타당하다고 볼 수 있다.
거기서. 이는 베들레헴을 가리킨다. 이처럼 하나님께 대한 제사가 지역적으로 드려진 가닭은 실로의 중앙 성소가 파괴된 후(4:10) 새로운 중앙 성소가 아직 세워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상황 하에서는 제단이 있는 곳을 중심으로 소가족 단위로 각종 제사가 드려질 수 있었다(Keil, Gerlach).
매년제를 드릴 때가 됨이니이다.. ‘매년제’(a yearly sacrifice)는 가족 단위로 매년 1차씩 드려지던 제사를 가리킨다(1:3 주석 참조). 그러나 모세 율법에서는 매년 3대 절기(유월절, 맥추절, 수장절)를 맞이하여 세 차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도록 명령한다(출 23:14-17, 34:24). 따라서 매년 1차만 드리는 여기의 ‘매년제’는 일종의 편의주의적 방법임이 분명했다. 그리고 여기의 ‘드릴 때’는 유월절, 맥추절, 수장절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출 23:14-16). 즉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세 절기 중 자신들에게 편한 한 절기를 택하여 ‘매년제’를 드렸던 것 같다. 아무튼 이처럼 이 제사는 율법에서 엄중히 명령되는 만큼, 다윗에게는 사울 왕이 베푼 초하루 잔치에 불참할만한 충분한 명분이 될 수 있었다. 더욱이 그 때 베들레헴에서 이 매년 제사가 그의 가족에 의해 드려진 것도 사실이었을 것이다.
네 종에게 인자하게 행하라. 이 말은, 다윗이 베들레헴에 매년제를 드리러 갔다는 요나단의 보고에 대하여 사울이 부정적인 반응을 보일 경우를 가상해서 요나단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말이다. 사실 사울이 죽이려 할 경우 다윗은 요나단의 도움을 받아 도망칠 수 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그런데 여기의 ‘인자하게’(히, 헤세드)는 원래 명사로서 언약적 관계에 따라 베풀어지는 특별한 사랑 및 은총을 가리킨다.
네가 … 너와 맹약하게 하였음이니라. 다윗이 요나단에게 담대히 도움을 요청할 수 있었던 근거는 요나단의 주관 하에 맺어진 신실한 언약 때문이었다(18:3-4). 다윗이 이처럼 단순한 우정이 아닌 언약 관계를 근거로 해서 도움을 호소한 까닭은 (1) 단순한 우정 관계는 부자(父子)관계보다 우선될 수 없으며 (2) 여호와 앞에서 그 이름으로 맺은 언약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는 것이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의 통념이었기 때문이다.
내게 죄악이 있거든 … 친히 나를 죽이라. 이 말은 다윗이 자신의 무죄와 결백을 강조하는 말이다. 즉 다윗은 이같은 말을 함으로써, 요나단이 부친 사울의 뜻과는 달리 자신을 돕는 일이 거리낌 없는 옳은 행위임을 강력히 시사한다.
누가 그것을 내게 고하겠느냐. 이것은 사울로부터 자신을 죽이려는 음모에 관한 정보를 요나단이 입수했다고 해도, 사울의 방해와 협박 때문에 요나단이 자신에게 그 사실을 알리는 일이 결코 쉽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들. 문자적으로는 ‘그 들’이다. 이것은 말할 나위없이 사울의 궁전 근처의 들판을 가리킨다(5절, 19:3).
증언하시거니와. 이것은 원문에는 없는 말이나, 의미를 강화하기 위한 번역자의 삽입구이다.
내일이나 모레. 초하루 잔치가 벌어지는 이틀 동안을 가리킨다 <5절>.
내 아버지를 살펴서. 이것은 다윗이 매년제에 참석하러 베들레헴에 갔다는 이야기를 사울에게 하고, 또 그 이야기를 들은 사울의 반응을 살피는 것을 가리킨다(6, 7절).
보내어. 이것은 요나단이 직접 전달하지 아니하고, 전령을 보내겠다는 뜻이다. 이처럼 다윗에 대한 사울의 의향이 선하게 나타날 경우 요나단이 전령을 보내겠다고 한 까닭은, 그러한 경우에는 분명 사울의 마음이 누그러진 상태일 것이므로 전령을 보내도 별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없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 벌을 … 내리시기를 원하노라. 이같은 맹세는 원래 고대 중근동 지역에서 동물을 죽이는 상징적 행위와 함께 이루어졌다(3:17). 즉 맹세를 파기할 경우 그 동물의 죽음과 같은 신세가 될 것이라는 의미였다. 그리고 그만큼 맹세에는 책임과 의무가 뒤따른다는 의식이었다. 한편 맹세를 지키지 않을 경우 여호와께 벌을 받을 것이라는 요나단의 이 맹세적 표현은 ‘여호와’를 증인으로 세웠던 12절의 맹세와 잘 부합된다.
여호와께서 내 아버지와 함께 하신 것 같이. 여기서 ‘하신’(히, 하야)이 완료형이라는 점에서, 요나단은 하나님께서 과거에는 자신의 아버지와 함께 계셨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16:14).
너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니. 여기서 ‘하시기를 원하노니’(히, 예히)가 미완료 시제 즉 미래형이라는 점에서, 여기 이 문구는 지금부터 앞으로 계속 하나님께서 다윗과 함께 하실 것을 소원하고 확신하는 말이다 (1:13, 17:37, 18:12). 이것은 결국 요나단이, 이스라엘의 왕권이 자신의 아버지 사울에게서 다윗에게로 넘어갔다는 사실을 이미 깨닫고 있었음을 뜻한다(14-15절, 23:17).
내가 사는 날 동안에 … 나를 죽지 않게. 이 말은 요나단이 다윗의 등극이 자신의 생전에 있을 것으로 예측했음을 시사해 준다. 그러나 실상 요나단은 길보아 전투에서 자신의 부친 사울과 함께 전사함으로써, 생전에 다윗이 왕이 되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31:2-6).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내게 베풀어서. ‘여호와의 인자하심’(히, 헤세드 야훼)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당신의 계약 백성들에게 베푸시는 신실한 계약적 사랑을 가리킨다(8절). 여기서 요나단은 이 말을 함으로써, 자신과 다윗 사이에 맺어진 언약 관계를 다윗으로 하여금 깊이 상기시키려 한다. 한편, 이처럼 요나단이 현재 다윗을 돕는 자이면서도 오히려 겸손히 다윗에게 ‘인자’를 요청하면서 그를 축원하고 있는 것은, 그가 왕자로서 명예욕과 권세욕에 초연했음을 보여 준다. 더 나아가 다윗에 대한 요나단의 전적인 협조와, 그리고 장차 인자 베풀 것을 요청한 것은 사울 대신 다윗을 들어 쓰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과 섭리에 요나단이 전적 순종하였다는 사실을 시사해 주며, 실로 요나단은 탁월한 신앙 인격을 가진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너는 네 인자함을 내 집에서 … 끊어 버리지 말라. 이것은 장차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고 사울의 가문은 멸망할 때에, 요나단 자신의 직계 후손만은 멸망되지 않도록 특별한 배려를 원한다는 뜻이다. 사실 요나단의 이같은 간청은 후일 다윗에 의해 받아들여져, 후에 요나단의 후손은 다윗으로부터 특별한 대우를 받았다(삼하 9:6-7).
여호와께서는 다윗의 대적들을 치실지어다. 앞 절의 해석 방법에 근거할 때 이 문구 역시 ‘여호와께서는 다윗의 적들의 손으로부터 그것을 요구하실 것이다’(KJV)로 번역함이 타당하다. 결국 이것은 다윗이 요나단 자신과의 언약을 이행치 않을 경우, 다윗은 여호와께로부터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뜻으로(창 31:39, 삼하 4:11). 요나단은 그 신적인 저주가 다윗의 대적들을 통해서 내려질 것이라고 말한다. 즉 대적들을 토벌하려다가 오히려 그들에 의해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뜻이다.
요나단이 … 다시 맹세하게 하였으니. 이는 요나단이 먼저 다윗을 도와줄 것을 맹세한 뒤, 이어 다윗이 후일 요나단의 후손들을 배려해 줄 것을 맹세하였음을 뜻한다. 이러한 맹세는 맹세한 쌍방 중 어느 한 편이라도 그 맹약을 어긴다면 하나님께서 그를 친히 심판하실 것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자기 생명 … 같이 … 사랑함이었더라. 18:1 주석 참조.
사흘 동안 있다가. 이것은 원문대로 ‘제3일에’로 번역되어야 한다. 즉 이틀 동안 계속되는 초하루 잔치가 끝나는 다음 날을 가리킨다.
빨리 내려가서. 여기의 ‘내려가서’(히, 테레드)는 본 문맥의 흐름상 적절치 못하다. 왜냐하면 여기의 언급처럼 만일 다윗이 빨리 내려가야 ‘숨었던 곳’에 도달한다면, 다윗이 사흘 동안 숨을 곳은 자신이 원래 숨어있겠다고 요나단에게 약속한 지점(5절)과 다르다는 결론이 나오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의 ‘내려가서’는 사본상의 문제가 있을 가능성이 있다. 이에 따라 혹자는 칠십인역(LXX)을 따라서 ‘테레드’를 ‘파카드’(‘찾다’, ‘묻다’란 뜻)의 단순 수동형인 ‘티파케드’로 고쳐야 된다고 주장한다(6절). 만일 이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말 번역의 ‘내려가서’는 ‘찾아지리니’란 의미로 바뀌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맥락에서 ‘빨리’(히, 메오드)는 ‘무척’, ‘대단히’로 번역되어야 할 것이다.
그 일이 있던 날에 숨었던 곳. 여기서 ‘그 일’은 다윗이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 왕의 음모 때문에 요나단의 도움을 받아 숨었던 사건을 가리킨다(19:1-3). 따라서 여기 ‘숨었던 곳’은 사울 궁전 근처의 은밀한 들을 가리킴이 분명하다.
이르러. 이것은 다윗이 요나단과의 담화가 끝나는 즉시 ‘은밀한 들판’으로 가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나 우리말 개역 성경의 번역은 마치 사흘째에 그리고 가라는 말처럼 오인케 한다.
에셀 바위 곁. ‘에셀’은 ‘가다’, ‘출발하다’의 의미를 갖는 동사 ‘아잘’에서 파생되었다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여기의 ‘에셀 바위’는 방향 표시를 위하여 세워진 바위를 가리키는 듯하다(Smith).
화살을 찾으라. 이같은 일은 전쟁 물자가 매우 부족했던 그 당시의 상황에서 볼 때, 무기 든 자에게 매우 당연한 일로 여겨졌음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요나단은 무기 든 자가 이 일을 자연스럽게 생각한다는 사실을 이용하여 다윗에게 정보를 제공할 기회를 만들었던 것이다.
네가 평안 무사할 것이요. 직역하면 ‘네게 평안이 있을 것이요’란 뜻이다. 구체적으로는 사울이 다윗에 대하여 살의를 품지 않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너와 내가 말한 일. 이는 단지 둘 사이에 묵계된 암호(20-22절) 뿐만 아니라, 요나단과 다윗이 새롭게 다지고 맺은 우정의 맹약(12-17절)도 포함한다. 즉 그 맹약에 살아 계신 여호와께서 증인과 판결자로서 영원히 지켜보고 계실 것이라는 의미이다.
초하루. 5절 주석 참조.
요나단은 서 있고. 여기의 ‘서 있고’(히, 야캄, 원형은 ‘쿰’)는 요나단이 그 때 식탁을 대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볼 때 매우 부자연스러운 자세이다. 따라서 이같은 문제의 해결을 위해 다음과 같은 견해가 제시되었다. 즉 (1) 여기의 ‘야캄’을 사본상의 오류로 보고 ‘코프’와 ‘멤’사이에 ‘달렛’을 삽입시켜 ‘에카뎀’으로 수정하여 ‘맞은 편에 위치하다’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LXX, Klein, Ewald, Bunsen, Thenius), (2) 여기 ‘쿰’의 의미를 ‘오다’란 말로 이해하여 ‘요나단이 왔다’란 뜻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De Wette, Maurer), (3) 사본을 정확한 것으로 보되, 다만 ‘(요나단이) 자신의 위치를 잡다’란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고 하는 견해(Mastin) 등이 제시되었다. 그런데 우리는 첫째, 여기의 ‘서 있고’(히, 쿰)라는 동사가 단순히 서있는 동작만을 의미하지 않으며(16:12, 창 43:13), 둘째, 히브리 본문을 최우선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일반 해석론에서 볼 때 (3)의 견해를 존중하는 입장에서, 곧 처음 요나단이 사울의 곁에 자리 잡았다가, 아브넬이 들어옴으로써 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양보했다는 뜻이거나, 아니면 군대 장관이요 숙부인(14:51) 아브넬이 들어오자 경의를 표하기 위해 단순히 잠깐 일어나는 자세를 취했다가 다시 앉은 행위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the Vulgate, Keil, Fay).
아브넬 … 다윗. 결국 초하루 어전 잔치의 참석자는 왕 사울, 왕자 요나단, 군사령장 아브넬, 천부장 다윗 등 4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 사울 왕을 중심으로 부자(父子) 관계, 사촌 형제 관계, 사위 관계 등 혈연으로 얽혀있었다는 점에서 가족 잔치의 성격도 띠고 있었다. 아무튼 이들 4인은 당시 이스라엘 왕정 제도의 핵심 수뇌부인데, 고대 초창기 왕정의 성격상 이러한 혈연 중심의 통치는 당시 보편적이었다(Leon Wood).
어찌하여 … 오늘 식사에 나오지 아니하느냐. 사울의 이 말은 여러 사유 등으로 인하여 부정하게 된 자는 그 당일에는 부정하지만 그 다음 날에는 깨끗하게 된다는 율법규정을 염두에 두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레 15:1-27). 바로 이같은 율법 규정을 아는 사울은, 다윗의 첫날 식사 불참은 그가 부정하게 되었기 때문에 그런 것으로 보고 용납할 수 있었으나(26절) 그 다음 날에도 불참한 것은 첫 날의 불참과는 달리 용납할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 이유를 묻고 있는 것이다.
패역무도한 계집의 소생아. 여기서 ‘패역’(히, 나아와트)은 ‘구부러지다’(히, 아와)에서 파생된 단어로서, 극도로 사악한 마음의 상태를 가리킨다(잠 12:8). 그리고 ‘무도’(히, 마르두트)는 ‘반역하다, 거역하다’(히, 마라드)에서 파생된 단어로서, 반항적이고 배타적인 마음의 상태를 가리킨다(창 14:4, 수 22:16, 왕하 18:20). 또한 여기의 ‘계집’은 사울 자신의 아내 곧 요나단의 생모 ‘아히노암’(14:50)을 가리킨다. 그러나 자신의 아내 아히노암에 대하여 사울이 이같이 언급한 것은 그녀가 그같은 행위와 어떤 관련이 있다는 뜻은 절대로 아니다. 다만 사울은 요나단의 어머니를 나쁜 여자로 몰아버림으로써, 즉 요나단을 처음 출생부터 잘못된 인물로 선언함으로써 그 아들 요나단의 ‘패역무도’함을 강조하려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원문을 따라 직역하면 “너 사악하고 반역적인(계집의) 아들아!”(NIV, RSV)란 뜻인데, 이처럼 어머니까지 들먹이며 욕하는 이런 행위는 특히 고대 중근동 지역에서는 극도의 증오와 분노를 나타내는 가장 격렬한 감정의 표시였다. 결국 이러한 사울의 행동은 다윗에 대한 적개심과 증오로 말미암아 이제는 자신의 아들마저 아들로 인정치 않을 정도로 비정상적인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이처럼 인간이 지니는 악한 감정은 결국 자신의 인격마저 파탄시키고 만다.
네가 이새의 아들을 택한 것. 여기서 ‘택하다’(히, 바하르)란 말은 사랑과 신의(信義)로써 사랑하는 행위를 가리키는데, 곧 요나단이 다윗과 친구가 되어 그 편을 들어 행동하는 상태를 말한다. 한편 여기 ‘이새의 아들’에 대한 해석은 27절 주석을 참조하라.
네 수치. 사울의 왕권이 다윗에게 넘어갈 경우 마땅히 사울의 왕권을 이양받을 권한이 있던 왕자 요나단이 당할 여러가지 부끄러움을 가리킨다.
네 어미의 벌거벗은 수치. 이 말은 다윗에게 사울의 왕권이 넘어감으로써 심한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요나단으로 인하여 요나단의 어미가 그를 낳은 일 자체를 부끄러워 할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사울의 이러한 말은 이기주의적 발상에서 비롯된 독선이고 아집이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다윗을 성실히 도와준 요나단은 오히려 그의 그러한 선행 때문에 가문의 수치를 벗고 다윗으로 말미암아 축복을 받게 되었다(31:9-13, 삼하 4:12, 9:1-13).
그는 죽어야 할 자이니라. 문자적으로는 ‘그는 사망의 자식이니라’이다. 반드시 다윗을 죽이고야 말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명으로, 이는 곧 다윗을 차기 이스라엘 왕으로 세우시려는 하나님의 계획과 주권에 정면 도전하는 선전 포고로 볼 수 있다. 이처럼 사울의 악한 감정은 이제 그를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하고 대항하는 자로까지 발전시키고 말았다. 그러나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의 결국은 멸망뿐이다(31:4-5, 나 1:2).
그 달의 둘째 날에는 먹지 아니하였으니. 이것은 월삭 잔치 둘째 날의 음식(27절)을 먹지 않았다는 사실을 뜻한다.
아버지가 다윗을 욕되게 하였으므로. 이는 매년제를 드리러 고향 베들레헴으로 갔다는 다윗을 부친 사울이 정당한 이유없이 반역자로 몰아, 반드시 ‘죽일 자’(31, 33절)로 간주했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작은 아이. [히, 나아르] 차라리 ‘소년’으로 번역함이 자연스럽다(22절, 14:1).
화살을 주워 가지고. 히브리 본문에는 여기 ‘화살’(히, 헤치)이 단수로 표기되었지만, 난외주에는 복수 ‘살들’(히, 힛침)로 표기되어 있다. 그 이유는 이미 요나단이 다윗과 약속할 때 ‘화살 셋’을 쏘기로 했기 때문이다(20절). 아마도 요나단은 화살 셋을 연이어 쏜 것 같다(Bunsen).
땅에 엎드려 세 번 절한 후에. 요나단을 향한 다윗의 이 행동은 요나단이 다윗 자신에게 큰 호의를 베풀어준 데 대한 감사의 표시였을 것이다(Hertzberg). 즉 땅에 엎드려 얼굴을 숙이는 자세는 일반적으로 왕이나 왕자에게 경의와 예우를 갖추어하는 절을 의미한다(삼하 9:6, 14:33). 그러나 여기 다윗의 절은 그러한 형식적인 경의나 예우의 표시가 아니라, 풍전등화의 목숨을 구해준 생명의 은인에 대한 감사의 표시였다. 이런 의미에서 요세푸스는 이 언급에 대하여 ‘다윗은 요나단을 존경하여 그를 자신의 생명의 주라고 불렀다’라고 의역하였다.
서로 입 맞추고. ‘입맞춤’은 보통 ‘만남의 기쁨’이나 ‘이별의 슬픔’을 표하기 위해 포옹과 더불어 이루어졌는데, 대체로 이마나 볼이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따라서 여기서도 슬픈 이별의 순간을 맞이하여 생명 같이 사랑하는 친구의 앞날을 서로 걱정해주면서 우정과 사랑의 입맞춤을 하고 있는 것이다(창 29:11, 33:4, 45:15, 출 4:27, 18:7, 룻 1:9, 14, 왕상 19:20, 행 20:37).
같이 울되 다윗이 더욱 심하더니. 이것은 (1) 깊은 사랑과 우정의 교제를 나누던 친구가 비극적 현실 앞에서 기약없이 서로 헤어져야 한다는 사실, (2) 그 중 한 친구는 목숨의 보존을 위해 향후 정처없이 방랑해야 하는 비참한 신세가 됐다는 사실 때문이었을 것이다. 더욱이 다윗은 전혀 자신의 뜻과는 달리 반역자로 몰려 왕과 국가에 충성할 기회를 갖기는 커녕 친구와 가정과 떨어져, 왕과 원수가 되어 정처없이 도피의 길을 떠나야 된다는 그 어이없는 현실에 그동안 참았던 설움이 복받쳐 올라와 길고깊은 울음으로 터져 나왔을 것이다.
평안히 가라. 요나단의 사랑과 우정이 함축된 마지막 작별 인사이다. 다윗과 요나단은 길게 작별을 나눌 시간조차 없었다. 다윗의 목숨을 노리는 사울과 그 측근들의 눈초리가 사방에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요나단은 순간의 격정이 지난 뒤 ‘평안히 가라’란 말로 다윗을 기약없이 떠나 보내고 있다. 진정 요나단의 작별 인사처럼 깊은 사랑과 우정이 깃든 평안(샬롬)에의 기원이야말로 인간과 인간 사이에 나눌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선물이라고 할 수 있다.
다윗은 … 떠나고 요나단은 … 들어가니라. 마침내 다윗은 친구와 가족을 등지고 사울의 추격을 피해 사울이 죽는 날까지(31:6) 온갖 고난이 뒤따르는 정처없는 도피 생활에 접어들게 되었다(21-31장). 한편 다윗과 요나단은 요나단이 길보아 전투에서 부친 사울과 함께 전사하기 전, 십 황무지 수풀 속에서 잠시 상면한 일(23:16-18)을 제외하고는 다시 서로 만나지 못했다. 후일 다윗의 노래 속에는 요나단의 죽음을 서러워하는 다윗의 애도의 심정이 잘 나타나 있다(삼하 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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