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다에 속한 소고. ‘소고’는 ‘가시가 많은 곳’이란 의미이다. 이곳은 유다 산지와 블레셋 평원, 곧 세펠라 지역에 위치한 요새 도시 중 하나로서(수 15:35), 오늘날 와디숨트(Wady Sumt)지역에 위치한 ‘슈웨이케’(Shuweikeh)로 추정된다(Keil, Smith). 베들레헴 서쪽 약 22.5 km, 아세가 남동쪽 약 4.8 km 지점에 위치해 있다. 한편 블레셋 군이 유다에 속한 이 곳에 진을 치고 있었다는 사실은 이미 이스라엘에 대해 기선을 장악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아세가. ‘파헤친 땅’이라는 의미이다. 이곳은 아얄론 골짜기(수 10:12) 남부의 견고한 도시로서, 해발 약 120m 가량이다. 수 10:10 주석 참조.
에베스담밈에 진 치매. ‘에베스담밈’은 ‘피의 경계선’이란 의미이다. 이같은 지명은 그곳에서의 잦은 전투로 많은 피가 흘려졌기 때문에 붙여졌을 것이다. 이곳은 소고(슈웨이케) 동북쪽 약 2.5 km 지점으로 현재의 ‘다뭄’(Damum)으로 추정된다(Keil, Fay). 한편 대상 11:13에는 ‘바스담밈’으로 표기되어 있다.
전열을 벌였으니. ‘전열을 벌이다’(히, 아라크)는 ‘상대를 엄습하다, 일렬로 정렬하다’란 의미이다(4:2, 욥 6:4). 여기서는 블레셋에 대한 이스라엘의 방어적 자세를 가리킨다.
그 사이에는 골짜기가 있었더라. 여기의 ‘골짜기’(히, 가이)는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는 일반적 의미의 골짜기(히, 에멕)와는 전혀 다른, 좁고 급격한 경사를 이루고 있는 협곡을 뜻한다(Conder). 바로 이같은 지형적 요인 때문에, 이스라엘과 블레셋은 마주보면서도 쉽사리 전투를 벌이지 못했을 것이다(PulpitCommentary).
그의 이름은 골리앗. ‘골리앗’이란 이름이 갖는 정확한 의미에 대해서는 현재까지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 까닭은 이 사람이 비셈계 인종에 속하기 때문이다.
가드 사람. ‘가드’는 아세가 서쪽 약 8.9 km 지점으로, 블레셋 5대 도시 중 하나이다(5:8). 그런데 이 지역에는 거인족인 아낙 족속이 섞여 살고 있었다(수 11:22). 그러므로 분명 골리앗도 이 거인족의 후예일 것이다.
그의 키는 여섯 규빗 한 뼘이요. 고대의 측량법에 근거하여 한 규빗을 약 45 cm 정도로, 한 뼘(Span)을 약 13 cm 정도로 본다면, 골리앗의 키는 약 283 cm 정도로 추정될 수 있다. 한편 NEB는 274 cm로 환산하였고, NIV와 Living bible은 ‘9피트 남짓’(over nine feet, 약 270 cm 남짓)으로 보았다. 아무튼 골리앗은 270 cm 이상으로, 보통 사람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장대한 거구였음이 분명하다.
몸에는 비늘 갑옷을 입었으니. ‘비늘 갑옷’(히, 카스케세트)은 천 위에 비늘 모양의 놋이나, 철판 조각을 다닥 다닥 붙여서 만든 갑옷(coat of mail, KJV / coat of scale armor of bronze, NIV)으로(Aquila), 고대의 전투 때에 왕이나 군장에 의해 주로 착용되곤 하였다(Layard).
그 갑옷의 무게가 놋 오천 세겔. 한 세겔은 약 11.5 g이므로, ‘오천 세겔’은 약 57.5 kg이다.
어깨 사이에는 놋 단창을 메었으니. ‘놋 단창’(히, 키돈)은 어깨의 뒷 부분에 차는 창을 가리킨다. 혹자는 이것을 방패라고 주장하나(LXX, Vulgate, the Syriac) (1) 고대에 방패는 대개 무기 드는 자가 별도로 갖고 다녔으며(7절) (2) 견고한 갑옷에 의해서 등 부분도 충분히 보호될 수 있다는 점(Josephus) 등에서, 여기 ‘놋 단창’은 방어용 무기인 방패라기 보다는 오히려 창과 같은 공격용 무기로 봄이 타당할 것이다. 그리고 본 단어가 단수라는 점에서, 이것은 손으로 던져 적을 살상하는 단검류는 아닌 듯하다.
창 날은 철 육백 세겔. 600 세겔은 약 7 kg이다. 따라서 이것은 골리앗의 창이 엄청나게 컸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4-7절에 묘사된 블레셋 군대의 선봉장 골리앗은 그 거대한 키나 육중한 무기 등이 보통 사람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조차 없을 만큼 크고 강했다. 마치 우뚝 솟은 난공 불락의 요새와 전혀 다를 바 없었던 것이다.
그가 서서. 골리앗은 그 때 언덕 위에 있던 자신의 진영을 나와 골짜기의 중간쯤에 우뚝 버티고 서 있었을 것이다.
어찌하여 … 전열을 벌였느냐.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블레셋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하여 군대를 이끌고 나와 진을 치고, 골짜기 언덕에 대열을 이루고 있는 사실을 가리킨다.
나는 블레셋 사람 … 너희는 사울의 신복. 여기서 ‘나는 블레셋 사람’이란 말은 골리앗 자신이 블레셋 군대의 힘을 대표하는 자란 뜻이다(Keil). 그리고 ‘너희는 사울의 신복’이란 말은 이스라엘 민족이 중앙 집권적 군주 사울에 의해 철저히 예속되어 있다는 사실을 조롱하는 말이다. 이것은 여기의 ‘신복’(히, 아바림)이란 단어가 ‘종들’ 혹은 ‘노예들’이란 의미를 갖고 있다는 사실로써도 잘 알 수 있다. 아무튼 골리앗은 이같은 언급들을 통하여 이스라엘에 대한 블레셋의 우월성을 과시하고, 사울과 이스라엘 군대를 모욕 흥분케 함으로써 자신의 목적을 이루려 한 것이다.
나와 더불어 싸우게 하라. 골리앗이 이스라엘에게 자신과 맞서 싸울 용사를 요구만 하고 이스라엘 진영으로 접근해 갈 수 없었던 이유는 (1) 무엇보다도 이스라엘의 진영이 가파른 산 위에 자리잡고 있었으며, (2) 또한 그는 중무장을 하여 몸이 무거웠기 때문일 것이다.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 ‘에브랏’은 베들레헴의 고대 명칭으로서(창 48:7), 족장 야곱의 아내 라헬이 산고로 죽은 곳이며(창 35:16-19), 무엇보다도 후일 선지자 미가의 입을 통해 메시아가 태어날 장소로 예언된 곳이다(미 5:2). 한편 본서 저자는 여기서 ‘유다 베들레헴’이라고 분명히 밝힘으로써 스불론 지파의 베들레헴과 구별했고(수 19:15, 삿 12:8), 또한 ‘에브랏 사람’이라고 밝혀줌으로써 이새의 집안이 베들레헴 본토인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했다. 결국 유다 베들레헴은 이스라엘의 성군 다윗의 고향으로서, 그리고 장차 메시아 그리스도가 태어날 곳으로서 구속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임을 알 수 있다.
이새는 … 나이가 많아 늙은 사람. ‘늙은 사람’(히, 자켄)는 성경에서 보통 ‘장로, 노인’으로 번역되는 단어이다. 한편 ‘나이가 많아’는 ‘나이에 있어서 다른 사람들보다 앞섰다’란 의미이다. 결국 이같은 언급은 이스라엘 사람들 대부분이 참전하고 있던 블레셋과의 전쟁에 이새가 참전치 아니했던 이유를 제시해 준다(Fay). 한편 스미드(R. Payne Smith) 박사는 당시 이새에게는 장성한 세 아들이 있었고, 도합 8명의 자녀가 있었던 사실에 근거하여 이새의 나이를 최소한 60세 이상으로 보았다.
여덟 아들이 있는 중. 16:10-11에서도 이새의 아들은 여기서처럼 여덟 명으로 언급되고 있으나, 대상 2:13-15에서는 일곱 명으로 나와 있다. 이같은 차이를 규명해보려는 시도로서는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다. (1) 이새의 아들은 원래 여덟 명이었으나 한 명은 죽었다고 보는 견해(Keil, Smith), (2) 이새의 아들은 원래 일곱 명이었으나 16:10에서 다윗을 제외하고도 일곱 명이라고 한 까닭은 많은 다른 아들들은 하나님에 의해 선택되지 못했음을 강조하려는 의도 때문이었다고 보는 견해(Klein) 등이다.
엘리압 … 아비나답 … 삼마. 16:6-9 주석 부분 참조.
베들레헴에서 … 양을 칠 때에. 이것은 오히려 ‘베들레헴에서 양을 치기 위하여’(to feed … sheep at Bethlehem, KJV)로 번역함이 타당하다. 즉 이것은 다윗이 수금을 타던 일을 그만 두고, 사울의 곁을 떠났던 한 가지 목적을 언급하는 어구이다.
사십 일을 … 몸을 나타내었더라. 이것은 블레셋과의 전투가 계속적으로 소강 상태에 머물고 있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이같은 상태가 계속된 까닭은 (1) 이스라엘 측에서 골리앗을 상대할 용사를 아직껏 내보내지 못했으며(11절) (2) 블레셋은 이스라엘의 진영이 자리잡고 있던 지형적 조건상 전면 공격을 감행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고 보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3절 주석). 그러나 블레셋의 선봉장 골리앗의 계속 되는 위협으로 말미암아 전황은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이스라엘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여기 ‘사십 일’은 이스라엘이 위기에 처해 있었음을 예시해주는 어구로 보아야 할 것이다(창 8:6, 삿 13:1, Krinetzki). 즉 본서 저자는 여기서 구체적으로 이스라엘이 위급한 상황을 맞이하고 있다는 언급은 하지 않았으나, 이같이 시련과 위기의 수인 ‘사십 일’이라는 말을 특별히 언급함으로써, 다윗이 매우 필요 적절한 시기에 이새에 의해 블레셋과의 전투 장소에 보내졌음을 강력히 암시하려고 한 듯하다.
볶은 곡식 … 떡 … 치즈. 성경에서 이것들은 제대로 먹지 못해 곤고한 자들에게 적절한 음식으로 주로 언급되고 있다(25:18, 삼하 17:28, 룻 2:14). 특히 ‘볶은 곡식’과 ‘떡’은 서민들에 의해 애호되던 음식이었다(Krinetzki). 그리고 ‘치즈’(히, 할라브)는 문자적으로는 ‘우유’를 뜻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건조한 우유덩어리’를 가리킨다. 한편 ‘한 에바’는 약 23리터에 해당하는 구약 시대 고체량의 부피 단위이다(출 16:36).
증표를 가져오라. 이것은 (1) 다윗이 제대로 형들을 만나 형들의 안부를 살폈는지의 여부, (2) 예물이 전달됐는지의 여부, (3) 다윗에 의해 이새에게 전달될 형들에 관한 소식의 진위 여부를 증명할 어떤 ‘증거물’(token, RSV)을 뜻한다. 틀림없이 이것은 서신의 형태였을 것이다(F. R. Fay).
진영. [히, 마갈라] 이것은 ‘둥글게 하다’라는 의미를 갖는 동사 ‘아갈’에서 파생된 단어로서, 고대 수비 진지의 일반적 형태인 둥근 모양을 한 바리케이드를 가리킨다(Lange). 한편 칼뱅(Calvin)은 이 바리케이드가 병거로 이루어졌다고 보고 ‘병거의 장소’로 이해하였다(26:5, 7).
짐 지키는 자. 새영어성경(NEB)은 이 말을 ‘병참 장교’(quartermaster)로 번역하였다. 이 번역을 따른다면, 다윗은 그 때 집에서 가져온 음식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전하지 않고, 여기의 이 병참 장교의 손을 통해 형들에게 전달하려고 했던 것 같다.
전과 같은 말. 곧 8-10절의 내용과 같은 모욕과 조롱의 말.
많은 재물로 부하게 하고. 이와 같이 큰 재물을 약속함으로써 군대의 사기를 북돋우는 경우는 성경에 많이 언급된다(수 15:16, 삿 1:12, 삼하 18:11, 대상 11:6). 한편 당시는 왕정이 실시된 지 20여년(15:1) 이란 세월이 흐른 뒤였으므로, 아마도 사울 왕가는 어느 정도의 행정 조직을 갖추고 백성들로부터 세금을 거둬들임으로써 많은 재정을 보유하고 있었을 것이다(8:15, 17). 사실 고대 군주국에서는 군주가 자신의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 신하의 충성에 대한 보상이 뒤따랐고, 따라서 그러한 관습이 군주가 많은 재정을 보유하려 했던 목적 중의 하나였다(8:14-15).
그의 딸을 그에게 주고. 성경에는 ‘메랍’과 ‘미갈’이라는 두 딸만이 사울의 딸로서 언급되고 있다(14:49). 그러나 사울에게는 이들 외에도 또다른 딸들이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서에 이 두 명 만이 언급된 까닭은, 이 둘만이 다윗과 특별한 관계를 가지기 때문이다. 즉 맏딸 ‘멜랍’은 결국 다른 남자와 혼인을 하지만 처음에는 다윗에게 주기로 약속되었었고(18:17-19), 또한 둘째 딸 ‘미갈’은 결국 다윗에게 주어졌다(18:20-27). 어쨌든 왕의 사위가 된다는 것은 매우 매력적이며, 의미 심장한 일이었다. 특히 이미 기름 부음을 받아 차기 왕으로 확정된(16:13) 다윗에게는 그 일이 왕좌로 나아가는 자신의 길을 보다 평탄게 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 아버지의 집을 … 면제하게 하시리라. 사울의 이 약속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다. 즉 (1) 왕과 백성 사이의 중간 계급 혹은 귀족 계급으로 올려주는 것을 의미한다는 견해(Lemche, Ewald), (2) 세금 납부를 면제해 주는 것을 의미한다는 견해(Fay), (3) 부역을 면제해 주는 것을 의미한다는 견해(Smith) 등이다. 그러나 첫 번째 견해는 그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는 중간 계급이 형성되어 있지 않았다는 점에서 (Mccarter), 그리고 두 번째의 견해는 ‘면제하게 하시리라’(히, 하파쉬)는 단어가 성경 용례상 세금의 면제를 전혀 뜻하지 않는다는 점에서(출 21:2, 신 15:12, 렘 34:10) 타당치 않다. 반면에 세 번째의 견해는 ‘면제하게 하시리라’라는 단어가 대체적으로 육체적 억압에서의 해방을 의미하며, 또한 우가릿 문서에 용감한 행동을 한 사람이 왕에 의하여 노예의 신분에서 자유인이 되었다는 평행 구절이 나타나고 있다는 점에서(Klein) 타당성이 있다. 한편 여기 ‘아버지의 집’은 가문 전체를 가리킨다.
어떠한 대우를 하겠느냐. 이것은 다윗이 이미 약속된 것(25절)보다 더 큰 상급을 사울에게 약속 받으려 했음을 가리키지 않는다. 다만 다윗은 그 때 이 말을 함으로써 골리앗을 죽이는 일의 당위성, 시급성을 시사하려고 했었던 것이다. 이같은 사실은 (1) 본 절의 후반부 ‘이 할례 받지 않은 … 모욕하겠느냐’라는 말과 (2) 이후 딸을 주겠다는 사울의 제안을 다윗이 사양했다는 언급(18:18) 등을 통해 분명해진다.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 이 말은 블레셋 사람들이 대체로 포경 수술을 안 했다는 사실 자체 보다는, 그들이 이스라엘과는 달리 하나님과의 거룩한 언약 관계에 있지 않은 이방 민족이라는 사실에 강조점이 있다(14:6 주석 참조). 그러므로 다윗의 이 말에는 자신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라는 자부심과 하나님께서 자신과 반드시 함께 하실 것이라는(16:18) 확신이 담겨 있었다.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 이같은 문구는 이방인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행동에 관한 언급이 다뤄지는 문맥 중에 종종 나타난다(Klein, 수 3:10, 왕하 19:4).그리고 여기 ‘살아 계시는 하나님’(히, 엘로힘 하임)은 말할 나위없이 블레셋이 섬기던 다곤(Dagon, 5:2 주석 참조) 우상의 무기력함과 무가치함을 경멸하는 말투임이 분명하다(렘 10:6-10). 이같은 다곤 우상의 무기력성은 다곤의 이름을 빙자하여 골리앗이 한 다윗에 대한 저주가 아무런 효험을 나타내지 못했다는 결과적 사실로써 증명되었다(43절). 뿐만 아니라 다곤 우상의 무기력함은 과거에 하나님의 언약궤 앞에 완전한 항복을 함으로써 백일하에 폭로되지 않았던가(5:3-4)! 한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의분으로 활활 타올랐던 소년 다윗의 이 말은 당시 사울 통치하의 무기력하고 침체된 이스라엘 군대의 무감각성을 일깨워 주는 각성제가 되었을 것이다.
네가 어찌하여 … 내려왔느냐. 이것은 베들레헴이 해발 690 m 높이의 고지에 위치한 성읍이었다는 사실을 통하여 이해될 수 있다(15:12, 16:2).
양들을 누구에게 맡겼느냐. 엘리압의 이 말은 (1) 양을 지키는 본연의 임무에 태만했다는 것, (2) 쓸데 없는 일에 공연히 참견했다는 것 등을 지적한, 다윗에 대한 부당한(20절) 책망이다(Lange).
나는 네 교만과 … 완악함을 아노니. 여기서 ‘교만’은 목동의 주제를 벗어난 이기적 욕심(25절)을 지적한 말이고, ‘완악’은 피흘리는 전쟁을 보고 즐기고자 하는 사악한 심성을 지적한 말이다. 그런데 이러한 ‘교만’과 ‘완악’은 모두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을 지적하고자 할 때 성경에서 종종 사용되는 단어들이다(신 17:12, 18:22, 렘 7:24). 그러므로 결국 형 엘리압은 이같은 단어를 다윗에게 적용함으로써, 다윗의 거룩한 열정과 의분을 한낱 이기적인 교만과 사악함으로 격하시키고 있다. 이로 볼 때 교만하고 완악한 심성은 엘리압 자신의 부당한 비난 속에 내포되어 있다.
어찌 이유가 없으리이까. 이것은 문자적으로는 ‘그것은 한 마디의 말에 불과하지 않은가?’란 뜻이다. 곧 이것은 다윗 자신이 골리앗과 싸울 의사를 밝히는 말 이외에는 기타 아무런 교만하고 완악한 말도 하지 않았음을 가리킨다. 이처럼 여기서 다윗은 자기가 그곳에 간 일차적 목적(17-18절)을 제쳐두고, 골리앗을 쳐죽이는 일을 자신이 그곳에 간 목적으로 형에게 제시한다. 그 때 다윗이 이같이 한 까닭은, 골리앗으로 인해 빚어진 이스라엘의 위급한 상황을 목격하면서 강렬한 신적 소명을 느꼈고, 바로 이같은 신적인 소명을 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자기 아버지를 통해 자기를 그곳으로 가게끔 하셨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백성이 전과 같이 대답하니라.. 이것은 골리앗을 물리치는 자에게 세 가지 상급이 약속 되었다는 사실을 말한다(25, 27절).
사울이 다윗을 부른지라. 여기서 ‘부른지라’(히, 라카흐)는 ‘취하다, 맞아들이다’란 의미이다. 결국 이 단어는 골리앗으로 인해 궁지에 몰린 사울에게 있어 다윗이라는 인물의 출현이 얼마나 반가운 일이었는지를 잘 시사해준다.
사람이 낙담하지 말 것이라. 여기서 ‘사람’(히, 아담)은 정관사가 없으므로 ‘한 사람’으로 번역해야 타당하다. 따라서 본 어구는 ‘한 사람도 낙담하지 말 것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 그런데 70인역은 ‘사람’ 대신에 ‘나의 주’(히, 아도니)로 번역하였다. 그러나 그처럼 원문을 고쳐 읽을 근거는 전혀 없다(Fay). 아무튼 일개 시골 목동에 불과했던 다윗이 한 나라의 통치자요 군대 총지휘관인 사울에게 오히려 이같은 위로의 말을 한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운 것이다.
주의 종이 가서 … 싸우리이다. 다윗의 이 말은 엘리압이 비난했던 것처럼(28절) 결코 쓸데없는 만용이나 교만이 아니었다. 오직 소년 다윗은 할례 받지 못한 이방 족속 블레셋 사람의 그 모멸스런 치욕과 경멸로부터 여호와의 군대인 이스라엘의 명예를 되찾고, 나아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영광을 회복해야 하겠다는 거룩한 열정에 불타 믿음과 확신으로 결연한 의지를 천명한 것이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용사. 여기서 ‘어려서’(히, 나아르)는 앞의 ‘소년’과 동일한 단어이다. 결국 이 말은 골리앗은 다윗의 나이만큼 밖에 안 되었을 때부터 이미 전투 경험을 쌓아온 백전의 노장임을 뜻한다. 한편 ‘용사’는 문자적으로 ‘전쟁의 남자’(a man of war)란 뜻이다.
사자나 곰. ‘사자’(히, 아리)는 다윗 당시만 해도 소아시아 전역을 포함하여 헬라와 인도에도 있었다. 그런데 사자는 대개 풀이 많은 초원 지대나 삼림 지대에서 주로 살기 때문에, 그러한 지대에서 양 떼를 방목하는 목자들에게는 항상 경계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여기의 ‘곰’(히, 도브)은 연한 갈색을 띤 ‘시리아 곰’을 가리키는데, 이것은 잡식성으로서 보통 때는 사람이나 가축을 건드리지 않지만, 동면이 끝날 시기인 늦겨울이나 이른 봄에는 먹을 것이 없으므로, 자신들의 서식지인 고산 지대를 내려와서 새 풀을 뜯고 있는 어린 양들을 거침없이 잡아먹는다고 한다. 따라서 여기 언급된 ‘사자와 곰’은 양 떼를 돌보고 지킬 책임이있는 목동에게는 가장 경계해야 할 맹수의 대표인데, 본문의 언급은 이러한 맹수들이 동시에 내려와 양 떼를 해쳤다는 의미가 아니라, 어떤 때는 사자가, 그리고 어떤 때는 곰이 내려와 양 떼를 해하려고 한 사실을 종합적으로 묶어 이야기하고 있다.
수염을 잡고. 사자나 곰은 ‘수염’이 없다는 점에서, 여기의 ‘수염’은 ‘턱’(chin)을 가리킴이 분명하다(R. Payne Smith). 이같이 추정할 수 있는 근거는 여기 ‘수염’에 해당되는 ‘자칸’은 ‘수염’이란 의미 이외에도 ‘턱’을 의미하기도 하기 때문이다(Bochart). 한편 이러한 관점에서 갈대아역(the Chaldee)은 ‘아래 턱’으로, 그리고 70인역(LXX)은 ‘목구멍’으로 각기 번역하고 있다.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 26절 주석 참조.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 26절 주석 참조. 특별히 여기서 이 호칭을 골리앗이 가진, 맹수와 같은 야만성을 강조하려는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가라. 이번 골리앗과의 일대일 결투는 전체 전쟁의 승패를 판가름 짓는 중요한 결투였고(9절), 나아가 이 전쟁의 승패 여부에 따라 이스라엘이 블레셋의 압제와 위협으로부터 자유하느냐 아니면 또 다시 이스라엘이 블레셋의 소국으로 전락하고 마느냐 하는 역사적 기로의 승부였다. 따라서 사울은 40일 동안이나 골리앗의 온갖 모욕과 조롱을 감수하면서도 선뜻 도전자를 내보내지 못하고 전전긍긍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때 다윗의 자원(32절)은 일면 반가운 일이었으나, 일면 쉽게 결정하기 힘든 사건이었다(33절). 그러나 거룩한 열정과 확고한 신앙에 근거한 다윗의 논리적인 설득에 결국 사울은 크게 감동을 받고, 마침내 골리앗과의 결투를 허락하였다.
여호와께서 … 함께 계시기를 원하노라. 여기서 ‘계시기를 원하노라’(히, 이흐예)란 말은 미래형이라는 점에서, 차라리 ‘계실 것이다’로 번역함이 더 좋다. 따라서 이것은 결국 사울이 다윗의 승리를 강력히 염원했을 뿐만 아니라 더나아가 확신까지도 했음을 뜻한다. 이것은 다윗의 말(34-37절)이 그만큼 믿음과 용기와 확신으로 가득차 있었음을 시사한다.
군복을 … 입히고. 여기서 ‘군복’(히, 마드)은 찢어지기도 한다는 점에서(4:12), 갑옷을 입기 전에 입은 겉옷 종류를 가리킴이 분명하다(Smith, Keil).
시험적으로. 이 말은, 그 의미가 본 절의 내용 중에 암시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히브리 원문에는 없다.
걸어 보다가. 이 말은 오히려 앞에 나왔던 ‘익숙하지 못한지라’의 앞에 두고 ‘걸어 보기를 시험하다가’로 번역함이 좋다.
익숙하지 못하니 … 가지 못하겠나이다. 결국 이같은 현상은 당시 사울과 다윗이 체격 차이가 컸기 때문에 나타났을 것이다(9:2, 10:23).
시내에서. 여기의 ‘시내’(히, 나할)는 ‘골짜기, 하수, 강’ 등의 의미로서 블레셋과 이스라엘이 진을 치고 있던 엘라 골짜기를 가리킨다(2절). 이곳은 우기인 가을부터 봄까지는 물이 흐르지만, 건기인 여름에는 강 바닥이 말라붙어 버린다.
매끄러운 돌. 이 돌은 물이 말라붙은 골짜기의 시내(Wadi) 바닥에서 주은 단단하고 매끄러운 차돌을 가리킨다.
물매. [히, 켈라] 이것은 주로 양가죽으로 만들어졌는데, 던질 돌을 넣을 수 있도록 가운데 부분이 넓게 엮어져 있었다. 그리고 이 물매의 한쪽 끝에는 끈이 달려 있어 엄지에 연결하여 물매를 돌려 던질 수 있었다. 당시 이러한 물매는 막대기와 더불어 목자들의 필수 도구였는데, 곧 목자들은 물매로써 (1) 옆길로 새는 양 떼를 멀리서도 통제하고 (2) 양을 노략하려는 야수들을 쫓아내었다. 뿐만 아니라 물매는 조직된 군대에 의해서도 사용된 듯하다. 즉 우선 베냐민 사람들은 성경에서 물매 사용의 명수들로 언급되며(25:29, 삿 20:16, 대상 12:2, 대하 26:4), 심지어 최근에 발견된 앗수르 왕 산헤립의 궁궐 벽에는 구리로 된 투구를 쓰고 쇠사슬로 만든 갑옷을 입은 물매꾼이 그려져 있을 정도이다.
다윗을 보고. 여기서 ‘보다’(히, 라아)란 말은 ‘자세히 들여다보다, 관찰하다’란 의미이다(레 13:3, 왕하 7:13, 대하 12:17, 욥 28:24).
젊고. [히, 나아르] 흔히 ‘소년’이란 말로 번역되는 단어로(16:18), 곧 나이의 연소함을 가리킨다(33절).
붉고 용모가 아름다움이라. 이 말은 외형적 아름다움을 뜻하는 말이기도 하지만(12절), 한편으로는 나이 어린 사람의 외형적 특징을 묘사한 말이기도 한다.
신들의 이름으로 … 저주하고. 여기서 ‘신들’은 히브리 본문에는 단수로 표기되어 있다. 따라서 문자적으로는 다만 ‘신’이란 의미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골리앗은 분명히 다신주의자(多神主義者)였을 것이라는 추정적 사실과 충돌할 수 밖에 없다. 이에 따라 이 모순을 해결할 두가지 방법이 제안되어 왔다. 즉 (1) 단수 ‘신’을 사본상의 오류로 보고, 복수인 ‘신들’로 이해해야 된다는 것 (LXX, KJV), (2) 단수 ‘신’을 정확한 것으로 보고, 다만 ‘신’을 다윗의 신 곧 여호와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Keil) 등이다. 그러나 싸움을 시작하기 전에 자신이 믿는 수호신의 이름을 빙자하여 상대방을 경멸하는 일이 고대 용사들에게는 보편적이었다는 사실(Lange)에 근거하여 볼 때, 위의 두 가지 견해 중 첫 번째의 견해가 더 타당한 듯하다(R. Payne Smith). 또한 이같은 추축은 45-46절에서 다윗이 자신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으로 상대방 골리앗을 경멸했다는 점에서, 보다 신빙성을 띠게 된다. 한편 한글 개역 성경의 ‘이름으로’는 히브리 본문에는 없는 말이다.
칼과 창과 단창. 블레셋 군대의 선봉장인 거인 골리앗이 소유하고 있던 막강한 무기들로서(4-7절), 곧 이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의 무력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만군의 여호와. [히, 야훼 체바오트] 이 말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원수들을 징치하기 위하여 이스라엘을 당신의 군대로 삼고, 친히 그 지휘자가 되신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말이다(1:3).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 이 말은 앞에 언급된 ‘만군의 여호와’가 갖는 의미를 설명해준다. 그러므로 여기 나타난 다윗의 말을 통해 볼 때, 다윗은 자신과 골리앗과의 싸움을 단순히 개인과 개인 또는 국가와 국가간의 싸움만으로 보지 않고, 골리앗이 숭배하는 블레셋 족속의 신들과 자신이 믿고 의뢰하는 이스라엘의 신, 곧 여호와 하나님 간의 싸움으로 인식한 것이다. 그러므로 다윗은 이방의 헛된 목석(木石)의 신들은 살아계신 하나님 여호와의 능력 앞에 여지없이 거꾸러지리라는 신앙과 확신으로 담대히 나아갔다.
온 땅으로 …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다윗의 이 말은 성전(聖戰)의 일차적 목적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보여준다(수 2:9-11). 즉 성전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살아계셔서 역사를 당신의 기쁘신 뜻대로 섭리 운행해 나가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널리 증거하는 데 있음을 다윗은 올바로 인식한 것이다(고전 10:31). 그러므로 여기서 다윗은 골리앗과의 싸움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계약 백성으로 만 천하에 널리 드러나게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이 말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는 ‘전쟁의 하나님’으로서, 곧 (1) 모든 전쟁의 승패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에 따라 좌우되며(대하 20:15, 시 127:1, 144:1) (2) 또한 그러한 모든 전쟁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선하신 뜻을 이루어 나가신다는 뜻이다.
블레셋 사람을 향하여 … 빨리 달리며. 이러한 다윗의 적극적인 전투 자세는 오직 여호와의 능력만을 힘입어 싸우려 했던 다윗의 신앙과 용기를 잘 보여 주고 있다. 아울러 이는 다윗이 골리앗과는 달리 극히 가벼운 무장, 즉 막대기와 물매만을 지니고 있었던 사실을 암시적으로 보여주고 있다(40, 43절).
이마를 치매 돌이 그 이마에 박히니. 이같은 결과는 일차적으로 (1) 그 당시에는 중세기의 기사(騎士)들이 착용했던 것과 같은 안면 보호대가 개발되지 않았으며, (2) 골리앗 앞에 있던 방패 드는 자가 골리앗의 큰 키로 인하여 그의 안면을 방어하지 못했으며, (3) 그리고 다윗의 뛰어난 물매 솜씨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이 전과(戰果)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인하여 거두어질 수 있었음(45-47절)이 분명하다(Galling). 그러므로 이것은 40일 동안이나 그 교만한 블레셋 사람(골리앗)의 온갖 모욕과 조롱을 당하셨던 여호와 하나님의 진노가 다윗의 물맷돌 속에 응축되어 골리앗의 이마에 박힌 것이다. 한편 ‘이마에 박히니’라는 말은 (1) 골리앗에 대한 다윗의 승리가 결코 다윗 자신의 물매 솜씨 때문만은 아니었다는 사실과 (2) 골리앗이 단 하나의 물맷돌로 인하여 죽기까지 했던 이유를 알려 준다.
엘렌 지 화잇은 골리앗이 물매를 이마에 맞은 이유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골리앗은 화가 왈칵 나서 그의 이마를 보호하고 있던 투구를 뒤로 밀어 제치고 그의 적수에게 보복하려고 앞으로 달려나왔다”(부조와 선지자, 648).
땅에 엎드러지니라. 외형적 자세로만 볼 때 이것은 상대에 대한 절대적 존경심을 표할 때에 취하는 자세이다. 일찍이 여호와의 법궤 앞에서 블레셋의 다곤 신상이 이처럼 엎드러졌었다(5:3). 그러므로 결국 이것은,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모멸하던 자를 강제로라도 굴복시켜 그로부터 합당한 영광을 받으신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의 칼을 … 빼내어 … 그를 죽이고. 전쟁 관례상 자신의 무기를 사용치 않고 상대국 장수로부터 칼을 빼앗아 그 장수를 죽이는 일은 강대국과 그 장수에 대해 수치심을 안겨 주려는 것이었다(Klein, 삼하 23:20-21). 한편 여기의 ‘칼’은 골리앗이 소지했던 창과는 달리 그다지 크지 않았던 것 같다. 이같은 추정은 (1) 소년 다윗이 능히 사용할 수 있었다는 사실, (2) 제사장 아히멜렉이 그 칼을 다윗에게 적당한 것으로 생각했었다는 사실(21:9) 등으로 뒷받침 된다. 아무튼 자신의 칼과 창만을 믿고 큰소리쳤던(43-44절) 골리앗이, 결국 자신의 그 칼로 자신의 목이 잘리는 이 아이러니컬한 사실은, 악인은 결국 자신이 파놓은 구덩이에 그 자신이 빠지고 만다는 진리를 보여 준다(시 7:15, 9:15).
그의 머리를 베니. 고대의 전투에서 적장을 죽이고, 그 승리의 증거로서 그 머리를 베어 왕에게 바치는 일(57절)은 관례였다.
자기 용사의 죽음을 보고 도망하는지라. 블레셋 군대는 골리앗의 승리를 확신하고 이스라엘 군에 대한 총공격 태세를 갖추었을 것이다. 그러나 골리앗의 패배라는 어이없는 결과에 그만 전의를 완전 상실하고 도망치기에 급급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이것은 골리앗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당초에 약속했던 것, 곧 양쪽의 대표 중 진 쪽의 군대는 이긴 쪽의 군대에게 완전한 항복의 예를 갖추어야 한다는 선언(9절)을 스스로 파기한 행동이기도 했다.
가이와 에그론 성문까지 이르렀고. 이것은 이스라엘이 블레셋에 대해 완전한 승리를 거두었음을 강력히 시사해 준다(7:14). 그런데 한편 여기서 ‘가이’에 대한 해석으로 다음 두 가지가 있다. 즉 이를 (1) 고유명사가 아닌 일반 명사 ‘골짜기’(3절)로 보고, ‘성문’처럼 ‘에그론’에 속한 한 지점일 것이라는 해석(Targum, Vulgate), (2) 필사자의 실수에 따른 오기(誤記)로 보고, 골리앗의 고향인 ‘가드’를 가리킬 것이라는 해석(Keil, Klein, LXX) 등이다. 그런데 첫째, 블레셋이 ‘가드’와 ‘에그론’까지 엎드러졌다는 언급과(52b절) 둘째, 블레셋에 대한 이스라엘의 완전한 승리를 시사하는 구절 속에 ‘가드’와 ‘에그론’이 나란히 언급됐다는 점(7:14)등에서 (2)의 견해가 더욱 타당성이 있다.
사아라임 가는 길. 이것은 ‘엘라 계곡’을 가리킨다(3절). 한편 ‘사아라임’은 여호수아 15:36의 언급을 통해서 볼 때, 소고 및 아세가(1절)와 인접한 한 지점에 위치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현재의 ‘텔 케플 자카리야’(Tell Kefr Zakariya)지역으로 추정된다(Keil).
가드와 에그론. 블레셋의 주요 도시 국가들. 수 13:3 주석 참조.
갑주는 자기 장막에 두니라. 여기서 ‘갑주’(히, 켈리)는 문자적으로는 ‘기계’ 혹은 ‘물건’이란 의미이다. 그러나 다른 문맥에서처럼 여기서도 ‘무기’(weapons, NIV)란 의미로 보아야 할 듯하다(14:1, 12, 20:4, 21:8). 그리고 여기서 ‘자기 장막’은 혹자들(Hertzberg, Abravanl)의 주장처럼 ‘여호와의 장막’을 가리킨다고 볼 수 없다. 오히려 다윗의 베들레헴 집을 가리키는데(Keil, Smith), 그 근거는 여기서 ‘장막’(tent)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오헬’은 ‘거주지’를 가리키는 고대 어휘로서(Fay), 그 용례가 성경 다른 곳에서도 종종 나타나기 때문이다(4:10, 13:2:삼하 18:17, 19:8, 20:1). 한편 이러한 사실은 후일 골리앗의 칼이 높(Nob)에 있던 여호와의 성막에 보관되었다는 본서 21:8-9의 언급과 모순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후일 다윗이 블레셋 거인으로부터 자신을 건져내 승리케 하신 여호와의 영광과 명예를 기리기 위해 놉에 있던 여호와의 성막에 그 칼을 기념물로 바쳤을 것이라는 사실은 충분히 가능한 추측이기 때문이다(J. P. Lange, Keil & Delitzsh).
이 소년이 누구의 아들이냐. 이같은 사울의 질문은, 이미 다윗은 사울을 위해 궁중 악사로서 일한 경력이 있었다는 점에서 볼 때(16:21-25) 우리를 당혹하게 한다. 이에 따라 주석가들은 다음과 같은 견해들을 제시해 왔다. 즉 (1) 정신 질환을 앓고 있던 사울이, 당시 자신과 잠시 함께 있다가 헤어진지 오래되어 많이 변해 있었을 다윗을 실제로 알아보지 못하여 이같은 질문을 했을 것이라는 견해(Klein, Lange, Smith), (2) 사울은 그 때 개인적으로는 다윗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골리앗과의 결투를 계기로 그처럼 용감 무쌍한 다윗의 가문이 어떠한 혈통과 신분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는지에 대하여 알고 싶어서 이같은 질문을 했을 것이라는 견해(Keil) 등이 있다. 그런데 여기서 사울은 첫째, 골리앗과 싸우도록 하기 위하여 이미 다윗과 대면을 했었고(31-40절) 둘째, 불과 몇 년 전에 자신의 옆에서 자신의 고통을 덜어 주었던 은인(恩人)을 완전히 잊어 버렸다고는 상상할 수 없다는 사실 등으로 미루어 볼 때 두 번째의 견해가 더 타당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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