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기를 든 소년. 본 장의 전체 내용을 볼 때 여기서 ‘무기를 든 소년’은 단순히 비서직 그 이상의 역할을 담당한 신분이었던 것 같다(Klein). 한편 ‘무기를 든 자’는 아비멜렉(삿 9:54), 기드온(삿 7:10), 심지어는 요압(삼하 18:15, 23:37)에서도 있었다. 그리고 소년 시절 다윗도 사울의 ‘무기를 든 자’로 선택되었다(16:21). ‘무기를 든 자’는 왕이나 군대 장관의 수하에서 나름대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자였음이 분명하다.
건너편 블레셋 사람들의 부대. 이때 사울과 요나단의 부대는 믹마스에서부터 뻗어내려오는 협곡에서 약 1.5 km 떨어진 게바에 위치해 있었다. 따라서 여기의 ‘건너편’은 블레셋의 수비대가 자리잡고 있는 믹마스 어귀의 보세스 고지를 뜻한다(4절, 13:23).
건너가자. 이는 협곡(현재의 Wady es Suweinit)의 게바쪽 고지 즉 ‘세네’에서, 협곡을 가운데 둔 반대쪽 고지 즉 ‘보세스’로 넘어가는 것을 뜻한다(4절). 그러므로 이같은 행동을 하기 앞서 요나단과 그의 무기를 든 자는 게바에서 세네까지 약 1.5 km를 걸어 왔어야 했다.
아버지에게는 아뢰지 아니하였더라. 요나단이 이같이 한 까닭은 다음과 같다. (1) 사울의 소심한 성격상 블레셋에 대한 요나단의 공격을 용인치 않을 것이 분명하였으며(F. R. Fay), (2) 기습 작전의 성공을 위한 비밀 유지가 반드시 필요하였기 때문이었다(R. Payne Smith).
기브아 변두리 미그론. 여기 ‘변두리’(히, 비크체)은 특정 지역의 끝부분을 가리킬 때 사용된다(욥 28:24, 시 19:6, 사 40:28). 또한 ‘미그론’은 ‘절벽’이란 뜻으로(Thenius), 산악 지대의 지형상 흔히 발견되는 이름이다(Smith). 그런데 여기서의 ‘미그론’은 기아브 북쪽 변두리, 믹마스 남쪽에 위치한 곳으로, 믹마스 북쪽에 위치한 ‘미그론’과는 구별된다(사 10:28).
석류나무. 히브리어로 ‘림몬’이다. 따라서 혹자들은 이 말을 믹마스 동북쪽에 있는 ‘림몬 바위’를 기리키는 고유 명사로 해석한다(삿 20:45, 47). 그러나 그 위치상 이곳은 기브아 최북단, 믹마스의 남쪽 미그론에 있는 유명한 ‘석류나무’를 가리키는 일반 명사로 봄이 타당하다(Keil).
함께 한 백성은 육백 명. 이것은 사울의 군사적 형편이 블레셋의 대군에 비해(13:5) 어림도 없다는 사실을 보여 주려는 저자의 의도에 따른 언급인 듯하다(13:15). 또한 저자가 여기서 이같이 언급한 중요한 이유는, 뒤이어 나올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이스라엘의 승리(31절)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에 따른 것임을 보여 주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에봇을 입고. ‘에봇’은 대제사장들이 대속죄일에 지성소에 들어갈 때(레 16:4)와 하나님께 특별한 뜻을 물을 때 착용했던 특수한 제의적 의복이었다(출 28:6-14). 따라서 ‘에봇을 입고 있었으니’라는 말은 아히야가 대제사장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 이처럼 대제사장이 에봇을 입고 왕의 옆에 함께 있는 것은 사울이 대제사장의 ‘우림과 둠밈’(출 28:30)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물으려고 했기 때문일 것이다(레 8:8). 이같이 왕들이 신의 뜻을 묻기 위해 제사장을 옆에 두는 일은 성경 외적 문헌에도 많이 나타나는데, 이것은 자신의 왕권 과시를 위한 수단이기도 하다(Klein).
거기 있었으니. 이 말은 히브리 본문에는 없는 것으로서 번역자가 뜻을 명확하게 하기 위해 삽입한 것이다.
이가봇의 형제 아히둡. 여기서 ‘이가봇’은 대제사장 엘리(1:3)의 아들 비느하스의 소생이었다(4:19-22). 그런데 성경은 그의 어머니가 그를 낳으면서 죽었다고 했으므로, 여기의 ‘형제’는 형을 가리킴이 분명하다. 한편 ‘아히둡’은 ‘형제는 선하다’란 의미이다.
보세스. ‘빛나다’, 또는 ‘미끄럽다’란 의미이다.
세네. ‘아카시아’, 또는 ‘가시’란 뜻이다. 이러한 이름의 뜻은 당시 블레셋의 주둔지인 믹마스로 뻗어있는 주변 지형이 가파르고 뾰족한 바위와 절벽으로 형성된 험준한 산악 지대였음을 보여 준다(Conder, Robinson).
남쪽에서 게바 앞에 일어섰더라. 이것은 ‘남쪽에서부터 뻗어서 게바 맞은 편에 있다’로 번역하는 것이 좋다. 결국 위의 두 큰 바위 절벽은 협곡을 가운데 두고 마주 서 있었다.
여호와께서 … 일하실까 하노라. 원문에는 ‘혹시’(히, 울라이)라는 단어가 있어서 요나단이 하나님의 도우심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창 32:20). 그러나 이 말은 또한 ‘정녕, 필시’라는 뜻의 소망과 확신의 의미도 있는 말이므로, 여기서는 후자의 의미로 사용되었음이 분명하다(수 14:12). 진정 요나단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싸우시는 용사되심을 믿었다.
여호와의 구원은 …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 승리의 관건은 수효의 다소나 군사력의 우열에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 여하에 있음을 믿는 요나단의 신앙 고백이다. 이러한 신앙은 기드온(삿 7:4, 15), 다윗(17:47), 솔로몬(전 9:11), 아사(대하 14:11), 히스기야(대하 32:7-8)의 신앙과도 상통한다.
앞서 가소서. 정확한 번역은 아니지만 그 의미는 충분히 살리고 있다. 한편, 원어 ‘네테 라크’에 대한 문자적인 번역은 ‘기우는대로 행하소서’이다.
보이리니. 이는 자신의 몸을 완전히 노출시킴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것은 요나단이 블레셋에 대하여 기습 작전을 펼치려는 것이 아니었음을 보여 준다.
히브리 사람. 13:3 주석 참조.
숨었던 구멍에서 나온다 하고. 원문에는 여기의 ‘구멍’(히, 호르)에 정관사 ‘하’가 붙어있으므로, 이 ‘구멍’은 요나단 일행이 잠시 은신하기 위해 작전상 파놓은 구멍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요나단 일행은 이 은신처에서 과감히 나옴으로써, 자신들의 일차적 목적대로(8절) 적에게 목격될 수 있었다.
보여 줄 것이 있느니라. 문자적으로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닫게 해 주겠다’란 뜻이다. 한편, 여기서 ‘것’(히, 다바르)은 블레셋 군대의 무력적인 힘을 뜻한다.
블레셋 사람들이 … 엎드러지매. 이같은 결과는 요나단의 민첩한 공격에 따른 것이었다(LXX).
무기를 든 자가 따라가며 죽였으니. 여기서 ‘죽였으니’(히, 메모테트)는 다시 살지 못하도록 완전히 죽이는 것을 가리킨다(Lange, 창 7:22, 신 22:24, 왕하 8:10). 따라서 모기 든 자는 요나단에 의해 부상당한 자를 뒤따르면서 즉이는 역할을 했던 것 같다.
처음으로 쳐죽인 자. 여기서 ‘처음으로’는 본서 저자가 20절 이하에 언급된 블레셋에 대한 또다른 승리를 염두에 두고 기록한 말이다.
이십 명 가량. 이같은 수는 이들이 전방 수비대 정도의 부대였음을 보여 준다. 물론 그 때 수비대의 병력이 모두 살해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일부는 자신들의 본대로 도주하였을 것이다. 아무튼 블레셋의 수비대는 요나단 일행이 그 가파른 절벽을 타고 올가와 졸지에 습격하리라고는 예상치 못했기 때문에, 방심하고 있다가 갑자기 들이닥친 요나단 일행의 공격에 당황하여 전의를 상실하고 도주하기 바빴을 것이다(Keil, Smith).
모든 백성. 군인과 대조되는 일반 블레셋 백성들을 가리킨다.
부대와 노략꾼들. ‘부대’(히, 하마차브)는 당시 믹마스에 주둔하고 있던 블레셋의 본대를 가리킨다(13:16). 한편, ‘노략꾼들’은 3 대로 나뉘어 이스라엘의 여러곳을 유린키 위해 떠났던 블레셋의 부대들이다(13:17-18).
땅도 진동하였으니. 이것은 ‘지진’을 가리킨다. 비록 ‘진동하였으니’(히, 티르가즈)란 말이 때로 심리적인 격동을 뜻하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지진을 가리키기 때문이다(삼하 22:8, 시 18:7, 77:18, 사 5:25). 또한 지진은 공포와 함께 거룩한 전쟁이 있을 때에 흔히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이는 큰 떨림이었더라. 원문에는 ‘하나님의 떨림이었더라’로 되어 있는데, 이는 블레셋에 임한 공포와 지진의 재앙이 하나님에 의해 내려진 것임을 강조한다.
파수꾼이 바라본즉. 이때 파수꾼은 약 1.5 km 떨어져 있는 믹마스의 블레셋 본진(本陳)을 관찰한 듯 하다. 물론 이때 파수꾼은 블레셋 진(陳)의 혼란스러운 모습을 보았을 뿐만 아니라 아우성 소리도 들었을 것이다.
블레셋 사람들이 무너져. 여기서 ‘무너져’(히, 나모그)는 문자적으로는 ‘녹아내리다’란 뜻이다. 곧 이는 극도의 공포로 인해 용기를 잃고 마음이 녹아내리는 상태를 나타낸다.
이리 저리 흩어지더라. 이것은 블레셋 사람들이 요나단 일행의 예상치 못한 공격과 수비대의 패주 소식을 듣고 극도의 혼란 상태에 빠졌음을 보여 준다.
점호하여 보라. 여기에서 ‘점호하다’(히, 파카드)란 말은 ‘계수하다(number, KJV, 11:8, 13:15, 민 1:20, 22, 대상 23:24), ‘점호하다’(공동번역), ‘소집하다’(muster, NIV) 등의 의미로 볼 수 있다.
하나님의 궤가 … 함께 있음이니라. 이것은 ‘하나님의 궤를 … 가져오라’는 앞의 문구를 정당화시키기 위한 필사자의 가필(加筆)로 봄이 타당할 것이다(R. Payne Smith). 따라서 물론 칠십인역에는 본 문구가 없다.
네 손을 거두라. 이것은 사울이, 요나단의 안전 여부 및 블레셋의 진영으로 공격해 들어가야 할 당위성이 있는지의 여부를 하나님께 묻기를 포기했음을 시사해 준다. 여기에서 우리는 사울의 변덕스런 신앙 자세를 엿볼 수 있다. 즉 사울은 전쟁의 작전 수행에 대하여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하다가(18절), 전세(戰勢)가 유리하게 돌아가자 돌연 하나님을 향한 질문을 취소하였다.
블레셋 사람들이 … 칼로 자기의 동무들을 치므로. 이같은 기묘한 상황은 기드온의 소수 병력이 미디안을 대항해 싸울 때에도 벌어졌었다(삿 7:22). 여기서도 하나님께서는 블레셋 사람들의 마음과 정신을 혼란스럽게 만드심으로써, 자기들끼리 피차 싸우다 자멸하도록 하셨다. 결국 이같은 상황은, 모든 전쟁을 홀로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친히 간섭하신 결과였으며, 요나단의 신앙적 용기와 도전에 대한 하나님의 도우심의 결과였다.
크게 혼란하였더라. 이같은 적군의 자중지란(自中之亂)의 모습은 대적에 대한 이스라엘의 승리가 결정적임을 보여줄 때 종종 성경에서 언급되고 있다(5:9, 11, 7:10, 출 14:24, 신 7:23, 겔 38:21).
사방에서 … 진영에 들어왔더니. 이것은 이스라엘 출신의 용병(혹은 징용군)들이 이번 전투를 맞이하여 자신들의 동족 이스라엘과 싸우도록 강제로 동원되었음을 강력히 시사해 준다.
그들이 돌이켜 … 합하였고. 엄밀히 말하여 히브리 원문에는 ‘돌이켜’라는 말이 없다. 다만 이는 의미를 두드러지게 하기 위한 번역자의 삽입이다(the Chaldee, LXX, the Vulgate, the Syriac).
이스라엘 사람. 이는 본 절 앞부분의 ‘히브리 사람’과 대조된다. 즉 여기서 저자가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그 백성의 거룩성을 강조하기 위함인 듯하다. 이 사실로 볼 때 위의 ‘히브리 사람’은, 그들이 이스라엘의 원수 블레셋을 위해 봉사했다는 전력 때문에 본서 저자에 의해서도 경멸적으로 사용되었음이 분명하다(R. Payne Smith).
전쟁이 벧아웬을 지나니라. ‘벧아웬’은 믹마스 서쪽 약 1.2 km 지점에 위치해 있다(13:5 주석 참조). 본서 저자가 여기서 ‘벧아웬’을 언급한 이유는, 13:5에서 블레셋 족속의 군대가 주둔했던 믹마스를 ‘벧아웬 동편’이라고 소개했던 사실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즉 여기서는 ‘벧아웬을 지나니라’라고 언급함으로써 믹마스에 주둔했던 블레셋 족속들이 이제 자신들의 본국 방향인 서쪽으로 패주했음을 밝히려는 것이다(Bunsen, 31절). 한편, 여기서 ‘지나니라’(히, 오브라)라는 말은 ‘넘어가다’(passed over, KJV), ‘계속되다’(continued out, Living Bible)란 뜻으로서, 곧 전쟁이 벧아웬 너머까지 계속 진행된 상태를 보여 준다(the battle moved on beyond Beth Aven, NIV).
이는 사울이 … 맹세시켜 경계하여. ‘이는’은 본 절 첫 부분의 내용, 즉 이스라엘 백성이 피곤하게 된 원인이 무엇인지를 밝히고 있는 구절을 이끄는 상관 접속사이다. 한편, ‘맹세시켜 경계하여’(히, 요엘)는 (1) ‘-라고 맹세하기를 강요하여’, (2) ‘어리석게 행동하여’ 등 두가지 의미로 이해될 수 잇다. 그리고 본 문구 이하는 사울이 백성들에게 맹세하기를 강요한 내용이다.
저녁 곧 내가 내 원수에게 보복하는 때까지. 사울의 이같은 말은, 태양이 질 때까지 원수를 무찌르겠다고 했던 여호수아의 결심을 염두에 두고 한 것 같다(수 10:13). 따라서 이 말은 블레셋을 완전 섬멸시키겠다는 사울의 결심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사울의 이 맹세는 여호수아의 경우와는 달리 여호와를 위한 진정한 충정과 신앙에서 비롯된 열성은 아니었다. 다만 사울이 자신의 공명심과 명예욕을 드높이기 위해 상황을 잘못 판단하고, 그대로 밀어부친 독선적 횡포에 불과했다(Keil, Fay). 따라서, 결국 사울의 이같은 행동은 여러가지 부정적인 결과를 낳고 말았으며, 전쟁에 이기고도 백성들의 신임을 잃는 비극을 초래하고 말았다. 그러므로 사울의 이러한 맹세는 이기적이고 독선적인 열정이 가져다 주는 폐단을 잘 보여 주는 예이다.
먹는 사람은 저주를 받을지어다. 구약 성경에서 성행위를 절제하는 것(21:5), 잠을 줄이는 것(시 132:3-4), 그리고 희생제사를 드리기로 서원하는 것(삿 11:30-31) 등은 용사들이 전쟁에서 필승을 기원하는 의미에서 취했던 행동으로 언급되고 있다(Klein). 따라서 그 때 사울은 이겻들과 유사한 형식으로, 자신의 헌신적 자세를 표명키 위하여 자신을 포함한 전군(全軍)에게 금식령을 내린 것 같다. 그런데 여기서 사울이 군사들로 하여금 금식하도록 한 또다른 중요한 이유는 그 전투를 속전 속결로 끝내기 위함이었을 것이다.그러나 그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블레셋과 격전을 치뤘으며, 블레셋을 쫓아 먼 거리를 행군했기 때문에 매우 허기진 상태였을 것이다. 따라서 당시사울은 이러한 군사들의 상황을 헤아리기보다는 자신의 공명심을 채우기 위해 경솔한 맹세를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백성이 음식물을 맛보지 못하고. 이것은 사울의 명령이 어리석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명령에 충실히 복종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땅에 꿀이 있더라. 팔레스타인 지방에서는 벌들이 나뭇가지나 바위틈 사이에 집을 짓고 거기에 꿀을 만들어 놓는다(Schultz). 심지어는 꿀이 벌집에서 넘쳐 땅으로 흘러내리는 경우도 있었다(신 32:13, 삿 14:8, 시 81:16, 마 3:4). 따라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러한 나뭇가지나 바위틈 사이에서 꿀을 취해 먹기도 했다. 이런 점에서 성경은 가나안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신11:9 주석 참조)으로 묘사하기도 했던 것이다(출 3:8, 민 13:27, 신 8:8).
눈이 밝아졌더라. 기록된 본문(케티브)을 따라 직역하면 ‘그의 눈이 보였더라, 시력을 회복했더라’란 뜻이다. 그러나 맛소라 학자들은 29절에 근거해 이말을 ‘케레’로 처리하여 곧 ‘그의 눈이 밝아졌더라’란 의미로 해석하였다. 여하튼 이 말은 블레셋 군대를 추격하던 중, 피로하고 허기에 지친 요나단이 수풀 나뭇가지에 뭉쳐있는 꿀을 취해 먹고 기력을 다시 회복하였음을 가리킨다(스 9:8, 시 13:3).
백성이 피곤하였나이다. 여기서 ‘피곤하였나이다’(히, 야아프)는 ‘탈진하다, 지치다’란 뜻의 ‘우프’에서 파생된 말로, 곧 사울의 금식령으로 인해 백성들이 심히 곤비하게 된 상태를 가리킨다. 삿 4:21에는 같은 단어가 ‘기절하다’란 말로 나와 있다.
땅에서 잡아.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배 고팠던 나머지 허기를 채우는 일에 급급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사실 그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큰 돌 위에서 가축을 잡아야만 고기로부터 피를 뺄 수 있었다.
처음 쌓은 제단이었더라. 문자적으로는 ‘제단을 쌓기 시작하였다’이다. 즉 이것은 특별한 목적에 따라 왕이 제단을 쌓는 일에 있어서, 사울이 선구자가 되었음을 뜻한다(R. Payne Smith). 한편 후일 다윗도 여호와를 위해 제단을 쌓았다(삼하 24:25).
제사장이 이르되 … 하나님께로 나아가사이다. 여기의 ‘제사장’은 말할 나위 없이 대제사장 아히야임이 분명하다(3,18절). 그리고 ‘하나님께 나아가사이다’란 말은 하나님의 뜻을 물어보기위해 취하는 행동이다. 따라서 그 때 제사장 아히야는 밤중인데도 불구하고 블레셋 군대를 계속 추격하자는 사울의 결정이, 전투중인데도 백성들을 금식시켰던 지난번의 결정만큼이나 경솔하지 않은 것인지를 염려했던 것이다.
이리로. 방금 전 사울이 쌓았던 제단을 가리킨다(Keil).
대답하지 아니하시는지라. 대제사장의 ‘우림과 둠밈’을 통하여 문의하였음에도 여호와께서 응답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은, 분명 이스라엘 중에 어떤 잘못이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Fay, Keil).
군대의 지휘관들. 여기서 ‘지휘관들’(히, 핀노트)은 ‘모퉁이의 돌, 우두머리, 망대’란 뜻이다(출 27:2, 삿 20:2, 습 1:16). 따라서 ‘군대의 지휘관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대표자 격인 각 지파 장로들을 가리킴이 분명하다(8:4, 민 11:30).
한 사람도 대답하지 아니하매. 요나단이 사울의 명령을 범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군사들까지도 이같이 한 것은, 이처럼 침묵함으로써 사울의 경솔함을 책망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Pulit Commentary).
그가 오늘 하나님과 동역하였음이니이다. 이것은 백성들이 사울에게 제시한, 요나단이 죽임을 당하지 않아야 할 이유이다. 즉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요나단을 도구로 사용하여 블레셋과 전투를 치르셨다는 사실이다. 결국 하나님께서 요나단과 함께 하셨기 때문에, 금번 믹마스 전투를 이스라엘이 승리로 이끌 수 있었던 것이므로, 승리를 위해서 발한 사울의 맹세는 마땅히 철회되어야 하고, 따라서 요나단에 대한 처형 역시 마땅히 중지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즉 당시 백성들은, 이처럼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사람을 해하는 일은 그 자체가 하나님을 거스리는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구원하여. 기본 동사 ‘파다’란 단어는 원래 돈, 짐승, 심지어 사람 등을 대신 주고 특정인을 되찾거나 목숨을 구하는 경우에 사용된다(출 13:13, 15, 21:30, 34:20, 민 3:46-51). 결국 본서 저자는 여기서 이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요나단을 구출하려는 백성들의 의지가 실로 대단했음을 강력히 암시하고 있다. 또한 이러한 백성들의 강력한 의지는, 결국 애초에 사울이 한 맹세(24절)가 잘못된 것이었음을 반영한다.
블레셋 사람들이 자기 곳으로 돌아가니라. 즉 믹마스 땅에 진쳤던(13:16) 블레셋 군대가 이스라엘에 패하여, 결국 자기 본토로 돌아갔다는 뜻이다. 따라서 결국 이번 믹마스 전투에서 살아남은 블레셋 군대는 이후 다시 세력을 키워 이스라엘을 재차 침공하였고(29:1), 그 전투에서 이스라엘은 대패하였을 뿐만 아니라, 사울과 요나단이 전사하기까지 하는 비극을 당하고 만다(31:1-6).
사방에 있는 모든 대적. 이 표현 그대로, 당시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모압과 암몬은 동편에, 에돔은 남방에, 소바는 북방에, 그리고 블레셋은 이스라엘의 서편에 각각 위치하고 있었다.
모압. 여기서 모압 족속은 요단의 동쪽, 갓과 르우벤 지파의 영토 남쪽에 거주했던 민족으로서, 사사 시대 이래 이스러엘 백성들을 괴롭혀왔다(삿 3:12-14). 한편 이곳 이외에는 사울 시대에 이 모압 족속이 이스라엘을 침입해왔다는 언급도, 또한 사울이 이들을 물리쳤다는 언급도 없다.
암몬 자손. 암몬 족속 또한 사사 시대 이래 이스라엘을 괴롭혔던 족속이다(삿 10:7-17). 이들은 사울의 즉위 직후 이스라엘을 공격했으나, 사울에 의해 격파당했다(11:1-11).
에돔. 에돔 족속은 사해의 남부에 자리잡고 잇던 족속으로서, 사사기에서는 이스라엘에 대한 이들의 침입 사실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사사 시대에는 에돔 족속의 공격이 없었을지라도, 사울 시대에는 이스라엘에 대한 이들의 공격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소바의 왕들. ‘소바’는 유프라테스 강 상류에서 야르묵 강 사이에 자리 잡았던 아람족의 일파이며(삼하 8:3), 여러 부족으로 이루어진 부족 연합 성격의 국가였다(Beitzel). 한편 ‘왕들’은 이들이 부족 연합의 성격을 띠고 있던 도시 국가였음을 잘 보여 준다.
약탈하는 자들의 손에서 건졌더라. 이러한 문구는 사사의 활약상을 묘사한 전형적 문구이다(삿 2:16). 그러므로 본 절의 이같은 표현은 결국 본서의 저자가 사울을 사사의 연장선상에서 보고 있음을 암시해 준다.
말기수아. 이 이름은 ‘나의 왕은 구원이다’란 의미이다. 한편, 사울과 그의 세 아들 요나단과 이스위(아비나답)와 말기수아는 후일 블레셋과의 길보아 전투에서 함께 전사한다. 그리고 이 외에도 사울에게는 ‘에스바알’이라고도 불리는(대상 8:33) 넷째 아들 ‘이스보셋’이 있었다(삼하 2:8).
메랍. ‘증가하다’란 의미의 이름으로 원래 골리앗을 죽인 사람에게 시집 보내기로 약속이 되었었다(17:25). 그러나 그 약속은 이행되지 않았고, 골리앗을 죽인 다윗 대신 므흘랏 사람 아드리엘에게 시집 보내졌다(18:19).
미갈. ‘누가 하나님 같으냐?’란 뜻이다. 사울의 차녀인 미갈은 다윗과 결혼했으나, 언약궤로 인하여 기뻐서 춤추던 다윗을 비웃다가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아이를 낳지 못했다(삼하 6:23). 한편 사울의 두 딸 메랍과 미갈은 18:17-21의 사건에 대한 배경으로 여기 기록되었다.
아브넬. ‘나의 아버지는 넬’이란 뜻이다. 사울과는 사촌 관계로서(Keil, Fay), 사울 왕국의 군대 장관을 맡았던 아브넬은 요압이 다윗을 군사적으로 도왔듯이 사울과 그의 아들 이스보셋을 군사적으로 보좌했던 인물이다(삼하 2:8-9).
사울의 숙부 넬. ‘넬’은 ‘등불’이란 뜻이다. 이 사람은 사무엘이 사울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에 대하여 특별한 관심을 표명했던 인물이다(10:15-16).
아비엘의 아들. 카일(Keil)과 스미드(Smith) 박사는 여기서 ‘아들’(히, 벤)을 ‘자손들’ 혹은 ‘아들들’(히, 베네)로 보아야 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사울이 … 불러모았더라. 이 말은 사울이 열방과 같은 왕처럼 조직적인 군대를 소유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즉 사울은 힘 있고 용맹한 백성들을 병사로 징집함으로써 상비군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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