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스라 이름 하는 유력한 사람. 여기서 ‘기스’는 베냐민 지파가 레위인의 첩을 윤간한 사건으로 말미암아 다른 지파들로부터 징벌을 당할 때, 그 징벌을 피하여 ‘림몬 바위’로 도망하였던 600 명의 베냐민 사람 중의 한 사람이거나, 혹은 그의 후손이었을 것이다(삿 20:47). 한편 ‘유력한 사람’(히, 깁보르 하일)은 ‘부유한 사람’을 의미하거나(룻 2:1, 왕하 15:20), 혹은 ‘강력한 용사’ 등으로 이해될 수 있다(삿 6:12, 11:1).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유력한 사람’을 위의 두 가지 의미 모두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1) 기스는, 약 25,000명의 베냐민 사람들에게 분배되었던(삿 20:46) 땅을 레위인의 첩 윤간 사건(삿 19:16-20:48) 이후 나뉘어 차지하게 되었을 600명(삿 20:47) 중의 한 사람 혹은 그의 후손이었기 때문에 부유했을 것이며, (2) 뿐만 아니라 베냐민 지파의 후손들 중에는 실제로 용사들이 많았고(삿 20:16), 또한 기스의 아들 사울의 출중한 외모(2절,10:23-24)가 기스의 용사됨을 어느 정도 암시하기 때문이다.
그는 아비엘의 아들이요. 본서의 기록과는 달리 역대상 9:39은 ‘넬’을 기스의 아버지로 말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족보의 차이는 근본적으로, 성경의 족보는 ‘선택 기록설’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구속사에서 특별하지 않은 인물들은 족보 기록에서 생략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기타 성경의 여러 참조 구절들(창 46:21, 삼상 14:51, 대상 7:6-8, 8:29-33, 9:35-39)을 비교 고찰해 보면, 우리는 역대상 9:39의 언급처럼 ‘넬’이 실제로 기스의 아버지이고, 여기서 기스의 아버지로 언급된 ‘아비엘’은 실제적으로는 기스의 할아버지로 봄이 타당한 듯하다(Pulpit Commentary). 이러한 사실은 히브리 어법상 ‘아들’(히, 벤)이란 개념이 반드시 1대 자손만을 뜻하지 않고, 여러 대 후의 자손을 가리킬 때도 같은 말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본 절에 나타난 ‘손자’, ‘증손’, ‘현손’이란 말도 모두 직역하면 ‘아들’(히, 벤)이란 말이다. 아무튼 본 절 묘사의 목적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부각될 사울의 역사적 실재성을 밝히고, 나아가 이스라엘 중 그의 위치를 명확히 드러내고자 함에 있다.
준수한 소년. 이에 해당하는 원문(M.T.)을 직역하면 ‘젊고 잘 생겼더라’(young and handsome)인데, 이는 그 의미상 사울의 미적(美的) 아름다움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사울의 풍채가 뛰어남을 말해준다(창 3: 6, 6: 2, 왕상 1:6). 그리고 여기 ‘소년’은 의역한 말인데, 이 번역은 적절치 못하다. 왜냐하면 원문의 의미는 아직 미성숙한 남자 아이가 아닌, 오히려 전투의 능력이 있고, 재산을 상속받을 자격이 있으며, 또한 결혼할 정도로 성숙한 젊은 청년을 가리키기 때문이다(Richer, 왕하 8:12, 대하 36:17, 시 148:12, 전 11:9, 사 31:8, 40:30) 이것은 (1) 사울이 이스라엘을 외적의 손에서 구원할 자로 지목되었고(16-17절), (2) 사울이 이 일이 있은 직후 암몬 족속을 맞아 싸움을 했다는 사실(11: 6-11) 등에서 분명해진다(Goslinga). 때문에 칠십인역(LXX)과 갈대아역(The Chaldee)에서는 ‘(성인) 남자’(헬, 아네르)로 번역했다.
키는 모든 백성보다 어깨 위만큼 더 컸더라. ‘키’는 사람의 외모를 판단할 때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요소 중의 하나이다. 따라서 사울의 장대한 신체는 강력한 통치력을 갖고 자신들을 다스려 줄 왕을 요구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매우 매력적인 요소로 작용하였을 것이다(8:20).
한 사환을 데리고 가서. 기스가 이처럼 아들 사울에게 사환과 함께 암나귀를 찾으라고 명령한 것은 기스가 그 나귀들을 얼마나 귀중하게 여겼는지를 보여준다. 아무튼 사울은 사환과 함께 집을 떠남으로써 집으로부터 더 먼 곳까지, 그리고 더 샅샅이 찾아 헤맬 수 있었을 것이다. 한편, 이처럼 사울이 부친의 명을 따라 잃어버린 나귀들을 찾으러 나선 이 사건은 조만간 이스라엘 왕정 출발의 중요한 배경을 이루는 역사적 사건이 된다. 왜냐하면 이 사건은 사울과 사무엘의 만남으로 이어지고, 또한 그로 인해 사울이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기 때문이다. 이로 볼 때 우리는 주변의 사소한 모든 일까지도 하나님께서 친히 주장하시고 섭리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살리사 땅. 이 곳은 ‘제3의 땅’이라는 의미로서 세겜 남서쪽 약 32 km 지점에 위치하였고, ‘바알 살리사’(왕하 4:42)와는 동일한 지역이다. 한편 이 지역에 대한 또다른 명칭인 ‘바알 살리사’는 그 지역에 바알을 섬기는 신당이 있었음을 암시해 준다.
사알림 땅. 이곳은 ‘자칼(여우의 일종)의 땅’이란 의미이며, 벧세메스(6:9)와 아얄론(수 10:12)중간에 위치하였다. 이름의 뜻이 암시하듯 이곳은 불모의 야생 들판인듯 한데, 혹자는 이곳을 오브라 (13:17) 근처의 ‘수알 땅’과 동일한 지역으로 추정하기도 한다(Albright).
두루 다녀. 사울과 그의 사환이 나귀를 찾기 위하여 매우 많은 거리를 분주하게 돌아다녔음을 시사해 준다. 즉 사울은 사환과 함께 고향 기브아를 출발하여 에브라임 산지 일대인 살리사, 사알림, 베냐민 땅 일대를 두루 돌아다니는 동안 어느덧 40 km 이상의 긴 여행을 한다. 그 결과 마침내 사무엘의 고향인 라마 근처의 숩 땅에까지 이른다. 분명 이 사실은 초기 사울의 남다른 효성과 성실성을 보여준다.
돌아가자 … 걱정하실까 두려워하노라. 20절에 따르면 사울과 그의 사환이 부친의 명을 따라 집을 떠난지 벌써 3일이 되었다. 따라서 사울의 이러한 걱정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한편 이것은 당시 사울이 부모를 공경하던 효성스러운 인물이었음을 알려 주는 말임이 분명하다(Matthew Henry). 그러나 사울의 이러한 인간적인 좋은 면도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신앙 인격에 뿌리를 두지 못하면, 영속성을 지니지 못할 뿐 아니라 한 인간의 비극적 운명을 막는 데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다. 이것은 후일의 사울의 생애가 입증하는 바이다.
존경을 받는 사람이라. 이 말은 사울의 사환이 한 말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사무엘이 그 당시 일반 백성들에 의하여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를 분명혀 보여 준다. 즉 이것은 “온 이스라엘이 사무엘은 여호와의 선지자로 세우심을 입은 줄을 알았더라”(3:20) 라는 말씀이 사실이었음을 구체적으로 알려 준다.
그가 말한 것은 반드시 다 응하나니. 이것은 참선지자에게 반드시 나타나야 할 객관적 증거였다(신 13:1-3, 18:21-22). 또한 이것은 3:8에서 본서 저자가 “여호와께서 … 그 말로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니”라고 말한 바가 실제로 백성들에게 사실로 인정되고 있었음을 잘 보여 준다.
그가 … 가르쳐 줄까 하나이다. 사환의 이같은 말은 그가 사무엘의 선지자됨을 온전히 믿었음을 시사한다. 물론 사환이 하나님의 선지자를 사사로운 점이나 치는 사람으로 잘못 이해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를 통해 우리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일상 생활에 관한 제반 문제들까지도 사무엘에게 문의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F. R. Fay).
우리가 갈 길을. 이것은 사울과 사환이 길을 잃어버렸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들은 암나귀를 찾을 수 있는 방법과 장소를 알고 싶어한 것이다(Keil).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고찰할 사실은 사무엘에 관한 이야기를 사환이 먼저 꺼냈다는 사실이다. 이에 대하여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당시 사울이 사무엘의 존재에 대해 잘 몰랐을 것이라고 생각하나, 그런것 같지는 않다. 일개 사환이 알고 있었던 지식을 유력한 집안의 아들인 사울이 전혀 몰랐을리 없다. 다만 나귀를 정신없이 찾는 중 라마 성읍 근처에 이르자, 사울의 사환이 먼저 그 사실을 깨닫고 이야기를 꺼낸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것은 이어지는 7절에서 사울이 선지자에게 드릴 예물의 풍습까지 알고 있었던 점으로 보아 확실하다.
우리 주머니에 먹을 것이 다 하였으니. 이 말은 선지자에게 드릴 예물로서 음식이 절대적이거나 제일 좋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사울의 생각으로는, 자신이 집에서 갖고 나온 것이 단지 음식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나마 음식 조차도 바닥 난 상황에서 사울이 이와 같은 걱정을 하는 것은 당연하였다.
예물. 이에 해당하는 원어 ‘테수라’는 희귀한 단어로서, 곧 선지자(선견자)에게 무엇을 문의하는 대가로 지불하는 ‘사례’를 뜻한다(R. Payne Smith). 이런 점에서 공동번역은 이 말을 ‘복채’로 번역하였다.
하나님의 사람에게 드려 … 하겠나이다. 이것은 선지자에게 반드시 예물을 바쳐야만 그에게 물어볼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사환은 다만 그 당시의 풍습에 합당한 기본적 예의를 갖춘 후 선지자에게 물어보겠다고 한 것이다.
하나님께 … 물으려 하면. 이것은 우림과 둠밈으로 하나님의 뜻을 묻던 방식이(출 28:30) 더 이상 사용되지 않고 있었음을 시사해 준다(Westermann). 물론 이후 시대에도 우림과 둠밈이 간혹 사용되기는 하였으나, 일반적으로 그 당시에는 여러 형편에 따라 우림과 둠밈이 사용되지 않았던 것 같다. 결국 이것은 그 당시 제사장의 권위가 현저히 떨어졌고, 그 역할도 제대로 수행되지 못하였음을 뜻한다.
선견자. ‘선견자’(히, 로에)는 ‘보다’(see)라는 동사 ‘라아’에서 파생된 말로, 곧 ‘보는 자’(seer)라는 의미이다. 이 명칭은 ‘선지자’(히, 나비)라는 명칭이 아직 일반적으로 사용되지 않았던 시기에 사용된 명칭으로서(Klein), 주로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의 계시를 ‘보는’ 측면에 강조점을 둔 고대적 명칭이다. 아울러 성경에는 ‘로에’와 더불어 ‘선견자’로 번역되는 단어가 또 있는데, 곧 ‘호제’이다(삼하 24:11, 왕하 17:13, 대상 25:5, 대하 9:29, 사 29:10, 암 7:12, 미 3:7). 이 ‘호제’는 정신적(영적)인 것을 ‘인지하다’라는 뜻의 동사 ‘하자’에서 파생된 말로, 역시 ‘보는 자’(beholder)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이 명칭은 주로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의 ‘신령한 환상’을 보는 측면에 강조점을 둔 시적(詩的) 명칭이다(R. Payne Smith, F. R. Fay). 한편 ‘선지자’(히, 나비)라는 명칭은 ‘말하다’, ‘선포하다’라는 뜻의 동사 ‘나바’에서 파생된 말로, 이 명칭은 주로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백성들에게 ‘선포하는’ 측면을 강조한 율법적 명칭이다. 그러므로 선견자(‘로에’ 또는 ‘호제’)와 선지자(‘나비’)는 근본적으로 같은 부류의 사람을 가리키는 호칭으로서(삼하 24:11, 사 30:9-10), 공히 ‘영감받은 하나님의 사람’을 가리키며, 따라서 선견자와 선지자는 일반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는 사실을 꿈, 환상, 계시 등을 통해 ‘보고’(seeing), ‘파악하며’(perceiving), 나아가 그 보여진 것이나 파악된 것을 일반 백성들에게 ‘선포하는’(speaking forth) 자들을 일컫는 명칭들이다.
물 길으러 나오는 소녀들을 만나. 중근동 지역에서 물을 긷는 시간은 보통 저녁 때였다. 이것은 그 지방의 낮 기온이 너무 높기 때문에, 그 더위를 피하기 위함이었다. 또한 물 긷는 일은 여자들이 하는 일이었다(창 8:15-20, 29:2-12, 출 2:15-19). 따라서 사울과 사환이 사무엘의 집에 도달한 시각은 저녁 무렵이었다. 특히 이와 같은 사실은 사울이 사무엘의 집에 도착한 후 잠을 잤다는 사실로도 확인될 수 있다(25-26 절).
선견자가 여기 있느냐. ‘여기’는 라마 성읍 전체를 가리킨다. 사울의 사환은 사무엘이 다른 지역으로 출장갔을 가능성 때문에 이같은 질문을 한 듯하다(12절).
백성이 오늘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므로. ‘산당’(히, 바마)은 가나안어에서 유래된 단어로서, 원뜻은 ‘높은 곳’ 혹은 ‘산등성이’이다. 그런데 이 단어는 구약 성경에서 우상 숭배와 관련된 장소로 주로 사용되었다(레 26:30, 민 22:41, 왕상 3:2, 12:31, 15:8, 왕하 15:4). 그것은 이방의 우상 제단이 흔히 산 중턱이나 고지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상을 숭배하는 이방인들이 자선들의 우상 숭배 장소를 높은 곳에 세운 이유는 (1) 우상 숭배자들로 하여금 그곳을 속세와 구별된 거룩한 장소로 여기게 하며 (2) 또한 그들로 하여금, 예배 대상이 거한다고 믿어졌던 하늘과 가까이 있다고 생각하게 하는 등의 심리적 효과를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방의 우상제단이 세워졌던 이런 산당에서는 비단 우상 숭배 행위 뿐 아니라 종교적 매춘 행위 따위의 성적 음란 행위가 수반되었기 떼문에, 성경은 산당에서의 제사 의식을 엄격히 금했던 것이다(민 33:52, 왕하 23:8). 그러나 사무엘 시대의 ‘산당’은 성경의 다른 곳에서 나오는 산당의 개념과는 전혀 달랐다. 즉 사무엘 시대에는 실로에서의 성막 제사가 불가능 하였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대신 산당에서 종교 행위가 행해졌던 것이다(왕상 3:3-4). 성경에서 이렇듯 성막이 아닌 곳에서의 제사 행위가 불가피했을 뿐 아니라 묵허된 시기는 (1) 성막이 설립되기 전(출 40:17), 곧 모세 이전의 족장 시대와 (2) 성막이 파괴되어 제사가 중단된 이후로부터(4:10-11) 예루살렘 중앙 성소가 건축되기까지(왕상 6:37-38)의 기간이다. 그러므로 이 기간에 사무엘은 고향 라마에 제단을 쌓은 것이다(7:17). 따라서 여기의 산당은 우상 숭배 의식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여호와의 제단이다.
그가 오늘 성읍에 들어오셨나이다. 이같은 행위는 사무엘이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자신의 사사직을 수행했다는 사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7:15-17). 따라서 본 구절은 여기의 이 성읍이 사무엘의 고향 ‘라마’가 아니라는 증거가 결코 되지 못한다.
그가 먹으러. 이것은 그 때 산당에서 드려진 제사가 화목제였음을 강력히 시사한다. 즉 화목제만이 제사 의식이 끝난 후 예배 참석자가 공동으로 그 제물을 함께 나눠 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실 제물을 함께 나눠 먹는 일은 화목제 제사 의식의 필수적인 한 부분이었다(레 7:11-18). 왜냐하면 화목제는 하나님과 백성 및 백성과 백성 간의 화목과 친교 도모를 제일의 목표로 하였으며, 그같은 화목과 친교는 여호와 앞에서 함께 먹고 마심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레 7:11, 19-21).
그가 제물을 축사한 후에야. 여기서 ‘축사’(히, 예바레크)는 감사 기도와 같은 성격으로 보아야 한다(Keil). 즉 ‘바라크’(‘예바레크’의 원형)라는 동사는 성경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찬송하다’ (대하 31: 8, 느 8:6, 시 34:1, 63:4), 인간에 대해서는 ‘복을 빌다’(창 27:34, 대하 6:3) 의 뜻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여기처럼 어떤 물건을 대상으로 할 경우 ‘바라크’라는 단어는 ‘기도하다’란 뜻도 있으므로 곧 ‘감사 기도하다’ 란 뜻으로 봄이 적절할 것이다(요 6:11).
청함을 받은 자가 먹음이니이다. 여기서 ‘청함을 받은 자’는 단순히 제사 의식에 참여했던 일반 백성들을 가리키지 않는다. 이들은 사무엘의 선견 지명에 따라 특별히 초청되었던 그 성읍의 지도자들인 듯하다(22-24절). 즉 사무엘이 사울을 왕으로 우대하고, 또 기름 붓는 자리에 참여할 증인들이었을 것이다(22절).
그러므로. 사무엘은 제사 제물에 반드시 축사해야 하며, 그래서 ‘그는 반드시 산당에 올라가야 하므로’란 뜻이다. 즉 이것은 사울이 산당에 올라갈 경우 사무엘을 반드시 만나게 될 필연성을 강조하는 접속사이다.
마침 … 마주 나오더라. 사무엘과 사울의 이 만남은 하나님의 적극적인 섭리 하에 이루어진 것임이 이어 나오는 15, 16절에서 밝히 설명되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잃어버린 나귀 사건’(3절)이란 작은 사건을 통하여, 장차 메시아 왕국을 예시하는 이스라엘의 왕정 제도 설립이란 당신의 원대한 구속사적 목적을 이루어 나가셨다. 이를 통해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확고한 진리는, 특히 성도의 삶에 있어서 우연이란 결코 있을 수 없으며, 따라서 성도는 영적 귀를 기울여 매사를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신령한 메시지를 청취할 수 있어야 한다(마 10:29-31).
너는 그에게 기름을 부어. 기름 부음의 의식은 왕이나 제사장 혹은 선지자 등을 거룩히 구별하여 임직할 때 행하는 상징적 의식이다(출 29:7, 왕상 1:39, 19:16). 고대 중근동의 풍습에 따르면, 기름 부음의 행위는 무엇을 거룩히 구별할 때 베푸는 상징적 행위였다(창 28:18, 31:13, 35:14, 출 29:36, 40:10, 레 8:10, 민 7:1, 10). 즉 이같은 의식을 통하여 고대 중근동 사람들은 사람이나 물건을 세속적인 용도로부터 구별하려고 했다. 한편, 고대 아마르나 서신(Amarna Letters) 은 B.C. 14세기에 수리아나 가나안 지역 등지에서 왕이 기름 부음을 받았던 사실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따라서 이같은 사실은 이스라엘의 기름 부음 의식이 그 주변 국가들의 그것과 전혀 무관하지 않음을 보여 준다(10:1). 그러나 이스라엘에서의 기름 부음 의식은 특별히 하나님의 거룩성이 반영되고, 하나님의 영이 개입되는 독톡성을 지닌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삼으라. 여기서 ‘지도자’(히, 나기드)는 보통 ‘족장, 두령’이란 의미로 사용된다(대상 12:27, 대하 11:22, 시 76:12). 따라서 여기의 ‘지도자’는 왕과는 다르다. 그런데 구약 성경에서 ‘왕’(히, 멜렉)이라는 단어는 이미 창세기에서부터 사용됐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사울에 대하여 굳이 ‘지도자’라는 단어를 사용하신 것은 열방과 같은 왕을 기뻐하지 않으셨던 하나님의 본심이 반영된 것이다(8:7-8).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이스라엘의 방백 정도로 세우셨지만, 나중에 사울은 백성들의 인본주의적 요구에 부응하여 왕이 되었던 것이다(Abrecht Alt).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구원하리라. 하나님께서 사울을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삼으신 목적이다. 사실 그 당시 이스라엘은 블레셋의 압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즉 사무엘의 미스바 전투 대승리 이후(7:7-11) 블레셋으로부터 잃어버린 입지를 많이 회복하기는 하였지만(7:14),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블레셋의 계속되는 위협과 압제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 있었다. 따라서 그로 인해 백성들은 하나님께 부르짖었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긍휼히 여기사 베냐민 지파의 사울을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삼아 군사적 목적을 수행토록 하신 것이다.특별히 여기서 그러한 목적을 수행할 인물이 베냐민 지파 출신(9:1-2)이었다는 것은, 첫째 그 지파의 혈통적 성격상 호전적이었고 (창 49:27, 삿 20:12-16), 둘째 그 지파의 지리적 위치상 블레셋과의 충돌이 불가피했기 때문이다(Smith, Fay).
내 백성의 부르짖음이 내게 상달되었으므로. ‘부르짖음’(히, 차아카)은 위급한 상황에서 구원받기 위하여 극렬히 간구하는 호소를 뜻한다(창 18:21, 19:13, 출 3:7, 느 5:1). 그리고 ‘상달되었으므로’(히, 바아)는 ‘오다, 들어오다’의 의미이다. 따라서 이것은 결국 백성들의 호소가 지극히 간절하여 그 부르짖는 절규가 하늘에 사무쳤음을 보여 준다(5:12, 출 3:9).
내가 그들을 돌아보았노라. ‘돌아보다’(히, 라아)는 ‘자세히 응시하다, 주의깊게 살피다’란 뜻이다(창 6:12, 22:13, 출 5:21, 왕하 7:13). 한편 성경은 하나님께서 백성들의 고통을 돌아보신 후에는 반드시 그들을 구원키 위한 구체적 행동이 뒤따랐음을 보여준다(출 3:7, 9, 4:31, 신 26:7, 왕하 14:26-27).
이가 내 백성을 다스리리라. ‘다스리다’(히, 아차르)는 ‘닫다, 제한하다, 소집하다’란 뜻으로서(시 107:29), 장차 사울의 통치 방식을 부정적으로 예시해 준다.
이르되 … 가르치소서. 이 말은 사울과 사환이 사무엘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이처럼 사울이 사무엘을 알아보지 못한 이유는 사무엘이 자신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한 어떤 치장을 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선견자. 9절 주석 참조.
너희가 … 나와 함께 먹을 것이요. 사무엘이 사울과 함께 사환까지도 한 식탁에 앉게 한 것은, 역시 같은 맥락에서 사무엘이 그 사환의 주인되는 사울을 가볍게 대하지 않겠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네 마음에 있는 것을 다 네게 말하리라. 여기서 ‘네 마음에 있는 것’은 단순히 암나귀를 찾아야 하는 일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 말은 선지자로서 사무엘이 사울에게 보다 중요한 일을 알려주겠다는 뜻으로, 구체적으로는 블레셋의 압제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일, 또는 이스라엘의 왕정 제도에 관한 일 등을 선지자의 자격으로서 사울에게 알려주겠다는 뜻이다(Bunsen). 그러므로 이것은 사울로 하여금 그 자신이 이스라엘을 블레셋의 압제에서 해방시키는 문제와 관련하여 하나님에 의해 지명되었음을 깨닫게 해주는 내용에 관한 것임이 분명하다.
온 이스라엘이 사모하는 자가 누구냐. 이것은 히브리 원문의 정확한 번역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1) ‘누구를 위하여 이스라엘의 사모함이 있겠느냐’, 혹은 (2) ‘누구에게 이스라엘 안의 사모할 만한 것들이 속하겠느냐’ 등으로 번역해야 할 것이다(Klein). 그 중 첫째 번역은 장차 왕으로서의 사울의 높은 신분을, 둘째 번역은 장차 왕으로서의 사울에게 홀러들어가게 될 재물을 강조한다. 아무튼 이 두가지 번역 모두 사울에게 돌아갈 왕권을 강조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사모’(히, 헤므다트 이스라엘)는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게 될 이스라엘의 왕권과, 또한 그 왕권으로 인해 소유하게 될 모든 값지고 귀중한 것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Keil, Smith, Fay).
너와 네 아버지의 온 집이 아니냐. 이것은 위의 첫 번째 번역을 취하면 ‘너와 네 아버지의 온 집을 위함이 아니냐’로, 그리고 나중 번역을 취하면 ‘너와 네 아버지의 온 집에게가 아니겠느냐’로 각각 번역된다.
베냐민 사람이 아니니이까. 한편 사울의 겸손한 발언 속에는 실제로 이스라엘 12지파 간의 세력 분포에 관한 현실적 이해가 깔려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베냐민 지파는 역사적으로 숫적 열세를 면치 못했으며(민 1:20-46, 26:51), 더욱이 사울의 이같은 말 속에는 사사기 20장에서 발생했던 내전의 상흔이 아직까지 베냐민 지파에게 남아 있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베냐민 지파. 1절 주석 참조. 특히 ‘지파’가 복수 형태로 된 맛소라 사본의 ‘쉬브테’는 단수 ‘쉐베트’로 고쳐 읽어야 한다(Keil, Fay, Smith).
청한 자 … 삼십 명. 여기 30명은 성읍의 유력 인사들이었을 것이다. 한편, 이처럼 왕을 세을 때에 손님을 초청하는 일은 고대의 보편적 관습이었던 것 같다.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모반을 하면서 손님 200명을 초대했던 사실은 좋은 예이다(삼하 15:10-12). 그러므로 틀림없이 이들은 (1) 특정인이 왕으로 세워졌음을 확증하며(13절 주석), (2) 또한 그 특정인으로 하여금 자신이 왕으로 채택되었음을 일깨우게 하는 증인들이었을 것이다.
상석에 앉게 하였는데. 이것은 높은 사람을 예우하는 고대의 일반적 관습이었다(Keil). 그리고 여기서 사무엘이 사울의 사환까지 함께 대우한 것은 그를 왕의 신하로서 예우한 셈이다(Smith).
네 앞에 놓고 먹으라. 아무튼 대선지자 사무엘이 사울을 상석에 앉히고, 또한 가장 귀한 음식을 미리 준비케 하였다가, 그에게 준 것은 분명 그를 왕적 지위로 예우했음을 뜻한다.
지붕에서. 여기서 ‘지붕’(히, 가그)은 아래에서 외부의 계단을 통하여 올라갈 수 있는 평평한 지붕을 뜻한다. 이러한 지붕은 양벽을 가로지른 대들보 및 석가래 위에 잘 다져진 진흙판을 덮음으로써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 사면에는 난간이 있었다(신 22:8). 따라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러한 지붕 위에서 휴식을 취하거나(삼하 11:2) 담화를 하고 잠도 청했으며, 혹은 그곳을 창고로 쓰기도 했으며(수 2:6), 심지어는 우상숭배의 장소로 사용하기도 하였다(렘 19:13).
하나님의 말씀을 네게 들려 주리라. 이것은 사무엘이 사울을 왕으로 세우기 위한 본격적인 행동을 취하겠다는 뜻으로서, 곧 기름 붓는 일을 가리킨다(10:1). 그러므로 여기서 사무엘은 하나님의 뜻을 말로써가 아닌 행동으로써 사울에게 전한 것이다. 물론 이때 사무엘은 아무도 없는 곳에서 사울에게 기름을 부었는데, 그 이유는 당시 사울이 왕으로 세워진 사실이 널리 알려질 경우, 그 절차상의 문제에 따른 부작용이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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