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 ‘엘리 앞에서’는 ‘엘리의 감독을 받으면서’란 뜻이다. 그리고 ‘섬긴다’(히, 샤라트)란 말은 구약 성경에서 성전 봉사 활동을 언급할 때 주로 사용된다(출 28:35, 43, 29:30, 민 16:9, 신 10:8, 대상 15:2, 대하 8:14). 따라서 이 말은 결국 사무엘이 그 때부터 본격적으로 희생제사의 직무에 참여하기 시작하였음을 강하게 시사한다.
여호와의 말씀. 구약 시대에 선지자들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던 신적 계시(神的 啓示, divine revelation)을 일컫는 일반적 명칭이다(사 38:4, 렘 1:2, 4, 6:10).
희귀하여 … 보이지 않았더라. 이 표현은 그 시대의 타락하고 부패한 영적 상황을 암시해 준다. 즉 계시의 희귀는 성경 전반의 가르침에서 볼 때, 백성들의 영적 도덕적 타락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일종이었다(암 8:12). 한편 여기서 ‘보이지’(히, 니프라츠)란 말은 ‘크게(널리) 퍼지다’(히, 파라츠)란 말에서 파생된 단어로서, ‘곳곳에 충만히 퍼지다’의 뜻이다(Driver, 잠 3:10). 따라서 ‘보이지 않았더라’는 말의 의미는 (1) 하나님의 계시가 이스라엘에게 주어지지 않았고(시74:9), (2) 또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계시에 지극히 무관심했음을 가리킨다(마 7:6).
이상. [히, 하존] 또는 ‘환상’(사 29:7)으로도 번역되는 이 말은 정상적인 시각이 아닌 꿈과 황홀경 등의 특수한 통로를 통해서 하나님께로부터 전달되는 묵시(revelation)를 가리킨다(Lower). 그러나 이것은 아예 오감이 완전히 마비되는 무아지경의 상태에서 일어나는 현상은 절대로 아니다. 이것은 자아 의식은 분명한 가운데 다만 초자연적으로 임하는 신적 계시의 전달 방법 중 하나이다.
그가 자기 처소에 누웠고. 대제사장 엘리의 ‘처소’는 분명치는 않으나 사무엘이 잠자던 곳과는 다소 떨어진 곳, 곧 성막의 입구쪽 별관이었을 것이다(Klein). 당시 성막은 실로에 오랫동안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제사의 원활한 수행을 위한 제반 부대 시설들 - 예를 들면 당직 제사장들의 처소, 사무엘처럼 성소에 헌신한 자들 및 회막문에서 수종드는 여인들의 거처 등 - 이 성막 주변에 세워지고 준비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R. Payne Smith).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으며. 그러므로 이 말은 때가 아직 완전한 새벽기 되지 않았음을 암시해 준다(Keil).
사무엘은 …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웠더니. 이 말은 사무엘이 하나님께 대한 헌신과 봉사를 위하여 계속적으로 성막 안에 머물고 있었음을 암시해 준다. 한편 여기서 ‘여호와의 전’(히, 헤칼 야훼)은 법궤 또는 언약궤가 있는 지성소나 분향단이 있는 성소를 의미하지 않고, 단순히 건물로서의 성막 전체를 가리킨다(시 11:4).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맛소라 본문(Masoretic Text)은 1:9에 이어 여기서도 성막을 ‘궁전’ 또는 ‘궁궐’이란 뜻의 ‘헤칼’로 기록한 듯하다(Keil & Delitzsch).
하나님의 궤 있는 … 전 안에 누웠더니. 이것은 사무엘이 지성소 안에서 잠을 잤다는 뜻이 아니다. 물론 언약궤가 지성소 안에 안치된 것은 사실이지만(출 26:33), 그 언약궤는 넓게 생각하면 또한 ‘전’(히, 헤칼) 안에 안치되어 있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사실 지성소에는 오직 대제사장만이 1년에 단 한 차례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다(레 16:2, 34, 히 9:7). 그러므로 사무엘이 잠을 잔 곳은 언약궤가 안치되어 있는 여호와의 전 뜰 주변에 제사장, 레위인, 헌신자들을 위해 지어놓은 거처이다(Keil, Fay). 한편 여기서 저자가 본 절에 ‘하나님의 궤’ 라는 말을 특별히 삽입하여 기록함으로써, 그 다음 절에서 사무엘에게 하나님께서 임재하실 것을 암시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다시 누우라. 이때 엘리는 사무엘이 깊은 잠을 자다가 꿈 속에서 헛 소리를 들은 줄로 생각한 것 같다.
두 귀가 울리리라. 이 말은 곧 ‘사건의 충격’을 가리킨다. 즉 하나님께서는 엘리 집안에 내리실 심판이 너무도 충격적이어서, 그 소식을 접한 자가 공포와 전율로 인해 귀가 멍멍할 정도가 될 것이라는 의미이다(Smith, Fay, Keil). 구체적으로 제사장 엘리 집안에 임한 하나님의 심판은 (1) 법궤가 블레셋 족속에게 빼앗기고, 실로 성소가 파괴된 사실(4:11, 17, 5:1), (2) 엘리의 두 아들이 전쟁터에서 한 날에 죽은 사실(4:18), (4) 엘리의 며느리가 해산하다가 죽은 사실(4:19-22) 등으로 나타났다. 한편, 이런 의미에서 ‘두 귀가 울리리라’는 말은 성경 다른 곳에서 예루살렘의 함락과 파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충격을 받게 되리라는 사실을 가리킬 때 역시 사용되었다(왕하 21:12, 렘 19:3).
처음부터 끝까지. 이는 어떠한 일을 진행함에 있어 그 중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세심하고도 철저히 이루겠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저주를 자청하되. ‘스스로를 타락시키되’(KJV, NIV)라는 뜻이다. 그런데 엘리의 두 아들이 제사장의 신분으로서 성소에서 그처럼 타락한 행동을 일삼은 것은(2:13-16, 22) 곧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와 다름없다. 따라서 70인역을 비롯, 일부 영역본들은 ‘하나님을 모독하되’(RSV, LB)로 번역했다.
엘리 집의 죄악은 … 속죄함을 받지 못하리라. 이 말은 엘리의 집안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불가피함을 강력히 알려준다. 그 이유는 (1) 엘리 집안의 죄악이 엄중한 경고 후에도 계속되었고, (2) 그러한 죄악을 속하는 거룩한 제사마저도 그들의 탐욕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되었기 때문이었다(2:12-17).
제물이나 예물로나. 여기서 제물(히, 제바흐)은 피흘림이 있는 희생제사를 가리키며, 예물(히, 민하)은 소제와 같이 피흘림 없는 곡식 제사를 가리킨다(R.P. Smith). 한편 이 두 가지는 구약 시대의 백성들이 자신들의 죄를 여호와께 속죄받을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다.
그 이상을 … 알게 하기를 두려워하더니. 사무엘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이상은 엘리 가문의 멸망과 직접적으로 맞물려 있었다. 따라서 사무엘은 하나님께로부터 엘리 가문의 멸망에 대한 예언을 듣고도 즉시 엘리에게 말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사무엘은 그같은 비극적인 예언으로 인하여 엘리 제사장이 심히 괴로워 할 것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소년 사무엘의 신중함이 엿보인다.
내 아들 사무엘아. 이것은 평소 엘리와 사무엘의 관계가 부자(父子)관계와 같이 밀접했음을 보여준다. 또한 ‘내 아들아’ 라는 호칭은 애정과 사랑의 표현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자신의 난감한 마음을 암시적으로 표현하는 호칭이기도 하다(6절).
내가 여기 있나이다. 이것은 엘리에 대한 사무엘의 존경심과 겸손한 마음, 그리고 순종의 의지를 보여주는 말이다(8, 9절).
하나라도 숨기면 하나님이 … 내리시기를 원하노라. ‘ … 하면 하나님이 … 하시기를 원하노라’와 같은 맹세적 표현은 성경의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14:44, 20:13, 25:22, 룻 1:17, 삼하 3:9, 35, 19:13, 왕상 2:23, 왕하 6:31). 본래 이와 같은 맹세적 표현은 중근동 지역에서 짐승을 잡아 죽이는 의식적 행위와 함께 이루어졌다(Klein). 즉 이같은 맹세는, 맹세자가 원하는 행동을 상대방이 신실히 실행하지 않을 경우 죽임을 당한 짐승과 같은 비참한 운명에 처하게 될 것을 암시해 주는 맹세의 한 방법이었다. 물론 여기서는 짐승을 죽이는 의식 행위가 생략되어 있지만, 위와 같은 당시대의 배경에서 본 절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는 여호와이시니. 사무엘의 모든 말이 틀림없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계시임을 엘리는 겸손히 인정한다.
선하신 대로 하실 것이니라. 이 말은 엘리가 하나님의 의지를 순히 받아들이고 있음을 보여준다. 즉 사무엘을 통해 전달된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집안의 멸망과 죽음에 관한 무서운 심판의 내용이었지만, 엘리는 완악하게 거부하거나 냉소적으로 대하지 않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 대로 모든 일이 이루어지기를 바랐다. 그러나 반면, 엘리는 이처럼 무서운 심판의 말씀을 듣고도 옷을 찢고 통회하며 재를 무릅쓰고 회개하는 참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따라서 이것으로 우리는 엘리의 신앙 면모를 얼핏 볼 수 있는데, 즉 그는 개인적으로는 후덕하고 어느 정도 신앙적이었지만, 공적으로 죄에 대처함에 있어 유약하고 미온적인 우유부단한 인물이었다(Keil, Smith).
“그러나 엘리는 참된 회개의 열매를 나타내지 않았다. 그는 자기의 죄를 자복하였으나 그 죄를 포기하지 않았다. 여러 해 동안 여호와께서는 당신의 무서운 형벌을 지체하셨다. 이 여러 해 동안에 과거의 실패를 속할 수 있는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노령의 제사장은 여호와의 성소를 더럽히고 무수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멸망으로 인도하는 죄악들을 시정하기 위한 아무런 효과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부조와 선지자, 582).
그의 말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니. 이는 사무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예언의 말은 헛된 것이 하나도 없이 모두 그대로 이루어졌다는 말이다. 그 이유는 여호와께서 사무엘과 함께 계셔서, 그의 입에 직접 예언의 말씀을 주셨기 때문이다. 사실 일찍부터 예언의 유효성은 참선지자의 증표였다(신 18:22). 이런 의미에서 후일 지혜자는 말하기를 회중의 스승의 말씀은 ‘잘 박힌 못’과 같다고 하였다(전 12:11).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단’은 이스라엘 북쪽 변경의 한 성읍 이름이다. 그런데 이곳의 원래 지명은 ‘라이스’(삿 18:29)였다. 그러나 이 지역에 단 비파의 사람들이 이주, 정착해 살면서 자신들의 조상 이름을 따라 이와 같은 지명을 붙였다. 단 지파는 원래 여호수아로부터 약속의 땅 중 남쪽 부분을 자신들의 기업으로 분배 받았다(수 19:40-48). 그러나 그들은 그 땅의 원주민을 몰아내지 못함으로, 그 땅을 완전히 소유할 수 없었다(삿 18:1). 그러던 중 정착지를 찾아다니다가 머무른 곳이 바로 이 단 지역이었다(삿 18:27).
‘브엘세바’는 팔레스타인 최남단 곧 헤브론 남서쪽 55 km 지점에 위치한다(창 21:14, 26:23, 삿 20:1). 따라서 ‘단에서 브엘세바까지’란 말은 이스라엘 전 국토를 가리키는 관용적이 표현이다(삿 201).
선지자. [히, 나비] 어원적으로 ‘부름을 받은 자’란 뜻이다(Klein). 그런데 우리는 이같은 어원적인 의미와 더불어 이 단어의 문맥적인 의미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즉 본 장의 문맥은 선지자의 의미가 (1) 여호와께서 임하신 바 된 자(10, 21절), (2) 여호와의 계시를 받은 자(17, 21절)임을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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