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 … 내 뿔 … 내 입. 이것은 히브리 문학에서 전형적 수사 기법으로 사용되는 3중 대구법적 표현 방식이다. 한나는 이같은 표현을 통하여 자신에게 베풀어진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벅찬 감격으로 말하고 있다. 기도의 응답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사무엘이 출생함으로써, 그녀의 ‘마음’은 괴로움(1:10)과 슬픔(1:15)에서 즐거움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의 ‘뿔’은 먼지 가운데서 짓밟힘을 당하던 비참한 처지에서(1:6) 다시 높아지게 되었다. 더구나 그녀의 ‘입’은 침묵할 수 밖에 없었던 처량한 신세에서(1:13) 다시 크게 열려 자신의 원수에 대하여 여호와의 은혜를 마음껏 알릴 수 있게 되었다. 한편 구약 성경에 자주 나오는 뿔(히, 케렌)은 이것 달린 동물이 자신의 머리를 높이 쳐들고 힘을 과시하며 자랑스럽게 다닌다는 점에서 ‘힘, 능력, 권위, 자부심, 긍지’ 등을 상징한다(신 33:17, 시 75:5, 89:17 등). 따라서 무자시(無子時)에 대적 브닌나에 의해 무참히 이 뿔을 짓밟힌 한나는 이제 하나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그 뿔을 다시 높이 들 수 있었다. 그러나 혹자(Ewald)의 생각처럼 여기서 이 뿔은 ‘교만’을 상징하지는 않는다.
이는 … 주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기뻐함이니이다. 이 구절은 한나의 기쁨, 곧 앞에서 언급된 3중적 대구법으로 표현된 한나의 벅찬 감격과 희열이 궁극적으로 ‘주의 구원’에 근거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그런데 이 구원(히, 예슈아)은 (1) 일차적으로는 무자시에 당한 온갖 수모와 멸시로부터의 구원이겠지만, (2)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구속적 의미상, 사무엘을 통한 타락한 종교적 상황으로부터의 이스라엘의 구원이며, (3)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인류의 구원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주 밖에 다른 이가 없고.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한나의 두 번째 고백은 하나님의 절대 존재성, 곧 ‘유일성’이다. 그런데 이 유일성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속성이겠지만(시 86:10), 또한 앞에서 언급된 ‘거룩성’의 근거이기도 하다(R. Payne Smith). 당시 이방신을 겸하여 섬기는 풍조가 만연해있던 사사 시대 말기의 타락한 상황 속에서(삿 3:6, 6:25), 하나님을 유일하신 분으로 고백한 한나의 신앙은 놀라운 것이었다. 신 4:35, 6:4 주석 참조.
하나님 같은 반석도 없으심이니이다.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한나의 마지막 고백은 하나님의 ‘신실성’이다. 왜냐하면 ‘반석’이라는 단어는 구약 전체를 통하여, 언제나 변함없이 성도의 구원을 궁극적으로 이루시는 언약의 하나님에 대한 상징적 명칭으로 쓰여지고 있기 때문이다(신 32:4, 시 19:14, 합 1:12). 한편 혹자는 ‘반석’(히, 추르)이라는 단어를 ‘산’으로 번역함이 더 타당하다고 말한다(Klein). 그 이유로 그는 (1) ‘산’이라는 단어가 하나님의 신실성을 더욱 효과적으로 부각시킬 수 있다는 사실과(시 27:5, 61:2), (2) 본 히브리어 단어의 어근이라 할 수 있는 우라릿 단어가 ‘산’을 뜻한다는 사실을 제시한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이라는 지리적 배경 하에서 ‘반석’은 급한 상황에 직면했을 때 언제나 가장 쉽게 피신할 수 있는 도피처요 안식처라는 점에서 ‘반석’이란 번역은 적당하다. 신 32:4 주석 참조.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라. ‘지식의 하나님’(히, 엘 데오트)은 하나님의 전지성(全知性)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즉 이것은, 하나님께서는 자연 법칙과 인간 사회의 이성적 법칙, 그리고 그 법칙들에 따라 벌어지는 원인, 과정, 결과까지도 완전히 알고 계시는 전지하신 분임을 시사해 준다
행동을 달아 보시느니라. 이말은 전지(全知)하신 하나님께서 인간이 행한 어떤 행동의 내면적 특성까지도 철저히 파악하고 계심을 가리킨다(Klein). 사실 한나의 대적 브닌나는 한나의 불임(不姙)을 그녀의 사악성 내지는 하나님께 저주 받은 증거로 오판하여, 그녀를 얕잡아 보고 격동시켰다(1:6-7). 또한 브닌나는 자신의 의도대로 한나가 격동됨을 보고 승리감에 도취되어 교만한 말을 사람들에게 늘어놓았을 것이다. 그러나 전지하신 하나님께서는 브닌나의 그러한 사악한 속 마음과 행동의 성격을 파악하셔서, 당신의 공평하고도 의로운 기준에 따라 그녀를 판단하셨을 것이다(잠 16:2, 21:2, 24:12).
용사의 활은 꺾이고. 고대 사회에서 ‘활’은 용사가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도구이자, 또한 무엇보다도 귀중하게 생각하는 신뢰의 대상이다. 그리고 ‘꺾이다’(히, 하타트)는 ‘산산히 부서지다, 깨지다’란 뜻으로서, 사람이나 국가가 안팎으로 철저히 붕괴되어 도저히 소생 불가능하게 된 상태를 가리킬 때 사용한다(렘 50:2, 51:56). 따라서 본 구절은 ‘활을 거머쥔 용사’로 상징된 바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기 보다는 자기 자신의 힘만을 의지하며, 또한 그러한 자신의 힘을 괴시하기를 일삼는 교만한 자들이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의 징벌에 따라(3절), 완전히 쇠망하게 될 것을 가리킨다(시 34:21, 37:35-36, 잠 14:32).
넘어진 자는 힘으로 띠를 띠도다. ‘넘어진 자’는 힘이 없고 연약하여 힘센 악인들 곧 활 가진 용사들에 의해 무참히 짓밟혔던 자들을 가리킨다(Klein). 그리고 ‘힘으로 띠를 띠도다’란 말은 넘어진 자가 이제 일어나 전쟁을 준비하고 출전할 수 있을 만큼 자신의 힘을 다시 회복한 활기차고 강건한 상태를 가리킨다(엡 6:14). 한편 자유주의 고등 비평가들(Ewald, Pfeiffer, Eissfeldt 등)은 본 절과 10절 등을 근거로, 한나의 기도 속에 ‘국가적인 전쟁 및 승리’의 주제가 부각되어 있다고 주장하면서 ‘한나의 기도송’(2:1-10)은 한나보다 훨씬 후대, 곧 왕정 체제하의 시기에 편집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문서설의 입장에서 본 독단적인 견해일 뿐이다. 왜냐하면 본 절에서 언급된 ‘용사’와 ‘넘어진 자’의 개념은 국가적인 강대국과 강자와 겸손한 약자의 개념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10절에서 언급된 ‘왕’의 개념 역시반드시 왕정 체제하의 실제적인 어떤 왕을 전제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여기서는 이스라엘을 의(義)로 통치할 이상적인 왕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왕의 개념은 한나 이전 시대부터 이미 약속되어 있었다(창 17:6, 신 17:14-20, 삿 8:22, Esward J. Young).
주리던 자들은 다시 주리지 아니하도다. 이것은 비록 지금은 가난하지만, 하나님께 신실한 자들은 마침내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 결코 배고픔을 모르는 풍족한 상태에 이를 것임을 가리킨다(눅 16:19-31).
전에 임신하지 못하던 자는 일곱을 낳았고. 이말은 일차적으로 한나 자신이 체험한 기쁜 감격을 노래한 것이다. 특별히 여기서 ‘일곱’은 ‘신적 충만(완전)’을 상징하는 수이니 만큼(Keil), 이는 곧 자녀 출산과 관련해서 한나가 받은 하나님의 최대 축복을 상징한다(룻 4:15). 비록 당시에 한나는 사무엘 한 명만을 자식으로 낳았지만, 그러나 그 아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보살핌 가운데 낳은 자식이었으므로, 그 당시 한나는 마치 ‘일곱’ 아들을 낳기라도 한듯이 크게 기뻐하였을 것이다. 결국 이 말은 이전에 한나가 당했던 것처럼 많은 고통과 괴로움을 당하는 슬픈 마음을 가진 자들을 하나님께서 친히 위로하시고 큰 기쁨으로 축복해 주실 것을 가리킨다.
많은 자녀를 둔 자는 쇠약하도다. 이것은 분명히 브닌나에 대한 언급일 것이다. 즉 브닌나는 한나가 아들을 낳음에 따라 이제 교만한 말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었다. 이와 같이 된 것은 그녀가 쇠약해진 것과 다름 없었다. 더 나아가 이 말은 브닌나와 같이 자신의 자랑거리를 가지고 그렇지 못한 자들을 멸시하고 조롱하는 모든 악인들은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그 자랑하던 것을 상실하게 됨으로써 오히려 더욱 쇠약하게 될 것을 가리킨다. 그런데 많은 성경 주석가들(Jerome, Augustine, Patrick, Wordsworth 등)은 본 구절 속에서 영적 의미를 발견하였다. 즉 브닌나와 한나의 관계를 사도 바울이 구속사적으로 서술한 하갈과 사라의 관계로 이해하여(갈 4:21-31), 곧 브린나는 많은 자녀가 있으나 약속을 받지 못한 소망 없는 여인으로, 그리고 한나는 비록 처음 잉태치 못했으나 약속을 받은 소망 있는 여인으로 각각 이해하였다. 그리고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한나를 장차 많은 열매를 맺을 그리스도교회의 모형으로 이해하고 있다(J.P. Lange).
땅의 기둥들은 여호와의 것이라. ‘기둥들’(히, 메추킴)은 여기와 14:4에 나오는 단어로서 원래 ‘거대한 바위’나 ‘바위산’을 뜻한다(Klein). 즉 히브리인들은 바로 이것을 세상(땅)의 초석(礎石)으로 본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 초석을 놓으신 분이 여호와시요, 또 관리하시는 분도 여호와이시다. 그러므로 이러한 땅의 기둥들이 ‘여호와의 것이라’는 말은 우주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나타내는 말로, 곧 여호와께서 이 세상 만물에 주권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실 수 있는 근거를 확실히 제시한다.
세계를 그것들 위에 세우셨도다. 이것은 이 세상이 기둥에 받쳐져서, 공간에 달려 지탱되고 있다고 보는 고대 히브리인들의 사상과 잘 부합된다(욥 26:7). 결국 위와 같은 사실 또한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대해서 당신의 주권을 행사하실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인지를 명확히 제시한다. 그것은 곧 이 세상의 기초를 놓았을 뿐 아니라, 그 기초 위에 만물을 조성하신 분도 하나님이시요, 그 만물을 유지 운행 섭리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후일 사도 바울은 이러한 하나님의 절대 주권 사상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롬 11:36).
발을 지키실 것이요. 성경적 표현상 ‘실족’ (신 32:35)과 ‘넘어짐’(시 116:8)은 곧 패배나 타락을 상징하는 말들이다. 따라서 ‘발을 지킨다’는 것은 모든 패배나 타락으로부터의 안전한 보호를 뜻한다(Klein).
악인들을. 여기서 ‘악인’(히, 레샤임)은 신분적으로나 윤리적으로 모든 면에서 의인을 박해하고 억압하는 사악한 자들을 가리킨다(시 1:1, 잠 28:4).
흑암 중에서 잠잠하게 하시리니. 이 표현은 (1) ‘흑암’이 성경에서 종종 ‘스올’(6절)처럼 죽음 혹은 멸망을 상징할 때 사용되는 단어라는 점과(욥 10:21-22, 15:22, 17:13) (2) 잠잠하게 하다란 역시 사악한 자들이 필연적으로 당할 비참한 결과를 표현할 때 사용되는 단어라는 점에서(시 31:17), 이 말은 악행자들에 대한 죽음 또는 멸망의 심판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산산이 께어질 것이라. 여기서 ‘깨어질 것이라’(히, 나하트)는 말은 ‘끌어내리다, 내리누르다’란 뜻으로서 교만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가리킨다(단 5:20).
하늘에서 우레로 … 치시리로다. ‘우레’가 하나님과 관련되어 나타나는 경우, (1) 당신의 백성들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현현’(출 19:16-20, 시 18:7-15, 합 3:4-15)을 상징하고, (2) 당신의 원수들에 대해서는 ‘징벌’이나 ‘심판’(7:10, 계 11:19)을 상징한다. 따라서 여기서 ‘하늘에서 우레로 그들을 치시로다’라는 말은 대적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땅 끝까지 심판을 내리시고. 이것은 일차적으로는 이스라엘의 성군(다윗)을 통한 모든 이방 세력의 정복을 암시하고(삼하 8장), 궁극적으로는 메시아(그리스도, ‘기름 부음 받은 자’란 뜻)를 통하여 모든 사탄의 세력을 꺾은 후 이룩될 하나님 나라의 의(義)의 통치(고전 15:25)를 가리킨다.
자기 왕에게 힘을 주시며. 이것 또한 앞의 문구와 같이 (1) 근시적으로는 하나님께서 다윗과 같은 의로운 왕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번성케 하실 것과 (2) 원시적으로는 영원한 평강의 왕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시키실 것을 예언적으로 보여준다(Aalders, Goslinga). 이런한 점에서 ‘한나의 기도송’ 은 메시아적 사상을 담고 있는 복음적인 예언의 노래요, 성령의 감화송이다(Wordsworth).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의 뿔을 높이시리로다. 하나님께서 당신이 세우신 왕의 권위를 높이겠다는 뜻이다. 한편 여기서 ‘기름 부음을 받은 자’(히, 마시아흐)는 왕을 가리킨다(왕상 1:30). 그런데 성경은 왕 이외에 또 다른 기름 부음을 받은 자에 대하여 언급하다. 즉 선지자(왕상 19:16)와 제사장(출 40:13)이 바로 그들인데, 이들 모두는 하나님의 뜻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실현되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님에 의해 구별되어 임명된 자들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왕, 선지자, 제사장은 장차 영원히 기름 부음을 받을 자, 곧 하나님의 뜻을 이 땅 위에서 완전히 실현시키실 ‘메시아’ - 헬라어로는 ‘그리스도’ - 이신 예수를 예표하는 인물들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여기서 기름 부음 받은 자의 뿔이 높아지기를 바라는 한나의 기도는 한나 자신의 뿔이 높아지기를 바라는 기도(1절)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즉 왕의 강성은 곧 온 백성의 번영과 안정, 그리고 윤택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실로 왕이 여호와의 축복을 받을 때 백성들 개개인들도 지속적인 하나님의 은총을 체험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따라서 이것은 구속사적으로 곧 하나님 나라의 백성된 성도들은 그리스도(메시아) 안에서 참된 복을 누릴 수 있음을 암시한다.
엘리 앞에서. ‘엘리의 면전에서’라는 뜻으로, 곧 ‘엘리의 감독 하에서’(under Eli, NLV)라는 의미이다(민 3:6). 그 이유는 당시 실로 성소의 대제사장은 엘리로서, 그가 성소의 총책임자였기 때문이다.
여호와를 알지 못하더라. 이 말은 (1)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치 아니하며 (2) 따라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3) 그래서 결국 하나님을 업신여기고 대적하는 행위를 가리킨다(욥 18:21, 렘 4:22, 호 5:4).
제사장들이 백성에게 행하는 관습. 여기서 ‘관습’(히, 미쉬파트)은 제사장들에게 보장된 법적 권한이 아니라, 그러한 권리나 권한을 뛰어넘은 월권 행위나 태도를 가리킨다(Keil).
제사를 드리고 그 고기를 삶을 때에. 여기서 ‘제사’는 화목제를 의미한다(1:3-5). 화목 제사에서는 제물 중 기름 부분만을 번제단에 태우고 (레 3:3-5), 살코기 부분은 제사장과 제물을 바친 자가 나누도록 되어 있었다. 따라서 여기의 ‘고기’는 제사장과 제물을 바친 자에게 나뉘어질 수 있는 부분을 가리킨다. 이것은 삶아진 다음 제사장과 제물을 바친 자에게 각각 모세 율법에서 지정한 몫에 따라 분배되어야 했다.
제사장의 사환. 여기서 ‘사환’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나아르’는 ‘사환, 종’이란 뜻 이외에도 ‘소년, 젊은이’란 뜻도 있다. 여기서는 문맥상 ‘소년’이란 뜻으로 보는 것이 좋다. 그리고 그렇게 볼 때 여기서 사환은 엘리의 두 아들 자신을 가리킨다. 그처럼 보는 이유는 여기서 ‘제사장’(히, ‘하코헨’, 문자적으로는 ‘그 제사장’)이 단수로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만일 ‘두 아들’의 사환이었다면, ‘제사장’이 복수로 기록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17절의 내용은 분명 엘리의 두 아들에 관한 언급인데, 거기에는 같은 단어가 복수화되어 ‘소년들’로 번역되어 있다.
실로. 1:3 주석 참조.
기름을 태우기 전에도 … 고기를 내라. 일반 다른 제물도 물론이거니와, 화목제의 희생제물도 반드시 여호와의 몫인 기름 부분이 먼저 번제단 위에서 태워져 여호와께 바쳐져야만 했다(레 3:3-5, 7:23-25, 17:6). 그리고 그런 후에야 비로소 제사장 자신들의 몫을 취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엘리의 두 아들들의 이러한 행동은 율법의 절차와 규정을 부인하고 무시하는 극악한 범죄 행위였다.
그가 네게 … 원하신다. 이것은 엘리의 두 아들들이 자신의 아버지 엘리 대제사장을 빙자하여 자신들의 탐욕을 채웠음을 보여준다.
먼저 기름을 태운 후에 … 원하는 대로 가지라. 제사장의 횡포에 대하여 오히려 제사 드리는 사람은 하나님께 먼저 제물이 바쳐져야 한다는 원칙을 설명한다. 아울러 자신의 몫에 대해서는 포기하겠다는 뜻도 시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사장은 강제로 고기를 빼앗아 자신의 탐욕을 채운다. 이것은 당시 엘리와 그의 두 아들에 의해 주관되던 실로 성소 제사의 타락상을 구체적으로 보여 준다. 정녕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해서는 새로운 지도자가 간절히 요청되던 시기였다.
멸시함이었더라. [히, 니아추] 이 단어는 여기서처럼 강조형으로 쓰일 경우 특히 하나님께 대한 적극적인 훼방 및 경멸 행위를 가리키는 단어이다(민 16:30, 신 31:20, 삼하 12:14, 시 10:3, 13, 74:18, 사 1:4, 5:24). 따라서 엘리의 두 아들들의 죄악은 단순히 제사 제물을 탐내어 그것을 탈취한 강도 행위일 뿐 아니라,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간에 맺은 언약과 구속의 제사 제도를 파괴하고 어지럽힌 신성 모독죄라는 데 그 심각성이 있다(O. Von Gerlach).
작은 겉옷을 … 주었더니. 여기의 ‘겉옷’은 이음새 없이 만든 옷으로서, 다만 머리와 팔 부분만 구멍을 내고 땅에 끌릴 정도로 길게 만든 옷이다. 당시 이러한 ‘겉옷’(히, 메일)은 왕과 제사장을 비롯, 일반 평민과 여자들까지도 입었던 보편적인 옷이었는데, 그 직위와 성별에 따라 옷의 색깔 및 장식품 등이 달랐다. 물론 직위가 낮을수록 수수했다. 그리고 제사장들 및 레위인들은 이 겉옷 위에 ‘에봇’ 을 걸쳤다(레 8:7). 한편, 본 절을 통하여 우리는 비록 사무엘이 하나님께 영원히 바쳐졌지만(1:11), 가족들과의 인연까지 완전히 단절되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여호와 앞에서 자라니라. ‘여호와 앞에서’는 곧 ‘여호와의 면전에서’(in the presence of the Lord, NLV, RSV)란 의미로서, 이는 사무엘이 육체적 성장 뿐 아니라 영적 성숙도 아울러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 준다.
그의 아들들이 … 행한 모든 일. 틀림없이 13-17절에 언급되고 있는 신성 모독과 탐욕죄에 관한 내용의 죄악일 것이다.
회막 문에서 수종 드는 여인. 여기서 ‘수종 드는 여인’은 당시의 성소 규례를 따라 성소 내에서 일정한 직무를 부여받았던 헌신된 여인들이었음이 틀림없다(출 38:8). 그러나 성경은 이 여인들이 성소에서 구체적으로 어떠한 일을 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아마도 이 여인들은 자주 반복되는 희생제사시에 반드시 수반되는 일, 곧 식기세척 및 그밖의 음식물 준비 등의 잡다한 일에 종사하였던 것 같다(R. Payne Smith, F.R. Fay). 아무튼 이들은 하나님께 특별히 헌신되어 성소의 일에 전념한 여인들이었음에 틀림없다.
동침하였음을 듣고. 여기서 ‘동침하다’에 해당하는 ‘샤카브’는 원래 ‘눕다’ 혹은 ‘잠자다’의 뜻이지만, 성경 용례상 대개의 경우 비합법적인 성행위를 표현할 때 사용되는 단어이다(창 19:33, 35:22, 레 15:33, 18:22, 20:11). 그런데 여기 이 단어는 강간 행위와는 다르다는 점에서, 홉니와 비니하스의 음행은 회막문에서 수종 드는 여인과의 합의 하에 이뤄졌음이 분명하다. 이와 같은 일은 일면 이방 민족의 음란한 제의 풍습이 이스라엘 사회, 심지어 제사장 사회에까지 깊숙히 침투해 들어왔음을 보여 주기도 한다(민 25:1-5). 그런데 이같은 악행은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기까지 계속된 듯하다(왕하 23:7). 아무튼 제사장의 신분으로서 하나님께 헌신된 여인들을 더럽힌 엘리의 두 아들의 이 사악한 행위는 하나님을 심히 욕되게 한 것임이 분명했다(25절). 아울러 일반 백성들에게 악영향을 끼쳐 그들로 실족케 한, 실로 용서받지 못할 죄악이었다(24-25절).
너희가 … 범과하게 하는도다. 신분상으로 영적 지도자들인 홉니와 비느하스의 범죄 행위는(13-16, 22절) 백성들로 하여금 (1) 하나님께 대한 제사를 멸시케 하고(17절), (2) 하나님의 성소를 가볍게 여기게 하며, (3) 성적으로 타락케 하기에 충분하였다.
사람이 여호와께 범죄하면 누가 그를 위하여 간구하겠느냐. 그러나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범죄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어찌할 권리나 능력이 없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관련된 문제에 중재자로 나서서 그 문제를 해결할 자는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범죄 행위에는 오직 하나님의 심판만이 있을 뿐이었다. 결과적으로 두 아들에 대한 엘리의 책망 요지는 (1) 그들의 죄가 신성 모독죄에 해당되는 중대한 대신(對神) 범죄 행위라는 것이고 (2) 따라서 즉시 회개하지 않으면 반드시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피할 수 없게 된다는 뜻이다.
이는 여호와께서 … 죽이기로 뜻하셨음이었더라. 이 말은 여호와께서 엘리의 두 아들을 죽이시기 위하여 그들로부터 회개할 가능성마저 고의적으로 배제시켰다는 뜻이 아니다. 이 말은 엘리의 두 아들에 대한 나쁜 여론, 영적 지도자로서의 신분 등에도 불구하고 이미 그 마음이 완악해져 타락과 방종에 눈멀게 되자, 여호와께서 그들의 그러한 마음을 방치해 두셨고, 따라서 이제 그들에게는 필연적으로 여호와의 무서운 심판만이 있을 뿐임을 가리킨다. 출 9:12 주석 참조.
너희 조상의 집. 이것은 엘리 가문이 속한 레위 지파, 그중에서도 특히 제사장의 직분을 위임받은 아론의 가문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바로의 집에 속하였을 때에. 즉 엘리의 뿌리요 조상 가문인 아론의 집이 바로의 통치 하에서 노예 생활을 하고 있었던 비참한 때를 가리킨다.
나타나지 아니하였느냐. 익명의 선지자는 엘리 가정의 죄악을 책망하고 심판을 선언하기에 앞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베푸셨던 크신 은혜를 먼저 언급한다(신 5:6). 즉 그 은혜는 (1) 엘리 가문의 뿌리인 아론의 일가가 애굽의 바로 치하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신 사실이며(출 4:27, 7:8), (2) 또한 하나님께서 그들을 다른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구출하셨을 뿐만 아니라(출 12:41-42),특별히 모세와 더불어 유월절 규례를 준비케 하심으로(출 12:1-28), 장차 제사장 가문으로 삼고자 하셨다는 점이다(Keil, Fay).
에봇을 입게 하지 아니하였으냐. 여기의 ‘에봇’은 18절에서 언급된 일반 에봇과는 다르다. 이것은 가슴에 하나님의 뜻을 물을 수 있는 우림과 둠밈이 들어 있을 뿐 아니라, 각종 화려한 색상의 실로 규례를 따라 엄격히 만들어진 대제사장만의 특별한 의복이다. 출 28:6-14 뿐 주석을 참조하라.
모든 화제를 … 주지 아니하였느냐. 이 말은 하나님께 드려지는 각종 제사 제물 중에서 제사 후 제사장들에게 돌아갔던 일정량의 분깃(응식)을 가리킨다. 이외에도 제사장들은 레위인들에게 돌려진 백성들의 십일조 중의 십일조를 받았다(민 18:26-29).이같은 각종 혜택에 의하여 제사장 가문은 모두 유족했고 부유했다.
네 아들들을 나보다 더 중히 여겨. 대제사장으로서 엘리는 그 누구보다도 신본주의적 삶을 살아야 했고, 또한 성소의 규례를 유지시키는데 그 누구보다도 거룩한 열정으로 불타올라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의 신성한 제사 제도를 짓밟는 두 아들의 행위에 대해 점잖게 타일렀을 뿐(24절), 별다른 제재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이는 분명 엘리가 대제사장으로서 직무를 유기했음을 의미하며, 또한 인본주의적 삶을 살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장 좋은 것으로 너희들을 살지게 하느냐. 두 아들의 범죄 행위에 엘리가 결부되어 있듯이, 그들이 저지른 죄악도 이중적이다. 즉 (1) 응당 하나님의 몫인 가장 좋은 것을 자신들이 취함으로써,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는 대신(對神) 범죄를 저질렀을 뿐 아니라 (2) 가장 좋은 것으로 여호와께 드린 백성들의 정성어린 마음까지 강탈함으로써 대인(對人) 범죄까지 저질렀다.
결단코 그렇게 하지 아니하리라. 이것은 (1) 좁은 의미로는 하나님께서 엘리 가문의 제사장 직분을 박탈하실 것이며 (2) 넓은 의미로는 하나님께서 엘리 가문의 제사장 직분의 권위를 약화시키겠다는 뜻이다. 그런데 위와 같은 하나님의 징계는 일차적으로는 죄악과 보응이라는 측면에서 하나님의 진노에 따른 심판적 의미가 있다. 이차적으로는 아론의 반차가 아니라,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영원한 대제사장 그리스도를 세우기 위한 구속사적 의미(히 7:17)가 있다. 한편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볼 때 하나의 문제는 ‘과연 하나님의 약속은 철회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물론 구속사적으로 진행되어가는 하나님의 신적 경륜과 섭리에는 하등의 변화나 철회가 없다.그러나 그러한 경륜이나 목적을 향해 역사가 점진적으로 진행되어 가는 과정에서 구체적으로 개인과 국민에게 있어서는 그들의 순종과 불순종, 그리고 조건과 상황 등에 따라 하나님의 뜻이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다. 본 절도 바로 그러한 측면에서 이해하여야 한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 익명의 선지자에 의해 엘리 가정에 선포된 여호와의 이 말씀은 모든 시대를 막론하고 하나님의 소명을 받아 하나님의 일을 하는 모든 자들에게 공히 적용되는 대명제이다(벧전 5:1-10). 즉 생사 화복과 빈부 귀천의 유일한 근거가 오직 하나님인 줄 바로 깨닫고 모든 일을 그분의 영광을 위하여 행할 때, 하나님께서도 역시 그를 높이드사 영화롭게 할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교만하여 하나님을 잊고 그분의 말씀을 멸시할 때, 하나님께서도 역시 그를 끌어내리사 만인의 경멸거리로 만드실 것이다. 바로 이러한 원리가 조만간 엘리 가정에 그대로 적용되어 나타났으니, 곧 제사 규례를 어기고 성소를 더럽힘으로써 하나님을 멸시한 엘리 가정은 역시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받아 이스라엘 중에 경멸거리가 되었으나, 반면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말씀을 신실히 따름으로 하나님을 존중히 여긴 사무엘은 역시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 높이 들림을 받았다.
팔을 끊어. 성경의 수사학적 표현상 ‘팔’은 주로 ‘힘’ 또는 ‘권세’를 의미하는 은유적 표현이다(욥 22:9, 시 10:15, 37:17). 그러므로 본 절은 엘리 집안의 권세를 꺾고 빼앗는다는 뜻이다. 이것은 엘리의 두 아들이 권세를 남용한 대가이다(Matthew Henry).
노인이 하나도 없게. 고대 가부장적 제도 하에서 한 집안의 노인들은 그 집안(가문)을 떠받쳐 주는 힘이요 권세였다(Böttcher). 그러나 가문의 팔이 꺾인 엘리 집안에는 당연히 노인이 없을 것이었다. 결국 이 말은 엘리 가문의 후손들은 조사(早死)하리라는 심판이었다.
날이 이를지라. 히브리 원문(Masoretic Text)에는 ‘보라’란 말과 연결되어, 곧 ‘힌네 야밈 바임’(Behold! the days come, KJV)으로 되어 있다. 즉 이 말은 ‘미래의 일’을 예언하거나 선포할 때 선지자들에 의해 상용되는 관용구이다(왕하 20:17, 사 39:6,, 렘 7:32, 암 4:2, 8:11, 9:13 등).
젊어서 죽으리라. 한 예언 속에 조사(早死)에 관한 저주가 3중 반복되어 있다. 즉 “노인이 하나도 없게”(31절), “영원토록 노인이 없을 것이며”(32절), “출산되는 모든 자가 젊어서 죽으리라”(33절) 등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런한 저주는 실제로 실로(4:11,20-21)와 놉(22:11-19)에서 일어났다(Pulpit Commentary). 뿐만 아니라 유대 전승에 의하면, 후일 제사장 가문 중 18세 이상을 살지 못하는 조사(早死)의 집안이 있었는데, 확인 결과 엘리 가문의 후손들이었다고 전해진다(Matthew Henry).
첫째로, 이 예언이 사무엘에 대한 것이라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1) 비록 그가 제사장 및 제사장 가문의 후손은 아니었지만, 제사장 및 제사의 권위를 회복했고(16:22), (2) 또한 실제로 제사장의 직분을 수행하기도했으며(7:9, 17), (3) 그리고 본 절의 예언이 끝남과 동시에 사무엘이 등장한다는 점(3:1 이하) 등이다(Theodoret, the Radbins).
둘째로, 이 예언이 사독에게 해당되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1) 그는 정통적으로 제사장 가문의 후예이며(31-34절), (2) 합법적인 왕 솔로몬을 왕으로 세우는 데 지대한 공을 세웠고(왕상 1:45), (3) 엘리의 후예인 아비아달 대신 대제사장에 임명됐다는 점(왕상 2:27, 35) 등이다(Augustine, Thenius, Gerlach).
셋째로, 이 예언이 그리스도에게 해당되는 이유는, 무엇보다 그리스도는 예표로서의 희생제사를 완성시키고,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어 완전한 속죄를 이루셨다는 점에서 궁극적으로 이 예언의 성취자임이 분명하다(히 10:1-14).
그를 위하여 견고한 집을 세우리니. 하나님께 성실하지 않았던 엘리의 가정이 파멸에 이른 것과는 달리, 새로 세움을 받을 제사장 가정은 커다란 축복을 받게 될 것을 가리킨다.
그가 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앞에서 영구히 행하리라. 여기서 ‘기름 부음을 받은 자’란 곧 이스라엘의 ‘왕’를 가리킨다(10절). 그러므로 이 말은 왕과 제사장에 의하여 이스라엘이 다스려질 것이라는 예언이다(렘 33:14-26). 즉 지금까지와는 달리 백성들의 소원에 따라 별도로 기름 부음 받은 왕이 세워져야 하는 마당에, 제사장은 그 왕과 함께 하나님의 신정 왕국 이스라엘을 잘 다스릴 필요성이 있었다. 그리고 사실상 사무엘과 사독 그리고 사독의 후손들은 이스라엘의 여러 왕들을 도와 제사장의 직분을 훌륭히 수행하였다.
은 한 조각과 떡 한 덩이를 위하여. 여기서 ‘한 조각’(히, 아고라트)과 ‘한 덩이’(히, 키카르)는 구걸하여 동냥으로 얻은 동전 한 닢, 빵 한 조각을 가리킨다(Keil). 곧 엘리 가문의 후손들이 굶주림을 면하기 위하여 이처럼 비참한 상태에까지 이를 것이란 예언이다. 결국 이러한 징벌은 엘리 집안이 하나님의 좋은 것을 빼앗아 스스로 살찌운 범죄(13-16, 29절)에 대한 정당한 보응의 결과였다(Matthew Henry).
청하노니 … 제사장의 직분 하나를 맡겨 … 먹게 하소서. 이 말을 의역하면, ‘제발 나에게 제사장이 할 만한 일거리를 맡겨 주어 생계를 잇게 하소서’란 뜻이다. 이것은 엘리 집안이 먼저 하나님을 멸시한데 대한 필연적인 결과였다(30절).
한편, 여기서 우리는 대제사장으로서 엘리 집안의 역사에 대하여 간략히 고찰할 필요가 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12지파 중 레위 지파를 부르시고, 그 중에서 또 다시 아론의 집안을 택하사 제사장 가문으로 삼으셨다. 그리고 모든 제사장의 머리로서 대제사장 제도를 두셨는데, 이스라엘의 초대 대제사장은 ‘아론’이었고, 그 다음은 ‘엘르아살’, ‘비느하스’(민 25:7) 순이었다. 그런데 그 이후, 즉 여호수아의 죽음과 사사 시대를 거치면서 대제사장의 계열이 유력한 ‘엘르아셀―비느하스’ 계열로부터 ‘이다말’ 계열로 옮겨져 ‘엘리’가 사사 시대 말기에 대제사장직에 오르게 되었다(대상 24:1-3). 이와 같은 변화가 생기게 된 이유로 우리는 다음 몇 가지를 추론할 수 있다. (1) 엘르아살 계열의 후손이 끊어졌기 때문일 가능성―그러나 후일 엘르아살 계열의 인물이 다시 등장하는 사실(삼하 8:17, 20:25)로 보아 이 추측은 타당성이 없다. (2) 엘르아살 계열의 마지막 대제사장―요세푸스는 이를 ‘오시’(Ozi)로 본다―의 아들들이 당시 너무 어렸거나, 아니면 사사 시대의 혼탁한 상황을 헤쳐나갈 능력이나 자질이 없었을 가능성―이것은 상당히 일리가 있는 추측이다. 아마도 바로 이러한 때 이다말 계열의 제사장이었던 ‘엘리’가 탁월한 지도력과 정치력으로 대제사장직에 올랐고, 아울러 사사로서도 활약을 한 것 같다. 그리고 바로 이때가 엘리 가문의 세력이 절정기에 달한 때인 것 같다. 그러나 엘리는 말년에 이르러 자신은 늙고 아들들은 방탕하게 되자 급속도로 그 세력이 약화되어 결국 예언자로부터 심판을 선고 받게 되고, 엘리와 그의 두 아들은 졸지에 죽음을 맞게 된다.
그리고 엘리 사후 대제사장직은 명목상 엘리의 손자요, 비느하스의 아들인 ‘아히둡’(14:3)이 계속 수행하게 된 것 같으나, 실질적으로는 사무엘이 사울 왕 등장 이전까지 정치 종교의 제문제를 관장했다. 이러한 사무엘 사후, 마침내 이스라엘이 본격적인 왕정 체제로 돌입하게 되었을 때, 곧 사울 왕 당시의 대제사장은 아히둡의 아들 ‘아히멜렉’(21:1, 22:9, 16)이었다. 그러나 그는 다윗의 도피 사건 문제로 사울 왕에 의해 놉 제사장 대학살 사건(22:11-19) 당시 죽임을 당한다. 이때 다행히 목숨을 구한 아히멜렉의 아들 ‘아비아달’이 다윗 즉위 시에 대제사장직에 임명되나(삼하 15:24-36), 이때에는 엘르아살 계열의 ‘사독’(대상 24:1-5)도 대제사장으로 함께 임명된다. 이처럼 다윗 치하에서는 사독과 아비아달이 함께 제사 업무를 관장했으나, 후일 솔로몬 즉위 시에 아비아달이 아도니야의 반역에 가담함으로써 결국 추방당하게 된다(왕상 2:26-27). 따라서 사독만이 대제사장의 위치를 굳히게 된다(왕상 2:35). 그리고 이때 이후로 대제사장직에서 이다말 계열, 곧 엘리 계열은 떨어져 나가게 되고, 엘르아살 계열이 대대로 대제사장직을 이어받게 된다. 그리고 그후 엘리 집안은 점차 몰락하여 예언자의 예언대로(33, 36절) 겨우 제사장직만을 근근히 이어갈 뿐이었다(Keil & Delitzs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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